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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667:예천8경 중 선몽대(3)(祝권정미,안나현/弔김교용)
작성자장병창 @ 2014.06.10 06:05:04

  예천의 자랑(3667) : 예천8경 중 선몽대(3)(附 권정미(예천여고, 1위)와 안나현(예천여중, 3위), 육상 전국대회에서 쾌거...축하합니다/김교용 대창학원 전 재단이사장, 9일 별세...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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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몽대(醴泉 白松 仙夢臺 退溪 親筆 詩, 仙夢臺 臺號는 退溪 先生 할배 親筆) [인터넷] :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이며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 창건한 정자로, 선몽대 대호 세 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이다. 신선이 나오는 꿈을 꾼 후 지은 퇴계 친필 현판과 퇴계 선생의 시에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한음 이덕형, 금계 황준량, 청음 김상헌, 다산 정약용 등의 차운 친필시가 게액되어 있다. 특히 대 위에 이르면 내성천 백사장의 평사십리가 한눈에 펼쳐지고 넓고 큰 내가 자랑하듯 울창한 노송이 들어서 여름에는 피서지로 봄, 가을, 겨울에는 산책코스로 좋다. 주변에는 여름철 피서지로 모래사장과 송림 등 경관이 아름다운 '서당마을'과 조선 중기 건축사의 귀중한 자료인 '연안이씨별좌공종택', 그리고 조선 선조 때 명재상 약포 정탁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정충사',  '도정서원'이 있다. [퇴계 친필 시] : 松老高臺揷翠虛 白沙靑壁?難如 吾今夜夜?仙夢 莫恨前時?賞疎(退溪)// 솔은 늙고 대는 높아서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하고,/ 강변에 흰 모래와 푸른 벽은 그림 그리기보다 어렵구나./ 내가 지금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니/ 전날에 가서 기리지 못하였음을 한탄하노라./ [藥圃, 鶴峯, 西涯, 漢陰, 淸陰, 茶山의 次韻詩] : 퇴계 선생의 仙夢臺 韻을 공경히 次韻하다.(鶴峯續集 제1권) -학봉 김성일// 半畝松陰倒碧虛 玉壺今日興何如 憑君更聽儒仙句 便覺塵緣立地疏// 넓다란 솔 그늘이 푸른 허공 가렸으니 술 마시는 오늘의 그 흥취가 어떠한가/ 그대 인해 유선의 시구 다시 들으니 속세 인연 그 자리서 멀어짐을 깨닫겠네./(國譯 鶴峯全集 2, 정선용 譯, 1999, 민족문화추진회) [약포 정탁] : 주인이 능히 스스로 맑고 빈곳을 점쳤는데/ 낭원(郎苑)과 현도(玄都)가 이보다 못하도다/ 꿈을 깨고 몇 번이나 대(臺) 위에 누워서/ 하늘에 찬 달과 별을 보았을까/(*낭원은 신선이 사는 곳이요, 현도는 옥경산에 있다.) [서애 유성룡] : 높은 대(臺)에 올라보니 공중을 의지한 것 같구나/ 고기잡고 낚시질하는 것, 나는 그러하질 못하였네/ 꽃이 뜰에 떨어지니 봄이 이미 늦었는데/ 푸른 주렴 솔 그림자가 다시 소조(蕭條)하도다/ [한음 이덕형] :옥 같은 구름과 구슬 같은 달이 빈 대(臺)에 비치는데/ 유묵(遺墨)을 새로 새기니 그림 같구나/ 늘 이 대에 올라 신선의 꿈을 꾸고자 하니/ 주인이 나를 기다려 드리웠던 발을 걷는구나/ [청음 김상헌] : 모래가 희고 내가 맑아서 담담해 빈 것 같으니/ 옥 같은 산이요 구슬 같은 전원에 비교하는 곳이 어떨까/ 신선의 땅이 하도 멀어 오기가 어렵다 하나/ 이 정자에 오고감을 게을리 하지 말자/ [다산 정약용의 선조 정사우(丁士優)] : 물 속에 있는 신선의 집과 같이 거울처럼 비치는데/ 주인의 마음마저 담박한 듯하네/ 이틀 동안 선몽대에 오르내리니/ 천 척이나 높은 세상 티끌이 생각에 소원하도다/ 난정(蘭亭)의 옛 자취가 이미 허무하게 되었으니/ 좋은 일 이때에 누구와 함께 할 것이냐/ 거북이와 학 같은 분들이 거듭 놀게 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가을이 오매 서신을 보내는 것을 소흘하지 말진저/

