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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630) : 예천8경 중 용문사(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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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龍門寺 : 千年 歲月 저편의 喊聲을 듣는다) [記事] : 어둠 속을 뚫고 문득 비가 내린다. 불빛들이 빗줄기 사이로 나타났다 사라지고 자정을 넘어 한 시가 가까워진 3번 국도는 한적하다. 상주, 문경을 지나고 예천에 접어들며 우리가 도착해야 할 용문사가 멀지 않음을 직감한다. 잔잔하게 내리던 비마저 멎고,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진다. 잠들지 못한 내 영혼을 향해 떨어지는 나뭇잎들의 가을은 저리도 깊고 용문사 가는 길은 어지러운 듯 아름답다. 새벽 2시 56분 불 켜진 용문사 보광명전에 들어섰다. 박경철 선생과 조용주 선생은 스님과 함께 정성을 모아 촛불을 켜고 우리들은 엎드려 절을 올리며 새벽 예불이 시작되었다. 흔들리는 촛불 사이로 보광명전에 모셔져 있는 세 분 부처님(주존불 비로자나불, 오른쪽 약사여래, 왼쪽 아미타불)은 우리를 그윽한 눈빛으로 내려다보고 먼 기억 속에 선 듯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러나 수 백 리 길 새벽을 헤치며 달려와 너무나 춥고 아무리 몸을 오그려 뜨려도 더욱 추웠다. 콧물이 주르르 흐르고 그 와중에도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잠이 오고. 어쩐다. 이 새벽 예불이 끝나면 우리들은 그 썰렁한 차 속으로 돌아가야 할 터인데. 그러나 우려는 우려로만 끝나고 스님은 선방 하나에 불을 지폈으니 몸을 녹이란다. 문을 열고 들어선 방안은 따뜻하다.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이불 속으로 들어가 눈을 감았고 공양 시간을 알리는 죽비 소리에 깨어나니 아침 7시였다. 부시시 일어나는 일행들에게 나는 영국의 시인 '비어레크'가 그의 시 '눈 위의 산보' 에서 표현했던 "나는 냉담하지 않아. 내 속은 온통 따뜻해" 라는 시 구절을 들려주며 따뜻함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이야기해 주었다. 조선시대의 학자 서거정이 "두 번째 용문사에 이르니 산이 깊어서 세속의 소란함이 끊어졌네. 상방(스님이 있는 곳)에는 중의 평상이 고요하고 옛 벽에는 부처의 등불이 환하다. 한 줄기 샘물소리는 가늘고 일천(一千) 봉우리 달빛이 고요하다. 고요히 깊은 반성에 잠겨지니 다시 이미 나의 가졌던 것까지 잃어버렸다." 라고 노래했지만 그 때의 아늑함은 이미 없다. 허나 아침이라서인지 아직까지 절은 조용하고 먼 산에 나뭇잎은 상기되어 붉다.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용문산 자락에 위치한 용문사는 신라 제48대 경문왕 10년 두운 조사가 개창하였다. 두운 조사는 소백산의 희방사를 창건한 신라 말기의 고승으로 이 절은 고려시대에 더욱 번창하여 대가람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절을 짓는 도중에 나무둥치 사이에서 16냥이나 되는 은병을 캐내어 절의 공사비를 충당하였다고 한다. 또한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을 당시 후백제를 징벌하러 가던 길에 이 절에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길목의 바위 위에 용이 앉아 있다가 왕건을 반겼는데 두운 조사의 옛일을 생각한 왕건이 뒷날 천하를 평정하면 이 곳에 큰 절을 일으키겠다고 맹세를 하였고 그러한 맹세에 힘입었음인지 왕건은 936년에 후삼국을 통일하게 되었으며 이듬해 용문사를 크게 일으켜 주었다. 