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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638:예천8경 중 용문사(10)(祝예천노인전문요양원)
작성자장병창 @ 2014.05.12 06:15:43

  예천의 자랑(3638) : 예천8경 중 용문사(10)(附 예천노인전문요양원, 전국장기요양기관 평가에서 우수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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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문사 중수비(龍門寺重修碑), 용문사 [碑]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경내 회전문(廻轉門) 앞에 있는 1185년(고려 명종 25) 4월에 만들어진 비석으로, 높이 170cm, 너비 93cm, 두께 6cm이다. 화강석을 다듬어 세운 중수비로, 비의 앞면 머리에는 '중수용문사기(重修龍門寺記)'라고 음각(陰刻)되어 있고, 기문(記文)은 조산대부 산기상시 보문각학사 지제고 사자금어대신 이지명(朝散大夫散騎常侍寶文閣學士知製誥賜紫金魚大臣李知命)이 짓고, 보제사 주지 성인 선사(普濟寺住持性印禪師)와 연의 선사(淵懿禪師)가 글씨를 쓰고, 승과(僧科)에 오른 과석(科錫)이 글자를 새겼고, 다정사 주지 중대사 충묵(茶井寺住持重大師沖黙)과 사수(思秀)가 비석을 세운 것이다. 배면에는 용문사의 사법 제자(嗣法弟子) 21명과 집사 제자(執事弟子) 2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말미(末尾)에 '대정 28년 무신 4월 일 기(大定二十八年戊申四月日記)'라고 음각(陰刻)되어 있다. 전문 1300자인 이 비문은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전재(轉載)되어 사찰의 역사를 밝혀 전해 오는데, 현재 비석은 일제 중기까지 용문사 경내에 보존되다가 해방과 더불어 행방이 묘연했었는데, 1972년 대장전(大藏殿) 마루 밑에서 두 쪽으로 절단된 체 발견된 것을 1987년 지금의 자리에 복원해 놓았다.

 

