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예천의 자랑(4200) : 유일한(2)(附 예천방문 1,336)
---
유일한 : "외국 위인들만 대단한 줄 알아요"/ 2008.12.10 | 머니투데이 | 미디어다음 백남준에 이른다. 특히 경제 분야에서는 해상왕 장보고,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 류일한 유한양행 창업주 외에 기녀 출신인 조선시대 제주 거부 김만덕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 뽑혀 눈길을 끈다...(daum 2010)
유일한 : 풍요로운 노후를 위한 연령별 라이프 플랜/ e-Book/ 오정선 지음 | 팜파스 | 2008.04.10/ 책본문 : 이건희 회장, 우리나라에서는 드물게 전문 경영인에게 사업을 물려준유한양행의 류일한 박사 등이 있다. 이렇게 세계적으로나 국내에서 유명한 자산가 말고도 주변의 가까운 곳에서.../ 76페이지(daum 2010)
유일한 : 기업인/ 생몰 1895년 1월 15일 ~ 1971년 3월 11일/ 학력 미시간 대학교 상학 학사/ 경력 1939년 한국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시/ 1926년 유한양행 설립/ 수상 1995년 건국훈장독립장추서, 1968년 동탑산업훈장(daum 2010)
유일한 : 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출생 1895년 1월 15일/ 사망 1971년 3월 1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학력 캘리포니아대학 상학석사/ 직업 사업가, 독립운동가/ 종교 침례교/ 배우자 호미리/ 부모 유기연(부), 김기복(모)/ 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1971년 3월 11일)은 주식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인으로, 본명은 유일형이다.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했으며,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현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경기도 부천시 괴안동 사이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동차 도로가 있다./ 목차 : 1 경력, 1.1 유년시절, 1.2 대학교생활, 1.3 식품사업가 시절, 1.4 유한양행, 1.5 재산의 사회환원, 2 주석/ 경력/ 유년시절 : 유일한은 1895년, 자수성가한 상인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인 아버지 유기연은 미국 침례교에서 조선인 유학생을 선발한다는 말을 듣고 1903년, 당시 9살에 불과한 큰 아들을 미국으로 유학을 보낸다. 큰 돈이 들 수도 있는 유학을 보낸 이유는 자신의 자식들이 식견을 넓혀서 나라를 위해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으로 유기연은 자식들을 러시아, 일본, 중국에 유학을 보내서 공부하게 하였다. 배에서 아버지가 환전해준 미국돈을 잃어버린 유일한은 인솔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박용만의 배려로 미국 네브래스카 주의 독신자 자매인 태프트 자매에게 입양되었다. 태프트 자매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성서 읽기와 기도를 한 뒤, 밭에서 하루종일 일하는 성실하고 검소한 삶을 통해 기독교의 노동윤리를 실천했으며, 어린 유일한에게 영어를 가르쳐서 미국 사회에 적응하도록 배려했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일한은 인종차별로 서러움을 겪기도 하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하는 강한 성격으로 극복했다. 독립운동가 박용만이 독립군을 기르기 위해 만든 헤이팅스 소년병 학교에 1909년 입학한 그는 낮에는 농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했으며, 방학 때는 신문배달을 하면서 자신의 힘으로 살았다.나중에 어른이 되었을때는 재미교포들의 항일집회에 참여하여 연설을 하기도 했는데, 항일경력 때문에 고향에 사업차 잠시 입국했을때 일본경찰에게 연행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한다./
대학교생활 : 네브레스카 주립대학교에 입학한 유일한은 뛰어난 운동실력을 발휘, 장학금을 받으며 미식축구 선수로 활약한다. 이를 안 아버지는 '내가 공부하라고 미국에 보냈지, 운동부에서 활동하라고 보낸 줄 아느냐'면서 꾸짖었지만, 유일한은 '미국 대학교에서는 운동을 못하면 공부를 못합니다. 장학금을 받으면서 공부하기 위해서 운동부에서 활동하는 것입니다.'라고 답장을 보내어 아버지를 안심시켰다. 1919년 3.1운동 직후, 서재필이 소집한 제1차 한인의회에 참여하였다. 미시간대학교를 졸업한 뒤, 1953년 스탠포드 대학원에서 국제법을 공부하고(1948) 귀국했다./ 식품사업가 시절 : 자신의 힘으로 대학교를 졸업한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발전기회사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제너럴 일렉트릭사에 취직한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돈을 모은 그는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을 제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주)를 설립하였다. 