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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634:예천8경 중 용문사(6)(附예천방문1,117)
작성자장병창 @ 2014.05.08 06:07:52

  예천의 자랑(3634) : 예천8경 중 용문사(6)(附 예천방문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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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사(夢草仁弘) [記事] : 일제강점기 통도사의 대강백으로 명성을 떨쳤던 몽초인홍(夢草仁弘, 1870~1947) 스님은 후학들을 제도하며 외길을 걸었던 수행자이다. 속성을 붙여 ꡐ허몽초ꡑ로 널리 알려진 스님의 행장은 그 명성에 비해 전해져 오는 내용은 극히 일부이다... 몽초 스님의 본래 법명은 인홍(仁弘)이다. 은사가 누군지 정확하지 않지만, 주로 주석했던 통도사 자장암과 인연 있는 스님일 것으로 추정된다. 인홍이란 법명은 출가 당시 은사에게 받은 것이며, 몽초(夢草)는 스스로 지은 당호이다. 당호에는 사연이 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불가(佛家)에서는 신년초가 되면 스님들이 영험 있는 도량을 찾아 정진하는 경우가 많았다...  몽초 스님은 1890년 예천 용문사 강원에서 구하(九河) 스님과 함께 공부를 했다. 당시 용문사는 ꡐ영남 제일 강원ꡑ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곳이다. 한때는 용문사에 500명의 스님이 모여 50일간 담선회(談禪會)를 열었을 정도로 큰 도량이었다. 하지만 조선후기 용문사의 살림은 다른 절과 마찬가지로 곤궁했다.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큰 불공이나 재가 있는 날 나오는 별식(別食)을 손꼽아 기다리며 주린 배를 움켜쥐는 일이 자주 있었다. 평소에는 구경하기 힘든 특별 공양은 ꡐ된장ꡑ이었다. 얼마나 맛있었는지, 당시 학인들은 ꡒ나중에 주지 등 소임을 맡으면 된장을 실컷 먹을 것ꡓ이라며 웃음을 지었다고 한다...(이성수 記者 佛敎新聞 2493號/ 1월17일자/ 2009-01-14 오전 9:46:11 送稿) 

 

  용문사(寶物은 우리 손으로 지킨다. 聞慶消防署 龍門寺 大藏殿 合同消防訓練 實施) [記事] : 숭례문 화재 발생 1주년을 맞아 보물 제145호로 지정된 용문사 대장전에 대하여 2009년 2월 16일 오후 2시 문경소방서(서장 박용우) 예천119안전센터․구조대 및 예천군 관계기관과 용문 의용소방대원, 용문사 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합동소방훈련을 실시했다. 이번 훈련은 문경소방서 소방력(소방차량5, 인원11명)과 예천군 산불진화대 등의 장비와 예천군 관계자 50여 명이 동원되어 방화 및 산불 등으로부터 지역에 산재되어 있는 귀중하고 소중한 문화자산 보호 목적과 내용(문화재 반출훈련, 자위대에 의한 초기대응, 소방력에 의한 화재진압훈련, 산불화재로의 연소 확대 방지)으로 합동소방훈련을 실시했다. 내실있는 합동소방훈련을 통하여 박용우 소방서장은 "목조건물 화재는 초기 대응이 가장 중요하며 특히 문화재의 경우에는 후손에게 물려줄 유산이므로 인재와 그 어떠한 재난으로 인한 소실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김상국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02-16 오후 7:41:08)

 