  [醴泉의 金石文]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 경내에 있는 비로, 1185년 4월에 이지명(李知命)이 짓고, 연의(淵懿)가 썼다. [碑文] : 『重修龍門寺記」// 朝散大夫左散騎常侍寶文閣學士翰林學士知 制誥賜紫金魚袋 臣李知命奉 宣述」/ 海東山川多奇秀惟龍門爲尤特峯巒??盤? 伏三百餘里洞壑幽深泉甘而土肥實高人遊士捿息異境也昔新羅禪師杜雲與梵日國師乘?入唐傳」/法而還乃卜玆地芟夷荊榛始結草庵精勤且久    我太祖擧義旗有幷呑三國志興兵吊伐至山下聞寺名入洞尋之駐車巖前頂禮以伸密約及定天」 / 下降勅鳩財陶瓦凡架屋三十間?給州縣稅租每歲一百五十石爲供養資其後傳法子孫繼繼相住至於大師英?住三十餘年告老而辭辭傳於禪師祖膺膺」 / 曰山門資蔭招提?廢旣久難以容膝?吾年老所住延鳳寺相去一千餘里?返艱阻未便營作擇門弟幹事者大師資嚴主之給稻租三百石嚴師自乙酉」 / 歲承 命來住以膺所施私財以爲資粮?道?堂三間僧房?庫九十三所乃至佛盤幡幢机案香?燈缸及一切受用釜 童海足濯盆?莫不備」 / 具越乙酉年降 勅旨勤勞修葺宜以門徒法孫相繼住之勿令廢絶歲在辛卯陰陽官卜定 今太子胎藏地於寺門外左臂峯頭於寺設祝」 / 聖壽法會約福田五負各弟子每日粥飯二味晝讀金光明經夜念觀音爲恒規據朝旨納近州縣亡寺田三十頃幷安東府甫州十小寺藏獲各二口」 / 及近州寺租稅七百石分貸村民取息以爲道?衆料而禪師竊恐歲久民?頗多奏請除焉己亥年創寺工畢會九山門學徒五百人設五十日談禪會請」 / 斷俗寺禪師孝惇敎習傳燈錄楞嚴經仁岳集雪竇拈頌以落成癸巳年 國朝多亂大禪師發願設三萬僧齋又別置輸大藏二座及堂三間作七日法」 / 會聚學者三百餘人請開泰寺僧統?緇講演以落之以救國難焉始自庚子正月至壬寅年八月披覽乃畢此寺有異事三焉初 聖祖尋杜」 / 雲師將入山而洞口巖足眞龍出延因號龍門一也始築基時忽得古樑上銀甁一□重十六兩賣穀米以充工匠日料二也歲在癸未道?堂南庭中立靑」 / 石塔九層藏舍利時第四層上五色雲盤繞移時而散三也大禪師謂靈異頗多想有前緣抑亦 儲皇胎藏所乃奉請奉 改?昌期寺先是甫」 / 州在安東管內因胎藏改爲基陽縣令官大禪師祖膺本海州人皇考戶長甫尹惟胤三韓壁上功臣司徒三重大匡崔貞獻七代孫也年十四投慧照國師門」 / 弟禪師英甫落?乙巳年曺溪選中格歷住七寺皆名藍也癸酉年下 批□三重至已□年轉禪師翌年爲大禪師仍受官誥一通住鳴鳳寺乙亥年欲」 / 設普濟國談禪齋向長安行至陰竹縣地見?石院焚蕩乃捨行裝褥席銀器計銀九斤八兩又租一百石銀甁一口等皆付縣吏重修館院後丁亥年冬設大」 / 豆羹粥以施行人及辛巳年住京北山大興寺乃捨財修營而作?林會依慧照國師入唐傳來坐禪儀?排鉢等事落成癸巳年被   制命鳴鳳寺叢林」 / 法主?乙酉年金州安國寺五十日談禪亦作法主焉甫州頭川院?東南地行人往返要途屋宇?廢鞠爲茂草於己亥年與龍門大師資嚴備材瓦重修每」 / 於冬夏設施作又癸未甲申年間南方?賊大 設一萬僧齋以救賊難焉師自??有瀟灑出塵想學識該博高道卓行爲?林模範人仰如山斗隨所住處」 / 學者如林而循善循誘□□□色年至?期猶不懈怠其傳法度人福利 邦家可勝道哉資嚴善士也師所親手削如誨螟?至于成名志?名?利?」 / ?汨沒於風塵乃脫?紅塵遍遊名山抵此爽塏樂於適性不憚辛艱修營作新勤且至矣夫杜雲聖僧也祖膺賢德也若無聖人卜居則龍門乃狼虎狐兎」 / 林藪耳孰能以天眠識王氣密護   聖主於草?定患難而名流千載乎若非祖膺修舊 廢則?垣破礎埋沒於草莽中焉能使九山衲子包腰杖錫海」 / 會鱗萃晨香夕炷祝延 國祚於無彊耶且年祀綿遠切恐開創修營異跡泯滅無聞?紀始末以示于後」 / 大定二十五年乙巳四月日普濟寺住持性印禪師臣淵懿奉 宣書門人今華茶 井寺住持重大師沖點住持重大師思秀等立石入選斛錫刻字」/

 