 

  [정재원-정약용의 아버지, 1780년 예천군수] : 속인(俗人)이 이에 이르니 자연스레 마음이 허명하구나/ 신선을 꿈꾸는 마당에는 나래가 돋는 것 같도다/ 퇴계 선생이 먼저 시를 쓰고 우리 할아버지가 화답하였으니/ 예로부터 내려온 운치가 소흘하지 않았지요/ [정약용-선몽대記] : 예천에서 동쪽으로 10여 리 가면 한 냇가에 닿는다. 그 시내는 넘실대며 구불구불 이어져 흐르는데 깊은 곳은 매우 푸르고 낮은 곳은 맑은 파란색이었다. 시냇가는 깨끗한 모래와 흰 돌로 되어 있어, 바람이 흩어지는 노을의 아름다운 모습이 사람의 눈에 비쳐 들어온다. 시냇물을 따라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높은 절벽이 깎아 세운 듯이 서 있는데 다시 그 벼랑을 올라가면 한 정자를 볼 수 있다. 그 정자에는 선몽대라는 방(榜)이 붙어 있다./ 선몽대의 좌우에는 우거진 수풀과 긴 대나무가 있는데, 시냇물에 비치는 햇빛과 돌의 색이 숲 그늘에 가리어 보일락 말락하니 참으로 이색적인 풍경이었다. 대개 태백산 남쪽에서 시내와 산의 경치가 뛰어난 곳은 오로지 내성, 영천(지금 영주), 예천이 최고인데 선몽대는 유독 그 기괴한 모양 때문에 여러 군에 이름이 났다./ 하루는 아버지를 따라 정상국(相國, 정탁)의 유상(遺像)을 배알하고, 기을 바꾸어 이 누대에 올랐다. 배회하며 바라보다가 이윽고 벽 위에 여러 시가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중에 하나는 관찰사를 지내신 나의 선대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지으신 것이었다. 시판(詩板)이 깨어져 글자가 갈라지고 한쪽 구석이 떨어져 나가기도 했으나, 자구(字句)는 빠진 것이 없었다. 아버지께서 손수 먼지를 떨어내시고 나에게 읽으라 하고서 말씀하시길, "공이 일찍이 영남에 관찰사로 내려 왔을 때 이 누대에 오르신 것이다. 공이 지금부터 200여 년 전에 사셨던 분인데 나와 네가 또 이 누대에 올라와서 즐기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셨다./ 그러고는 나에게 명하여 그 시판의 시를 옮겨 본떠서 번각(飜刻)하고 다시 단청을 입혀 걸어 놓게 하시고, 이윽고 나를 불러 기(記)를 쓰라고 하셨다.(다산이 19살에 예천군수인 아버지 정재원을 찾아 와 책방도령으로 공부하며 고평의 정탁 영정을 배알한 후 선몽대에 올라 기문을 작성하였다. 뒷날 다산은 예천을 추로지향이라 지칭하였다. 200년 전의 선조가 시를 써 놓은 곳을 아버지와 함께 다시 올라 기문을 쓰는 감회는!1) *지난 가을 백송파 문중 시사 직전에 도둑이 들어와 선몽대의 문짝을 12개나 떼어 가서 선몽대 현판만 남겨 놓고 약포, 서애, 학봉, 한음, 청음, 다산 제공의 시판을 떼어서 종가에서 보관하고 있다. 불행 중 다행으로 퇴계 친필 현판과 시들은 떼어 가지 않았다. 기껏 민속주점이나 까페에 장식용으로 팔려고 이런 짓을 하다니...(다음 카페 : 眞城李氏 退溪의 後孫들이여! 2005.04.28)

 