  용문사 [記事] : 수레바퀴클링클럽 카페/천사백스물다섯번째 여행편지 - 예천 용문사/ 글쓴이: 은봉/ 2009.03.26 06:45/ 경북 예천을 대표하는 최고의 사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찰도 그렇지만 사찰까지 들어가는 진입로가 무척 아늑하고 마음까지 편안하게 만드는 그런 곳이죠.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년)에 두운대사가 창건하였는데 역사도 오래되었지만 많은 국보급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두운대사가 용문산에 이르렀을 때 큰 바위에서 용이 그를 영접하였다 해서 용문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하네요. 특히 용문사 대장전은 팔만대장경의 일부를 간직하기 위해 고려 명종 7년(1177년)에 지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봉정사 극락전, 부석사 무량수전 그리고 이곳 용문사 대장전이 비슷한 연대에 세워졌다고 하죠.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윤장대를 간직한 사찰도 바로 이곳 용문사입니다. 윤장대는 불경을 보관한 일종의 목공예품인데요,  회전식으로 되어있어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불경을 한번 읽은 만큼 불심을 닦을 수 있다고 하죠? 원래 윤장대는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과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이들을 위해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 제 눈에 어찌 보였겠어요? 한바퀴만 돌리면 불경을 한번 읽은 공덕을 쌓는다 싶어 돌려보려 했는데 ꡐ손대지 마시오ꡑ라고 써있어 쉽게 공(功)을 한번 쌓으려다 그저 아쉬움만 안고 돌아왔던 기억이 나네요.(daum 2009)

 

  용문사(醴泉 龍門寺, '마음으로 돌리는 佛經' 티베트 것만 알았더니 韓國에도 있었네) [記事] : 추수가 끝난 들녘은 황량하다. 나락이 사라진 빈 들판엔 찬 바람만 불어 댄다. 단풍도 이제 거의 다 졌다. 들과 산은 이제 잿빛으로만 치닫는다. 맨 몸을 드러낸 가냘픈 가지들이 처량해 보이기 시작한다. 경북 문경시 산북면의 경천호를 스쳐 용문사 쪽으로 넘어가는 길이다. 호수의 물이 잔뜩 말랐다. 2, 3m 깊이의 호수가 '맨흙의 속살'을 드러내고 있다. 그 위로 가을비가 흩뿌렸다. 차창 밖을 스치는 건 무상함이 느껴지는 무채색의 풍경이다. 세월이란, 시간이란. 괜한 상념이 쏟아진다. 경천호를 지나 고개를 넘으면 예천군 용문면이다. 산 깊고 외진 이곳은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 중 하나로 불려지던 곳이다. 고개마루 주변에 여러 저수지들이 들어앉았다. 비만 오지 않았으면 이른 아침 새하얀 물안개를 토해 냈을 예쁘장한 저수지들이다. 용문사 입구에 거의 다다를 때였다. 주변의 색이 갑자기 달라졌다. 잿빛은 사라졌고 짙붉은 황토색이 사방을 감쌌다. 주위를 가득 덮고 있는 낙엽 때문이다. 낙엽의 바다 위에 기품 있어 보이는 일주문이 오롯이 솟았다. 산속에 어찌 이런 넓은 자리가 있었을까? 갑자기 하늘이 열리는 듯 나타난 넓은 터에 가람이 웅장하게 자리하고 있다. 고운사의 말사인 용문사는 신라 870년 두운이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낙엽 쌓인 긴 돌계단을 오르면 여느 절의 천왕문에 해당하는 회전문이다. 해운루를 통과해 만난 절 마당은 무슨 공사를 하는지 어수선했다. 정면으로 1984년 화재로 불탔다가 복원된 보광명전이 서 있다. 그 옆에는 용문사의 보물 중의 보물인 대장전이 있다. 용케도 사찰을 휘감았던 화마를 피한, 용문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고려 명종 3년(1173)에 세워진 건물이다. 대장전이 불을 피할 수 있었던 건 외벽에 치장된 귀면(鬼面)과 물고기 조각, 용 조각 등이 불 막이를 제대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장전을 찾는 이들이 빼놓지 않고 쳐다보는 것도 왼쪽 문 위에 있는 조각이다. 도깨비가 물고기를 물고 있는 모양이다. 대장전 안을 둘러보다 티베트의 마니차를 닮은 듯한 윤장대(보물 684호)를 봤다. 경전을 놓은 책장 가운데 축을 달아 회전토록 한 것이다. 티베트 사람들은 내부에 불교 경전을 넣거나 겉면에 불경을 새긴 마니차를 돌린다. 마니차를 돌릴 때마다 경문을 한 번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았다고 여긴다. 글을 읽지 못하는 민중들을 위한 배려였을 것이다. 이 마니차와 같은 기능을 하는 물건이 한국에도 있었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았다. 최근 들어 마니차를 들여 놓는 사찰들이 많다. 그런 것을 보며 불전을 조금이라도 더 받아 내겠다고 외국의 문물까지 수입하는 건 아닐까 생각해 왔던 터였다. 그런데 그 윤장대가 버젓이 한국에도 있었던 것이다. 사찰의 설명문에는 금강산 장안사에 3층 윤장대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회암사터와 혜음원터에 윤장대 축의 받침돌 유구가 있지만 현존하는 것은 용문사 윤장대가 유일하다고 적혀 있다.

