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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760:세계활축제(12)권영학(2)(祝권오휘,박지민)
작성자장병창 @ 2014.09.12 06:11:09

   예천의 자랑(3760) : 예천세계활축제(12) 권영학(2)(附 권오휘 한국문인협회 예천지부장, 평론신인문학상 수상...축하합니다/예천초 박지민, 4일 양궁 전국대회 금...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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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영학(權寧鶴 : 醴泉弓匠) [文化財] : 무형문화재 제6호로, 소재지는 예천읍 남본리 69-3번지(권영학), 예천(醴泉)은 예로부터 국궁의 고장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 명맥이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궁을 제작하고 심신을 수련하는 이들이 많다. 국궁은 각궁이라 하여 우리 군의 특산물로 예천궁장 기능 보유자인 권영학(道 지정무형문화재 제6호) 씨가 수작업으로 완성하며, 전국 수요 60%를 예천 출신의 명장들이 제작ㆍ공급하고 있다. 활의 주요 재료로는 대나무, 산뽕나무, 굴참나무, 소심줄, 물소뿔, 민어풀 및 장식에 필요한 화피 등을 사용하며, 특별히 도지래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외에 몇 가지의 공정을 거쳐 각궁을 생산한다. 생산 기간은 보통 100일에서 120일 정도 소요되며, 제작 시기도 따뜻하고 서늘한 봄ㆍ가을에 주로 생산한다. 국궁으로 심신을 단련하고 후진 양성을 위한 활쏘기 장소로 예천읍 남산(남본리 소재)에 무학정(武學亭)이 있으며, 1960년까지만 하여도 예천읍 대심리에 있던 것을 활쏘기에 불편하고 건물이 낙후되어 남산으로 이전하였으며,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인 이곳에서는 선비의 정신 수양으로 활쏘기를 많이 하였다. 남산(南山)은 산책 코스와 체육시설이 있으며 읍(邑)의 전경이 한눈에 바라보이는 팔각정과 화재를 예방해 준다는 돌자라, 호국선열의 혼이 깃들여 있는 충혼탑이 있는 곳으로 군민들의 휴식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또한 1996년 국제 규모의 양궁경기장이 예천읍 청복리에 들어서 매년 전국 규모의 양궁대회가 4~5차례 개최되고 있으며, 실내양궁경기장인 문화체육센터가 1,164평의 규모로 2000년도에 준공되었다. 예천이 활의 고장으로 크게 알려진 것은 지난 79년 예천여고(醴泉女高)의 김진호 선수가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으로 제패하면서부터이다. 이 때부터 활(國弓ㆍ洋弓)에 대한 자부심과 열정이 어느 지역보다 높고 적극적이다.(醴泉郡廳 홈페이지)

 

  권영학(慶尙北道 無形文化財 保存會 創立總會 開催) [記事] :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보존회는 2009년 6월 19일 김천시문화회관에서 지역의 전통문화를 계승보존하고, 무형문화재를 연구 발전 육성하기 위하여 전수자 양성과 국내외 전시 및 시연, 회원 상호간 친목도모를 통해서 고유문화 발전시키는 목적으로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보존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다. 27명의 기능 보유자가 한자리에 모여서 정관 및 제 관련규정을 제정 및 임원 선임 및 각 분과별 위원회를 구성하고, 7월초 안동에서 임원 회의를 가질 예정이다. [임원명단] : 회장 권영학(예천 궁장 보유자), 부회장 김일웅(김천 징장 보유자), 부회장 김연박(안동소주 이수자), 부회장 정순임(판소리 보유자), 이사 황규욱(문경 호산촌 교육조교), 이사 김삼식(문경 한지장), 이사 조석탑(제전농요 후보), 이사 이무남(청송 옹기 보유자), 이사 이면규(영풍 장도 후보), 이사 양규석(예천 통명농요 후보), 이사 이자성(청송 한지 보유자), 감사 송강호(김천 과하주 보유자 후보), 조석탑(저전 동농요 후보).(최도철 取材部長 金泉新聞 2009-06-23 오후 4:47:00)

 