  선몽대(仙夢臺) [亭子] : 호명면 백송리에 있는 정자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가 벼슬에서 물러나 1563년에 이를 창건하여 독서 자적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선몽대 3자의 현판을 썼고, 한 수의 시를 읊었다. 그리하여 이곳은 우리나라의 경승(景勝)이 되었고, 약포(藥圃) 정탁(鄭琢),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한음(漢陰) 이덕형(李德馨),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중원(中原) 최진방(崔鎭邦) 등이 화운(和韻)하여 친필 시가 게액되어 있고, 멀리 중국 절강(浙江)의 시인 주대승(朱大勝)이 와서 제사(題詞)하였다. 그 후 명인 운사(名人韻士)가 앞 다투어 찬시(讚詩)를 보태어서 1975년 주사손(主祀孫) 이중화(李重華)가 그 글을 모아 <선몽대지(仙夢臺志)>를 발간하였다. 특히 대 위에 이르면, 내성천 백사장의 평사십리가 한눈에 펼쳐지고 가늘고 긴 내가 자랑하듯 울창한 노송이 들어서 여름에는 피서지로, 봄, 가을, 겨울에는 산책 코스로 좋다. 주변에는 여름철 피서지로 모래사장과 송림 등 경관이 아름다운 ‘서당마을’과 조선 중기 건축사의 귀중한 자료인 ‘연안이씨별좌공종택’, 그리고 조선 선조 때 명재상 약포 정탁의 유물을 보존하고 있는 ‘정충사’, ‘도정서원’이 있다.(慶尙北道廳 홈페이지 2002, 醴泉의 金石文 2003)

 

  선몽대(仙夢臺 숲은 名勝의 次元을 넘어 선다 : 乃城川邊 仙夢臺 숲에서 옛 先人들의 자취를 찾다 ①) [記事] : [선몽대 가는 길] : 문경에서 안동으로 이어지는 34번 국도는 예천읍을 왼쪽으로 끼고 내성천 방향으로 이어진다. 새로 난 이 국도를 타고 경도대학을 지나면 청북교차로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나가 옛 34번 국도를 따라가면 예천 진호양궁장이 나오고 내성천을 가로지르는 고평교에 이른다. 이 고평교를 건너지 말고 오른쪽으로 나 있는 927번 지방도로를 따라가면 호명면 월포리가 나온다. 선몽대에 가기 위해서는 월포리에서 직진하여 내성천 북쪽을 따라 가다 오천교를 통해 내성천을 건너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바로 호명면 소재지인 오천리가 나온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호명면소재지를 지나 924번 지방도를 따라가면 바로 백송리에 이르게 된다. 선몽대는 이곳 백송리 75번지에 있는데, 마을 초입에서 우회전하여 들어갈 수 있다. 은행나무 가로수 길을 따라가다 보면 중간에 간간히 적송이 보여 이곳이 선몽대 가는 길임을 짐작케 한다. 조금 들어가면 주차장이 나오고 오른쪽으로 봉서재(鳳棲齋)라는 기와집이 보인다. 이곳에는 약 2년 전에 정착하여 봉서 연꽃농원(//www.achimpia.com)을 가꾸고 있는 김철환 임미옥 씨 부부가 살고 있다. ꡐ숲속에 어리는 백련 향기ꡑ라는 컨셉트를 가지고 연꽃을 가꾸며 여름에 연꽃축제까지 열고 있다. 오고가는 길에 이곳에 잠시 들러 연꽃과 연잎으로 만든 차를 맛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최근에는 연잎으로 만든 냉면과 떡까지 개발했다고 한다. 봉서농원을 지나 오른쪽으로 난 길을 들어가면 선몽대에 이를 수 있다. 단풍나무 가로수가 이어지고 그 끝에 주차장이 있어 이곳에 차를 대면된다. 주차장에서 보면 오른쪽으로 산에 소나무가 울창하고 앞으로는 굵은 적송들이 우뚝우뚝 솟아있다. 그리고 적송 너머로 하얀 모래사장이 펼쳐진다. 이곳이 바로 명승 제19호인 선몽대 숲이다. 안동쪽에서 선몽대에 가기 위해서는 서안동 인터체인지를 지나 34번 국도를 따라 예천방향으로 가다 풍산읍 괴정리 나들목에서 오른쪽으로 나와야 한다. 이곳에서 오미리를 지나 호명면 소재지인 오천리로 간 다음 백송리로 가야 한다. 선몽대에 이르는 길은 지방도로이고 표지판이나 안내판이 거의 없어 찾기가 쉽지 않다.