새내기 사업가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없자, 유일한은 일부러 교통사고를 내서 숙주나물 통조림을 기자들이 소개하도록 하여 미국인 특히 숙주나물을 조리하여 먹는 중국계 미국인들의 관심을 모았다. 덕분에 사업은 번창했고, 중국계 미국인 여성이자 소아과 의사인 호미리와 결혼했다. 1925년에는 서재필과 New Il-han & Co. 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후에 서재필은 유일한이 귀국할 때 유한양행의 버드나무 CI를 제작하여 선물할 정도로 유일한을 아꼈다./ 유한양행 : 1926년 서울에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그가 사업을 시작한 이유는 라초이회사 경영 때 필요한 녹두를 구입하기 위해 중국에 갔다가 북간도에 거주하던 부모와 동생들을 만난 사건 때문이었다. 부모는 큰 아들이 보내준 100달러로 땅을 사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었지만,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은 그렇지 못해서 병이나 민중작가 최서해의 소설 《탈출기》에서 묘사된 것처럼 굶주림으로 죽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유일한은 한민족의 건강유지에 필요한 결핵약, 진통소염제(안티푸라민), 혈청 등을 판매했으며, 특히 안티푸라민은 이전에는 미국에서 약품을 수입하여 팔던 유한양행이 1933년 처음 개발하여 판매한 제품으로 알려져 있다.[1] 부인 호미리 여사도 중일전쟁으로 조선의 의약품 부족이 극에 달하자, 소아과 병원을 개업하여 저렴한 가격에 환자들을 치료하였다.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경영할 때 항상 윤리경영을 실천하였다. 그 이유는 라초이사 경영을 하던 시절, 거래하던 녹두회사 사장이 탈세를 통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모습에 실망해서였다. 그래서 그는 탈세하지 않았으며, 모르핀을 팔면 돈을 벌 수 있다는 간부사원의 유혹을 '당장 회사에서 나가시오'라는 꾸짖음으로 물리친 일화가 있다.[2]/
재산의 사회환원 :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유일한은 자신의 재산에 대해 자신의 소유가 아닌, 하느님이 맡기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1970년 유한재단을 설립하여 직업교육기관인 유한공업고등학교와 유한공업전문대학를 세웠고, 1971년 별세하기 전 아들 유일선 변호사의 딸 즉, 손녀의 학자금으로 쓰일 1만불을 제외한 전 재산을 교육사업에 기부한다는 유서를 남겼다. 유일한이 살던 집은 겉은 붉은 벽돌로, 내부는 목재로 지어졌으며, 현재 건물 소유주인 성공회대학교에서 신학연구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주석 : ↑ 한겨레 21, 2006년11월03일 제633호 '만병통치약을 경계하다. 진통소염제 안티푸라민'/ ↑ 한겨레 2007년 4월 11일자, 한국기독교 120년-숨은 영성가를 찾아 ⑪ 유일한 선생/ v ? d ? e1996년 선정 이 달의 독립 운동가 /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 송종익 신채호 신석구 서재필 신익희 유일한 김하락 박상진 홍진 정인승 전명운 정이형 / v ? d ? e1996년 선정 이 달의 문화 인물 / 1월 2월 3월 4월 5월 6월 7월 8월 9월 10월 11월 12월 / 김만중 최치원 이순지 서재필 김명국 유일한 도선 심훈 왕산악 정인승 전형필 이제마 / 원본 주소 (daum 2010)
유일한 : [선비성현] 항일 특수공작원과 참 기업인을 넘나든 유일한| ‥――――-♣한자고사예절/ 이도령/ 2010.06.09 15:33/ 유한양행의 유일한 박사/ - 항일 특수공작원과 참 기업인을 넘나든 유일한 - / 한 세기 전에 불과 1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생에서 경영자로 성장하였고, 고국에 돌아 와 민족기업을 일으키고 항일투쟁을 위한 특수요원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 다시 기업을 키워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그의 말에서 남다른 기업관을 엿볼 수 있다. 1895년 1월 5일 유기연과 김기복 사이에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유일한 박사는 부친의 영향으로 10살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까지 "유일형"이었던 이름을 조국을 잊지 않고 살겠다는 그의 의지대로 "유일한"으로 바꾸는 것을 시작으로 대학 졸업반이던 1919년 우리 나라의 독립을 주장하는 "한인 자유대회"가 필라델피아에서 열리자 "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 결의문"을 작성하여 발표하고 그 결의문대로 실천하며 평생 조국을 사랑하면서 살았다. 1920년에 대학을 졸업한 유일한 박사는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에 동양인 최초의 회계사로 취직 동양 현지 총 책임자를 맡아 달라는 제의를 받는다. 