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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643) : 예천8경 중 용문사(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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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용문사 윤장대(까막눈도 깨달을 수 있어요 : 글을 알든 모르든 ꡐ깨달음ꡑ은 열려 있다. ...못 배운 이들은 輪藏臺 돌려 經典 功德 쌓게 해) [記事] : ...까막눈 중생들도 깨달음의 길에 이를 수 있도록 남을 배려하는 마음을 잘 나타낸 곳이 예천 용문사 윤장대이다. 대장전 내부 양쪽에 자리한 윤장대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모든 중생이 함께 깨달음의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윤장(輪藏)은 전륜장(轉輪藏)의 준말로 경전을 담은 서가의 중심에 돌아가는 기둥을 세워서 8면의 서가를 돌리면 그 안에 들어 있는 경전을 모조리 다 읽은 공덕이 있다고 한다. 경전을 몰라도 윤장대를 지극정성으로 한번 돌리면 그 내부에 있는 모든 경을 한 번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운 공덕이 있으니 3 바퀴만 돌려도 까막눈이 지혜를 가진 자보다 더 많은 책을 읽은 공덕을 지을 수 있다고 하니 참으로 해학적이고 멋진 발상의 배려하는 마음이다. 내부에 모신 경전을 부처님과 동일시하여 정성스럽고 화려하게 부처님 말씀의 집을 만들었다. 연잎으로 난간을 두르고 8각 문에는 화려한 꽃살문을 달았으며 지붕은 닫집과 같이 천상의 누각을 옮겨 놓은 듯 공포가 아름답고 짜임새 있다. 글을 배우지 못한 촌로들을 위하여 한량없고 끝없는 공덕을 성취하게 하려는 배려의 마음이 곧 부처님의 마음이다. 더불어 살아가라는 부처님의 말씀을 눈으로 보여주는 윤장대야 말로 오늘을 살아가는 중생들에게 커다란 가르침으로 전해진다...(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불교신문 2465호/ 10월8일자/ 2008-10-04 오전 11:04:46 / 송고)
예천용문사 윤장대(醴泉 龍門寺의 輪藏臺) [記事] : 묵은 해 업장을 씻고 새해 업장 예방할까? ꡒ내가 사랑한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ꡓ라는 구절을 지닌 시가 있다. 대학 시절 즐겨 읽던 시인의 1994년 소월시문학상 수상작. ꡒ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ꡓ 정공법으로 게워내는 고해들은 하나의 ꡒ뼈아픈 후회ꡓ를 향해 질주한다. ꡒ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해 본 적 없다는 거.ꡓ 사랑은 도덕적 우월감이나 자기 연민에서 나온 상스러운 감정에 불과했다는 반성이다. 아무리 멀끔하게 차려 입어도 천박한 본성을 감추지 못하는 이기심. 민폐를 끼치고 자폭을 부르는 이기심. 한해를 마무리하는 연말이다. 연재의 마지막을 예천 용문사로 택한 이유는 윤장대(輪藏臺)가 있기 때문이다. 묵은해의 업장을 매립하고 새해의 업장을 예방하기 위해서. 윤장대는 사찰에서 경전을 담아두는 책장으로 쓰이던 물건이다. 장(藏)은 경율론(經律論) 삼장(三藏), 불교의 전적류를 총칭하는 말이다. 그리고 윤(輪). 윤장대의 두드러진 특징은 돌릴 수 있는 책장이라는 것이다. 예천 용문사의 윤장대는 보물 제684호다. 문화재로서의 윤장대는 이것뿐이다. 고려 명종 7년(1177) 왕명으로 대장전(大藏殿)을 지으면서 같이 만들어 넣어뒀다. 현존하는 유물이 그때 것인지 아니면 조선 현종 11년(1670) 대장전을 새로 단장하면서 다시 만든 것인지 확실치 않다. 여하튼 아무리 짧게 잡아도 300년이다. 전국을 뒤져도 이만한 나이를 지닌 윤장대는 없다. 인간은 업장을 씻기 위해 윤회한다고들 한다. 옛 사람들은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소원을 성취하고 업장을 소멸해 부처의 행복을 누리리란 믿음. 결국 윤장대의 돎과 윤회의 돎, 운동적 유사성에서 착안해 만들어진 신화로 보인다. 