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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3965:백창직(2)-백철-백치상
작성자장병창 @ 2015.04.06 06:12:40

  예천의 자랑(3965) : 백창직(2)-백철-백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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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창직 : 백씨의 본관/ 2008.11.22/ 12본으로 축소하였으며 나머지 본관은 실리지 못하거나 수원에 편입하였다. 수원 본관 유래설로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의 증손 포주 백휘(浦州 白揮)가 대사마 대장군으로 수원군(水原君)에 봉해졌기 때문이라 하고 혹은, 문익공.../ //blog.daum.net/bak0416/ 아름다운 사람들(가족사랑)(daum 2010)

 

  백창직 : 진천 대모산성의 메아리/ 2007.07.17/ ...모습이 많이 눈에 띄는 그런 고장이 되고 말았다. [추기] 최근 수원백씨 세보에, 임희의 딸인 의화왕후(혜종의 비)의 소생 정혜공주가 수원백씨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의 부인이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어 향후 연구가 필요하다. [끝]/ //blog.naver.com/lyhlsrn/ 이야기 한국(daum 2010)

 

  백창직(白昌稷) : 본관(本貫) 수원(水原), 자(字) 화숙(和淑)/ 이력(履歷) 백창직(白昌稷)  수원인/ 1세 중시조 昌稷(창직) : 자는 화숙(和淑)이요 경명왕(景明王) 대에 중랑장(中郞將)이 되었고 시중상장군(侍中上將軍)을 증(贈)했었다. 두 아들이 있는데 장(長)은 길(吉)이요 차(次)는 탁(卓)이다./ 백창직(白昌稷) : 중시조(中始祖)다. 백씨는 중시조를 1세(世)로 하여 계세하고 있다. 자는 화숙(和淑)이고 시호는 영희(英禧)이다. 신라말엽 경명왕조(서기 917~922)때 벼슬이 중랑장(中郞將)이고 증직(贈職)이 시중상장군(侍中上將軍)이다. 묘는 예천에 있었다고 하나 실전하고 신위는 시조 송계공 재사 영월당과 충남 보령군 웅천면 평리 동막동 옥산사에 모시고 있다. 배(配) 상화공주는 경명왕 박승영의 딸인데 소생은 없다. 배(配) 진천임씨는 산중대광일흥군 희의 딸이다./ 배(配) 상화공주는 경명왕 박승영의 딸인데 소생은 없다./ 배(配) 진천임씨는 산중대광일흥군 희의 딸이다./ 자(子) 백길(白吉)  수원인/ 2세 백길(白吉) : 字는 태초(太初)며 경순왕(敬順王) 때에 교위(校尉)를 지냈으며 고려(高麗) 태조(太祖) 때 정남장군(征南將軍)으로 광평시랑(廣評侍郞)이었으며 혜종(惠宗) 정종(定宗)때까지 역사(歷事)했었다. 두 아들이 있었는데 사유(思柔)와 사홍(思弘)이다./ 자(子) 백탁(白卓) 2세(daum 2010)

 

  백창직 : 관송사(觀松祠)/ ○ 본 관 : 수원(水原)/ ○ 파 : 선정공파(禪亭公派)/ ○ 소재지 : 거제면 내간리 산 5/ ○ 관리자 : 내간리 353 백정현(白定鉉)/ ○ 유래 또는 업적 수원백씨 시조는 백우경(白宇經)으로 자는 경천, 시호는 송계공(松溪公)인데 당나라 소주인(蘇州人)으로 관작이 첨이사 이부상서(僉議事吏部尙書)였으나 간신의 모함으로 당나라에서 신라로 건너와서 선덕왕 원년 경신년에 망명하여 계림 자옥산(紫玉山) 아래 정착하였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은 자(字) 화숙(和淑) 영희공(英禧公) 시중상장군(侍中上將軍)이었는데 수원부에 있었기에 이때부터 수원백씨(水源白氏)가 되었고 파조(派祖)는 선전공 백인관(白仁寬)이다. 관송사(觀松祠)에는 파조의 4세손 백기(白琦)가 1633년 고성 월평에서 거제면 내간리로 이주하였다. 백기를 주벽으로 그 후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묘지 거제면 내간리 산 5번지 제사일 : 음력 10월 15일 벌초일 : 음력 7월 28일/ 거제군지(巨濟郡誌)(daum 2010)

