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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645) : 예천8경 중 용문사(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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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응향각에는 조선 세조 때 스님들의 잡역을 면제케 해준 교지가 대형 금고 속에 있었는데 이때 이 절에서 공부하고 있던 변진용(당시 20세)이라는 학생은 장정 4명이 목도를 이용해도 억지로 들 수 있는 육중한 금고를 초인적(超人的)인 힘으로 요사채 안방에서 문턱을 넘어 마당까지 굴려 떨어뜨려 귀중한 문화재를 구했다. 특히 응향각을 삼킨 불이 2m 이내에 있는 단하각(丹霞閣)에 접근하자 30여 명의 용문면사무소 직원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불길을 헤쳐 들어가 단하각을 허물어 바로 옆에 있는 대장전(大藏殿)이 화(禍)를 면하였는데 그 안에는 윤장대 1쌍(雙), 목각좌상 및 후불탱화 등 이 절을 상징하는 귀중한 문화재가 있어서 이는 부처님의 음덕(蔭德)과 가호가 있었다고 한다. 대장전 기둥과 벽에는 연꽃, 붕어, 도깨비(鬼面) 등 그림이 있는데, 이들은 물을 상징하는 부적(符籍)으로 화마(火魔)를 막는 역할을 하였다고도 한다. 또한 불이 나기 전인 4월 5일(陰) 주지스님의 꿈에 사천왕상(四天王門) 전면에 5색 연기가 자욱하게 나고 많은 군중이 법당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을 꾸어 잠을 설쳤다고 하며, 4월 7일(陰) 사찰 현장에 근무 중이던 용문면 산업계장은 비몽사몽(非夢似夢) 간 큰 법당 부처가 벌겋게 달아오르는 꿈을 3번이나 되풀이 꾸어 놀라 잠을 깨어 보니 꿈이었으므로 방심하여 부처님의 계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화재(火災)를 막지 못하였다고 매우 안타까워했다. 당시 “용머리를 깼으니 불이 안날 턱이 있겠느냐?”는 소문이 자자하였는데 이는 불이 나기 며칠 전 면(面) 경계지점인 용문면 하금곡리 포장 공사장에서 용머리 바위를 폭약으로 깨트려 용문사(龍門寺)를 지키는 수호신인 용(龍)이 화가 나서 불을 냈다는 말이 지금도 전해온다.(龍門寺홈페이지 2013)
용문사 큰북 : 부처님 앞에서의 거짓말, 용문사(龍門寺)의 큰북에는 다음과 같은 설화(說話)가 있다. 옛날 서울과 부산의 거짓말쟁이가 천하제일의 거짓말쟁이는 자기라고 자찬(自讚)하던 중, 서로의 소식을 듣고 ‘한번 만나서 내기라도 해봐야지’하고 각자 집에서 출발, 산천을 구경하며 예천(醴泉)에 도착했다. 예천이라면 금당 맛질과 용문사를 빼놓고 지나칠 리 없는 두 양반, 용문사를 찾아 하루를 부처님께 신세를 지게 되었다. 오후 시간, 경내(境內)를 구경하던 중 서로의 행색을 살펴보니 시골 촌뜨기는 아닌 지라 통성명(通姓名)을 하게 되었다. 나는 서울 사는 김 아무개요...나는 부산 사는 박 아무개요... 서로 놀라는 눈치였으나 태연한 척 더 이상의 인사가 필요 없었다. 서울 김서방이 먼저. “아, 우리 집 뒤뜰에 오동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놈이 금년에 자란 새순이 너무 커서 꼭대기 가지를 잘라 북을 매려고 하나 그에 마땅한 가죽을 찾지 못했으니 답답한 마음 누가 알겠소”. 이 말을 들은 부산의 박 서방은 김 서방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달포 전에 우리 집 외양간에 있던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마굿간이 조금 비좁아 송아지 꼬리를 쬐끔 잘라서 그 가죽으로 북을 매려니 그만한 통을 짤 나무가 없어 당초 북을 맬 수가 없구려”. 했다나. 