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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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랑 3718 : <예천대사전 제163권> 오늘 나와, 총 32,600쪽 돌파(附 우경아 예천참우촌 대표, 18일 국제구호기구 표창받아...축하합니다/예천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 요양보호사 국가자격시험 8명 합격...축하합니다/호명면 출신 안도현, <백석평전> 펴내...축하합니다/예천방문 1,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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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대사전 제163권(醴泉大事典 第163卷) [冊] : 예천읍 백전리 109번지 출신인 백산(栢山) 장병창(張炳昌, 中等校長)의 편저로, 32,401~32,600쪽(200쪽 분량), 27cm, 예천에서 장병창이 2014년 8월 1일에 발행하였다. 수록 범위는 “추가 XX : 박지경~반학정”이다. 수록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명 : 백일장고개와 장원봉, 반송,
예천인 : 박지경(1762년 문과 급제, 사헌부지평, 총 23쪽), 박지민(양궁선수, 총 3쪽), 박진(1612년 문과 급제, 교리), 박진구(동양외식산업 대표), 박진보(통정대부), 박진숙(철학박사, 총 3쪽), 박진우(World Review 창간호 만듬), 박진종(1583년 무과 급제, 첨지중추부사),
박진필(1627년 문과 급제, 형조정랑, 총 3쪽), 박찬력(재구예천보문면민회장), 박찬보(한국문화예술신문사 회장), 박찬성(교장), 박찬애(양궁선수), 박찬주(인맥 회장), 박찬중(대성주류판매 회장, 총 14쪽), 박창근(제창한약방 대표), 박창남(경북산업 대표), 박창숙(EBS 장수가족 건강의 비밀에 나옴),
박창영(입자장, 중요무형문화제 제4호, 총 4쪽), 박창일(신용보증기금 기획본부장), 박창호(1927년 독립유공자), 박창호(중소기업청장상 수상), 박창환(권투 주니어 국가대표), 박천록(정략장군), 박천수(1840년 진사시 합격, 총 3쪽), 박천우(좌윤), 박천익(대구대 교수, 총 13쪽), 박철(화가),
박철구(도 교육의원, 총 3쪽), 박철홍(1954년 예천서부국민학교장), 박철환(공학박사, 총 4쪽), 박춘(고려 말의 장군), 박충서(영남대 교수, 총 6쪽), 박충좌(호 치암), 박치(이황의 외조부), 박치대(소설가), 박치온(조선 태종 때 문과에 급제, 사헌부 감찰, 총 3쪽), 박치정(건국대 교수, 총 9쪽),
박태동(목사), 박태령(1773년생, 학자), 박태양(매산인), 박태원(1919년 독립운동가), 박태일(KT 통신망연구소장, 총 8쪽), 박필건(1763년 금릉군), 박필구(서울대 이학박사), 박한주(1485년 문과 급제, 예천군수, 총 4쪽), 박한평(호 세심재), 박해경(자활자립상 수상), 박현수(문화일보 팀장, 총 5쪽),
박현우(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 실장), 박현정(양궁선수), 박현종(KBS 기술본부장), 박현진(변호사), 박혜경(변호사), 박혜선(판사), 박혜현(육상선수), 박호근(재구예천군민회 사무차장, 총 3쪽), 박호생(세종 때, 감무), 박호준(1941년 독립운동가, 총 3쪽), 박호철(1930년 독립운동가),
박호태(영화감독, 총 6쪽), 박혼(1549년 진사시 합격), 박홍린(입향조, 1522년 문과 급제, 예조참판, 총 18쪽), 박홍섭(마포구청장), 박홍진(1888년 진사시에 합격), 박화수(재정경제원 국장), 박후정(드라마 집필자, 총 5쪽), 박훈(입향조, 진사시 합격), 박훈(아이디어회관 대표),
박흥로(방송기자연합회장, 총 7쪽), 박흥석(양궁선수), 박흥수(경성무역 사장), 박희근(판사), 박희문(1586년생, 입향조), 박희민(1687년 문과 급제, 사간원 정언, 총 10쪽),반달해(1651년 무과 급제), 반병섭(민주평통 동해시협의회장), 반석평(1507년 문과 급제, 형조판서, 총 24쪽),
반영(1633년 증광시 합격), 반용귀(고려 때 진사시 합격, 전공총랑), 반우형(1474년 문과 급제, 대사헌, 총 5쪽), 반재원(1894년 집강소의 양향도감), 반재일(1861년생), 반충(1584년 효자정려)
예천인의 저술 : 반공문학의 양상(김태현, 순천향대 교수), 반복복원 기법을 이용한 전자회로기판의 납땜부 형상 복원(권대갑, 한국과기원 교수), 반응표면분석법을 이용한 오가피의 열수 추출조건 최적화(권중호, 경북대 교수), 반응표면분석에 의한 Maillard 반응기질 동적변화 모니터링(권중호),
반응표면분석에 의한 소국 에탄올 추출물의 추출조건 최적화(권중호), 반응표면분석에 의한 홍차로부터 기능성 성분의 침출조건 모니터링(권중호), 반응표면분석을 이용한 생강의 추출효율 및 기능성에 대한 모니터링(권중호),
단체 : 반사모,
문화재 자료 : 반송재 고택(1899년 이건),
누대정사 : 반학정(1780년 다산 정약용이 공부하던 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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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아 예천참우촌 대표, 18일 국제구호기구 표창받아...축하합니다.