  [번역] : 조산대부 좌산기 상시 보문각 학사 한림학사 지제고(朝散大夫左散騎常侍寶文閣學士翰林學知制誥)로 자금어대(紫金魚袋)가 하사(下賜)된 신하(臣下) 이지명(李知命)이 왕명을 받들어 짓는다. 우리나라에는 빼어나게 아름다운 산천이 흔하지만 오직 이 용문산(龍門山)이 더욱 훌륭한 것은 봉만(峰巒)이 여러 구비 감돌고 기복(起伏)하기를 300여 리나 해서 골짜기가 그윽히 깊숙하고 샘물 맛이 달고 농토는 비옥해서 진실로 고인달사(高人達士)들이 참으로 그 기이한 곳에 살 만하기 때문이다. 그 옛날 두운 선사(杜雲禪師)가 범일 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당(唐) 나라에 가서 불법(佛法)으로 전수하고 돌아와서 868년(신라 경문왕 7)에 이 곳을 가려잡아 가시덤불을 치고 터를 닦아 초암(草庵)을 짓고 거기 살면서 불도에 접근하기 오래 되었는데, 우리 태조(王建)께서 삼한을 통일한 큰 뜻을 품고 의기(義旗)를 높이 들고 군사를 일으켜 백성을 어루만지며 백성을 괴롭히는 무리들을 치다가 이 산 아래에 이르러 두운 선사의 명성을 듣자 수레를 멈추고 이 동구(洞口)에 들어가 선사를 찾아갔다. 초암 앞에서 정례(頂禮)를 올리고 천하를 평정할 방책을 밀약해 달라고 졸랐다. 그리고 936년(태조 19) 칙서(勅書)를 내려 비용을 모으고 기와를 굽고 해서 30칸 집을 짓고 아울러 해마다 이웃 주현(州縣)에서 거두는 세금에서 150석씩을 주어서 공양(供養)하는 경비로 쓰게 했다. 그 다음부터 법손(法孫)들을 계승해서 거처한다. 영건 대사(英건大師)가 30여 년을 주지(住持)하다가 늙었다고 사임하고 물러나면서 그 자리를 조응 선사(祖膺禪師)에게 물려주었다. 이에 조응 선사가, “산문(山門)이 허술해진 적이 오래되고 비좁아서 서로 무릎을 꿇고 앉기도 어려우며 내 나이 많고 내가 주지하는 연봉사(延鳳寺)와의 거리도 1000여 리나 되니 오고 가기에 고생스럽고 어려움도 많으며, 절은 다시 짓는데 일을 맡아볼 사람을 가려서 이 일을 맡기겠다.”하고, 자엄 대사(資嚴大師)를 선임하면서 벼 300석을 주었다. 자엄 대사가 1165년부터 조응 선사의 명을 받들어 주지하면서 조응 선사가 준 사재로 양식을 해서 도장(道場) 3칸을 비롯하여 불반(佛盤), 번당(幡幢), 궤안(机案), 향로(香爐), 등공(燈공) 등 일체와 부력(釜력), 동해(童海), 족관분(足灌盆)을 고루 갖추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리고 지난 1165년 이래로 교지(敎旨)가 내려, “절을 고치고 새로 짓고 하면서 법도(法徒)와 법손(法孫)이 상계(相繼)하여 주지하면서 이 영(令)을 폐(廢)하는 일이 없더니, 1171년에 음양관(陰陽官)이 금상(今上)의 황태자(皇太子, 후 康宗) 태(胎)를 이 절 문 밖 좌비봉(左臂峰)에 복정(卜定)해서 갈무리하고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개설하고 복전(福田) 5부(負)를 약속하고 거기서 나는 소출로 날마다 죽과 밥을 먹게 하고 낮에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읽고, 밤에는 관음보살을 염하게 하는 것으로 영원한 규정을 삼게 하고 조정의 뜻을 도내의 없어진 절의 토지 30경(頃)과 안동부(安東府) 보주(甫州, 現 醴泉)의 10 소사(小寺)의 장획(藏獲) 각 2구(口)씩을 이 절에 주고 또 이 절이 가까운 고을에서 거두는 세조(稅租) 700석을 촌민들에게 빌려주고 그 이식(利殖)으로 도장의 경비를 삼게 했더니 선사가 이렇게 하기를 오래 하면 백성들에게 폐해가 심해질 것을 걱정해서 이 것을 그만 둘 것을 요청했다.

 