더구나 남의 나라의 복잡한 글말인 한문이 사회를 장악하던 시대다. 대부분이 문맹인 중생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누군가 선의의 거짓말을 만들어 유포했으리란 짐작. 용문사의 윤장대는 대장전 불단을 중심으로 2기가 나란히 설치됐다. 좌측(동편) 것의 문은 빗살문, 우측(서편)은 화문(花紋)으로 새겼다. 일원주(一圓柱)를 축으로 해서 팔각정 모양으로 제작했다. 지붕 끝은 건물 천장에 연결하고 밑동은 팽이모양으로 뾰족하게 깎아 잘 돌아갈 수 있게 했다. 실용적이면서도 고풍스럽다. 현대의 가구에 응용해도 괜찮을 법한 체(體)와 용(用)이다. 야무지게 깎고 엮어 고관대작에게 팔면 제법 수지맞은 목공예 제품이 될 성싶다. 윤장대는 도내의 명물이다. 윤장대를 돌리면 불보살의 가피를 얻을 수 있다는 신화는 여전히 유효하다. 내방객이 용문사를 찾으면 십중팔구 윤장대의 위치를 물어보고 대장전에 들어가 힐끔거린다. 밑져야 본전이니 한번 만져나 보자는 싸구려 신앙. 훼손 우려 탓에 절에서는 윤장대의 손잡이에 자물쇠를 채웠다. 1년에 두 번, 삼짇날(음력 3월3일)과 중양절(음력 9월9일)에만 체험을 허락한다. 제비가 나타나고 사라지는 날들로 양기(陽氣)의 생멸을 기리는 절기다. 아무 때나 돌릴 수 있는 줄 알고 무작정 들렀다가 낭패를 봤다면, 사찰 한편의 성보유물관으로 들어가면 된다. 모조품을 만들어 놨다. 병든 마음이 일어나 사진을 찍던 손을 자꾸 윤장대 쪽으로 잡아당긴다. 억지로라도 돌려볼까, 싶다. 발을 움직일 때마다 요란하게 앓는 소리를 내는 대장전 바닥에서 묵직한 흉조를 느꼈다. 복을 쥐기는커녕 괜히 수갑이나 차지 않을까 싶어 관뒀다.
인간은 업장을 씻기 위해 윤회한다고들 한다. 옛 사람들은 윤장대를 돌리면 경전을 읽는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여겼다. 소원을 성취하고 업장을 소멸해 부처의 행복을 누리리란 믿음. … 대부분이 문맹인 중생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할 수 있도록, 누군가 선의의 거짓말을 만들어 유포했으리란 짐작. 직지사의 말사인 용문사(龍門士)는 예천군 중심에서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소백산 기슭에 자리했다. 신라 경문왕 10년(870) 두운(杜雲) 대사가 개창했다. 두운 스님이 범일(梵日) 스님과 함께 입당구법(入唐求法)했다가 귀국한 뒤, 용문산 기슭에 풀을 엮어 암자를 마련해 산 것이 시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유난히 아꼈다. 남벌(南伐)에 나선 왕건은 평소 두운 대사의 명성을 익히 알고 있었다. 조언과 격려를 들을 요량으로 용문사로 발길을 틀었다. 행차가 동구에 이르렀을 때 별안간 용 한 마리가 나타나 어가(御駕)를 반겼다. 신이(神異)를 높이 산 왕건은 산 이름을 용문산, 절 이름을 용문사라고 바꿨다. 그리곤 두운과 함께 후일을 약속했다고 전한다. 왕건은 삼국을 통일한 그 해(936) 용문사의 대대적인 중창을 지시했다. 아울러 관할 주현에 매년 150석의 조세를 절에 바치도록 조치했다. 모르긴 해도 스님에게서 상당한 은덕을 입은 것 같다. 출정 길에 벼락같이 나타난 용은 스님의 군사적 혹은 정치적 조력을 에둘러 표현한 상징으로 풀이된다. 도반인 범일 스님이 구산선문의 하나인 사굴산문의 개창자였다는 점이, 만만치 않았을 스님의 위세를 뒷받침한다. 물론 용은 탁월한 지세로 읽어도 괜찮다. 명종은 1171년 용문사에서 자신의 즉위와 원자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한 법회를 크게 열었다. 도량의 남쪽에 9층의 청석탑(靑石塔)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했다. 5명의 스님이 낮에는 <금강명경>을 읽고 밤에는 염불을 했다. 대작불사에는 안동의 10개 사찰 등에서 거둬들인 조 700석이 들었다. 무엇보다 사찰은 원자의 태(胎)를 일주문 밖에 묻는 영광을 얻었다. 국가의 안위를 좌지우지할 길지. 용문사를 바라보던 왕조의 미더운 시선을 엿볼 수 있다. 윤장대는 지나간 시절의 서가다. 곧 사찰이 경학과 연관이 깊었음을 시사한다. 일제강점기만 해도 용문사는 ꡐ영남제일강원ꡑ으로 이름을 날렸다. 명종 3년(1173) 중창불사를 완공한 뒤 절에서는 학인 500인을 모아 50일간 담선회(談禪會)를 열었다. 