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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894:박주상(2)-박주엽(1)
작성자장병창 @ 2015.01.25 06:16:01

  예천의 자랑(3894) : 박주상(2)-박주엽(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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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상(朴周庠) : 구분: 독립운동자공적자료/ 날짜: 1831/ 분류: 인물 > 독립운동가자료 > 독립운동자공적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전자사료관/ 유공자명(한글) 박주상 유공자명(한자) 朴周庠/ 생존여부 사망/ 성별 남/ 생년월일 (양)1831년/ 사망년월일 (양)1908년 05월 05일/ 본적 1. 경상북도 예천군 龍門面 上金谷里 353/ 독립운동당시 주소  慶北 醴泉郡 龍門面 上金谷里 353/ 관리번호 2442/ 훈격 애족장/ 포상년도 1990/ 운동계열 의병/ 소속 및 지위  醴泉義兵陣 義兵將/ 독립운동기간 3年/ 활동지역 慶北 醴泉/ 공적개요 1895년 明成皇后 시해를 분격한 나머지 사림에 통문하여 향병을 모집. 1896년 醴泉義兵將으로 추대되어 의병 100여명을 인솔하고 咸昌의 적군을 격멸시키다가 의병해산조칙에 따라 해병하였으며 1905년 을미의병활동을 후원한 사실이 확인됨. / 심사년월 참조문헌 제목  관련 이미지/ 1990.00...  독립운동사자료집 1권 참조 정보 597p ,//

 

  박주상 : 자랑 2780 : 예천의병대장 박주상 추모비건립 중(祝 군청,이영호,권이숙)(작성자 장병창 작성일 2011-12-30)/ 예천의 자랑(2780) : 예천의병대장 박주상 추모비 건립 중(附 예천군, 지적행정 도평가 우수상...축하합니다/노상리 출신 이영호 교사, 20일 전국 스마트러닝공모전 금상...축하합니다/오지리로 시집온 권이숙. 사무관 승진...축하합니다)

 

  박주상 : 안내의 말씀/ 엄동지절에... 가정에 건강과 행운을 기원 드립니다... 수년 전부터 뜻있는 이들이 남천 선생의 추모비를 건립하고자 하였으나 지금까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지난 8월 발기인 몇 사람이 뜻을 모아 조직을 갖추고 추모비건립계획서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결과 11월 10일 공훈심사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되었습니다... 참고로 추모비건립사업비는 국가보훈처의 보조와 문중 및 유족 성금 등으로 확보되어 현재 사업이 착공단계에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2011.12. 의병장 박주상선생추모비건립추진위원장 김시우, 함양박씨 정랑공파문중대표 박일순, 유족대표 박희식

 

  박주상(朴周庠) : 신종우의 인명사전 | 3년전, 2008년 11월 2일/ 박주상(朴周庠), 본관(本貫) 함양(咸陽), 시대(時代) (1831-1908), 자(字) 양선(養選), 호(號) 남천(南泉)/ 이력(履歷) <예천신문 고장의 인물> 박주상(1831-1908)은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 출신으로, 자는 양선(養選), 호는 남천(南泉), 본관은 함양, 필령(弼寧)의 셋째 아들이다. 유학뿐 아니라 풍수지리에도 조예가 깊어 예천 유림의 존경을 받았다. 을미사변 후, 박주상은 사재를 털어 의병을 모집(1896)하였는데, 모여든 의병의 수가 수백 명이나 되었다. 박주상은 늙은 몸에도 불구하고 예천군의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부서를 정하고, 대열을 정돈하여 밤낮으로 훈련을 거듭하여 왜적의 정보를 알아내고, 한편으로는 안동의 김하락, 문경의 이강년 등과 연락하여 북진하기도 하였다. 박주상이 선봉에 서니, 의병들의 사기는 충천하였다. "간교한 무리들을 기필코 섬멸하고 국권을 되찾겠다."라고 하면서 고향인 예천을 떠나 용궁으로 진격하는 도중 친일파와 왜적을 무찌르고, 용궁에서 하룻밤 들에서 자고 다음날 함창을 지나 상주에 다달았다. 이때 고종 임금이 의병을 해산하라고 명령을 하니, 박주상은 놀랍고 분하고 통탄스러웠다. 부득이 예천으로 돌아오니 뒷날을 기약하고 의병들을 해산하였다. 그러나 박주상은 일제에 의해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던 중 예천 군민들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 출감 후에도 청년들과 장년들에게 항일정신, 민족정신 함양에 전력하였다. 일제는 다시 을사조약(1905)을 강제로 체결하니, 박주상은 다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미 70여 세의 늙은 몸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타계하였다. 무덤은 용문면 원류리 마을 뒷산 비석골 장등에 있는데, 문공부에서 유적으로 등록하였다. 당시의 유림들이 박주상의 <창의록>을 적어 예천향교에 보관하였고, 정부에서는 박주상의 공을 기리어 대통령 표창(제55107호, 1982)을 하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www.shinjongwoo.co.kr(daum 2011)