  1170년(명종 9) (15년간에 걸친) 절을 중창하는 공사를 마치고 구산문(九山門) 학도 500인을 모아 50일 담선회(談禪會)를 열면서 단속사(斷俗寺)의 효돈 선사(孝惇禪師)를 청해서 전등록(傳燈錄)과 능엄경과 인악집(仁岳集)과 설두계송(雪竇揭頌)을 교습하고 낙성했다. 1173년(명종 3)에 나라가 어지럽자 대선사(大禪師)가 발원하고자 3만승도(三萬僧徒)를 열었고, 또 따로 윤대장(輪大藏) 2좌를 안치하고 당(堂) 3칸을 짓고 7일 법회(法會)를 열고 공부하는 사람들 300여 인을 모으고 개태사(開泰寺) 스님 통영(統穎)을 초청해서 강연하게 하고 낙성했으며, 나라의 어지러움을 구하고자 1180년 정월에 시작해서 1182년 8월 피람(披覽)하는 것을 마쳤다. 이 절에는 이적(異蹟) 세 가지가 있었으니, 저 태조(王建)께서 두운(杜雲)을 찾아 이 산에 들고자 할 때 동구(洞口)의 바위 위에 진룡(眞龍)이 나타나 출영(出迎)했으므로 절 이름을 용문사(龍門寺)로 삼은 것이 첫째이고, 처음 축기(築基)할 적에 옛 집 들보 위에서 무게 16냥(兩)짜리 은병(銀甁) 한 개를 얻었는데, 그 것을 팔아서 식량을 사고 일꾼들 품삯을 충당할 수 있었으니 그 것이 둘째이고, 저 지난 계미년(1163) 도장당(道場堂) 남쪽 마당에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그 9층에 사리(舍利)를 봉안할 적에 그 탑의 제4층 위로 5색 구름이 휘감았다가 한참만에야 흩어졌으니 그 것이 셋째이다. 대선사께서 말씀하시되,  ”이렇듯 영험스럽고 이상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 것은 생각컨대 전연(前緣)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했다. 또한 여기 황태자의 태를 모시고 절 이름을 바꾸자고 주청해서 절 이름을 창기사(昌期寺)라고 했으며, 원래 보주(甫州)는 안동 관내에 소속되었었는데, 태를 모시고 고을 이름도 기양(基陽)으로 고치고 현령(縣令)을 두었다. 조응 대선사(祖膺大禪師)는 본관이 해주인 사람이고 아버지 유윤(惟胤)은 보윤 호장(甫尹戶長)이고 삼한벽상공신 사도 삼중대광(三韓壁上功臣司徒三重大匡) 최정헌 공(崔貞獻公)의 7대손이다. 나이 14살에 혜조 국사(慧照國師)의 문제(門弟)인 영보 선사(英甫禪師)에게 낙채(落采)하고 1125년에 조계(曹溪)의 과거(科擧)에 뽑혔고, 일곱 사찰에 주지하면서 모두 석람(石藍)이었다. 1153년에 왕명으로 삼중(三重)이 가자(加資)되었고, 1169년에 선사(禪師)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 대선사(大禪師)가 되었고, 이어서 관고(官誥)로 명봉사(鳴鳳寺)에 주지했다. 1129년에 보제국담선재(普濟國談禪齋)를 개설하고자 해서 장안(長安)으로 가던 도중 음죽현(陰竹縣)에 이르니 흑석원(黑石院)에서 분탕질이 생겼다. 이에 선사는 행장(行裝) 속의 이부자리와 은(銀)그릇 등 모두 은 9근(斤) 8냥(兩)과, 또 벼 100석과 은병 1개 등을 내어놓고 그 고을 아전(衙前)들로 하여금 관원(館院)을 중수하게 했다. 그 뒤 1167년 겨울에 콩갱죽(太豆羹粥)을 끓여서 굶주린 행인들에게 베풀었고, 1161년에 경북산(京北山) 대흥사(大興寺)에 주지하면서 재물을 내어 중수 영선(重修營繕)하고 총림회(叢林會)는 혜조 국사(慧照國師)가 당 나라에서 전해온 좌선상궤(坐禪像軌) 배발(俳鉢) 등사에 따르고 낙성했다.

 

