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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666) : 예천8경 중 선몽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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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9세 이열도(李閱道, 1538-1591)字 靜可 號 遇巖, 殯所골 侍墓(13세) 從祖父 퇴계 門下-2편의 퇴계 서찰이 있다. 조상의 추증을 알리고, 학문을 열심히 할 것과 ꡐ항상 충(忠直),신(信義),겸(謙讓),근(勤愼)으로 조신(操身)하라ꡑ고 가르쳤다. 퇴계가 손자대에서는(道자 항렬) 가장 훌륭한 인재로 촉망했다. 선몽대를 만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편액과 제시를 써 주었다.(권오봉,1988, 예던길,160쪽) / 퇴계가 손자들 중에 가장 촉망을 두터이 한사람이며,忠信 謙謹의 상조훈常操訓을 끼쳤다. 선몽대를 쌓아 퇴계의 시를 얻었다.(권오봉,1996, 이퇴계의 실행유학,185쪽) / 1563년 仙夢臺 건립, 퇴계 친필 현판 시 1수,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금계 황준량, 한음 이덕형, 우복 정경세, 청음 김상헌, 茶山 정약용의 父 정재원, 절강성 주대승, 이동은 次韻詩, 1576년 문과 급제, 예조정랑, 평안都事, 경산현감/ 영양 牧使 남희석 女 / 이열도(李閱道):1538(중종 33, 무술)˜1591(선조 24, 신묘). 본관 眞城. 자는 靜可. 호는 遇巖. 宏의 子. 1576년(선조 9) 문과 급제. 정랑을 역임. 은퇴 후 仙夢臺에서 소요하며 지냄. 퇴계 친필시와 현판,鄭琢․柳成龍․黃俊良․金誠一, 이덕형, 김상헌, 정재원 등의 題詠詩가 전함. ▣참고:國朝榜目 眞城李氏譜; 집필:김태안 / 白松里(백송리)는 흰 소나무가 있어 힌소리가 변하여 행소리 또는 백송(白松)이라고 함. / ◇ 역사적 인물 / 백송파 9세 이열도(李閱道) : 본관은 진보요, 자는 정가이며 찰방 굉의 아들이고, 퇴계 선생의 종손이다. 1576년 별시문과 2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벼슬이 예조좌랑에 이르고 만년에 선몽대를 지어 놓고 자연의 절정을 마음껫 즐겼으며 명공과 거경(퇴계 이황,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약포 정탁,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이 많이 노닐고 시를 읊었으며 호명의 백금리에 살았고 광지가 있다. 공의 이름은 열도에 자는 정가이니 그 선대의 세계와 관훈과 이력은 경의 종조부 문순공(퇴계선생)의 묘갈과 그 아버님 찰방공의 광지에 자세하였다. /
공이 1538년(중종33)년에 태어났고 남달리 영특하여 스스로 글을 읽을 줄 알았으며 열세 살에 어머니 안동김씨를 여의었어도 예법대로 집상하였고(빈소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음) 자라서는 문순공 퇴계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1573년 가을에 아버지가 임지에서 별세하였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가 시신을 받들고 모셔와 장사를 치루고 3년 여묘하고 복을 벗은 다음 1576년에 별시문과에 병과 제일인으로 급제하여 곧 승문원에 들고 정자 박사 감찰 예조좌랑을 역임하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뜻에 맞지 아니하는 동료들의 시기로 은계도(강원도 회양군 화북면) 찰방으로 나갔고 임기를 마치자 고령현감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임하니 얼마 뒤에 평안도 도사로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돌아온 후 형조좌랑, 금산군수, 강원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다음해에 경산현감에 부임하여 정사가 매우 엄격하면서도 분명하니 아전이나 백성이 속이지 못하였고, 4년 후 사임하고 집에 돌아와 사벽이 소연하여 아무것도 없고 다만 책과 뜰에 핀 꽃뿐이더라. 