  권영학(마음으로 만든 활, 마음으로 쏜다-權寧鶴 弓匠) [記事] : 대를 이어 활을 만들어온 한국을 대표하는 궁장(弓匠) 기능보유자인 권영학(權寧鶴, 경상북도 무형문화재 제6호) 씨는 명무(名武)이자 명궁(名弓)의 칭호를 갖고 있다. 이 세 가지 기능 보유자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 신문 TV에 소개된 사례만 해도 줄잡아 200번은 될 것이다. 권씨에 뒤이어 활 만드는 장인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는 권무석(서울시 무형문화재 23호) 씨, 경기도 부천에서 살고 있는 김박영(金博英, 국가지정 무형문화재) 씨도 궁장이다. 이들은 모두 경상북도 예천 출신이다. 궁장은 한국의 고유 궁인 각궁을 전통적으로 제작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진 사람이다. 각궁은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47호이다. 우리나라에서 현재 활을 제작하는 사람은 모두 십여 명에 불과하다. [한국 양궁의 뿌리 예천 양궁] : 청소년(16세) 시절부터 지금까지 50여년 한길을 걸어온 권영학 씨의 인생엔 활에 담긴 수많은 사연이 녹아있다. 활을 만드는 궁장이었던 부친(권태진) 밑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 어깨 너머로 배워 온 활 만들기가 결국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찬밥 신세였던 소위 "쟁이"의 길이었다. 옛날 한 동네 대학생이 한 명도 있기 힘든 1964년 대학(동국대 농과대) 재학 중 4급 공무원 공채시험에 합격하여 출세 길도 열릴 수 있는 그였다. 숱한 고민 끝에 가업(家業)을 잇겠다는 결심을 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김진호(현 한국체대 교수) 선수를 배출하기도 한 예천여자중고등학교 양궁부도 권씨의 작품이다. 1979년 베를린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 김진호 선수가 5관왕을 차지해 세계 양궁계를 깜짝 놀라게 한 이후로 전국에 양궁 붐이 일어났다. 예천양궁은 어느 날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니라 전통각궁을 제작하고 전통궁도의 토양이 그 기반이 됐다. 양궁을 창설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ꡒ예천 궁도는 한국 양궁의 시발점ꡓ이라며 세계에 우뚝 선 한국 양궁의 오늘을 있게 한 자부심이 그의 형형한 눈빛에 어려 있었다.

 

  [각궁은 선비의 심신수련용] : 활은 궁간(弓幹)의 길이에 따라 장궁(長弓)과 단궁(短弓)으로 나누어진다. 장궁은 활의 길이가 2m이상으로 주로 삼림지대나 해안 지대의 민족들이 사용해왔다. 단궁은 2m 이하로 초원지대의 민족들이 주로 사용하던 활이다. 구조에 따라 환목궁(丸木弓)과 복합궁(複合弓)으로 분류된다. 또 사용된 재료에 따라 나무로 만들면 목궁, 대나무로 만들면 죽궁, 소뿔로 만들면 각궁, 놋쇠로 만들면 철궁 등으로 구분한다. 대나무 한 가지 재료로 제작한 것도 있고, 대나무, 뿔 등 여러 가지 재료를 복합하여 제작한 것도 있다. 대나무․뽕나무․참나무․소 심줄 ․물소 뿔․민어부레․화피 등 여러 재료가 동원된다. 우리나라의 활은 크기로는 단궁이며 여러 가지 재료를 사용한 복합궁으로,「복합단궁」이라 한다. 쇠뿔(牛角) 쇠심줄 같은 것을 재료로 하여 만드는 것이 현존하는 각궁(角弓)이라 불리는 우리나라 전통 심신수련용 활이다. 원래는 각궁 외에도 예식에 쓴 예궁 등 우리 활은 10개 종류가 있었다. 가장 일반적인 정량궁(正兩弓)은 활짱의 길이가 5.5척, 군왕(君王)이 위용으로 지니는 예궁(禮弓)은 6척에 달한다. 전투용에는 대소의 차이가 있으나, 기마용(騎馬用)의 동개(활과 화살을 넣어 등에 지는 제구)는 단궁(短弓)에 사용되는 것이다. 활은 옛날 중국의 창(槍), 일본의 칼(刀)과 더불어 수렵(狩獵)의 도구로서 뿐만 아니라 전쟁의 수단으로도 사용되어 왔다. 예천 활은 복합단궁(復合短弓)으로 재료의 처리와 제작과정이 손으로 이루어지는 수공예품(手工藝品)이기 때문에 보기에도 아름다움이 뛰어나다. 활 제작은 크게 활을 만드는데 필요한 각종 재료를 준비하는 과정, 재료들을 모아 활로 만드는 과정, 만든 활이 제 모양을 갖추고 그것을 쓰는 사람의 몸에 맞도록 해궁(解弓 = 활 풀이)과정, 그리고 마무리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활 제작 작업은, 5월에서 9월까지 재료 처리 기간 이외에 하나의 활이 완성되는 기간은 약 다섯 달(150일) 소요된다고 한다. 활은 모두 자연조건에 민감하게 영향을 받는 천연재료로 처음부터 끝까지 빈틈없이 사람의 손길이 미쳐야 하는 고난도 작업으로 기후와 기온에 맞추어 이루어지는 단계별 작업이다. 각궁은 활짱(활의 몸)의 손잡이 부분(줌통)과 양쪽 끝(정탈목 고잣잎)에는 참나무와 뽕나무를 각각 대지만, 강력한 탄력을 유지하는 오금 부위에는 죽심(竹心)을 넣고 그 안팎에다 쇠뿔과 쇠심줄을 부레풀로 접착시킴으로써 탄성(彈性)의 강도를 높였다. 이때 수우각(水牛角 , 무소뿔)을 깎아 댄 것을 흑각궁(黑角弓)이라 하고, 또 한우각(韓牛角)은 백각궁(白角弓)이 되는데, 백각으로는 큰 활을 만들지 못하는 결점이 있어 흑각궁을 높이 쳤다. 이러한 각궁은 목궁(木弓)이나 죽궁(竹弓)에는 비할 수 없이 화살을 멀리 날리는 강한 힘을 분출한다.