 

  왼쪽 윤장대의 8면에는 각기 다른 꽃살문이 새겨져 있다. 꽃살문의 아름다움만 놓고 보면 전국의 모든 사찰과 견줘도 손색이 없다. 윤장대는 보존을 위해 쇠줄에 묶여 있어 돌려 볼 순 없다. 대신 몸으로 윤장대를 돌았다. 아름다운 꽃살문 하나하나를 감상하며 마음 속 윤장대를 돌려봤다. 대장전의 정면에 있는 삼존불 뒤에는 금칠을 한 목각탱(보물 989호)이 있다. 조선 숙종 때 대추나무로 새긴 이 목각탱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다. 가로 세로 2m가 넘는 크기의 이 조각은 화려한 금빛 도금이 돼 있다. 대장전 내부를 환하게 밝히기 위한 것이다. 조용하던 사찰이 북적거렸다. 부산의 어느 사찰에서 온 신도들이 대장전으로 몰려들었다. 어떻게 들어섰는지 좁은 대장전 안에 모두 자리를 잡고는 불공을 드리기 시작했다. 대장전 처마에선 가을비가 투둑투둑 떨어졌다. 대장전 계단 아래에는 자운루라는 2층 누각이 있다.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회의를 하고, 짚신을 만들어 조달했던 호국의 장소이다. 사찰 마당 왼쪽에는 사찰의 유물들을 모은 박물관이 있다. 윤장대를 모사해 놓은 것이 있어 직접 돌려 볼 수 있다. 박물관에선 아름다운 빛깔의 탱화와 조선시대 유명 선사들의 초상화도 볼 수 있다.

 

  ■ 예천군 용문면, 그림같은 초간정·황진이의 병암정… 타임머신 탄 듯 : 용문사에서 내려와 용문면사무소가 있는 금당실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지방도 928호선을 만난 지 얼마 안돼 오른쪽으로 아름다운 정자가 눈에 띄었다. 초간정이다. 금곡천이란 넓지 않은 개울이 큰 바위를 만나 크게 휘돌아 가는 모퉁이 절벽 위에 들어선 정자다. 정갈한 그 모양이 한 폭의 멋진 그림을 보는 듯했다. 주변 나무들이 옷을 벗어서인지 정자는 더욱 또렷이 자태를 드러냈다. 솔향 그윽한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드리워 정자의 운치를 더욱 빛내 줬다. 이 정자는 조선 중기 한국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을 지은 초간 권문해가 심신을 수양하기 지었다고 한다. <대동운부군옥>은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 역사 인문 지리 등을 총망라한 책으로 초간이 중국의 백과사전인 <운부군옥>을 읽고 힌트를 얻어 편찬한 한국형 백과사전이다. 그림 같은 초간정을 자세히 보고 싶어 정자를 품은 집의 대문을 두드렸는데 아쉽게도 반응이 없었다. 저 집의 주인과 어떻게든 연을 만들어 하룻밤 꼭 묵어 봤으면 좋으련만…. 처마에서 떨어지는 찰진 빗소리만 듣다가 자리를 떴다. 초간정에서 금당실마을 가는 길 중간쯤 '예천 감로루'라는 이정표가 서 있다. 감로루가 뭘까 궁금해 차를 돌렸다. 농로를 타고 한참을 올라가 만난 건 특이하게 생긴 고택이다. 세월의 까만 때가 묻은 건물은 함양 박씨 예천 입향조의 묘를 지키기 위해 세운 재실이었다. 재실 한쪽에 누각을 세워 멋을 낸 것이 참 특이했다. 누각의 아래는 마구간으로 썼다고 한다. 비안개에 젖은 감로루의 풍경이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금당실마을은 1960,70년대 우리 옛 농촌으로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 듯한 분위기다. 입구의 울창한 소나무 숲을 지나 마을로 들어갔다. 옛 모습의 고택들과 구불구불 얽혀 있는 돌담길이 정겹다. 허리춤 높이의 돌담길은 곡선을 그리며 미로처럼 이어져 있다. 활짝 열린 대문과 낮은 담장으로 서로에게 툭 터놓고 사는, 그런 마을이다. 옛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금당실마을은 영화의 배경으로도 많이 등장했다. '나의 결혼 원정기' '영어 완전 정복' 등이 이곳에서 촬영됐다. 금당실마을에서 1km 떨어진 곳에 드라마 '황진이'의 무대가 됐던 병암정이 있다. 병풍 같은 큰 바위에 정자가 올라서선 굽은 노송 두어 그루와 어울려 너른 들판을 내려다보고 있다. 바로 앞에는 연못이 있고 가운데 앙증맞은 인공섬도 있다.