 

  [적송들이 자리 잡은 강변 풍경] : 예천읍지에 따르면 선몽대는 약 450여년 역사를 지닌 유서 깊은 곳이다. 선몽대는 선비들이 문장을 주고받으며 교유하던 누대(樓臺)이다. 선몽대 주변에는 아름다운 숲이 조성되어 있고 그 앞으로는 내성천이 흘러 자연과 인공이 훌륭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또 선몽대 앞으로 넓게 펼쳐진 명사십리는 시인묵객들의 호연지기를 길러주기에 정말 좋은 곳이다. 선몽대 일원은 이처럼 자연 경관이 빼어나고 역사적 의미가 크기 때문에 2006년 11월 16일 문화재청으로부터 명승 제19호로 지정받았다. 풍수지리상 평사낙안형의 명당으로 알려진 이곳은 영주와 봉화 지역에서 발원한 내성천이 남쪽으로 흐르다 서쪽으로 방향을 트는 곳이다. 선몽대에서 보면 십리에 이르는 하얀 모래 백사장이 좌우로 펼쳐지고, 백사장 건너편으로는 나지막한 야산이 자리 잡고 있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한다. 선몽대 숲은 선몽대와 선몽대 안쪽에 자리 잡은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해방지와 방풍을 목적으로 한 수구막이 숲으로 처음 만들어졌으며, 숲이 하천과 어울려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면서 마을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도 이용되었을 것이다. 선몽대 숲은 우리 선조들의 풍수사상이 깃든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수백 년 된 적송이 선몽대로 가는 물가에 심어져 있다. 이곳의 적송들은 모두 그 굵기가 한 아름이 훨씬 넘어 선몽대의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이들은 서로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각기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고 있으며, 그것이 오히려 소나무의 고고한 자태를 드러나게 한다. 최근에는 나무들이 조금은 노쇠한 기운을 보여 양분을 주기도 하고 가지를 쳐 주기도 한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중간에 가지들이 잘린 채 줄기만이 우뚝 서 있는 소나무도 볼 수 있다.

 

  [숲속에 사람들이 남긴 흔적들] : 선몽대 숲에는 월송정(月松亭)이라는 정자를 중심으로 좌우에 옛날 우리 선인들이 사용하던 연자방아, 디딜방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이들 사이로는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노란 은행잎이 늦가을의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숲에는 또한 ꡐ선대동천(仙臺洞天)ꡑ ꡐ산하호대(山河好大)ꡑ와 같은 글씨가 쓰여 있어 옛 선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선대동천이란 ꡐ선몽대가 산천에 둘러싸여 훌륭한 경치를 이루고 있다ꡑ는 뜻이고, 산하호대란 ꡐ산이 좋고 개울은 크고 길다ꡑ는 뜻이다. 이곳에는 또한 1983년에 세운 우암선생유적비가 있다. 글은 정순목이 지었고, 글씨는 김충현(전면)과 이원기(내용)가 썼다. ꡒ솔바람 향기롭고 맑은 냇물 천고에 한결같이 운형(韻馨)을 함께 하니 이곳은 이름하여 선몽대이다. 백송동천(白松洞天)의 저 외연한 병암(屛巖)은 옛 선몽대 동주(洞主) 우암선생의 경해(?咳)가 깃든 곳이요 그 위에 우뚝 선 일각(一閣)은 공께서 소요장수(逍遙藏修)하시던 자리이다.ꡓ 여기서 운형은 글 향기를 말하고, 백송동천은 흰 소나무가 있는 아름다운 경치를 말한다. 병암은 병풍처럼 우뚝 솟은 바위를 말하고, 경해란 기침소리로 말하니 우암선생의 자취를 뜻한다. 소요장수란 선생이 이곳을 자유롭게 거닐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학문에 힘을 쏟았다는 뜻이다. 선몽대 뒷산으로는 소나무가 울창하게 심어져 있어 적송의 고고함과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다. 12칸의 선몽대 뒤에는 원래 네 칸짜리 학심대(鶴尋臺)와 방학정(訪鶴亭)이라는 누정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두 건물은 좀 더 경사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세월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다음 복원을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역사의 흐름 속에서 선몽대는 지금도 푸른 소나무를 배경으로 하얀 백사장과 푸른 시냇물을 굽어보고 있다.(이상기 OhmyNews 2007.11.26 19:19)