우경아(우경아 代表 ‘國際救護機構 表彰받아’) [記事] : 예천참우촌 우경아 대표가 2014년 7월 18일 (사)국제구호기구로부터 사회봉사활동분야에 헌신적으로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표창장을 받았다. 우경아 대표는 예천군장애인협회를 통해 지역 장애인들에 대한 다양한 지원과 봉사활동을 펼쳐왔으며, 수익의 10%는 지역 사회에 환원한다는 초심을 잃지 않고 실천해 오고 있다. 이 자리에서 “당연한 일을 하고 상을 받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라며 “누군가를 위해 나눌 수 있다는 것은 삶의 기쁨이다. 작지만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봉사로 언제나 이웃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참우촌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우 대표는 여성봉사단체인 예천담샘로타리클럽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남편인 김종은 씨와 함께 예천군장애인협회 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14.7.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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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 요양보호사 국가자격시험 8명 합격...축하합니다.
예천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醴泉郡多文化家族支援센터 療養保護師 國家資格試驗 結婚移民者 8名 合格 快擧!) [記事] : 예천군다문화가족지원센터(센터장 김정옥)는 2014년 7월 한국보건의료인국가시험원에서 주관한 제13회 요양보호사자격시험에 도전한 10명의 결혼이민자 중 8명이 합격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요양보호사자격시험반은 한국어 능력이 우수하고 요양보호사자격증 취득을 원하는 결혼이민자 10명을 대상으로 올 3월부터 관내 '요양보호사교육원'과의 연계를 통해 이론수업과 관내 요양병원, 재가시설 등의 현장실습 과정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이날, 요양보호사자격시험에 합격한 결혼이민자는 "요양보호사 자격증 취득에 관심이 많아 신청했는데 막상 공부를 해 보니 어려운 단어들도 많고 이해하기가 어려워 과연 내가 자격증을 딸 수 있을까 고민도 많았었는데 이렇게 합격 소식을 듣고 나니 기분이 너무 좋다"고 말했다. 김정옥 센터장은 "우리 지역에 거주하는 결혼이민자 대부분은 뚜렷한 자격증이 없어서 생산직이나 단순노동직 이외 별다른 선택이 없다 그래서 우리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결혼이민자들의 장점을 자원화하고 전문 인력으로 양성시켜 앞으로 결혼이민자들이 경제적 및 사회적으로 자립을 도모할 수 있는 직업능력 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4-07-30 오후 2:3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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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면 출신 안도현, <백석평전> 펴내...축하합니다.
안도현(<백석평전〉 펴낸 안도현 詩人 "現在進行形 '백석의 삶'…永遠한 探究 對象이죠") [記事] : 1980년대 초반부터 일었던 한국사회의 문화운동은 기존의 어떤 형태의 운동보다도 더 대중적이고 힘있게 사람들을 끌어들여 시대와 현실을 공유하게 했다. 그 문화운동의 중심에는 문학이 있었다. 60년대 김수영이나 신동엽으로 대표되는 참여문학운동, 70년대의 민족문학운동을 돌아보면 우리사회 문화운동의 선도적 역할은 문학에 의해 이루어졌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80년대에 뜨겁게 전개됐던 전북지역의 문화운동 역시 젊은 문학인들이 주도했다. 역사와 시대를 직시하는 문학인들은 '남민시' 동인이나 '땅전'과 같은 무크지 운동을 이끌어냈다. 20대였던 시인 안도현도 그 중심에 있었다. 그리고 30년. 80년대와 90년대, 2000년대를 관통해오는 동안 세상과 늘 치열하게 맞서있었던 시인의 삶은 온전히 글로 담겨 수많은 독자들을 문학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러나 2000년대 중반,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하면서 진보지식인으로 주목받아온 그는 지난해 7월 이후 시를 쓰지 않는 시인이 됐다. 그렇다면 '세상이 어지러울수록 시는 단정한 모습을 보여야 하고, 세상이 차가울수록 시는 따뜻한 편에 서야 한다.'는 그의 시정신을 만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어려워진 것일까. 지난 봄, 선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항소심에서 무죄 판결) 정치참여의 후유증을 단단히 겪고 있는 안도현 시인(53)이 최근 '백석평전'(다산북스)을 펴냈다. 시가 아닌 평전으로 시인을 만나는 일은 새롭다. 더구나 스무 살에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났다는 시인이 10년 넘게 준비해온 이 평전은 '시인적 직관과 통찰력으로 백석의 생애를 완벽히 구성해내는데 성공했다'는 찬사와 함께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시인은 이 책 서문에서 '백석을 베낀 시간들'을 고백한다. 그렇고 보니 안도현의 시에서 백석이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안도현 시인(53)을 만났다. 시대의 경계를 가르고 백석과 안도현이 만나는 지점을 만나고 싶었다. 인터뷰는 우석대 그의 연구실과 완주군 구이면 작업실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백석과의 인연이 꽤 깊더군요. 스무 살 때 백석의 시를 처음 만나셨다니 30여년 세월인데 그때는 백석의 존재가 완전히 가려져 있던 시절 아니었습니까? ="그렇죠. 저도 박항식 교수님이 펴낸 '수사학'에서 백석의 시를 처음 읽었어요. '모닥불'이란 시였는데, 그동안 읽었던 시와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때 알게 되었어요. 〈사슴〉이란 시집이 있고 〈문장〉에 가끔 작품 발표를 했다는 것이 전부였어요." ♦월북시인에 대해 관심이 높았었던 때였나요? ="오히려 관심을 갖는 일조차 금기시 되던 때였죠. 월북작가들에 대한 관심은 87년 6월 항쟁 이후에 그들의 작품이 책으로 나오면서 이루어졌다고 봐야겠죠. 우리 사회 민주화 분위기와 함께 월북 납북 작가들에 대한 재조명이 그때 이루어졌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석은 평남 정주에서 태어나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 활동한 재북작가여서 발표된 시도 제대로 발굴되지 않았었죠."
