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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775:세계활축제(27)김진호(3)(附예천방문1,174)
작성자장병창 @ 2014.09.27 06:10:10

  예천의 자랑(3775) : 예천세계활축제(27) 김진호(3)(附 예천방문 1,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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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진호(世界에 떨친 洋弓 女王, 다시 頂上에 오른 金珍浩, 射法 고쳐 再起 60m 빼고는 獨走, 醴泉産... 79년 베를린大會 5冠王) [記事] : 스포츠 각 종목 가운데 한국 선수가 세계 최고 기록을 기지고 있는 종목은 궁도의 김진호뿐이다. ‘한국 양궁의 여왕’으로 불려지는 김진호(22, 한체대 3년)는 79년 베를린에서 열린 제30회 세계선수권대회 60m 더블 라운드(720점 만점)에서 643점을 기록, 세계최고기록 보유자가 되었다. 한 개의 세계 기록을 갖고있던 김은 이 번 오비히로대회에서 세계 기록을 무더기로 따내 이제는 ‘세계 양궁의 여왕’으로 등장했다. 국궁의 고향 경북 예천 출신으로, 키 164cm, 체중 54kg의 야멸찬 모습을 지닌 김진호는 예천여고 재학 시절인 1979년 7월 베를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 신데렐라가 되었다. 인기의 뒤안길에 있던 한국 궁도를 양지로 끌어낸 김진호는 이후 비공인이지만 70ㆍ60ㆍ30m 더블 라운드와 개인종합 세계최고기록을 세웠다. 각광 속에 휩싸였던 김진호는 80년 후반부터 슬럼프에 빠졌다. 부상이 겹쳤고, 1982년 2월까지만 해도 궁도 선수의 생명인 오른쪽 어깨가 정상이 아니었다. 재기가 절망적이던 김진호는 1982년 봄부터 기적으로 부진의 늪에서 헤어났다. 정갑표(鄭甲杓) 대표팀 코치의 지시에 따라 사법(射法)을 고치고, 각종 치유 끝에 재기한 것이다. 특히 사법 교정은 일반적인 근육통처럼 어깨 근육이 늘어난 게 아니라 지나치게 수축된 그녀의 어깨를 원상으로 회복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82년 6월 초 대표선수선발전에서 김은 비공인 세계신기록 3개, 세계타이 1개를 수립해 훌륭히 재기했고, 이 번에 일본에 가서도 50m 경기를 제외하고는 독보적인 존재로 호조의 기록을 낸 것이다.(李鍾南 記者 韓國日報 1982.7.22)

 

  김진호(金珍浩 全美洋弓選手權大會 女子部 競技 5個 部分 席捲) [記事] : 한국 양궁의 1인자 김진호(23)가 슬럼프에서 깨어나 LA올림픽을 향해 질주하고 있다. 한국체대 졸업반인 김진호는 1983년 8월 미국에서 열렸던 제99회 전미양궁선수권대회 여자부 경기 5개 부분을 석권, 다가오는 LA올림픽에서 금메달의 꿈을 부풀게 했다. 김은 또 이 번 대회에서 자신이 국제대회 사상 처음으로 더블 라운드 2600점대를 돌파, 더욱 자신을 갖게 했다. 김은 지난 79년 예천여고 시절 2632점으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작성했지만 정작 국제시합에서는 2600점대를 넘지 못했다. 김은 이 번 대회에서 첫 싱글에서 1312점 등 2615점(2880점 만점)을 기록해서 김진호의 건재를 과시했다. 79년 서독대회 5관왕으로 활짝 꽃을 피운 그는 80년 모스크바올림픽 불참으로 좌절하는 듯 하더니 최근 다시 고개를 들고 세계무대를 주름잡고 있어 팬들은 물론 국민 전체의 관심도를 높여 놓은 셈이다.(새農民 1983年 9月號)

 