 

  ■ 여행수첩 : 호산춘이 있는 문경시 산북면까지는 중부내륙고속도로를 이용하는 게 좋다. 점촌ㆍ함창IC에서 나와 예천 방향으로 국도 34호선을 타고 가다 산양에서 좌회전한 뒤 산북, 동로 쪽으로 향한다. 산북면사무소 소재지를 지나 조금만 가면 길가에 호산춘 간판이 보인다. 산북에서 경천호를 끼고 달리면 용문사 금당실마을이 있는 예천군 용문면으로 향한다. 용문에서 수도권으로 귀가할 때는 예천IC에서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오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금당실마을 장거리에는 음식점들이 여럿 있다. 이중 안동식당은 두부가 주 메뉴다. 칼칼하게 끓여 내는 두부찌개가 5,000원이고 손두부는 4,000원, 칼국수는 4,000원이다. 주인이 직접 만든 두부 맛이 일품이다.(이성원 記者 韓國日報 2009-11-20)

 

  용문사([旅行]小白山 龍門寺 : 이 世上에 좋고 나쁜 것은 없다) [記事] : 소백산 기슭 한적한 곳에 자리잡고 있는 전국 3대 지장도량인 용문사 가는 '깨달음의 길'로 역사여행을 떠난다. (한국지역인터넷언론협회 김윤탁 회장 용문사 탐방기). 이제 제법 추워진 날씨에 초겨울의 예천군 용문면 소백산 용문사 가는 긴 길의 풍경은 오래된 역사 기운을 머금은 나무와 바위들이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 ‘깨달음의 길’ 끝에 처음 만나는 일주문은 小白山龍門寺(소백산용문사)라는 글씨와 함께 눈앞에는 장엄한 사찰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일주문을 지나자 경사가 완만한 좌측 언덕 위에는 최근 세워진 김수남 예천군수의 업적을 기리는 공덕비(郡守 海觀 金秀男 居士 功德碑)가 세워져 있다. 공적비에는 ‘창공이 내려 앉아 청산 곁에 기대서고, 청산은 길을 비켜 하늘을 담아내다, 흩날리는 눈보라를 빈손으로 껴안더니, 오늘은 복사꽃비 하늘 덮어 청산이라’고 아주 멋진 글이 쓰여 있다.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년)에 두운대사가 용문산에 이르렀을 때 큰 바위에서 용이 그를 영접했다고 해서 지금의 이름으로 창건했다고 전해지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고려 태조가 신라를 정벌하러 남쪽으로 내려올 때 운무가 자욱하여 지척을 분간치 못할 때 어디선가 청룡 두 마리가 나타나 길을 인도했다고 해서 용문사라고 한다고 하는데 어느 것이든 아주 그럴듯한 창건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용문사는 고창 도솔암, 연천 심원사와 함께 전국 3대 지장도량의 하나로 불릴 정도로 유명하다. 그 3대 지장도량의 첫 관문이 회전문(廻轉門)이다. 회전(廻轉)은 ‘윤회전생(輪廻轉生)’의 줄임말로 일반사찰의 사천왕문(四天王門)에 해당된다. 회전문 안에는 국내 최대크기의 사천왕상이 무섭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눈길을 사천왕상 밑으로 돌리자 그 사천왕이 죄를 많이 지은 탐관오리를 오래도록 짓밟고 있어 착하게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난다. 이곳을 지나 불국토로 들어가는 해운루(海雲樓)가 보이고 현판에는 소백산용문사란 편액이 쓰여 있다. 용문사는 회전문에서 용문사의 주전(主殿)인 보광명전(普光明殿)까지 위로해서 터널처럼 일직선으로 되어 있어 아마 이곳에 들어오면 모두가 깨달음을 얻을 듯싶다. 그 깨달음의 터널을 지나면 보광명전(普光明殿)이 또 언덕위에 우뚝 자리 잡고 있다. 보광명전에서 바라본 예천자락은 끝없는 산 능선이 겹쳐 한 폭의 그림으로 아름답게 눈에 서린다. 그리고 그 좌측 앞에는 자운루(慈雲樓)가 있는데 임진왜란 때 승병(僧兵)들의 회담장으로 지금으로 생각하면 지휘부에 해당하는 호국(護國)의 얼이 서린 곳이다. 용문사의 또 다른 자랑거리는 대장전(보물 제145호)이다. 대장전은 고려시대 명종 3년(1173)에 건축된 맞배지붕 건축물로 팔만대장경 경판의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서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대장전은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로 또 하나의 보물이 있다. 그것은 삼존불과 목각탱불(보물 제989호)로 아주 특이하게도 대추나무로 만든 것이다.