산청 단속사(斷俗寺)에서 효순 선사(孝淳禪師)를 초청해 <전등록>과 <능엄경>을 가르치게 했다. 강(講)과 선(禪)이 함께 성하던 희유한 도량이었던 셈이다. 윤장대가 조성된 시기에 즈음한다. 근대 한국불교 의식집 <석문의범>의 저자 안진호 스님과 직지사 전 조실 관응 스님이 후학들을 가르친 가람이다. ꡒ용문사에서 강(講)을 들은 이력이 없다면 직지사 주지는 꿈도 꾸지 말라ꡓ는 채근이 전승되는 곳이다. 주지 청안 스님은 휴대폰이 생활필수품으로 등극하던 시절, ꡒ또 다른 세상을 만날 땐 잠시 꺼두셔도 좋습니다.ꡓ란 카피로 평 광고의 주인공이다. 스님은 안동의 유서 깊은 유교문화권, 소백산의 청명한 자연환경을 접목한 신개념의 템플스테이를 추진하겠다는 계획이다.
업장(業障). 말과 몸, 마음으로 지은 죄들의 흙탕. 내가 나를 위해 사는 건 어쩌면 순리다. 모든 생명은 홀몸으로 태어나고 몸 하나에 목숨은 하나뿐이니까. 결국 살려면 다퉈야 하고 잘 살려면 이겨야 하는 게 홀몸들의 운명이다. 윤리와 종교가 조정에 나섰지만 성과는 알다시피 지지부진한 편이다. 시인은 다른 시편에서도 ꡒ삶은 얼마간의 굴욕을 지불해야 건널 수 있는 길ꡓ이라고 씁쓸한 진단을 내렸다. 비단 굴욕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판돈은 아니다. 학대와 모략의 기억을 가지지 않은 자는 인생을 논할 자격이 없다. 나를 살리는 것이든 나를 죽이는 것이든, 더러운 ꡐ내ꡑ가 만든다. 그러나 양심의 가책, 인간이 자연에게 거둔 유일한 1승이다. 사람이라면, 질투심으로 쌓아올린 자아를 죄책감으로 허물어뜨릴 날을 한번쯤은 만난다. 사람의 세상에서 제 몫을 찢고 가르고 나눠본 경험이 있다면. 겨울날 맨몸으로 벌서고 있는 나무들, 어서 이리로 오라고 난리다.(장영섭 記者 佛敎新聞 2488호/ 12월27일자, 2008-12-24 오전 11:07:04 / 送稿)
예천용문사 자운루('護國 痕迹이 또렷한 龍門寺 慈雲樓' : 壬辰倭亂 때 倡義한 僧兵 支援 軍用 신발 만들어) [記事] : 용문사에는 윤장대를 비롯 소중한 문화재가 많지만 임진왜란 때 창의한 승병들을 지원하기 위해 군용신발을 만들어 조달한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건물 자운루(慈雲樓) 또한 빼놓을 수 없는 문화재다. 자운루는 사천왕이 있는 회전문을 지나 법고와 목어가 있는 해운루 오른쪽에 있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2층 건물로서 맞배지붕으로 된 모두 30칸의 우람한 건물이다. 윤장대와는 20m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있다. 용문사 사적기에 의하면 자운루는 고려 의종(毅宗) 20년(1166)에 처음 지어졌고 조선시대에 2차례 고쳤으며, 1979년에 다시 해체 수리 복원하였지만 건물의 구조와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건축물이다. 임진왜란(1592) 때 승병의 신발을 만들기 위해 걸었던 노끈 줄을 당겼던 무수한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는 건물이다. 막돌로 쌓은 기단 위에 바위에 가까운 자연석으로 덤벙주초를 놓고 밖에는 둥근 기둥을 세우고 가운데는 다듬지 않은 자연목으로 기둥을 놓아 더욱 튼튼하고 멋스러움을 느끼게 한다. 아래층과 윗층의 기둥은 따로 되어 있다. 아래층 기둥 위에 다듬은 목재를 교묘하게 짜 맞추어 마루구들을 놓고 15칸 넓이의 공간에 우물마루를 깔았다. 다시 아래층 기둥 위에 10척 높이의 기둥을 세우고 시원스런 공간의 2층을 만들었다. 천정은 기둥에 대들보를 얹고, 대들보 위에는 아기기둥을 세우고 종마루를 얹었으며 종마루 위에 자치미를 얹고 상량보를 얹은 단순하고 시원스런 구조이다. 단순한 구조라고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8개의 대들보는 단청을 했지만 노끈을 걸고 당긴 자국들이 수없이 많이 보인다. 임진란 때 승병과 의병들의 신발을 조달하던 흔적이다. 또한 이곳은 승병들의 회의 장소였고 지휘소였으며 불사시에는 법공양 장소로 쓰였다. 용마루는 직선인 듯하나 끄트머리를 슬쩍 반전시킨 맞배지붕의 장식성이 없는 익공계 박공지붕의 우람한 목조건물을 보면서 겨레의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겨레의 7년 대환란이라는 임진왜란! 