공이 평소 잔병이 많더니 몸져누운 지 반년 만에 의약의 효험도 없이 1591년(선조 24)에 춘추 54세로 작고하였다. / 집성촌이며 오랜 세거지 마을들의 입향조 묘소를 안내간판과 답사경로를 발굴하여야 한다. 대지재사-호명면 본리 약포묘소-백송마을 선몽대 난산-원곡리 안질 연복군 묘-사곡리 무릉정-지보면 익장 정묘를 연결하여 입향조 묘소를 연계한다면 풍부한 내용이 있고 관광자원이 있는 풍수인물기행도 가능하다. / 솔경지 쑤-십승지인 금당실 쑤, 대수의 향나무-석송령-선몽대 송림 등의 비보 숲인 마을숲을 보존하여 휴식공간으로 활용하는 것이 필요하다. / 선몽대는 퇴계 선생이 촉망하던 從孫종손이자 문인인 우암공이 건립하고 퇴계 선생이 편액과 시를 써 주었다. 선생의 시를 차운하여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금계 황준량, 한음 이덕형, 우복 정경세,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 등 諸公제공들이 친필시를 남긴 이름난 누각이다. 퇴계학파의 핵심 학자들이 이렇게 망라하여 선생의 시에 차운한 현판이 걸린 정자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누마루에서 보는 내성천의 유장한 흐름, 십리백사장과 송림(잘 생긴 노송 숲)은 장대한 경관을 연출하고 있다. / 문화역사 인물사적 측면에서 퇴계학맥을 한말까지 이어간 수제자인 서애와 학봉, 임진왜란을 극복한 공이 큰 약포 정탁, 한음 이덕형, 서애 수제자이며 임란의병장이었던 우복 정경세, 실학을 완성했던 다산 정약용 등 전국 어느 누각에도 뒤지지 않는다. / 전국 최고의 밝은 모래 백사장 과 맑은 내성천 물과 솔숲도 또한 그러하다. / 仙夢臺(선몽대)- 최윤상; 풍수학인의 시각 / 선몽대는 맑은 하늘을 배경으로 물위에 살포시 떠오른 芙蓉[부용]과 같았다 / 옛 문인들이라면 틀림없이 거문고를 키면서 시 한 수를 읊었을 것이다. 선몽대는 당시에 저명한 인사들이 많이 모여 시를 지어 읊으며 선몽대의 창건을 축하해주었으므로 옛 선조들의 정신이 남아있으며 선몽대 앞은 동서로 흐르는 내성천 모래밭 明沙十里를 한눈으로 볼 수 있고 정자주변에 천년을 자랑하는 울창한 노송이 있으며 주변에는 빼어난 경관과 더불어 서당마을과 조선중기 건축사의 귀중한 자료인 연안 이씨 별좌 종택 약포 정탁 선생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정충사가 있음인지 기대하는 바가 매우 컸다 / 이름만 들어도 아름다운 모습이 그려지는 이곳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옛 문인들은 지금 모두 어디로 가셨을까 永生不死(영생불사)하는 신선들이 모여 산다는 초월계나 선계로 가셨을까 다가오는 산맥들이 작으면서 아담한 산봉우리들을 이루었는데 바라보는 필자의 마음을 답례라도 하듯이 그 봉우리들은 아름다운 꽃잎으로 수를 놓은 것처럼 반겨주는 모습이었다. 흐르는 저 물결은 장마철임에도 불구하고 물과 산봉우리들이 어우러져 이곳을 찾는 많은 분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멈춘 것처럼 보였다. 흐르는 물줄기를 그대로 보내기에는 아쉬워서인지 군데군데 水中에 돌이나 흙이 점차 퇴적하여 쌓여진 羅星(나성)들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선몽대는 마치 흐르는 물이 구불구불 강줄기를 감싸주고 있는 저 편에 모래사장이 있어 하늘을 날던 기러기들이 마치 먹이를 찾아 모래사장에 앉거나 물 속으로 들어가는 형상이었다. / 혈의 이름은 平沙落雁形(평사낙안형) 平沙下雁形(평사하안형) 飛雁投水形(비안투수형) 이라고 볼 수 있다. 우리 일행은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선몽대에 도착했다. /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문은 닫혀 있고 우리 일행은 오는 길에 땀을 흘려서인지 지친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데 이한방 교수님은 눈에 안보이시고 문은 안 열리고...아닙니다. 안에 들어가시면 경관이 아주 좋습니다. 