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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721) : 박광배(2)-박광호-박구슬-박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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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배([列邦郵遞局-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宣敎師] 1991年 韓國서 쌀 보내주자 “食糧問題 解決” 온 都市가 들썩) [記事] : 1991년 러시아는 생필품이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 집도 주식인 쌀을 구할 수가 없어 애를 태워야 했다. 매일 쌀을 구하기 위해 가게 이곳저곳을 돌았다. 식량문제를 놓고 기도하던 중 사랑의 쌀 나누기 운동 본부에 도움을 청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당장 먹을 양식이 부족한 러시아에도 사랑의 쌀을 나눠 달라’는 내용으로 편지를 보냈다. 그러자 답신이 왔다. 담당국장이 러시아 현장을 방문하고 결정하겠다는 것이다. 처참했던 러시아 상황을 심각하게 본 담당국장은 ‘컨테이너 하나로는 부족하다.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쌀을 보내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후 쌀을 가득 실은 10개의 컨테이너가 나홋카에 도착했다. 그런데 이 쌀을 누가, 어떻게 분배할지가 문제였다. 나는 쌀 분배에 있어 다음과 같은 원칙을 세웠다. 첫째, 구호물자로 도착했으니 러시아인들에게 돈을 받지 않는다. 둘째, 선교사가 직접 나누어 주면 다음에 또 구호물자를 요구할지 모르니 나는 하나님 말씀만 전하고 쌀은 시청에 맡기자. 셋째, 이 일로 시청에 어떤 대가도 바라지 말자. 아니나 다를까 쌀이 도착하자 사방에서 난리였다. 신문과 방송은 ‘한국에서 쌀이 도착해 얼마간 우리 도시의 양식문제가 해결됐다’는 내용을 연일 보도했다. 도시가 시끌벅적해졌다. 시청은 내게 쌀을 얼마든지 줄 테니 필요한 양을 말하라고 했다. 하지만 처음 결정대로 나는 구호품 배분에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시청은 각 지역의 연금자와 참전용사들에게 쌀을 정확하게 분배했다. 담당자는 수혜자의 이름과 수량을 일일이 기재해 10권 분량으로 정리한 노트를 내게 가져왔다. 주변에선 이 분위기를 타 시청에 아파트를 요구하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정부에 개인적으로나 교회 이름으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자 이 일 이후 정부는 선교하러 찾아온 동양인을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귀빈 대접해 주었다. 시장과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는 핫라인도 만들어 줬다. 그리고 우리 교회 관련 행정처리 전담자로 무히나 부시장을 배치해 줬다. 하나님은 선교지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두려움과 염려, 열등감을 사랑의 쌀을 사용해 없애 주셨다. 이때 나는 국력이 선교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지 뼛속 깊이 알게 됐다. 당시 후원에 동참해 주신 분들과 담당자 분들께 러시아 모든 수혜자들의 이름으로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문서선교의 힘 :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나는 출판사에서 일하며 신학공부를 했다. 이때 나는 책이 선교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게 됐다. 러시아 정부에 쌀을 기증하면서 여러 번 현지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신문사 사장과도 인사를 나눴다. 문서선교의 힘을 알던 난 내친 김에 신문으로 문서전도를 하고자 했다. 신문사 사장은 이런 내 생각에 대환영이란 견해를 보였다. 매주 토요일 신문에 설교를 싣고 하단엔 예배 시간과 장소도 나가니 교회를 알리는 데 이만한 장이 없었다. 신문설교는 믿지 않는 자들뿐 아니라 비밀리에 믿음을 지키던 러시아 지하교회 교인에게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믿지 않는 자들은 신문을 보고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으로 나라에 큰 변화가 오는 구나. 어떻게 신이 없다던 나라에서 외국 목사의 이름으로 신문에 설교가 실린단 말인가?” 