  김진호(金珍浩) [記事] : 1961- , 예천읍 동본동 출신, 종국(鍾國)의 2남 2녀 중 막내, 한국체육대 졸업, 예천여고 진학 때 운동 시작(77년), 77년 제58회 전국체전 개인종합 1위, 제8회 아시안게임 단체 1위, 개인종합 1위, 79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서독) 5관왕, 81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 개인종합 3위, 82년 아시아양궁선수권대회 개인종합 1위, 82년 세9회 아시안게임 단체 1위, 개인종합 2위, 83년 전미오픈양궁선수권대회 단체 및 개인종합 1위, 83년 세계양궁선수권대회(32회, LA) 5관왕, 84년 LA올림픽대회 동메달이다. 체육훈장 백마장, 청룡장 등 수여받았다.(每日年鑑 1985)

 

  김진호(精神 訓練․科學 活用의 凱歌/ 韓國洋弓 頂上 13年 秘訣) [記事] : ◎새벽부터 단전호흡… 지도자 연구도 한 몫//ꡒ고구려 무사들의 피가 흐르기 때문인가.ꡓ한국 여성 궁사들이 올림픽 양궁을 압도하고 남성 궁사들이 정상을 넘보자 한국양궁의 성공 비결에 세계인의 궁금증어린 눈길이 쏠리고 있다. 김진호가 79년 제30회 세계선수권대회(베를린) 5관왕을 석권하며 세계 양궁계에 화려한 첫선을 보인 한국 양궁은 서향순­왕희경­김수녕 등 걸출한 천재들을 잇따라 배출하며 13년 간 세계 정상을 누려왔다. 특히 각종 세계기록의 절반 이상을 한국선수가 갖고 있고 88서울올림픽에 이어 바르셀로나에서도 남녀 모두 세계정상급 수준의 기량을 선보인 양궁은 더 이상 양궁이 아닌ꡐ한궁ꡑ이란 평까지 나오고 있다. 60년대 초 처음 양궁이 국내에 들어온 지 불과 30년만의 일이다. 양궁이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발전을 이룰 수 있었던 첫 번째 요인을 많은 양궁인들은 우선 전래 활인 국궁의 오랜 전통에서 찾는다. 본격적인 양궁 1세대라 할 수 있는 김진호가 활의 고장인 경북 예천 출신이란 것도 이런 점에서 흥미롭다. 국궁이나 양궁 모두에 공통되는 정신 훈련의 중요성에 비추어 볼 때 국궁에서 기법을 전수받았다는 설명은 설득력을 갖고 있다. 태릉훈련원의 새벽 기상과 함께 30여분간의 단전호흡과 참선으로 마음 가라앉히기, 동전만한 금색 과녁을 농구공 만하게 그려보는 명상 훈련, 그 한가운데를 화살이 꿰뚫고 들어가는 걸 끊임없이 상상하는 이미지 트레이닝, 그리고 이번 겨울 새로 시도한 표적지 뒤집어 붙이고 백지 위에 쏘기 등이 그러한 정신훈련의 예이다. 그간 세계 양궁계를 양분해 왔던 미국․옛 소련 등 비동양권 선수들로서는 쉽게 납득하지 못하는 이런 정신 훈련은 사실 한국 양궁이란 빙산의 밑둥치였던 셈이다. 이런 바탕 위에 덧붙여진 것이 현대 스포츠과학의 성과를 최대한 활용한 과학적 훈련이다. 서울올림픽 때ꡐ생체리듬그래프ꡑ란 과학적 훈련 방법을 적용했던 양궁 대표팀은 이 번 대회를 대비해 이를 더욱 발전시켜ꡐSL 스코어링 시스팀ꡑ이란 생체 리듬 조절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불임클리닉분야의 권위자인 서병희(경희의료원) 씨와 이기식 대표팀 감독의 영문 앞 자를 따 이름을 붙인 이 프로그램은 선수들의 생체 리듬과 활을 쏘는 자세, 그리고 성적 사이의 관계를 지속적인 측정과 비디오 촬영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이처럼 정신 훈련과 과학적 훈련이 어우러져 최상의 기량을 발휘하기까지는 연구하는 젊은 지도자들의 노력이 컸다. 현 대표팀의 이기식(36) 감독이나 박경래(36) 전 감독, 이왕우(36), 김학룡(34) 코치 등은 외국 서적을 놓치지 않고 찾아내 독파하고 이를 훈련에 적용하는 등 국제 양궁계에서도 빼어난 이론가로 통하고 있다.〈바르셀로나=올림픽취재단>(한겨레新聞 1992-08-05)

