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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108:안리-안명-안명남-안몽징(祝조동직,양명희/예천방문1,295)
작성자장병창 @ 2015.08.30 06:10:58

  예천의 자랑(4108) : 안리-안명-안명남-안몽징(附 퇴직교원 조동직(훈장)·양명희(포장), 8월말 수상...축하합니다/예천방문 1,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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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리 : 通訓大夫醴泉郡事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상위서지: 曉庵文集 十 > 曉庵文集卷之十二 > 墓碣銘/ 분류: 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효암문집 (曉庵文集)/ 通訓大夫醴泉郡事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 通訓大夫醴泉郡事西坡先生安公墓碣銘[幷序] )// 晦軒夫子。倡道東方。嘉惠後學。仁深而德厚。源遠而流長。子孫至六七世而金玉滿朝。卿相布列。有若西坡先生諱理以。晦軒之孫。獨以盛滿爲戒。胎?名利歸梓鄕。時則端廟遜矣。獨抱幽貞超然自靖。其義與六臣不甚相遠。其後孫克?祖訓。世世業儒。不求聞達?爵之典。不及於泉壤俎豆之儀。亦毁於一時。則今於四百年之後。何能想傷其潛光隱德之萬一哉後孫宗熙敎煥敎德等。方營改/ ▣ 004/ 碣訪余。囑以顯刻詩。自顧廢蟄絶筆久矣。而均是爲先竊有所感於心者。謹按而敍之。安氏系出順興。文成公晦軒夫子爲六世祖。五世祖諱于器。順平君。文順公。號屋子。高祖諱牧。順興君。文淑公。號謙齋。曾祖諱元崇、順成君。文惠公。祖諱?。刑曹典書謚景質。考諱宗約。海州牧使贈吏曹判書。?貞夫人東萊鄭氏。蓬原府原君良度公諱良女。癸酉。先生生于瑞原舊第。風儀俊偉字量宏深。伯仲兩兄俱登貴顯。獨不樂仕進。杜門讀書。以探?蘊奧爲務。嘗曰吾家自先正以。後歷顯于朝。昆弟子姪充滿臺府。此正?藏之時也。外補宜寧。?勉赴任。歲値凶荒。民多散亡。刻/ ▣ 005/ 捧設賑。恩信普洽流逋四歸。道伯以治績褒聞于朝。翌年甲戌。移拜醴泉。未幾莊陵遜位。投?歸鄕。卜居樓巖山下。命其理曰大龍山。改山名曰龍巖。改軒號曰樂園。丁丑。六臣禍起。錦城大君被誅。先生杜門謝客。瞻望寧越。恒自悲傷。歿後數歲。己卯禍作。京中諸族俱被慘酷。惟先生家獨免。時人服其前知之鑑。墓在順興府大龍山桂谷子坐原。純廟壬午。以士林公議?享于龍淵祠。配淑人慶州李氏。鷄川君從直女月城君之秀五世孫。墓?先生。兆後育五男。伯文叔文俱無後。季文蔭副司直。贈兵判。興文佐郞。益文司果。判書三男瑛進士。玎忠順衛。瑠佐郞。二/ ▣ 006/ 男熙別坐。燾司果。二男?同樞。信判官。餘不盡錄於乎。先生生長於詩禮之庭。簪纓之族。初不以富貴利達?其心。閉門守靜。?潛性理。其操守之堅學問之深有不可窺測矣。暫試外補遺愛兩邑。豈足以展其所蘊哉。枳棘之林已非鸞鳳所棲。山陽之雉可以色擧矣。不俟終日棲山?晦。其出處之正志節之高。足以凜百世質神明矣。黃石公有言曰。後人苟不明百世無賢人。不?雖筆萎言輕。竊自附於百世之公言。係之以銘曰知滿而退。明哲之卓。自靖而隱。秉執之確。行藏允合。心跡俱潔。桂谷之陽。有?其石。千載起敬。過者必式。//

 

  안리(醴泉郡守 1453이후-1455.윤6이전) : 안리(安理) 출생 [한국국학진흥원-유교연표]/ ...寧縣監)에 부임했다. 당시 흉년이 들었는데 안리가 봉록을 던져 굶주림을 구제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감사(監司)가 그 치적을 조정에 알려 이듬해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승진되었으나 얼마 후 단종(端宗)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물러.../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ꡐ역사자료ꡑ이다.//

 