구소련 시절 핍박으로 숨어서 예배드리던 지하교회 교인들은 이 설교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좋은 기회가 됐다. 러시아 극동의 작은 도시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이는 내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러시아도 선교가 가능하다는 확신과 믿음이었다. 신문을 보고 많은 이들이 교회를 찾았다. 이들은 설교를 유심히 듣고 기록하는가 하면 설교 중에 질문도 했다. 전도 집회나 다름없는 분위기였다. 나는 형식에 매이지 않고 예배를 진행했다. 질문이 있으면 답하는 식으로 예배를 드리는데 이 또한 러시아인에게는 신선한 충격을 줬다. 지금도 러시아 정교회는 고대 슬라브어로 예배를 드린다. 그래서 예식에 참석만 할 뿐 구체적으로 다 알아듣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저 예배가 끝나기를 조용하게 기다린다. 이것이 이들의 예배 전통이다. 그런데 개신교에서 누구나 알아듣는 말로 설교를 하니 매우 좋아했다. 더 놀랍게 생각한 건 목사가 찬양을 한다는 것이다. 우렁찬 목소리로 찬양하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양이 참 좋고 은혜롭다’는 찬사가 이어졌다. 이때 예배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일일이 적는 이가 있었다. 알고 보니 북한영사관에서 파견한 러시아 경찰이었다. 사복을 입고 성도로 위장한 그의 임무는 모든 예배를 글로 작성해 보고하는 것이었다. 북한영사관은 한국에서 온 젊은 선교사를 목사로 위장한 고정간첩으로 생각했던 모양이다. 예배마다 맨 앞자리에서 설교 내용을 작성해 북한 영사관에 보고하던 그는 시나브로 신앙을 받아들였다. 이후 내게 본인이 이런 임무를 띠고 설교를 들었음을 고백했다. 나는 당당했고, 또 이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기에 그분에게 ‘더 적극적으로 자세히 기록해 보고해도 괜찮다’고 격려했다. 현재 그는 주일학교를 섬기는 신실한 교사로 교회를 섬기고 있다.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다 : 사람들이 교회로 모여들자 문제가 생겼다. 예배 장소가 비좁았던 것이다. 교회당을 짓기로 결정하고 주파송교회에 말씀드리자 서울남교회 박원섭 목사와 이일남 장로, 이창수 장로가 러시아로 급히 들어왔다. 현장을 본 이들은 교회건축비로 1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약속했다. 당시로서는 정말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소식을 성도에게 전했다. 성도들이 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온 도시에 ‘선교사에게 10만 달러나 있다’는 소문이 퍼졌다. 그러자 사업가들이 내게 몰려들었다. 이들은 서로 자기 사업에 투자하라고 제안했다. 투자하고 불어난 돈으로 훨씬 더 많고 큰 교회를 지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내 마음은 똑같다. 헌금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 헌금은 건축을 위한 것이었다. 그때 투자를 제안했던 사업가 가운데 거부가 된 이가 있다. 고려인인 그는 호텔사업과 자원개발에 돈을 투자해 수천억에 달하는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한국을 오가는 비행기 안에서 가끔 그분을 만나면 속이 매우 불편했다. 나는 일반석에 있는데 비즈니스 석에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며 후회가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사업 제안을 거절한 게 잘한 것인지 내적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15년 연속 성장가도를 달리던 이 그룹의 임원진이 어느 날 모두 외국으로 도주했다. 언론엔 이 그룹이 어떻게 회사를 키웠으며 무엇을 했는지가 대서특필됐다. 알고 보니 러시아에서 제일 큰 컨테이너 부두가 있는 나홋카에서 세관장과 직원들, 이 그룹의 임원이 한통속이 돼 밀수로 돈을 벌어들인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가슴을 쓸어내리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국 선교사, 러시아에서 밀수하다 도주’란 제목이 신문과 방송을 연일 장식한다면 어떨지 생각해보라. 러시아 선교뿐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은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이들은 ‘50대 50으로 수익을 배분하자’고 제안했었다. 