이순자 부회장님의 말씀으로 잠시 기다리게 되었다 이윽고 이한방 교수님께서 열쇠를 가져오셨다 / 선몽대란 이름 그대로 퇴계 선생이 집에서 현몽을 하고 지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 아름다운 내성천이 앞에서 유유히 흐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선몽대는 퇴계 이황 선생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 26세에 창건한 정자로서 그 당시 63세였던 퇴계 선생은 아름다운 선몽대를 축하 하기 위해 선몽대란 세 글자를 써주시고 시와 서문을 써주셨다. 약포 정탁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금계 황준량 한음 이덕형 우복 정경세 청음 김상헌 등의 친필로 쓴 글이 전하여 오는 모습에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다 / 특이한 것은 그런 글들이 천장에 놓여있었다. 옛사람들은 천장을 또 하나의 하늘로서 여기었다 무덤에서도 천장에 하늘을 상징하는 것들로 죽은 자를 위한 소우주로 꾸미듯이 / 필자의 생각이지만 서양의 대표적인 반구형 천장인 Dome돔은 라틴어로 Domus Dei(신의집)에서 유래 한 것처럼 친필의 글들이 천장에 있어서 보기에는 불편했지만 우리조상들은 복을 관장하는 가신이나 흉한 것을 부르는 악귀도 천장에 머문다고 믿어 천장에 부적을 붙여 액을 막고 복을 빌었다. 글이 천장에 있는 것은 그분들의 뜻을 기리기 위함인 것 같다./ 우암 이열도 선생은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1576년 39세에 별시 문과에 응시해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조 좌랑 평안도 도사 경산 현감 역임을 마지막으로 여러 차례 조정에 불리어 졌으나 관직에 오르지 않고 선몽대를 세우고 여생을 바친 역사의 유서가 담겨있는 생생한 현장에 우리일행은 배고픔을 뒤로하고 잠시 이한방 교수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무더운 여름철 가 볼만한 계곡이나 명승지를 보면 매일같이 인산인해를 이루며 저잣거리보다 시끌 복잡한 경우가 많은데 이곳의 어르신들은 아름다운 기운이 하염없이 밀려와 온몸을 감아 주는 듯한 훌륭한 전망대인 선몽대를 보호하기 위해서 현재뿐만 아니라 먼 미래의 후손들도 오래도록 두고두고 바라볼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출입을 통제하는 듯하다. / 겨울에는 추위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보이지만 봄은 찾아올 수밖에 없고 여름에는 더위가 끝없이 이어질 것처럼 기승을 부리지만 처서를 넘기는 모습을 바라보며 / 선몽대에서 내다보는 저 물줄기는 가을이 멀지 않았다는 소식을 전하여 주고 있으니 무더웠던 여름도 이제 끝나가는 모양이다 / 蛇頭穴-최윤상; 풍수학인의 시각 / 우리 일행은 선몽대에서의 점심식사를 마치고 이한방 교수님의 案內에 맞추어 사두혈이 있는 장소로 이동하게 되었으므로 우암 이열도 선생의 後孫들이 살고 있는 탐랑체의 산이 아름다운 매의 봉우리처럼 보이는 백송리 마을을 지나 사두혈이 있는 우암 선생묘를 踏査하게 되었다 선생의 묘 앞에서 산의 모습은 마치 뱀 한 마리가 머리를 앞세우고 무엇인가 먹이를 찾아 기어오는 形局이었다 오르는 길에 물을 보니 왼쪽의 논에서 우측으로 물은 산을 감싸주면서 흐르는 모습이고 산밑에 바위 두 개가 박혀 있다기보다 놓여있는 모습으로 보였고 밖에서 보는 것과는 달리 산을 오르는 곳이 경사졌는데 아래의 모습은 제대로 살펴보지 못했다. 밑에 있는 바위를 바라보면서 설명을 붙인다면 生蛇取蛙形이나 長蛇逐蛙形으로 보아야하는데 마치 살아있는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는 形象과 큰 뱀이 개구리를 쫓는 형상이다 산 밑에는 개구리 모습을 닮지는 않았으나 바위 두 개가 좀 큰 것과 그보다 작은 것이 놓여 있었으며 案山은 마치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 담장을 친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보였다. / 사두혈은 뱀 머리가 삼각형처럼 보이는 모습이 먹이를 찾아 내려오며 이럴 경우 모든 氣運은 머리에 集中되므로 보통 혈은 머리에 해당되는 곳에 결지 한다 이곳은 砂格이나 案山이 사두혈로서 부족함이 없어 보였지만 뱀이 갇혀있는 기분이었다. 