  1173년에 법령에 따라 명봉사 주지로서 총림법회(叢林法會)했고, 1165년에 전주 안국사(安國寺)에서 50일 담선회를 열었다. 보주(甫州, 現 醴泉)의 두천원(頭川院)은 곧 동남지방 사람들의 내왕이 잦은 길목인데, 집이 무너지고 풀이 우거졌다. 이에 1179년에 용문사의 자엄 대사(資嚴大師)와 더불어 재목과 기와를 준비해서 중수하고 겨울과 여름마다 설시했다. 또 1163-1164년 사이에 남방에 도적이 크게 일어났다. 이에 1만 승재(一萬僧齋)를 열어 적난(賊難)을 구제했었다. 대사는 어려서부터 깔끔하고 티끌세상을 벗어난 듯한 모습에 학식이 해박하고 고도탁행(高道卓行)은 총림(叢林)의 모범이 되니, 사람들이 태산북두(泰山北斗)로 우러르고 발 길 머무르는 곳마다 대사에게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수풀을 이루었으며, 그들을 순순히 잘 깨우쳐 주되 조금도 권태로운 얼굴빛을 나타내지 않았고, 늙도록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었으니 그 서인(庶人)들에게 불법을 전하고 나라의 복리를 위했음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다. 자엄 선사는 선사(善士)이다. 자엄 선사가 손수 삭발하고 일찍 깨우쳐서 성명(成名)하고 명리(名利)를 싫어하며 홍진(紅塵)을 벗어나 명산대천(名山大川)을 두루 노닐며 성정(性情)에 맞게 삼상한 즐거움에 젓고 신고(辛苦)하고 간난(艱難)한 일을 꺼려서 피하지 아니하며 늘 마음을 새롭게 다졌다. 대체로 두운(杜雲)은 성승(聖僧)이요, 조응(祖膺)은 현덕(賢德)이니 만약에 여기 용문에 성인이 복거하지 아니했다면 산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숲이 되었을 뿐인데, 천안(天眼)으로 왕기(王氣)가 밀호(密護)하여 성주(聖主)께서 이 곳에 납시어 환란을 평정할 계책을 얻었고, 명류(名流)가 여기 있어 가꾸었도다. 만약에 조응 대선사가 허물어진 옛 터전을 새롭게 가꾸지 아니 했던들 담장은 무너지고 주초(柱礎)는 부서져 수풀 속에 묻혀버렸을 것인데. 구산(九山)의 스님들로 하여금 여기 머물며 새벽에 향불 피우고 저녁에 등을 밝혀 국조(國祚)가 무궁하기를 축원한 것이 참으로 오랜 세월이었다. 이에 이 절을 개창한 때로부터 중수하고 영선하면서 나타난 이적(異蹟)들이 가뭇없이 사라져 버릴까봐 오래도록 전해지게 하고자 그 시말(始末)을 함께 갖추어 여기 적는다. 1185년 4월에 보제사(普濟寺) 주지(住持) 성인 선사(性印禪師) 신(臣) 연의(淵懿)는 왕명을 받들어 글씨를 썼다.(醴泉의 金石文 2003)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 [記事] : 시대   고려 / 연대   1185년(명종15년)  / 유형/재질   비문 / 돌  / 문화재지정   비지정  / 크기   높이 197cm, 너비 78.8cm, 글자크기 1.8cm / 출토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용문사  / 소재지   (한국)-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용문사 / 서체   행서(行書) / 찬자/서자/각자 이지명(李知命) / 연의(淵懿) / 곡석(斛錫)  / 경상북도 예천(醴泉)에 있는 용문사(龍門寺)의 연혁과 중수사실을 기록한 비. 국왕의 명령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이지명(李知命 : 1127~1191)이 짓고 승려인 연의(淵懿)가 글씨를 썼다. 이 글에 의하면 용문사는 본래 신라 말에 두운(杜雲)선사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고려 중기까지 그 문도들이 계속하여 주석하였다. 1165년(의종 19)에 당시 주지이던 조응(祖應) 선사가 사찰을 중수하고자 하여 제자인 자엄(資嚴)에게 일을 담당하게 하여 1179년(명종 9)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조응은 해주 출신으로 조계종 승과에 합격한 후 여러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사재를 털어 음죽현(陰竹縣)의 흑석원(黑石院)과 보주(甫州)의 두천원(頭川院)을 중수하는 등 사찰의 중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고려중기 용문사의 현황 뿐 아니라 담선법회와 당시 선종계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앞면의 본문은 1185년(명종 15)에 새겨졌으며 뒷면의 음기에는 1188년(명종 18)에 기록한 조응선사 제자들의 명단이 있다. 현재 용문사에 비석이 남아 있는데 중간 부분이 잘리어 일부의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 / (논문)김복영, 1996, 「금당실 가는 길」『安東文化硏究』10, 안동문화연구회/ (단행본)정재훈, 1996, 『문화의 산길 들길; 우리 문화유적 바라보기』, 화산문화/ (단행본)권영한, 1996, 『한국사찰의 주련 I』, 전원문화사/ (단행본)사찰문화연구원 편, 1995, 『인천․경기도의 전통사찰-전통사찰총서 5-』, 사찰문화연구원/ (단행본)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下, 亞細亞文化社/ (단행본)趙東元, 1979, 『韓國金石文大系』3-慶尙北道篇-, 圓光大出版局/ (단행본)朝鮮總督府 編, 1976, 『朝鮮金石總覽』上, 亞細亞文化社/ (단행본)劉燕庭, 1976, 『海東金石苑』上, 亞細亞文化社/ (논문)文明大, 1967, 「龍門寺 一浮屠의 舍利裝置」『考古美術』85호 8-8(韓國金石文綜合映像情報시스템 2007)

 