 

  선몽대(仙夢臺에서 만난 退溪와 遇巖과 茶山, 乃城川邊 仙夢臺 숲에서 옛 先人들의 자취를 찾다 ② : 仙夢臺에 걸린 詩들을 通해 過去로 돌아가다) [記事] :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從孫)인 우암(遇巖) 이열도(李閱道, 1538~1591)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다. 퇴계 선생이 선몽대란 이름 세 글자를 쓰고 시를 보내주었다. 이 시를 차운하여 우암 선생이 시를 썼으며, 이후로도 당대의 석학인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이 퇴계의 시를 차운하여 시를 남겼다. 이들 시는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 퇴계와 학맥이 닿는 모든 사람들이 다녀가면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그러므로 선몽대는 명승고적으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유교의 전통을 간직한 역사적인 장소로도 의미가 크다. 선몽대를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암 선생의 후손인 이창노 씨에게 연락해야 한다. 이창노씨는 백송리에 살면서 선몽대를 관리하고 있다. 선몽대는 주사(廚舍: 부엌 겸 재실로 이루어진 10칸짜리 집)을 통해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주사 가운데 문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12칸의 선몽대가 바위 위에 2층으로 자리잡고 있다. 1967년 주사와 함께 중수하였는데 1층은 온돌 겸 지하실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실제 시용할 수 있는 공간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2층 12칸이다. 안에 들어가면 동쪽으로 퇴계 선생이 직접 쓴 선몽대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 건너편에는 퇴계 선생이 선몽대란 이름을 짓게 된 연유를 쓴 현판이 걸려 있다. 끝에 가정(嘉靖) 계해(癸亥) 도산(陶山)이라는 글자가 있어 1563년 도산(퇴계) 선생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선몽대란 제목을 지어 부치다. 寄題仙夢臺// 노송과 높은 누대 푸른 하늘에 솟아있고 松老高臺揷翠虛/ 흰모래 푸른 절벽은 그리기도 어렵구나. 白沙靑壁畵難如/ 내가 이제 밤마다 선몽대에 기대서니 吾今夜夜?仙夢/ 예전에 가서 기리지 못함을 한탄하지 않노라. 莫恨前時?賞疏/” 그리고 한쪽으로는 종조부인 퇴계의 시에서 차운한 우암 선생의 칠언절구 세 편이 걸려 있다. 퇴계의 시에서 허(虛)와 여(如) 그리고 소(疎)를 차운했다. 그 중 두 번째 시가 이곳의 풍경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 “시렁처럼 높이 솟은 작은 정자가 물에 비쳐 한가로운데 小亭高架鏡中虛/ 멀리 갯가와 긴 내를 바라보니 속이 탁 트이는구나. 遠浦長川望豁如/ 외로운 두루미 노을 진 저녁에 여러 형상 드러나니 孤?落霞呈百態/ 늦바람에 흩날리는 비가 쓸쓸하게 내리는구나. 晩風飛雨又疎疎 /”

 