 

  김진호(神弓 韓國) [記事] : 크로마뇽인의 동굴벽화엔 활로 들짐승을 사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인류에게 불의 발견만큼이나 활도 큰 몫을 차지했다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첨단과학이 세계를 지구촌으로 만드는 오늘날에도 활로 사냥하는 오지의 원주민들이 있고 보면 활쏘기는 인류와 줄곧 함께 있어온 셈이다. 활이 전쟁 무기로 위력을 떨친 사례는 너무나 많다. 1066년 헤이스팅스전투에서 영국군을 대패시킨 노르만족의 무기는 활이었다. 13세기 유럽을 공포에 떨게한 칭기즈칸의 기마궁병이나 백년전쟁 당시에도 활싸움은 승리의 수단이었다. 활이 전쟁 무기의 자리를 잃게 된 계기는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 이후. 활이 총기류를 당할 재주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중국에선 1860년까지 활을 마지막 전쟁 무기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전문가들은 사법을 지중해형과 몽골형으로 나눈다. 오늘날 양궁으로 발전한 것이 지중해형이다. 양궁이 우리나라에 보급되기 시작한 시기는 1962년께. 그 이후 양궁이 국제대회에서 효자종목으로 자리매김을 하게 된 계기는 1978년 제8회 아시아경기대회였다. 이 대회에 첫 출전한 당시 예천여고생 김진호가 당긴 시위는 바로 금메달의 효시로 기록됐다. 효시는 적진으로 돌진하는 기마부대 선봉장의 공격 개시 신호 화살. 화살이 날아가는 소리를 흉내 낸 스키타이문화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김진호 이래 양궁은 한국의 메달밭이 돼오고 있다. 제10회 아시아대회에서는 무려 9개나 되는 금메달을 따내 종합 2위를 굳히는데 톡톡히 한 몫을 했다. 이 뿐 아니라 올림픽에서도 거르지 않고 금메달을 목에 걸어오고 있는 양궁은 이 번에도 화제를 뿌리고 있다. 김경욱이 두 차례, 오교문이 한 차례「퍼펙트 골드」를 명중시켰대서다. 신조어가 된 퍼펙트골드의 확률은 12,500분의 1. 한국은 신궁의 나라임이 분명하다.(京鄕新聞 1996-08-03)

 

  김진호(20世紀 今週의 小史 ; 金珍浩 洋弓史上 첫 世界 制覇 快擧) [記事] : 1979년 7월 19일 제30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가 열린 베를린 마이펠트 그라운드. 세계대회에 첫 출전한 한국선수단에는 18세의 앳된 소녀 김진호(예천여고 3년)가 있었다. 간간이 비바람이 몰아친 이날 김진호는 여자 60m 더블라운드에서 643점을 쏴 세계신기록을 갈아치웠다. 한국 기록경기사상 첫 세계 제패였다. 김진호는 이튿날 30m와 50m에서도 우승한 데 이어 개인종합과 단체종합도 석권해 여자부문에 걸린 6개의 금메달 중 5개를 휩쓸었다. 외신은 한국양궁의 세계 제패를 다투어 전했다. 국내 언론도,『손기정이 월계관을 쓴 곳에서 43년 만에 태극기가 펄럭였다』며,『국궁에 눌려 빛을 못 본 양궁에 투자하면 올림픽 금메달도 가능하다』고 흥분했다. 김진호의 세계 제패 이후 한국 여자양궁은 84년 서향순, 88년 김수녕, 92년 조윤정, 96년 김경욱이 연이어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며 20년째 세계 최강으로 군림하고 있다. 김진호는 현재 한국체대에서 후진을 양성하고 있다.(이한수 記者 朝鮮日報 1999-07-24)

 

