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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665:예천8경 중 선몽대(1)
작성자장병창 @ 2014.06.08 06:05:41

  예천의 자랑(3665) : 예천8경 중 선몽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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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몽대(仙夢臺), 백송정자(白松亭子) [景觀] : 호명면 백송리 74번지 행소리마을 동쪽 우암산(遇巖山) 서북쪽 벼랑 위에 있는 정자로, 뒤에는 높은 우암산이 있고, 앞에는 내성천(乃城川)의 맑은 물이 동에서 서로 흘러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주변에는 우거진 송림이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건지산(巾芝山)이 포근히 감싸 안고 행솔이(白松里)마을이 자리하여 진성 이씨(眞城李氏) 후손이 수백 년을 이어 살아오는 유서 깊은 고장이다. 주위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노송이 송림을 이루고 강변에는 평사십리 백사장(平砂十里白沙場)이 멀리 서울나드리(京津)까지 이어짐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우암산 위에서 내려오다가 보면 약수터가 있고, 절벽 사이에 학심대(鶴尋臺)와 방학정(訪鶴亭)이 있으니 정산 청천 백운(靑山淸川白雲)의 조화를 이루고 백송동천(白松洞天)의 외연(巍然)한 병암(屛巖)과 자연 송림의 솔바람 향기로움이 어디서나 볼 수 없는 너무나 아름다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지금 예천은 물론 영남 전역에 알려진 명승지로 사계절의 구별없이 소풍객이 찾고 특히 여름 피서기는 인산인해를 이룬다. 정랑 이열도(正郞李閱道)가 1563년(명종 18)에 창건하여 학업에 몰두한 곳인데, 퇴계 이황(退溪李滉), 서애 유성룡(西厓柳成龍), 학봉 김성일(鶴峰金誠一), 약포 정탁(藥圃鄭琢), 한음 이덕형(漢陰李德馨, 辛卯書), 청음 김상헌(淸陰金尙憲) 등의 시를 차운(次韻)한 것을 비롯하여 170여 명이 선몽대운(仙夢臺韻)을 지어 찬양하였고, <심방록(尋訪錄)>에 기재된 명사만도 지금까지 1,860명을 헤아린다. 선몽대가 위치한 후방에 학심대(鶴尋臺), 방학정(訪鶴亭) 등 2동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전하지 않는다. 1671년, 1922년, 1967년에 중수, 1974년에 수리하였다. 선몽대 경내에는, '이열도유허비(李閱道遺蹟碑)'와 함께 2기의 입석(立石)이 있는데, 새겨진 글은 '산하호대(山河好大)', '선대동천(仙臺洞天)'이다. [仙夢臺 篇額] : 현판 글씨 3자는 퇴계 이황(退溪李滉)이 1563년에 썼는데, 세로 33cm, 가로 91cm이다. 자경으로 '仙' 자는 27x26cm, '夢' 자는 26x30cm, '臺' 자는 26x30cm로 현존한다. 또한 이황의 친필 시도 남아 있다. [亭子] : 정면 4칸, 측면 2칸, 팔작기와집 누식이다. [廚所] : 정면 8칸, 측면 1칸 단층맞배집 시멘트블록, 와즙이다. [李閱道의 原韻] : 정자를 높이 거울 빈 데 세우니/ 먼 개 긴 하늘 바라봄이 넓고야/ 따오기와 지는 나오리 여러 모양을 드리는데/ 늦은 바람 나는 비 또 소소(疎疎)하고야/ [李滉의 次韻] : 소나무 높은 데 늙어 푸르고 빈 데 꽂으니/ 흰 모래 푸른 벽 그림 그리기 어렵고나/ 내 이제 신선의 꿈 밤마다 비겨/ 다달아 구경(九經) 서끔을 한탄하지 마소/ [金尙憲의 次韻] : 모래는 희고 물은 맑아 맑기가 빈 것 같으니/ 옥산(玉山)과 구슬 뒤원을 비교컨대 어떠할꼬/ 신선의 구역 만리 이르기 어려워라/ 이 정자 오고 가는 것 또 서끌게 하지 마오/. 그리고 유성룡(柳成龍)의 시(高臺登眺若憑虛/ 漁釣生涯我不如/ 花落半庭春事晩/ 碧詹松彩更蕭疎/ 정탁(鄭琢)의 시(主人能自卜淸許/ 양苑玄都此不如/ 夢罷幾回臺上臥/ 滿天明月看星疎/)와 김성일(金誠一)의 시( 半畝松陰倒碧虛/ 玉壺今日興何如/ 憑君更聽遊仙句/ 便覺塵緣立地疎/ [李德馨의 詩] : 山環蒼壁地凌虛/ 水釣氷耕신自如/ 未到此坮名己好/ 賞情難動世情疎/)가 있다.(醴泉郡邑誌 1780 1786 1841 1895, 醴泉郡誌  1939, 朝鮮寰輿勝覽 1929, 嶠南誌 1937)