그럭저럭 해서 만들어진 북이 용문사의 큰북이었다니… 이 이야기는 용문사 큰북이 얼마나 큰 규모로 만들어졌나를 짐작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이다. 그리고 이 이야기 속의 두 거짓말쟁이에게서 우리는 거짓말이라기보다 부처님 앞에서도 이러한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는 배포와 해학(諧謔) 을 느낄 수 있다. 그렇다고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 그 사람의 얼굴 한번 쳐다보고 한바탕 흐드러지게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진 말이니, 오늘을 사는 우리에겐 신선한 웃음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닌가 싶다.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짓말을 간직한 큰북은 1984년 5월 8일 화재로 불타고, 다시 제작(製作)했으니 그 배포 큰 거짓말도 다 불타 버렸는지 새로 만든 큰북은 옛 전설을 뒤로하며 무더위 속 경내를 소리 없이 지키고 있다.(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예천지부)(龍門面홈페이지 2013)
예천 제일의 고적지 용문사(내 故庄의 遺蹟 醴泉 第一의 古蹟地 龍門寺) [인터넷] : 기고자는 예천읍 백전리 109번지 출신인 백산(栢山) 장병창(張炳昌, 1942- , 中等 校長), 발췌문헌은 <예천문화> 창간호, 출판사는 예천문화원, 출판년도는 1991, 관련페이지는 pp.97~121이다.(adi.andong.net 2003 2004)
예천 제일의 고적지 용문사(醴泉 第一의 古蹟地 龍門寺 : 1985.12.31 張炳昌 作成) [寄稿] : 여름이면 우거진 수목의 푸르름이 찌는 듯한 더위를 잊게 하고, 가을이면 온 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이 시정(詩情)을 돋우며, 흰 눈에 덮인 겨울밤에는 고요를 뚫는 승려들의 목탁소리와 졸졸 흐르는 골짜기의 물소리는 한결 깊은 산의 운치를 더해주는 곳이 용문사(龍門寺)이다./ 이 사찰은 용문면 소재지에서 서북으로 약 8km 지점에 소백산맥의 준령(峻嶺)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서 멀리 국사봉(國師峰)을 바라보면서 전면(前面)에 계곡을 중심으로 청룡등(靑龍嶝)과 백호등(白虎嶝)의 울창한 큰 노목(老木)으로 둘러싸여 있는 용문면 내지동 319번지 용문산(龍門山, 海拔 877m)에 소재하고 있다. 지리적으로 소백산의 영기(靈氣)를 타고나 십훈요(十訓要) 안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풍수지리설에 의해 사찰을 세우라는 내용에도 부합되었던 곳이므로 역대 왕 중에 이곳에 관심을 쓴 분이 많았다. 또한 조선 때 정감록(鄭鑑綠)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에 예천 용문(龍門)이 들어있는 것도 우연의 일치라고는 할 수 없다./ <용문>이라는 지명이 전국에 세 군데 있는데, 그것은 경기 양평군(楊平郡), 경남 밀양군(密陽郡)과 이곳을 헤아린다. 이를 북쪽으로부터 용머리, 용허리, 용꼬리로 사문(寺門)에서 보고 있어 예천 용문이 용의 허리에 해당된다. 허리는 용의 가장 힘쓰는 부분이므로 이곳에 절을 세움으로써 불법(佛法)을 널리 펴 흥성케 할 수 있다고 하여 이룩하였다고 한다. 물론 다른 용문에도 사찰이 건립되어 있다./ 또한 이 용문사는 고려 때 승군(僧軍)을 훈련시키던 전국 5대 규정원(糾正院) 중의 하나였으니 호국 불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는 대도장(大道場)이었다. 더욱이 임진왜란(1592) 때는 승군의 짚신을 삼아 보급한 호국 불교의 대가람이었고,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에서는 많은 고승 석덕(高僧碩德)을 배출하였다. 