 

  박주상 : 독립운동가 소개-박주학(朴周學,敬可,蓉溪) 선생/ Daum 카페 | 3년전, 2008년 8월 14일/ 대장으로 천거되었으나 신병(身病)으로 사직하여 박주학이 부장(副將)직을 맡게 되었으며, 대장이 된 박주상(朴周庠)은 선생의 집안 족형(族兄)이었다. 그 뒤 2월 제천의병의 일파인 서상렬 의병을 비롯하여 안동(安東)·예안.../ cafe.daum.net/parkyeol/KdEU/25 | 독립운동가 박열의사 추도회(daum 2011)

 

  박주상 : 함양박씨 고문서 국사편찬위에 위탁관리/ 연합뉴스 | 6년전, 2005년 5월 2일/ 하나인 동국통지(東國通志)를 편찬한 박주종(朴周鍾)을 비롯해 한말에 의병대장으로 활동한 박주상(朴周庠), 장지연(張志淵)과 함께 항일 활동을 한 박일수(朴一洙) 등의 인물을 배출했다. 이번에 위탁된 자료는 17세기.../ newslink.media.daum.net/news/ | 미디어다음(daum 2011)

 

  박주상 : 독립유공자(공훈록) ㅣ 국가보훈처/ 검색결과 1102건 [48/111 페이지] 독립유공자 연번 성명 한자 운동계열 생존기간 훈격연도 출생지 632 박주상 朴周庠 의병 1831.~1908. 5. 6 애족장(90) 경북 예천 631 박주석 朴周錫 국내항일 1864. 2.17~1921. 7.24 애국장(95.../ mpva.go.kr(daum 2011)

 

  박주상 : 안동의진/ Daum 카페 | 3달전, 2011년 9월 24일 (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재기를 준비하였다. 1896년 2월에 들어와 이중린(李中麟)이 이끄는 청량산의진, 박주상(朴周庠)이 이끄는 예천의진이 새롭게 꾸려지면서 안동을 중심으로 반격 대열이 형성되었다. 안동의진 역시 주변 지역.../ cafe.daum.net/lhl0775/GTtB/13 | 진성이씨 우포파(daum 2011)

 

  박주상 : 권세연(權世淵)/ 웹문서/ 예안에서 이중린(李中麟)이 이끄는 의진이 청량산에서 편성되었고, 예천에서도 박주대(朴周大)를 이어 박주상(朴周庠)이 의진을 맡으면서 안동을 중심으로 반격 대열이 형성되었다. 안동의진이 주변지역 의진들과 연합하여.../ 815andong.or.kr// 권세연(權世淵 1836~1899.12.10)/ Daum 카페 | 4년전, 2007년 4월 11일(daum 2011)

 

