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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3759) : 예천세계활축제(11) 권영록(2)-권영식-권영학(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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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록(權寧錄) [記事] : 조궁술을 가업으로 이어온 지 400년, 무형문화재 47호, 권영록 옹은 조상들의 얼을 재현시키기 위해 50여 년 간을 활과 더불어 살아왔다. 옛부터 활의 고장으로 이름난 경북 예천, 소백산의 정기 속에 맑은 시냇물은 옥류와 같은 활의 고장으로 더한층 돋보이게 한다. 권옹이 활 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16세 때부터인데, 조궁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부친 권태선(權泰善) 씨의 옆에서 일손을 거들면서 전수자의 기초를 닦았다. 그로부터 48년의 긴 세월을 오직 활과 함께 살아왔다. 그 동안 20여만 장의 활을 만들어 국내 뿐 아니라, 일본, 홍콩 등에 수출도 많이 했다. 권옹의 가업은 400년 전 조선 숙종 때 11대 조상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인 개성에서 기술을 익혀 지금의 예천읍 왕신동에서 조궁업을 시작했다. 계황-광필(光弼)-성은(聖殷)-희직(熙直)-무겸(舞兼)-만영(萬榮)-병위(丙褘)-동락(童洛)-태선-영록 옹으로 이어졌다. 조궁 가업은 7대조 때 명궁으로서 그 이름을 떠치기 시작했다. 희직은 10만 장의 활을 만들었다. 이 활은 외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 때의 공으로 희직은 교위 용장(校尉勇將, 現 軍人敎官)의 벼슬까지 하사받았다. 이로 인해 권씨 가문은 활의 명궁으로써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퍼졌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사직공원 뒤, 황학정에서 쏘던 활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시사하던 활이 모두 권옹의 작품이었다. 해방 3년 전부터 물소뿔 수입이 금지되면서 권옹의 가업도 중단되었다. 1948년 이 소식을 들은 이 대통령은 권옹을 경무대로 불러 위로한 뒤, 그 자리에서 물소뿔 수입을 명령할 만큼 우리 활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국궁의 종가 권영록 옹은 예천읍 남본동 245번지, 나직한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 목조 3칸짜리가 그의 집이자 작업장으로, 현재까지 활 만드는 가업은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계속 내려왔다. 경북 예천은 옛부터 활을 사랑하고, 활쏘기를 즐긴 궁술의 고장, 군내 1읍 11면 중에서 예천읍 남본동은 사내아이 걸음마 배울 때 활을 잡히고, 천자문 깨우칠 때 첫 시위를 당겨준다는 활 마을이다. 고추를 낳으면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달아놓는 대신 이 마을에서는 활을 걸어주기도 한다. 이 마을에 궁도가 번성한 데는 대대로 명궁을 만들어 후학을 키워온 조궁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기(郡技)가 궁도이고, 예천여고, 예천중의 교기가 궁도이며, 읍민 2만5천 명 중 반이 활을 쏜다는 자랑이다. 세계궁도대회에서도 이름 날린 김진호, 황숙주 등이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하여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다. 