 

  [醴泉新聞] : 호명면 백송리에 있는 정자로, 1563년(명종 19)에 우암 이열도(遇巖李閱道)가 창건하였다. 퇴계 이황이 '仙夢臺'라는 대호(臺號) 3자, 시와 서문을 썼다. 1623년(인조 1) 홍수로 허물어져 장서각(藏書閣)의 책을 모두 백송리 본집으로 옮겼다. 1671년(현종 12) 현손 지(址)가 중수하였다. 1673년(현종 14) 본가의 화재로 서적이 소실되었으나 제영록(題詠錄)과 심유록(尋遊錄)만을 구하였다. 1922년에 15세손 인희(麟熙)가 중수하였는데, 원래 대(臺)가 12칸, 주사(廚舍) 10칸, 학심대(鶴尋臺) 4칸, 방학정(訪鶴亭) 4칸이었으나 학심대와 방학정은 지대가 경사져서 풍우에 넘어짐에 복구할 수 없었다. 1967년에 16세손 중화(重華)가 중수하였는데, 기둥을 돌로 바꾸었고, 헌함도 개조하였고, 주사도 새로 10칸을 세웠고, 송정(松亭) 4칸을 신축하였다. [退溪 李滉의 詩] : 선몽대란 제목을 지어 부친다//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친 듯 하고/ 강변에 흰 모래와 푸른 벽은 그림 그리기보다 어렵구나/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지 않노라// 가정 계해년(1563) 도산에서// [李閱道의 次韻] : 엎드려 종조부 퇴계 선생 시를 차운하다// 선인의 끼친 법이 오래도록 빈 데 돌아갔으나/ 끼친 뜻이 아직 있으니 이어받는 뜻도 그러하도다/ 두어 칸 집과 기둥을 이제야 얻었으니 숨어 산 삶이 세정에만 소홀함이 아니었네/ 작은 정자와 높은 시릉이 물 가운데 맑고 빈 것 같은데/ 먼 개와 긴 내를 바라보면 뜻이 넓어지는 것 같다/ 외로운 곡새와 떨어지는 나오리는 일만 형태를 드리니 늦은 바람나는 비 또 뜸뜸이 나리네/ 산에 비기고 물에 다다르니 층층한 봉우리가 공중에 솟았는데/ 안개 끼인 문과 소나무 창문이 비단과 같도다/ 오래 한가한 스님을 짝하니 신선의 자리가 고요한 듯 가까이 오므로 특별히 세상 인연 먼 것을 깨닫겠네/(主人)// [鄭琢의 次韻] : 삼가 퇴계 선생 시를 차운하다// 주인이 능히 스스로 맑고 빈 곳을 점쳤는데/ 신선이 사는 곳과 무극황군(無極皇君)의 치하(治下)가 이보다 못하도다/ 꿈을 깨고 몇 번이나 대(臺) 위에 누워서 하늘에 찬 밝은 달과 별을 보았을까/(藥圃)// [柳成龍의 次韻] : 삼가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높은 대에 올라보니 공중을 의지한 것 같구나/ 고기 잡고 낚시질하는 것 나는 그러하지 못하였네/ 꽃이 뜰에 떨어지매 봄이 이미 늦었는데 푸른 주렴 솔 그림자가 다시 소소(蕭疎)하도다/(西厓)// [金誠一의 次韻] : 삼가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반 이렁 솔 그림자가 푸른 공중에 기울어지니/ 좋은 술 두루미 대하니 오늘 날 흥치가 어떠할까/ 자내를 빙자해 다시 유(儒)와 선(仙)의 글을 들으니/ 문득 세상 인연이 이 땅에 성근 것을 깨닫겠네/(鶴峰)// [李德馨의 次韻] : 경건하게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산은 푸른 벽에 비겼고 땅은 공중을 능가하였는데/ 물에 고기 잡고 산림에 밭 가는 것이 참으로 자유롭구나/ 이 대(臺)에 오기 전 이름이 이미 좋았는데 구경할 뜻이 동하니 세상 정이 멀구나/(漢陰)// [茶山 丁若鏞 先祖의 次韻] : 경건히 벽 위에 있는 운을 차운하여 선몽대 주인에게 드리고 겸하여 자리 위에 있는 여러 분에게 보이다// 물 속에 있는 신선의 집과 같아 거울처럼 허명한데/ 주인의 마음씨마저 담박한 듯 하네/ 이틀 동안 선몽대에 오르내리니/ 천척(千尺)이나 높은 세상 티끌이 생각에 소원하도다/ 난정(蘭亭)의 옛 자취가 이미 허무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 이때에 누구와 같이 할 것이냐/ 거북이와 학 같은 분들이 거듭 놀게 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라/ 가을이 오매 서신 보내는 것을 소홀하지 말진저/(丁士優)// [金尙憲의 次韻] : 경건히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모래가 희고 내가 밝아서 담담해 빈 것 같으니/ 옥같은 산이오 구슬같은 정원에 비교하는 것이 어떠할까/ 신선의 땅이 하도 멀어 오기가 어렵다 하나 이 정자에 오고감을 소홀하지 말자/(淸陰)// 추강 김현종(秋崗金炫鍾, 1906-1987)이 시로써 이르기를, "선몽대 선유 유감(船遊有感)// 유유한 장류수(長流水)는 석양에 노을지고/ 초동(樵童) 탄 일엽편주(一葉片舟) 강심(江心)을 배회하니/ 선몽대 칠석(七夕) 정경을 못내 그려 하노라// 1955년 추석//"라고 하였다(秋崗文集 1988, 仙夢臺略志 1991).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이 1780년 19세 때 그의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예천 군수를 따라와서 '선몽대기(仙夢臺記)'를 지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천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깨끗한 모래와 흰돌로 되어 있어, 바람에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 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따라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고, 그 정자에는 '선몽대(仙夢臺)'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乃城, 現 奉化), 영천(榮川, 現 榮州), 예천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약포(藥圃) 정 상국(鄭相國, 宣祖 때의 文臣인 鄭琢)의 유상(遺像)을 배알하고 길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詩)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先代, 丁士優) 할아버지께서 일찌기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이 깨어져 글자가 갈라지고 한 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자구(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기를, "공이 일찌기 영남에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00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느냐?"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공장(工匠)에게 번각(飜刻)하고 다시 단청(丹靑)을 입혀 걸어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醴泉新聞 2001.10.11)

