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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637) : 예천8경 중 용문사(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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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영산회괘불탱 : 예천 용문사영산회괘불탱(자료=예천군) | 예천신문 | 2010.04.03. 10:26/ 예천 용문사영산회괘불탱(보물 제1445호 2005. 9. 6 지정)/ 소재지 : 예천군 용문면/ 소유자 : 용문사/ 자세한 설명 : [크기〕전체크기 가로 674.5㎝, 세로 1097.0㎝, 그림크기 가로 611.8㎝, 세로 1002.5㎝/ 이 괘불탱은 괘불탱으로서는 비교적 빠른 시기에 해당하는 1705년 조성의 작품으로, 둥글넓적해진 얼굴에 근엄함이 엿보이며, 어깨가 약간 올라가는 등 17세기로부터 18세기로 넘어 가는 과도기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보살상이 아닌 부처상으로써 지물(연꽃가지)을 드는 새로운 도상의 예를 보여주어 조선시대 불화 연구에 학술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크다.(daum 2010)
용문사와 명봉사(龍門寺 木造阿彌陀如來坐像·千佛圖, 鳴鳳寺鏡淸禪院慈寂禪師凌雲塔碑 寶物 指定) [記事] : 예천군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천불도,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가 2010년 2월 24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어 고시됐다. 문화재 자료였던 용문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이중의 대의를 걸친 불상으로 가슴과 옷주름, 무릎과 발 등의 표현이 자연스러우면서도 신체의 볼록한 양감이 강조된 것이 특징으로 특히 눈 꼬리가 길고 앞으로 튀어 나온 양감있는 얼굴 모습과 자연스러운 옷 주름 등은 조선전기인 15세기의 전통이 남아 있어 16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명문불상이 극히 적게 남아 있는 조선 전기의 조각 상황, 우수한 조형성 등에서 보존하여할 가치가 높은 작품으로 평가 받아 보물 제1637호로 승격됐다. 도 지정 유형문화재였던 용문사 천불도는 1709년에 제작된 그림으로 질서 정연한 배치, 이지러짐이 없는 형상과 필선 등으로 매우 희귀하며 현존 천불도 가운데 시기가 가장 앞설 뿐 만 아니라 18세기 초반의 불화라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아 보물 제1644호로 승격 지정됐다. 도지정 유형문화재였던 명봉사경청선원자적선사능운탑비는 282cm 높이의 석비로 통일신라 말기부터 고려시대 초기까지 활동한 승려 자적선사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으며 이두문으로 작성되어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당대의 명문장가 최언위가 짓고 비문의 서체는 중국의 명필 구양순의 필적을 집자하였으며 고려 최초의 이두문자까지 남아 있어 고려초기의 문장과 서예를 잘 보전해 보물 제1648호로 지정받았다. 이로써 예천군은 국가명승 제16호로 지정된 예천 회룡포를 비롯해 석송령, 윤장대 등 국가지정문화재 31점과 도지정문화재 26점, 문화재 자료 26점 등 총 83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전통문화의 고장으로 확고한 입지를 굳히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0-02-26 오전 9:03:56)
용문사와 석송령(慶北道, 住民과 함께하는 文化財 政策 成果 : 總 963億 원 投資) [記事] : 경상북도(도지사 김관용)에서는 2008년도 문화재 관련 예산 총 963억 원(국비 501, 교부세 57, 지방비 296)을 투자하여 경주역사문화도시조성사업, 경주고도보존정비사업, 유교문화권관광개발사업, 종합방재시스템 확충, 무형문화재 전수교육관 건립 등 문화유산의 올바른 보존과 함께 창조적 문화재 활용 정책으로 이를 관광자원화 하는데 적극 노력해 왔다. 