왜병들은 둔두배이고개(두인고개)와 벌재를 넘어 단양에 이르러 남한강을 따라 쉽게 한양으로 가는 길이 있었지만, 용문사에 본부를 둔 두인과 동로지구 의병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이곳을 넘지 못하고 왜병은 문경새재를 넘어갈 수밖에 없었으며, 결국 충주의 탄금대에서 신립 장군이 이끄는 관군은 패퇴하고 신립 장군도 전사하고 말았다. 용문사에 지휘소를 둔 승병과 의병으로 인하여 왜병들은 벌재를 넘지는 못했던 것이다. 5천년 고난의 역사를 슬기롭게 이겨내며 빛나는 문화를 창조한 우리 겨레. 우리 겨레는 종교의 신심은 깊었지만 신심보다 앞서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나라사랑의 마음이었다. 겨레의 가슴에 맥맥히 흐르는 애국심, 그것은 5천년의 역사를 꿋꿋이 이어온 보이지 않는 힘이었다. 다른 종교와의 갈등도 심하지 않았으며 더욱이 종교전쟁은 있을 수도 없었다. 종교에서는 민간신앙까지 수용하는 자세를 보였다. 절집의 산신각과 삼성각 등이 그 증거이다. 보다 큰 목적을 위해서 작은 것을 용납하고 수용하는 자세가 있었다. 애국에는 모두가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가마솥의 원리이다. 먹거리가 가마솥에서 다 우러나고 퍼져 한 가지 음식이 되는 것처럼 하나의 힘이 되었던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3․1운동과 국채보상운동이다. 기독교 불교 도교와 각계의 대표가 하나가 되어 민족의 독립을 선언한 것이 어느 나라 역사에 있었는가. 종교를 초월하여 온 나라가 하나가 된 위대한 역사이다.(醴泉新聞 2007년 07월 05일 17:39:08)
예천용문사중수비(醴泉龍門寺重修碑) [碑] : 1185년(고려 명종 15)에 예천 용문사에 세워진 비로, “대선사 조응이 을사년에 조계선에 합격하였다.(大禪師祖膺乙巳年曹溪選中格)"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의 을사년은 1125년(인종 3)이며, 조계선은 승선(僧選 : 僧科)를 말한다. 그리고 1125년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출생하기 33년 전이므로, 이를 통하여 조계종이 지눌 이전에 이미 성립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chang256.new21.net 2003)
예천용문사 중수비(醴泉龍門寺 重修碑) [碑] :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용문사 경내 회전문(回轉門) 앞에 있는 비로, 비신은 가로 92cm, 세로 9cm, 높이 170cm, 비좌는 가로 141cm, 세로 61cm, 높이 62cm, 자경 9x9cm이다. 비신 둘레에 인동당초문양대를 사방에 둘렀다. 비의 앞면 상부에는 ‘重修龍門寺記’라고 음각되어 있고, 뒷면에는 용문사의 사법제자(嗣法弟子) 21명과 집사제자(執事弟子) 2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말미(末尾)에 ‘大定二十五年乙巳四月日’(1185)이라고 음각되었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예천용문사 중수비(醴泉龍門寺 重修碑) [碑] :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용문사 경내 회전문(回轉門) 앞에 있는 비로, 비신은 가로 92cm, 세로 9cm, 높이 170cm, 비좌는 가로 141cm, 세로 61cm, 높이 62cm, 자경 9x9cm이다. 비신 둘레에 인동당초문양대를 사방에 둘렀다. 비의 앞면 상부에는 ‘重修龍門寺記’라고 음각되어 있고, 기문에는 조산대부 산기상시 보문각 학사 지제고 사자 금어대신 이지명(朝散大夫散騎常侍寶文閣學士知制誥賜紫金魚大臣李知命)이 짓고, 보제사 주지 성인 선사(普濟寺住持性印禪師)와 연의 선사(淵懿禪師)가 글씨를 쓰고, 승과(僧科)에 오른 과석(科錫)이 글자를 새겼고, 다정사 주지 중대사 충목(茶井寺住持重大師沖黙)과 사수(思秀)가 비석을 세웠다라고 하였다. 뒷면에는 용문사의 사법제자(嗣法弟子) 21명과 집사제자(執事弟子) 24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고, 말미(末尾)에 ‘大定二十五年乙巳四月日’(1185)이라고 음각되었다. 