 

  그리고 또 대장전 윤장대(보물 제684호)는 불교예술의 진수를 아직도 보라는 듯 용문사 대장전 안에는 두 개의 윤장대가 있다. 이 윤장대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라고 한다. 윤장대는 불경을 보관한 일종의 목 공예품으로 회전식으로 되어있어 윤장대를 한번 돌리면 불경을 한번 읽은 만큼 불심을 닦을 수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원래 윤장대는 글을 읽지 못하는 이들과 불경을 읽을 시간이 없는 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현대인은 혜택을 보지 못한다. 왜? ‘손대지 마시오.’라고 쓰여 있어서 이 글을 읽고는 돌릴 수가 없는 것이다. 그 외에도 용문사에는 명부전, 응진전, 진영당, 원통전과 산신각, 용문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극락보전(極樂寶殿) 천불상(千佛象)이 있어 직접 가보지 않고서는 일일이 소개하기 어렵다. 그리고 최근 2006년에 지어진 성보박물관은 모형 윤장대, 탱화, 영정, 불상, 존자, 불교 제례도구 등 230여점의 유물이 전시되어있어 산사(山寺)의 역사를 잘 말해주고 있다. <깨달음의 길> 이 세상에 좋고 나쁜 것은 없다. 다만 서로 다른 것이 있을 뿐이다.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다만 판단이 다를 뿐이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은 없다. 다만 서로 다른 사람일 뿐이다. 부디 나하고 같지 않다고 분별하지 말라. 분별하는 마음은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된다. 그리하여 불가(佛家)에서는 망심(妄心) 즉, 분별심(分別心)을 경계하라고 가르친다. 어떤 것들을 분별(分別)하여 열고 닫는 것은 오직 자신만의 일이다. 예천 용문사 찾아가는 길 : 중부내륙고속도로 ▶ 북상주IC ▶ 안동방면 ▶ 예천읍 ▶ 동로방면(928번지방도) ▶ 용문면 ▶ 원류삼거리 ▶용문사로 김천에서 소요시간은 1시간 30분 정도 걸린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9-12-06 오전 11:10:59)

 