 

  [1920년대 왕산골 안동권씨의 가업] : 활이 임진왜란(1592) 때 일본 조총과 조선중기이후 화약 총포발명 이전까지 전쟁의 주 무기로 사용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오늘날 전승되는 각궁은 병자호란 등 양난(兩亂)을 전후한 16세기에 정형되어 계승 발전된 것으로 보인다. 예천에서 각궁을 만든 것이 언제부터이고 왜 이곳에만 활 제작이 이어져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전쟁이 심했던 지역이어서 전쟁무기인 활에 친화적인 문화 때문인지, 선비의 고장이어서 궁술이 발달됐는지 잘은 모른다. 삼국시대 예천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각축을 벌여온 지역이다. 북쪽 2~3십리에 어림성터 흔적이 80년대까지 만해도 남아있었다.  예천은 우리나라 활(弓)의 대표적 산지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현재의 각궁 제작기술이 예천에 전래된 시기는 조선조 숙종 때 한성(서울)에 살던 권계황(權繼黃)이 활을 만들어 예천 관아에 납품하는 궁장(弓匠)이었다는 일부 보도가 있었으나 이를 뒷받침할 객관적인 고증은 없다. 1920년대 초 당시 읍내에 서 조금 떨어진 왕산골(旺山谷, 현 왕신동)에서 모여 살고 있던 안동권씨들이 활을 만들어 쏘기 시작한 것이 오늘의 궁장들을 탄생시킨 배경이었다. 지금도 예천출신의 명장들이 전통의 맥을 이어 전국 각궁 수요의 상당수를 공급하는 각궁의 산실이다. 이곳 사람들은 아들을 낳으면 새끼줄에 붉은 고추도 달지만 활과 화살을 건다. 예천궁장은 전통공예기술로서 미적 감각이 뛰어나고 기술이 정교하여 시도(市道) 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활 제작은 긴 시간에 걸쳐 한 공정이라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되는 세심한 손길과 몸의 힘이 필요한 작업이다. 만드는 사람의 열정과 외골수 장인정신이 있어야 가능한 고통과 인내의 과정이다. 이러한 어려움을 말해주듯, 굳은살이 배여 있는 투박한 권영학 씨의 손은 수많은 활의 산실이 된 장한 손이다. 복잡한 손작업으로 제작되어 다른 활보다 화살을 멀리 보낼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여기서 나온다. 영화 〈왕의 남자〉속 줄타기는 광대의 예술혼과 애환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소재다. 그만큼이나 주목해야 할 장치가 바로 ꡐ활ꡑ이다. 활 제작의 최고 기술자를 배출한 예천의 명성은 80년 대 이후 활을 잘 쏘는 고장으로 명성이 더 추가됐다. 이곳 출신인 김진호 선수가 세계를 주름잡는 ꡐ궁왕(弓王)ꡑ으로 등극하면서부터이다. 안동에서 예천읍으로 가는 왼쪽 편에 진호국제양궁장은 이를 기념해 만든 것이다. 인구 5만이 안 되는 농촌지역에 궁도팀이 있는 학교가 7개에 이른다. 1980년 궁도시범학교로 출발한 예천동부초등학교 궁도팀 출신으로 베이징올림픽에서 단체전 금메달과 개인전 동메달을 획득한 윤옥희 한희정 황숙주 등의 국가대표 선수를 배출했다.