   [다산 정약용이 본 선몽대] : 그리고 아버지인 예천군수 정재원을 따라 선몽대에 왔던 다산 정약용은 이곳에 있는 7대조인 감사공(監司公) 정사우(丁士優)의 시를 본다. 이것 역시 퇴계의 시를 차운하여 쓴 시이다.  “물속에 드리운 아름다운 누대 보배로운 거울을 무색케 하고 一水瑤臺寶鑑虛/ 주인이 품은 마음씨 또한 담백하기 이를 데 없네. 主人襟抱淡相如/ 이틀간을 오르내리면서 선몽대와 함께 하니  ?臨兩日同仙夢/ 천길 위에서 세상 티끌이 내 생각으로부터 멀어지는구나. 千尺紅塵念己疏/”  이 시를 보고 난 정재원은 다산에게 시를 한 수 짓도록 하고 다산은 다음과 같은 시로 화답한다. 이것은 퇴계의 시에서 차운하지 않았다. 선몽대의 모습을 보면서 느낀 감정을 표현한 서정적 칠언율시이다. 풍우(風雨)와 수운(水雲)의 절묘한 조화가 기막히고 사신과 승상의 놀던 흔적이 선연하게 드러난다. 이 시는 퇴계나 우암의 시보다 훨씬 더 사실적이고 또 현실적이다.  “부친을 모시고 선몽대에 올라 陪家君登仙夢臺 // 높은 언덕 자리 잡아 허공에 솟은 누각 中天樓閣枕高丘/ 술잔 들고 올라가니 객의 시름 사라지네. 杯酒登臨散客愁/ 산중의 비 붉은 꽃에 방울져 떨어지고 山雨著花紅滴瀝/ 푸른 소나무 사이로 강바람이 불어온다. 溪風入檜碧??/ 사신의 의관은 지나간 흔적을 슬퍼하도록 하고 使臣冠蓋悲陳跡/ 승상의 의건은 예전에 놀던 일을 기억케 하네.  丞相衣巾憶舊游/ 붉은 부엌 연기 없어 신선의 꿈 싸늘한데 丹?無煙仙夢冷/ 강물과 구름은 예나 지금이나 참 한가하구나. 水雲今古自悠悠/”  [선몽대 나오는 길] : 늦가을 오후의 햇살이 서쪽으로 기울어간다. 이창노 씨와 선몽대 바깥 마루에 나와 선조들이 보았던 풍경을 관찰한다. 동에서 서로 내성천이 휘감아 흐르고 하얀 백사장이 길게 펼쳐진다. 평사낙안 기러기는 찾을 수 없고, 강 건너편에는 작업을 하는 포크레인 소리만이 요란하다. 선몽대가 명승으로 지정되기 전에는 이곳에서 골재를 채취하기도 했다고 한다. 오른쪽으로는 오천교가 보이고, 왼쪽 가까이로는 소나무 숲이 보인다. 선몽대 바로 아래는 절벽인지라 물이 깊어 약간의 소용돌이도 보인다. 선몽대는 물에 가깝고 절벽에 지어져 있고, 건물의 방향이 북동을 향하고 있어 오후에는 그림자가 많이 지는 편이다. 그래서 누가 이곳에 상주할 수는 없고 일이 있을 때만 사용하다 보니 관리가 쉽지는 않다고 한다. 나오면서 보니 주사 대문 옆에 큰 솥이 걸려 있다. 이 솥은 묘제(廟祭)가 있어 음식을 준비할 때만 가끔 사용할 뿐이다. 지붕의 기와에도 잡초들이 무성하다. 이런 것들이 건물의 수명을 단축시킨다는 사실을 알지만 손을 대지 못한다고 한다.

 

  관리비도 부족하고 젊은이도 없고, 요즘 고가나 사당, 누정들이 겪는 공통의 어려움이다. 선몽대를 구경하고 밖으로 나와 선몽대 숲을 거닐며, 이창노 씨로부터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하는 부탁의 말씀도 듣는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숲이나 시설을 훼손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즐겨달라는 것이다. 차를 타고 나오면서 보니 단풍나무 가로수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잎의 대부분이 땅에 떨어져 길 가장자리가 빨갛게 변해 있다. 선몽대는 아마 계절에 따라 우리에게 다른 모습을 보여줄 것이다. 봄이면 신록으로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여름이면 수목이 어우러져 울창한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이다. 여름에는 또한 가까운 봉서농원에 하얀 연꽃이 만발하여 그 아름다움이 두 배가 될 것이다. 그리고 가을에는 단풍이, 겨울에는 흰 눈이 또한 우리의 눈을 즐겁게 할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선몽대 숲은 2007년 10월 담양에서 열린 제8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어울림상을 받았다. 선몽대 숲은 누정과 어울려 아름다움을 만들어내고, 그곳을 찾는 사람과 어울려 역사를 만들어내고 있다. 과거 퇴계와 우암, 다산이 이곳을 찾아 역사를 만들었다면, 현재는 우리 시대의 시민들이 이곳을 찾아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선몽대 안의 문짝 일부는 도난을 당해 새 것으로 갈았고, 이곳에 걸려 있던 편액들도 도난을 우려해 안동에 있는 국학진흥원으로 옮겨졌다. 현재 선몽대에 걸려 있는 편액들은 모두 국학진흥원에 있는 원본의 복제본이다.(이상기 OhmyNews 2007.11.27 15:38)

 