  안리(醴泉郡守 1453이후-1455.윤6이전) : 안리 (安理) | 생애이야기 / 독서와 학문을 벗 삼아 지내다|짧은 관직 생활 속의 뛰어난 치적|고향에 은둔하여 단종을 그리워하다 / 안리安理순흥 順興 )...서파 안리는 1393년(태조 1) 파주의 옛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역사체험관 - 인물이다.// 서파정 | 원문자료 / 서파정기|죽림사중수기 / ...령스런 곳이다. 지난 날 서파(西坡) 선생 안공(安公)이 예천(醴泉) 군수를 사임하고 산 아래에 은거하며, .../ 예천 관련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역사체험관 - 유적이다.//

 

  안리(安理) : 구분: 영남유학인물자료/ 날짜: 1393년(태조 1)-/ 분류: 인물 > 영남유학인물자료/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안리/安理/ 호  서파/西坡/ 년도  1393년(태조 1)//

 

  안리(安理) : 가족이야기 | 안병록 | 2009.11.26 14:08/ //cafe.daum.net/ 안리(安理) 가족이야기/ 조 : 안원(安瑗), 생부 : 안종약(安從約), 모 : 동래정씨(東萊鄭氏) 정양생(鄭良生)의 딸, 형제 : 안구(安玖) 등/ 많은 유학자와 명신을 배출한 순흥안씨 : 순흥안씨는 고려 시대 이래로 많은 학자와 명신을 배출한 이름 있는 가문이다. 대표적인 인물로 조선 성리학의 종조로 추앙받는 회헌(晦軒) 안향(安珦)을 들 수 있는데, 그가 바로 서파 안리의 6대조이다. 안리의 5대조인 죽옥자(竹玉子) 안우기(安于器)는 순평군(順平君)에 봉해졌으며, 문순공(文順公)의 시호를 받았다. 고조인 겸재(謙齋) 안목(安牧)은 순흥군(順興君)에 봉해지고, 문숙공(文淑公)의 시호를 받았다. 증조인 안원숭(安元崇)은 순성군(順城君)에 봉해지고, 문혜공(文惠公)의 시호를 받았다. 안리의 조부 안원은 형조 전서(刑曹典書)를 지냈는데 공민왕의 뜻을 거슬렀다는 이유로 외지에 유배되었다.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와 여러 차례 조정의 부름을 받았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안리의 아버지 안종약은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냈으며 이조 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었다. 한편 어머니는 봉원부원군(蓬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양도공(良度公)의 시호를 받은 동래정씨 정양생의 딸이다./ 유복한 일가를 이룬 안리 : 안리의 부인은 경주이씨 계천군 이종직의 딸이며, 월성군(月城君) 이지수(李之秀)의 5대 손녀이다. 그녀는 모두 5명의 아들을 낳았는데, 안타깝게도 장남 안백문(安伯文)과 2남 안숙문(安叔文)은 모두 후사를 두지 못했다. 3남 안계문(安季文)은 음사로 부사직을 지냈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증직되었으며, 4남 안흥문(安興文)은 좌랑(佐郞)의 벼슬을 했으며, 5남 안익문(安益文)은 사과(司果)를 지냈다. 이들이 또한 장성하여 자식을 낳으니 그 후손은 일일이 기록하기 어려울 정도로 번창하였다./ 문중 이야기  : - 순흥안씨 대룡산에 터전을 열다 : 용암산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룡산 마을은 순흥안씨와 창원황씨 두 문중이 세거해 오고 있는데, 창원황씨 입향조는 순흥안씨의 사위가 된다. 조선 태종 때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의 아들 서파 안리가 예천 군수로 있다가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던져 버리고 물러나 순흥도호부 남쪽 용암산 아래 자리를 잡아 숲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대룡산이라 이름 했다. 이 후 5백 년 동안 대룡산의 순흥안씨들은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하였다./

 