이곳의 <기일록(忌日錄)>에 의하면 이곳에서 주석(駐錫)하다가 열반(涅槃)한 선사(禪師)들 158명에게 제사를 지내주고 있는데, 서산(西山, 本名 休靜) 대사(大師)를 비롯하여 사명당(四溟堂, 惟政), 와운(臥雲, 信慧), 영파(影波, 聖奎), 영엽(影燁, 豊岩), 허조(虛照, 碧林), 영해(泳海, 龍波), 용파(龍婆, 有鉉), 경암(慶岩, 道暎), 황악(黃岳, 士元), 인담(印譚, 道弼), 필은(弼恩, 善日), 송악(松嶽, 鵬樂), 덕원(德圓, 富悅), 운학(雲鶴, 有宣) 등 근대 고승을 총망라하고 있다./ 또 이곳에서 세 가지 공산품을 만들어 팔아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얻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앞에서 말한 짚신(미투리)과 그 외에 누룩, 딱종이(韓紙)이다. 특히 딱종이는 궁중 진상품이 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용문사는 매우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1900년(光武 4) 5월에 장례원(掌隷院)에서 내린 증서에 의하면, 용문사의 소유지 경계를 말하고 있는데, "용문사는 인빈궁 원당(仁嬪宮願堂)이고, 소헌왕후(昭憲王后)와 문효세자(文孝世子) 서궁 태실(西宮胎室)의 봉안지(奉安地)이기에 사(寺)의 경계가 동으로는 선동(仙洞), 남으로는 명경지(明鏡池), 서로는 도곡(道谷), 북으로는 만경치(晩頃峙)이다." 라고 하였다./ 용문사의 창건과 그 전설들/ 용문사는 870년(統一新羅 景文王 10)에 두운 선사(杜雲禪師)가 당(唐) 나라 유학에서 범일 국사(梵日國師)와 함께 돌아오자마자 오막살이 초옥(草屋) 한 칸을 창건하여 창기사(昌期寺)라 한 것이 그 효시(嚆矢)이다. 그 후 발전하여 고려 건국(918) 때에는 이곳의 모든 건물이 30칸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太祖王建)이 남쪽으로 정벌을 나가는 길에, 앞에 보이는 아담한 절을 가리키며, "오늘은 저 절에서 묵고 가겠다." 라고 하였다. 시종과 비복(婢僕)들이 부랴부랴 노숙(露宿)할 행장을 마련하는 등, 절로 달려가는 등 법석을 떠는데, 왕건이 묻기를, "저 절은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 대체 절의 이름은 무엇이뇨?" 라고 물었으나, 좌우 수행 신하들은 알 길이 없었다. 그 때 주지인 두운 선사가 허둥지둥 달려 나와 반길 사이, 난데없는 뇌성벽력과 폭우가 일어나 모두 놀랐다. 그때 사문(寺門) 밖에 있는 <수림지>라는 연못에서 구름 속처럼 꿈틀대는 무엇이 있었다. 이윽고 비늘이 손바닥 같은 푸른 청룡(靑龍) 두 마리가 서기를 뿜으며 바위(現 一柱門 밖 左臂峰頭) 위에 나타나 태조 면전을 두 바퀴를 돌면서 춤을 추며 환영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말에서 내려 자기를 환영하는 한 쌍의 청룡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여 환대에 답하였다. 그러자 한 쌍의 청룡은 삽시간에 운무(雲霧)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그 자리에 섰던 낡은 사문(寺門)이 하이얀 잿더미로 화하였다. 그래서 태조는 이르기를,/ "이는 짐(朕)의 삼한 통일(三韓統一)을 경축하는 하늘의 계시이니라. 오늘같이 기쁜 날을 맞이하여 이 절 이름(昌期寺)을 용문사로 개칭하라." 라고 <용문산 용문사(龍門山龍門寺)>라 사액(賜額)하였다. 그리고 주현(州縣)에서 받은 조세(租稅)로 매년 공양미(供養米) 150석을 베풀었다./ 또 태조가 신하들에게 묻기를, "국내에서 제일 좋은 여지승람지(輿地勝覽地)가 어디냐?" 라고 하니, 신하들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보주(甫州, 現 醴泉)에 있는 용문사가 우리나라에서 제일 좋은 대가람입니다." 