♦백석 시의 어떤 점이 그렇게 마음을 사로잡았는지 궁금해집니다. ="제가 스무 살 때까지 읽었던 시와는 전혀 다른 시였다는 겁니다. 시 한편이 주는 인상이 아주 강했어요. 향토적인 듯하면서도 모던하고, 시인이 자기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도 독특했어요. 아주 잘 찍은 사진 한 장을 보는 듯 한 감동이었습니다. 백석만의 그러한 독특한 시적 성취는 우리 근대시사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부분이기도 합니다." ♦30년 동안 짝사랑해왔다는 고백이 있던데요. 스무 살 이후 시인의 시를 본격적으로 만날 수 있었던 기회가 있었습니까? = "별로 없었죠. 30-40년대 잡지 속에서 한두 편씩 만날 수 있었던 것이 전부였으니까요. 그런데 작고하신 이광웅 시인이 백석시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선생님이 감옥에서 나온 직후니까 87년쯤 되었을 것 같은데, 노트 한권을 보여주시더군요. 백석의 시를 직접 필사한 것이었어요. 정갈하게 쓰인 그 노트에 새로운 백석의 시가 있었습니다. 그 시를 읽으면서 가슴 떨렸던 기억이 있어요." ♦백석은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많은 시가 실려 있지만 그의 삶과 시에 대한 연구 작업은 여전히 미진한 것 같습니다. ="우선은 발굴된 그의 시가 많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시집은 '사슴' 한권뿐인데, 그 마저도 국내에 대여섯 권 있을 정도로 귀하죠." ♦그래서 이번 평전이 더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 또한 앞서 나온 일대기와 시선집이 없었다면 연구의 진전이 어려웠을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기왕에 나와 있는 백석 일대기는 여러 한계로 오류가 있거나 백석을 지나치게 과장한 경향이 있었습니다. 애초 평전의 취지를 조각조각 흩어져 있던 백석의 생애와 관련된 사실의 객관적 자료를 근거로 재구성하자는데 두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어요." ♦ 평전을 펴낸 특별한 이유가 또 있습니까? ="정서적으로는 30여 년 동안 내가 깃들일 둥지로 나의 시를 견인해준 백석에게 진 빚을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전'이라는 형식으로 백석의 생애를 복원해 본다면 그를 직접 만나는 방식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백석의 후기 시가 연구자들에 의해 발굴되면서 30년대에 '모던보이'로 불리던 시인이 만주로 건너간 후에, 또 해방 후 북에서는 어떻게 그렇게 다른 시를 쓰게 되었는지도 궁금했지요. 그래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습니다." ♦기왕에 나온 다른 책들과 다른 성과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 ="백석이 어떤 계기로 시를 쓰게 되었는지, 그가 일본에서 유학하며 습작할 때 누구의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 그동안 제대로 규명되지 않았었어요. 이 책에서는 1920년대 일본의 모더니즘 시론을 폭넓게 수용했다는 점을 밝혔지요. 시와 산문에 드러나 있는 내용과 그의 행적을 비교해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독자들에게는 백석의 젊은 시절 연인이었던 자야 김영한 여사와의 연애담이 아무래도 흥미로울 텐데요? ="사실 자야여사가 에세이 〈내 사랑 백석〉을 펴낸 후 독자들의 관심이 더 높아졌다고 봅니다. 그런데 그 에세이 역시 기억의 오류로 사실이 잘못 알려진 부분이 있었어요. 그동안 지나치게 과장되었거나 풍문으로만 떠돌던 백석의 연애담과 결혼생활도 가능한 객관적 사실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백석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시인들에 비해 대중적 관심이 훨씬 높은 것 같습니다. 이유가 있을까요? ="수많은 시인 중에서 그런 관심을 받는 것 자체가 특별한 일이긴 하죠. 정지용 김기림 신석정 등 동시대에 활동했던 시인들은 이미 해방 후 교과서를 통해 알려지고, 그러면서 교과서적인 시인으로 굳어졌지만 백석은 그렇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백석이 독자들에게 알려진 것이 1988년 이후이고, 교과서에 그의 시가 실린 것은 90년대 중반부터거든요. 늦게 알려진 덕분에 궁금증을 자아내는 측면이 있고, 다른 시인들은 문학사적으로 규정되었거나 평가가 이미 이루어진 옛날시인처럼 느껴지는데, 백석과 그의 시는 현재 진행형인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렇다보니 백석의 작품이 발굴될 때마다 언론이 주목하게 되고 관심이 증폭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백석은 식민지와 분단 시대를 살았던 시인인데도 친일의 혐의가 없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백석은 해방 이전의 민족시나 저항시 계열의 시인이 아니었지만 친일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해방직전에는 거의 모든 시인들이 친일 작품을 썼지 않습니까. 더구나 백석은 일본 유학에 조선일보 장학금으로 유학생활을 했어요. 친일을 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를 피하기 위해 만주로 갔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다면 이념이 대립된 시대에 어느 한쪽에도 서지 않겠다는 그런 입장이었을까요? ="아니죠. 오히려 어느 한쪽을 확실히 선택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친일을 하지 않겠다는. 그런데 독특한 것은 시는 또 아주 모던한 경향을 보이거든요." ♦문학사 쪽에서 보면 어떻습니까? ="백석을 굳이 민족시인으로 규정하거나 전체적으로 색칠할 필요는 없지만 당시 지식인의 민족의식, 특히 글 쓰는 지식인으로서 가져야 할 민족의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시인이었습니다. 