 

  백창직 : 白(백)氏/ 시조 백우경(白宇經)은 중국 소주(蘇州) 사람으로 당나라에서 첨의사 좌복야 사공 대사도 등을 지내다가 간신들의 참소를 받아 780년(선덕왕 1)에 신라에 귀화하여 계림의 자옥산 아래(지금의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에 살면서 신라에 벼슬하여 대상에 이르렀다. 그가 자옥산 아래에서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워 거처하고 있는데 선덕왕이 친림하여 만세암을 정혜사라 개명하고 어필로 영월당의 현판에 <경춘>이라 쓰고 사운시를 지어 주어 이를 각자해서 걸었다고 한다. 묘소는 경북 월성군 안강읍 옥산동 자옥산에 있고,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향사한다. 그 후 세계가 실전되어 중간 세계를 연계하지 못하고 신라 경덕왕 때 중랑장을 지낸 창직(昌稷)을 1세조로 하고 있다. 과거에는 창직을 시조의 14대손으로 연계하여 계대한 적도 있었지만 시조의 입국 연대와 창직의 활동 연대를 따져 볼 때 불과 140여년밖에 차이가 나지 않아 사리에 맞지 않으므로 창직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잇고 있다. 본관은 수원(水原) 단본이다. 문헌에는 수원 외에 남포(藍浦), 직산(稷山), 임천(林川), 태천(泰川), 적성(赤城:순창(淳昌)), 문경(聞慶), 청도(淸道), 해미(海美), 남해(南海), 해안(海岸:대구), 개성(開城), 선산(善山), 대흥(大興), 부여(扶餘), 태인(泰仁) 등 10여 본이 전해  지고 있으나 모두 한 핏줄이므로 <갑자대동보(甲子大同譜)>를 발간할 때 각 파의 대표들이 모여 수원으로 단일화하기로 합의한 후 대부분 수원을 본관으로 쓰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보령의 이재공<이정>파 후손들은 남포로 쓰고 있고, 대흥, 청도, 부여, 임천, 태인 등으로 칭관하는 파도 있으나 그 수는 많지 않다. 백씨는 고려조와 조선조를 통해 많은 석학과 명유를 배출한 기호지방 과 관서지방의 문벌가다.(daum 2010)

 

  백창직 : 백인관(白仁寬)/ 신라로 건너와서 선덕왕 원년 경신년에 망명하여 계림 자옥산(紫玉山) 아래 정착하였다. 중시조 백창직(白昌稷)은 자(字) 화숙(和淑) 영희공(英禧公) 시중상장군(侍中上將軍)이었는데 수원부에 있었기에 이때부터 수원백씨(水源白氏.../ (daum 2010)

 

  백창직 : 30세 밀성대군(휘 언침:貫鄕祖)/ ...密城大君 (彦?) - 언성-언신-언립-언창-언화-언지-언의-교순- 여? 彦成-彦信-彦立-彦昌-彦華-彦智-彦義-交舜- 白昌稷 ○밀성대군(密城大君) 1 世 ① 휘(諱)·자(字)·호(號) : 휘(諱)는 언침(彦?)이다. 다른 이름은 원생(元生)이라고도.../ (daum 2010)

 

  백창직 : 29세 신라 경명왕(휘 승영)/ ...(忠憲公派)족보” 권지1에는 ☞ 경명왕 : 8왕자 1공주를 두었는데 8왕자는 8대군에 봉해졌고 - 1공주 : 백창직(白昌稷)에게 출가하였다. ☞ 경애왕 - 1왕자 금성대군 교순(金城大君 交舜)--지금의 울산박씨(蔚山朴氏) - 2왕자 계림대군.../ (daum 2010)

 