지금까지 문화재에 대한 원형보존에 치중하던 것을 2008년부터는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거나 사라져 가는 문화유산을 토대로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한 개발에 중점을 두어 역사문화자원의 보존과 활용이 균형을 이루어 주민의 삶의 질을 높이고 관광자원화를 통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했다... 그리고 불교문화유산과 서원, 향교 등 유교문화유산 보존을 위해 144억 원을 투자하여 청하향교 천화루 개축, 예안향교 문루복원, 부석사 공양간 보수, 소수서원 강학당 보수, 장육사 일주문 건립, 예천용문사 설법전 건립 등 주변문화재에 대해서도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보존관리가 될 수 있도록 다각적인 방안을 강구하는 한편 안동 하회 남촌댁 안채복원 등 역사적으로 가치가 있는 문화유산을 새로운 관광자원으로 개발하고 있다... 또한, 전통마을의 수려한 경관을 보존하고 지역주민의 공동체의식을 결속하는 전통생활문화공간인 천연기념물 마을숲 등의 보호사업으로 자천리의 오리장림, 예천 감천면의 석송령 생육환경개선사업과, 와룡면의 뚝향나무, 영양 답곡리의 만지송 등천연수종 보호를 위하여 소나무재선충방제사업실시와, 경산 삽삽개 보호 등에 12억 원을 투입하여 주변 자연․인문환경의 지속적인 보존과 보호에도 역점을 두고 있다. 경상북도 김동환 문화재과장은「조상의 숨결이 고스란히 담겨져 오천년 우리역사의 맥을 이어 온 전통문화유산 보존사업을 담당하고 있어 높은 자긍심을 느낀다면서 2009년도에도 역사문화유산을 지역경제 활성화를 위한 새로운 자원으로 개발하는데 최선을 다해 나가겠다.」고 말했다. 출처 : 경상북도청(聯合뉴스 2008.12.31 15:33)
용문사 왕비태실비(昭憲王妃胎室碑), 용문사왕후태실비 [碑]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 입구 오른 쪽 봉우리인 태봉에 있는 비로, 비의 앞면에는 "왕비태실(王妃胎室)"이라고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성화 14년(1478, 성종 9) 2월 14일(成化十四年二月十四日)"이라고 음각되어 있다. <예천군읍지>(1841)와 <예천군지>(1939)에서도, "성화 14년 봉왕비태실(封王妃胎室)"이라고 하였다. <국사대사전>(1963) 용문사편에서, "1478년(성종 9) 소헌왕비태실(張炳昌 註 : 연산군의 모 제헌왕후의 誤記)을 봉안하고 성불산 용문사로 고쳤다."라고 하였다. 소헌왕후는 세종대왕의 왕비로 본관은 청송이고, 영의정 심온(沈溫)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나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책봉되었는데, 아버지의 죄로 폐위될 뻔 하였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일축된 바 있고, 1446년(세종 28) 향년 52세로 승하하였다. [문제점] : 1) 소헌왕후가 출생했을 때는 청송 심씨 심온의 딸이었을 뿐인데 어떻게 태실이 여기 있었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사대부가(士大夫家)에서는 자녀가 출생하면 태실을 만들었는지? 그랬다가 왕비가 된 후에 다시 이곳으로 옮기어 안장하고, 태봉을 했었는지 잘 모르겠다.(張炳昌 註 : 연산군의 모 제헌왕후의 誤記) 2) <조선왕조실록>에는, "1463년(세조 9) 3월 4일에 예조(禮曹)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옛 순흥(順興)의 소헌왕후태실과 옛 은풍(殷豊, 上里面)의 문종대왕태실은 돌난간과 축대가 조금 물러났으니, 풍수를 보내어 살펴보고 고치게 하소서,"하니, 윤허치 않고, "도순찰사 이극배로 하여금 살펴보고 오게 하라."라고 하였다. 이 소헌왕후 태실은 영주시 윤인봉에 마련되었다가 1928년 창경원 안으로 옮겨졌고, 1944년 10월에 서울 덕양구 원당동 산 38-4번지 서삼릉(西三陵 : 史蹟 第200號) 경내로 다시 옮겨졌다. [제헌왕후태실비라는 주장] : 예천군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2001.9.12, 權奇模)에 의하면, "소헌왕후태실비는 성종의 제헌왕후태실비이다."고 주장하고 있다. 제헌왕후는 성종의 폐비 윤씨이고, 연산군(1476-1506)의 생모이다. 1445년(단종 3) 윤 6월 1일 예천 군수이던 윤기견(본 함안)의 딸로 태어나서 뛰어난 미인으로서 후궁으로서 왕의 총애를 받아 1473년(성종 4) 숙의, 그리고 1474년(성종 5)에 왕비로 책봉되며 1476년(성종 7)에 원자 연산군을 낳았다. 인수대비에 의해 1479년에 폐비되고, 3년 뒤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고, 연산군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얼굴도 모르는 생모이다. 