경계해야할 점은 머리 부분에 혈이 있다 보니 突穴이 많은데 돌혈을 만들기 위해서는 起伏 變化를 해야하며 제일 중요한 結咽束氣處가 확실하며 過峽處가 짧아야한다 過峽하면서 우뚝 솟아오르는 龍脈은 纏護(전호)環抱(환포)藏風(장풍)이제대로 이루어지는 곳에 결혈이 되고 더불어 行龍하고 山勢가 서로 有情하게 朝應해주면서 앞에 있는 案山과 朝山들이 應接해 주어야 한다. 突穴은 주변산들에 비해 지나치게 높아서도 안되며 주변산보다 너무 높으면 바람을 맞을 수가 있다 다음에 혈장을 살펴 볼 때에 달무리나 해무리 모양의 둥글게 보이는 穴暈을 살펴 가까이서 살펴보고 좀 떨어져서도 살펴보아 자세히 보아야하며 혈운 역시 음과 양의 配合이 되어야 하므로 살포시 突하였으면 부드럽게 陷이있어야 하는데 마치 선익이 뚜렷이 보여 바람을 막아주고 혈장 앞은 아름다운 여인이 옷고름을 여미는 듯한 아름다운 자태의 순전이 있어야 제대로 된 上分下合 작용이라 할 수 있다 過峽處를 살펴본 결과 버스를 세워놓고 용의 모습을 본것과는 다르게 힘은 있어 보이나 너무 길어서 기가 많이 설기된 느낌이었지만 過峽處에서 入首倒頭 까지 올라오는 힘은 대단한 氣勢였다 하지만 혈장이 매우 넓지는 못한데도 봉분이 3기가 있었다 제일 위에는 찰방 진성 이공지묘 가운데는 이열도 선생 어머니 묘가 있었고 그밑에 아버지묘가 있었다. 문제는 入首倒頭 에서 선익을 하여 거두어주는 용의 穴場으로 바라보건데 우암 선생묘도 蟬翼과 脣氈에 맞게 지금자리 에서 조금 내려쓰면 아주 좋은 묘가 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되며 그 脣氈의 여기가 어머니묘소로 조금 흘러갔지만 穴場이 狹小하고 아버지 묘에는 生氣가 느껴지지 않았다 地勢로 보아서는 혈은 산이 높으면 높은 곳에 주변의 산이 낮으면 낮은 곳에 써야 되는데 우암 이열도 선생묘가 아쉽지만 그래도 안정적이었다. 입수도두한 용의 힘은 左旋 龍이었고 물은 右水倒左였다 巽坐乾向에 自生向이며 辛戌破였다 건지산이 향의 녹방에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필자의 느낌이지만 혈장이 좁은데 3기의 묘를 쓴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다 앞쪽에 멀리 떨어진 안산으로 보아 마치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듯이 약간 기운 듯한 모습이었으나 명당이 협소하며 용맥의 힘으로 보아서 능력은 있으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환경이 뒷받침이 안됨이 느껴진다. 박사가 많이 나온 것은 사두혈보다는 백송마을의 우뚝 솟은 문필봉이 매봉처럼 보이는 산의 정기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사두혈의 명당이 좁아서 큰 꿈을 실현하기는 어려워 보였고 마치 배가 항구에 있을 때 가장 안전하다고 하지만 넓고 넓은 바다에서 거친 파도와 싸워 이기는 어부만이 만선의 기쁨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안산이 멀리 떨어져 있어 하루가 끝나기 전에 천리를 달려 보겠다는 야망으로 해보겠다는 마음을 굳게 세웠으면 빠른 준마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며 훌륭한 선생에게 묻지 않으면 어려울 것처럼 보인다. 그토록 학인들이 많았던 것도 그런 이유인 듯 하고 마치 구름을 헤치고 햇빛이 비추면 만물은 그 모습을 감출 수가 없으며 지혜를 살려 지난 일을 회고해 본다면 천지 실상에 모습을 모를 리 없듯이 문필봉이 우뚝 솟은 백송리 마을의 덕택으로 학덕이 높으신 분들이 많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사두혈 주변에 명당이 넓었더라면 하는 희망 어린 필자의 아쉬운 소감이 있었다 / 5. 입향조의 묘지경관 / 호명면 백송리 난산(卵山)에는 백송마을 진성 이씨 입향조인 이굉과 이열도의 묘가 있다. 역장으로 이열도의 묘소가 뒤쪽에 있고, 사두혈(巳頭穴)이나 노서하전(老鼠下田)형이라 한다. 묘 오른쪽 도랑에 개구리 바위가 있어 비보풍수의 일종이다. / 참고문헌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2004, 예천 금당실 맛질마을: 정감록이 꼽은 길지, 예문서원 / 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2005, 터를 안고 仁을 펴다: 퇴계가 굽어보는 하계마을,예문서원 /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2002, 예천 맛질 박씨가 일기 1.