  백창직(水原白氏 中始祖 백창직 先生 墓 發見 : 新羅 景明王 때 중랑장 지내 … 柳川面 고림리 墓域 정화사업 推進) [記事] : 수원백씨 중앙종친회의 오랜 숙원사업 중 하나인 중시조 백창직 선생의 묘가 유천면 고림리에 있는 것으로 밝혀져 약 1천1백년 만에 빛을 보게 됐다. 신라 경명왕 때 중랑장을 지낸 백창직 선생의 묘는 수원백씨 대동보에 우리 지역인 예천에 있다고 전해져 왔지만 그동안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그 동안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중앙종친회와 유천면 고림리의 작고한 백규한 옹과 아들인 백창근 씨 2대가 끈질긴 노력을 펼쳐 왔으며, 이런 노력에 힘입어 30년 만에 수원백씨 대의원 총회, 이사회 만장일치, 정기총회에서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현지 묘역을 중시조인 백창직 선생의 묘로 최종 승인했다. 현재 이를 바탕으로 묘역정화사업이 진행 중이다. 그러나 중앙종친회 일부 회원들의 반대로 인한 방해 작업과 함께 이들의 끊임없는 민원제기와 예천군의 미온적인 태도가 더해져 그동안 발목을 잡아 왔다. 이번에 묘역정화사업이 진행되고 있는 유천면 고림리(高林里)는 신라시대 당동현 개척 당시 수원백씨가 개척한 것으로 문헌에 기록돼 있으며, 수목이 짙어 다래넝쿨을 헤치고 정착할 정도로 높은 나무숲이 우거졌다하여 고림이라 전해지고 있다. 또한 중시조인 백창직 선생은 후삼국시대 최대 격전지였던 문경시 산양면 근품성에서 전사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며, 근품성과 고림리 묘역과는 직선으로 약 20여리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을 정도로 지척이다. 묘역정화사업을 추진하고 있는 백석기 중앙종친회장은 “중시조 묘역정화사업은 수원 백씨 종인들의 숙원사업으로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반드시 해내야 한다.”고 강조하고 “전국 수원백씨 40여만 명 모두의 염원이 담긴 일이니 만큼 예천군의 적극적인 협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중앙종친회에서는 우선 현재 하고 있는 수원백씨 중시조 백창직 선생의 묘 단장에 총력을 경주하며, 이 사업이 완료되는 데로 춘계·추계향사를 추진할 예정이다. 이 경우 연간 약 4천여 명 정도의 수원백씨 족친들이 예천을 방문하게 된다. 또한 국가지정 명승인 회룡포에 위치한 원산성에 전해져 오는 백장군의 전설과 5백여 년 전 신비로운 이야기를 간직한 나무인 용궁면 무이2리 마주목에 얽힌 전설, 개포면 황산리 백씨 집성촌 등을 하나로 묶어 전국 수원백씨들을 대상으로 한 테마관광도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유천면 고림리 황모 씨는 “수원백씨 중시조 묘가 고림에서 발견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으며, 성씨를 떠나 면과 군차원에서 적극 협조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회룡포 원산성에 전해지는 백 장군 전설: 통일신라시대 말기, 혹은 고려시대 초에 축성한 것으로 추측되는 용주고을의 산성으로 당시 성주였던 백 장군이 이 성을 지켰다. 이번에 묘역정화사업을 펼치고 있는 중시조 백창직 선생이 용주골 성주로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장군에게는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애마가 있었다. 하루는 백 장군이 말과 시합을 하기로 하고 내기를 하였는데 말에게 “내가 활을 쏘아 성문 기둥에 네가 먼저 닿으면 너에게 후한 상을 줄 것이로되 화살보다 늦으면 목을 베겠다.”고 하였다. 그는 성에서 서쪽 들판 약 2km 지점에서 활을 쏜 후 달려와 보니 화살은 이미 와 있었다. 장부일언중천금(丈夫一言重千金)이라 눈물을 머금고 애마의 목을 치고 나니 그때서야 화살이 ‘딱’ 하고 성문기둥에 와 닿으므로 백 장군은 무척 애통해 하였다. 그 전에 쏜 화살을 이번에 쏜 화살로 착각하고 애마의 목을 벤 그는 후회하여 말무덤을 정중히 만들어 주고 후히 장사 지내주었다. 당시 시합했던 들판 일부를 지금도 ‘말무덤재’라고 부르고 있다.