  용문사중수비 [記事] : 유교관련도서/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龍門寺 重修碑/ ...B202_0027.jpg 용문사를 중수하고 세운 비석의 글/ 조산대부 좌산기 상시 보문각 학사 한림학사 지제고로 ...(韓國國學振興院 ugo.net 2008)

 

  용문사중수비 :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龍門寺 重修碑/ ...B202_0027.jpg용문사를 중수하고 세운 비석의 글조산대부 좌산기 상시 보문각 학사 한림학사 지제고로 .../ 예천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관련도서이다.//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 : 구분: 고려/ 작성자: 이지명(李知命)/ 날짜: 1185년(명종15년)/ 분류: 금석문자료 > 고려/ 제공: 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 시대 고려/ 연대 1185년(명종15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97cm, 너비 78.8cm, 글자크기 1.8cm/ 출토지 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용문사/ 소재지 (한국)-경상북도 예천군 용문면 내지동 용문사/ 서체 행서(行書)/ 찬자/서자/각자  이지명(李知命) / 연의(淵懿) / 곡석(斛錫)/ 경상북도 예천(醴泉)에 있는 용문사(龍門寺)의 연혁과 중수사실을 기록한 비. 국왕의 명령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이지명(李知命 : 1127~1191)이 짓고 승려인 연의(淵懿)가 글씨를 썼다. 이 글에 의하면 용문사는 본래 신라 말에 두운(杜雲)선사에 의해 건립되었으며 고려 중기까지 그 문도들이 계속하여 주석하였다. 1165년(의종 19)에 당시 주지이던 조응(祖應) 선사가 사찰을 중수하고자 하여 제자인 자엄(資嚴)에게 일을 담당하게 하여 1179년(명종 9)에 공사를 완료하였다. 조응은 해주 출신으로 조계종 승과에 합격한 후 여러 사찰의 주지를 역임하였으며, 사재를 털어 음죽현(陰竹縣)의 흑석원(黑石院)과 보주(甫州)의 두천원(頭川院)을 중수하는 등 사찰의 중수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고려중기 용문사의 현황 뿐 아니라 담선법회와 당시 선종계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앞면의 본문은 1185년(명종 15)에 새겨졌으며 뒷면의 음기에는 1188년(명종 18)에 기록한 조응선사 제자들의 명단이 있다. 현재 용문사에 비석이 남아 있는데 중간 부분이 잘리어 일부의 글자는 판독이 불가능하다./ (논문)김복영, 1996, 「금당실 가는 길」『安東文化硏究』10, 안동문화연구회/ (단행본)정재훈, 1996, 『문화의 산길 들길; 우리 문화유적 바라보기』, 화산문화/ (단행본)권영한, 1996, 『한국사찰의 주련 I』, 전원문화사/ (단행본)사찰문화연구원 편, 1995, 『인천·경기도의 전통사찰-전통사찰총서 5-』, 사찰문화연구원/ (단행본)許興植, 1984, 『韓國金石全文』中世下, 亞細亞文化社/ (단행본)趙東元, 1979, 『韓國金石文大系』3-慶尙北道篇-, 圓光大出版局/ (단행본)朝鮮總督府 編, 1976, 『朝鮮金石總覽』上, 亞細亞文化社/ (단행본)劉燕庭, 1976, 『海東金石苑』上, 亞細亞文化社/ (논문)文明大, 1967, 「龍門寺 一浮屠의 舍利裝置」『考古美術』85호 8-8//

 

  용문사 천불탱(龍門寺 千佛幀, 道文化財 349號 指定) [記事] :  18세기 불교 신앙 체계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는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의 `천불탱'이 2003년 4월 14일자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349호로 지정됐다. 1709년도에 제작된 용문사 천불탱은 세로 168cm, 가로 234cm 크기에 비단에 채색된 불화로 천 개의 불상을 한 폭에 그려졌으며 현존 천불탱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가운데 전북 고창의 선운사 천불탱(1754년)과 더불어 다불사상에 따라 조성된 조선시대 불화다. 용문사 천불탱은 18세기 초 불교 신앙 체계의 한 단면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천불탱의 도상과 형식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醴泉新聞 2003-04-17 14:26:37)

 