그 후 매년 150석의 쌀을 하사하도록 하였고, 이 절은 고려 왕조 내내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번영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의종 때인 1165년에는 왕명에 의하여 절을 중수하였고, 1171년에는 절문 밖 왼편 봉우리에 태자의 태(胎)를 보관한 뒤 절 이름을 창기사로 바꾸고 축성수법회를 열었다. 그 뒤 용문사에서는 선문구산의 승려 500여 명을 모아 50인 당성회를 열었고 그 때 단속사의 승려 효순이 전등록 능엄경 등을 강하였다. 1173년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을 때 용문사에서는 승려 3만 명을 모아 대법회를 열었고 1478년(성종 9년) 왕비의 태실을 봉안한 뒤 절 이름을 성불산 용문사로 개창하였다. 1835년 불에 타 모두 소실되었던 건물을 1840년 영파, 상민, 부영 등 여러 스님들이 힘을 모아 중건하였고 1884년에 다시 불이 나 보광명전, 해운루, 음향각, 영남제일강원, 요사, 종무원 등이 불에 타 다시 재건하였다. 조선 중기에 지어진 대장전은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정면 3칸에 측면 2칸인 이 대장전은 보물 제145호로 다포계 맞배지붕이다. 나직한 자연석 기단 위에 막돌 주초를 놓고, 민흘림기둥을 세운 대장전은 기둥 높이에 비하여 지붕이 조금 큰 편이다. 대장전이 처음 설치되었던 때는 고려 명종 3년(1173년)이었다. 그 때 삼만승재를 열고 대장전을 지었으며 그 안에 윤장대 2좌를 설치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있는 맞배지붕 건물로 가장 균형미가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기둥 위의 붕어, 연꽃, 귀면 등의 조각들은 화재를 막는 부적의 역할을 하였다고 하고 대장전 안 목조대좌 위에는 목조를 짓고 부처님의 힘으로 호국을 축원하기 위하여 조성하였다는 것으로 고려 명종 때 자엄 스님께서 처음 조성하였다고 한다. 높이가 4.2m, 둘레가 3.15m인 이 윤장대 안에 경전을 놓아두고 바깥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연자방아를 돌리 듯 돌리면 부처님의 법이 사방에 퍼지고 나라의 지세를 고르게 하여 난리가 없고 비바람이 순조로워서 풍년이 들며 한 바퀴 돌리면 장원 급제와 함께 죽음복을 받는다는 전설이 있다. 윤장대를 돌리면서 예불을 하는 전경신앙(경전의 보관처이자 자체로 신앙의 대상으로서 큰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의 예를 보여주는 귀중한 보물로서 나라 안에 하나밖에 없다. 대추나무를 잇대어 섬세하게 만들어진 목각후불탱화와 화려한 꽃살 장식으로 만들어진 서쪽 윤장대 빗살을 바라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을 모르지만 정신 차리고 일어서야지, 스님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서 스님의 말씀에 빠져든다. "이 지역에는 여러 좋은 절들(부석사, 봉정사, 고운사, 대승사, 봉암사, 김룡사)이 많아서인지 이 절은 신도가 별로 없지요. 문화재 보수비가 나와서 건물을 짓고 있지. 시주로는 절 운영도 힘들지요." 솔직 담백한 주지 스님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나뭇잎이 수북이 쌓인 산길을 내려와 초간정 앞에 차를 세운다.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대동운부군옥>을 지었고 1580년에서 1591년까지 11년 동안 일상생활에서 국정에 이르기까지 주변의 일들을 기록한 <초간일기>(보물 제879호)를 남긴 초간 권문해가 1582년에 지은 별채 정자가 초간정이다. 그의 나이 49세에 벼슬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이 초간정을 지었는데 처음에는 작은 초가집으로 초간정사라고 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불에 탔던 것을 17세기에 다시 세우고 1870년에 연이어 중수하여 권문해의 유고를 보관하는 전각으로 삼았다.