 

  ◆마주목에 얽힌 전설: 약 5백년 전 신비로운 이야기를 간직하고 있는 나무가 있다. 이름하여 마주목(馬株木)이다. 당시 황해도 관찰사(黃海道 觀察使)를 지낸 추월헌(秋月軒) 백진양(白震楊 : 1508∼1591)이 무이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끔찍이도 사랑하는 한 필(匹)의 애마(愛馬)가 있어서 늘 집 앞 우물가에 있는 이 나무에 매어두었다고 하여 마주목이라 부르게 되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전의 일이다. 왜구(倭寇)가 쳐들어오자 애마(愛馬)를 타고 싸움터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 마을 사람들에게, “내가 싸움에서 이기고 공(功)을 세우면 이 나무가 살아있을 것이요, 내가 공을 세우지 못하고 죽으면 이 나무도 말라죽을 것이다” 하는 말을 남기고 싸움터로 떠났다. 얼마 뒤, 말만 돌아오고 백 장군(白將軍)은 돌아오지 않은 채 소식을 모르게 되었다. 그 후 이 말이 죽자 마을에서는 마을 앞들에 정성스레 묻어주고 제사(祭祀)를 지냈으며, 묻어준 곳을 “말무덤”이라 하고 그 주변의 논을 “말무덤 배미”라고 하여 근래(近來)까지 전해져 내려왔다. 그러나 1976년도 경지정리(耕地整理) 때 없어져 말무덤은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수백 년이 지난 지금도 마주목(馬柱木)에 칼로 껍질에 흠이 나게 파 살펴보면 아직도 썩지 않고 살아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백 장군의 애국충절(愛國忠節)과 호국정신이 아직까지 남아있음을 이 나무가 가르쳐 주고 있다고 한다.

 

  ◆수원백씨 중시조 백창직 : 수원백씨 중시조인 백창직 선생은 수원백씨 29개파 모두가 중시조 1세로 계세하여 내려오고 있으며, 전국 40여만 명의 수원백씨 모두에게 절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선생은 신라 경명왕 때 중랑장을 지내고 고려조에 와서는 시중 상장군으로 증직되었으며, 시호는 영희공이다. 부인은 신라 경명왕의 딸인 상화공주로, 두 번째 부인은 진천 임씨로 흥화부원군 희의 딸이며, 사이에 두 명의 자손을 두었다고 전해진다. 고려 혜종왕비 역시 진천임씨 흥화부원군의 딸로 선생과 혜종왕과는 동서지간이 된다. 선생과 임씨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 길은 광편시랑에 올랐으며, 둘째 아들 탁 역시 병부시랑을 지냈다. 927년 1월, 고려군이 신라의 지원을 받아 용궁을 점령할 때 신라지원군 일원으로 전투에 참여했으며, 근품성 점령과 이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추정된다.(백승학 記者 예천신문 2012.6.14)

 