북에 돌아가서 쓴 시들도 겉으로는 체제 찬양하는 시지만 당시 북에서 발표됐던 다른 시인들의 시와 비교해보면 표현방법에 있어서 백석만의 특징이 아주 강합니다." ♦시 못지않게 동시로도 작품 활동이 활발했었다고 하던데요? ="백석은 북에 돌아간 이후 시를 발표하지 않고 동시를 썼어요. 동화시 같은 새로운 장르도 개발했지요. 그러다가 57년쯤 격렬한 아동문학 논쟁을 벌이게 됩니다. 백석은 동시가 이데올로기로부터는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교훈이 담겨있긴 하지만 직접적이지는 않은. 그런데 백석이 동시를 발표하자 북한 문단의 주류 아동문학 작가들이 공격을 시작했죠. 백석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서 아동문학평론을 시작했는데, 그것이 더 격렬한 논쟁으로 이어졌습니다. 주류 측은 아동문학작품에도 사상성을 적극적으로 담아내야 한다는 것이고, 백석은 아이들이 읽는 작품은 사상성 보다는 문학성 예술성이 먼저여야 한다는 입장이었죠. 문학창작의 자율성과 집단적 획일주의가 맞선 셈인데, 이 논쟁으로 결국 백석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문학사에서 백석은 온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보십니까? ="자리를 잡아가는 과정이라고 보는 것이 옳겠죠. 아쉬운 것은 해방이후에 발표한 시에 대해 본격적인 평가 작업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인데, 북한 체제에 순응적인 시들이 많다보니 단순하게 체제순응의 시라고 규정해버리고 있거든요. 그러나 좀 더 세밀하게 분석하면 새로운 평가와 사실이 드러날 수 있을 겁니다. ♦서문에 '백석을 베낀 시간들'을 고백하셨더군요.(웃음) 그래서인지 백석의 시와 닮은 점이 보이기도 합니다. 거대담론보다는 일상의 작고 하찮은 것들에 대한 관심도 그중 하나일 듯 하고요? ="조심스럽지만 어떻게 보면 백석으로부터 배웠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인이 세계를 보는 태도와 자세겠지요."
♦ 화제를 돌려보죠. 요즈음 시는 어떻습니까.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난해한 시가 너무 많다고도 하는데 가뜩이나 시가 안 읽혀지는 시대에 독자들을 밀어내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요? ="특히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는 지나치게 자폐적이고 난해해서 시인이나 비평가들조차도 읽기 힘들어합니다. 한국현대시 자체가 소수 전문가들의 소유로 변해가는 어떤 전환기 같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과거로 돌아가자고 할 필요는 없겠지요. 사실 이런 경향은 세계적인 흐름 이예요. 일상문화의 변화 탓도 있을 겁니다. '스마트 폰'이 우리 일상을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 자신을 강조하고 나 자신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성향이 더 강해지고 있지 않습니까. 젊은 세대들의 시쓰기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죠. 자기 안에서 자기 세계만 들여다보니까." ♦청소년기에 시를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사실 창의력을 키우는 텍스트로 시만큼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적어도 학교교육 안에서는 시가 거의 유일한 셈입니다. 시교육의 목표를 창의력 신장으로 잡는 것이 바람직하죠. 그러나 오늘의 학교교육에서는 아이들이 시를 국어시험에 나오는 지문의 하나 정도로 압니다. 시를 즐기지 못하고 문제풀이의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지난해 7월, 시를 쓰지 않겠다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후에 정말 시는 한편도 안 쓰셨습니까? ="1년 동안 메모도 안했습니다. 제 시쓰기는 보통 어떤 소재를 만나면 메모하고 그것을 컴퓨터에 옮겨 나중에 시를 쓸 때 꺼내어 쓰거든요. 아예 시를 안 쓰겠다고 마음먹었더니 메모도 안 떠오르더군요." ♦세상에 대한 관심도 무디어지는 것 아닐까요? ="할 이야기는 트위터로 하죠. 절대 무디어진 것은 아녜요.(웃음)" ♦시는 언제부터 다시 쓸 수 있게 될까요? ="제 나름대로 시인이 시를 안 쓰는 것도 세상과 맞서는 방식일 수 있겠다 싶어서 택한 일인데 예상보다 마음이 편합니다. 이번 기회에 나를 비우고 좀 더 새로운 시쓰기를 얻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안도현 시인이 펴낸 〈백석평전〉은 한편의 장대한 소설 같은 책이다. 백석을 향한 짝사랑, 그리고 그 경계를 뛰어넘는 존경이 품격 높은 그만의 상상력과 조우하면서 백석의 생애를 온전히 복원하고 있는 덕분이다. 그의 말대로 '현재진행형인 백석'은 안도현의 영원한 탐구 대상이다. 시가 아닌 평전으로 문학의 정신을 다시 새롭게 만나게 해주는 일은 시인 안도현이 독자들에게 돌려주는 선물이다. '시를 쓰는 자유를 내려놓음으로써 더 많은 자유를 누렸던'백석 처럼 시인은 잠시(?) 시를 내려놓고 있다. 더 큰 자유가 그를 기다리고 있을 터다. ● 안도현 시인은 전북 문화운동 이끈 주역…통일ㆍ교육운동도 앞장 : 안도현 시인은 196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났다. 대구 대건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전국의 백일장을 휩쓸었을 정도로 문재를 날렸다. 경희대 장학생 입학자격을 얻었으나 원광대 국문과를 택했다. 대학을 졸업한 80년대 초부터 지역 문화운동의 현장을 지켰던 그는 시인이면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국어교사였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전교조 교사로 교육운동을 벌이다 학교에서 쫓겨나 해직교사가 됐다. 94년 복직이 되어 다시 교단에 섰지만 3년만인 97년, 이번에는 스스로 교직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가 됐다. 