금곡천 변에 소나무와 여러 나무들이 우거진 곳에 자리잡은 초간정에 서서 권문해가 삼십 년을 동고동락하던 아내를 잃고 구십일장 장사를 지내면서 돌아간 아내 앞에 바쳤던 뼈에 사무치는 제문을 회상해 본다. "...이제 그대가 저승에서 추울까 봐, 어머님께서 손수 수의를 지으셨으니 이 옷에는 피눈물이 젖어 있어 천추만세를 입어도 해지지 아니하리다. 오월 서럽고 슬프다. 사람이 죽고 사는 것은 우주에 밤과 낮이 있음 같고 사물이 비롯과 마침이 있음과 다를 바 없는데, 이제 그대는 상여에 실려 저승으로 떠나니 그림자도 없는 저승, 나는 남아 어찌 살리. 상여소리 한 가락에 구곡간장 미어져서 길이 슬퍼할 말마저 잊었다오. 상향." 임을 여읜 슬픔이 이다지도 깊으랴. 흐르는 물 위에 노오란 은행잎이 떨어지고 해 뜨지 않은 아침녘의 쓸쓸함으로 가득하다. 권문해가 지은 죽림리의 예천권씨종택에 도착하자, 그 날이 시제를 모시는 날이라고 종손들이 모여들었고, 예천읍 동본동석불입상과 삼층석탑을 답사한 뒤, 용궁면 향석리 장안사에 도착한 것은 아침 11시가 가까워서였다. 유유히 흘러가는 강물이 느닷없이 회전을 하면서 거의 제자리로 돌아오는 물도리동으로 이름난 곳은 안동의 하회마을과 정여립이 의문사한 진안의 죽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와 못지않게 천하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 의성포 물도리동이다. 향석초등학교에서 내성천을 건너면 비룡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시멘트 포장도로를 1km쯤 올라가면 이 곳 사람들이 남산절이라 부르는 장안사가 있다. 새로 지어진 건물이라서 절에 들어가지 않고 곧바로 비룡산으로 올라 회룡대에 닿는다. 의성포(現 回龍浦)는 회룡 남쪽에 있는 마을로 내성천이 감돌아 섬처럼 되어서 조선조에 귀양지로 되었던 것을 고종 때 의성 사람들이 모여 살아서 의성포라고 하였다고도 하고 옛날 큰 홍수가 났을 때 의성에서 소금 실은 배가 이 곳에 왔으므로 의성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고도 한다. 육지 속에 고립된 섬처럼 그렇게 떠 있는 의성포의 물도리동은 오지이지만 땅이 기름지고 인심이 순후해서 사람이 살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제껏 찌뿌둥했던 하늘에서 햇살이 빛나기 시작했다. 물은 소리도 없이 빛나는 물살을 드러내며 흐르고 의성포 물도리동은 그림처럼 떠 있었다. 아직 시들지 않은 구절초꽃과 쑥부쟁이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빛나는 물살과 흰모래처럼 형형색색으로 물든 나뭇잎들이 후두둑 떨어진다. 돌아감을 잊은 우리들은 그냥 강물만 쳐다보지만 여정은 아직도 여러 곳이 남았다. 내려오며 들른 장안사에서는 보살님이 겨울을 준비하느라 창호지를 바르고 있었다. 단풍잎과 구절초 잎을 넣고 한껏 가을 정취를 풍기며 바르는 문을 보며 나는 기억 속에 아스라한 우리 할머니를 떠올리고 길은 가은읍 아차마을로 이어진다. 견훤의 출생지라고 알려진 아차마을에는 유난히도 은행나무가 많았다.(신정일 황토현문화연구소 所長 月刊 <사람과 山> 2000年 12月號)
용문사(龍門寺) [記事] : 예천군이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으로 추진 중인 용문사 주변정비사업이 2004년 4월 공정 80%를 보이며 5월 완공을 목표로 순조롭게 추진되고 있다. 이 사업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주변 진입로 확장, 포장 및 공원조성사업에 23억 원, 불교유물전시관 건립에 60억 원, 모형 윤장대 및 전시각 20억 원, 기타 부대시설 4억 원 등 총 107억 원의 사업비를 투입하는 대규모 사업이다.(每日新聞 2004.4.13)