이를 수락했다면 아마 수천억대의 부자가 됐으리라. 그런데 그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하나님은 재앙을 피하게 해 주셨다. ‘헌금은 내 것이 아닌 하나님의 것이라’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나를 보호해 준 것이다. 여전히 나는 사업제안을 했던 분들이 운영하는 호텔에서 하룻밤 지내기에도 빠듯한 일개 선교사다. 그럼에도 행복하다. 그저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는 것 하나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 ◇ 박광배 선교사 약력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09년 미국 리폼드 신학교 박사 △91년 소련선교회 파송으로 러시아 연해주 나홋카 현지인 사역 시작 △91년 나홋카예수사랑교회 설립 후 로마노브카, 프랄로브카를 비롯한 연해주 농촌지역 5곳에 개척교회 설립.(國民日報 2014-04-21)
박광배([列邦郵遞局-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宣敎師] 到着했던 宣敎地, 맞이한 것은 싸늘한 바람뿐…) [記事] : 나는 시니어 선교사다. 머잖아 현장에서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해외선교사로 지원할 누군가를 위해 먼저 이국땅을 밟은 내 경험을 전하고 싶다. 만일 해외선교사를 파송하는 입장이라면 선교사가 어떤 마음으로 공항을 출발하는지 아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선교사의 고뇌를 구체적으로 안다면 기도 후원도 수월히 될 거라는 기대에서다. ♦선교지로 출발 : 선교사라면 한 번쯤은 공항 출국장에서 남모르게 눈물을 흘렸으리라. 난 이 눈물을 선교사의 초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삶의 여정을 주님 손에 맡긴 채 묵묵히 떠나던 순간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1991년 선교지로 떠나던 날, 당시 서울남교회 당회장인 고(故) 박원섭 목사와 성도들, 지인과 가족들이 김포공항에 모였다. 이들은 선교지로 떠나는 날 위해 손을 잡고 뜨겁게 기도했다. 밝게 웃는 모습으로 인사하고 탑승 수속장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갑자기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흐르는 게 아닌가.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던 나는 배웅해주는 분들을 향해 다시 인사하지 못했다. 선교지에 살림집을 구하고 사역 현장이 정해진 뒤 가족을 데려오기로 했기에 나 홀로 떠나는 길이었다. 가족을 뒤로 하고 떠나는 순간이라 더 울컥했는지 모르겠다. 러시아 선교를 위해 기도해주시는 교회와 지인들, 그리고 미지의 세계로 떠나는 영적군사의 얼굴은 그렇게 눈물로 범벅이 됐다. 러시아 선교사로 지원한 걸 후회해서일까. 아니면 고국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일까.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나를 복잡하게 했다. 한편 마음 한쪽으론 비장한 각오를 새겼다. “주님! 드디어 떠납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지인도 뒤로하고 이제 출발합니다. 나 홀로 가지 않게 하시고 함께해주십시오.” 당시에는 러시아 극동지역 직항이 한국에 없던 때다.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일본 니가타 공항을 거쳐 러시아 하바롭스크행 비행기를 탔다. 가을이라 활주로 밖의 김포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어 고개를 숙였다. 벼들조차 나에게 선교지에서 승리하라는 것 같았다. 알알이 익은 벼를 보며 이렇게 기도했다. “주님, 제 사역도 들판의 잘 익은 벼처럼 영적 추수가 가득하게 해주세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오리라’ 말씀했으니 그 말씀대로 이뤄지게 하옵소서.” 하지만 평안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니가타 공항에서 하바롭스크로 갈 러시아항공기인 아에로플로트를 보니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김포공항을 떠날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활주로에 선 러시아 항공기를 보니 살아 있는 호랑이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다. 비행기 위에 적힌 러시아 알파벳이 눈에 들어오자 “드디어 현실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극도로 긴장하니 괜히 러시아인들의 몸이 크게 느껴졌다. 