일용 편(日用) 2.일기 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권문해 저, 남명학연구소경상 한문학연구회 역, 2003, 대동운부군옥 1-10, 소명출판 / 권오봉, 1988, 예던 길-퇴계선생의 생활실사, 우신출판사 / 권오봉, 1996, 이퇴계의 실행 유학, 학사원 / 조동윤, 《길 따라 사람 따라 예천기행》, 역사만들기, 2003, pp.128˜129. / 최원석, <영남 지방의 裨補>, 고려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학위 논문. 2001 / 국민대학교 국사학과,2003, <<우리 역사문화의 갈래를 찾아서 안동문화권>>, 역사공간 / 권기모, 1999, <<정겨운 예천산하>>, 예당 / 권상로, 1994, <<한국지명연혁사전>., 이화문화출판사(1961, 韓國地名沿革考, 동국문화사). / 김학범장동수, 1994, <<마을숲>>, 悅話堂 / 서주석, 2000, 안동문화산책, 이화문화사 / 송지향, 1983, 안동향토지 상하, 대성문화사 / 안동대학교 민속문화연구소, 안동양반의 생활문화, 안동대 민속학연구소 / 안동대학 안동문화연구소, 1988, 경북북부지방의 전통문화, 경상북도 / 안병직·이영훈, 2001, 맛질의 농민들-한국 근세 촌락생활사-, 일조각 (일기형 가계출납부) / 이완규, 2001, 안동풍수기행: 돌혈의 땅과 인물, 예문서원 / 이완규, 2001, 안동풍수기행: 와혈의 땅과 인물, 예문서원 / 최원석, 2000, 도선국사 따라 걷는 우리 땅 풍수기행, 시공사 / 최원석, 2001a, 영남 지방의 裨補, 고려대학교 지리교육과 박사학위 논문. / 최창조, 1997, 한국의 자생풍수, 민음사 / 황위주, 2000, ꡒ예천지역의 퇴계학파ꡓ, 한국의 철학 28호, 113-148,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 경북마을지 하권, 1992, 경상북도경북향토사연구협의회 / 경상북도지명유래총람, 1984, 경상북도교육위원회 / <<내고장 전통가꾸기>>, 1981, 예천군 / <<내고장 예천>>, 1984, 예천군 / 예천군지편찬위원회, <<예천군지>>, 1988, 예천군 / 예천향토문화연구회, <<예천의 숨결>>, 1991, 예천군 / 예천향토문화연구회, <<예천촌락사>>, 1992, 예천군 / 예천향토문화연구회, 1994, <<國譯 襄陽誌(1661)>> / 예천문화원, 1995, <<예천문화 제8집>> / 장병창 편저, 2002, <<예천 대사전 제10권>> / 예천군 기획감사실, 2001, <<사진으로 보는 예천 50년사>> /진성이씨온혜종파세보, 1981, 회상사 / 이동수, 1986, 국역 진성이씨 白松派先世文蹟 / 진성이씨 백송파 종중, 1994, 仙夢臺略誌 / 仙夢臺誌 上下 / //poongsoojiri.org/bbs/view.php?id=record&page=2&sn1=&divpage=1&category=6&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78 /
---1) 조동윤, 《길 따라 사람 따라 예천기행》, 역사만들기, 2003, pp.128˜129./ 2) 조동윤, 앞의 책, pp. 117-130./ 다산이 19살에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찾아 와 책방도령으로 공부하며 고평의 정탁 영정을 배알한 후 선몽대에 올라 기문을 작성하였다. 뒷날 다산은 예천을 추로지향이라 지칭하였다. 200년 전의 선조가 시를 써 놓은 곳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올라 기문을 쓰는 감회는 남달랐으리라!(이한방 예천군청 홈페이지 예천사랑운동참여 2006-03-27 오후 5:32:27 37)
선몽대(仙夢臺) [記事] : 예천 출신인 이명식(大昌高 2)의 호명면 백송리 소재의 정자에 대한 기사로, 대창중고등학교에서 1973년에 발행한 <송대(松臺)> 2호 142-142쪽(1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선몽대(詩와 함께 떠나는 醴泉 紀行 4 : 仙夢臺) [記事] : 감천면 증거리 출신인 조동윤(趙東潤, 醴泉郡廳 勤務)의 호명면 백송리 소재 선몽대에 대한 기사로, 예천문학회(會長 金敎容)에서 2001년에 발행한 <예천문학(醴泉文學)> 24호 가을호 130-139쪽(10쪽 분량)에 수록되어 있다.