이 사건은 훗날 갑자사화의 씨앗이 되었다. 윤비의 태실은 일제 때 이왕직에서 태실을 조사할 당시 태지석에, "경태 6년(단종 3, 1455) 윤 6월 초 1일 생, 왕비 윤씨 태, 성화14년(성종 9, 1478) 11월 12일 오시 장"이라고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고, 이를 서삼릉에 옮긴 데서도 확인된다. 이 곳에서 함께 출토된 태항아리는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하나의 기록으로는 <성종실록>에, "동지사 이승소가 아뢰기를, '중궁의 태실이 경상도 예천에 있으니 사람을 보내어 다시 살펴서 그 산이 불길하거든 길한 곳으로 옮겨 모시고, 수호군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왕이, "경작을 금하면 백성의 폐해가 많을 것이니 아직 그대로 두라."라고 한 뒤 이듬해 1478년(성종 9) 안태사 한성판윤 서거정에 의하여 점혈되어 건립된 뒤 오늘에 이른다. [회묘] : 서삼릉의 천장묘 중 회묘는 성종의 폐비 윤씨(연산군 생모)의 묘로, 경기도 양주 천장산 아래에 민묘로서 있었던 것이나 연산군이 등극한 후 비릉으로서 조영하고 회릉이라 하였던 것이다. 연산군이 폐출된 후 회묘로 강위되었고, 1969년 10월 25일 서삼릉 경내로 천묘(遷墓)하였다. 천묘터엔 경희대 경희의료원이 들어섰다. 태실은 1930년 전후 서삼릉 경내로 이설되었다.
용문사 왕비태실비(龍門寺王妃胎室碑) [碑]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 경내에 있는 비로, 권기모(權奇謨)는 2001년 9월 12일 다음과 같은 글을 예천군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 실었다. "용문사 앞 소헌왕후(世宗王妃) 태실비는 성종의 제헌왕후 윤비(燕山君生母)의 태실비이다.// 우리 예천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 입구 오른쪽 봉우리는 산이름을 예로부터 '태봉'이라 부른다. 태봉은 산이름이 마을의 뒷산인 경우는 마을을 지키는 주산(主山)을 이른다. 예천읍의 흑응산이 검은매를 닮은 산이라기보다는 '흑(큰)응(뫼=산)산' 결국 예천 시내의 주산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용문의 태봉은 태실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고을의 승격까지도 고려되던 용문사 앞 태실비는 과연 누구의 것일까?" <예천군지>, <예천촌락사>, <내고장예천>, <예천의 숨결> 등의 책자에는 "성종 9년(1478) 소헌왕후의 태를 봉안한 태실비"이며, "왕비태실(王妃胎室)"이라고 각자되었었다고 한다(예천의 숨결). 하지만 소헌왕후는 세종대왕의 왕비로 본관은 청송이며, 영의정 심온의 딸로 1395년(태조 4)에 태어나 1432년(세종 14)에 왕비로 책봉되었는데, 부친의 죄로 폐위될 뻔하였으나 내조의 공이 인정되어 일축된 바 있고, 1446년(세종 28) 춘추 52세로 승하한 분이다. 따라서 필자의 의견으론 이 태실비는 조선 9대 성종의 제헌왕후 윤씨의 태실비로서 제헌왕후는 지난 번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에 나오 듯, 인수대비에 의해 1479년에 폐비되고 3년 뒤 사약을 받고 승하하였으며, 연산군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얼굴도 모르는 생모이자 이 사건은 훗날 갑자사화 씨앗이 된다. 재헌황후 윤씨는 1455년(단종 3) 윤 6월 1일 예천군수이었던 윤기견(본관 함안)의 딸로 출생하여 성종 4년 숙의, 그리고 5년에 왕비로 책봉되며 성종 7년(1476)에 원자 연산군을 낳았다. 윤비의 태실은 일제 강점시 이왕직에서 태실을 조사할 당시 태지석에는 "경태 6년(단종 3, 1455) 윤6월 초1일생, 왕비윤씨태, 성화14년(성종 9, 1478) 11월 12일 오시장"이라고 한자로 기록되어 있었고, 이를 서삼릉에 옮긴 데서도 확인된다. 이 곳에서 같이 출토된 태항아리는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또 하나의 기록으로는 <성종실록>에, "동지사 이승소가 아뢰기를, '중궁의 태실이 경상도 예천에 있으니 사람을 보내어 다시 살펴서 그 산이 불길하거든 길한 곳으로 옮겨 모시고, 수호군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에 왕이, "경작을 금하면 백성의 폐해가 많을 것이니 아직 그대로 두라'라고 한 뒤 이듬해 1478년(성종 9) 안태사 한성판윤 서거정에 의하여 점혈되어 건립된 뒤 오늘에 이른다."