  박주상 : 예천 의병장 박주상 선생.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 =취지문.../ 예천사랑 | 조회 75 | 2006.02.21. 09:40/ 박치대/  예천을 충효의 고장이라고 합니다. 한 지역의 정신문화를 대표하여 충효의 고장이라고 내세울 때는 다른 지역의 일반적인 충효사상과 구별되는 독특한 토양과 뿌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천에서는 임진왜란 당시에 큰공을 세운 약포 정탁 선생이 충(忠)을 대표하고, 명심보감에 오를 정도로 효행이 지극했던 도시복 선생을 효(孝)의 대표자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엇이든 정신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 지역을 대표하는 것이 되려면 그것이 일회성으로 그치거나 단절되어서는 안 되고, 지역 주민들에게 뿌리 깊게 이어져 가는 일관성과 정체성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수많은 고비가 있었으나 일본제국의 침탈로 모진 수난을 겪었던 시절이 어느 때보다 힘겹고 어려운 고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기에 나라와 민족을 건지기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며 의병활동과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높이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에, 민족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았던 구한말에 예천 지역의 의병운동을 이끌어 나라를 지키는 데 힘썼을 뿐만 아니라 예천의 긍지와 자존심을 살리는 데 앞장섰던 의병장 박주상(朴周庠) 선생과 엄혹한 식민지배 아래서 일본제국의 중심적 상징인 천황 부자를 폭살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역범으로 몰려 조선인의 기개를 유감없이 떨쳤던 박열(朴烈) 의사의 기녑비를 세워 오늘날 우리 지역의 정신문화를 제대로 살리고 올바른 민족교육 활동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고자 합니다. 박주상 선생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조선 침략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전국적으로 일어난 의병운동에 발맞추어 65세의 고령에 예천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이강년, 김하락 등 혁혁한 의병장들과 손잡고 일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습니다. 그러다가 일본의 압력을 받은 고종이 의병 해산의 조칙을 내리자 선생은 고향으로 물러나 지친 몸을 쉬면서 사태를 관망했습니다. 그러던 중 1905년에 일본이 강제로 을사조약을 맺고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아 조선 합병의 야욕을 드러내자 전국적으로 2차 의병운동이 일어났으니, 선생은 다시 예천 의병장으로 나서서 침략군과 맞서 싸웠으나 워낙 고령으로 무리하게 싸운 데다가 병환이 겹쳐 1908년 78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하였습니다. 그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1982년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에 국민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으며, 2001년 대전 국립묘지 애국지사 묘역에 부인과 함께 이장되어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박열 의사는, 누대를 금당실에 터 잡고 살아온 집안으로 조부 때 문경으로 이사하여 그곳에서 태어났으며, 경성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중 기미년에 만세운동을 하다가 일경에 쫓겨 일본에 건너가서 사상운동과 함께 독립운동을 펼쳤습니다. 일본제국 최고 권력자인 천황 부자를 폭살할 계획으로 폭탄을 구입하려고 노력하던 가운데 때마침 일어났던 관동 대지진으로 일이 무산되었고, 의사는 대역범으로 몰려 일본 대심원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23년간의 오랜 세월을 일본 감옥에서 보낸 다음 일본의 패전과 함께 석방되었습니다. 석방된 후 의사는 재일교포들의 생활 조건 개선을 위하여 애쓰다가 고국에 돌아와 장학 사업에 힘쓰던 중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북으로 잡혀가 거기에서 평화통일을 위하여 힘쓰다가 1974년에 세상을 떠나 평양의 애국열사릉에 묻혔습니다. 그러자 서울에서 박열 의사 추모식을 거국적으로 거행하였으며, 1989년에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사십 없이 자신을 바쳐 싸웠던 박주상 의병장과 박열 의사의 기념비를 두 분의 본고향인 용문 금당실 마을에 세우려고 합니다. 금당실은 전통 문화마을로서 앞으로 예천 지역의 문화 답사에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기념비 건립은 예천의 정체성을 찾고 정신적 뿌리를 내리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예천 지역의 모든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민과 관이 마음을 함께 모아 뜻깊고 실속 있는 사업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기 바랍니다. 의병장 박주상 선생. 독립운동가 박열 의사 기념비 건립 추진위원회/ 출 처 : 예천군홈페이지 자유게시판/ cafe.daum.net/yckun/ 예천군민회(daum 2011)

 

  박주상 : 初夏의 문턱에서 만물이 약동하는 이때 貴宅에 날로 淸榮하심을 仰祝하나이다. 일제의 국권침탈에 항거하여 예천지역 義兵將으로 활동하신 南泉 朴周庠 선생을 추모하고자 지난 2012년 국가보훈처의 지원과 추진위원 諸位의 노력으로 추모비를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주지하시는 바와 같이 남천 선생은 일제의 마수가 밀려오던 국난의 여울목에서 절망과 어둠속에 처한 나라를 지키려고 한 몸을 바친 愛國志士였습니다. 이에 선생의 고귀한 애국정신과 올곧은 선비정신을 기리고자 추모비 건립을 추진하여 그 除幕式을 다음과 같이 갖고자... 일시 : 2013년 5월 10일 11:00, 장소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산32 오비봉 下... 南泉 朴周庠 義兵將 追慕碑建立推進委員會 委員長 : 金時佑, 문중대표 : 박일순, 사무장 : 박희식(作成 張炳昌 醴泉郡廳홈페이지 自由揭示板 201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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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주엽 [記事] : 박주엽(원적은 상리면, 출생은 하리면, 본적은 예천읍 동본1리) 시인이 2007년 1월 13일 오후 5시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시집 <난(蘭) 말이오> 출판기념회를 연다.(醴泉新聞 2007.1.11)