마음이 어지럽고 정신이 흔들려서는 활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뜻과 몸을 바르게 하는 본체가 궁도이기 때문이다. 권옹은 장남 오규(五奎, 42) 씨와 3남 오덕(五德, 35) 씨, 동생 영호(寧浩, 57) 씨, 영덕(寧悳, 42) 씨, 영강(寧康, 36) 씨를 비롯 친척동생 영익(寧翊, 36) 씨 등 6명에게 기술을 전수해줬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활은 한 해 2만 장 가량 되나 권옹 집에서 70%를 생산하고 있어 명실 공히 조궁계의 종가를 이루고 있다. 권옹은 78kg의 체구에 봄가을 전국 230개 사장(활 쏘는 장소)에서 고문으로 초청 받아 시범으로 쏘기도 하고, 심판으로 활약하면서 자신이 만든 활이 창공을 날아 표적에 명중하는 쾌감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물맛이 차고 달아 이름 붙여진 예천읍 궁술에서 활달한 기품을 키우고 궁도에서 예절을 배우는 주민들은 국궁의 후예답게 활터에서 산다. 권옹은 전통을 잇는 보람에 더욱 좋은 활을 만들기에 더욱 정성을 쏟고, 우리의 문화재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활을 아는 사람이 찾아줄 때가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조상의 얼이 담긴 국궁을 사랑하는 예천군민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醴泉女子中學校)
권영록(權寧錄) [弓矢匠] : 1916-?, 본적은 예천읍 왕신리 169번지, 주소는 예천읍 남본리 245번지이다. 무형문화재 제47호(1971.9.13 指定)로서, 슬하에 3형제(長男 五奎, 2男 五榮, 3男 五德)에게 전수하였다. 학력은 한학이다. 부속품으로 톱(길이 55cm) 1개, 활밀이(길이 75cm) 1개, 줄(길이 45cm) 1개, 나무찝개(길이 40cm) 1개, 짜귀(길이 27cm) 1개, 두루자(길이 29cm) 1개, 사련(길이 28cm) 1개, 심빗(길이 18cm) 1개, 도가니(직경 13cm, 높이 12cm) 1개, 디짐지(직경 23cm) 1개, 대칼(길이 26cm) 1개, 대빗(길이 25cm) 1개, 심노이빗(길이 21cm) 1개, 도지계(길이 35cm) 1개이다. 활 만드는 기술자인 그는 본관이 안동, 시조 태사공 권행(權幸)의 34세손이다. 그의 조궁술(造宮術)은 조선 영조 때 그의 7대조인 권희직(權熙直, 활 製作의 功으로 當時 校尉, 勇將의 벼슬까지 지냈다)으로부터 대대가업으로 전승되어 왔다. 특히 11대조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인 개성에서 조궁술을 익혀 예천읍 왕신동으로 옮겨 대대로 살다가 권영록이 남본동 245번지로 이거 궁방(弓房)을 설치하고 활을 제작하였다. 그가 조궁에 종사케 된 것은 16세 때부터 연마하여 활의 인현력(引眩力)을 마음대로 조절해서 여러 가지 활을 만들어 관혁(貫革)에 맞히면 반동으로 되튀기게 할 수도 있고, 한(漢) 나라 유총(劉聰)의 활처럼 철판을 뚫을 수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국에 산재해 있는 자신의 활을 쏘는 소리만 듣고도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다고 한다. 전국 활 생산량의 70%를 권영록이 제작하고 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물소뿔을 구할 수 없어 6년 간 활 제작을 중단하다가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특별 배려로 조궁업을 계속하였다. 신장 173cm, 체중 72kg, 건강한 편이었다. 아들 권오규(權五奎, 1938-?)에게까지 전수시켜 후계자로 양성하고 있다. 예천군내 활 제작자는 권영록, 권영호(權寧鎬), 권우갑(權又甲), 권선출(權宣出), 이치우(李致雨) 등 5명이고, 타지의 활 제작자는 권태은(광주), 권영덕(구래), 권인수(울산), 권태기(울산), 김봉원(진해), 기타(안동, 영주)이다. 