  용문사(모여! 윷이여! 龍門寺 佛者 2千餘名 윷놀이 소리에 小白山 자락이 떠들썩!) [記事] : 지역불교인들의 화합을 위해 예천불교사암연합회(회장 청안 스님)와 예천불교연합신도회(회장 김수남)가 주최한 "제10회 지역불교인 윷놀이 한마당 잔치"가 2010년 3월 6일 오전 10시~오후 3시까지 천년고찰 소백산 용문사에게 성대히 개최됐다. 이날 불교인 윷놀이 행사에는 김수남 군수를 비롯한 관내 기관단체장, 용문사 주지 청안 스님을 비롯한 각 사찰 주지스님, 불자 등 2천여 명이 참석해 이날 하루 용문사는 모여! 윷이여! 참가자들의 윷놀이 소리가 소백산 자락을 들썩이게 했다. 용문사 청안 스님은 인사말에서 "윷놀이 대회를 통해 불자들의 흩어진 마음을 한 곳으로 모으고 오늘 하루 참석자들은 모든 시름과 근심을 잊고 즐거운 마음으로 함께 하는 한마당 잔치가 되길 기원한다."고 말했다. 김수남 군수는 "부처님은 우리에게 사랑, 보은으로 서로를 위하라는 가르침을 주셨으니 오늘 우리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참석자 모두가 윷놀이를 통해 서로 화합하고 주위의 어려운 이웃을 생각해 지역사회 발전에도 불자 모두가 앞장서 줄 것"을  당부했다. 이날 윷놀이 행사를 위해 관내 불자들이 기증한 300여점의 경품은 윷놀이가 끝난 뒤 김수남 군수 및 청안 스님, 참석 기관장과 각 사찰주지들의 추첨에 의해 불자들에게 전달됐다. 용문사 측은 지난 12년 동안 인심좋고 잘사는 예천군 건설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김수남 군수에게 감사와 축하의 꽃다발을 전달, 참석자 모두 뜨거운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오는 6월 30일 임기를 마치는 김 군수의 건강을 기원했다. 한편, 보슬비가 내리는 가운데도 소백산 용문사에는 오전 9시부터 많은 불자들이 방문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3-06 오후 3:28:44)

 

  용문사(道內 템플스테이 體驗 '人氣 짱∼' : 昨年 10個 寺刹 參加者 38% 增加…觀光商品 育成) [記事] : 경북도가 경북 빅4 관광상품으로 선정, 역점적으로 추진 중인 템플스테이 관광상품이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체험관광객이 급증하고 있다. 이에 따라 도는 템플스테이 명품화작업에 나서기로 했다. 2010년 3월 18일 도에 따르면 지난해 경주 골굴사 등 10개 사찰에서 운영한 템플스테이 관광상품 체험관광객은 모두 2만3천850명으로, 전년도(1만7천317명)보다 38% 증가했다. 지난해 체험관광객 중 외국인이 2천406명이나 됐다... 템플스테이가 꾸준히 인기를 얻어감에 따라, 경북도는 템플스테이를 경북을 대표할 수 있는 명품관광상품으로 정착시키기로 했다. 이를 위해 먼저 올해 경산 선본사, 고령 반룡사, 예천 용문사 3개 사찰을 템플스테이 운영사찰로 추가 지정했다. 또 1억8천만 원의 템플스테이 프로그램 운영비를 지원해 운영프로그램의 특화 및 차별화에 나서는 한편, 도 및 시·군에서 발간하는 홍보물 등을 통해 템플스테이 운영사찰에 대한 홍보를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한편 경북도는 18일 영천 은해사에서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불교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 운영사찰 주지 등이 참석한 가운데 경북 템플스테이 사업 활성화를 위한 관계자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간담회에서는 템플스테이 활성화를 위해 △템플스테이 홍보활동 지원 △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통역안내원 지원 △지역주민 소득연계 방안 강구 △운영 프로그램의 특화 및 차별화 △프로그램과 지역 전통 문화관광자원의 연계 △기업체 연수프로그램과의 접목 등 다양한 의견이 제시됐다.(嶺南日報 2010-03-19)

 