전문 1,300자인 이 비문은 <조선금석총람>에 전재되어 사찰의 역사를 전해오는데, 현재 비석은 일제 중기까지 용문사 경내에 보존되다가 해방과 더불어 행방이 묘연했었는데, 1972년 대장전(大藏殿) 마루 밑에서 두 쪽으로 절단된 채 발견된 것을 1987년 지금의 자리에 복원해 놓았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예천용문사 중수용문사기비(醴泉 龍門寺 重修龍門寺記碑 國家指定文化財 申請 : 慶北道, 聞慶 봉암사 木造阿彌陀佛坐像․복장遺物도) [記事] : '문경 봉암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및 복장유물'과 '예천 용문사 중수용문사기비'가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될 것으로 보인다. 경북도는 최근 문화재위원회를 열어 이들 2건의 도지정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토록 문화재청에 신청키로 했다. 또 '포항 합천이씨 전서공파 소장 유물', '김천 청암사 아미타불회도', '김천 청암사 신중도', '소수박물관 소장 성학십도 판목', '소수박물관 소장 해동명적' 등 5건을 유형문화재로, '김선궁 신도비 및 유허비', '경산 경흥사 소장 수미단 부재', '영양 조검 축천단비' 등 3건을 문화재자료로 각각 지정키로 했다. 이밖에 '송재 이우 초상화', '상주 사서 전식 신도비', '상주 천주교 신앙고백비' 등 3건을 유형문화재 및 문화재자료 지정대상으로 선정했다. 이번에 지정대상으로 선정된 문화유산은 지정예고절차를 거쳐 차기 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이 확정된다.(양승복 記者 慶北日報 2009-08-21)
예천용문사 천불탱(醴泉龍門寺千佛幀) [幀畵]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에서 소장하고 있는 탱화로, 1폭, 16세기 후반 성행하였던 금선묘불화(金線描佛畵)의 전통을 잇고 있는 작품이다. 천 불을 한 폭에 그렸으며, 화기(畵記) 등을 통하여 용문사의 불사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보물로 지정되었다.(인터넷 bulkyoilbo 2001)
예천용문사 코스(全國 달리기코스, 醴泉 龍門寺코스, 登錄日 : 2004-3-18) [인터넷] : 코스 소개 : 1. 예천-경천댐-석항리-명봉사-하리-예천(50Km) LSD코스(6시간) 2. 예천-경천댐-벌재-사인암-저수재-예천(80Km) 울트라코스(12시간), 코스 성격 : 자동차도로, 이용 동호회 : 예천마라톤클럽, 도로 폭 : 6-8m, 코스 상태 : 아스팔트 시멘트, 코스 종류 : 순환, 중간 급수대 : 민가 이용 가능, 개방 시간 : 연중 무휴, 언덕수와 경사 : 2개소 10% 정도, 총길이 : 50km, 코스 게시자: 박중진(www.marathon.pe.kr 2004)
예천용문사 통판투조모란 꽃살문 [무늬] : 용문면 내지리 용문사의 문에 있는 무늬로, 예술로 승화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문은 이 쪽과 저 쪽, 안과 밖, 벽과 벽을 연결하는 고리이다. 불교에서는 문을 신성한 부처와 극락, 사바의 고통을 안고 사는 중생을 나누는 장치요, 중생이 이승의 티끌을 털고 부처의 극락으로 들어가는 경계로 본다. 국립청주박물관에서는 2003년 4월 27일까지 우리 문의 아름다움과 역사성을 담은 ‘관조 스님 사찰 꽃살문 사진전’을 연다. 관조 스님은 부산 범어사에서 수행하며 1977년부터 전국의 사찰과 자연을 사진에 담아왔다.(한겨레新聞 2003.3.20)