선몽대(仙夢臺) [記事] : 호명면 백송리에 있는 정자로, <다산시문집(茶山詩文集)> 제1권에 다산 정약용(丁若鏞)의 시가 있다. “부친을 모시고 선몽대(當時 左議政 鄭琢의 別館)에 올라// 높은 언덕 자리잡아 허공에 솟은 누각/ 술 마시며 유람하니 객이 시름 사라지네/ 꽃잎에 닿은 산중 비 방울져서 떨어지고/ 전나무에 든 시냇바람 우수수 들려온다/ 사신(7代祖 監司 丁士憂가 일찌기 사명使命을 받들고 이 곳에 와서 남긴 壁上의 詩와 記文이 있다)이라 관개는 낡은 자취 서글프고/ 승상(丞相 : 鄭琢)이라 의건(衣巾)은 예전 놀이 상상되네/ 단약 부엌 연기 없어 신선의 꿈 싸늘한데/ 강물과 구름 고금이 절로 한가로워라/”
선몽대("天使 아저씨 來年에도 仙夢臺 놀러 갈게요" : 虎鳴面 박영호(仙夢臺 管理 日傭人夫) 氏) [記事] : 요즘 예천군청 인터넷 홈페이지ꡐ칭찬합시다ꡑ코너가 호명면 선몽대 한 지킴이에 대한 감사의 글과 칭찬으로 화제다. 선몽대 지킴이로 알려진 주인공은 호명면 오천리 박영호(33) 씨다. 2005년 8월 18일 오후, 화제의 주인공을 만나기 위해 찾아간 선몽대는 간간이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이 적막했다. 공중화장실에서 플라스틱 빗자루를 들고 나오는 박영호 씨를 만나 인사를 나눴다. 검게 그을린 얼굴에 환한 미소는 십년지기를 만난 듯 금세 친근함으로 다가온다. 송림을 지나 정자로 안내하며, 옷에 먼지라도 묻을까 얼른 걸레질을 해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눈치를 보니 올 여름 선몽대를 다녀간 관광객들의 반응이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ꡒ별로 잘 한 것도 없는데 이렇게 칭찬을 들으니 부끄럽다ꡓ며, ꡒ많은 분들이 좋게 봐주시니 앞으로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 뿐ꡓ이란다. 박영호 씨는 2005년부터 여름 성수기(90일) 동안 한시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호명면사무소 소속 선몽대 관리 일용인부다. 7월에 처음 시작한 일은 냄새와 악취로 접근조차 어려운 재래식 공중화장실을 청소하는 일이었다. 하루일과는 새벽 5시면 일어나 축사와 농사일 등 집안일을 하고 아침 9시 출근해 종일 선몽대에서 보내는 고달픈 일상이지만 관광객들과 세상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며, 남기고 간 쓰레기를 치우고 주변 정리를 끝내고 나면 피로도 봄눈 녹듯 사라진다. 2005년 여름휴가철에 선몽대를 찾은 관광객은 주말이면 하루 3백여 명. 쓰레기는 평균 1톤이 나왔다. 고단한 나날이지만 틈만 나면 고평교, 형호교, 서당마을 솔밭 등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을 돌아보며, 쓰레기를 수거하는 등 스스로 일을 찾아서 할 정도로 부지런하다는 것이 주변인들의 평이다. 말끔하게 정돈된 송림과 몰라보게 깨끗해진 화장실, 친절함으로 다가오는 박영호 씨의 모습은 2005년 선몽대를 찾아온 관광객들에게 물맑고 인심좋은 예천의 이미지를 심어주는 좋은 본보기가 됐다. 경북 구미에 사는 김미정 씨는 군홈페이지를 통해 ꡒ선몽대에서의 1박 2일이 참 즐겁고 좋았다ꡓ며, ꡒ항상 지금처럼 깨끗한, 다시 가고픈 선몽대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관리하시는 젊은 아저씨의 노고에 감사하다ꡓ는 글을 남겼으며, 서울에서 온 최영란 씨는, ꡒ덥고 짜증나는 날씨 속에서도 밝게 웃으면서 주차를 도와주고 사촌동생들이 물가에 가는 것까지 일일이 챙겨주시는 모습에 너무 감명을 받았다ꡓ며, ꡒ비록 검게 그을려 얼굴은 까맣지만 천사의 마음을 가진 아저씨 때문에 내년에도 다시 가족들과 함께 선몽대를 찾고 싶다ꡓ며 감사함을 전했다. 호명면사무소 복지환경담당 임병철 씨는, ꡒ하나에서 열까지 무엇 하나 나무랄 것이 없는 사람ꡓ이라며, ꡒ몸에 밴 친절함과 근면성실한 자세로 생활하는 박씨의 모습을 보며 한편으로는 대견하고 10월이면 일을 그만두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타깝다ꡓ고 토로했다. ꡒ칠순의 부모님을 모시고 아내와 함께 오순도순 살아가는 것이 소망ꡓ이라는 박영호 씨. ꡒ고향이 좋은데 먹고 사는 일이 제일 걱정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환경미화 쪽 일을 계속하고 싶은데…ꡓ 말끝을 흐리는 박영호 씨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이 느껴진다.(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05-08-26 10:40:42)