라고 하자, 왕이 이를 인정했다고 하며, 태조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기까지 두운 선사의 자문을 받았다고 한다./ 또, 한 전설에는 신라 경문왕 때 두운 선사가 이 산에 들어갈 때 동구(洞口)의 바위에서 용이 춤을 추며 환영하였다 하여 창건 당시부터 절 이름을 용문사하고 하였다고 한다, 즉, 지금도 용문면 두인동(杜仁洞) 뒷산 국사봉(國師峰) 산골 한 쪽에 '조가집골'이라고 있는데, 이곳에서 두운 선사가 조(粟) 천 석을 경작하였다 하여, 그 골짜기의 이름이 생겼고, 두운 선사가 이 근처에 경치가 좋으니 절을 지으면 후에 성할 것이라 하여 용문사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두운 선사가 절을 지으려고 다래덩굴을 헤치고 입산하니 연못이 있었는데, 거기서 놀던 용이 두운 선사를 보고 환영하여 하늘에 오르지를 않고 지상으로 내려 가다가 현 하금곡동(下金谷洞) 앞에 이르러 승천하였다고 하여 용이 사라진 그 지명을 '용두(龍頭)'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용두바위는 1984년 도로 확장 포장 때 남포에 의해 그 일부분이 깨어졌다./ 또 한 전설에는 두운 선사가 절터를 구하기 위하여 여러 곳을 찾아다니다가 용을 발견했는데, 그곳이 아늑하고 좋아서 절을 지으려 하니, 용이 반대하므로 내기로써 겨루었다고 한다. 즉, 용이 비를 내리니, 두운 선사는 그 비를 하늘로 올려버리고, 또 용이 햇빛을 두운 선사가 있는 곳으로 모으면 선사는 그 빛을 도리어 용이 있는 연못으로 이끌어 들여 물을 끓게 하니, 용은 할 수 없이 용문면 하금곡동 용바위까지 내려와서 승천하였다고 한다./ 용문사의 연혁 : 936년(太祖 19)에 왕명으로 태조가 창건자 두운 선사를 위하여 용문사를 중건(重建)하였다. 그 후 법손(法孫)을 이어 가다가, 영련(英련) 대사까지 이르렀는데, 그는 30여 년 간 주지로 있어서 연로(年老)하여 사임하였다. 그래서 연봉사(延鳳寺) 주지 조응(祖膺) 선사가 대를 잇게 되었다. 그런데 조응 선사 역시 늙고, 연봉사에서 용문사까지 일천 여 리 길을 갈 수 없다고 하여 자기 문제(門弟) 자엄(資嚴) 대사를 용문사의 간사자(幹事者)로 택하여 도조(稻租) 300석을 기부하여 절의 유지비로 쓰도록 했다./ 조응(祖膺) 선사는 본관이 해주로서 삼한벽상공신 사도 삼중대광 최정헌(三韓壁上功臣司徒三重大匡崔貞獻)의 7대손이다. 14세에 혜조 국사(慧照國師)의 제자가 되었고, 1125년(仁宗 3)에 승과(僧科)에 합격하여 7군데 대사찰 주지를 거쳐서 유명하였다. 1165년(毅宗 19)에는 보주(甫州, 現 醴泉)의 두천원(頭川院, 現 龍門面 院流洞 所在, 龍門寺에서 設置한 旅館)에 들렀는데, 이곳은 우리나라 동남 방향으로 왕래가 잦은 요로(要路)인데도, 가옥이 퇴폐(頹廢)하고, 잡초가 무성하여 한탄하던 중 1179년(明宗 9)에 용문사 주지 자엄 대사와 함께 재목과 기와를 중수하고 매년 여름, 겨울철에 건물 정비를 하였다. 1170년(毅宗 24)에 대선사(大禪師)가 되고, 1173년(明宗 3)에 명봉사(鳴鳳寺) 주지로 갔다./ 한편, 자엄 대사는 1165년(毅宗 19)에 용문사 주지로 임명받아 부임하게 되었는데, 조응(祖膺) 대사가 사재(私財)로 시주한 것에 힘을 얻어 도장당(道場堂, 大藏殿) 3칸과 승방(僧房), 주소(廚所), 창고 등 93동(棟)을 짓기 시작했다. 그리고 불반(佛盤), 동반(幢幡), 궤안(机案), 향로, 등홍(燈홍) 등을 수용하고, 부초(釜樵), 동해(東海), 족관(足灌), 분구(盆瞿) 등 아직 준비하지 못한 것을 갖추었다. 