마음속에 이런 질문이 떠올랐다. “정말 저들 앞에서 영적인 지도자로 설 수 있을까. 저들은 나를 얼마나 작고 초라한 동양인이라 느낄까.” 절망적인 생각이 들었다. 골리앗 앞에 떨던 사울의 군사들처럼 출발선에서부터 떨고 있었다. 초조해하던 내 마음을 다잡게 한 건 다윗의 고백이었다. “저들에게 나아가는 것은 신장이 작은 내가 아니다. 살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가는 거다.” 이렇게 생각하자 내 마음이 한결 가볍게 느껴졌다. 아에로플로트의 거대한 몸통은 굉음을 내며 움직였다. 기내 서비스를 담당하는 승무원의 체격이 정말 컸다. 미소조차 없어 군인 같은 모습이었다. 승무원들의 기세에 눌려 궁금한 것도 질문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비행 도중 러시아인들이 갑자기 옷들을 주섬주섬 꺼내 입는다. 기내 공기가 갑자기 차가워져서다. 공기만으로도 이곳이 러시아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비행기는 하바롭스크 공항에 닿았다. 밖은 이미 어둑해 저녁때였다. 그렇게 기다려온 땅이었다. 가슴이 쿵쾅거리며 요동쳤다. ‘어렵게 도착한 이 땅에 입이라도 맞출까’라는 낭만적인 생각도 품었다. 그러나 내 앞에 펼쳐진 세상은 몸과 마음을 굳어 버리게 만들었다. ♦ 영적군사의 모습 대신 두려움 엄습해 : 비행기를 내리자마자 차가운 공기가 확 밀려왔다. 폐 깊숙이 파고드는 싸늘한 느낌이었다. 날 얼게 한 것은 찬 공기뿐이 아니었다. 공항에 완전무장한 군인들이 도열해 있었다. 승객은 군인이 서 있는 사이로만 걸어 공항 대합실로 들어가야 했다. 놀란 마음을 애써 누그러뜨리며 긴장을 풀려 해도 쉽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공항 분위기 때문이었다. 마치 강제수용소에 끌려온 기분으로 수속을 준비했다. 모든 일을 예측할 수 없어 홀로 망망대해에 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길게 줄을 서 순서를 기다렸다. 드디어 내 차례가 됐다. 국경수비대 군인 앞에서 애써 입가에 미소를 띠려고 노력했다. 입국 수속을 담당한 국경수비대원이 몇 번이고 나를 쳐다봤다. 그럴수록 불안해진 내 입 꼬리는 위를 향했다. 애처로운 수고가 통해서일까. 예리한 눈으로 째려보던 국경수비대원이 큰소리를 내며 내 여권 위에 도장을 찍었다. 통과다. 드디어 러시아 입국이 허락된 것이다. 이민가방 3개를 힘겹게 끌고 공항 밖으로 나왔다. 입국이 됐다는 사실에 흥분한 나는 만나기로 약속한 동료 선교사를 사방으로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도 그가 보이지 않았다. 순간 두려움이 온몸을 감쌌다. “곧 오겠지.” 수십 번을 스스로 다독거리며 위로해도 불안감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았다. 목이 빠져라 기다려도 보이지 않았다. 밤 10시쯤 되자 공항직원도 거의 퇴근했다. 끝내 공항에는 나 홀로 남았다. 당장 러시아를 복음으로 점령할 것처럼 기세등등하게 외쳤던 영적군사의 모습이 아니었다. 여기서 난 그저 생명에 위협을 느끼며 홀로 남은 이방인일 뿐이었다. 작은 동양인이 여행가방을 꼭 쥐고 서 있는 모습을 본 택시기사가 뭐라 집요하게 물었다. 그런데 도통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선교회에서 러시아어를 공부할 땐 굉장히 잘한다고 칭찬받았는데. 정작 현장에서 내 실력은 바닥이었다. 어떤 말도 들리지 않을 뿐 아니라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문득 김영국 장로께서 내게 하바롭스크 주소를 준 기억이 났다. 김 장로는 절체절명의 위기일 때 이곳으로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했었다. 가방 꾸러미에서 어렵게 쪽지를 찾았다. 택시 기사에게 쪽지를 보여주며 물었다.
♦“하라쇼(러시아어로 좋다, 괜찮다는 의미)?” : “하라쇼!” 주소를 한참 들어다보던 뚱뚱한 택시기사가 미소를 띠며 답했다. 당시엔 휴대전화가 없어 나오기로 한 이에게 전화해볼 수도 없었다. 패잔병이 돼 포로로 끌려가는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사방이 캄캄한 밤길에서 택시기사가 목적지에 맞게 가는 건지도 의구심이 들었다. 산속에 차를 세운 뒤 선교비와 생필품이 든 가방을 빼앗진 않을까 불안했다. 손에 땀이 나고 힘이 들어갔다. 창가에 띄엄띄엄 불빛이 비췄다. 주택단지로 들어온 듯했다. 어두운 골목길을 달리던 택시는 한 고층 아파트 앞에 멈췄다. 택시기사가 아파트 안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한 동양인을 데려왔다. 그 동양인은 극도로 긴장한 내게 한국어로 말을 걸었다. “서울에서 왔시유(서울에서 오셨습니까)?” 고려인이었다. ‘이제 살았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 들린 한국어는 내게 한 줄기 희망 같았다. 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 박광배 선교사 약력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09년 미국 리폼드 신학교 박사 △91년 소련선교회 파송으로 러시아 연해주 나홋카 현지인 사역 시작 △91년 나홋카예수사랑교회 설립 후 로마노브카, 프랄로브카를 비롯한 연해주 농촌지역 5곳에 개척교회 설립.(國民日報 2014-02-24)