  용문사 천불탱(자료=예천군) | 예천신문 | 2010.04.03. 10:12/ 용문사 천불탱(유형문화재 제349호 2003.04.14 지정)/ 소재지 : 예천군 용문면 내지리 391 290/ 소유자 : 용문사 (관리자:용문사)/ 자세한 설명 : 용문사 소장 천불탱(1709년)은 168×234㎝ 크기의 비단에 채색된 불화로 천개의 불상을 한 폭에 그렸으며 현존 천불탱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며 전라북도 고창 선운사의 천불탱(1754년)과 함께 조선시대 작품으로 다불사상에 의거해 조성된 불화이다. 용문사 천불탱은 삼세불이나 오방불과 같은 특정한 여래는 보이지 않고 한 화면 가득 일렬로 앉아 있는 여래가 채워져 천명의 존상을 이루고 하단과 상단은 구름을 그려 천상세계를 표현한 것으로 주지 두잠, 희인, 희욱, 대규, 혜학 등 많은 승려와 시주자의 참여로 제작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제작된 보물 1330호 용문사 팔상탱의 화기에도 등장하고 있어 18세기 초 불교신앙체계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것으로 도상과 형식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daum 2010)

 

  용문사 태봉 : 徐鼎修,以觀象監言啓曰,醴泉胎峯看審/ 상위서지: 승정원일기 정조 07년/ 날짜: 1783-08-16(음)/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편년류(編年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정조 7년 8월 16일 (을해) 원본1539책/탈초본83책 (17/30)  1783년 乾隆(淸/高宗) 48년/ ○ 徐鼎修, 以觀象監言啓曰, 醴泉胎峯看審事, 發送相地官李命求矣。卽者李命求, 看審後還來, 以爲醴泉龍門寺後胎峯置標, 子坐午向處看審, 則自太白山爲小白山, 爲龍門山, 主山秀壯, 局勢完固, 峯穴端的, 兩水合吉。正合胎峯, 壽考聰明之地, 前後左右數百步之內, 無一相?之端, 故圖形以來, 而本監謄錄, 則以子坐午向載之, 今番看審, 則子坐午向, 非但局勢之偏右, 亦不協於陰陽家, 以壬坐丙向看之, 則局勢平正, 陰陽亦吉, 然以愚迷所見, 獨斷有所不敢, 前稷山縣監柳東亨所居相近, 故招與相議, 則亦以爲子坐不合, 壬坐最吉云, 而年運則子坐壬坐, 皆得吉利云。今此龍門寺後胎峯, 聽其山論, 參以圖形, 則實有勝於前日擬入之望, 而坐向則本監謄錄, 雖以子坐午向置簿, 李命求․柳東亨之言, 旣皆以壬坐爲吉云, 以龍門山胎峯壬坐丙向, 改望以入, 何如? 傳曰, 以此處定之, 日子卽爲擇入。//

 

  용문사 팔상도 : →용문사 팔상탱

 