 

  [국내 궁도 선수사상 최다기록 보유자] : 전통 활을 서양에서 들어온 양궁(洋弓)의 상대적 개념으로 국궁(國弓)이라 부르나 궁도로 부르는 게 정확하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궁술(弓術)이다. 일제강점기에 살라져 가는 우리 궁술을 보존하기 위해 1922년 7월 조선궁술연구회가 발족했다. 1926년 5월 조선궁도회로 개칭하며 궁도로 불리게 되었다. 궁술을 일본식으로 검도 유도와 같이 궁도라 부르게 된 것이다. 궁장으로서 뿐 아니라 명궁으로서 권영학 씨의 면모는 무학정(武學亭, 예천읍 남본리, 남산공원)에서 볼 수 있었다. 권씨는 68년부터 93년까지 궁도 선수와 궁도 코치 감독으로 활약했다. 전국 체전 및 전국규모대회 등 마흔 네 번이나 우승하고 백 쉰 번 이상 입상하는 국내 궁도사상 최다기록 보유자이다. 예천여중고 양궁부 등 97년까지 전국 72개 지구 궁도팀 창설을 지도했다. 궁도정신과 선비정신의 바탕은 禮儀嚴守, 習射無言, 不怨勝者, 寞灣他弓 등 궁도 9개훈과 집궁 8원칙. 활을 만드는 권씨이지만 궁도정신을 신념처럼 숭상한다. 즉 단순한 장인이 아니라 궁술의 정신 즉 ꡐ도(道)ꡑ를 말하고 있다. 문무를 겸비한 궁도정신은 우리정신문화의 본류라고 장담한다. 권영학 씨는 활시위를 힘차게 당기며 예를 차리는 절차와 몸가짐을 엄하게 지키며(禮儀嚴守), 활을 쏠 때는 말하지 말 것이며(習射無言), 나를 이긴 사람을 원망하지 말 것이고(不怨勝者), 남의 활을 당기지 말 것이다(寞灣他弓) 등 9개 훈이 바탕이다. 그는 "호흡을 단단히 가다듬고 마음을 정제한 후 하체에 단단히 힘의 중심을 잡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서 오른손으로는 호랑이의 꼬리를 잡아당기듯 시위를 힘차게 잡아당긴다. 그리고 숨을 내쉬며 오른손을 풀어 호랑이를 숲 속으로 힘차게 돌려보내게 한다."는 예부터 전해진 활 쏘는 방법을 후학들에게 일러주었다. 바람을 뚫고 유연하게 날아가는 화살은 지나가는 바람과 산, 자신의 신체가 모두 하나가 되어야만 목표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수치화된 노력이 아니라 부단한 연습에서 몸에 배인 기술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활은 삶의 일부가 아니라 장롱 속에 고이 모셔둔 유물로 여긴다. 비록 스포츠화 되어버린 모습이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이어져오는 활을 통해 지켜져 온 민족정신과 전통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도 궁장을 잇겠다는 전수희망자는 나오지 않는다. 활의 가치를 모르는 당국의 무관심도 한 몫하고 있다. 권영학 씨는 체계적인 정책지원도 전무하고, 전수관 마저 형식적인 무용지물로 만든 예천군 당국의 탁상행정으로 인한 혈세낭비를 호되게 꾸짖는다. 전임군수가 계획해 놓은 남산 무학정도 소규모로 축소해 왜소하게 만든 것은 전임자이자 경쟁자의 업적 깍아 내리기라는 것이다.