  김진호('洋弓韓國' 幕올린 1世代) [記事] : 지금의 한국 여자양궁은 명실공히 세계 최강이다. 그러나 79년 7월 예천여고 3년생인 김진호(당시 18세)가 제30회 베를린세계선수권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한국양궁은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62년 국내에 양궁이 처음 도입된 지 꼭 17년만의 세계 정상. 세계스포츠사에 이런 이변은 없었다. 그 것도 단체, 개인 등 6개 부문 중 5개 부문을 석권하며 단숨에 세계 정상에 올라선 김진호의 쾌거는 그야말로 전국을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종합우승 소식이 전해진 경북 예천 김진호의 집에는 주민들이 몰려와 마치 잔칫집 같았다. 특히 김진호가 첫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정상을 차지했다는 것은 더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 것도 양궁의 역사가 짧은 한국에서 변변한 시설도 갖추지 못한 훈련 시설의 핸디캡을 딛고 이룬 쾌거여서 국민의 기쁨은 더 컸다. 아무도 예상하지는 못했지만 김진호는 이미「큰일을 저지를」싹이었다. 언니를 따라 예천여중 2년 때부터 활을 잡은 그는 예천여고 1년인 77년 광주체전에서 개인우승을 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혜성처럼 등장한 김진호는 이후 77년 말 대표선수로 발탁돼 승승장구한다. 78년 방콕아시안게임 여자개인전서 우승컵을 차지하며 한국양궁사상 첫 국제대회 우승을 이루고 이듬해 세계대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았다. 활을 잡기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양궁여왕」의 자리에 등극한 것이다. 김진호의 세계 정복에는 다소의 행운도 있었다. 인종 차별, 정치 문제로 소련, 폴란드 등 동구의 양궁 강국들이 무더기로 출전을 보이코트, 당시 세계 정상권이던 루스타모바, 부투조바, 코사베리제(이상 구 소련)와 세계최고기록 보유자 빌레즈토(폴란드) 등이 불참한 것이다. 하지만 김진호는 기록으로 세계 정상의 실력을 확인시켰다. 60㎙더블라운드에서 빌레즈토의 당시 세계최고기록을 무려 13점 경신한 세계신기록을 세운 것. 김진호는 이후 82년 세계선수권에서 다시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김진호의 시대는 84년 LA올림픽을 계기로 서서히 막을 내리기 시작했다. 당시 광주여고 3년생이던 서향순에게 올림픽 금메달을 내준 채 3위로 밀려났다. 하지만 김진호가 세계 정상의 물꼬를 트지 않았다면 서향순의 등장은 더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서향순 이후 88서울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인「양궁천재」 김수녕,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우승자인 조윤정, 96애틀랜타올림픽 우승을 차지한 김경욱, 그리고 1999년 세계선수권 우승자인 이은경까지…. 한국은 20년 간 부동의 최강명성을 이어오고 있다. 한국의 양궁 최강에는 바로 김진호라는「신동」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현재 한국체육대 강사로 변신한 김진호는 이제 양궁코치로도 활약하며「제2의 김진호」발굴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박원식 記者 韓國日報 1999-12-17)

 