대중적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놓은 어른들을 위한 동화 〈연어〉를 내놓은 지 1년만이었다. 전업 작가가 된 후 창작 작업은 더 치열해졌으며 시집과 산문집을 아우르는 작품들을 발표하면서 한국의 대표적 시인이자 인기작가가 됐다. 그는 한동안 연애시류의 시쓰기와 대중들을 더 가깝게 만날 수 있는 산문쓰기에 집중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들여다보면 이른바 '인기작가'나 '대중작가' 되고 대중적 이미지를 공고히 다지는 동안에도 그는 통일운동과 교육운동을 실천했다. 북한어린이돕기로 통일운동의 전면에 나섰으며 사회변화에의 갈망을 정치운동으로 풀어냈다. 2000년대 중반부터 그의 정치활동은 치열해졌다. 덕분에 〈연어〉의 작가 안도현의 대중적 이미지는 '정치적 진보 지식인'으로 바뀌었다. 정치활동 보폭은 갈수록 넓어져 2010년 6ㆍ2 지방선거 때 치러진 교육감 선거에서는 진보진영 후보의 홍보위원장을 맡아 선거캠프를 주도했으며, 국회의원 후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후원회 대표가 되어 벌이는 그의 정치활동은 더 이상 대중들에게 낯설지 않게 되었다. 지난 19대 총선에서는 정치활동 전면에 나서 민주당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으로도 참여했다. 올해 봄, 선거법위반으로 기소돼 법정 다툼을 거쳐 항소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대법원 판결을 앞두고 있다. 그의 정치활동이 적극적이고 공개적으로 전개되면서 대중들은 시인 안도현이 앞으로 정치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갖기 시작했지만 "정치는 하고 싶다. 그러나 정치인은 결코 되지 않겠다."는 입장을 공개적으로 밝힌 이후 자유로워졌다. 대구매일신문(1981년)과 동아일보(1984년) 신춘문예에 당선하며 등단한 그는 〈서울로 가는 전봉준〉부터 〈북항〉까지 열권의 시집을 냈으며 〈외로울 때는 외로워하자〉 〈사람〉을 비롯해 여러 권의 산문집을 냈다.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 〈짜장면〉 〈증기기관차 미카〉 등으로도 주목받았으며 그를 인기작가로 만든 〈연어〉는 130쇄를 기록, 6개국의 언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2004년, 우석대 문예창작과과 신설되면서 교수로 임용돼 다시 교단에 선 그는 10년 동안 준비해온 백석의 시와 생애를 통찰한 〈백석평전〉을 펴내 주목 받고 있다.(김은정 全北日報 201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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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주막막걸리축제 2014(醴泉郡, 세 줄기 江 만나는 酒幕서 시원한 막걸리 한 사발 쭉~ : 來日부터 3日間, 三江酒幕 막걸리 祝祭) [記事] : 나그네와 선비 보부상들의 쉼터 역할을 해 온 낙동강 1천300리 마지막 남은 주막 삼강주막에서 내달(2014년 8월) 1일부터 3일간의 일정으로 '2014 삼강주막 막걸리 축제'가 개최된다. 올해로 5회째인 삼강주막 막걸리 축제는 '나그네 반기는 주(酒) 한 사발'이라는 주제로 펼쳐진다. 삼강주막은 내성천과 금천, 낙동강이 만나는 곳의 나루터로 옛 선비들의 과거보러가는 길목, 보부상들의 쉼터 역할을 해온 곳이다. 낙동강 1천300리에 1900년 무렵 지어져 유일하게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주막이다. 2006년 마지막 주모가 세상을 떠난 후 허물어져 가던 것을 옛날 주막 모습으로 복원함으로써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시원한 막걸리에 배추전, 두부, 묵 등을 안주삼아 사라진 옛 주막의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첫날 오후 개막식 축하공연에는 진성, 박주희, 금잔디, 김양, 문연주, 강문경, 박미영, 선경, 서주경, 신동 등 인기가수들이 신나는 무대를 선보인다. 축제 기간에는 통기타와 트로트, 농악, 사물놀이, 댄스, 악기연주, 밴드공연, 각설이 타령 등 다채로운 공연이 펼쳐진다. 삼강 골든벨, 삼강주막 스타킹, 막걸리 3종 경기, 막걸리 알아맞히기, 얼음 위에서 펼쳐지는 레크리에이션 등 다양한 이벤트도 마련된다. 전시 행사로는 우리나라 대표 술, 막걸리 기획전, 돌담길 갤러리, 예천군 관광사진전이 꾸며진다. 가상음주 체험, 민속놀이 체험, 양반자전거 체험, 취중진담 삼강주막 우체통 등 체험 프로그램도 마련되는 등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만끽할 수 있다. 매일 오후 2~3시에는 삼강주막 막걸리를 무료 시음할 수 있는 삼강주막 막걸리 타임, 예천군 농·특산물 판매장터와 건전한 음주문화 확산을 위한 캠페인도 진행된다. 이기성 예천군 문화관광과장은 "휴가철을 맞아 열리는 삼강주막 막걸리축제는 온 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다양한 체험과 놀이가 마련돼 있다"며 많은 참여를 당부했다.(이상만 記者 慶北日報 2014-07-31)
예천세계활축제 제1회(활의 感動, 醴泉에서 느껴봐요 : 10月 15~19日 第1回 醴泉世界활祝祭 開催 : 漢川體育公園 一圓…박진감 넘치는 피드아處理場도 運營) [記事] : 활의 고장 예천이 새천년의 염원을 담아 세계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제1회 예천세계활축제가 ‘활을 쏘자! 꿈을 명중시키자!’를 슬로건으로 오는(2014년) 10월 15일(수)부터 19일(일)까지 5일 간 예천읍 한천체육공원 및 남산공원 무학정 일원에서 열린다. 세계활축제추진위원회에서는 활의 가치와 즐거움을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새길 수 있는 축제로 만들기 위해 한여름의 무더위를 잊은 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3개월이 채 남지 않은 현재, 미리 그 축제를 살펴본다.