그 후부터는 왕명에 의해 지붕을 수리하고 문도 법손(門徒法孫)으로 주지를 계승하기를 끊이지 않았다./ 1171년(明宗 1)에 태자(太子, 後 22代 康宗)의 태(胎)를 일주문(一柱門) 밖 좌비봉두(左臂峰頭)에 묻고 <용문산 창기사(龍門山昌期寺, 或은 作基寺)>라 개칭함과 동시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설치하여 복전으로 승려들의 생활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또한 태자의 태를 용문사 경내에 묻었기 때문에 1172년(명종 2) 안동 관내에 있던 보주(甫州)를, 기양현(基陽縣)이라 개칭하고 현령(縣令)을 보냈다./ 1173년(明宗 3)에는 국내외가 크게 어지러워 남방에 도적이 심하므로 3만 승재(僧齋)를 세우는 동시, 자엄 대사가 윤대장(輪大藏) 2좌(座)와 대장전(大藏殿) 3칸(堂三間)을 낙성하고, 7일 간 법회(法會)를 열고, 또한 개태사(開泰寺)의 승통(僧統) 영뇌(潁뇌)를 초청하여 강연을 했는데, 취학자(聚學者)가 300여 명이나 되었다./
1179년(明宗 9)에는 15년 간 계속되던 93동(棟)의 중건 공사(重建工事)들이 모두 마무리됨과 동시에 선종 9문학도(禪宗九門學徒) 500명을 모아 50일 간에 걸쳐 상호 담선회(相互談禪會)를 열고, 단속사(斷俗寺)에 머물고 있는 노돈(孝惇) 선사를 모셔다가 전등록(傳燈錄), 능엄경(楞嚴經), 인악집(仁岳集), 설두집(雪竇集), 점송(점頌) 등을 강의한 바 있다./ 1185년(明宗 15)에는 경내에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를 세웠다./ 조선에 들어와 1457년(世祖 3)에 왕이 교지(敎旨)를 내려 용문사 승려들에게 잡역 감면(雜役減免)의 특혜를 주었고, 1467년(世祖 13)에 대장전(大藏殿) 등을 보수하였다./ 1478년(成宗 9)에 왕비(王妃)의 태실(胎室)을 이 곳에 봉장(奉藏)하고, <성불산 용문사(成佛山龍門寺)>로 고쳤다./ 이곳 용문사에는 사가정 서거정(四佳亭徐居正, 1420-1488), 이재 조우인(이齋曺友仁, 1561-1625), 청풍자 정윤목(淸風子鄭允穆, 1571-1629), 그리고 박세대(朴世大)의 시들이 있는데, 그 중 성종 때의 학자 서거정(徐居正)의 시 한 편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다시 용문사에 찾아드니(再到龍門寺)/ 산이 깊어 세속 시끄러움이 끊어졌구나.(山深絶俗暄)/ 조용한 승방(僧房)(上方僧척靜)/ 고벽(古壁)엔 등불이 아롱거리고(古壁佛燈壎)/ 외길 샘물소리 가늘게 흐르니(一道泉聲細)/ 천 봉우리에 달빛이 걸렸도다.(千峰月色分)/ 아- 내 마음을 찾음이니(居然發深省)/ 나는 있는가 없는가(聊復喪吾存)/ 1529년(中宗 24)에 혜공(慧空) 대사가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중수하였고, 1534년(中宗 29)에 대장전(大藏殿)을 중수하였다./ 명종 때에는 승과 제도(僧科制度)를 부활시킨 당대의 거승 보우(巨僧普雨) 대사(?-1565)가 두 번이나 이곳을 다녀가기도 하였다./ 역대 억불정책(抑佛政策)에도 먼 산골짜기에 고립되어 남아 있다가 임진왜란(1592)으로 인해 남부 지방의 절들은 거의 병화(兵禍)를 입어 불타버렸음에도 용문사만은 광대한 산림과 토지를 보유하여 자력으로 절을 유지하고, 수많은 승려를 보호하고 불교 예술을 보존하였다./ 1599년(宣祖 31)에는 대장전 등을 다시 중수하고, 1608년(宣祖 41)에 호남 승 혜명(湖南僧慧明)이 제하당(霽霞堂, 後 寮舍, 現 燒失)을 증축 중수하고, 1636년(仁祖14)에 용문사 승려 학문(學文)이 적묵당(寂黙堂, 後 宗務所, 現 復元 中)을 세우고, 그 남쪽에 1637년에 옛날 두인루(杜印樓)를 다시 세우고, 범종루(梵鍾樓, 後 海雲樓, 現 復元 中)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 두 당(堂)의 북쪽에 세워진 광명전(光明殿, 後 普光明殿, 現 燒失)과 통하여 궁중의 구조같이 되었다./ 1641년(仁祖 19)에 계인 화주(戒仁化主)가 보광명전(普光明殿)을 중수하고, 1649년(仁祖 27)에는 간사자(幹事者) 광인(廣印) 화주가 지장각(地藏閣) 서쪽에 영칙전(靈則殿)을 세우고, 응향각(凝香閣) 동쪽에 도오전(道悟殿)을 세웠다. 이 무렵을 전후하여 옛 건물들의 중수들도 활발히 이루어졌는데, 영준(靈俊)은 원통전(圓通殿)을, 학문(學文)은 응진전(應眞殿)을, 혜일(惠日)은 미타전(彌陀殿)을 중수하였다. 