예천읍에 궁도협회가 조직(會長 崔元漢, 會員 50名)되고, 남산공원에 무학정(武學亭, 弓道場)이 설치되어 무사도를 닦는다. 그리하여 도대회, 전국대회에서 석권하였다. 김장용(4단), 권영학(3단), 권오규(2단)를 사범으로 위촉하여 계속 궁술을 익히고 있다. 궁도을 군기로 삼고 예산 지원(국궁 50%, 양궁 50%)을 군청에서 하고 있다. 양궁은 국궁에 힘입어 1970년대에 예천여중고(교장 장기오)에서 양궁부를 창단하여 선수를 많이 양성했다. 그리하여 소년체전, 아시안게임, 세계궁도대회에서 석권하였다. 국궁의 제작 기간은 활 1개에 4개월이 소요되고, 국궁의 값은 6만-30만 원, 전통궁의 값은 5만-30만 원(포항, 광주), 화살은 10개에 1만 원(개당 1천 원)이고, 권영록의 생계 보조금은 문공부에서 국고로 매월 8만 원(연간 96만 원)을 지급한다. 본래 활은 어느 민족이나 다 공유(共有)하던 무기요 수렵 도구이다. 아득한 옛날의 돌화살촉의 발견은 인류가 신석기시대 이래 활을 얼마나 중요한 이기(利器)로 사용했던가를 입증한다. 적어도 우리 나라에 총이 수입된 이조 말기까지 2,000여년 동안 활은 먼 거리의 표적을 겨누는 대표적 무기였음에 틀림이 없다. 조고선 혹은 삼국시대에 관한 기록을 보면, 한민족이 활을 잘 쏜다는 칭찬이 자자할 뿐더러 그 활의 우수함을 높이 평가하였다. 또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 보내는 선물 가운데도 활이 중요 품목의 하나로 되어 있었다. 세계의 허다한 활 가운데 우리 나라의 활은 활장(弓幹)이 짧은 편이어서 단궁(短弓)이라 한다. 단궁은 중동의 ‘터키’에서부터 몽고, 중국, 한국에 분포하는 즉 기마민족계(騎馬民族系)의 것이고, 일본이나 서양의 것은 해양계(海洋系)의 한 길이 넘는 활이다. 활장이 긴 것은 연궁(軟弓)이어서 화살의 미치는 거리가 짧기 마련이고, 멀리 미치는 것은 강궁(剛弓)일 수 밖에 없다. 현재 국궁의 관혁 거리는 145m지만 옛날엔 190m였다 한다.(1970년대)
권영록(權寧錄) [記事] : 조궁술을 가업으로 이어온 지 400년, 무형문화재 47호, 권영록 옹은 조상들의 얼을 재현시키기 위해 50여 년 간을 활과 더불어 살아왔다. 옛부터 활의 고장으로 이름난 경북 예천, 소백산의 정기 속에 맑은 시냇물은 옥류와 같은 활의 고장으로 더한층 돋보이게 한다. 권옹이 활 만들기를 시작한 것은 16세 때부터인데, 조궁장으로 명성이 높았던 부친 권태선(權泰善) 씨의 옆에서 일손을 거들면서 전수자의 기초를 닦았다. 그로부터 48년의 긴 세월을 오직 활과 함께 살아왔다. 그 동안 20여만 장의 활을 만들어 국내 뿐 아니라, 일본, 홍콩 등에 수출도 많이 했다. 권옹의 가업은 400년 전 조선 숙종 때 11대 조상인 권계황(權繼黃)이 활의 본고장인 개성에서 기술을 익혀 지금의 예천읍 왕신동에서 조궁업을 시작했다. 계황-광필(光弼)-성은(聖殷)-희직(熙直)-무겸(舞兼)-만영(萬榮)-병위(丙褘)-동락(童洛)-태선-영록 옹으로 이어졌다. 조궁 가업은 7대조 때 명궁으로서 그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희직은 10만 장의 활을 만들었다. 이 활은 외적을 무찌르는데 큰 공을 세웠다. 이때의 공으로 희직은 교위 용장(校尉勇將, 現 軍人敎官)의 벼슬까지 하사받았다. 이로 인해 권씨 가문은 활의 명궁으로써 전국 방방곡곡에 소문이 퍼졌다. 고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 사직공원 뒤, 황학정에서 쏘던 활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아산 현충사에서 시사하던 활이 모두 권옹의 작품이었다. 해방 3년 전부터 물소뿔 수입이 금지되면서 권옹의 가업도 중단되었다. 1948년 이 소식을 들은 이 대통령은 권옹을 경무대로 불러 위로한 뒤, 그 자리에서 물소뿔 수입을 명령할 만큼 우리 활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국궁의 종가 권영록 옹은 예천읍 남본동 245번지, 나직한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곳에 목조 3칸짜리가 그의 집이자 작업장으로, 현재까지 활 만드는 가업은 한 번도 끊기지 않고 계속 내려왔다. 