■ 활의 고장 예천 : 예천 전통 활의 역사는 대략 4백년 정도로 알려져 있다. 안동 권씨 예천읍 왕신리 왕산골 입향조인 권재황이 활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 시초가 됐으며, 후손들이 면면이 계승해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과거에는 국민의 심신단련 및 호국정신의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방편으로 활의 사용과 발달을 연구했으며 그 결과 종류도 다양하다.} 「범털과 개털」의 저자 박갑로(전 안동교도소 교도관) 씨가 찾아낸 제천 의병 관련 일부 문서에 `예천의 궁장 4명을 불러다가 목궁(木弓)과 쇠뇌를 만들게 하다'는 대목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예천지역에서는 각궁뿐만 아니라 목궁, 쇠뇌 등 다양한 종류의 활이 제작된 듯하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재까지 그 외형과 제작 기법이 남아 있는 것은 오직 각궁(角弓) 뿐이다. 그나마 전국에서 활동하는 전통 활(각궁) 장인의 70%가 예천 왕신리 왕산골을 본향으로 두고 있다는 점만 봐도 예천이 활의 고장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한편에선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 5연패를 달성해 세계를 놀라게 한 신궁 김진호 선수를 시작으로 스카우트를 통해 예천군청양궁실업팀에 합류한 장용호·김수녕 선수가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거는 등 예천은 양궁의 메카로 입지를 다졌다. 또 예천 토종 윤옥희 선수도 베이징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내는 등 예천군청양궁실업팀은 문형철 감독의 탁월한 지도로 양궁의 전설을 이어가고 있다. 이러한 전설이 있기까지 단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고(故) 이병탁 회장이다. 이병탁 회장은 지난 1987년부터 21년 간 경북양궁협회장, 1980년 한국실업양궁연맹을 창설해 초대회장과 2대 회장, 또 한국중고연맹 33대와 34대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81년 8월 사비 5천만원을 들여 예천군청 남녀 양궁실업팀을 창단해 양궁의 고장 예천의 근간을 다졌으며, 30여년 동안 양궁과 체육 발전을 위해 매년 5천여만원 이상을 지원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양궁을 세계 최고로 만든 장본인인 동시에 예천양궁의 대부로 예천진호국제양궁장 건립, 대구하계유니버시아드대회 양궁종목 예천 개최에 기여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현재는 한국중고양궁연맹 회장인 이현준 군수를 중심으로 김도영 경북양궁협회장이 함께 보조를 맞춰 예천 양궁의 화려한 꽃을 피우기 위해 밤낮으로 뛰고 있다. 뛰어난 경기력으로 전설을 만들고 있는 양궁과 달리 국궁은 4대 1백20년의 가업을 잇고 있는 국내 최고의 전통 활 장인인 경북무형문화재 6호인 권영학 씨가 명장·명궁·명무로 국궁 동호인들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으며, 궁장이수자인 김성락 씨가 왕산골 예천국궁전수관에서 전통 활 제작에 앞장서고 있다. 그리고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된 궁시장 김종국 씨가 예천읍 서본리 본가에서 전통 죽시(竹矢) 제작에 힘쓰고 있다. 전통 활과 함께 전통 궁시(弓矢)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김 궁시장의 전통 죽시는 제작 과정에 있어 그 솜씨가 매우 치밀하며 숙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완성된 죽시의 예술성·조형성 모든 면에서 탁월한 기량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뿌리 깊은 전통이 배어 있는 고장에 걸맞게 세계활축제를 앞두고 지역 가죽공예가인 김재수 씨가 조선 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전통 화살통을 복원해 제작하고 있어 귀추가 주목된다. 이번 제1회 세계활축제에서는 전통 활과 죽시, 화살통이 하나의 완전체가 되어 선보일 예정이다. 또한 전국 최고의 실력을 갖춘 예천군청양궁실업팀과 남산 무학정의 궁사들, 지역민들이 한마음으로 국궁과 양궁을 통해 과거와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활의 고장 예천의 정통성을 세계속에 각인시킬 계획이다.