 

  [茶山詩文集] : 호명면 백송리에 있는 정자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시와 기문이 있다. [詩] : 부친(醴泉郡守 丁載遠)을 모시고 선몽대에 올라// 높은 언덕 자리잡아 허공에 솟은 누각/ 술 마시며 유람하니 객(客)의 시름 사라지네/ 꽃잎에 닿은 산중 비(山雨) 방울져서 떨어지고/ 전나무에 든 시냇바람 우수수 들려온다/ 사신(使臣)이라 관개(冠蓋)는 낡은 자취 서글프고(7代祖 監司公 丁士憂가 일찌기 使命을 받들고 이 곳에 왔는데, 壁上의 詩가 있고, 別途로 記文이 있다)/ 승상(丞相)이라 의건(衣巾)은 예전 놀이(舊游) 상상되네/ 단약 부엌 연기 없어 신선의 꿈 싸늘한데/ 강물과 구름 고금(古今)이 절로 한가로워라/(茶山詩文集 第1卷 詩部, 1982). [記文] : 선몽대기(仙夢臺記)// 예천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되는 곳에 가면 한 냇가(乃城川)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모두 깨끗한 모래와 흰 돌로 되어 있었으며, 바람에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따라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으며, 그 정자에는 '선몽대(仙夢臺)'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이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乃城 : 現 奉化), 영천(榮川 : 現 榮州), 예천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當時 醴泉郡守 丁載遠)를 따라 약포(藥圃) 정 상국(鄭相國 : 明宗 때의 文臣인 鄭琢)의 유상(遺像)을 배알하고, 길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丁士優)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는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자구(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기를, "공(公)이 일찍이 영남에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00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공장(工匠)에게 번각(번刻)하고 다시 단청(丹靑)을 입혀 걸어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茶山詩文集 第13卷 記)