  [고대 한민족 파워 비밀은 활] : 활은 옛날에는 병기(兵器)였다.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활(弓)을 잘 쏜다는 것쯤은 누구나 다 안다. 평화 시에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 상무(尙武)정신을 다듬었던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전시에는 활로써 외적을 물리친 것이다. 고구려의 고주몽, 온달장군 그리고 이성계 등 숱한 명궁들이 이름을 날렸다. 우리 선조의 활쏘기 솜씨를 유전자로 받은 탓인지 한국 양궁은 세계양궁경기를 휩쓸고 있다. 활은 삼국시대에 보편화되었으나 훨씬 이전인 기원 전 고조선을 전후하여 국방과 수렵생산의 주무기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외적들은 우리 선조 장수들의 활 솜씨에 전의를 상실할 정도였다. 당나라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고구리) 원정에 나선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 서부 요새인 요동벌 안시성 성벽아래에서 한쪽 눈을 잃고 결국 후퇴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뜻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이다. 2천여 년 전 중국대륙을 호령하던 진나라와 한나라가 우리 고대민족과 관계있는 흉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조공을 바친 것은 흉노의 강력한 기마병과 궁수(弓手)들 때문이었다. 고구려의 한 갈래인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의 칭기즈칸과 기마병들도 마찬가지이다. 고대 한민족의 웅비와 신궁(神弓)들의 관계를 말해준다. 옛날 한족(漢族)들이 동북아시아 민족을 ꡐ동이(東夷)ꡑ라고 했는데 이(夷)는 궁(弓)과 대(大)를 합한 글자이다. 우리 민족이 ꡐ활을 잘 만들고 잘 쏘는 동쪽의 민족ꡑ이라 해서 부른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큼 활 제작에 있어서 탁월한 기술을 가졌다고 전해진다. 진수가 쓴 정사 ꡐ삼국지ꡑ에는 구려(고구려) 압록강 위 소수맥에는 좋은 활이 나와서, 이른바 맥궁(貊弓)이라 한다. 박달나무로 만든 고구려의 맥궁(貊弓), 동예(東濊)의 단궁(檀弓), 신라의 포궁(砲弓)이 사용되었다는 것이 중국 사서에 나온다. 고대 우리민족의 한 갈래인 읍루(지금 연해주)의 활은 길이가 4척으로, 힘은 쇠뇌와 같고, 화살은 호나무를 사용하며, 길이가 1척8촌이고, 푸른 돌로 촉을 만든다. 궁술이 뛰어나 사람을 쏘면 모두 눈에 맞는다. 화살에 독을 발라서, 사람이 맞으면 모두 죽는다. 조선시대 학자 이수광은 지봉유설에서 "활은 최고의 무기"라고 했다. 조총이 멀어야 50m 나가는 반면 조선 각궁은 400m 앞 물체까지 꿰뚫는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각종 공장의 기록과 기술자 명단에서 그들을 ꡐ○○匠ꡑ이라 호칭하지 않고, 유독 ꡐ궁인(弓人)ꡑ․ꡐ시인(矢人)ꡑ이라 한 것을 보면 각별히 차등을 두어 예우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 임진왜란이라는 절체절명의 국난을 만난 선조는 양인(良人)들에게 궁궐 내 정자에서 활쏘기 대회를 한 적이 있다. 이런 우리의 활쏘기 문화는 우리문화를 말살해 죽이려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빠르게 쇠퇴했고 오늘날 양궁이라는 변형된 모습에 기대어 이어가고 있는 현실이다. 권영학 씨의 활을 만드는 손놀림을 보며 수천 년 전 알타이산맥 아래 동아시아를 활보하던 고대 한민족의 멋과 정신이 담긴 혼을 보는 듯 했다. 한국의 정체성이 세계화의 대세 속에 자취를 잃어 가는 현대 속에, 한 장인의 손길에서 전통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은 퍽 다행스런 일이다. 문제는 임오생(壬午)인 그의 나이도 칠순이 코앞에 다가왔다. 손에 힘이 빠져 계속 활을 만드는 게 힘들고 숨 가쁘다. 궁장은 전수기간이 길고 성공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어서 전수희망자가 적다고 권씨는 안타까워하고 있다.

 