  용문사(醴泉 龍門寺 住持 청안 스님) [記事] : 용문사는 윤장대로 유명하다. 스님은 예순이 넘어 불사 원력을 세워 오늘도 매진하고 있다. 휴대전화가 대중화되던 때 전국을 강타한 광고 한 편이 있었다. 당대 최고 배우 한석규가 스님과 함께 대숲을 거닐던 한 이동통신사 광고였다. 많은 사람들이 대숲 바람이 일던 풍경과 함께 자애로우면서도 탈속(脫俗)한 듯 잘 생긴 스님의 모습에 열광했다. 스님은 ‘이것도 포교려니’ 하고 촬영에 임했는데 뜻밖에 유명세를 타게 돼 산속으로 들어갔다. 경북 예천 용문사 청안 스님 이야기다. [“옳고 해야 할 일이면 원력 세워 성취해야” 농촌인구 줄어 신도 급감…사찰도 폐사위기, 지역 활성화가 곧 포교, 복지사업 매진해야] : 2010년 4월 29일 소백산은 머리에 흰 눈을 가득안고 있었지만 가로수는 이미 연두색으로 옷을 갈아입었다. 바람에 흩날려 떨어지던 벚꽃이 용문사 초입에 들어서자 아직 한창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용문산을 이르기를, “신라 때에, 고승 두운이 이 산에 들어가 초막을 짓고 살았는데, 고려 태조가 일찍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여기를 지나다가 두운의 이름을 듣고 찾아갔다. 동구에 이르러 홀연히 용이 바위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용문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두운이 살았던 때는 신라 하대로 궁예, 견훤이 삼국을 나눠 쟁패를 다투던 때이다. 궁예의 휘하에 있던 왕건은 후백제를 정벌하던 중에 이 절에 들렀는데 길목의 바위 위에 용이 앉아 있다가 왕건을 반겼다고 한다. 이 지역이 왕건 편을 들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설화다. 경북 북부는 견훤이 태어난 곳이지만 왕건에게 우호적이었다. 935년 왕건은 삼국을 통일하고 이듬해 곧바로 용문사를 크게 일으켰다. 그 때부터 용문사는 고려 내내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번창했다. 김보당이 난을 일으켰을 때 용문사는 스님 3만여 명이 모여 대법회를 열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했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용문사는 왕실의 대접을 받았다. 세조는 잡역을 면해주라는 명을 내렸는데 그 교지가 현재 보물 제729호로 지정돼 여전히 용문사에서 전해온다. 성종 9년에는 소헌왕비(張炳昌 註: 연산군 어머니인 제헌왕비의 誤記)의 태를 이곳에 안장했으며, 정조도 문효세자의 태를 안장했다. 그만큼 왕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는 대강백이 주석하던 영남제일 강원이었다. 그러다 조선 말기에 불타 전각을 다시 세웠으며 한국전쟁의 참화도 이겨낸 절은 1984년 안타깝게도 화마로 보광명전, 해운루, 응향각, 영남제일강원, 요사, 종무원 등을 잃었다. CF 한편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청안 스님은 번잡을 피해 예천 용문사로 들어온다. 그 때가 1998년이다. 대형 화재 이후 일부 복원했지만 옛 명성은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스님은 “도량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도로 정비도 되지 않았다. 다락 속에는 문화재가 쌓여있는데 좀이 쏠고 있었다. 그 때 원을 세웠다. 박물관을 세워 후손들에게 잘 물려주어야겠다.”고 말했다.

 