용문사(龍門寺 周邊整備事業 마무리 段階) [記事] :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으로 추진되는 예천군 용문사 진입로 확·포장 공사와 공원 조성 공사가 2004년 6월 완공 예정으로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다. 2001년부터 오는 2007년까지 총 사업비 1백7억 원이 투입 시행되는 용문사 주변정비사업은 주차장에서 사찰까지 625m의 진입로 확·포장 공사가 2003년 11월 착공돼 2004년 5월 23일 석탄일 행사 이용객들의 편의를 위해 아스콘 포장공사를 마쳤으며, 600평 규모의 공원 조성 사업도 현재 90%의 마무리 공정에 있다. 한편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시행되는 용문사주변정비사업은 이외에도 설계 용역 중인 250평 규모의 불교유물전시관 건립 사업을 비롯해 모형 윤장대 건립, 부대시설 조성 등 모두 5개 단위 사업으로 예천권씨종택 및 금당실마을정비사업 등 인근 연계된 유교문화권 사업과 더불어 전통 문화를 보존 전승하고 지역민의 소득 향상에도 도움을 주게 될 것으로 기대된다.(醴泉新聞 2004-05-27 16:58:33)
용문사(늦가을맞이 文學會 同人誌 出刊 ꡐ豊盛ꡑ, 公務員文學會) [記事] :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각 문학 단체가 앞 다투어 동인지를 출간하는 가운데 경상북도공무원문학회(회장 황인동)가ꡐ경북 31호ꡑ를 출간했다. 공무원문학회에서 활동하는 시인들의 시와 시조, 수필, 콩트 외에도 예천향토연구가이자 수필가인 조동윤(현 보문면장) 씨가, ꡐ천년 가람 소백산 용문사ꡑ를 소개하면서 창건 유래, 창건자, 대장전, 목불좌상 및 목각탱, 용문사 법종 등에 대해 상세한 설명을 곁들였다.(慶北日報 2004.11.24)
용문사(가볼만한 곳 : 千年古刹 '龍門寺') [記事] : 예천읍에서 북쪽으로 16km, 소백산 준령이 이어진 용문면 내지리의 한적한 곳에 천년 역사의 향훈이 풍기는 지장도량 용문사가 발길을 멈추게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삼국 통합의 큰 뜻을 품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 곳을 지나면서 두운 선사의 명성을 듣고 절을 방문코자 절 동구에 이르자 갑자기 바위 위에 용이 나타나 절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해서「용문산」이라고 이름짓고 절의 이름도「용문사」라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171년 제17대 명종의 태자(王濤, 後에 第22代 康宗) 태를 이 절의 왼쪽에 있는 봉우리에 묻고 창기사라 했고, 조선 성종 9년에는 왕비의 태실을 봉안하고「성불산 용문사」라 부르게 되었다. 또한 1738년 정조 7년에는 순조의 맏아들 문효세자의 태실을 봉안하고 다시「소백산 용문사」라고 고쳐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용문사는 정감록의 전국 십승지 중 경기 양평, 경남 남해의 용문사와 함께 삼대 용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예천 용문사는 셋 중에서도 가장 힘을 쓸 수 있는 허리 즉 중추부로 일컬어지고 있는데 이 절이 번성할 당시에는 승려가 80여 명이나 되었고 그 유명한 서산 대사와 사명 대사도 이 절에 있었다고 전한다. 건물의 기록에 의하면, 용문사의 규모는 도장당 3칸을 비롯해 승방, 불당, 부엌방 등을 합해서 93동이나 되었으며 근세까지만 해도 상당히 많았으나 1984년 대형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어 지금 남은 건물은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가 있는 보물 제145호 대장전을 비롯해 일주문, 회전문, 자운루, 극락암 등 18동의 건물이 남아있다. 회전식 서가인 윤장대 등 4점의 보물과 5점의 문화재가 있다. 설법을 마친 석가모니 부처가 용수보살이 훗날 꺼낼 때까지 용궁에 경전을 보관한 전설적 의미처럼 용문사에 장경을 보관함은 당연하지만 굳이 돌리는 윤장대를 만든 까닭은 무엇일까. 궁금증은 증폭되고 있다. 스님네와 속인들이 윤장대를 돌리며 부처의 이치를 깨달아 인과 사슬을 벗으라는 의미도 있겠고 온 세계에 불법이 고루 퍼져 모든 중생이 해탈을 얻으라는 뜻도 담겼음직하다. 