예천용문사 팔상도(붓다 一生의 여덟 事件 '八相圖') [記事] : 圓覺道場何處(원각도량하처)/ 現今生死卽是(현금생사즉시)/ 바른 깨달음을 이루는 도량은 어디인가?/ 여기 생사가 있는 바로 이 자리! (해인사 법보전 주련의 글귀)/ 오랜 역사의 숨결을 간직하고 있는 이름난 명산의 명찰이나 고찰이 아니라도 좋다. 그저 그곳에 자리하고 있어 중생들의 삶에 위안을 줄 수만 있다면 그곳이 시끄러운 시장의 한 가운데라도 문제없으리라…./ 그렇다! 우리는 바른 깨달음을 찾기 위해 굳이 깊은 산속의 고찰을 찾지 않아도 된다. 지금 내가 있는 이곳이 바로 세상의 이치를 경험하고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인 것이다. 아마도 그 이상의 장소를 찾아 이곳저곳으로 헤맨다면 그것은 시간을 낭비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촌각을 다투며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깊은 산 속에 있는 사찰보다는 서점에서 마주치게 되는 한 권의 '책'이 오히려 현실적으로 불교라고 하는 종교에 한발 다가서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 불교 세계에 흥미를 가졌거나 혹은 '붓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궁금증을 가진 사람들에게 명쾌하고 간단히 그리고 깊은 흥미를 가지게 하는 한권의 책이 있다. 우리 문화재 속에 숨 쉬는 석가모니 붓다의 이야기를 불상과 불화의 해석을 통해 소개한 <세상은 연꽃 속에>가 그것이다./ 저자 배진달 교수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개의 사건으로 표현한 불화 '팔상도'를 통해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데 그 접근방식이 매우 흥미롭고 간단명료하다. 우선 책의 서두에서 해인사가 있는 가야산과 통도사의 영취산 지명이 마가다국 라자그리하에 있는 가야산과 영취산에서 유래했으며 용연사가 있는 대구의 비슬산은 인도 신화에 내오는 비슈누 신에서 유래했다고 말하면서 우리 땅 곳곳에서 붓다를 느끼고 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고 말한다./ 많은 경우 사찰 외벽에는 붓다의 일생을 그린 '팔상도'가 그려져 있는데 이는 붓다의 탄생과 출가, 성도, 그리고 열반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 대표적인 것이 법주사 팔상전의 가운데 기둥에 그려진 것(국보 55호)과 경북 예천 용문사에 전해져오는 '팔상도'가 있다./ 용문사의 '팔상도'는 조선시대 숙종 35년 1709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지금까지 전해져오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건물이나 복식, 인물들의 이미지가 인도의 그것과는 다른 당시 조선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다./ 저자는 붓다의 일생을 용문사의 '팔상도'를 통해 하나하나 소개하는데 그 문장이나 설명이 매우 쉽게 되어 있어 어린이가 읽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진 붓다의 탄생과 열반의 과정을 '팔상도'의 그림 해석을 곁들여 소개함으로써 이해력을 높이는데 효과적으로 이용하고 있다./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들었던 석가모니 붓다의 이야기가 막연하게 느껴진다면 불교도가 아니라도 '팔상도'를 통해 소개한 붓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된다면 나도 모르는 사이 고개가 아래위로 흔들리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특히 학습을 위해 무작정 외우기만 했던 고집멸도(苦集滅道)의 사제와 팔정도(八正道)에 관한 이야기 역시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기회를 제공하는데 이는 붓다가 깨달음을 이룬 후 처음으로 사슴 동산인 녹야원에서 행한 설법을 그린 '녹원전법상'에서 소개한다./ 소설 <서유기>와 애니메이션 <날아라 슈퍼보드>에 등장하는 '삼장법사'에 관한 이야기도 소개하고 있는데 여기서 '삼장법사'라 함은 붓다가 말씀하신 이야기 즉 경장(經藏), 그리고 계율인 율장(律藏), 붓다의 말씀을 해석하고 풀이한 논장(論藏)에 능통한 스님을 '삼장법사'라고 한다는 이야기를 소개한다./ 이처럼 저자는 불교를 통해 우리 일상생활에 전해진 이야기 혹은 단어를 중심으로 무겁지 않게 불교와 <붓다>를 이야기한다. 