용문사 왕비태실비(龍門寺王妃胎室碑), 용문사 [碑] :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용문사(龍門寺)의 동쪽 봉우리 남단에 있는 화강석 비로, 1478년(성종 9) 2월 14일에 세워졌다. 비신(碑身) 높이 110cm, 비신 너비 47cm, 비신 두께 32cm이다. 이수(이首)의 길이 53cm, 이수의 지름 53cm이고, 비신과 이수가 한 돌로 되어 있다. 태실의 석함(石函)은 일제가 발굴해 가고, 비의 받침돌과 비신, 구부(龜趺)만 매몰되어 있었는데, 비신은 부분 파손이 보이고, 인근 거주 신도들이 복원해 놓은 것이다. 비 앞면에는, '왕비태실(王妃胎室)'이라는 각자(刻字)가 있고, 배면(背面)에는, '성화 14년 2월 14일(成化十四年二月十四日)'이라 음각(陰刻)되어 있다. [傳說] : 이 비의 돌거북(龜跌)이 남쪽을 바라보며 앉아서 고개를 내밀고 있다. 옛날 이 고장에 백발 노파가 살고 있었다. 노파가 마을 사람에게 예언하기를, "모월 모일(某月某日)에 돌거북 입에서 붉은 빛이 나와서 그 빛이 앞산의 큰 바위에 부딛히면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대홍수가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동네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았다. 드디어 그 날이 닥쳐왔다. 이 날 일찍이 그 노파는 마을 사람들에게 피하라고 얘기했으나, 역시 마을 사람들은 믿지 않았다. 노파만이 그 돌거북이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예언대로 돌거북의 입에서 붉은 불이 나오더니 앞산 바위덩이에 들어 박았다. 그것을 계기로 하늘에선 천둥과 번개가 연달아 일어나더니, 비가 오기 시작하였다. 삽시간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 익사(溺死)하고 말았다. 그러나 노파만은 무사하였다고 한다. <국사대사전>(1965)에서는 ‘소헌왕후태실비(昭憲王后胎室碑)’라고 한다. →부도
용문사 윤장대 [模造品] : 경기도 여주 목아불교박물관 2층 전시실에 소장되어 있는 모조품으로, 경전을 보관하는 일종의 장인데, 양쪽에 손잡이가 있어 이 손잡이를 돌리면서 공덕을 비는 일종의 공양 기구라고 할 수 있다. 옛부터 윤장대가 많이 설치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예천 용문사에 1쌍이 남아있는 정도이다. 이를 1/4로 축소한 모조품이다.(www.njoyschool.net 2004)
용문사 윤장대(龍門寺輪藏臺), 용문사 [文化財] :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용문사 대장전(大藏殿) 내에 있는 2개의 구조물로, 불단(佛壇)을 중심으로 좌우에 각 1좌씩 설치되어 있는데, 고려 명종 때 조성한 회전식 장경각(藏經閣)이다. 보물 제684호(1980.9.16 指定)이다. 높이 4.2m, 둘레 3.37m, 팔작식(八作式)이다. 공예품으로는 국내 900여 사찰 가운데 용문사에 유일하게 완전하게 소장하고 있다. 원래 대장경(大藏經)을 넣어 두고 특별 법회(法會) 때 손잡이로 돌려가며 참회 염불하던 사치스런 조각으로 한 개의 둥근 기둥을 축으로 한 팔각정(八角亭) 형식을 하고 있다. 조각 수법이 섬세하여 불가(佛家)에서는 이것을 최고의 걸작품으로 꼽고 있다. 이 윤장대(輪藏臺)의 상부 가구(上部架構)는 다포식 공포(多包式拱包)가 섬세하고, 윤장(輪藏)의 중앙에는 각 칸마다 문을 두었는데, 좌측(左側)은 빗살무늬, 우측은 꽃무늬로 조각하여, 그 정교함은 고려 공예 문화의 정수(精髓)라고 하고, 회전하는 건축물로서는 귀중한 연구 자료라고 고고학계에서 말하고 있다. 이 윤장대의 제작 연대는 1190년(고려 명종 20)으로 여러 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1987년도에 문화재 관리국에서 실시한 대장전 실측 때 이 구조물의 내부를 조사하였던바 천정에서 '천계 5년(1625) 중수(天啓五年重修)"란 묵기(墨記)가 발견되었다. 이 묵기로 미루어 보아, 1625년에 다시 제작한 것이 아닌가도 추측된다. 원래 후량(後梁)의 쌍림 대사 전흡(雙林大師傳翕)이 경전(經典)을 넣어두고 회전하는 책장으로 만들었고, 명칭은 전윤장(轉輪藏) 또는 윤장대(輪藏臺)라고 했고, 이것을 돌려 읽을 경전을 쌓아 둔 곳을 찾아 그 경전을 읽기 위해 만들었으나, 속인(俗人)은 이것을 돌리기만 하고, 경전을 읽지 않더라도 공덕이 된다고 한다.