그러나 월급을 받으며 일생을 편안하게 살기 보다는 민족에 봉사하는 기업을 경영하는 길을 택했다. 1924년 승승장구하며 성공을 거듭하던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회사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한다. "헐벗고 굶주리고 병든" 동포들의 문제를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 그 중에서도 제약회사를 키우는 일이라고 판단한 유일한 박사는 1926년 12월에 자신의 이름에서 "유한"을 따고 세계로 통한다는 의미를 가진 유한양행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향상에 힘쓰고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후 1945년 1월 지천명의 나이라는 50세에 미군의 한국 침투작전인 냅코 작전계획 (Napko Project - 미육군 전략정보처(OSS)에 의해 수립된 계획으로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들을 선발하여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다음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되어 침투, 폭파, 통신, 낙하산 등 특수공작 교육을 받고 제1조 조장으로 임명되어 "코드명 A"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유일한은 후에 미 국무성의 비밀문서를 통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 까지 평생 한마디도 이 작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광복 후 미국에서 귀국한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간존중을 사업의 기본철학으로 가지고 있던 그는 육영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시대부터 종업원들의 소양교육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1952년 전란 중에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비뿐만 아니라 숙식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며 숙련된 지식 노동자의 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5년에는 오늘날의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여 학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또한 유일한은 기업경영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현한 경영자다. 그는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 자신이 100%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 52%를 사원들에게 양도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하였다. 1969년 유일한은 기업경영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되는데 이때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조권순(趙權順) 전무에게 사장직을 승계하여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다. 그에게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던 유능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소유도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선재단과 종업원 그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그의 기업관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유일한은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고 납세의 의무를 철저히 지킨 경영자였다. 1950년대와 1960년대 많은 사업가들이 권력에 밀착해 이권을 따내고 부를 축적했지만그는 역대 정권의 탄압과 유혹 속에서도 일절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 그는 세금에 대해서도 철저했다. 세금을 탈루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할 때에도 유일한은 하지 않았다."기업이 세금을 많이 납부해야 정부가 국민을 위해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그는 조금의 누락도 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혹독한 세무조사를 수없이 받았지만 한 치의 어김도 없이 납세의 의무를 지켰기에 1968년 3개월에 걸친 세무조사 끝에 어떤 혐의도 발견되지 않아 오히려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도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업가로서 몸을 일으켰으며 사업가로서는 꿈꾸기 힘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나아가 나눔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에게 기업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은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서라고 강조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정부는 1971년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1995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daum 2010)