박광배([列邦郵遞局-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宣敎師] 가룟 유다 품은 예수님을 생각하며 容恕하고 또 容恕…) [記事] : 물건이냐, 생명이냐, 나를 비롯한 대부분 선교사들의 고민은 아마 ‘도둑’일 것이다. 선교지에서 끊임없이 만나는 양상군자(梁上君子)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상하는지 모른다. 선교지에서 도둑을 피해 살 순 없을까. 가능하다. 사역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된다. 일을 안 하는데 무슨 일이 벌어지겠는가. 그러나 선교지에서 일을 하면 사기를 당할 가능성이 높다. 믿고 일을 맡겼던 사람들에게 속는 일도 부지기수다. 그래도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또 용서하고 이들에게 일을 맡긴다.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된다. 나도 선교지에서 황당한 일을 여러 번 겪었다. 그중 첫 사건은 1991년 사역지의 한 가정집에서 일어났다. 당시는 물가가 낮아 한 달에 아파트세로 미화 100달러를 내면 참 괜찮은 집을 얻었다. 그러나 나는 지인이 소개한 집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자동차를 얻어 타며 신세를 졌다. 시간을 내 수고해 주는 주인장이 참 고맙고 미안했다. 보상이라도 해야겠다는 뜻에서 이것저것 선물을 드렸다. 그것으로 어느 정도 계산이 해결됐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주일쯤 지났을까. 사역지로 운전하던 도중 집 주인은 방값 문제를 꺼냈다. “호텔에서 한국 사람이 하루 머물면 50달러는 줘야 합니다. 저는 식사도 매끼 다 주지만 하루에 50달러만 계산하겠습니다. 운전도 해주고 휘발유도 내가 넣는 데다 심부름도 해드리니 자동차 이용비는 하루에 30달러 받겠습니다. 괜찮으시죠?” 그러니까 내가 그 집에 하루 머무는 비용이 80달러란 것이다. 일주일을 지냈으니 계산하면 560달러. 내게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나는 차를 세웠다. 신세는 여기까지 지고 걸어가겠다는 의사를 전했다. 그는 도착해서 이야기하자고 했지만 나는 560달러를 바로 계산했다. 그리고 갈 곳도 없이 무작정 그 집을 떠났다. 현지인에게 속은 일이 이뿐이랴. 교회 건축을 하거나 돈이 들어가는 일을 하면 셀 수 없이 사기당하기 일쑤다. 한번은 건축 중에 야간 경비를 세웠다. 그가 밤이 길다며 TV를 사 달라고 해 경비실에 사두었더니 다음 날 없어졌다. 화장실에 갔다 오니 없어졌다는 것이다. 알고 보니 TV는 경비원 집 안방에 놓여 있었다. 또 다른 경비를 세웠더니 자꾸 건축 자재가 조금씩 없어졌다. 갑자기 페인트 10통이 한꺼번에 없어져 경비를 추궁하자 자고 일어났더니 없어졌다고 하는 게 아닌가. 경찰을 불러 도난신고를 했다. 3시간 후 경찰이 나를 어느 차고로 데리고 갔다. 차고엔 그동안 도둑맞은 자재가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단순히 재산상 손해를 봤다고 가슴앓이를 하는 건 아니다. 후원자들이 십시일반 보내 준 헌금을 잘 관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더 크다. 여기에 후원교회와 교단의 의심이 더해지면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예전에 이웃도시 A선교사가 사역지에서 돈을 회수하지 못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A선교사 교단의 선교책임자가 나를 찾아왔다. “A선교사님이 개인적으로 이 돈을 착복했다고 보십니까. 아니면 돈을 빌려줬다가 회수 못했다고 보십니까?”
“당연히 회수하지 못한 돈이지요. 그 큰 돈을 선교사가 어떻게 착복하겠습니까?”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이사회에 보고할까요?” “있는 그대로 보고하셔야죠.” 이사회를 앞둔 교단의 선교책임자는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다’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이처럼 선교지엔 항상 예상치 못한 일이 암초처럼 선교사를 기다리고 있다.