한편 윤장대 설치에 대해 또 다른 시대적 상황에서 그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기록에 의하면, 윤장대 설치는 12C 말로 정중부의 난 이후 민심이 흉흉한 시절이다. 숱한 문신들이 쓰러지고 죽고 죽임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이어지던 시절 불법의 힘으로 국운을 고르게 한다는 뜻에서 윤장대를 세웠을 것이라는 추측이다. 윤장대가 돌 때마다 지축을 울린 경의 소리로 시대를 어지럽힌 요괴를 몰아낸다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용문사중수비에 윤장대 설치 전에 국난이 있었다고 기록된 점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지금은 새로 찍은 경책이 들어 있지만 빗살무늬, 꽃무늬가 새겨진 윤장대 안에는 해인사 대장경보다 이전의 장경이 들어있었을지도 모른다. 수차례 고쳐진 기록이 있으나 간결하면서도 시원한 느낌을 주는 조각 솜씨는 윤장대가 고려 작품임을 알게 한다. 윤장대를 좌우에 둔 목각좌불상과 목각정도 보기 드문 걸작이다. 대추나무 재질의 여기 목각탱은 국내 목각 후불탱으로서는 가장 오래됐다. 조각 하나하나가 제각기 살아 숨쉬는 듯하다. 절 좌우 산수와 초목이 울창해 경내 풍치가 아름답기로 이름나 전국 각지의 불자와 관광객들이 찾고 올라가는 길목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류인「대동운부군옥」20권을 저술해 국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를 남긴 초간 권문해 선생이 심신을 수양하던「초간정」이 있다. 거목으로 둘러싸인 용문사의 새봄은 산새들이 지저귀고 밤이 되면 고요를 뚫는 목탁소리와 골짜기의 물소리로 한결 운치를 더해주고 있어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이 곳을 찾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01-28 오전 9:54:19)
용문사(佛紀2549 부처님 오신날 법요식) [記事] : 불기2549년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해 소백산 용문사(주지 청안 스님-예천군사암연합회장, 신도회장 박우식)는 봉축 법요식을 2005년 5월 14일 오후 6시 30분 자광 큰스님(8교 본사 직지사 전 주지, 문경불교대학), 김수남 군수(예천군불교연합신도회장, 용문사복원불사추진위원장), 신국환 국회의원, 지역 기관단체장 등 6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봉축법회를 개최했다. 용문사는 고려 태조 왕건이 삼한 통합의 큰 뜻을 품고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을 지나면서 두운 선사의 명성을 듣고 절을 방문코자 절 동구에 이르자 갑자기 바위 위에 용이 나타나 절로 가는 길을 가리켰다 해서 '용문산'이라고 이름 짓고 절의 이름도 '용문사'라고 지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건물의 기록에 의하면 용문사의 규모는 도장당 3칸을 비롯해 승방, 불당, 부엌방 등을 합해서 93동이나 되었으며 근세까지만 해도 상당히 많았으나 1984년 대형 화재로 대부분이 소실되어 지금 남은 건물은 보물 제684호인 윤장대가 있는 보물 145호 대장전을 비롯해 일주문, 회전문, 자운루, 극락암 등 18동의 건물이 남아있으며 회전식 서가인 윤장대 등 4점의 보물과 5점의 문화재가 있다. 청안 스님은 법요식에서,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희망을 주고자 오신 것"이라고 밝히고, "연등 공양은 일체중생의 아픔이 자신의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씻어주신 부처님의 큰 뜻을 오색등에 달아 높이 받들겠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했다. 