선몽대(仙夢臺) [樓臺] : 호명면 백송리 행소리마을 내성천 변에 있는 누대로, 진성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가 1563년에 세웠다. 정면 4칸, 측면 2칸,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다. 이열도는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고, 퇴계 칠필 ‘仙夢臺’라는 글씨와 역시 퇴계의 원운을 비롯하여 이열도, 약포(藥圃) 정탁(鄭琢),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차운시(次韻詩)가 제액(題額)되어 있다. 1924년에 이열도의 유고와 유물을 보관하던 장서각(藏書閣)이 소실되어 심유록(尋遊錄)만이 전하고 절경이므로 찾는 이가 많다.(醴泉鄕校誌 2004)
선몽대(仙夢臺) [樓亭] : 호명면 백송리 74번지(垈)에 있는 정자로, 마을 동쪽 우암산(遇岩山) 북서쪽 벼랑 위에 내성천을 바라보며 위치하고 있다. 퇴계 선생의 종손인 우암(遇岩) 이열도(李閱道)가 1563년에 세웠으나 1623년에 수해로 도괴된 후 1671년에 중건하였으며, 1922년과 1968년에 중수하였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기와집인데, 전면 기둥의 하부에는 콘크리트로 하층주를 세워 누마루를 이루게 하였다.(文化遺蹟分布地圖 醴泉郡 2005)
선몽대(虎鳴面 白松里 '仙夢臺' 아름다운 숲 全國大會 어울림賞 受賞 淸淨醴泉 立證) [記事] : 예천군이 2007년 10월 6일 전남 담양에서 개최된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선몽대(호명면 백송리)를 출품, 장려상인 어울림상을 수상하여 청정 예천의 이미지를 전국에 널리 알리는 계기를 마련했다. 지난 2000년부터 산림청과 사단법인 생명의 숲 국민운동본부, 유한킴벌리가 공동으로 주관하여 실시하고 있는 이 대회는 2007년 총 21개 대상지가 응모했으며, 선몽대는 5백~6백년 수령의 아름드리 노송, 역사적 가치, 마을 숲 보전을 위한 민관의 협력, 숲의 미래에 대한 우수성을 인정받아 수상의 영예를 얻었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 창건한 정자로서 "선몽대" 의 대호 세 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로 뒷산에 병암이 둘러싸고, 동서로 흐르는 내성천 모래밭 평사십리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정자주변은 천년 세월을 가늠할 수 있는 울창한 노송이 둘러싸고 있어 일년 내내 사람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 군 관계자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지역의 아름다운 숲을 잘 보존하고 소중하게 가꾸어 꿈과 희망이 있고 자연과 사람이 공존하며 생명이 넘치는 숲으로 조성하여 청정예천의 이미지를 높혀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金相國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7-10-09 오전 9: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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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