경북 예천은 옛부터 활을 사랑하고, 활쏘기를 즐긴 궁술의 고장, 군내 1읍 11면 중에서 예천읍 남본동은 사내아이 걸음마 배울 때 활을 잡히고, 천자문 깨우칠 때 첫 시위를 당겨준다는 활 마을이다. 고추를 낳으면 새끼줄에 빨간 고추를 달아놓는 대신 이 마을에서는 활을 걸어주기도 한다. 이 마을에 궁도가 번성한 데는 대대로 명궁을 만들어 후학을 키워온 조궁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군기(郡技)가 궁도이고, 예천여고, 예천중의 교기가 궁도이며, 읍민 2만5천 명 중 반이 활을 쏜다는 자랑이다. 세계궁도대회에서도 이름 날린 김진호, 황숙주 등이 금메달, 동메달을 획득하여 국위를 선양하기도 했다. 마음이 어지럽고 정신이 흔들려서는 활이 바로 보이지 않는다. 뜻과 몸을 바르게 하는 본체가 궁도이기 때문이다. 권옹은 장남 오규(五奎, 42) 씨와 3남 오덕(五德, 35) 씨, 동생 영호(寧浩, 57) 씨, 영덕(寧悳, 42) 씨, 영강(寧康, 36) 씨를 비롯 친척동생 영익(寧翊, 36) 씨 등 6명에게 기술을 전수해줬다. 우리나라에서 만든 활은 한 해 2만 장 가량 되나 권옹 집에서 70%를 생산하고 있어 명실 공히 조궁계의 종가를 이루고 있다. 권옹은 78kg의 체구에 봄가을 전국 230개 사장(활 쏘는 장소)에서 고문으로 초청 받아 시범으로 쏘기도 하고, 심판으로 활약하면서 자신이 만든 활이 창공을 날아 표적에 명중하는 쾌감을 즐기는 것이라고 한다. 물맛이 차고 달아 이름 붙여진 예천읍 궁술에서 활달한 기품을 키우고 궁도에서 예절을 배우는 주민들은 국궁의 후예답게 활터에서 산다. 권옹은 전통을 잇는 보람에 더욱 좋은 활을 만들기에 더욱 정성을 쏟고, 우리의 문화재에 크게 이바지하고 있으며 활을 아는 사람이 찾아줄 때가 가장 보람을 느낀다고 한다. 조상의 얼이 담긴 국궁을 사랑하는 예천군민의 자랑이라 아니할 수 없다.(醴泉女子中學校)
권영록 : 대창90년사:송대인,권수경(2)-권순모-권영대-권영록/ 작성 장병창/ 2011.09.16/ 위로한 뒤, 그 자리에서 물소뿔 수입을 명령할 만큼 우리 활에 대한 사랑이 대단했다. 국궁의 종가 권영록 옹은 예천읍 남본동 245번지, 나직한 한옥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곳에 목조 3칸짜리가.../ cafe.daum.net/seouldaechong 재경대창중.고등학교 동문회(daum 2012)
권영록 : 궁시장/ Daum 카페 | 2004.04.20/ 시대에 따라 다양하다. 현재로는 국궁(國弓)으로 불리는 각궁(角弓)과 거기에... 울산, 충무 등 기타 여러 지역에서 제작되고 있으나 그 가운데서도 궁장(弓匠)으로는 김장환, 권영록, 장진섭, 시장(矢匠)으로는 박상준의 기능이 .../ cafe.daum.net/bowloveer/FDoh/4 | 국궁사랑// 중요무형문화재 47호 궁시장(弓矢匠)/ Daum 블로그 | 2008.11.14(daum 2012)
권영록 : 사라진 전통문화를 잇는 사람들,,/ Daum 지식 | 2005.11.04/ 현재는 국궁인 각궁(角弓)이 보편화되었다. 활을 만드는 재료로는 대나무... 김장환(金章煥) 남 궁장 1971.09.13 1984.07.05 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 장진섭(張鎭燮) 남 궁장 1971.09.13 1996.04.17 중요무형문화재보유자 권영록(.../ k.daum.net(daum 2012)
권영록 : 활쏘기와 활, 화살, 화살통 만들기 18분짜리..수정 완료!/ Daum 카페 | 2006.03.24/ 활 만들기 - 권 노인이 활을 쏘고 표적맞는 장면, 국궁 - 권 노인의 교습, 수렵도, 삼국지(위지동이전, 무예도보), 그림 - 예천 전경, 활을 제작해온 인간문화재 권영록 옹 - 재료 준비(재료의 모습), 뿔켜기, 좋은 뿔.../ cafe.daum.net/koreaarrow/Asuf/589 | 활과노 기술구조나눔터(daum 2012)
권영록 : 궁장 권영덕씨.../ Daum 카페 | 2006.07.19/ 예천이 고향인 권영덕 씨는 11대 조부 때부터 전통 국궁을 만들어 온 집안이다. 형 권영록 씨(작고)는 국궁 만들기로 인간문화재(47호)였던 사람이다. 이런 집안의 내력 때문에 권영덕 씨는 어릴 때부터.../ cafe.daum.net/bigbow/IJA1/98 | 활터(daum 2012)