  용문사 팔상탱(龍門寺八相幀), 용문사팔상도(龍門寺八相圖) [文化財]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 경내에 있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극적인 장면을 그린 불화로, 보물 제1330호(2001.10.22)이다. 사찰의 팔상전이나 영산전(靈山殿)에 봉안하며, 팔상탱(八相幀), 팔상성도(八相聖圖)라고도 한다. 이는 조선시대 불교 회화로, 1709년(숙종 35) 작품인데, 세로 224cm, 가로 180cm로 비단 바탕에 채색된 것이다. 석가모니의 일생에서 중요한 행적을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불전도인데, 중심 주제가 되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과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이 1폭,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과 유성출가상(踰城出家相)이 1폭,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과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 1폭, 녹야전법상(鹿野轉法相)과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이 1폭 등 총 4폭으로 되어 있다. 화면 구성은 조선시대 팔상탱의 시원이 되는 <석보상절>(1447)과 <월인석보>(1568, 희방사판) 변상도에서 좌우 대칭으로 표현되었던 팔상이 상하로 바꾸어 구성되었고, 조선 후기 팔상탱의 일반적인 구성은 상하 구조이나 용문사 팔상탱은 가로로 구성되던 내용이 세로로 전환하는 과정을 보여준 불교미술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첫 번째 그림 도솔래의상은 탄생을 위하여 도솔천을 떠나 흰 코끼리를 타고 북인도의 카필라 왕궁을 향하고 있는 모습이다. 두 번째 그림 미람강생상은 마야(摩耶) 부인이 산달을 맞아 친정으로 가던 도중 산기가 있어 룸비니 동산으로 가서 부처를 낳는 모습이다. 부처는 부인의 오른쪽 옆구리로 출생하였다. 세 번째 그림 사문유관상은 부처가 도성의 성문으로 나가 노인과 병자, 죽어 실려 나가는 시체를 보고 북문에서 출가하는 사문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는 그림이다. 네 번째 유성출가상은 29세 되던 해에 사랑하는 처자와 왕위를 계승할 태자의 자리를 버리고 성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이다. 다섯 번째 설산수도상은 6년 동안 갖은 고행을 겪으며 스승을 찾아다니다가 스승은 밖에 있지 않고 자기 안에 있음을 깨달아 부다가야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들어가는 모습이다. 여섯 번째 수하항마상은 선정에 들어가 갈등이 심하지만 수행이 자신과의 투쟁임을 깨닫고 용맹 정진하여 마침내 마귀의 항복을 받고 대오 각성의 경지에 드는 모습이다. 일곱 번째 녹야전법상은 대오각성한 석가모니가 그 곳에서 500리쯤 떨어진 녹야원으로 가서 처음으로 5명의 수행자에게 설법하여 그들을 귀의시키는 모습이다. 여덟 번째 쌍림열반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법을 전한 후 제행무상(諸行無常)과 용맹 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사라쌍수 아래서 열반에 드는 모습이다. 화폭마다 제목을 적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 것이 이 불화의 특징이다. 부처가 도솔천에서 내려오는 도설래의상, 룸비니동산에서 탄생하는 비람강생상, 사문에 나가 세상을 보는 사문유관상, 성을 넘어 출가하는 유성출가상, 설산에서 수도하는 설산수도상, 보리수 아래에서 마귀의 항복을 받는 수하항마상, 녹야원에서 첫 설교를 하는 녹원전법상,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쌍림열반상의 여덟 장면인데, 8폭으로 구성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한 폭에 2개씩 묶어 모시기도 한다. 옛날 불화 중 현존하는 팔상도는 그리 많지 않으나, 경기도 용문사와 경북 예천의 용문사, 승주 송광사, 하동 쌍계사 등에는 18세기 초의 팔상도가 보존되어 있다.(醴泉新聞 2001.10.25, Lycos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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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노인전문요양원, 전국장기요양기관 평가에서 우수상...축하합니다.

 

  예천노인전문요양원(醴泉老人專門療養院, 入所人家族 招請 興겨운 '孝 잔치 行事' 가져) [記事] : 예천노인전문요양원(원장 신규원)은 2014년 5월 10일 입소 어르신 및 보호자 가족, 지역주민을 초청하여 사회적 소외감 방지와 상실감을 해소할 수 있는 소중하고 즐거운 한마당 잔치인 “효 잔치와 보호자 간담회”를 실시했다. 이날 보호자 간담회에서 어르신들의 현 생활 상황을 설명하고, 2014년도 전반기 사업과 프로그램 및 개별사례관리에 대한 안내와 질 높은 서비스제공을 위한 의견을 교환했으며, 특히 보호자들은 2013년도 전국장기요양기관 평가에서 예천노인전문요양원, 예천노인요양원이 ‘우수상’을 5월 22일 받게 되는 것에 대해 흡족해 하며, 부모님들께 보다나은 서비스 제공을 부탁드렸다. 신규원 원장은 어르신 가족과, 지역 주민을 초청 하여 식사 대접과 효 잔치를 베풀게 되어 무척 기쁘고,  많은 도움을 준 봉사단체(민들레 공연단, 이서현 국악 연구원, 예천제일적십자, 경도대학사회복지과 학생 등)와 후원 해주신(새마을중앙회 예천지회, 농협주부대학, 예천군지역사회복지협의체, 유천면장, 예천농협유천지점장, 대지식품, 창성식품, 보호자 등)분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점심식사 후 2부 행사로 상반기 우수 직원포상에 이어, 민들레 공연단(단장 박윤우)과 이서현 국악 연구원의 멋진 무용 공연, 국악, 노래자랑 등으로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끝으로 가족사진 촬영 세트장에서 가족간 추억의 사진을 찍어 즉석에서 뽑아 넣어 드렸으며, 하이라이트로 직원들이 준비한 댄스곡으로 웃음을 자아냈다.(醴泉인터넷放送 2014-05-11 오후 12:3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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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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