  궁장이 되기까지도 힘들지만 활을 만들어서는 소득 창출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 국궁을 하는 사람들도 대부분 개량궁을 사용하고 각궁을 사용하는 궁도인이 매우 적다. 이제부터라도 당국의 적극적인 관심으로 궁장을 잇는 전수자를 길러야 한다. 한국의 국궁은 궁장을 기르는데 그치지 않고 궁도를 역사문화산업으로 키울 수 있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세계에 내놓을만한 찬란한 고대 한국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전국 산하에 지천으로 널린 골프장을 보며 정부에서 세계관광객을 불러 모을 수 있는 궁도장 하나쯤은 제대로 만들 필요가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국내 도시인들도 경관 좋은 산 중턱에 궁도장을 마련해놓으면 분명히 매력적이다. 일본에서는 도시가 농촌지역의 갖가지 경관 문화를 보기 위해 몰려오는 ꡐ그린투어리즘ꡑ이 뜨고 있다. 활쏘기와 활 만들기는 단순한 무예나 레포츠가 아닌,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의미 있는 전통무예이자 전통공예이다. 전국의 뜻있는 사람들이나 다른 지방에서도 관심을 가져야한다. 지난 17일까지 5일간 ꡐ전국사두대회ꡑ 겸 승단대회가 대한궁도협회 주최로 영주시 충무정에서 열렸다. 사정(射亭, 활 쏘는 정자)은 충무정 팔공정 관덕정 영락정 등 전국에 300여개가 있다. 국궁의 사회문화사를 탐구한 책, <활을 쏘다>는 김형국(金炯國)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가 고대 중국의 병서와 조선 시대 역사 문헌까지 훑으면서 활의 역사를 문화사의 입장에서 살펴보고 있다. 이 모두가 활에 눈뜨고 나서 생긴 의미 있는 일이다. 앞서 얘기한 <왕의 남자> 곳곳에서 활은 중심이미지이다. 연산군의 침소에는 활과 화살이 있고 중신들이 꾸민 사냥놀이에서 광대 육갑은 화살을 맞고 죽는다. 그러나 가장 인상 깊은 대목은 줄을 타며 왕을 풍자하는 사설을 읊는 장생을 향해 연산이 활을 쏘는 장면이다. 화살이 줄을 스치자 장생은 중심을 잃고 ꡐ반허공ꡑ의 판타지 세계에서 지상으로 떨어진다. 우리고유의 궁도가 세계 진출은커녕 국내에서도 생존의 갈림길에 있다. 궁도(국궁)가 행여나 역사의 후미진 곳으로 떨어지는 날이 일어나지 않으려면 정책지원과 국민들의 사랑이 필요하다.(글: 金正模 編輯委員 大邱日報 2009-07-13 16:02:53)

 

  권영학 : 예천은 신궁의 나라 <김영진 시인>| 예천신문 1010.03.31 17:26/ 예천은 신궁의 나라 -명무 권영학/ <시와 함께 하는 경북북부문화 나들이*김영진 시인>// 권우갑 옹의 궁방(弓房)에서 자란/ 소년 권영학을 아시나요./ 자신이 만든 활로 신궁(神弓)이 된/ 명무 권영학 선생을 아시나요.// 최고의 궁장은 최고의 궁사/ 아비의 활 만들기 이어받은 명궁장/ 궁장(弓匠)* 되고 명무(名武)* 되어/ 군자지도(君子之道)의 전설이 된 가문// 천년 세월 활과 살 만드는 동안/ 궁사의 시위를 떠난 화살은/ 날아가는 족족 표적에 명중했다지요// “민첩하고 날래기는 백대(百代)의 협객이요/ 굳세고 곧기는 만고의 충절이라”* / 소백산맥 정기 받아/ 국궁(國弓)의 성지가 된 예천이랍니다.// *궁장 : 활을 만드는 장인/  *명무 : 활을 잘 쏘는 자에게 주는 칭호/  *제침문(祭針文) 1절/ 시작 노트 : 예천이 낳은 권영학 선생은 활을 만들고, 직접 활을 쏘았다. 대한민국 공인 6단 명궁(名弓)이요, 전주대사습에서 장원한 명무이시다. 그의 궁사로서의 내력은 부친 권우갑 씨로부터 시작되었다. 권옹은 활 만들기에 평생을 바쳐 온 사람이다. 부친의 솜씨를 이어받은 권영학 선생은 활 만들기에서 활 쏘는 궁인으로 명성을 얻은 한국의 명궁이다. 이 고을에서는 김진호, 윤옥희 같은 신궁이 대를 잇고 있다.(daum 2010)

 