권영록 : 국궁/ 네이버 블로그 | 2006.09.01/ 위하여 국궁(國弓)이라고도 부르고 있다. (역사) 우리나라 활의 역사는 고조선의..., 활을 만들 때처럼 공정이 까다롭다. 현재 중요 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된 궁시장(弓矢匠)의 기능보유자로서는 김장환, 장진섭, 권영록, 이석훈 .../ blog.naver.com/hwa8376/ Only for you..// 국궁(國弓)/ Daum 카페 | 2011.03.02(daum 2012)
권영록 : [부천 박물관 시리즈 8탄] <활 박물관> 부천 활 박물관/ Daum 카페 | 2007.02.28/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국궁(國弓)이라고 하는 각궁(角弓)과 그것에 ...전승지는 서울·경기·경북이며, 기능보유자는 장진섭(張鎭燮)· 김장환 (金章換)·권영록(權寧錄)· 이석훈(李碩薰) 등 4명이다. 기증 전시실 내에는 .../ cafe.daum.net/myseastory/HmMI/8 | 바다이야기 두 번째이야기(daum 2012)
권영록 :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 - 궁시장 [弓矢匠]/ 네이버 블로그 | 2007.10.07/ 종류: 각궁과 화살제작기능 기능보유자: 장진섭·김장환·권영록·이석훈 설명 1. 1971년 9월 13일 중요무형문화재 제47호로 지정되었다. 오늘날 국궁(國弓)이라고 하는 각궁(角弓)과 그것에 쓰이는 화살을 보편적으로.../ blog.naver.com/skshn/ 흰고무신// [부천 박물관 시리즈 8탄] <활 박물관> 부천 활 박물관/ Daum 플레이스(daum 2012)
권영록 : 양궁이 대한궁도협회 산하일 때의 모습입니다.[국궁신문]/ 네이버 블로그 | 2010.05.21/ 양궁이 대한궁도협회 산하일 때의 모습입니다. 국궁, 양궁을 아우르며 궁도라 부르던 시절입니다. 예천활 장인 권영록 님, 부천활 장인 김장환 님, 서울활 장인 장진석 님의 살아생전 활 만드는 영상들이 귀중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듯.../ blog.naver.com/limys777/ 어느날 활을 배우게..// [동영상] 1978년 활과 우리민족(양궁도 궁도라 부르던 시절)/ Daum 카페 | 2010.05.17(daum 2012)
권영록 : 전통활 제작 “배우려는 이 없어 안타깝기만…”/ 네이버 블로그 | 2011.05.12/ (권영록)이 인간문화재 47호셨는데, 제자들인 우리에게 명하셨죠. ‘전국 각지로 흩어져 활 제작자의 삶을 살아라’ 하고요. 그때가 73년도인가…, 활 제작자인 형님네와 저도 천안에 와서 살게 됐습니다.” 형은 국궁제작자로.../ blog.naver.com/ CAKCR 천안아산 정보..(daum 2012)
권영록 : 전통활 제작 “배우려는 이 없어 안타깝기만…”/ 충남시사신문/ 않았던 시절, 40여 호가 살던 마을에서 10여 집이 활 제작에 나선 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당시 집안 6촌형님(권영록)이 인간문화재 47호셨는데, 제자들인 우리에게 명하셨죠. 전국 각지로 흩어져 활 제작자의 삶을 살아라.../ chungnamsisa.com(daum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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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식 : 제2회 태안군수배 충서대회 성료/ [국궁신문] 2010.11.10/ 1위 : 당진 국수정 전찬종 14중 2위 : 천안 천안정 정성수 13중*천안 천안정 김상호 13중 3위 : 예산 예덕정 권영식 13중*천안 천안정 김중구 12중*당진 학유정 김희근 12중 입선 : 충무정 이석진*충무정 이문상*예덕정 김봉현.../ cafe.daum.net/archery1/8I9w/ 천안시 천궁정(daum 2014)