  김진호(萬物相) [記事] : 한국인들의 활솜씨는 어쩌면 그렇게도 좋을까. 시드니올림픽의 초반 부진을 일거에 쓸어버린 남․북한 낭자들의 양궁 솜씨는 세계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제 시드니올림픽 홈부시베이 올림픽파크 양궁장에서 열린 여자 개인전 4강에 오른 선수는 한국 선수 3명, 북한 선수 1명. 모두 우리의 낭자들이었다. ▶한국 양궁의 역사는 아주 짧다. 국내에 양궁이 도입된 것은 1962년, 아직 50년도 채 안 된 미천한 역사다. 그러니ꡐ양궁 신동ꡑ김진호가 1979년 제30회 베를린 세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따기까지 양궁은 비인기의 그늘에서 17년을 묻혀있어야 했다. 혜성처럼 나타난 김진호로 인해 비로소 국민들은 양궁을 알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양궁의 역사는 여고생들이 개척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진호가 세계선수권을 차지했을 때 그녀는 예천여고 3년생이었다. 1984년 LA올림픽에서 첫 올림픽 금메달을 딴 서향순은 광주여고 3년생, 김수녕은 청주여고 2년생 때였다. 어제 시드니에 첫 금메달의 태극기를 올린 윤미진도 경기체고 2년생이다. 우리의 여고생들이 세계를 제패하고 있는 것이다. ▶한 텔레비전 해설자는,ꡒ우리는 동이족으로 원래 활을 잘 쐈다ꡓ고 흥분했다. 동이(東夷)는 옛날 중국인들이 그들의 동쪽에 있던 종족들을 업신여겨 부른ꡐ동쪽의 오랑캐ꡑ라는 뜻이다. 중화(中華)를 자처하는 중국 지배자들은 방위에 따라 남만(南蠻) 북적(北狄) 서융(西戎)하며 미개한 종족들이라고 얕잡아 봤다. ▶그러나ꡐ이(夷)ꡑ를 풀어보면ꡐ큰 대(大), 활 궁(弓)ꡑ의 결합으로ꡐ큰 활ꡑ을 의미한다. 까닭에ꡐ동이ꡑ는ꡐ활을 잘 쏘는 민족ꡑ이 된다. 동이에 얼마나 괴롭힘을 당하고 놀랐으면 중국인들이 얕잡아보려고 하면서도 그 재주를 글자에 옮긴 셈이다. 고구려 벽화에 잘 나타나 있듯 우리는 말을 타고 호랑이를 활로 잡던 민족이다. 이왕 금(金) 본 김에 오늘 남자 궁사들도 쾌거를 이뤘으면 좋겠다.(朝鮮日報 2000-09-20)

 

  김진호(洋弓스타 金珍浩 博士帽) [記事] : 한국 여자 양궁을 처음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던 김진호(40․한체대 조교수) 씨가 최근 명지대 대학원에서ꡐ훈련 조건과 경기 조건간의 일치도에 따른 경기 수행 비교 연구ꡑ논문으로 이학박사 학위를 땄다. 김 교수는 예천여고 3학년이던 79년 독일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을 차지하면서 80년대 중반까지 세계무대를 석권한 명궁. 은퇴 후 95년부터 한체대 강단에 섰다.(朝鮮日報 2001-02-28)

 

  김진호 [記事] : 양궁 선수로서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양궁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다. 75년 예천여중 2학년 때 양궁 입문, 77년 제58회 전국체전 여고부 개인전에서 대회 타이로 1위, 78년 8월 국가대표 상비군 평가대회에서 60. 70m 더블라운드에서 비공인 세계신기록을 작성, 78년 방콕아시안게임 거리별 전 종목 우승으로 5관왕, 79년 예천여고 3학년생으로 독일 제30회 베를린세계선수권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는데, 첫 출전한 국제대회에서 단숨에 정상에 오른 쾌거는 올림픽 무대를 휩쓴 한국 여자양궁의 출발점이 되었다. 80년 7월 제1회 아시아오세아니아주 선수권대회 70m더블에서 공인세계신기록을 수립하여 5관왕, 83년 롬비치세계선수권대회 5관왕, 84년 LA올림픽에서 아쉬운 동메달, 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을 차지한 것으로 국가대표 선수생활에서 은퇴, 활을 놓은 뒤 86년 한체대 대학원 체육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따고, 97년 한체대 경기지도과 조교수로 강단에 섰다. 99년 전국제전 서울시선수단 임원이다. 2001년 2월 21일 명지대 대학원 체육학과 박사 학위식에서 '양궁 선수의 훈련 조건과 경기 조건간의 일치도에 따른 경기 수행 비교 연구'(지도교수 신호주)로 이학 박사모를 썼다. 여자양궁박사 1호가 되었다. 한체대 코치로 양궁팀을 이끌고 있는 김 교수는 여성 양궁인 중 박사 지도자 1호이다. 코치ㆍ주부ㆍ교수 등 1인 3역의 틈을 쪼개 박사 과정을 마쳤다.(每日經濟 2001.2.27 김은희 記者, 인터넷 sportsmuseum 2001)

 