  관련인물 : - 단종절신 서파 안리 :안리의 호는 서파(西坡)·낙원(樂園)이고, 목사 안종약(安從約)의 아들로 문성공 안향의 6대손이다.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 그는 조정에서 여러 벼슬로 불렀으나 사양해 오다가 1453년(단종 1) 의령 현감에 부임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봉록으로 기민을 구제하는 등 선정을 베풀어 이듬해 예천 군수가 되었으나 얼마하지 않아 단종이 폐위되자 벼슬을 버리고 본향인 순흥부 대룡산으로 낙향했다. 그는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 용암산) 아래 자리를 잡고 마을을 이룩하여 동네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하고, 아호를 낙원옹(樂園翁)이라 했다. ‘대룡’은 옛날 제갈공명의 ‘와룡(臥龍)’에서 따왔다. 아호인 낙원에서 ‘원(園)’은 옛날 사마광의 ‘독락(獨樂)’의 뜻에서 취했다. 그는 순흥의 금성대군 사건(정축지변)이 일어난 후 용암산 기슭에 더욱 깊이 숨어 그 아들들에게, “지금은 출세할 때가 아니다. 문을 닫고 글을 읽어 행실을 닦기에 힘쓰되 우선 선조께서 주자(朱子)를 사모하신 뜻을 본받으라. 혹 서울에 가서 일가를 만나더라도 영달에 관해서는 아예 말해선 안 된다. 만일 이 훈계를 어기면 아비의 뜻을 저버림이니라.”고 일렀다. 서울에 사는 집안 조카며 손자들이 대신의 지위에 있으면서 안리가 시골에 묻혀 고생스럽게 지내는 것을 딱히 여겨 여러 가지 물품을 보내왔으나 “나는 소백산 나물만으로 족한데 서울의 진미는 당치도 않다.”고 뿌리쳤다. 그의 선비적 기질은 이후에도 많은 사람들의 모범이 되기도 했다. 안리의 아들 안계문은 부사직을 지냈으며, 손자 안영이 연산군 때 진사, 증손 안공택이 학행으로 동학교관, 안공필이 중종 때 진사, 안공신이 진사·문과 중시로 군수를 지냈다. 안공택의 손자 안응일이 효행으로 공조 참의에 증직되고, 그 아들 안욱이 인조 때 진사·문과로 군수를 지냈다. 안공신의 손자 안경우·안경례·안경유가 나란히 무과에 급제하여 함께 벼슬에 올랐다. 안응일의 7대손 안필경이 효행이 있었으며, 안리의 후손 안종희가 시문에 능하여 문집을 남겼다. 한국국학진흥원-유교유적] (daum 2010)

 

  안리(安理) : 생애이야기 | 안병록 | 2009.11.26 14:06/ //cafe.daum.net/ 안리(安理) 생애이야기/ 성명 : 안리(安理) , 1393년(태조 1)년 ~/ 본관 : 순흥( 順興 )/ 호 : 서파(西坡)/ 출생지 : 파주(坡州)의 옛 집/ 출신지 : 순흥((順興)/ 분묘지 : 순흥 남쪽 대룡산(大龍山) 계곡(桂谷) / 외관직 : 의령 현감(宜寧縣監), 예천 군수(醴泉郡守)/ 독서와 학문을 벗 삼아 지내다/ 서파 안리는 1393년(태조 1) 파주의 옛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에서 배운 문장과 학업은 당대의 명사들이 하나같이 숭상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오른 큰 형과 작은 형과는 달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안리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 가문은 회헌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가문 사람 가운데 한 사람도 천한 옷을 입은 사람이 없으니 지금이 바로 자신을 거두어 숨길 때이다.” 라는 말에도 잘 드러난다.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는 대신 문을 닫고 독서에 열중하면서 심오한 도리를 되새기고 깊은 학문을 쌓는 것에 만족했다./ 짧은 관직 생활 속의 뛰어난 치적 : 이렇듯 조정의 일을 즐기지 않았던 그였기에 그리 오랜 관직 생활을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타고난 곧은 품성과 뛰어난 능력은 숨길 수 없는 법, 비록 두 번의 짧은 관직 생활이었지만 그는 많은 치적을 남겼다. 의령현(宜寧縣)에 잠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마침 흉년이 들어 백성들 가운데 뿔뿔이 흩어지는 사람이 많아지자 안리는 자신의 녹봉을 나누어서 백성들을 구휼하였고, 이에 달아나 유랑하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돌아왔다고 한다. 이 일은 관찰사를 통해 조정에 알려졌고 그 다음해 안리는 예천 군수로 임명을 받았다./ 고향에 은둔하여 단종을 그리워하다 : 그가 예천 군수로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사양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그 사실을 두고 볼 수 없었던 안리는 결국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누암산(樓巖山) 밑에 집터를 잡고 살면서 학문에만 힘을 쏟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 산 이름을 용암산(龍巖山)이라고 고쳐 불렀는데 이는 제갈량(諸葛亮)이 와룡(臥龍)에 은거한 뜻을 취한 것이라 한다. 한편 호를 낙원(樂園)이라고 개칭하기도 했는데 이는 송나라 사마광(司馬光)의 독락원(獨樂園) 취향을 취한 것이라 한다. 이렇듯 그는 말년을 고향에서 은거를 하며 보냈다. 특히 사육신의 참화 이후 단종의 복위를 꾀하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 부사(順興府使) 이보흠(李甫欽)이 발각되어 처형을 당하고 연이어 순흥부 내의 판복을 입은 70여 가문이 일시에 전멸을 당하자, 안리는 문을 막고 손님을 사절하면서 더욱 더 깊이 몸을 숨겼다. 그는 명공과 거경(巨卿)들의 서신에도 답서를 하지 않았고, 방백과 수령들의 방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 하나를 사이에 둔 영월을 우러러 바라보며 항상 슬퍼하고 상심하면서 만년을 보냈다. 서울에 사는 현달한 반열에 있는 조카와 종손들이 그를 걱정하여 좋은 음식물이라도 보내려 하면 “소백산의 명아주와 콩잎국이 내 분수에 만족한데 관청에서 내려진 고량진미가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라며 단호하게 물리쳤으니, 그의 검약과 지조 또한 알만하다. 이렇게 은거 생활을 하며 단종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던 안리는 자신의 고향에서 조용하게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는 순흥부의 남쪽 대룡산의 계곡 언덕에 있다.