권영식 : 청원군수기 청원생명쌀 전국대회광경/ 용인 수양정 서윤석 14중 각 〃 익산 송백정 이동권 14중 비교승 3위 증평 삼보정 성기양 14중 〃 예산 예덕정 권영식 13중 각 〃 평택 화궁정 이 형 13중 비교승 여 자 부 1위 세종 관운정 한명애 13중 비교승 2위 증평.../ archerynews.net(dau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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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학(權寧鶴) : 1943- , 예천읍 왕신리 출신, 본관은 안동, 태진(泰震, 又甲)의 아들, 68년 동국대 농학과 졸업, 무형문화재 경북6호 예천궁장, 한국무형문화재 기능보존협회 부이사장이다. 64년 총무처고시(總務處考試) 4급 공채(公採)에 합격, 56년 조궁술(造弓術)을 아버지(무형문화재 6호)로부터 전수(傳授), 68년 경북 관광민속품 경진대회 특선, 68년 대한궁도협회의 공인 6단(公認六段)으로 명궁(名弓)의 칭호를 받았고, 70년 예천중(醴泉中) 양궁팀 창설 육성, 71년 사재(私財)로 예천여중고(醴泉女中高)에 양궁부(洋弓部)을 만들었고, 78년 경북민예전(慶北民藝展) 은상, 전국민예전 입선, 79년 제2회 전주대사습놀이에서 장원(壯元, 문화공보부장관상)을 하였다. 81년 국풍(國風)81 작품 전시, 미국 LA박물관 전시, 81-90년 전승공예대전(傳承工藝大展) 대의원, 83년 스위스 국립박물관 전시, 87-89년 한국궁우회(韓國弓友會) 상임부회장, 대한궁도협회 중앙대의원, 89년 인간문화재 작품전, 문화행사 초청 전시, 한국궁시기능보존협회장(韓國弓矢技能保存協會長), 경북궁도협회 상임고문, 대한궁도협회 공인심판, 예천궁도회장, 예천문화원 자문위원(醴泉文化院諮問委員), 전국민속제전 궁도부문 자문위원, 이충무공탄신기념제전(李忠武公 誕辰記念祭展) 경북 수석위원이다. 상으로는 대한민국 명궁(大韓民國明弓, 68), 경북도지사 표창(68-89, 20회), 대한궁도협회장상(68-89, 11회), 대한체육회장상(71- 89, 13회), 대한민국 명무(名武, 79), KBS사장상(81), 각종 궁도대회 100회 이상 입상(48회 우승), 예천문화상 (醴泉文化賞, 92), MBC향토문화상(문화부문, 95)이다. 무형문화재 경북 6호 궁장(弓匠)으로서 그가 만든 활은 전국에서 손꼽히는 명품이 되었고, 주소는 예천읍 남본리 69번지이다.(醴泉新聞 1995.9.7, 韓國을 움직이는 人物들 1997, 朝鮮日報 DB 2003)
권영학(嶺南 文化․文化人-國內 最高 弓匠 醴泉 권영학 氏, 3代째 家業 '타고난 弓匠') [記事] : 국궁(國弓), 활(弓)을 얘기하자면 예천을 빼놓을 수 없다. 활 쏘는 민족의 기(氣)와 전통을 고집스럽게 지켜오는 고장이기 때문이다. 그 구심에는 국내 최고의 궁장(弓匠)이자 명무(名武)인 권영학(權寧鶴․ 62․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6호 예천궁장) 씨와 그가 만들어내는 활이 있다. [신궁 명장] : 활과 함께한 40년 외길 인생. 그 길을 걷게 된 것은 운명처럼 이끌렸고 수양의 도(道)를 깨우치게 했던 우리 활에 대한 끝없는 애정이었다. 권씨의 고향은 예천읍 왕신리 '왕산골'. 소년 시절 그는 활 제작의 달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아버지로부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약조를 강요받았다. 당시만 해도 빛을 보지 못하던 장인의 길 대신 관직으로 입신할 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호통이 거듭될수록 오히려 활에 대한 호기심은 커져만 갔다. 거역할 수 없는 '핏줄'이었다. 아버지가 활 만드는 일에는 얼씬도 못하게 했던 터라 대신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활이라도 원 없이 쏘아 볼 요량으로 궁도부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대물림은 궁사의 자질로 나타났다. 