그리고 1665년(顯宗 6)에는 대장전을 수리하였다./ 1670년(顯宗 11)에 해징(海澄), 취성(就性)이 제하당(霽霞堂) 남쪽에 삼강당(三綱堂)을 세우고, 그 동북쪽으로 수 10보 거리에 태상(太祥), 각철(覺哲)이 만월당(滿月堂)를 일으켰다. 같은 해 의섬(義暹)과 의탄(義坦)이 대장전의 서까래와 기와를 수리하였다./ 1681년(肅宗 7)에 중력(衆力)을 기울여 만세루(萬歲樓)를 지었는데, 법률(法律), 희인(希印), 대규(大奎), 밀언(密彦), 법견(法堅)의 역할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1689년(肅宗 15)에 두관(斗寬), 법청(法淸), 도해(道海), 인경(印瓊), 정률(精律), 동영(洞英)이 십왕전(十王殿)을 만들었다. 십왕(十王)의 조상(造像)은 금당(金堂)의 판불(版佛)이고, 실적(實籍)에는 신경(神鏡) 대사의 힘이 많았다. 용문사의 승려들이 그 공덕을 기리기 위해 하나의 함을 특별히 설치하고 그 서편에 대사의 영정(影幀)을 모셨다./ 청심당(淸心堂)은 십왕전의 앞에 있고, 명월당(明月堂)은 적묵 요사(寂黙寮舍)의 우편에 있었다. 이들은 주지 성청(性聽)이 1686년(肅宗 12)에 지은 것이다./ 또한 1688년(肅宗 14) 봄에는 범종루(泛鍾樓) 남쪽에 천왕문(天王門, 現 回轉門)을 크게 세우고, 좌우에 소상(塑像) 4구(軀)를 세웠는데, 이 공사를 마치는데는 처원(處源), 삼웅(三雄)의 노고가 많았고, 원선(圓善), 공신(公信)이 천왕상(天王像)을 만들고,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장외(場外)에 별암(別庵)이 3동(棟) 있었다. 서쪽 것을 서전(西殿)이라 했는데, 옛날 영칙전(靈則殿)이었다. 북쪽 것을 비전(碑殿)이라 했는데, 이는 혜진(惠眞)이 지은 것이다. 비전(碑殿)의 아래에는 노인을 위한 양노암(養老庵)이 있었다. 늙은 대사는 이곳에서만 머물 수 있었는데, 해월(海月), 밀청(密淸) 등 10여 명에 이르렀다./ 또 일주문(一柱門), 향적전(香積殿)은 1689년(肅宗 15)에 지었다. 1767년(英祖43)에는 대장전 등을 중수하였다./ 1783년(正祖 7)에 정조(正祖)의 맏아들이며, 순조(純祖)의 이복 형(異腹兄)인 문효세자(文孝世子, 王이 못됨)의 태실(胎室)을 이곳에 봉안하고 <소백산 용문사(小白山龍門寺)>라 개칭하였다./ 1835년(憲宗 1) 8월에 해운루(海雲樓), 보관명전(普光明殿), 강원(講院) 등이 불타버린 것을 당시의 거승 역파(巨僧역坡)가 상민(尙敏), 부열(富悅) 등과 더불어 중건(重建)을 시작한 지 5년만인 1839년(憲宗 5)에 공사를 마쳐 건물 19동에 309칸이나 보유하게 되었다./ 1893년(高宗 30) 9월에는 비구 법현(比丘法顯)이 화장찰해 탱화(華藏刹海幀畵)를 그려 강원(講院) 안에 안치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때는 의병의 근거지이기도 하였고, 1962년에 대장전을 보수하였다. 1969년에는 보광명전을 보수하였고, 1972년 4월 장마로 약간 손실을 입어서, 1973년까지 보수하였다./ 1975년 2월 5일에 경북 지정문화재 이외의 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되었다. 1979년 12월 20일에는 대장전, 해운루, 자운루(慈雲樓),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명부전(冥府殿)을 4천만 원으로 보수하였는데, 총 20동, 연건평 439.9평의 건물이 위용을 자랑하게 되었다. 선종 계통(禪宗系統)이며, 대한 조계종 제8지구(直指寺) 소속인 이 용문사에는 불상(佛像) 1,070구(軀), 탱화(幀畵, 紙造) 59매, 경문(經文) 414권 등이 있고, 승려 6명이 2500호에 13,000명의 신도를 돌보고 있다./ 그리고 회전문(回轉門) 앞에는 5기(基)의 비들이 세워져 있는데, <청신여월성화김남심 영세불망비(靑信女月成華金南心永世不忘碑)> <최병규 지통 선사 영세불망비(崔秉奎智通禪師永世不忘碑, 1983.6.