 

  세조 왕위 찬탈 후 은둔을 한 안리 : 안리(1393~?)는 고려 대유학자 문성공(文成公) 안향(安珦)의 5대손으로 해주 목사를 지냈다.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고, 파주에서 태어났다. 안리의 호는 서파(西坡)·낙원(樂園)이다. 준수한 용모에 기량이 출중하고, 학문적 소양이 뛰어난데다 문장 실력 또한 훌륭하여 당시 유명인사들이 그를 따르고 받들었다 한다. 그의 맏형 안구(安玖)는 직제학(直提學)이었고, 중형 안경(安璟)은 한성 부윤을 지냈으나, 안리는 일찍부터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 까닭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옛날 사람들은 무엇이나 가득히 차는 것을 경계했는데, 우리 집안은 회헌(晦軒 : 문성공 안향) 선조 이래로 고관대작이 무리를 이루었으니, 이는 실로 가득 찬 상태라 하겠다. 그러니 내가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마땅히 삼가야 하리라.” 그리고는 두문불출하며 학문에 침잠했다. 그의 학문이 깊고 덕망이 있다는 소문을 들은 조정에서 여러 번 불러 벼슬을 내리고자 했으나 늘 사양하고 나가지 않다가 1453년(단종 1)에야 외직으로 의령 현감에 부임했다. 그가 의령 현감으로 재직할 때 그 지방에 심한 흉년이 들어 고을 백성들이 굶주림에 지쳐 사방으로 흩어져 고을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봉록을 나누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니, 흩어졌던 백성들이 사방에서 다시 모여들었다. 감사(監司)는 이러한 그의 행적을 조정에 보고했고, 이를 가상히 여긴 조정은 이듬해 안리를 예천 군수로 승진 발령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단종 임금이 왕위를 빼앗기고 물러나자, 안리는 단호하게 벼슬을 버리고 물러나 고향인 순흥부 남쪽 30리 누암산(樓岩山) 아래 터전을 잡았다. 그는 그 산자락에 숲을 개척하고 그 아래에 마을을 이루었으니, 그로부터 동네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했다. 그 산 이름은 용암산(龍巖山)으로 바뀌게 되었다. 산 이름을 용암산이라 한 것은 옛날 중국의 제갈공명이 ‘와룡(臥龍)’이라 했던 뜻을 취한 것이라고도 하고, 『주역』의 ‘잠룡물용(潛龍勿用 : 물속에 잠겨있는 용은 함부로 쓰지 말라)’에서 취했다고도 한다. 그러던 중 1456년(세조 2) 6월 성삼문 등 충신들이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실패하여 형벌을 받고, 또한 순흥에 귀양 와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이 순흥 부사 이보흠(李甫欽)과 함께 단종의 복위운동을 추진하다가 실패하여 순흥의 사대부 가문들이 모조리 도륙을 당하는 일이 일어났다. 그러자 안리는 용암산 기슭에 깊숙이 숨어 그 아들들에게 당부하였다. “지금은 출세할 때가 아니니, 우리 선조께서 주자(朱子)를 사모하신 뜻을 본받아 문을 닫아걸고 글을 읽으며 수양하여 행실을 반듯하게 하기에 힘쓰도록 하라. 혹 서울에 가서 일가를 만나더라도 영달에 관해서는 아예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 훈계를 어기면 아비의 뜻을 저버리는 일이 될 것이다.” 이는 참으로 어지러운 세상에 나가 뜻을 세우기도 어렵거니와 자칫하면 일순간에 멸문지화를 당하는 난세를 피하여 조용히 자기 수양에 힘쓸 것을 당부한 지혜였다. 한 때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이 서찰을 보내왔으나, 그는 일체 답을 하지도 않았으며, 고을의 감사나 수령이 찾아와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서울에 사는 집안 조카며 손자들이 높은 관직에 있으면서 그가 시골에 묻혀 고생하며 지내는 것을 딱하게 여겨 철마다 맛있는 음식을 보내오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소백산에서 나는 나물만으로도 분수에 족하니 서울의 진기하고 맛있는 음식은 어울리지 않는다.” 안리가 죽은 뒤 몇 해 지나지 않아 다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인하여 죄 없는 선비들이 많이 화를 입었는데, 그의 후손들은 그의 명을 받들어 그다지 큰 피해가 없었다. 그러자 당시 사람들이 그의 선견지명에 탄복했다고 한다.한국국학진흥원-유교유적]  (daum 2010)