  김진호(金珍浩) : "세계양궁선수권 대회에서 5관왕을 차지했던 양궁의 여왕" 김진호는 1961년 12월 1일 경북 예천군 예천읍에서 아버지 김종국과 어머니 김심분 사이의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예천동부초등학교, 예천여자중학교, 예천여자고등학교를 거쳐 한국체육대학을 졸업했다. 예천여중에 재학할 당시 국궁의 명산지이며 많은 궁사를 배출한 이 지방에 활을 통해 옛 명성을 되찾기라도 하려는 듯 양궁바람이 불었다. 75년 우연히 목격한 활 쏘는 모습이 멋져 보여 자신도 활을 쏴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고, 언니의 권유로 양궁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녀는 입문 1년만인 중학교 3학년 때 전국체전 여중부 단체우승을 차지하며 천부적인 자질을 인정받기 시작했고, 예천여고 1학년 때인 1977년 58회 전국체전 양궁여자부 개인전에서 우승하였으며 2학년 때는 한국대표로 방콕 아시아경기대회에 참가하여 여자 개인전에서 우승하여 국제대회 첫 금메달리스트가 되었다. 1979년 제31회 서베를린 올림픽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세계양궁선수권대회와 1983년 제33회 로스엔젤레스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서는 5관왕을 차지하여 양궁의 여왕으로 군림하면서 한국 양궁을 세계 정상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불행하게도 올림픽대회와는 인연이 없어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는 한국의 대회 불참으로 금메달을 획득할 찬스를 놓쳤고, 1984년 로스엔젤레스올림픽에서는 동메달에 그쳤다. 그러나 그녀는 더욱 노력을 경주하여 1985년 서울에서 열린 제33회 세계양궁선수권대회에 대비한 대표선수 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하고 50m싱글과 싱글종합에서 그녀가 1979년 세웠던 세계 기록을 6년 만에 경신하는 호조를 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서훈으로는 1979년도 체육훈장 청룡장이 있으며, 1983년 백상체육대상 기록경기부문 수상, 동년 최우수선수상, 1984년 대한민국체육상 등이 있다. <자료출처 : 스포츠나인> (www.kasra.or.kr 2004)

 

  김진호(第15回 正心賞 故鄕을 빛낸 사람 部門 受賞者 金珍浩(43歲, 龍仁市, 醴泉邑 出生) [記事] : 현재 한국체육대 교수이다.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초 불모지였던 우리나라 양궁을 세계 정상으로 올려놓았으며, 예천을 양궁의 메카로 자리 잡게 한 장본인이다. 1975년 예천여중 2학년 때 양궁을 시작해 197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 양궁부문에서 거리별 전 종목 우승했다. 1979년 베를린 세계선구권대회에서 5관왕, 1982년 제1회 아시아오세아니아주선수권대회 5관왕, 1983년 세계대회 5관왕, 84년 LA올림필 2관왕,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4관왕 등 우리나라는 물론 세계에 예천의 위상을 높인, 살아있으면서 전설로 남은 인물이기도 하다.(醴泉新聞 2004.9.23)

 

  김진호(金珍浩(醴泉女高), 泰陵選手村에서 열린 國家代表 및 常備軍洋弓記錄評價會에서 3個의 非公認 世界新記錄 수립) [記事] : 날짜 : 1978년 08월 29일/ 정보제공기관 :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제공기관 : 국사편찬위원회(www.knowledge.go.kr 2006)

 