  백창직(水原白氏 中始祖 백창직 先生 告由祭) [記事] : 1천1백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수원백씨 중시조 백창직 선생의 넋을 위로하는 고유제가 2012년 7월 4일 유천면 고림리 현지에서 열렸다. 이날 고유제에는 수원백씨종친회(회장 백석기) 회장단 및 종손, 전국 시·도 회장단, 예천종친회(회장 백병구) 회원 등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치러졌다. 앞서 열린 회장단 회의에서 백석기 회장은 “중시조인 백창직 선생의 묘역 정화사업은 전국 40여만 명의 종인들이 오래도록 숙원해온 일”이라며 “어떠한 난관이 있어도 틀림없이 이루어야 하는 사업으로 모두가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길 바란다.”고 강조하고 “예천의 중시조 묘역은 전국 수원백씨 모두의 성지와도 같은 무게감을 지니고 있는 만큼 묘역 정화사업이 원활히 이루어질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 나가겠다.”는 각오를 밝혔다. 참석 회장단은 뜨거운 박수로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이어진 고유제는 엄숙한 가운데 간소하게 진행됐으며, 중시조 백창직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후손으로서의 죄스러움을 고했다. 이번에 고유제를 지낸 수원백씨 중시조 백창직 선생의 묘는 수원백씨 대동보에 우리 지역인 예천에 있다고 전해져 왔지만 그동안 실전된 것으로 알려져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중앙종친회가 역사적 사실과 구전으로 전해져온 전설을 바탕으로 다각적인 노력을 펼친 끝에 신라 당동현 당시 수원백씨들이 개척한 유천면 고림리를 중시조 백창직 선생이 잠든 묘역으로 확정했다. 이를 근거로 중앙종친회 대의원 총회, 이사회에서 만장일치로 승인을 받았으며, 정기총회에서 절대 다수의 지지를 얻어 현지 묘역을 중시조인 백창직 선생의 묘로 최종 승인했다. 예천군종친회 회원들은 “중시조 백창직 선생의 묘가 우리 군에 있다는 사실이 가슴을 뜨겁게 한다. 하지만 묘역정화사업에 대한 군의 태도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며 “각 지자체마다 새로운 관광상품을 만들기 위해 수억 원의 사업비를 쓰고 있는 형편인데 돈 한 푼 안들이고 전국 40여만 명의 수원백씨 모두에게 충효의 고장 예천을 각인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를 1960년대에 만들어진 장사법을 이유로 막는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밝히고 “지금이라도 수원백씨 40여만 명을 포용할 수 있는 적극적인 행정을 펼칠 것을 강력히 바란다.”고 강조했다. 현재 관내에는 1백20여 가구의 수원백씨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고유제를 계기로 중시조 백창직 선생의 묘역정화사업이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극적인 노력을 다해 나간다는 방침을 세우고 있다.(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12년 07월 12일 (목) 10:37:44)

 

  백창직(水原白氏 中央宗親會 會長團 엑스포 後援金 傳達) [記事] : 수원백씨 중앙종친회(회장 백석기) 회장단이 2012년 8월 7일 엑스포 주행사장을 방문해 2012 예천곤충바이오엑스포 성공개최를 위한 후원금 2백만 원을 전달했다. 이어 이현준 군수와 환담을 나눴으며, 군정발전을 위한 지속적이고 적극적인 동참을 약속했다. 백석기 회장은 “예천은 전국에 흩어진 수원백씨 40여만 명의 1대 시조인 백창직 선생의 묘가 있는 곳으로 모든 수원백씨들의 모태가 되는 소중한 곳”이라며 “제2의 마음의 고향인 예천의 발전을 위해 더욱 더 한마음으로 노력해 나가겠다.”고 강조했다.(醴泉新聞 2012년 08월 17일 (금) 08:59:47)

 