■제1회 세계활축제 : 이를 바탕으로 오는 10월 15일부터 19일까지 5일 간 활의 고장 예천에서 제1회 세계활축제를 개최할 예정이다. ‘활을 쏘자! 꿈을 명중시키자!’를 슬로건으로 한 이번 축제는 모든 관광객이 활의 진정한 가치와 즐거움을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새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궁극적인 목표다. 개장식은 먼저 세계 전통복장을 착용하고 예천시내 일원에서 퍼레이드를 펼치며, 주요 내빈 및 VIP 입장, 에어샷 연출 및 메인 입구 조형물 등장, 샤막이탈로 주제상징 입구조형물이 등장하는 퍼포먼스가 진행된다. 15일 개막식은 행사장 메인무대에서 연출된다. 먼저 고려시대 최무선에 의해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로켓 화기인 신기전을 직접 발사하는 퍼포먼스가 진행되며, 신기전은 1994년 육군사관학교에서 실제 발사한 이후 이번이 두 번째다. 이어 축하공연과 멀티미디어쇼와 연계한 피날레가 펼쳐진다. 저녁 6시부터는 낙동강 7경 문화한마당! 축하공연이 메인무대에서 열릴 예정이다. 행사장 내 전시관에서는 활에 관련된 스토리를 담은 5개의 ZONE(존)을 구성하며, INTRO(인트로) 활과의 첫만남, 첫 걸음 활이야기, 두 번째 걸음 활 영웅 이야기, 세 번째 걸음 활의 새로운 시선, 네 번째 걸음 소리와 영상으로 만나는 활, 다섯 번째 걸음 가상으로 체험하는 활로 꾸며진다. 남산체육공원에는 동물 타깃과 평면 실사 타깃으로 구성된 9개의 표적을 맞추고 기준점수 획득시 5천원의 농산물 상품권을 지급하는 필드아처리장을 설치해 박진감 넘치는 활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특수효과로 전쟁신(scene)을 연출한 국궁 활 쏘기 체험장과 경기장에 있는 착각을 들게 할 양궁 활 쏘기 체험장은 또 다른 재미로 다가오기에 충분하다. 행사기간 중에 1일 2회 열리는 예천 편사 뮤지컬은 연극영화과 학생들의 협조를 받아 관광객과 함께 팀을 이루어지는 뮤지컬 형식의 체험 참여 프로그램으로 음향효과가 더해져 생동감 넘치는 표현으로 관객몰이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한 무예 24기 중 지상무예와 활쏘기를 중심으로 한 시범, 교전, 베기 등의 무예공연이 진행되며, 활쏘기, 표창던지기, 전통병장기 체험도 직접 할 수 있다. 행사장 공연마당에서는 10개국(중국,일본,몽골,부탄,말레이시아,터키,폴란드,프랑스,미국,영국) 18명으로 구성된 글로벌 전통 활 시연단의 색다른 볼거리도 마련돼 있다. 체험 프로그램으로 대나무 활 만들기, 룰렛으로 점보기, 활로 켜는 악기교실, 활 쏘아 풍선 터트리기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포토존 판토마임 퍼포먼스, 활 캐릭터 코스프레 대회 등 이벤트 행사가 즐거움을 선물한다. 부대행사로는 청소년수련관 청소년극장에서 17일 오전 10시 활 전문가들이 모여 전 세계의 활의 문화를 공유하고, 예천 활의 가치를 널리 알릴 수 있는 자리인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 개최되며, 전통 활 축제 전문가인 홍콩의 스테판 셀비 씨가 기조연설을 맡는다. 예천세계활축제 추진위원회에서는 제1회 세계활축제의 성공개최를 위해 활 쏘기를 취미로 하거나, 활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연예인을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축제기간 30일 전부터 대대적인 언론홍보에 집중할 계획이다. 또한 타 지역축제, 행사에 참여해 홍보부스와 전국 주요도시에서 살찌버스를 통해 국내 사전 홍보를 실시하며, 비즈링을 이용해 적극적인 관객몰이에 나선다.
■주변 관광지 : 먼저 예천하면 떠오르는 곳은 국가명승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천혜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육지속의 섬 회룡포다. 이 외에도 낙동강 7백리 마지막 주막인 삼강주막, 모래사장과 송림이 장관인 선몽대, 계곡과 숲이 우거진 명봉사 계곡, 금당실 전통마을, 세금내는 소나무 석송령, 용문 송림 등 볼거리가 다양하다. 저녁이면 한천 최첨단 영상음악분수에서 펼쳐지는 분수쇼가 삶의 기쁨을 선물하며, 상리면 고항리에 조성된 곤충생태원은 꼭 방문해야 할 예천의 명소 중 하나로 손꼽힌다. 먹거리로는 달리는 청포묵집과 용궁순대, 예천궁의 궁중비빔밥, 한국관과 제주복집의 복어, 백수식당의 한우육회비빔밥 등을 골라서 먹는 즐거움이 누릴 수 있다. 예천축협에서 운영하는 예천축산한우프라자와 김서방숯불, 황소고집, 예천참우촌, 풍양 백번고기집 등에서 예천한우의 참맛을 즐길 수 있다.(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14년 07월 31일 (목) 15:42:30)
석송령(‘만가지 형상’ 醴泉 石松靈, 觀光客 발길 : 稅金 내는 富者나무 全國 名聲에 龍틀임 몸짓·男根·女子가슴 演出 ‘壯觀’) [記事] : 예천군 감천면에는 수령 600년이 넘는 세금 내는 부자나무로 알려진 석송령(石松靈)이라는 소나무가 있다. 석송령은 반송으로 1만 가지의 가지가 열린다고 해서 만지송으로도 불려지고 있다. 높이 10m, 둘레 4.2m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외관뿐 아니라 자신의 이름으로 토지를 소유하고 매년 재산세를 내는 부자나무로 그 동안 언론매체를 통해 국내에 널리 알려지면서 최근 주말마다 석송령을 보러 오는 관광객들로 북적이고 있다. 석송령은 1982년 천연기념물 294호로 지정됐다. 1927년 자식이 없던 한 마을 주민의 재산을 상속받아 현재 5천87㎡의 토지를 보유하면서 매년 세금을 내는 부자나무로 전국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수십 마리의 용이 승천을 하기 위해 소나무에 앉아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세금을 내는 것도 화제지만 특이한 것은 소나무 가지마다 용틀임 몸짓과 남근가지, 여자가슴 등의 형상을 연출하고 있다. 2014년 7월 28일 오후 2시 세금 내는 소나무로만 알려진 석송령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 위해 예천군 감천면에 있는 석송령을 찾았다. 