  김진호(洋弓 神話의 始作.. 神弓 '김진호') [記事] : 우리나라 여자 양궁 무적신화는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한국양궁의 역사는 짧다. 우리나라 양궁이 국제대회에 출전했던 게 불과 30년 전이다. 첫 출전은 1978년 열렸던 방콕 아시안게임. 이 대회에 김진호, 오영숙 선수 출전하였다. 한국 여자양궁의 박성현, 주현정, 윤옥희 선수가 2008년 8월 11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 한국은 여자양궁 단체전에서 88 서울올림픽 이래 6연패의 위업을 달성했다. 매번 올림픽 때가 되면 언론과 방송은 마치 양궁 특히 여자양궁은 당연히 금메달을 따와야 하는 종목인 것처럼 이야기하곤 하지만, 막상 경기를 지켜보게 되면 행여 실수가 있지는 않을지 또는 이변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가슴 졸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KBS 양궁 해설위원 이은경(92 바르셀로나 여자 단체 금메달), SBS 양궁 해설위원 김경욱(96 애틀랜타 올림픽 2관왕), MBC 양궁 해설위원 김수녕 (88 서울 올림픽 2관왕) 씨도 모두 한결같이 말하는 것처럼 사실 여자양궁의 올림픽 금메달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닌 선수들의 피땀 나는 노력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전부터 계획된 한국 양궁에 대한 지속적인 투자와 육성 끝에 이루어진 결실인 것이니까. 아마 여자양궁 역대 올림픽 메달리스트 목록은 올림픽 때마다 방송에서 하도 읊어댔으니 웬만한 분들도 다들 외우다시피 할 것이다. 84년 LA의 서향순, 88년 서울의 김수녕, 92년 바르셀로나의 조윤정, 96년 애틀란타의 김경욱, 2000년 시드니의 윤미진, 2004년 아테네의 박성현. 그야말로 한국의 전통적인 강세 종목이며 가문의 대를 이어가 듯 쭉 이어온 지난 20년간의 여자 올림픽 양궁 금메달리스트들이다. 하지만 요즘 10대, 20대는 물론 30대 초반 만해도 김진호 선수에 대해선 잘 모를 것이다. 지난 30년 세계 최강의 자리를 우뚝 지켜온 한국 여자양궁이지만, 바로 그 양궁 금빛신화의 시초는 김진호 선수였다. 올림픽에서 양궁이 첫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것은 1900년 제2회 파리 올림픽. 하지만 당시 유럽 각국 마다 양궁 시합방식이 달랐기에 이에 대한 통합문제로 우여곡절을 거듭하다 1920년 제7회 앤트워프 대회를 마지막으로 양궁은 정식종목에서 제외되었다. 그리고 52년만인 1972년 뭔헨올림픽 때 양궁은 현대적인 경기방식의 정식종목으로 부활하였다. 한편 우리나라 양궁의 역사는 좀 복잡하다. 우선 우리나라엔 전통적인 활쏘기 대회인 ꡐ 궁도 ꡑ가 이미 존재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우리의 전통궁도와 서양의 양궁은 기술이나 경기방식에서 많은 차이를 갖고 있다. 이 문제 때문에 쭉 혼선을 빚어오다가 1969년 대한궁도협회에 양궁 이사직이 신설되기에 이른다. 그리고 여기까지 이르게 된 데에는 한국전쟁 직후인 1959년 서울 중앙시장 부근 한 고물수집상에서 양궁을 발견한 석봉근 씨의 부단한 노력이 있었다. 석봉근 씨는 한국 양궁의 산파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인물이다.

 