 

  박주엽(醴泉邑 出身 出鄕人 박주엽 氏 不遇이웃돕기 誠金 200萬 원 傳達) [記事] : 예천읍 동본리가 고향인 박주엽(52, 건설업, 시인) 씨가 2007년 1월 13일 대구그랜드호텔에서 가진 자신의 시집 출판기념회를 통해 얻은 수익금 200만 원 전액을 불우이웃돕기에 써 달라며 2007년 1월 15일 예천군에 기탁해 훈훈한 미담이 되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07-01-16 오전 9:42:00)

 

  박주엽('作品마다 抒情性, 眞率함 묻어나' : 박주엽(下里面 出生) 詩人 詩集 「난(蘭) 말이오」 出版記念會 盛況) [記事] : 박주엽(50․하리면 출생) 시인의 시집 「난(蘭), 말이오」 출판기념회가 2007년 1월 13일 대구 그랜드호텔 2층 다이너스티 B홀에서 열렸다. 이날 출판기념회에는 구본학 예천군부군수, 김택종 재구예천군민회장을 비롯한 친구, 지인, 문인 등 2백여 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이 자리에서 박주엽 시인은 ꡒ난초가 주는 깊고 깊은 뜻을 가슴속 깊이 새기며 남은 인생 가정에 거름되고 사회에 봉사하는 마음으로 시를 노래하며 싱싱하게 살겠다.ꡓ고 밝혔다. 축하공연으로 딸 박미연 양의 섹스폰 독주와 대구가톨릭대학교 음대 학생들이 선보인 알토섹스폰, 오보에, 튜바 3중주의 아름다운 선율이 행사장을 아름답게 수놓았으며, 동료시인들의 축시와 시창이 이어졌다. 전 대구문협 지회장 도광의 시인은 ꡒ시집 「난, 말이오」는 어떤 미사여구도 사용하지 않고 소통불능의 난해성도 없는 진솔함 가득한 서정성이 그 깊이를 함께 보여주는 수작ꡓ이라고 평했다. 어릴 적 친구인 박기동(예천읍 출신) 시인은 ꡒ자신이 감동하지 않는 글은 남도 감동시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잊지 말기 바란다.ꡓ는 따뜻한 충고를 잊지 않았다. 한편 시집 「난, 말이오」 판매 수익금 2백만 원은 국제로타리 3700지구 대구남북로타리의 이름으로 고향의 어렵고 힘든 이웃들에게 작은 보탬을 주기 위해 이날 구본학 예천부군수에게 전달돼 출판기념회를 더욱 뜻 깊게 했다. 박주엽 시인은 동부초, 대창중․고(20회), 한양대학교 체육학과를 졸업했으며, 현재 경암교육재단(경화여자중․고) 이사, (주)화산클럽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2006년 한맥문학 시부문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나라사랑시동우회 회원, 국제로타리 3700지구 대구남북 로타리클럽 위원으로 활발한 사회활동을 펼치고 있다. 박주엽 시인의 지난 삶은 고단함 그 자체였다. 최고경영자의 꿈을 꾸던 청년시절, 부도로 산사에서 보낸 5년의 은둔생활, 가족의 생계를 위한 일확천금의 꿈, 가두리 양식장에서의 6개월, 건설회사와의 인연, 재기 등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왔다. 이런 고단한 삶속에서도 언제나 잊지 않은 것은 가족과 고향과 친구와 시였단다. 난초와 같은 깨끗하고 맑은 삶. 이것이 박주엽 시인이 앞으로 추구할 제2의 인생목표다. 가족으로는 부인 장해숙(46) 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으며, 고향에는 큰형인 박주탁(동광슈퍼) 씨와 많은 친구들이 살고 있다.(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07년 01월 18일 17:35:28)