立)> <천불 조성 법당 중수 공덕비(千佛造成法堂重修功德碑, 1979)> <중수 용문사기(重修龍門寺記)> <천불전 시주 방명록(千佛殿施主芳名錄, 1980)>이다./ 1984년 5월 9일 오전 7시에 일어난 화재로 인하여 보광명전(普光明殿), 해운루(海雲樓), 종무소(宗務所),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요사(寮舍), 객실(客室), 응향각(凝香閣), 단하각(丹霞閣) 등 8동이 소실(燒失)되었다./ 용문사 삼기 전설(三奇傳說)/ 1) 고려 태조가 왕가(王駕)할 때 동구(洞口)의 두 암상(岩上)에서 청룡(靑龍)이 출영(出迎)하여 용문(龍門)이라 명명(命名)한 것./ 2) 고려 중엽에 옛 건물을 중수하려고 파옥(破屋)할 때에 상량에서 16냥 중(重)의 기묘한 은병(銀甁)이 한 개 나와 이를 팔아서 곡미(穀米)를 사서 공장(工匠)들의 일료(日料)로 충당한 것./ 3) 고려 중엽(癸未年)에 도장(道場) 남쪽 뜰에 9층탑을 만든 후 사리(舍利)를 넣을 때 4층에서 5층까지 오색 구름이 5-6일 간 서리었다는 것./
용문사 경내의 건물과 유물(가나다順) : 1) 괘불 탱화(掛佛幀畵) : 진영당(振影堂, 住持室) 뒷마루에 보관되어 있는 이 괘불은 법회(法會) 때 보광명전(普光明殿) 앞에 세워 놓은 철대(鐵臺)에 걸어 두고, 예불(禮佛)을 올리는 것으로, 그 크기가 가로 7.27m, 세로 15m나 된다. 중앙에 석존(釋尊), 좌우로 보현보살(普賢菩薩)과 문수보살(文殊菩薩)이 있고, 뒷 배경에 가습존자(尊者)와 아란 존자가 표색(表色)되어 있다./ 2) 극락암(極樂庵) : 원래는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모신 건물로, 용문사 서쪽 끝에 있다. 이 극락암은 1166년(毅宗 20)에 자엄 대사(資嚴大師)가 창건하였는데, 조선 명종 때에는 보우(普雨) 대사가 두 차례 다녀간 곳이다. 1587년(宣祖 20)에 이곳에 주석(駐錫)하고 있던 사명당(四溟堂)이 중수하였는데, 1596년(宣祖 29)에 전소(全燒)된 것을, 1687년(肅宗 3)에 승 영준(僧靈俊)이 다시 신축하였다./ <극락암(極樂庵)>이라는 현판(懸板) 3자는 1797년(正祖 21) 7월에 자헌대부 행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 윤사국(資憲大夫行禮曹判書兼判義禁府尹師國)이 썼고, 중수기(重修記)는 1801년(純祖 1) 7월 성규(聖奎)가 썼다./ 원래 전내(殿內)에 관음보살상(觀音菩薩像)이 안치(安置)되었는데, 이 상은 매우 기묘한 불상이었다. 그리고 그 뒷면에 아미타불(阿彌陀佛)의 탱화(幀畵)도 게시되었다./ 그러나 1978년 12월 1일에는 군내 각 기관장과 유지 그리고 신도들의 성금으로 천불상(千佛像)을 모시고 천불전(千佛殿)으로 개칭하였다. 천불의 재료는 경주의 옥석(玉石)이며, 천불을 모신 후 1980년 12월에 명호비(冥護碑)를 회전문(回轉門) 앞에 세웠는데, 거기에 따르면 불상 조성은 영진사 대표 심형근이 하였고, 불상 기안(起案)은 보문불교미술사(普門佛敎美術社) 대표 주영주이고, 명호비 제작은 한국석재공예사(韓國石材工藝社) 대표 구정근이 하였다. 이 극락암은 건평 32평, 정면 21.1m, 측면 9.0m의 목조 와가 단층(木造瓦家單層) 맞배집으로 되어 있다./ 3) 남무아미타불 음각(南無阿彌陀佛陰刻) : 둔지방(屯地坊) 마을에서 용문사로 올라가다가 보면 넙적바우, 뾰족바우(立岩)를 지나 <남무아미타불 김철하(南無阿彌陀佛金徹霞)> 라고 음각한 바위를 볼 수 있다. 용문사 주지로 있던 김철하(金徹霞)가 1920년 경에 새긴 글이다./ 4) 단하각(丹霞閣) : 건평 2평, 정면 2.3m, 측면 2.75m의 목조와가(木造瓦家) 단층 맞배집이다. 1984년 5월 9일에 소실(燒失)되었다./ 5) 대장전(大藏殿) : 보광명전(普光明殿) 동편에 위치한 목조와가(木造 瓦家)로, 과거 국보(國寶) 제243호(1936.5.23)로 지정되어 오던 중 1963년에 보물(寶物) 제145호로 수정 지정되었다./ 이 대장전을 처음 세운 것은 1173년(明宗 3)인데, 인도(印度)의 고승 구담(高僧瞿曇)이 대장경(大藏經)을 용궁(龍宮)에 소장하였다는 고사(古事)에 따라 용이 나타난 용문사에 대장전을 짓고, 불력(佛力)으로 호국을 기원하기 위하여 대장경을 보관하였다고 한다./ 이 대장전은 창건 이후 1467년(世祖 13), 1534년(中宗 29), 1599년(宣祖 31), 1665년(顯宗 6), 1670년(顯宗 11), 1767년(英祖 43)에 중수하였다. 