한눈에 명궁의 재목임을 알아 본 지도교사가 부친을 설득해 손수 만든 활을 건네게 했고, 권씨는 그 활로 신기의 활솜씨를 보였다. 38세 되던 해 전주대사습놀이 국궁대회에서 장원에 올라 가장 젊은 나이에 '명무(名武)' 라는 칭호를 얻은 것을 비롯해 전국대회 100여 회 입상에 우승만 48회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궁장의 길은 여전히 가로막혀 있었다. 아버지의 채근으로 상경해 대학 재학 중 총무처 4급 공채에 합격, 뜻하지 않은 외도를 했으나 1964년 6․3학생운동에 참가한 대가로 학교와 직장을 모두 잃었다. 전화위복이었다. 어쩔 수 없었던 낙향이 비로소 궁장의 길을 터준 것이다. 아버지가 바라는 길을 거스른 데 백배 사죄한 다음에야 활 제작에 참여할 수 있었다. 아버지의 기법을 기본으로 했지만 감히 변형을 시도했다. 활 폭을 줄이고 탄력성과 미려함을 더하는 작업이었다. 아버지의 호통이 따랐으나 활을 직접 쏘면서 개선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신기일까? 1967년 선보인 첫 작품 13장은 내로라하는 궁사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고, 그 순간부터 이미 권씨는 최고의 궁장이었다. 권씨의 활 제작 솜씨는 예술의 경지에 비했다. 궁사들은 소장하려 애썼고 국내는 물론 외국 유명 박물관의 한 자리를 차지하며 우리 활의 위상을 높였다. 1980년 경북무형문화재 지정은 오히려 때늦은 것이었다. [예천 활] : 우리 활은 목궁, 철궁 등 약 10종류가 있었는데, 지금은 소뿔로 만드는 각궁만 남았다. 권씨의 예천활도 각궁이며, 길이로는 단궁(短弓), 구조상으로는 목편과 죽편, 각편 등을 모두 사용해 만드는 복합궁이다. 주재료는 대나무, 산뽕나무, 물소뿔, 소힘줄, 민어부레 등 모두 천연 소재다. 습하지 않은 9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만들며 활 한 장 만드는데 300번 이상 손이 가야하는 정성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1920년쯤 안동 권씨 집성촌인 예천 '왕상골' 에 활 만드는 기술을 가진 외지 사람이 들어와 권씨의 조부대에 제작술을 전했고, 다수의 마을사람들도 따라 배웠다. 예천 활이 전국 수요의 80% 이상을 차지한다는 사실은 타지의 활 제작 명맥이 끊기다시피 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산, 경주, 광주 등지에도 궁장이 있지만 이 역시 '왕상골' 출신이다. [궁장의 소임] : "인정받는 궁장의 지위에 올랐지만 오히려 짐스럽습니다." 권씨는, "고급 스포츠레저와 양궁에 의한 국궁의 급속한 퇴조 현상이 자신의 힘으로 막기에는 역부족이어서 자괴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저앉아 있지만은 않을 작정이다. 무엇보다도 궁장의 맥을 확산시키는데 주력할 계획이다. 권씨는 정부의 궁장 후보들에 대한 육성 지원과 국민들의 관심이 절실하다고 했다. 그렇지 못하면 저변 확대는 고사하고 우리 활의 명맥도 단절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이런 우려 때문에 요즘은 우리 활의 모든 것을 집대성한 책을 출간하는데 몰두한다. 꼬박 10년이 걸린 작업이다. 또 맏아들에게는 국궁 제작을 주제로 박사 학위 논문을 쓰게 했다. 궁장으로서의 소임이라는 것이다.(정경구 記者 每日新聞 2004년 09월 02일)