 

  박주엽(박주엽 詩人 ‘回龍浦의 햇살’ 發刊 : 故鄕의 鄕愁 담아내) [記事] : 시인 박주엽(51)이 1년 만에 시집을 냈다. 시집의 제목은 ‘회룡포의 햇살’. 자신의 고향인 경북 예천에 있는 ‘회룡포’ 사진을 시집 표지에 실었다. 이번 시집에서는 작가 자신이 힘들었을 때와 고통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인생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작가는 자신이 힘들 때마다 마음의 안식처를 찾았고, 그 안식처는 바로 고향이었다. 그리고 고향의 상징이었던 ‘회룡포’를 시집에 담았다. 그는 이번 시집에 자신이 일상에서 겪은 삶과 가족들의 모습의 느낌을 표현했다. 누구나 일상에서 체험할 수 있는 사례를 바탕으로 느근낌을 한편의 시로 표현했다. 평론가들은 그의 시가 특징은 무기교라고 했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솔직한 모습을 담아내는 것이다. 작자는 ‘한맥문학’ 시부문 시인상 당선, ‘문학예술’ 시부문 신인상 당선으로 재등단했으며, 대구문인협회·한맥문학회 동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문학예술출판부. 136쪽, 8천원(이심철 記者 大邱日報 2007-11-18 20:24:58)

 

  박주엽 : 가을문학제 - 힘드니까 사는 거다 / 박주엽| 자유 게시판/ 金石/ 2009.12.13 10:59/ //cafe.daum.net/dgmunin/4cx9/ 힘드니까 사는 거다 / 박주엽// 어머니 손잡고 시장 따라 다니던 세월/ 세월이 떨어진 낙엽에 묻혀 누렇게 누렇게 익어간다/ 철들면서 어머니 젖물 빨던 하얀 젖가슴을 눈에 담고/ 누렇게 익어가는 세상에 기억을 셈할 것이 너무도 많구나/ 낙엽 밑에 덮인 거름처럼/ 재미난 세상에서 큰소리치면서 썩어간다/ 힘든 것만 안고, 모조리 안고 썩어가는 거름처럼/ 숨 쉬며 썩어가는 세상/ 지금까지 살아온 것 호강뿐이구나/ 어머니 따뜻이 손잡던 세월을 더듬고 보니/ 숨쉬어 온 날이 너무도 행복했으니/ 어느 누구보다도 나는 복(福)많은 놈인지라/ 남들은 힘드니까 낙엽 밑에 엎드려 고통을 못 이겨/ 삶을 포기하는데/ 나는 힘드니까 미친 듯이 사는 거다/ 단 한 번도 삶을 포기하려는 마음 가진 적 없이/ 낙엽 밑에 세상이 썩어가는 것임을 알고서도/ 힘드니까 사는 거다. 악착같이 사는 거다./ [박주엽] : 시인 · 경북 예천 출생/ 2005년『한맥문학』,『문학예술』로 등단/ 시집『난 말이오』,『회룡포의 햇살』,『시들은 꽃에 향기가 피어난다』(daum 2010)

 