  선몽대(맑고푸른虎鳴21協議會 仙夢臺에서 世界 물의 날 河川 大淸潔 運動 實施) [記事] : 맑고푸른호명21협의회는 2008년 3월 20일 오전 11시 호명면 선몽대에서 김수남 군수, 김시호 맑고푸른예천21협의회장, 이영섭 부의장, 각급 기관단체장과 회원 등 100여 명이 참석하여 제16회 세계 물의 날 행사를 실시했다. 이날 행사는 물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하고 주변 환경 정비를 실시했으며 단체별 책임 구역을 지정하여 호명면 하천변 일대를 깨끗하게 정비했다.(金相國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8-03-21 오전 11:03:21)

 

선몽대 숲(仙夢臺藪) [숲] : 호명면 백송리(白松里) 선몽대 서쪽 아래에 있는 숲으로, 소나무 수 백 그루가 긴 숲을 이루고 있다.

 

  선몽대 숲(稀貴한 소나무와 버드나무) [記事] :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선몽대 숲 200여 년이 된 소나무 가지 5~6m 높이 옹이 부분에 10여 년이 된 버드나무가 자라고 있어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버드나무는 원래 하천 변 등 습기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 수종으로 토양도 없는 나무에 기생해서 자라고 있는 것은 일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아주 희귀한 현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화생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 창건한 정자로서 건물의 이름을 짓기 전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노는 꿈을 꾸고 나서 정자 이름을 선몽대라 지었으며, 현판은 퇴계 선생의 친필이며, 정자 내에는 당대의 석학인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운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가치가 있는 곳이다.(윤현숙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5-05-03 오후 12:03:53)

 

선몽대지(仙夢臺志) [冊] : 호명면 백송리에 있는 선몽대에 대한 기록이 있는 책으로, 이중화가 편집하여 안동인쇄사에서 출판하였다. 안동대 도서관에 소장(KDC 980.22)되어 있다.(인터넷 야후 2001)

 

  예천 선몽대 일원(醴泉 仙夢臺 一圓 國家文化財 '名勝' 指定豫告) [記事] : 문화재청(청장 유홍준)은 경상북도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소재 '예천 선몽대 일원'을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으로 2006년 9월 19일 지정 예고하기로 했다고 18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예천 선몽대 일원'은 선몽대와 인근 숲, 내성천 백사장이 함께 어우러져 한국의 전통적 산수미를 보여주는 역사적․경관적 가치가 큰 곳으로 평가되어 명승으로 지정 추진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며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1538˜1591) 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서 '선몽대'의 대호 세 글자는 퇴계 선생의 친필로 알려져 있으며, 정자 내에는 당대의 석학인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목판에 새겨져 지금까지 전해져 오고 있는 곳으로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 공간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또 선몽대 숲은 선몽대와 선몽대 뒤편 백송리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된 우리 선조들의 풍수사상이 깃든 전통적인 마을 숲으로 100~200여 년 수령의 소나무 노거수와 은행나무, 버드나무, 향나무 등이 함께 자라고 있으며, 예천에서 낙동강 방향으로 흐르는 내성천의 강물과 십리에 이른다는 백사장이 어우러져 빼어난 경관을 자아내고 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되는 '예천 선몽대 일원'은 30일간의 예고 후 문화재위원회의 심의 등 지정 절차를 거쳐 명승으로 지정될 예정이다.(CBS文化部 정재훈 記者 노컷뉴스 2006년 9월 18일 (월) 12:03)

 