 

  안리(安理) : 학문이야기 | 안병록 | 2009.11.26 14:10/ 안리(安理) 학문이야기/ 학파 : 퇴계 학파/ 안향을 흠모하다/ 안리의 6대조가 안향이라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집안은 본디 성리학에 정통한 가문이었다. 그 역시 문장과 학업을 모두 가정에서 배웠다. 그러면서 자연히 회헌 안향에 대한 흠모의 감정도 깊어진 듯하다. 말년에 고향에서 은거 생활을 할 적에 말 1필과 동자 1명을 데리고 순흥의 숙수사(宿水寺)를 왕래하곤 하던 그는, 회헌 안향이 독서를 하던 세연지(洗硯池)를 지날 때 마다 흠모의 시를 읊었다고 한다. “죽계수(竹溪水)의 연원이여, 사수(泗水)의 물가에는 우리 조상님 독서하면서 여기서 자라나셨네. 이리저리 거닐어 보니 감모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는데 달은 뜰의 오동과 세연지를 비추네.”/ 자손들에게 안향의 가르침을 전하다 : 이렇듯 안향을 흠모하였던 안리는 그의 가르침을 자손들에게도 고스란히 물려주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항상 물과 달은 가득하면 넘치고 줄어든다.’는 경계로써 자손들에게 벼슬을 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며, 아침저녁으로는 부모를 봉양하고 남는 시간에는 주자서를 읽게 하였다. 이는 안향이 주자를 존모하던 뜻을 체득케 함이었으며 또한 자손들이 영달의 길에 얽매이지 않도록 하고자 함이었다. 한국국학진흥원-유교유적] (daum 2010)

 

  안리 : 영주 순흥 대룡산(大龍山) 안정면 용산리마을-安理(서파공파)| 순흥(順興)/ 바른정보(안정의)/ 2008.11.27 17:55/ //cafe.daum.net/ 영주시 안정면 용산리 마을 순흥안씨 서파공파 안리(安理) 정착지/ 종택 / 서파정(西坡亭)/ 죽림사(竹林祠) / 서파안선생휘리약사비(西坡安先生諱理略史碑)/ 만지정(萬枝亭) : 영풍군 안정면 용산동에 있으며 안재건이 관리한다. 집의(執義) 안욱(安頊)의 건립으로 단곡(丹谷) 곽진(郭진)의 기가 있다.(daum 2010)

 

  안리 : 살림꾼 90 hit/ subject 안정면 대룡산 순흥 안(順興 安)씨 - 端宗 폐위되자 군수 安理가 은퇴, 터전 열어 -/ 용암산(龍岩山) 동남쪽 기슭에 자리한 대룡산 마을은 순흥 安씨와 창원 황(黃)씨 두 문중이 世居해 오는데, 安씨의 문헌에 의하면, 조선 太宗때 해주목사(海州牧使)를 지낸 안종약(安從約 : 安珦의 5대손)의 아들 이(理 : 호는 西坡)가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있다가, 端宗임금이 왕위를 빼앗기자, 분연히 벼슬을 던지고 물러와 순흥부(府) 남쪽 용암산 아래 자리잡아, 숲을 개척하여 마을을 이루고 「대룡산」이라 이름했다고 전한다.    (安應昌<鳳林大君의 스승>이 지은 安理의 행장<行將>/ 5백 년을 세거해 오는 대룡산의 순흥 安씨에서는 터전을 열은 이(理)의 아들 계문(季文)이 부사직(副司直), 손자 영(瑛)은 연산군 때 進士, 증손 공택(公擇)이 학행으로 동학교관(東學敎官), 공필(公弼)이 中宗때 進士, 공신(公信)이 進士, 文科 중시(重試)로 군수를 지냈으며, 공택의 손자 응일(應一)이 孝行으로 공조참의(工曺參議)에 증직되고, 그 아들 욱(頊)이 仁祖때 進士, 文科로 군수를 지냈다. 공신(公信)의 손자 경우(景祐), 경례(景禮), 경유(景?)가 나란히 武科에 급제하여 함께 벼슬에 올랐으며, 응일의 7대손 필경(必烱)이 효행이 독실했고, 理의 후손 종희(宗熙)가 詩文에 능하여 문집(文集)을 남겼다.