석송령은 반송으로 일반 소나무와는 다르게 옆 가지가 원줄기보다 1.5배 정도 길게 늘어져 있어 한그루의 소나무 밑 있지만 마치 송림에 들어 온 것 같이 크고 아늑함을 주고 있다. 야릇한 막걸리 냄새가 소나무 주변에서 코끝을 자극해 돌아보니 "노목이지만 수 백년 동안 매년 1마디씩 자라고 있다"며 1963년부터 관리를 하고 있는 김성호(77·감천면 석송로) 씨가 관광객들이 소나무에게 준 막걸리 병을 주어 들었다. 김씨는 또 "석송령에게 많은 관광객들이 막걸리를 주고 있다"며 "막걸리가 소나무에게 가장 좋은 영양제"라고 말해줬다. 600년 동안 온갖 풍파를 이겨낸 상흔처럼 축 늘어진 가지마다 힘겨워 세월을 이겨 나갈 수 있게 보존회에서 디딤돌을 마련해 가지마다 나무를 받쳐 주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소나무의 가장 아름다운 결정체가 바로 석송령인 것 같다. 굵고 웅장한 가지마다 세월을 무색케 하는 핏빛을 띠며 건강함과 건재함을 과시하며 앞으로 천년의 세월을 더 이겨 나갈 태세다. 석송령은 가지 끝자락 마다 용틀임 형상으로 수 십 마리의 크고 작은 용이 마치 소나무에 걸터앉아 있는 것처럼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원가지에서 오른쪽으로 뻗은 굵은 가지 중간에는 언제부턴가 남근모양이 생겼다. 남성을 상징하는 남근모양은 최근 관광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다. "이 형상 때문에 자식과 손자들을 얻기 위한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으며 소원을 빌면 잘 이뤄진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언제부터인가 작은 돌들이 소나무 디딤돌에 얹혀 지게 됐다"고 관리인은 전했다. 또 가지마다 하늘로 승천을 하려는 용틀임 형상이 자연스럽게 연출돼 수 십 마리의 용이 소나무에 앉아 있는 것 같아 관광객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보통 소나무 한 그루에 용틀임 현상은 한번 정도 생기고 있으나 석송령은 가지마다 형상을 띠고 있어 보는 각도 마다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석송령을 보는 내내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세월도 비껴간 듯 흔들림 없이 머리를 숙인 다소곳한 아낙네처럼 보이기도 하고 승천을 기다리는 용의 몸짓처럼 웅장함을 뽐내고 있어 찾아오는 관광객들도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다.
부산에서 며느리와 함께 여행을 온 문승광(63) 씨는 "전국 어디를 돌아다녀 봐도 이렇게 아름다운 소나무는 처음 본다."며 "세금 내는 나무, 남근 모양을 지닌 수백 년 된 소나무 소식을 듣고 손자를 얻기 위해 일부러 이곳에 와보니 정말 잘 온 것 같다"고 전했다. 농산물품질관리원 예천사무소장이며, 농화학 기술사·종자기술사인 박승민 소장은 "식물학적으로 훌륭한 DNA을 가지고 있는 세계 최고의 소나무로소 영구 보존의 가치가 높다"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또 "보통 나무는 원줄기가 높게 뻗어 나가는 반면 석송령은 원줄기보다 옆 줄기가 더 길게 뻗어 져 나가 원 줄기보다 1.5배가 더 늘어져 특이하게 자란 세계에서 하나뿐인 소나무다"고 강조했다. 이어 "전문적으로 말하면 보통 나무는 정부우세성(頂部優勢性)에 반하는 형태로 성장하고 있으나 석송령은 그 반대로 옆 가지가 더 크게 성장하고 있다"며 특이함과 우수성을 강조했다. 정부우세성이란 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눈에서 발생한 가지가 세력이 제일 강하게 자라고, 아래 눈으로 내려올수록 가지의 세력이 점차 약해지거나 숨은 눈으로 되는 현상을 말한다. 석송령은 그 반대로 자라고 있기 때문에 식물학계의 큰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다. 예천군농업기술센터 성백경 계장(52)은 "95년도부터 종묘를 채취 해 후계목을 양성하려고 했으나 실패로 난관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으나 새로운 연구와 시도로 마침내 후계목을 생산하게 됐다"고 말했다. 또 "문헌에 따르면 석송골에서 자란 소나무들이 특이하게 밑가지가 뻗어 나가는 형상을 띠고 있어 토양과 지역의 기후에 따른 특성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여진다."며 "그 중에서도 1만분의 1정도가 석송령처럼 큰 형태를 띠고 자랄 수가 있다"고 덧붙였다. 석송령의 종자인 솔방울의 크기 또한 어린이의 주먹만 하고 솔씨도 일반 적송, 금강송보다 크고 굵다. 한편, 예천군은 지난해부터 국립산림과학원 및 문화재청과 함께 천연기념물 석송령의 우량 유전자(Gene)를 추출해 복제 나무를 만들어 유전자를 보존하고 있다. 또 군은 석송령의 기록자원화를 통해 대외적으로 널리 홍보하고 우수한 관광자원으로 발전시키고자 지난해 2월부터 한국기록원과 기네스북 등재를 위한 협약을 맺고 석송령의 기네스북 등재를 추진 중에 있다. 석송령이 있는 예천에서 오늘부터 8월 3일까지 예천용궁전통순대축제가 열린다. 주말, 석송령도 보고 맛있는 순대도 먹고 예천 구경 가면 좋을 것이다.(이상만 記者 慶北日報 2014-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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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