 

  선몽대(仙夢臺) [樓亭] : 호명면 백송리 74번지(垈)에 있는 정자로, 마을 동쪽 우암산(遇岩山) 북서쪽 벼랑 위에 내성천을 바라보며 위치하고 있다. 퇴계 선생의 종손인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가 1563년(명종 18)에 세웠으나 1623년에 수해로 도괴된 후 1671년에 중건하였으며, 1922년과 1968년에 중수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전면 기둥의 하부에는 콘크리트로 하층주를 세워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醴泉郡誌 2005)

 

  선몽대 [記事] : 한국문집총간(031_435b) 퇴계집(退溪集, 1573)에 실린 유도원(柳道源)의 기사로, 그 내용은, “退溪先生文集攷證卷之八/ 外集詩/ 寄題仙夢臺臺在醴泉郡吳川南岸上。先生兄孫閱道所構。/ (註)/ 遇巖卽仙夢臺所在之地。”이다.(www.minchu.or.kr 2006)

 

  선몽대 [記事] : 한국문집총간(037_414b) 동원집(東園集, 1935)에 실린 김귀영(金貴榮)의 기사로, 그 내용은, “東園先生文集卷之一/ 詩/ 謹次退溪先生韻。寄題仙夢臺。臺在醴泉白松/ 石老川廻飽靜虛。一區幽勝問何如。棲遲自有無窮樂。莫道書生活計疏。”이다.(www.minchu.or.kr 2006)

 

  선몽대 [記事] : 한국문집총간(039_200b) 백담집(栢潭集, 1670)에 실린 백담 구봉령(具鳳齡)의 기사로, 그 내용은, “栢潭先生續集卷之二/ 七言絶句/ 題仙夢臺。敬次退溪先生韻。先生姪子宏所築。在醴泉沙川上。/ 一夢飄?眼界虛。溪臺霽月興何如。覺來身在風塵路。恨望山林迹也疏。”이다.(www.minchu.or.kr 2006)

 

  선몽대 [記事] : 한국문집총간(062_016a) 금역당집(琴易堂集, 1855)에 실린 배용길(裴龍吉)의 기사로, 그 내용은, “琴易堂先生文集卷之一/ 詩/ 題仙夢臺 臺在醴泉。主人李鎭南。/ 主人分竹虎。襟韻?風流。策杖晴沙岸。安亭?石頭。鷗盟曾款款。仙夢忽悠悠。誰識經過地。雲煙摠是愁。”이다.(www.minchu.or.kr 2006)

 

  선몽대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009d)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기사로, 그 내용은, “第一集詩文集第一卷○詩集/ 詩/  家君登仙夢臺臺在醴泉治南十里。故左相鄭公琢別館也。/  天樓閣枕高丘。杯酒登臨散客愁。山雨著花紅滴瀝。溪風入檜碧??。使臣冠蓋悲陳跡。七世祖監司公嘗奉使至此。有壁上詩。別有記文。丞相衣巾憶舊游。丹?無煙仙夢冷。水雲今古自悠悠。”이다.(www.minchu.or.kr 2006)

 

  선몽대 [記事] : 한국문집총간(281_290a)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기사로, 그 내용은, “仙夢臺記/ ...仙夢臺記 醴泉之東十餘里。得一川焉。泓渟而演?。紆餘而??。深者深靑。淺者淨綠。川邊皆明沙白石。風煙...”이다.(www.minchu.or.kr 2006)

 