현지인들에게 사기를 당할 때마다 자신을 팔 가룟 유다를 품은 예수님을 생각한다. 아마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 아픔을 견디며 살 수 있는 건지 모른다. 갑자기 조개에 모래가 들어와 부드러운 살에 상처를 주는 것과도 같으리라. 그러나 아픔을 머금고 있었던 모래는 먼 훗날 진주가 된다. 선교지에서의 아픔을 당하며 살아가는 우리네 소망도 이와 같다. 선교지에서 무언가를 잃고 화를 내다 결국 스스로에게 묻는 질문은 늘 이렇다. “물건이냐? 생명이냐?” 한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이런 사투는 지금도 계속된다. ♦러시아 종교법 : 러시아는 ‘정교회의 나라’라 할 만큼 영향이 크다.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국민정서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런 러시아에 개방 이후 외국선교사들이 경쟁하듯 너도나도 밀려들었다. 그러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단과 정부는 종교법을 만들었다. 러시아에서 15년 이상 활동하지 않은 선교단체나 교회는 국가가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91년부터 선교사가 들어가기 시작했는데 법이 공포된 시점은 98년이었다. 모든 선교사들이 선교지에서 철수할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각 지역 선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기도했다. 선교본부와 상황을 공유하던 중 하나님이 피할 길을 알려주셨다. ‘러시아 현지 교단이란 우산 아래 선교사가 소속되면 살 길이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현지의 침례교단과 오순절교단이 우리를 받아줄지가 걱정이었다. 당시 내가 연해주 선교사회 회장이라 현지교단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했다. 그간 현지의 교회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주려 노력했는데 이제는 상황이 역전됐다. 연해주 현지 침례교 지도자들은 이렇게 답변했다. “어려움을 당한 외국 선교사에게 도움을 주자. 아무 조건을 달지 말고 받아 교회도 살리고 사역자들도 살리자.” 연해주 침례교회의 상부기관인 극동지방회도 같은 답변을 보냈다. 문제는 중앙총회였다. 침례교 지도자들은 모스크바 총회에서 이틀 연속으로 난상토론을 벌였다. 이들은 지역 교회에 지지를 호소하며 모스크바까지 올라온 나를 불렀다. 외국 선교사를 대표해 소견을 말해 보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동역자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우리 사역 앞날의 향방을 쥐고 있습니다. 받아 주면 우리 외국선교사들은 계속 사역할 수 있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이들이 다음 날 구두로 전해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평생 침례교 목사로 남는 조건으로 총회는 외국 선교사를 받는다.’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등 타 교단의 외국 선교사들이 모두 침례교 목사가 되라는 것이다. 러시아 침례교에서는 당연한 결론이었겠지만 우리로서는 아쉬웠다. 훗날 러시아에서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등록이 가능하면 자기 교단을 설립해도 된다는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아서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조차 부족했다. 새 법에 맞게 목회자로 재등록할 기간이 임박해서다. 이 조건대로 하자는 분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러시아 침례교단에서 방언문제로 독립한 오순절 총회가 생각났다. 난 급히 러시아 침례교총회의 결과를 문서로 요청해 총회장 서명을 받은 뒤 같은 날 열린 오순절 총회 현장을 찾았다.
러시아 오순절 총회는 다행히 교회 등록을 할 자격이 되면 교리대로 다시 총회를 만들어 나간다는 조건을 받아줬다. 그야말로 대역전이었다. 오순절 교단에서도 총회 결의 내용을 문서로 받았다. 다음 날 각 지방의 선교사를 모았다. 두 총회 중 어디로 갈 것인지 각자 선택을 하게 했다. 그러자 누가 모든 외국선교사를 대표해 러시아 현지 총회와 교류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내가 겨우 받아낸 서류로 자리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러시아 수도권의 한 선교사가 대표로 선출됐다. 다음 날 쓸쓸히 모스크바 공항으로 가면서 하늘을 바라봤다. 마치 주님이 손짓을 하는 것 같다. “놀라지 말라.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리라.” 선교사의 삶은 이름도, 빛도 없다. 오직 주님만이 영원히 영광을 받으시리라.