  박주엽 : 박주엽 시인 "난(蘭). 말이오" 평론 옮김| 회원출판물 소개/ 거랑/ 2008.12.20 11:31/ //cafe.daum.net/bakgidong/FWx4/ <평론>/ "蘭"에게서 사람소리 들리고, 난향에 맺히는 삶의 이슬/ 박 기 동/ <시인, 문학평론가> / 초등학교 동창생인 박주엽은 시집『난, 말이오』를 상재함으로써 세상에 제 목소리를 들려준다. 참으로 장한 일이다. 박주엽 그를 대하면 다소 다혈질에 차가운 바람이 일 것 같은 첫인상이다. 허나 그는 매사에 능동적이고 남자다운 기질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경상도 남자, 그래서인지 유독 무뚝뚝한 친구로 대해왔다. 헌데 참으로 뜻밖인 것은 그가 나에게 처음으로 보여준 작품 모두가 연하디 연한 '蘭'이니 여간 놀란 게 아니다. 11월말 아침 출근을 앞두고 울린 전화에서 그는 자신의 작품을 껴안고 울고 있다고 했다. 그게 뭔가? 내막도 모르고 나도 울적했지만… 그동안 그는 자신의 시를 읽으며 지나간 어려운 시절을 반추해 보았을 것이다. 돌아보면 그가 우리 동창 모임에서 보여준 모습은 호방하고 다른 친구들보다 뛰어난 매력이 있어 기꺼이 우리들은 그를 회장으로 추대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겉으로 내숭은 떨었지만 잘 삐지고 내성적인 필자와는 판이하게 다르니, 에구 인정머리라고는 도통 통하지 않을 것만 같은 박주엽이가 시를 써놓았다니. 한편 의아하기도 하고 내심으로는 문학을 한다는 친구를 알아봐주니 고맙기 그지없기도 하다. 그는 40대 젊은 시절 사업이 부도났다. 마음잡을 곳이 없어 대구 인근 절간에 처박혀 5년이라는 세월을 절밥 축내며 마음을 모두 비우고 재기에 도전한 오뚝이 인생을 살았다고 가까운 친구가 귀띔 해 주었다. 오죽 못났으면 시주로 들어온 절밥을 축냈겠네만 또다시 속세로 돌아온 그 용기가 가상하기도 하여 궁금 반 호기심 반으로 원고를 슬쩍 보았더니 지천에 깔린 시편 모두에 '난'향기가 묻어 있다.  꽤 괜찮다고 본다. 어렵게 살아온 그만의 슬픔을 난촉 하나하나로 싹틔워 세상에 빛으로 보낸 그 심정을 필자가 다 메워줄 수는 없지만 이만하면 원고 값하겠다 싶어 그의 시에 拙說을 쓴다.

 

  1. 시가 곧 '난'이고 '난'이 곧 그다 : 박주엽 시인의 첫 시집은 '난'으로 장식된 집이다. 그에게 '난'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를 미리 밝혀두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늘 온실 속에서 자라는 '난'으로 바라보지만 실상 '난'을 동양란 서양란 구분해서 살펴보면 박주엽이가 나타내고자 하는 '난'은 동양란이다. 엄동설한과 긴 여름 가뭄으로 척박한 깊은 산속에서 인동초 같이 자신의 몸을 단도리하면서 자라나는 동양란 그중에 '寒란'으로 매김해 볼 수 있다.  그의 시를 대하면서 '寒란'의 은근과 끈기로 이어지는 향기를 느낄 수 있었다. 지난시절 너무나 힘들게 살아온 여정이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 그의 시 "너무 힘들다"에서 그는 역설적으로 하얀 밤을 청하며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가혹하리만치 자신의 병을 스스로 세상에서는 없어야할 중병으로 진단하고 생명의 다리를 건너가 보았을 것이다. 이런 중병을 다시 치유하는 능력도 스스로 투약하는 모습도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정과 웃음이라는 처방이며 "너무 힘들다"에서 난초 같은 마음이 필요하다고 그는 호소하고 있다.// 먼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빌며/ 하얀 밤을 청한다/ 목과 허리와 무릎이 다 부러진 중환자처럼/ 내 마음 너무 크게 병들어 있기에/ 마음까지 차박차박 부서지고 있습니다/ 내일의 꽃을 피우기 위해 하얀 밤을 헤매며/ 생명의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조그마한 마음의 情이 있다면/ 나에게 웃음을 주오/ 당신의 웃음이 필요합니다/ 너무 힘든 나에게/ 蘭草같은 작은 미소가 필요합니다/ -「너무 힘들다」전문/

 

  누구에게나 잠자는 시간은 휴식을 뜻한다. 그런데 그 시간마저 마다하고 영원히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너무 힘들다"라는 제목에서 그가 관계하는 모든 것이 차단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하며 "蘭草 같은 작은 미소"만이 그에게 위안이 되고 꺼져가는 생명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 즉 다시 말하면 어떤 조건이나 배경 또는 가식적인 인사가 아니라 절대적인 마음 하나 얻기를 소원하는 것인지 모른다. 시인은 그 마음을 난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음을 그의 시 편 편에서 읽을 수 있다. 마치 연작시를 읽는 듯한 착각이 드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난이 빠지고서는 그 무엇도 말 할 수 없을 것 같은 박주엽 시인의 시는 시가 곧 난이며 난이 곧 그다. 시 한 편 한 편에서 세상을 향해 꽃대를 밀어 올리며 들릴 듯 말 듯 은은한 향기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그가 걸어온 길이 "난향기"로 나타난다.// 봇짐을 지고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천리를 가는 길이 인생이라면/ 무엇이 苦行인지 알 것 같다// 지금 내가/ 슬퍼서가 아니다// 난실에서 노래 짓는 잎새/ 듬뿍 물마시고 잠자는/ 난이 피우는 香氣 때문이 아니다// 코끝에 맴도는/ 가슴에 아려오는// 香에 취하여 퍼뜩이는 코끝의 전율/ 난향기 자욱이 앞을 뒤덮는/ 삶의 저편 푸른 오두막// 눈을 저려내고/ 마음을 도려내는/ 향기향기 蘭香氣// -「蘭香氣(난향기)」전문//