권영학(名弓 權寧鶴 氏 : "활쏘기는 道의 世界로 가는 길" 全國大會 48番 優勝 '最多 記錄' 활 쏠 땐 '自身'조차 잊어버려야) [記事] : "활은 마음으로 쏘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맞추는 것만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지요. 활쏘기의 궁극적 지향점은 바로 도(道)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말합니다." 명궁 권영학 씨는 활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마자 '활은 기술로 맞추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 수양을 통해 어떤 경지를 터득하는 것'이라는 것부터 강조한다. 맞추기라면 권씨만큼 화려한 이력을 가진 사람도 없다. 전국대회 150번 이상 입상에 우승만도 무려 48번을 차지한 전국 최다 기록보유자(1997년까지의 공식 기록). 이런 그가 '맞추기'를 하지 말고 마음으로 활을 쏘라고 거듭 강조하는 것은 그냥 일반론적 이야기 이상의 의미가 있다. 우리 국궁계가 언제부턴가 맞추기 위주로 흘러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우려와 지적이다. 경북도 궁도대표선수 겸 코치를 25년간이나 연속해 온 이력이 있는 권씨는 활쏘기를 통해 얻어지는 경지에 대해, "마음이 지극히 편안해지고, 텅 비어지고, 고요해지고, 또 모든 세상사를 잊는 것은 물론 나 자신도 잊어버리는 상태가 저절로 온다. 이런 다음에는 꼭 신이 들린 것처럼 화살은 쏘는 대로 그대로 과녁에 명중하게 된다."고 말했다. 백발백중의 경지는 결코 활쏘기 기술로 되는 것이 아니라 수양을 통해 어떤 경지에 도달했을 때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것. 어떠한 걸림도 없이 활을 쏘는 무애(無碍)의 경지를 맛볼 수 있는 사람은 한 세대에 한 명도 나오기 어렵다고 궁도인들은 말한다. 권씨는 이러한 경지에 대해, "아무도 모른다. 자신만이 안다. 앉아서 쏘아도 명중, 서서 쏘아도 명중, 걸어가면서 쏘아도 명중, 이 맛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어찌 알랴"라는 말로 표현했다. 고향이 예천인 권씨는 국궁 뿐 아니라 양궁계에서도 국보급 존재다. 예천여중․고 양궁부를 창설하고 육성한 인물. 오늘날 올림픽에서 한국양궁이 세계 정상에 우뚝 선, 그 뒤에는 바로 권영학이란 인물이 있었다. 권씨는 '그 때 선친께서 당시로서는 엄청난 돈을 선뜻 궁도부 창설 자금으로 지원해 주신 것'을 지금도 고마워하고 있다. 선친인 권태진 씨는 우리 전통 국궁을 만든 분으로 무형문화재 6호였으며 지금은 권씨가 전수를 해 가업으로 이어오고 있다. "궁도 9계훈이 바로 국궁 정신의 핵심입니다. 이 정신은 비록 국궁계뿐 아니라 우리 전통 사상의 모든 핵심을 담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니 궁도 9계훈의 실천을 통해 국궁인은 바로 이 시대 한국 정신의 맥을 잇고, 그 것의 실천을 통해 자신의 수양과 사회, 국가, 나아가 세계에 이바지하는 것이지요."라며 많은 운동 중에서도 우리의 전통 사상을 그대로 담으면서 그 정신적 맥을 오늘에 살리고 있는 것이 바로 국궁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궁도 9계훈은 정심정기(正心正己), 불원승자(不怨勝者), 자중절조(自重節操) 등 궁도인의 9개 실천 요강으로 각종 대회 때는 반드시 단체로 낭독하고 있다. 권씨는 장전(長田)이라는 호를 쓰고 있다. 활(弓)과 더불어 길게(長) 마음밭(田)을 가꾼다는 의미의 이 호는 자신이 스스로 지어 사용하는 것. 국궁과 더불어 살고 있는 모습이 이 호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권씨는 우리의 전통 활을 세계에 알리는 일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다. 외무부 주선으로 1981년 미국 LA박물관에 작품을 전시한 것을 비롯해 83년 스위스 국립박물관 작품 전시, 85년 독일(서독) 국립박물관 작품 전시, 95년 중국정부 초청 작품 전시 및 제작 시연, 97년 일본 세계공예품 전시 및 제작 시연을 했다. 그는 요즘 국궁에 대한 각종 자료 정리에 바쁘다.(김동윤 記者 嶺南日報2004.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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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