유일한 : 존경받을 기업인/유일한| 우리들의 이야기/ 김상필/ 조회 156 | 2010.05.07 02:31/ (daum 2010)
유일한 : 존경받을 기업인/ 유일한|▒☞ 정감있는 방/ 나물먹고 물마시고 카페운영자 | 2005.11.19 09:49/ //cafe.daum.net/ 1895년 9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부친 유기연은 성공한 상인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 유기연은 장남인 유일한을 외국에 보내 교육을 시키기로 함. 1904년 9살의 나이에 순회공사 박장연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감. 그곳에서 신문배달 등 고학을 하며 학업에 열중, 고등학교 때는 재능 있는 미식축구 선수로 장학금까지 받음. 1915년 미시건 대학 입학. 당시 유일한은 일본의 압제를 피해 북간도로 건너간 부친으로부터 귀국 종용을 받았으나, 그는 학업을 마쳐야 한다는 일념으로 집에 빌린 돈 100달러를 보내고 학업에 매진. 대학 시절에 학자금 마련을 위해 중국 등에서 만들어진 값싼 제품을 동양인들에게 판매하는 등 장사 수완을 발휘함. 1919년 대학 졸업 후 GE(General Electric Co.)에 동양인 최초로 입사. (당시 회계사로 일함.) 고국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필라델피아 독립 선언에 참여함. 이때부터 그는 민족을 위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 (그는 이후 대한민국 독립 전쟁을 위한 맹호군 창설에도 비밀리에 기여한다.) GE를 그만두고 숙주나물 사업을 시작. 당시 미국에서는 중국 요리에 반드시 첨가해야 하는 숙주나물이 부족했다는 사실을 간파, 숙주나물의 보관과 상품 생산을 위한 공장을 만들어 사업을 키우기 시작. 숙주나물 사업을 키운 그는 1922년 “라. 초이 식품회사” 창립. 숙주나물의 원료인 녹두를 확보하기 위해 1925년 한국에 일시 귀국. 이곳에서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눈뜸. 유일한은 무엇보다 의학 시설과 약품이 없어 끔찍하게 죽어가는 동포들을 보고 제약회사 설립을 결심한다. 그는 미국의 식품회사를 동업자에게 넘기고 50만 달러의 자본금으로 영구 귀국, 1926년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다. 그러나 유일한에겐 한일합방으로 호적도 상실된 상태였고, 약사 자격증도 없어 사업에 막대한 어려움을 겪는다. (유일한은 미국 시민권자였음.) 그러나 당시 경성세관 주임이었던 예동식의 도움으로 호적을 얻고, 약제사를 구하는 등 사업은 점차 제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구충제, 피부병 연고제, 결핵 치료제, 아스피린 등 주로 미국에서 수입된 약품을 판매하다가 1934년 프론토실(Prontosil)이란 항생제를 독점 제조, 판매하기 시작, 일본 기업들을 제치고 막대한 돈을 벌어들였으며 아시아 일대에 수출까지 하게 된다. 1936년 경성방직에 이어 대한민국 사상 두 번째 주식회사로 등록. 2만평 규모의 사옥 토지를 확보, 약품을 직접 생산할 수 있는 공장, 발전실, 사원들을 위한 기숙사, 운동장, 위생시설 등을 건립해 당시 국내 기업 중 가장 진일보한 복지 후생을 자랑했음. 주식의 30%는 모두 사원들에게 배분해 주는 등, 유한양행은 종업원 지주제, 전문 경영인 도입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기업 문화를 만들어 냄. 유일한은 조회 때마다 전 사원에게 한민족은 일본보다 못하지 않으며, 유한은 사회를 위해 존재하며,항상 국민 보건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고 강조했음. 제품 품질 개선을 위해 연구실에 집중적인 투자를 해 국내 최대의 제약 시설과 연구진을 확보했음. 1938년에는 유한비타민간유회사, 유한 만주제약회사, 유한무역회사, 대련유한양행, 천진유한양행 등의 사업체를 설립 사업을 동북아 일대에 크게 확장함으로써 일제 치하에서 가장 성공한 100% 민족자본 기업이 됨.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이 미국과 전시 체제에 들어가자, 미국 시민권자인 유일한의 사업은 커다란 타격을 입는다. 일제는 당시 각종 비열한 세금 공세로 회사를 도산 직전까지 몰고 갔고, 유한양행은 해방 때까지 간신히 명맥만 유지한다. 해방 후 회생에 주력하던 유한양행은 한국 전쟁으로 또 다시 시련을 맞는다. 전쟁 와중에 공장이 파괴되고 기업 자산은 잿더미가 돼 버림. 1953년 귀국하여 복구 작업에 앞장섬. 미국의 원조로 최신식 화학실험 연구실을 설립하는 등 치열한 재건 노력 끝에 1950년대 말 다시 한국 최대 제약회사로 거듭남. 학생들에 대한 애정이 강했음. 1954년 자신의 돈을 털어 부천에 기능공 양성 학교인 "고려공과학관"을 설립해 학생 전원의 학비와 숙식비등을 무료로 제공함. 이 학교는 1964년 유한공업 고등학교로 개명됨. 1965년 사비를 털어 "유한교육신탁관리기금"을 설립, 보다 대대적인 장학사업과 사회복지 사업에 집중함. 이는 이후 "유한재단"으로 명칭을 변경함. 1968년 국내 최초의 "동탑 산업 훈장"을 받고 1년간 세무 사찰 면제. 신문에 "한국 유일의 자진 납세 업체", "한국 유일의 장부 공개 업체" 등으로 높은 평가를 받음. 당시 대기업 중 그때까지 탈세와 정치자금 은닉 등의 혐의를 받지 않은 기업은 유한양행이 유일했음. 유일한, 동탑산업 훈장을 목에 걸고. 1961년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는 기업을 길들일 목적으로 의심가는 기업인들을 모두 소환해 조사를 벌였다. 당시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며 유한양행까지 압수 수색을 했으나, 정말 아무것도 나오지 않자 유일한 박사에게 상을 줬다는 일화도 있음. 1969년 50년간 맡았던 기업 CEO 자리에서 물러남. 