 

  박주엽 시인이 걸어온 시간, 스스로의 삶을 펼쳐 보인다면 이 시를 보여줄 것 같다. 눈물이 앞을 가려 말을 차마 잇지 못하는 화자의 눈물에 난향기가 배어 있다. 힘들다는 말도 사치스러워 말하지 못하고 그 길을 묵묵히 걸어와 이제 입을 열고 말을 하려니 눈물부터 나오는, 마치 꽃이 피고 감추려 해도 저절로 퍼지는 향기와 눈물이 함께 읽힌다. 그러나 늘 이렇게 어려운 것만이 아니다. 고생 끝에 낙이라 수풀을 헤치고 고달픈 언덕길을 지나온 그의 발자취에 빛이 보이고 있다, 이제 그의 그러한 말 걸기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그의 시를 음미해 보기로 한다.// 삼월 삼짓날/ 내가 세상에 울음 터진 날// 강남 갔던 제비가/ 꽃잎 물고 선물 안기던 날/ 우주의 빛이 모두가 내 것이 령(零)// 해질녘 술 생각에/ 민들레 蘭園을 찾아/ 그곳을 찾는 모두에게 소주를 청했건만/ 이 핑계 저 핑계 웃으며 돌아왔다// 이 좋은날 시간을 붙잡고 싶다/ 첫 울음 울던 날 그대로를/ 깊이깊이 하늘에 마음을 심고 싶다// -「봄(Ⅱ)」전문// 꽃샘추위에/ 고생한대요/ 봄이 왔건만/ 추위가 옆에 앉아서/  蘭 싹(신아)이 얼굴을 내밀지 못한다고/ 그래/ 자연의 법칙은 이래서 무섭다나/ 난실 속의 난은 춥지 않은가 봐/ 웃고 있으니 말이야/ 담담한 표정이 대견스럽기에/ 마음이 밝아 졌어요/ 돋보기로 蘭 나체를 홅고 있노니/ 새싹(신아)이 나를 보고 손짓합니다// -「봄(Ⅲ)」전문// 요즘/  일業 하다가/ 집엘 자주 간다// 마누라 엉덩이가/ 보고파서가 아니다/ 그 살갗보다/ 더 보드라운 살갗을 보러/ 집엘 자주 간다// 아기 낳는 난초가/ 진통이 심해/ 집엘 자주 간다// 복 받는 난초아기 출생을/ 기도하며/ 아픈지 외로운지 문 열면/ 살포시 웃어 주는/ 난초 보러/ 집엘 자주 간다// -「봄(ⅹ)」전문// 봄Ⅱ Ⅲ Ⅹ을 읽으며 봄기운 속에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본다. 이쯤 오기까지 너무 힘든 고비를 '난'을 통해 마음을 일으켰다고 본다. 그의 인내가 서서히 자각하며 세상을 다시금 여는 봄으로 맞이하고 있다. 생명의 신비로움에 휩싸인 삼월 삼짇날, 봄을 예감한다. 이른 봄날 봄의 문을 열고 난실 속에서 새싹(신아)을 보는 모습은 마치 그의 자화상을 보는 거 같다. 그리고 해를 거듭하는 동안 이제 태어날 새 생명을 축복하는 자리에 서 있는 시인은 생명을 어루만지는 따스한 마음을 지닌 봄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 그의 마음에 늘 봄의 신아를 내밀기를 바랄뿐이지만 한편으론 부럽고 질투(?)도 난다. 