자광 큰스님은 법문을 통해, "부처님은 일대사인연으로 이 세상에 오시어 불지견(佛知見)을 열어 보시고 중생들로 하여금 깨달아 들어오게 하시었으니 모두 부처님을 믿고 가르침을 이해하고 가르침대로 수행해 그 공덕의 진실된 맛과 멋을 통해 행복하게 살아보자"고 했다. 김수남 예천불교연합신도회장은, "부처님의 큰 뜻을 받들어 모든 중생이 환란과 고통에서 벗어나 평화와 안녕을 찾길 바란다."고 밝혔다. 이날 법요식에 참석한 지역 기관단체장들은 법당에 헌화하면서 지역의 평안과 안녕을 기원했으며 용문사 1,500여 명의 신도들은 연등을 매달고 부처님오신날을 기념했다.(윤현숙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05-14 오후 10:10:24)
용문사 [記事] : 한국문집총간(148_241b) 염헌집(恬軒集, 1760)에 실린 임상원(任相元)의 기사로, 그 내용은, “恬軒集卷之九/ 詩 西河任相元公輔著/ 發醴泉。午憩龍門寺。/ 遙看林表絢丹靑。洞口龍遊舊有靈。絶壁亂泉春活活。獨園喬木晝冥冥。尊前喜進伊蒲饌。函裏閑披貝葉經。法界一來眞宿債。高僧休?逐浮萍。”이다.(www.minchu.or.kr 2006)
용문사(佛紀 2551年 奉祝 法要式 小白山 龍門寺 嶺南第一講院과 普門寺에서 奉行) [記事] : 불기 2551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부처님의 은덕을 기리고 자비가 온 누리에 펼쳐지기를 바라는 봉축법요식 행사가 2007년 5월 23일 오후 6시 소백산 용문사 영남제일강원에서 봉행됐다. 이날 법요식에는 김수남 군수, 남시우 군의장, 홍성칠 상주지원장, 한영수 경찰서장, 이상열 농협군지부장, 이재창 군의원, 각 기관단체장 및 불자 등 300여 명이 참가했다. 2007년 창단된 용문사 보현합창단의 은은한 찬불가(찬양합니다)가 소백산 자락에 울려 퍼지는 가운데 삼귀의례, 헌화, 반양심경 봉독, 내빈소개, 개식사 순으로 진행됐다. 김수남 군수(예천불교연합신도회장)는 봉축사에서 "오늘은 병들고 고통 받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부처님을 기념하는 날로 모든 불자들은 참된 마음으로 수행 기도하고 쉼 없는 노력으로 이웃간 정이 넘치고 잘 사는 예천을 만드는 데 모두 동참해 줄 것"을 당부했다. 김 군수는 또, "모든 불자들과 군민들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아름다운 마음을 갖고 서로 화합하고 사랑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홍성칠 대구지검 상주지원장은 축사를 통해 "사부대중을 모시고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봉축행사를 갖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중생의 마음이 부처님이고 부처님 마음이 중생의 마음이라는 참된 뜻을 되새기는 날이 오늘"이라고 말했다. 홍 지원장은 "참석 불자 모두의 마음속에 항상 지혜와 자비로 이웃을 사랑하는 참된 마음을 키워 가정과 온 누리에 부처님의 자비가 가득하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살아가는 예천을 만들어 줄 것"을 당부했다. 참석 불자들은 "부처님의 삶은 유화했지만 그 향기는 오늘도 불자 여러분들께 끈끈히 전해지고 있다"는 용문사 주지 스님의 봉축사에 두 손을 합장하고 부처님 오신 날을 축하했다. 한편, 용문사 청안 주지 스님은 "예천양수발전소 상류댐에서 수백 본의 진달래를 용문사 앞·뒤에 심어 온통 꽃동산으로 만들어 준 김수남 군수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고 2년 뒤 용문사에서 예천진달래 축제를 개최할 것"이라고 소개 많은 박수를 받았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7-05-24 오전 9:29:12)