[每日新聞] : 900여 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그 모습을 고이 간직하여온 국내 유일의 회전식 장경각으로, 2003년 10월 4일 일반에게 공개된다. 1980년 보물 제684호로 지정된 이후 훼손 상태가 심해 일반들의 접근이 차단되어 오던 중 주지 청안 스님의 열정으로 3년 여 간의 보수를 모두 마쳤기 때문이다. 사찰측은 “신도들의 복덕을 기리기 위해 매년 음력 3월 3일과 9월 9일 두 차례 신도들과 일반에 공개하기로 결정했다”며, 2003년 10월 4일(음력 9월 9일) 윤장 불사를 봉행한다.“고 밝혔다. 이 윤장대는 한 번 돌리면 1만 번의 다라니경을 읽는 공덕을 쌓게 하고 자기 업장 소멸과 자신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고, 복을 빌고 소원을 빌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염험함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는 1173년(명종 3) 자엄 대사가 조성했고, 인도의 고승 구담이 가져온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용이 나타난 용문사에 대장전을 짓고 대장경을 보관하기 위해 높이 4.2m, 둘레 3.37m의 팔각정 모양의 윤장대를 설치했다. 중앙에 찰주를 세우고, 하대와 몸체, 옥개부 세 부분으로 올렸으며, 아랫부분에 손잡이를 달아 돌리면서 염송을 할 수 있도록 했다. 팽이처럼 생긴 하대는 연꽃을 조각한 판재로 장식하고, 몸체는 난간이 있고, 기둥 사이에는 화려한 꽃창살과 살창을 대었으며, 옥개부은 닫집과 비슷한 짧은 기둥을 달고 연꽃 봉우리로 장식해 놓았다. 사찰에 처음 윤장대를 설치한 것은 중국 양 나라 때 선혜 대사 부흡 현풍을 불도를 믿으려 하나 글을 읽지 못하거나 경을 읽을 겨를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한 번 돌리면 경전을 읽는 것과 같은 공덕을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전해지고 있다.(每日新聞 2003.9.16)
용문사 윤장대("所願 빌어 보세요." 龍門寺, '輪藏臺 돌리는 날') [記事] : 매년 봄을 알리는 명절인 3월 3일 삼짇날과 9월 9일 중구절(重陽節)은 윤장대를 일반인들이 돌려볼 수 있는 날이다. 용문사(주지 청안 스님)에서는 2004년 4월 21일 오전 10시 용문사 현지에서 신도와 관계자 등 1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를 돌리며 소원을 비는 첫 `윤장대 돌리는 날' 행사를 가졌다. 이 윤장대는 800여 년이 넘는 오랜 시간의 흐름에 따른 퇴락과 높이 4.2m, 둘레 3.4m에 이르는 무게 등 더 이상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돌리는 것을 금지해 왔는데 2002년도와 2003년도 보수 공사를 거쳐 2004년부터 연간 두 차례에 걸쳐 윤장대 돌리는 날을 정해 운영키로 함으로써 일반인들도 이 날에는 윤장대를 돌려볼 수 있게 됐다. 고려 명종 때 대장경을 보관하는 용도로 만들어져 이 대를 돌리면서 소원을 빌면 바라던 바가 이루어진다는 설을 담고 있는 윤장대는 고려 명종 3년(1173) 자엄 스님이 용이 나타난 용문사에 대장전을 짓고 부처님의 힘으로 호국을 축원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 전해 오며 대장전 내에 좌우로 각각 1기씩 모두 한 쌍이 배치되어 있는데 문화 유산적 가치와 보존 상태가 좋아 보물 제684호로 지정돼 있는 국내 유일의 회전식 불경 보관대인 불교문화 유산이다.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때 두운 선사가 조성한 천 년 고찰로 고려 태조가 군사를 이끌고 초암에 살던 두운 선사를 찾아 왔을 때 홀연히 용이 나타났다 해서 용문사로 이름 붙여졌다 전해온다. 윤장대가 들어서 있는 대장전 건물은 보물 제145호로 지정돼 있고 고려 명종 때 팔만대장경 일부를 보관하기 위해 지었다고 전해오며 내부에 윤장대를 비롯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진 목각후불탱을 소장하고 있다.(醴泉新聞 2004-04-29 15:59:27)