  선몽대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기사로, 그 내용은, “다산시문집 제1권/ 시(詩)/ 부친을 모시고 선몽대에 올라[陪家君登仙夢臺] 대는 예천 고을 남쪽 10리 지점에 있는데 고 좌상 정공탁(鄭公琢)의 별관이다// 높은 언덕 자리잡아 허공에 솟은 누각 / 中天樓閣枕高丘/ 술 마시며 유람하니 객의 시름 사라지네 / 杯酒登臨散客愁/ 꽃잎에 닿은 산중 비 방울져서 떨어지고 / 山雨著花紅滴瀝/ 전나무에 든 시냇바람 우수수 들려온다 / 溪風入檜碧??/ 사신이라 관개는 낡은 자취 서글프고 7대조 감사공(監司公)께서 일찍이 사명을 받들고 이곳에 오셨는데 벽상의 시가 있고 별도로 기문(記文)이 있다. / 使臣冠蓋悲陳跡/ 승상이라 의건은 예전 놀이 상상되네 / 丞相衣巾憶舊游/ 단약 부엌 연기 없어 신선의 꿈 싸늘한데 / 丹?無煙仙夢冷/ 강물과 구름 고금이 절로 한가로워라 / 水雲今古自悠悠// [주D-001]승상 : 정탁(鄭琢)을 가리킨다.”이다.(www.minchu.or.kr 2006)

 

  선몽대 [記事] : 고전국역총서(1982 刊)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에 실린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기사로, 그 내용은, “다산시문집 제13권/ 기(記)/ 선몽대기(仙夢臺記)/ 예천(醴泉)에서 동쪽으로 10여 리(里) 되는 곳에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모두 깨끗한 모래와 흰 돌로 되어 있었으며, 바람에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따라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으며 그 정자에는 '선몽대(仙夢臺)'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 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太白山)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柰城)·영천(榮川)·예천(醴泉)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약포(藥圃) 정 상국(鄭相國 명종(明宗) 때의 문신인 정탁(鄭琢))의 유상(遺像)을 배알(拜謁)하고, 길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徘徊)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의 하나는 관찰사(觀察使)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는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자구(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으로 먼지를 털어내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기를,/ "공(公)이 일찍이 영남(嶺南)에 관찰사로 내려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백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느냐."/ 하셨다. 그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공장(工匠)에게 번각(?刻)하고 다시 단청(丹靑)을 입혀 걸어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이다.(www.minchu.or.kr 2006)

 

  선몽대 [記事] : <퇴계선생문집고증[退溪先生文集攷證, 1891]>에 실린 작자 미상의 기사로, 그 내용은, “寄題仙夢臺。/ [臺在醴泉/ 郡/ 吳川南岸上。先生兄孫閱道所構。]註遇巖[卽仙夢臺所在/ 之/ 地。] ”이다.(www.koreastudy.or.kr 2006)

 