  권영학(韓國 代表 弓匠이자 名弓 권영학) [記事] : 대나무로 만든 홈에 참나무를 끼우고 있다. 백발, 형형한 눈빛, 굳게 다문 입술…. 첫눈에 봐도 ‘무사’의 기운이 느껴진다. 경북도 무형문화재 6호 권영학(69·예천군 예천읍 남본리). 한국을 대표하는 궁장(弓匠) 기능보유자로 50여년을 ‘활’과 함께 한길로만 걸어온 그는 궁장 외에 명무(名武)·명궁(名弓)이란 칭호도 갖고 있다. 궁장은 ‘최고의 활 제작기술을 보유한 장인’이란 뜻이며, 명무와 명궁은 ‘최고의 활솜씨를 가진 무인’이란 말이다. 국내 독보적 존재다.  “나는 활을 만들고, 쏘는 사람이에요. 한국사람 중 전통 활에 대해 나만큼 아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걸요.”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그의 어투에 자부심이 넘친다. 그럴 만한 자격이 있다. 권 궁장은 15세 때 활을 잡은 이후 은퇴할 때까지 전국의 각종 궁도대회에서 48번의 우승을 포함해 150회 이상 입상했다. 국내 최다기록이다. 한창 땐 부친과 年 475개 제작, 외국 전시회도… 私財로 고교에 양궁부 창설 김진호 키워내. 권 궁장이 활을 제작하고 명궁이 된 배경에는 ‘활의 고장 예천’이란 전통이 한 몫을 한다. 이곳에서는 옛날 사내아이를 낳으면 새끼줄에 붉은 고추 대신 활을 걸어놓을 정도로 활을 사랑하고 활쏘기를 즐겼다고 한다. 예천군 예천읍 왕신리 안동권씨 집성촌에서 활 제작이 본격화된 때는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부터다. 조선 숙종 때 한양에서 예천으로 낙향한 권계황이 활을 만들어 관아에 납품했다는 일부 언론보도가 있었으나, 역사적으로 고증된 것은 아니다. 권 궁장 외에도 예천출신 국궁제작자는 지금도 전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다. 그가 궁장과 명궁으로 우뚝 서기까지 선친(권우갑)의 후광을 빼놓을 수 없다. 선친 역시 당대 각궁(角弓) 제작 1인자였던 궁장이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공방에 잔심부름을 하면서 활 제작모습을 어깨너머로 지켜봤다. 활을 쏘기 시작한 건 중학교 궁도부에 입학하면서부터다. 중3 때는 선친이 만든 활을 가지고 전국대회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만든 활에 신령스러운 기운이 들었는지 쏘기만 하면 백발백중이었지요. 신궁이 났다는 소문이 읍내까지 퍼졌습니다.”  하지만 선친은 궁사로서 장남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그가 활을 만드는 일은 극구 반대했다. 거기에다 그는 7남매의 장남이었다.  “당시만 해도 장인(匠人)에 대한 경시와 사회적 편견이 남아 있었지요. 쟁이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시대였습니다.”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대학(동국대 농학과)에 들어갔다. 하지만 1964년 6·3항쟁(한일국교정상회담 반대시위)에 투신하면서 반독재투쟁에 나서게 됐다. 화살처럼 곧은 그의 성정에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반골기질 때문에 그는 학교에서 제적을 당하고 재학 중 합격했던 총무처고시4급 공채마저 반납하게 된다.  “그때 제 인생의 스승이었던 분이 함석헌, 장준하 선생입니다. 돌이켜 보건데 후회하지 않습니다. 떳떳하게 살았기에 똑바로 말할 수 있지요.”  그는 94년 창립한 참여연대의 창립회원이기도 하다. 지금도 시민단체 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다. 참여연대에서 발간하는 월간 ‘참여사회’가 방안에 쌓여있다.  68년 그는 우여곡절 끝에 대학을 졸업하고 귀향을 선택했다. 장인이 천대받지 않는 시대가 올 것이라 확신하며 활 제작과 활쏘기에 나머지 인생을 걸었다. 아버지를 다시 볼 면목이 없었으나 활 배우기를 청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거절했지요. 하지만 무릎을 꿇고 수차례나 애원하고 설득한 끝에 문하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승낙이 아니라 묵인이었지요.”  권 궁장은 혼신을 다해 밤낮으로 활을 만들었다. 한창때는 부친과 함께 연간 475장(丈)의 활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에겐 ‘전통은 만들어간다’는 신념이 있었다. 궁사로서 활의 성능을 알기에 보다 쏘기 쉽고 잘 맞힐 수 있도록 활의 성능을 개선시켰다.

 