  예천선몽대 일원(ꡒ醴泉 仙夢臺ꡓ 15日 國家指定文化財 名勝으로 指定돼, 郡 觀光밸트 造成키로) [記事] : 예천군 호명면 백송리 소재 『예천 선몽대 일원』이 2006년 11월 15일 국가지정문화재인 명승 제19호로 지정되어 예천군은 지역의 전통문화재와 명소들을 연계한 관광밸트를 구축, "관광예천"으로 만들어 갈 계획이다. 선몽대 일원은 <예천군읍지>에 수록된 약 45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유서 깊은 곳으로, 한국의 전통적 산수미를 보여주는 내성천 유역의 대표적 경승지의 하나로 지형은 풍수상 평사낙안형(平沙落雁形)으로 내성천의 백사장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내고 있는 숲으로 수해방비림, 방풍림, 수구막이 숲(홍수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숲), 비보림(풍수상 단점을 보완하기 위한 숲)의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이곳에 자립잡고 있는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자 문하생인 우암(遇巖) 이열도(1538~1591) 공이 1563년 창건한 정자로서 가묘, 재실, 정자와 단, 비각, 비 등의 시설물과 퇴계 선생의 친필인 선몽대 현판을 비롯하여 곳곳에 서애 유성룡, 약포 정탁, 청음 김상헌, 한음 이덕형, 학봉 김성일 등의 친필시가 남아 있는 등 선인들의 유교적 전통공간으로서의 역사적 의미가 큰 경승지의 하나로 경관적․역사적 가치가 큰 곳으로 평가되어 이번에 명승으로 지정된 것으로 알려 졌다. 이로써 예천군은 명승 제16호로 지정된 예천 회룡포와 함께 전국에서 유일하게 명승 2곳을 보유하게 돼, 국가지정문화재 25점과 도지정문화재 54점을 포함해 총 79점의 문화재를 보유한 전통문화의 고장으로 확고한 입지를 굳히게 되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6-11-16 오전 9:32:00)

 

  예천선몽대 일원(名勝地 '仙夢臺' 觀光資源으로 開發) [記事] : 경북 예천군은 선몽대의 명승 지정을 계기로 명승 제16호인 회룡포와 함께 이 일대를 관광자원으로 중점 개발하기로 했습니다. 선몽대는 퇴계 이황의 종손이자 문하생인 우암 이열도가 1563년에 창건한 정자로 내성천이 내려다보이는 물가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정자 주변에는 수령 1~2백년된 아름드리 소나무와 왕버드나무숲이 어우러져 있고 맑은 물과 모래사장이 펼쳐져 말 그대로 평사낙안형의 절경으로 꼽혀왔습니다.(大邱放送 SBS 2006년 11월 21일 (화) 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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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정미(예천여고, 1위)와 안나현(예천여중, 3위), 육상 전국대회에서 쾌거...축하합니다. 

 

  권정미(醴泉女高 권정미 孃, KBS盃 全國陸上選手權大會 400m 허들 優勝했다!!) [記事] : 예천여고 3년 권정미 양이 전남 여수 망마육상경기장에서 열린 제42회 KBS배 전국육상선수권대회 여고부 400m 허들 경기에서 1위를 차지하며 모처럼 육상의 메카 예천군의 명예를 드높혔다. 더욱이 이번 대회에서 권양과 함께 참석한 예천여중 2년 안나현 양도 여중부 근대 5종경기대회에서 3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여 향후 한국 육상의 기대주로 성장할 것으로 대회 관계자들은 내다봤다. 한편 이번에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지역의 명예를 높인 권양과 안양 등 두 사람은 어려운 가정형편 속에서 학교의 도움을 받으며 훈련에 열중하고 있어 지역사회의 따뜻한 관심과 지원이 절실히 필요한 실정이다.(새慶北인터넷뉴스 2014년06월09일 14시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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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교용 대창학원 전 재단이사장, 9일 별세...명복을 빕니다.

 

  김교용(金敎容 大昌學院 前 財團理事長, 別世 : 發靷 11日 午前 10時 學校葬으로 擧行) [記事] : 학교법인 대창학원 전 재단이사장 김교용 선생이 2014년 6월 9일 오전 1시 30분 별세했다. 김 전 이사장은 1918년 태어나 1931년 예천공립보통학교, 1936년 경성보성전문학교, 1939년 동경 명치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1944년 충북도청과, 1950년 예천군청에서 잠시 근무하다가 그해 10월 대창중학교 교사로 근무를 시작으로 대창중·고등학교장 등 44년간 재직해 왔다. 김교용 (전)이사장은 1982년 경상북도 교육대상, 1988년 국민훈장 모란장, 1995년 학교장 자랑스런 신한국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자녀로는 (현)재단이사장인 경호와 정식, 혜영, 경연 등 2남 2녀가 있으며, 빈소는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특1호실이고, 발인은 11일 오전 10시 학교장으로 거행되며 장지는 예천읍 인도사 뒤 선산.(醴泉뉴스 2014년 06월 0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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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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