  선몽대(仙夢臺; 虎鳴面 白松里 행소리) [記事] : 1. 집성촌(백송리 행소리마을)의 형성 배경 : 경북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는 퇴계의 둘째 형(仲兄)인 예천훈도(醴泉訓導) 진성이씨 온혜종파 백송파 7세(世) 이하(李河) 공(公)이 처가 함양박씨 세거지인 용문 금당실에 우거(寓居)하다가 둘째 아들인 이굉(李宏 1515-1573)이 백송리로 입향하게 된다. 난산(卵山)에는 입향조인 8세 이굉과 9세 이열도의 묘가 있고 사두혈이라 한다. 백송마을은 연소형국(燕巢形局, 제비집)이다. 정조 4년(1780년)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따라 다산 정약용이 형 약전과 함께 와 반학정(伴鶴亭)에서 공부하였는데 예천 관아 서편에 있었다고 한다. 뒷날 정약용은 젊은 시절 예천에서 공부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예천을 공자와 맹자의 고향처럼 유학이 성행한 곳이란 의미에서 추로지향(鄒魯之鄕)이라 하였다. 정재원은 정약용과 함께 고평에 있는 정탁의 영정을 배알한 후 호명면 백송리의 선몽대에 올라 조상인 정사우의 낡은 현편을 다시 새겨 걸어 놓고 ꡐ선몽대기ꡑ를 남겼다.1)/ 2. 집성촌(세거지)의 풍수 : 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는 지배층들이 경주나 개성 같은 수도에 모여 살았다. 고려 말 두문동 72현 이후에는 양반 지배층들은 읍치(도시)에서 떨어진 향촌에서 주로 거주하였다. 1650년 이전까지는 남녀균분상속이어서 친족 외척 척족들이 혼거하였고 외가나 처가동네로 이주해 가는 경우가 흔했으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농토가 황폐화되면서 적장자(嫡長子) 위주로 상속법이 변화되면서 집성촌이 세거지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집성촌에는 유교문화경관인 종가 서당 서원 정자 불천위사당 재실 정려 등이 잔존하고 있다. 집성촌의 입지나 집터와 서원터를 잡는데 풍수이론이 결정적으로 작용하고 있어 풍수형국론과 입지선정과정, 입향 배경들을 검토하는 것이 필요하다./ 3.선몽대 : 백송리 내성천변에 선몽대(仙夢臺)는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1538˜1591)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 대호 세 글자는 퇴계선생의 친필이다. 퇴계선생이 신선이 나오는 꿈을 꾼 후 지은 퇴계 친필 현판과 퇴계선생의 시에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한음 이덕형, 금계 황준량,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 등의 차운(次韻) 친필시가 게액되어 있다. 특히 선몽대 위에 오르면 내성천 백사장의 평사십리가 한눈에 펼쳐지고 넓고 큰 내가 자랑하듯 울창한 노송이 들어서 여름에는 피서지로 봄, 가을, 겨울에는 산책코스로 좋다. 주변에는 여름철 피서지로 모래사장과 송림 등 경관이 아름다운 '서당마을'이 있다. [퇴계 친필 시] : 松老高臺揷翠虛 白沙靑壁?難如 吾今夜夜?仙夢 莫恨前時?賞疎/ (嘉靖 癸亥 陶山)/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강변에 흰 모래와 푸른 벽은 그림 그리기보다 어렵구나./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노라. / (藥圃,西涯,鶴峯,금계,漢陰,愚伏,淸陰,茶山의 次韻詩,1563년 건립)/ 엎드려 종조부 퇴계선생 시를 차운하다 / 선인의 끼친 법이 오래도록 빈데 돌아갔으나, 끼친 뜻이 아직 있으니 이어받는 뜻도 그러하도다. 두어칸 집과 기둥을 이제야 얻었으니 숨어 산 삶이 세정에만 소홀함이 아니었네. 작은 정자와 높은 시릉이 물 가운데 맑고 빈 것 같은데, 먼 개와 긴 내를 바라보면 뜻이    넓어지는 것 같다. 외로운 곡새와 떨어지는 나오리는 일만 형태를 드리니 늦은 바람 나는 비 또 뜸뜸이 나리네. 산에 비기고 물에 다다르니 층층한 봉우리가 공중에 솟았는데, 안개 끼인 문과 소나무 창문이 비단과 같도다. 오래 한가한 중을 짝하니 신선의 자리가  고요한 듯 가까이 오므로 특별히 세상 인연 먼 것을 깨닫겠네. / -주인 이열도, 자 정가, 호 우암, 진성인, 퇴계선생 종손(從孫)/ 謹次 退溪先生韻 / 主人能自卜淸虛 ?苑玄都此不如 夢罷幾回臺上臥 滿天明月看星疎 / 삼가 퇴계선생시를 차운하다 / 주인이 능히 스스로 맑고  빈 곳을 점쳤는데 낭원(郎苑)과 현도(玄都)가 이보다 못하도다/ 꿈을 깨고 몇 번이나 대(臺) 위에 누워서 하늘에 찬 달과 별을 보았을까/ -약포 정탁, 자 자정, 청주인, 퇴계문인, 시호 정간 / *낭원은 신선이 사는 곳이요, 현도는 옥경산에 있다. / 謹次仙夢臺韻 / 高臺登眺若憑虛 漁釣生涯我不如 花落半庭春事晩 碧簾松影蕭疎(西厓)/ 삼가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높은 대(臺)에 올라보니 공중을 의지한 것 같구나 / 고기잡고 낚시질하는 것, 나는 그러하질 못하였네 / 꽃이 뜰에 떨어지니 봄이 이미 늦었는데 / 푸른 주렴 솔 그림자가 다시 소조(蕭條)하도다  / -서애 류성룡, 자 이현, 풍산인, 시호 문충, 퇴계문인 / 謹次仙夢臺韻 / 半畝松陰倒碧虛 玉壺今日興何如 憑君更聽儒仙句 便覺塵緣立地疏 / 퇴계선생의 仙夢臺 韻을 공경히 次韻하다.(鶴峯續集 제1권) / 넓다란 솔 그늘이 푸른 허공 가렸으니 술 마시는 오늘의 그 흥취가 어떠한가 / 그대 인해 유선儒仙의 시구 다시 들으니  속세 인연 그 자리서 멀어짐을 깨닫겠네. /-학봉 김성일, 자는 사순, 의성인, 시호 문충, 퇴계문인 /(國譯 鶴峯全集 2, 정선용 譯, 1999, 민족문화추진회) / 경건하게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 / 옥 같은 구름과 구슬 같은 달이 빈 대(臺)에 비치는데 / 유묵(遺墨)을 새로 새기니 그림 같구나 / 늘 이 대에 올라 신선의 꿈을 꾸고자 하니 / 주인이 나를 기다려 드리웠던 발을 걷는구나 / -한음 이덕형, 자 명보, 광주인, 시호 문익 / 경건히 선몽대 시를 차운하다(敬次仙夢臺韻)/ 모래가 희고 내가 맑아서 담담해 빈 것 같으니(沙白川明澹若虛)/ 옥 같은 산이요 구슬 같은 전원에 비교하는 곳이 어떨까(玉山瓊圃較何如)/ 신선의 땅이 하도 멀어 오기가 어렵다 하나(仙區萬里應難到)/ 이 정자에 오고감을 게을리 하지 말자(來往斯亭旦莫疎)/ -청음 김상헌 / 경건히 벽위에 있는 운을 차운하여 선몽대 주인에게 드리고 겸하여 자리 위에 있는 여러분에게 보이다. / 물 속에 있는 신선의 집과 같이 거울처럼 비치는데 주인의 마음마저 담박한 듯하네. / 이틀 동안 선몽대에 오르내리니 천척이나 높은 세상 티끌이 생각에 소원하도다 / 난정(蘭亭)의 옛 자취가 이미 허무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 이 때에 누구와 함께 할 것이냐 / 거북이와 학 같은 분들이 거듭 놀게 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가을이 오매 서신을 보내는 것을 소흘하지 말진저 / -다산 정약용의 선조 정사우(丁士優)/