  68년부터 전국의 각종 민속공예전에 손수 제작한 활을 출품해 최고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권 궁장의 활 제작 솜씨는 예술의 경지에까지 이르렀고 전국의 궁사들은 그가 만든 활을 소장하는 게 꿈이었다. 80년 그는 경북도무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후부터는 미국·유럽·아시아 등지에 자신의 작품을 전시하며 전 세계에 우리 활의 우수성을 알리고 있다. 그는 활 제작뿐만 아니라 활 보급과 후진양성에도 최선을 다했다. 68년부터 93년까지 경북도 궁도대표 겸 코치활동을 했다. 또 전국 72개 지구에 궁도팀을 창설하는 등 궁도인구의 저변확대와 발전을 주도했다. 특히 사재를 털어 예천여자중·고에 양궁부를 창설해 김진호와 같은 세계적인 스타를 길러냈다. 2008년 베이징올림픽 양궁여자단체전에서 금메달과 동메달을 딴 윤옥희, 한희정, 황숙주 등도 예천 출신이다. 현재 예천지역에 궁도팀이 있는 학교가 7개에 이른다.  ▲예천각궁은 어떻게 만드나? : 전통 활은 목궁, 철궁, 죽궁 등 10여종에 이르지만 지금은 소뿔로 만드는 각궁(角弓)이 유일하다. 각궁은 고구려의 기마무사가 쓰던 맥궁(貊弓)이 원형이다. 길이는 짧고, 탄력성이 있는 여러 다른 물체들을 결합한 복합단궁이다. 각궁은 고유의 전승공예품으로 문화재적 가치와 운동용구의 기능이 인정돼 국가무형문화재 47호로 지정돼 있다. 각궁은 순수천연재료를 사용하며 계절과 시간·온도조건에 맞춰 만들어야 한다. 또 일일이 다듬고, 붙이고, 파고, 구부리고, 말리고 하는 등 전 과정을 수작업으로 한다는 것이 특징이다. 주재료는 대나무·참나무·산뽕나무·물소뿔·소힘줄·민어부레 등이며, 완성된 활이 나오기까지 1년이 걸린다. 대나무와 참나무는 활의 활짱(몸통), 산뽕나무는 활의 줌통(손잡이 부분)에 사용된다. 물소뿔과 소힘줄은 활의 앞뒷면에 붙여 탄력성과 신축성을 강하게 해준다. 민어 부레는 일종의 접착제다. 본 작업은 날씨가 서늘해지기 시작하는 10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이고, 재료준비와 처리기간은 6월에서 9월까지다. 이중 한 과정이라도 소홀히 해선 제대로 된 활을 만들 수 없다. 보통 한 장(丈)의 활을 만들기까지 300번 이상의 손질과 정성이 필요하다. 뒤짐·도지개·조막손이·도가니 등 제작기구만도 20여 가지가 넘는다. 권 궁장은 “손재주로만 활을 만들어선 안 된다. 일심정념(一心正念)으로 만들어야 제대로 된 활을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글·박진관 記者 嶺南日報 2012-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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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오휘 한국문인협회 예천지부장, 평론신인문학상 수상...축하합니다.

 

  권오휘(權五輝 氏 評論 新人文學賞 受賞) [記事] : 대창고 교사 권오휘 씨가 ‘통찰을 통한 미학’으로 원간 문학세계(8월호) 평론신인문학상을 수상했다. 심사위원들은 “권씨의 당선작은 김운태 시인의 시적 미학을 명징한 시선으로 관찰하고 있는 가운데 통섭의 시각으로 건저올린 심안의 집 한 채를 짓고 있다”고 평가했다. 권오휘 씨는 월간 문예사조(시)로 등단했으며, 한국문인협회 예천지부장을 맡고 있다.(醴泉新聞 2014.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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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초 박지민, 4일 양궁 전국대회 금...축하합니다.

 

  예천초등학교(醴泉初 2014 마지막 全國初等學校 洋弓大會에서 金빛사냥을 하다) [記事] : 예천초등학교(교장 김영한) 양궁부 박지민(예천초 6학년) 선수가 2014년 9월 2일부터 4일까지 예천진호국제양궁장에서 200여명의 남초부 선수가 참가한 가운데 열린 '제25회 전국남여초등학교 양궁대회'에서 25m 부분에서 1위(356점)를 하였다. 박지민 선수는 2014년도에 열린 모든 경북대회 및 전국대회에서 메달을 따는 쾌거를 거두었는데, 특히 제43회 전국소년체육대회에서(2014.5.23.~25) 30m 은메달, 25m 동메달을 수상하여 예천초등학교 양궁부 창단(1981.12.21) 이래 1995년 제24회 전국소년체육회(양궁)에서 단체전 3위(본교 윤정혁 참가)에 입상한 후 20년 만에 메달을 획득하였으며 개인전 메달(은1, 동1)은 처음으로 획득하였다. 이번 성과가 있기까지 예천초등학교 전 교직원은 양궁부 후원회를 조직하여 많은 관심과 격려를 보내주고 있었고, 다른 기관 및 단체에서도 관심과 격려를 아끼지 않고 있다. 2015년에 있을 경북대회 및 전국대회에서도 좋은 결실을 거두기 위해 예천초등학교 양궁부 선수들은 감독선생님과 코치선생님의 지도를 받아 오늘도 열심히 훈련에 임하고 있다.(醴泉인터넷放送 2014-09-11 오후 1:3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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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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