그리고 근래에도 1962년, 1973년, 1979년에 건물 보수를 하였다./ 전내 불단(殿內佛壇)에 3존 불상(三尊佛像)이 있는데, 그 중 본존불(本尊佛) 뒤에 보이는 대추나무에 양각한 목각탱불(木刻幀佛)의 조각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솜씨라고 하는데, 원래 3존불과 목각탱화(木刻幀畵)는 극락전(極樂殿, 現 없어짐)에 있던 것을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더욱이 전내의 윤장대(輪藏臺) 한 쌍은 보물 제684호이다./ 현재의 대장전 건물은 1767년에 중수한 것으로 정면 3칸 10m, 측면 2칸 5.5m, 건평 16.6평의 단층 맞배집이다. 정면 3칸은 모두 똑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각각 두 짝 열 개의 빗살문을 달았다. 처마 밑에는 내외 2출목(內外二出目)의 공포(拱包)를 배치하고, 기둥 사이마다 두 개 씩의 공간포(空間包)를 둔, 보기 드문 다포 계통(多包系統)의 건축이다. 대들보는 앞뒤 기둥 위의 공포(拱包)에 걸치게 하고, 그 위에 동자주형(童子柱形)의 대공(臺工)을 세워 종량(宗樑)을 받쳤으며, 측면은 중앙에 높은 기둥을 하나 세워 대들보의 한 복판을 받치게 하였다. 내부 바닥은 마루를 깔았다. 건축 내부에 나타난 구조 양식은 조선 중기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으나 건물 외부는 고려의 건축 양식이다./ 6) 동향각(東香閣) : 1644년(仁祖 22)에 서산 대사(西山大師)의 6대손 영파(六代孫影波, 聖奎)가 창건하여 극락전(極樂殿, 現 없어짐)의 노전승(爐殿僧)이 이곳에 상주(常住)하면서 조석(朝夕)으로 극락전에 예불(禮佛)을 드렸다. 그 후 서산 대사의 9대손 덕원(德圓), 은허(隱虛), 황악(黃岳) 조사(祖師)가 중수하여 서산 대사의 사리(舍利) 2개를 상량에 모시고, 상주(常住)하였다. 그러나 1980년 국비(國費)와 지방비(地方費)로 완전 해체 복원할 때 문화재 전문위원 유문룡(兪門龍) 씨가 발견한 이 건물의 상량에 <함풍 7년 정사 8월 25일(咸豊七年丁巳八月二十五日)>이라는 기록이 있어, 이 동향각은 1857년(哲宗 8)에 건립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상량문과 함께 스님의 사리 2개, 목판본 법화경(木版本法華經) 1권, 염주용(念珠用) 구슬 10개, 부적(符籍) 등 부장품(副葬品)이 발견되기도 하였는데, 이들은 상량 기념으로 넣은 것 같다. 사리는 재난 때 손실의 위험이 있기 때문에, 1981년에 보광명전(普光明殿) 앞에 석조5층사리탑(石造五層舍利塔)을 세우고 그 안에 넣었는데, 이 사리와 함께 발견된 부장품 외에도 능엄경(楞嚴經) 1질(帙) 5권, 화엄경(華嚴經) 1질 3권, 반야경(般若經) 1질 2권, 향로(香爐) 등 청자류(靑磁類) 8점을 사리와 함께 넣었다./ 용문사 경내에서 제일 북쪽에 위치한 이 동향각은 정면 10.5m, 측면 5.8m, 건평 18평의 목조와가 단층 팔작(木造瓦家單層八作)집으로, 현재 요사(寮舍)로 이용되고 있는데, 일제 때 보수한 흔적이 있다./ 또 1857년의 상량문(上樑文)에는 200여 대중(大衆)의 이름이 명기(明記)되어 있다./ 또한 이 동향각 뒷편 북쪽 약 30m에 덕원(德圓, 富悅), 은허(隱虛, 尹悅), 황악(黃岳, 士元) 조사의 부도(浮屠) 3기(基)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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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