♦러시아 나홋카 박광배 선교사 : ◇ 박광배 선교사 약력 △1958년 경북 예천 출생 △86년 총신대 신학대학원 졸업 △2009년 미국 리폼드 신학교 박사 △91년 소련선교회 파송으로 러시아 연해주 나홋카 현지인 사역 시작 △91년 나홋카예수사랑교회 설립 후 로마노브카, 프랄로브카를 비롯한 연해주 농촌지역 5곳에 개척교회 설립.(國民日報 2014-0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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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호(韓國쌀專業農 中央會長 感謝牌 받아) [記事] : 박광호(예천군청 농정과) 주무관이 2011년 3월 18일 쌀전업농 육성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사)한국쌀전업농 중앙회장 감사패를 받았다.(醴泉新聞 2011년 03월 28일 (월) 09: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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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구슬(醴泉女高 박구슬 100m허들 優勝) [記事] : 경북 여자육상의 기대주 박구슬(예천여고)가 2004년 9월 제33회 추계전국중․고육상경기대회 여고부 100m허들에서 우승을 하였다. 2004년 경북도민체전 최우수선수인 박구슬(예천여고)이 14초92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嶺南日報 2004-09-21 장준영 記者)
박구슬 : 박구슬 경북 육상 100미터 허들 최고 기록 경신/ 이름 : 파란나라 (andongori@yahoo.co.kr)/ 조회수 : 772/ 박구슬(예천여고), 경북 육상 100m 허들 최고기록 경신 박구슬 허들 유망주 박구슬(예천여고)이 17년이나 묵은 경북육상 여고 100m 허들.../ //yecheon.hs.kr(daum 2010)
박구슬 : 박구슬 선수, 부상투혼, 4백m 계주 출전 1위 차지/ 이름 : 박상배 (andongori@yahoo.co.kr)/ 조회수 : 700/ 박구슬 선수, 부상투혼, 4백m 계주 출전 1위 차지 지난해 경북도민체전 최우수선수상 수상자인 예천여고 박구슬(3년) 양이 연습도중 발목 인대.../ //yecheon.hs.kr(daum 2010)
박구슬 : 2004 박구슬 육상경기 입상기록/ 2004.10.29/ 박구슬 육상경기 입상기록 □ 2004년 일시 대회명칭 주최 종목 등위 기록 풍향 학년 비고 2004.04.20 제33회 전국종별육상선수권대회 대한육상경기연맹 100mH 3등 14“80 예천여고 2학년 전국대회 400mH 1등 1′04″72 2004.04.28 제33회.../ //cafe.daum.net/sjilga/ 순진일가(daum 2010)
박구슬 : 41회 도민체전에서 구미시 우승/ 2009.04.03/ ...4관왕에 오른 박혜정(경산)은 최우수선수의 영예를 안았고 육상에서 4관왕이 된 김영현(구미.체육고)과 박구슬(예천여고)은 우수선수상을 받았다. . . 성취상은 영주시.봉화군이, 모범선수단상은 안동시.김천시.청송군이, 입장상은.../ //blog.daum.net/sportsgumi/ 구미시체육회(daum 2010)
박구슬 : -전국체전-<전적종합>(9일)/ 2004.10.09 (토) 오전 6:37/ 정순옥(전남) 12초55 3.김태경(서울) 12초58 △여고 100m허들 1.김수빈(대구) 14초49 2.정혜림(부산) 14초51 3.박구슬(경북) 15초22 △남일 100m 1.강태석(경기) 10초76 2.임희남(경기) 10초84 3.이광필(광주) 10초92 △여고 원반던지기.../ 연합뉴스 | 미디어다음(daum 2010)
박구슬 : -전국체전-<전적종합>(11일)/ 2003.10.11 (토) 오전 8:04/ (제주) 13초95 3.이광선(인천) 14초67 △동 여고부 100m 허들 1.김수빈(대구) 14초18 2.정혜림(부산) 14초46 3.박구슬(경북) 14초58 △남자일반부 5000m 1.김이용(경북) 14분10초52 2.지영준(충남) 14분19초74 3.박상문(경기) 14분31초.../ 연합뉴스 | 미디어다음(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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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규서(朴規緖) : 구분: 독립운동가옥고(獄苦)기록/ 날짜: 1919-05-05/ 분류: 인물 > 독립운동가자료 > 독립운동가옥고(獄苦)기록/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수형인명부 - 사료메타 상세 조회/ 이름(이명) 박규서/ 한자명 朴規緖/ 생년월일 1881-09-13/ 본적 慶北 醴泉郡 龍門面 德新洞 170/ 출생지 慶北 醴泉郡 龍門面 德新洞 170/ 주소 慶北 醴泉郡 龍門面 德新洞 170/ 직업 농업/ 비고 정식재판청구권포기/ 죄명 보안법위반/ 형기구분 태형-도 형기 태 90/ 복역월수 징역 : 0 집행유예 : 0 태 : 90/ 판결일자 1919/05/05 확정일자 1919/05/05/ 판결처 예천헌병분대 소장처 경북 예천군 용문면 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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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