 

  2. 가족 가운데로 피우는 난향 : 흔히 "애란인" 가정에서는 '난'을 두고 부부싸움이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생각해보라 소중한 당신이 자기보다 '난'을 애지중지한다면 아무리 금슬이 좋다고 해도 질투와 서운함이 드러나지 않겠는가. '난' 한 촉에 몇천만원을 주고 눈길과 마음이 온통 거기에만 머문다면 이건 틀림없이 부부싸움감이 되고 만다. 그의 시 "부부싸움(1)"에서 독자들은 절로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풀 한포기를 놓고/ 고성이 오고 간다/ 이천만원 주고 산 난초를 두고/ 나를 교육시키는 마누라// 밤기운에/ 아파트가 흔들거린다// 난실 속/ 난초 눈동자가 빛을 잃어간다// 어두운 밤/ 지나가는 별빛이 응원을 보낸다//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겠지 하며 속을 삭인다// 냉장고 속/ 술병에 화를 던지고 웃어 버린다// -「부부싸움(1)」전문// 부부싸움을 읽다가 슬그머니 웃음이 나온다. 부부가 풀 한포기 놓고 싸우는 일이 결코 작은 일도 아닌데, 넌지시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이미 다툼이 있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덜컥 일을 저지른 겸연쩍음이 엿보인다. 그가 진정으로 아끼는 것은 사실 '난'이 아니라 "마누라"라고 크게 들려준다. 제발 부부싸움 자주해서 이런 좋은 시가 많이 쓰이길 친구로서 진정 바란다.

 

  자신의 이마골에 달린 계급장과 부모님을 연상하며 자식을 향하는 아버지로서의 옹골찬 다짐도 '난'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올해 모습이/ 작년보다/ 젊어졌다는/ 蘭草 모습을 볼 때마다/ 내 주름진 이마골에 피는/ 늙어가는 계급장/ 자식들 뒷바라지에/ 蘭草의 꿋꿋함을 볼 때면/ 忍耐로 버텼던/ 순박하신/ 부모님 모습// -「인내 2」전문// 자식 뒷바라지에 주름이 늘어가는 자신의 모습과 부모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지점에 난초가 피어 있다. 마음이 머무는 곳마다 마음이 열리는 곳마다 사람으로 화하는 난초를 본다. 부모님이 계시고 내가 있고 자식이 자라는 그곳, 난실은 그에게 세상의 축소판이다. 그곳에서 그는 세상을 읽고 세상을 살아가는 진정한 애란인이다.

 

  그의 자식사랑 또한 아비로서 못 다한 마음을 난을 통해 말하고 있다. 스승의 날 5월15일/아들 딸 두 아이 선생님에게로/난초를 선물했다… 난초를 보고/스승과 제자의 위치가 어딘가를/가만히 느껴본다면/어둡던 교실이 밝음의 빛으로/영원하리라 기대하며/난초를 선물했다. 스승의 날에 시인이 가장 아끼는 난을 보낸 깊은 뜻 그 속에 자식 사랑이 묻어나온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난이 있고 난을 통해서 서로의 마음을 열어 두고 있음이다. 난을 선물한다는 것은 곧 진실한 마음을 전하는 것이며 속 깊은 아비의 情이다.// 캄캄한 밤 조용한 시간 네 생각에/ 전화로만 단속하는 애비 음성 들리더나/ 열심히 하라는 명제를 네 가슴에 남기니/ 달빛 속에 어리는 네 얼굴 소심素心으로 피더구나// 너의 별을 잡으려 예쁜 너 얼굴에/ 소담스레 핀 소심素心이 오늘 따라 더욱 예쁘다/ 너의 가슴에 내리는 향기는 나의 숨결/ 뽀얀 이슬 보며 詩 속에 너를 띄우는 마음/ 2년 후/ 우리 웃음의 氷點에 서서/ 마음껏 울어보자/  -객지에서 음악 공부하는 딸, 미연이를 생각하며-//  -「보고 싶은 딸 - 美蓮」전문// 딸에 대한 애틋한 부정은 "소심素心이 오늘 따라 더욱 예쁘다" 애지중지 딸 미연이를 가슴에 담고 있다. 딸 미연이도 이젠 어엿한 음악가로 자라 아버지에게 늘 새로운 기쁨의 마음을 들려주고 있으니 이만하면 소심도 잘 키운 소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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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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