용문사 윤장대(31. 眞理의 바퀴를 돌려 자비로움을 救한다/ 醴泉 龍門寺 輪藏臺) [記事] : 박보하의 저서로, 다른세상에서 2000년 5월 1일에 펴낸 <산사의 미를 찾아서(사색과 향기에 취하는 또 다른 세상)>(245쪽) 31번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사진작가인 박보하 씨가 20년 가까이 전국의 유명한 절을 찾아다니며 사찰의 정취를 담아낸 것이다. 우리가 무심코 보아 넘길 수 있는 산사의 구석구석을 300여 장의 사진으로 섬세하게 포착해 보여준다. 선방에 놓인 스님의 고무신 한 켤레를 통해 그 절의 고적함을 드러내기도 하고, 작은 연꽃 조각의 아기자기함, 저녁노을의 기운이 비쳐드는 문창살의 신비함을 느끼게 해주기도 한다. 사진과 함께 해설이 곁들이고, 낯선 불교 용어와 건축 용어는 캡션을 달아 설명함으로써 사찰을 더욱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돕는다.[리브로 提供]
용문사 윤장대 꽃문(極樂淨土와 俗世의 境界 ; 절문 ; 幾何學的 무늬-연꽃-물고기 等 ; 原色 물감으로 華麗하게 治粧 ; 各各의 門마다 藝術-哲學 담겨; ◇범어사 팔상전 꽃문 ; ◇신흥사 극락보전 꽃문 ; ◇마곡사 대광보전 꽃문 ; ◇정수사 대웅보전 꽃문 ; ◇내소사 대웅보전 꽃문 ; ◇龍門寺 輪藏臺 꽃門 ; ◇불갑사 대웅전 꽃문 ; ◇송광사 하사당 문살) [記事] : 절은 속세(사바세계)에 차려진 정토(淨土)다. 그 곳엔 꽃비 흩날리고 그지없는 향기가 나며, 새소리에 맑은 물, 온갖 나비가 노닌다. 절의 대웅전이니 극락전이니 하는 건물이 화려함의 극치를 이룬 것도 지상에 베풀어진 극락정토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세속과 정토(절)를 가르는 경계가 있다면 그 것은 문이다. 문은 사람을 맞이하는 장치지만, 외부인을 막아서는 역할도 한다. 누구나 부담 없이 찾아와 속세에 찌든 몸과 마음을 씻어내도록 베풀어진 절의 문이 외부인을 가로막는 벽이 될 수는 없다. 그래서 절의 문은 꽃으로, 물감으로 화려하게 치장한다. 닥종이를 안으로 발라 차가운 흰빛을 감춘 채 빛이 통하고 소리가 들리도록 한 전통 한지문처럼, 절 문 역시 낯선 이의 첫 발걸음을 풀어주려 애쓴다. 손대어 만지고 열어보고 싶도록 곱게 꾸며진 우리 절 문들을 만나보자... 16세기 경 제작된 8각의 윤장대는 안에 불경을 칸칸이 넣고 둘러앉은 사람들이 돌려가며 불경을 꺼내볼 수 있도록 만든 장치다. 8개의 문짝에 정교한 무늬를 새겨놓고 단청을 곱게 올린 보물 685호. 문짝에는 각기 홍-백의 매화, 들국화, 모란꽃 같은 꽃무늬를 새겼으며, 붉은 연꽃과 연잎 사이를 물고기가 노니는 연못도 그렸다. 불법(佛法) 진리의 상징을 꽃으로 나타내는 좋은 예다. 특히 닥종이를 바르지 않은 채 꽃무늬 사이로 힐끗힐끗 불경이 내비치도록 운치가 엿보인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소백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때(870년) 두운 조사가 세웠다는 고찰이다.(글․강순형(문화재관리국 학예관) 朝鮮日報 1997-05-07)
용문사 자운루(龍門寺紫雲樓), 용문사 [文化財] :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용문사 경내에 있는 12세기의 누각식 건물로, 문화재자료 제143호(1985.8.15 指定)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맞배지붕이다. 용문사 대장전(大藏殿) 앞쪽 20m 지점에 남향하여 있다. 초건 연대는 1166년(高麗 毅宗 20)이고, 1561년(조선 명종 16)에 중건되었고, 1621년(광해군 13) 중수한 것을 비롯하여 1979년 국비 보조사업으로 해체 복원 하는 등 여러 차례 보수하였다. 