용문사(龍門寺), 절 [寺刹] :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안골 서북쪽 용문산(龍門山)에 있는 사찰로, 870년(경문왕 10)에 두운 선사(杜雲禪師)가 창건하여 창기사(昌期寺)라 하였는데, 고려 태조 왕건(王建)이 남정(南征) 길에 이 곳에 묵으면서 용문사(龍門寺)로 개칭하였다. 936년(태조 19)과 1165년(의종 19)에 각각 칙명(勅命)으로 중수하고, 1171년(명종 1)에 태자의 태(胎)를 절문 바깥 좌비봉두(左臂峯頭)에 묻고 용문산 창기사(龍門山昌期寺)로 고치고, 1179년(명종 9)에 중건을 시작하여 15년 만에 준공하였고, 1478년(성종 9)에 소헌왕후(昭憲王后, 張炳昌 註 : 연산군의 모 제헌왕후의 誤記)의 태를 봉안(奉安)하고 성불산 용문사(成佛山龍門寺)로 고치고, 1783년(정조 7)에 문효세자(文孝世子)의 태를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小白山龍門寺)로 고쳤고, 1835년(헌종 1) 8월에 소실되어, 승 역파(僧轢坡)가 상민(尙敏), 부열(富悅) 등과 함께 중건하고 1984년 5월에 또다시 소실되므로 또 중건하였다. 1911년부터 김용사 본산(金龍寺本山)의 말사(末寺)였으나, 1962년부터 직지사교구(直指寺敎區)의 말사(末寺, 區分 乙)이다. 1979년에 건물을 보수하였다.(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용문사 [遺蹟探訪] : 용문사를 다녀와서/ 등록일 2005년 02월 14일/ 자료번호 #240951/ 조회수 97건/ 전체 페이지수 3페이지/ 목차/ Ⅰ. 머리말/ 백지 상태의 마음으로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절이라는 것 외엔 다른 특별한 사전 지식 하나 없이, 그렇게 경북 예천의 용문사를 향한 나의 여행은 시작되었다. 아무리 작고 초라한 유적지라 할지라도, 자신만이 간직할 벅찬 감동들을 좀더 강하게 간직하고자, 설레임과 기대감이 아닌 백지 상태의 마음으로 나는 여행길에 올랐다. 사실, 어떤 중요한 목적을 간직한 여행이기보단, 이 가을에 어울리는 혼자만의 소박한 여행을 하고 싶었기에, 지도책을 보고 편하게 선택한 곳이 바로 이 곳 용문사였다. 잘 모른다는 것, 생소하다는 것, 이 것이 오히려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몇 배의 감동을 줄 수도 있다는 것을 후에 나 자신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다. 그럼 그 감동의 세계를 향해 함께 출발해 보도록 하자./ Ⅱ. 본론/ 1. 용문사를 가는 길 : 자동차를 타고 경북 예천의 나들목이란 곳에서 내린 후, 시내버스를 타고 북쪽 방향으로 30분 정도 가다보면, 정감록 십승지 가운데 하나인 용문면 금당실에 도착하게 된다.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것은, 용문사를 가기까지의 그 주변 배경을 감상하는데 훨씬 더 용이하기 때문이며, 시골 마을 주민들의 대화와 표정까지도 직접 듣고 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강줄기를 타고 2차선 도로 양옆엔, 수 킬로에 이르기까지 벚꽃 나무가 즐비하게 서 있었고, 수확기로 접어든 황금색의 머리 숙인 벼들과 예쁘게 익은 곶감들이, 시골 마을의 풍성함과 평화로움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달리는 버스 창가로, 가을 햇살을 받으며 날고 있는 빨간 고추잠자리를 보며 동심에 잠기기도 잠깐, 그렇게 소백산 자락을 지나 용문산에 도착하면 신라 경문왕 10년(870년) 이 고장 출신인 두운 대사가 창건한 천년고찰 용문사가 나타난다./ 2. 용문사의 유래와 그 주변 경치 : 먼저, 주차장에 이르면 멀리 매봉이 늠름하게 다가온다. 해발 865미터의 매봉은, 소백산 줄기가 죽령으로 내려와 두솔봉을 거쳐 저수령에서 월악산으로 가다가, 한 줄기가 남으로 내려와 맺힌 소백의 지봉이다. 용문사는 바로 그 매봉의 남쪽 줄기에 앉아있다.../ (3)용문사의 문화재/ 3. 맺음말 : 영원히 가슴속에 자리 잡을 용문사(//www.reportworld.co.kr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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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