  백창직(水原白氏 中始祖(諱: 창직) 첫 祭享) [記事] :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수원백씨 40여만 종인들의 오랜 숙원이 1천1백년의 시공을 넘어 충효의 고장 예천에서 이루어졌다. 2012년 10월 6일 유천면 고림리 현지에서 수원백씨 중시조(휘 창직) 첫 제향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백석기 중앙회장을 비롯한 각 시도 임원진, 전국 각지에서 1천1백여 명의 종인들이 참석했으며, 먼저 종인들은 붉은 수수밭을 지나 곱게 단장한 묘역을 참배하고 큰절로 중시조와의 만남을 기뻐했다. 백석기 중앙회장은 “오늘 첫 제향을 받들어 모심으로써 남북한 70만 전 종인의 구심점을 삼고 우리 백씨의 위상을 드높이고 자손번영의 토대를 마련하여 후손에게 물려주게 되었다”며 “중시조 묘역은 제2의 성지로 수원백씨의 마음의 고향이 될 것이고 충효사상의 요람이 될 것이라 믿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바쁜 일정에도 불구하고 제향에 참석한 이한성 국회의원은 전국에서 모인 종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백석기 중앙회장, 백병구 예천회장과 환담을 나눴다. 이어 중시조 묘역 조성사업을 위해 아낌없이 헌신한 유공자에 대해 공로패 및 감사패를 수여하고 노고를 치하했다. 2부 행사에서는 중시조 묘비와 재북파조단비 제막식이 있었으며, 모든 종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엄숙하면서도 간소하게 첫 제향이 진행됐다. 이번에 첫 제향을 올린 수원백씨중앙종친회는 앞으로 매년 이곳에서 춘계, 추계향사를 치룰 예정이며, 충효의 고장 예천을 제2의 성지로 삼아 전국의 후손들이 지속적으로 중시조 묘역을 찾을 수 있도록 사업을 추진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중시조 백창직 선생은 통일신라 말 경명왕의 사위로 중랑장을 지냈으며, 수원백씨 29개파 모두의 중시조 1세로 계세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후삼국 최대의 격전지였던 문경 근품성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그동안 우리 지역 내에 묘가 있다고 전해져 왔지만 실전돼 찾을 길이 없었다. 하지만 역사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끈질긴 노력 끝에 현지 묘역을 확인하고 대의원 총회, 이사회 만장일치, 정기총회에서 절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중시조인 백창직 선생의 묘로 최종 승인했다. 이를 바탕으로 일부 반대를 무릅쓰고 묘역정화사업을 강행했으며, 1차 정화사업을 마치고 지난 7월 4일 고유제를 지내고 이번에 첫 제향을 올리게 됐다. 첫 제향에 참석한 대다수 종인들은 이구동성으로 “산이 높지 않고 볕이 잘 드는 곳에 중시조님이 모셔져 있어 참으로 기쁘다”며 “천리 길을 한달음에 달려온 보람이 있다. 기회가 된다면 가족들을 데리고 꼭 다시 찾아올 예정”이라는 말로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백승학 記者 醴泉新聞 2012년 10월 11일 (목) 09:4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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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철 : 1943- , 예천 출신, 68년 용산서림 창업 운영, 76년 (주)대창물산 설립 운영, 88년 역학계 입문하여 수년 간 입산 수학, 명리(命理), 풍수(風水), 작명(作名) 등 역술학에 밝다. 백철철학원 운영(서울 대림동), 한국역리학회 중앙학술위원, 한국작명회 회장, 대한해진회 회장이다. 저서로, <좋은 이름은 운명을 바꿔준다>, <생활 역학 개운법>, <알기 쉬운 작명법과 개운법> 등이 있다.(www.sajuname.net 2002)

 

  백철 : 백철 선생의 프로필/ ◆ 프로필 1943년 - 경북 예천 한학자 집안에서 출생,  - 학창시절 사서 통달, 1968년 용산서림 창업 운영, 1976년 주식회사 대창물산 설립 운영, 1988년 - 역학계 입문하여 수년간 입산 수학, - 命理, 風水, 作名 등 역술학 달통, 현 백철 철학원 운영(서울 대림동 소재), 사단법인 : 한국역리학회 중앙학술위원, 사회단체 : 한국 상명회 회장, 사회단체 : 대한 해진회 회장, 저서 - 좋은 이름은 운명을 바꿔준다. - 생활 역학 개운법. - 알기 쉬운 작명법과 개운법(출간예정)/ ◆ 백철 선생의 한마디 : 운로를 알고 행하면 100% 성공을 보장한다. 정통 학문에 의하여 감정하고 그 결과에 따라 가장 길한 방향으로 운명을 유도하는 백철 선생의 작명법과 개운법은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습니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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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치상 : 辛卯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발송자 白致相/ 날짜 辛卯()/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신묘년에 南面 上金谷里에 살고 있는 白致相(64)이 신묘년에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아내와 아들마저 잃었던 홀아비 백치상은 며느리(36)의 봉양을 받으며 살았다. 그에게는 20명에 이르는 많은 노비가 있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도망을 가서 외지에 가서 살고 있었다./ 제공 호남기록문화시스템 (daum 2014)

 

  백치상 : 甲子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발송자 白致相/ 날짜 甲子()/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갑자년에 南面 上金谷里에 살고 있는 白致相(37)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그는 妻 梁氏(36)와, 동생 致絢(28) 부부, 그리고 아직 혼인하지 않은 동생 致運(21)과 같이 살았다. 같이 살던 형님 致五는 얼마 전에 독립하여 나갔다. 스무 명이 넘는 노비가 있었으나, 그들 대부분이 도망가서 외지에서 살고 있었다./ 제공 호남기록문화시스템(daum 2014)

 