현재 건물은 구조의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기의 건축물로 보이고, 임진왜란(1592) 때는 창의(倡義)한 승병(僧兵)들을 지원키 위해 이 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역할을 한 호국의 도장이다. 막돌 기단 위에 큼직한 덤벙 주초(柱礎)를 놓고 원주(圓柱)를 세웠고, 아래위의 둥근 기둥은 별개로 연결되어 있다. 누의 상층(上層)은 익공식(翼工式)으로 주두(柱頭) 위에 뻗어 나온 행공첨차위 소누(小累)는 주심도리(柱心道理) 장혀를 받치고, 주심도리를 떠받고 있다. 내부는 출목(出目)없이 보아지를 만들어 대량(大樑)을 받도록 하였고, 누의 앞면은 창틀 중앙에 문설주(門瑄柱)가 세워져 있고, 연등 천정(燃燈天井)에 바닥은 우물마루의 청판(廳板)을 깔았는데, 전체적으로 볼 때 우람하고 고졸한 맛을 보여준다. [文化財廳 홈페이지] :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용문사 경내에 있는 사찰 건축 1동으로, 국가 문화재자료 제169호(1985.12.30 지정)이다. 용문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용문사는 870년(경문왕 10)에 두운(杜雲) 선사가 세운 절이다. 두운은 용문산에 이르렀을 때 바위 위에서 용이 영접하였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자운루는 2층 누각집으로, 1166년(의종 20)에 자엄(資嚴) 대사가 세웠으며, 1561년(명종 16)에 고쳐 짓고, 1621년(광해군 13)에도 고쳐 지었다. 그 뒤, 1979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짠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안쪽 천장은 뼈대가 그대로 드러나 있는 연등천장이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僧兵)들을 지원하기 위해 이 곳에서 짚신을 만들어 조달한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불교 행사가 있을 때 법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문화재청 홈페이지 2002, www.ocp.go.kr 2002)
용문사 자운루(자료=예천군) : 예천신문 | 2010.04.02. 14:06/ 용문사 자운루 (문화재자료 제169호 1985.12.30 지정)/ 소재지 :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 소유자 : 용문사(관리자:용문사)/ 자세한 설명 : 용문사 대장전의 문루인 자운루는 대장전과 대향하고 있는 익공계 박공지붕의 이충누각 집으로 임란 때 승병들의 회담장이었으며, 승속들이 승병들을 돕기 위해 짚신을 만든 신방의 기능을 수행한 호국의 장소이기도 하다. 사적에 의하면 고려 의종 20년(1166) 자엄대사가 건립하였으나 조선 명종 16년(1561)에 중창이 있었고 광해군(1621) 때 중수한 기록 등이 있다. 건축양식으로 보아 조선 중·후기의 기법을 지니고 있으며 장식성이 두드러지지 않는 익공계의 건실한 목구조수법을 지닌 건물로서 불사가 있을 때 법공양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daum 2010)
용문사 장승(龍門寺장승) [遺物]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에 있는 장승으로, 예천 용문사와 함양 벽송사, 하동 쌍계사의 사찰 장승은 호법대장군, 삼원대장군, 금호대장군, 호법대신, 가람선신, 외호선신 등의 명문이 적혀있는 특이한 것들이고, 밤나무를 이용한 빼어난 조각품이다.(장승 열화당 1988.10.20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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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