 

  정재유 / 속인(俗人)이 이에 이르니 자연스레 마음이 허명하구나 / 신선을 꿈꾸는 마당에는 나래가 돋는 것 같도다 / 퇴계 선생이 먼저 시를 쓰고 우리 할아버지가 화답하였으니 / 예로부터 내려온 운치가 소흘하지 않았지요 / 정약용-선몽대기(記) / 예천에서 동쪽으로 10여리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깨끗한  모래와 흰 돌로 되어 있어, 바람이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다. 그 정자에는 선몽대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 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 영천(지금 영주), 예천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정상국(鄭相國, 정탁)의 유상(遺像)을 배알하고, 길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잇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가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수 먼지를 떨어내시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길,  "공이 일찍이 영남에 관찰사로 내려 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00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셨다./ 그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번각(飜刻)하고 다시 단청을 입혀 걸어 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2). / 4.진성이씨 백송파 문중 / 1)진성이씨 백송파 입향조; 찰방공 이굉 / 8세 둘째 아들인 찰방공 이굉(李宏, 1515- 1573)은 퇴계 문인으로 퇴계 선생으로부터 편지 2통을 받았고, 1530년대에 금곡리로부터 처가인 백금리(행소리)로 이거(移居)하였다. 묘는 백송 난산(卵山)에 있고 구봉령 갈(碣)하고, 배(配)는 안동김씨 부장(部將)인 수량(遂良) 따님이다./ 이굉(李宏):1515년생. 完(기암)의 弟. 滉의 문인. 일찍이 詩文으로 알려짐. 察訪 역임. ▣참고:退溪門人錄 집필:이원걸/공람할 편지가 한 편이 있다. 官의 납초사納招事에 대하여 잘 밝히라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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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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