 

  [유적(遺跡)] : 1) 용연사(龍淵祠) : 대룡산에 있다. 안부(安孚 : 珦의 아버지. 고려 版圖判書지냄)이하 6位를 제향(祭享). (高宗초에 훼철됨)/ 2) 서파정(西坡亭) : 대룡산에 있다. 안리(安理)가 독서, 강학(講學)하던 처소로, 후손이 개축하다. 채산(蔡山) 권상규(權相圭)가 기문(記文)을 짓다./ 3) 만지정(萬枝亭) : 대룡산에 있다. 군수 안욱(安頊)이 독서하던 처소로, 후손이 옮겨 세우다. 文成公 향(珦)의 영정을 봉안, 곽구(郭玖)가 기문(記文)을 지었다./ 4) 우우정(友于亭) : 매담(梅潭) 안공신(安公信)이 독서하던 처소로 지금 용산리 어약(魚躍)에 있다. 옛터에 友于亭 舊址碑가 있다. 작성일: 2004-04-19 15:57:31( daum 2010)

 

  안리 [專門資料] : 西坡 安理 墓碑/ 자료유형 한국학자료/ 발행일2008-03-24(daum 2010)

 

  안리 [專門資料] : 西坡 安理 墓碑/ 발행일2007-01-09(daum 2010)

 

  안리(安理) : 발행일 2008-03-21/ 자료소개 본관 :순흥( 順興 ), 출신지 :순흥((順興), 분묘지 : 순흥 남쪽 대룡산(大龍山) 계곡(桂谷), 주요 관직 :의령 현감(宜寧縣監), 예천 군수(醴泉郡守)/ 생애 일화 : 서파 안리는 1393년(태조 1) 파주의 옛 집에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풍채가 훌륭하고 도량이 크고 깊었다고 한다. 또한 가정에서 배운 문장과 학업은 당대의 명사들이 하나같이 숭상할 정도로 뛰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찬성(贊成)과 판윤(判尹)에 오른 큰 형과 작은 형과는 달리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안리의 이러한 마음가짐은 “우리 가문은 회헌 이후 역대로 조정에 현달하여 형제와 자질들이 사헌부에 가득하고 온 가문...(daum 2010)

 

  안리 [專門資料] : 서파정(西坡亭) (영남유교문화유물)/ 발행일 2007-01-03/ 자료소개 서파정(西坡亭)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서파정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호가 서파(西坡)·낙원(樂園)으로,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단종 때 예천군수를 지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름을 대룡산(大龍山)이라 불렀다. 해주 목사를 지낸 안종약(安從約)의 아들이며, 그의 어머니는 동래정씨로 봉원부원군 정양생의 딸이다.(daum 2010)

 

  안리 [專門資料] : 서파정기(西坡亭記) (영남유교문화유물)/ 발행일 2007-01-03/ 자료소개 서파정(西坡亭)에 걸려있는 권상규(權相圭)가 지은 서파정기(西坡亭記)이다. 서파정의 유래와 안리(安理)의 충절, 그리고 후손들이 이것을 잘 이어받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서파정은 인륜을 저버린 단종 폐위 사건에 분개하여 명예와 이욕을 버리고 은거한 조선조 선비 안리(安理)가 독서하며 후학들을 지도하던 곳이다. 안리는 호가 서파(西坡)·낙원(樂園)으로, 고려의 유학자 안향(安珦)의 후손으로 단종 때 예천군수를 지냈다.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빼앗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은둔하여, 당시 순흥부 남쪽 용암산 아래에 터를 닦고 마을 이...(daum 2010)

 

  안리(安理) : 분류 인물 > 영남유학인물자료/ 생성일  1393년(태조 1)- / 초록 : 본관 :순흥(順興), 출신지 :순흥((順興), 분묘지 :순흥 남쪽 대룡산(大龍山) 계곡(桂谷), 주요 관직 :의령 현감(宜寧縣監), 예천 군수(醴泉郡守)/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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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명(安銘) : 1549(명종 4)-1636(인조 14), 자는 의보(義甫), 본관은 순흥, 참봉 희맹(希孟)의 아들, 양윤(良胤)ㆍ현윤(賢胤)의 아버지이다. 벼슬은 참봉이다. 묘는 예천 갈동(葛洞) 자좌(子坐)에 있는데, 묘갈명(墓喝銘)은 1989년에 족후손 승락(承珞)이 지었고, 중화 양홍대(楊鴻大)가 썼다.(醴泉의 金石文 2003)