특히 도표와 삽화 그리고 사진을 곁들인 해석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우리 문화재와 일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불교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책의 전반부는 석가모니 붓다의 일생을 소개하고 있으며 후반부는 우리가 사찰에서 마주치게 되는 각종 불상과 불화 그리고 탑, 건축물 등을 이야기하는데 이 역시 간결하고 쉬운 표현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우리가 그동안 막연하게 들어왔던 붓다의 일생과 불교의 일반적 특성을 어렵지 않게 가벼운 마음으로 접하길 원한다면 퇴근길 서점에 들러 <세상은 연꽃 속에>를 손에 들어보기를 권한다./ 저자 배진달은 누구? /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하고,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 학예연구사로 재직하였다. 재직 중 대만으로 유학하여 국립대만대학교에서 불교 미술을 공부하였고 홍익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이 때 쓴 논문을 <<당대불교조각>>(일지사, 2003)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다./ 중국 불교 미술과 문화에 관한 2권의 역서를 펴냈으며, <용문석굴 신라상감 시론>(1996)을 시작으로 중국과 한국의 불교 미술에 대한 논문도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최근에 펴낸 <<중국의 불상>>(일지사, 2005)은 한국인이 쓴 최초의 중국 불교 미술 통사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지금은 용인대학교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로 있다.(이인우 記者 오마이뉴스 2006년 3월 8일 (수) 18:03)
예천용문사 팔상탱(醴泉龍門寺 八相幀) [文化財] : 용문면 내지리 391번지 용문사 경내에 있는 조선 숙종 때의 불화(佛畵) 4폭(幅)으로, 국가 보물 1330호(2001.10.25 指定)이다. 용문사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팔상탱화는 석가모니의 일생을 잉태(孕胎)로부터 열반(涅槃)에 이르기까지 여덟 장면으로 나누어 묘사한 그림이다. 이 팔상탱화는 한 폭에 두 장면씩 네 쪽으로 이루어져 있어 형식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제1폭은 석가모니가 도솔천에서 코끼리를 타고 사바세계로 내려오는 장면인 도솔래의상(도率來儀相)과 석가모니가 룸비니공원에서 마야 부인의 옆구리를 통해 출생하는 모습을 그린 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제2폭에는 태자가 성문 밖의 중생들의 고통을 관찰하고 인생무상을 느끼는 장면의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하는 장면을 묘사한 유성축가상(踰城出家相), 제3폭에는 설상(雪山)에서 신선들과 수행하는 모습을 그린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태자가 수행 중 온갖 유혹과 위협을 물리치는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이 그려져 있고, 마지막 폭에는 부처가 녹야원에서 최초로 설법하는 모습을 나타낸 녹원정법상(鹿苑轉法相), 부처가 쌍림수 아래에서 죽음에 이르는 모습을 표현한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으로 구성되어 있다. 황토색 바탕에 붉은 색과 녹청색을 주로 사용하여 주된 장면만을 강조하여 나타낸 비교적 간단한 구성을 하고 있다. 용문사의 팔상탱화는 조선 전기의 도상과 화풍의 흐름을 이은 것으로, 이후 제작된 팔상도 작품과는 차별화된 특징을 지닌 작품이다.(文化財廳 홈페이지 2002. www.ocp.go.kr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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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