  [환갑 넘어 불사 시작, 12년 만에 결실 이뤄, “이것저것 따졌으면 엄두도 못 냈을 것”] : 용문사를 맡았을 때 스님의 세수는 이미 환갑을 넘었다. 후학들에게 미루고 물러나 편히 쉴 나이에 스님은 대원력을 세웠다. “전국 말사 중에서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한 절이 바로 용문사다. 보물 8점을 포함해 보물급만 15점이고 문화재 자료까지 합쳐 모두 315점을 보유하고 있다. 용문사는 걸어 다니던 시절에는 교통의 길목이었다. 걷던 시절에서 차량 시대가 되면서 용문사는 잊힌 가람이 됐다. 하지만 다시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수도권이나 남쪽에서 접근하기가 용이해진데다 경북도청이 이곳과 멀지 않은 곳에 들어섰다.” 스님은 지난 12년간 잊히고 퇴락한 용문사를 일으키는데 온힘을 쏟았다. 60억원을 들여 240평 규모의 박물관을 지었다. 말사가 자체 성보박물관을 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숙소 기능을 하는 설법전을 짓고 제1강원을 보수했다. 모두 300억 원이 들어간 불사다. 모든 것이 쉽지 않았다. “용문사에서 왔다고 하면 모두 양평 용문사냐고 묻는다. 예천이라는 동네가 있는지 조차 모르는 사람이 더 많다. 이름도 지역도 모르는 공무원들이 나를 상대해 줄 턱이 있나. 서류를 만들어서 서울로 공무원을 만나러 가면 당연히 만나주지 않았다. 매일 가서 살다시피 하니 조금씩 관심을 갖더라. 이제 중앙에서 나 모르는 공무원이 없다. 일하기도 많이 수월해졌다. 하지만 인부들과 같이 일하면서 일일이 신경 쓰는 탓에 여전히 힘들다. 입에서 단내가 날 정도다.”  스님의 불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대규모 템플스테이를 유치할 공간 마련과 지역 복지가 스님에게 남겨진 두 가지 과제다. “내 나이 어느덧 74세인데 아직 불사가 끝나지 않았다. 여기서 100리 안에 경북도청이 들어선다. 도청과 함께 많은 관공서와 관련기관이 들어올 것이다. 이들을 위한 템플스테이와 연수 시설을 갖춰야한다. 80억 가량을 들여 2~3년 지나면 마무리 될 것으로 본다. 또 하나는 지역 복지 불사다. 농촌은 사라져 간다. 우리 사찰도 지난 10년간 1000명의 신도가 사라졌다. 특히 예천은 전국에서 노인층 비율이 가장 높다. 그런데도 사회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젊은이들이 빠져나간 빈자리를 그나마 외국인 신부들이 메워준다. 이들을 위해 사찰이 기여를 해야 한다. 사암연합회 스님들과 함께 지역 복지, 다문화 가정 복지를 하려 한다.”  스님은 걱정이 많았다. “이대로 가면 농촌 사찰은 폐사되고 만다. 오랜 전통과 역사 그리고 문화를 지닌 사찰이 무너지는 것을 방치할 수는 없다. 시대의 변화에 맞춰 사찰의 역할을 하기 위해 지난 10여 년간 잠을 설쳐가며 불사를 해왔다. 그리고 많은 성과를 거뒀다. 남은 계획만 성취하면 용문사가 옛 명성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용문사가 어떤 사찰인가. 양평 용문사, 남해 용문사와 함께 3대 용문사이며, 연천 심원사, 선운사 도솔암과 함께 3대 지장도량이다. 내 비록 나이 들고 힘이 부족하지만 원력을 성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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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117

 

  예천군 관광(醴泉昆蟲·天文宇宙센터 '黃金 連休') [記事] : 황금연휴 나흘 동안 예천곤충생태원`예천천문우주센터에 2만여 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몰려드는 등 경북 도내 주요 관광지마다 사상 최고치의 관람객들을 기록했다. 동굴곤충나라를 첫 공개한 예천곤충생태원에는 2014년 5월 3~6일 1만5천여 명의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찾았다. 총길이 110m 동굴로 꾸며진 동굴곤충나라에서는 반딧불이`노래기`공벌레`꼽등이 등 다양한 동굴 속 곤충을 직접 보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관광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예천군 감천면 예천천문우주센터에도 5천여 명의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찾았다. 센터가 문을 연 이래 가장 많은 인파가 몰린 것이다. 예천천문우주센터에서는 천문`우주 전문가의 특별 강연과 천체 관측 체험, 우주비행사 훈련 체험, 과학공작 및 과학실습 등이 펼쳐졌다. 5일 대구 신암동에서 가족과 함께 축제장을 찾은 권인영(10) 양은 "대구에서는 볼 수 없는 살아 있는 곤충과 우주 체험 등을 동시에 할 수 있어 정말 좋았다"고 했다...(권오석 記者 每日新聞 201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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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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