  백치상 : 乙酉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발송자 白致相/ 날짜 乙酉()/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을유년에 南面 上金谷里에 살고 있는 白致相(58)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오랫동안 동거동락하던 妻 梁氏가 얼마 전에 죽어 홀아비가 된 그는 아들(28),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그에게는 20명에 가까운 많은 노비가 있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도망을 가서 외지에 가서 살고 있었다./ 제공 호남기록문화시스템 (daum 2014)

 

  백치상 : 戊子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발송자 白致相/ 날짜 戊子()/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경상도 예천군 상금곡리에 사는 유학 백치상(55)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홀아비인 그는 성혼한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았다./ 제공 호남기록문화시스템 (daum 2014)

 

  백치상 : 1878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발송자 白致相/ 날짜 고종15년(戊寅)(1878)/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1878년(고종 15)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 남면(南面) 상금곡리(上金谷里)에 사는 유학(幼學) 백치상(白致相, 61)이 작성하여 예천군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홀아비인 그는 성혼한 아들 시현(時俔, 31)과 함께 살았다. 천구질에 기록된 노비들은 모두 도망노비이다./ 제공 호남기록문화시스템(daum 2014)

 

  백치상(白致相) : 辛卯年에 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신묘년에 남면 상금곡리에 사는 백치상이 작성한 호구단자/ 발송자: 白致相/ 날짜: 辛卯()/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제공: 전북대학교 박물관 호남기록문화시스템/ 신묘년에 南面 上金谷里에 살고 있는 白致相(64)이 신묘년에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아내와 아들마저 잃었던 홀아비 백치상은 며느리(36)의 봉양을 받으며 살았다. 그에게는 20명에 이르는 많은 노비가 있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도망을 가서 외지에 가서 살고 있었다.//

 

  백치상(白致相) : 甲子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갑자년에 남면 상금곡리에 사는 백치상이 작성한 호구단자/ 발송자: 白致相/ 날짜: 甲子()/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제공: 전북대학교 박물관 호남기록문화시스템/ 갑자년에 南面 上金谷里에 살고 있는 白致相(37)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그는 妻 梁氏(36)와, 동생 致絢(28) 부부, 그리고 아직 혼인하지 않은 동생 致運(21)과 같이 살았다. 같이 살던 형님 致五는 얼마 전에 독립하여 나갔다. 스무 명이 넘는 노비가 있었으나, 그들 대부분이 도망가서 외지에서 살고 있었다.//

 

  백치상(白致相) : 乙酉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을유년에 남면 상금곡리에 사는 백치상이 작성한 호구단자/ 발송자: 白致相/ 날짜: 乙酉()/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제공: 전북대학교 박물관 호남기록문화시스템/ 을유년에 南面 上金谷里에 살고 있는 白致相(58)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오랫동안 동거동락하던 妻 梁氏가 얼마 전에 죽어 홀아비가 된 그는 아들(28), 며느리와 함께 살았다. 그에게는 20명에 가까운 많은 노비가 있었지만, 이들 대부분은 도망을 가서 외지에 가서 살고 있었다.//

 

  백치상(白致相) : 戊子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무자년에 남면 상금곡리에 사는 백치상이 작성한 호구단자/ 발송자: 白致相/ 날짜: 戊子()/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제공: 전북대학교 박물관 호남기록문화시스템/ 경상도 예천군 상금곡리에 사는 유학 백치상(55)이 작성하여 관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홀아비인 그는 성혼한 아들 내외와 함께 살았다.//

 

  백치상(白致相) : 1878年에 南面 上金谷里에 사는 白致相이 作成한 戶口單子 / 1878년에 남면 상금곡리에 사는 백치상이 작성한 호구단자/ 발송자: 白致相/ 날짜: 고종15년(戊寅)(1878)/ 분류: 고문서 > 준호구․호구단자(准戶口․戶口單子)/ 제공: 전북대학교 박물관 호남기록문화시스템/ 1878년(고종 15)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 남면(南面) 상금곡리(上金谷里)에 사는 유학(幼學) 백치상(白致相, 61)이 작성하여 예천군에 제출한 호구단자이다. 홀아비인 그는 성혼한 아들 시현(時俔, 31)과 함께 살았다. 천구질에 기록된 노비들은 모두 도망노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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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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