 

  안명 :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承仕郞 順興安公(銘) 墓碣銘/ ...하여 우러러 볼 수 있으리라.향년 80세로 병자(1636)년 모월 모일에 돌아가셨으며 醴泉 葛洞 子坐에 장례.../ 예천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관련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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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명남 :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佐郞 順興安公(命男) 墓碣銘/ ...B202_0193.jpg좌랑 순흥안공(명남) 묘갈명공의 휘는 命男이요 자는 順夫며 성은 安氏이다.고려의 상호.../ 예천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관련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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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몽징 : 예천의 금석문 1 | 간행년:2003   저자:예천문화원   발행처:예천문화원 / 成均進士 松坡 順興安公(夢徵) 碣陰銘/ ...B202_0195.jpg성균진사 송파 순흥안공(몽징) 갈음명임인(壬寅)년에 달천 안군이 북학에서 서울로 와서.../ 예천 내용이 수록된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 유교관련도서이다.//

 

  안몽징(安夢徵) : 본관(本貫) 순흥(順興), 시대(時代) (1611, 광해군 3-1654, 효종 5), 자(字) 천뢰(天賚), 호(號) 송파(松坡)/ 이력(履歷)/ 영남문집/ 송파유고(松坡遺稿)/ 자(字) 천뢰(天賚), 호(號) 송파(松坡), 본(本) 순흥(順興), 부(父) 측(測), 거(居) 예천(醴泉)/ 2권1책/ 행장(行狀); 송릉필(宋凌弼) 찬(撰). 공(公)은 7세에 시문(詩文)을 지었고 10세에 경사자집(經史子集)을통독(通讀)하였고, 12세에 대소육체(大小六體)를 모두 짓게 되어 명성이 자자하였다. 공(公)은 부친(父親)과 친교(親交)가 있던 무주(無住) 홍호(洪鎬), 청풍자(淸風子) 정윤목(鄭允穆), 호우(湖憂) 이환(李煥)등에게 종학(從學)하여 많이 계발(啓發)되였다. 1652년(효종 3) 아우 두징(斗徵)과 함께진사시(進士試)에합격하였으나 부모상(父母喪)을 당한 후로는 영도(榮途)에 뜻을 끊고 매일 단정히 앉아 학문에 힘쓸 이었다. 송파(松坡) 위에 소정(小亭)을 짓고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와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하였다./ 문헌(文獻)/ 사마방목(司馬榜目)/ 안몽징(安夢徵) - - 1611 증광시(增廣試) 1등(一等) 3위(daum 2010)

 

  안몽징 : 점리와집 (點?窩集)(17C)/ ...태어났고 어려서부터 명민하고 뛰어난 오성과 재능이 있었으며 학문에도 힘써 文辭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형 安夢徵의 영향으로 世事와 관계를 끊고 心經에 침잠하였으며 당시 뛰어난 碩學 洪汝河와 교유하였다. 安道徵은 鄭經世의.../ (daum 2010)

 

  안몽징 : 2派-별장공파(別將公派)계보도 (수정중)/ 2009.04.04/ ㅣ ㅣ ㅣ ㄴ ㅜ 안상인(安尙仁)안상예(安尙禮) 안엽(安曄) 안석징(安碩徵)안구징(安久徵)안헌징(安獻徵) 안몽징(安夢徵) ㅣ 안한소(安漢召) ㅣ 안일리(安日履) ㅣ 안광세(安光世)안석룡(安錫龍) ㅣ 안진구(安鎭龜) ㅣ 1 안자미(安子美.../ //cafe.daum.net/ahnjustice/ 순흥안씨 찬성공파(daum 2010)

 

  안몽징 : 순흥(順興) 안씨(安氏)의 생원진사시 합격자 목록(생년순)/ 2009.11.15/ 1610~? 순흥(順興) 3등(三等) 70등 안광욱(安光郁) 희문(希文) 1610~? 순흥(順興) 3등(三等) 17등 안몽징(安夢徵) 천뢰(天賚) 1611~? 순흥(順興) 1등(一等) 3등 안두징(安斗徵) 경추(景樞) 1620~? 순흥(順興) 2등(二等) 2등.../ //cafe.daum.net/ahnjustice/ 순흥안씨 찬성공파(daum 2010)

 

  안몽징 : 안창열(安昌烈)-동려문집(東旅文集)/ 2008.03.31/ , 享年六十有 六, 八月奉措于 殷豊 松川, 越十六年丁未移奉士(//www.koreastudy.or.kr 2007) 안몽징(安夢徵) : 1611(광해군 3)-1654(효종 5), 용궁면 월오리 다래이(達美川) 순흥 안씨 입향조, 자는 천뢰(天賚), 호는 송파.../ //cafe.daum.net/ahnjustice/ 순흥안씨 찬성공파(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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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직교원 조동직(훈장)·양명희(포장), 8월말 수상...축하합니다.