  1971년 양궁은 소년체전에서 여 고등부 종목으로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고, 그로부터 7년이 지난 1978년 한국의 첫 여궁사 신화가 탄생한다. 1961년 예천 출생으로 중학교 2학년 때인 75년에 첫 화살을 잡은 김진호 선수가 바로 그녀이다. 77년 전국체전에서 1위를 기록한 김진호 선수는 7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출전 5관왕이 된다. 그리고 이듬해인 1979년 제30회 베를린 국제 양궁 선수권대회에서 또다시 5관왕을 거머쥠으로써 한국의 여고생 신궁(神弓) 김진호 신화가 탄생한다. 79년 김진호의 양궁 신화는 한국 체육계를 온통 들썩이게 만들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에서 양정모 선수가 건국 이래 최초의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된 3년 후의 일이니까. 하지만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서방국가들이 줄줄이 불참을 선언하고 우리나라 역시 불참했기 때문에, 올림픽 금빛신화 탄생 시기는 아쉽게도 4년 뒤로 미루어야만 했다. 비록 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양정모에 이은 여자양궁 김진호 올림픽 금메달 신화 탄생 시나리오는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70년대 후반 그렇게 혜성같이 나타난 여고생 궁사 김진호는 80년대 초반까지 매번 국제대회를 싹쓸이하다시피 하며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당대 최고의 신궁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그러나 84년 LA 올림픽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금메달리스트이자 여고생 신궁 신화의 영예는 당시 17세였던 서향순에게 돌아가게 된다. 한편 김진호는 자신에게 쏠린 언론과 국민의 지나친 관심에 대한 부담 때문이었을까. LA 올림픽에서 김진호는 동메달에 그치고 86 아시안게임 3관왕을 끝으로 선수생활을 마감한다. 84년 LA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였던 서향순, 그리고 88 서울올림픽 2관왕 김수녕이 모두 당시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관계로 여고생 신궁 혹은 여고생 신화란 별칭이 따라다니기도 했지만, 바로 그 여고생 신화 탄생의 원조는 79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열여덟 살 나이로 5관왕을 차지한 김진호 선수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역시 윤미진 선수가 여고생 나이로 2관왕을 차지하여 바로 그 여고생 신궁 탄생 신화의 계보를 이어갔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엔 선수 이름으로 붙여진 양궁장이 세 개 있다. 광주에 있는 ꡐ서향순양궁장ꡑ, 충북 청주에 있는 ꡐ김수녕양궁장ꡑ 그리고 경북 예천의 ꡐ김진호양궁장ꡑ이다. 여자 개인전은 84년 이래 2004년까지 6차례 그리고 단체전은 88년 이래 이번 베이징 올림픽까지 6차례 금메달 신화를 이어가고 있지만, 아쉽게도 올림픽 금메달 신화엔 이름을 올리지 못한 김진호 선수.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올림픽 효녀종목으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여자양궁. 그 신화탄생의 원조는 79년 세계선수권 대회 5관왕 김진호 선수였음을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바로 그 김진호가 신화탄생의 시초가 되어 지난 30년 세계 최강으로 자리매김해온 한국 여자양궁이기 때문이다.(인터넷뉴스 신문고 2008/08/12 [07:20])

 

  김진호 [記事] : 출생 1961년 12월 1일/ 출신지 경상북도 예천/ 직업 대학 교수,양궁선수/ 학력 한국체육대학교/ 경력 1999년 전국체전 서울시 선수단 임원, 1984년 LA 올림픽 여자양궁 동메달 수상,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3관왕, 1984년 LA올림픽 동메달(daum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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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귀농인회(醴泉, ‘第2人生 設計, 歸農ㆍ歸村 博覽會’ 參加 : 歸農政策 紹介 等 豫備歸農人 情報 相談 效果 커) [記事] : 예천군은 2014년 9월 25일부터 27일까지 3일간 경기 일산 킨텍스에서 열리는 ‘제2인생 설계, 귀농ㆍ귀촌 박람회’에 참가했다. 올 들어 세 번째로 참가하는 이번 박람회는 예비 귀농인들에게 농지구입, 자금지원 등 귀농인들이 궁금해 하는 정보를 상담하면서 귀농ㆍ귀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인식을 확산시키고 귀농 종합정보 등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며 다양한 귀농시책사업을 소개했다. 이번 행사에서 예천군 귀농지원팀 2명과 예천군 귀농인회 회원 5명이 참가하여 귀농을 희망하는 도시민에게 맞춤형 귀농 정보 상담과 귀농성공사례 등을 상담했다. 베이비부머 세대 은퇴자가 점점 늘어나고 경기회복이 둔화됨에 따라 횟수를 거듭할수록 귀농ㆍ귀촌 상담 건수도 부쩍 늘어나 이번 박람회에는 100여건을 상담했으며 특히, 예비 귀농인들이 주택 및 농지구입 등에 대한 정보를 가장 많이 상담하는 것으로 분석돼 부동산 정보 제공에 보다 전문적 지식이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 예천군 관계자는 “이번 박람회를 통해 농촌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귀농귀촌에 대한 현실적인 감각을 심어 주었으며 앞으로도 귀농활성화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다양한 시책개발과 홍보 행사를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한편, 올해 세 차례 박람회에 참가한 결과 예비 귀농인에게 올바른 귀농 방법과 절차 등의 상담으로 큰 효과를 거두었으며 아울러 오는 10월15일 부터 19일까지 5일간 열리는 제1회 예천 세계활축제 및 곤충나라 clean 예천우리농산물대축제 홍보도 병행해 실시했다.(醴泉뉴스 2014년 09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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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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