 

  예천교육지원청(2015年 8月末 退職敎員 勳襃獎 受賞者 名單<慶北道敎育廳>) [記事] : ◆홍조근정훈장 :...△예천초등학교 교감 조동직... ◆근정포장 : 예천여자중학교 교감 양명희...(이석수 記者 每日新聞 2015-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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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295

 

  예천군생활체육회(醴泉郡生活體育會 主管 '第19回 慶北道知事旗生活體育테니스大會(29.30日)' 開幕!) [記事] : 생활체육 7330(일주일에 세 번 하루 30분 운동!!! 경상북도생활체육회가 주최하고 예천군생활체육회가 주관한 '제19회 경상북도지사기생활체육 테니스대회'가 2015년 8월 29일 오전 11시 예천공설운동장 테니스장에서 임상호 예천군테니스협회장의 개회 선언으로 막을 올렸다. 이날 행사에는 이현준 군수, 김시택 경찰서장, 군의회 도국환 부의장과 황병일·이형식·최병욱 의원, 도기욱·안희영 도의원, 권영석 예천군새마을금고 이사장을 비롯한 내빈, 권광남 회장을 비롯한 생활체육 관계자, 선수 등 500여명이 참석, 도지사배 테니스대회를 축하했다. 이현준 군수는 환영사를 통해 "초록의 싱그러움이 더한 8월에 제19회 도지사기 테니스대회를 예천에서 개최토록 애써주신 김성환 도 회장님과 권광남 예천회장님에게 감사드리며, 23개 시.군에서 충효의 고장 예천을 방문하신 선수 및 임원 여러분을 5만 군민과 함께 진심으로 환영한다."고 말했다. 이 군수는 또 "군민들의 건강증진과 테니스 동호회 활성화를 위해 올해 완공된 예천군 실내테니스장에서 부드러운 테니스공으로 빗장을 여는 신고의식을 갖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오는 15일~18일(4일간)까지 예천에서 개최되는 제2회 예천세계활축제에 동호인들이 많이 관람해 줄 것"을 당부했다. 김성한 도회장은 "신도청시대와 함께 21세기 경북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기 위해 노력하시면서 우리 생활체육 동호인들을 따뜻하게 맞이해 주신 이현준 군수님께 감사드리며, 동호인들은 회원 상호간 화합과 친목을 도모하는 뜻 깊은 대회가 다함께 노력하자"고 말했다.  도국환 부의장은 "올해로 19번째를 맞이한 경북도지사기 테니스대회가 예천에서 개최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각 시.군에서 오신 임원 및 선수 여러분을 환영하면서 선수 여러분들은 건강한 마음과 체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시고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맘껏 펼쳐 보이는 대회가 되길 기원드린다."는 축사를 했다. 예천군생활체육회 권광남 회장은 "이번 대회가 성공적으로 개최될 수 있도록 장소를 제공해 주신 이현준 군수님과 군의회 도국환 부의장님을 비롯한 군의원님, 도의원님, 내빈들께 감사드리며 선수 여러분들은 예천군의 따뜻한 배려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좋은 성적 거두시길 기원드린다."고 말했다. 이날 개회식에 참석한 임원 및 선수들은 운동장이 아닌 예천군이 정성들여 만들어 놓은 한천변 소나무 군락지 그늘 아래서 편안한 자세로 참여해 선수들 개개인은 "이색적인 개회식에 감탄사를 보내면서 예천군이 새롭게 건설한 실내테니스장에서 눈길을 옮기지 못했다. 한편, 이현준 군수를 비롯한 예천군 관내 기관단체장 및 경상북도 생활체육회 관계자 등은 실내테니스장을 둘러보고 '경북도내에서 처음으로 예천이 이토록 훌륭한 실내 테니스경기장을 건설한 것은 체육웅군의 명성을 지켜가는 예천의 힘(김성환 회장)'이라고 칭찬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5-08-29 오후 12:2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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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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