그는 동탑 산업훈장을 후임인 조권순 사장에게 물려 주며 "정직함을 상징하는 이 메달을 대대로 이어져갈 사장에게 전달하라"는 말을 남김. 당시 자신이 일으킨 사업을 자신과 일체의 혈연관계도 없는 이에게 물려주는 일은 한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음. 1971년 76세의 나이로 타계. 당시 자신이 남긴 모든 재산을 공익 기업에 기부함.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 받음. 슬하엔 1남 1녀가 있었음. 그는 죽어서도 학생들이 뛰노는 소리를 듣고 싶다며 딸 유재라 여사에게 그의 묘소가 있는 5천 평의 대지를 상속, 학생들을 위한 "유한동산"으로 꾸며주도록 부탁함. 그리고 미국에 있는 장남에겐 일체 재산을 물려주지 않았고 "너는 대학까지 졸업 시켰으니 앞으로는 자립해서 살아가라"는 유언만 있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1991년 미국에서 타계한 유재라 여사 역시 자신의 전 재산을 공익 재단인 유한재단에 기부하고 그의 아버지가 묻힌 유한동산에 묻힌다. 그의 사후 유한양행은 오직 제약 사업에 집중하면서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우량기업으로, 단 한번도 노사분규에 시달리지 않은 화목한 기업으로, 국내에서 (같은 이름으로 존재한) 가장 오래된 기업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음. (아직도 유한양행의 1천 여명의 직원 중 유일한 회장의 친인척은 단 한 명도 없다고 함.)(daum 2010)
유일한 : 진전한 복음가진 기업인 유일한 박사| 자 유 게 시 판/ 루터베드로/ 조회 104 | 2010.04.27 15:33/ 유일한/ 출생 1895년 1월 15일/ 사망 1971년 3월 11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국적 대한민국/ 학력 캘리포니아대학 상학석사/ 직업 사업가, 독립운동가/ 종교 침례교/ 배우자 호미리/ 부모 유기연(부), 김기복(모)(daum 2010)
유일한 : 유일한(柳一韓, 1895년 1월 15일~1971년 3월 11일)은 주식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대한민국의 기업가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인으로, 본명은 유일형이다. 그는 자신의 유언에서 "자신의 전 재산을 교육하는 데에다가 기증하라"고 했으며, 유한공업전문대학을 설립하였다. 현재 유한공업고등학교와 경기도 부천시 괴안동 사이에 유일한로라는 이름이 붙여진 자동차 도로가 있다.(daum 2010)
유일한 :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 1위인 유일한/ 2008.11.12/ 유한양행 창업자였던 유일한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유일한은 1895년 9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유기연은 성공한 상인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서양문명을 빨리 받아들여 일본을.../ //cafe.daum.net/sukdooam/ 박법종 예화모음(daum 2010)
유일한 : 유한양행 창업자였던 유일한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이다. 유일한은 1895년 9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아버지 유기연은 성공한 상인이자,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서양문명을 빨리 받아들여 일본을 앞서야 한다는 생각으로 1904년 아홉살의 유일한을 대한제국 순회공사였던 박장현의 손에 맡겨 미국에 조기 유학을 시켰다. 말이 조기유학이지 집으로부터 생활비를 한 푼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유일한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그는 미국에서 신문배달 등 고학을 하며 학업에 열중했고 1912년 헤스팅스고등학교 때는 재능있는 미식축구선수로 장학금까지 받았다. 1915년 미시건대학에 입학했고 1919년 대학 졸업 후 GE(General Electric Co)에 동양인으로는 최초로 입사, 회계사로 일했다. 그는 고국의 3.1운동 소식을 듣고 그 때부터 민족을 위한 사업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결심한대로 좋은 직장이었던 GE사를 그만두고 1922년 숙주나물 통조림 회사인 "라초이식품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사업은 대성공이었다. 1925년까지 50여만 달러의 거금을 벌었으며 그 이익 중 일부를 독립운동에 지원하기도 했다. 1924년 질좋은 녹두를 미국에서 구하기 점점 어려워지자, 좋은 녹두를 확보하기 위해 한국에 일시 귀국했다. 미국에서는 잘 알지 못했으나 조국에 돌아온 그는 일제치하에서 가난과 질병 속에 있는 조국의 비참한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미국에서의 기득권을 모두 포기하고 1926년 12월 31세의 나이로 귀국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 교수직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지만 그는 자신의 결심대로 헐벗은 동포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질병으로 신음하는 동포들에게 좋은 약을 제공해주어 한민족의 생활문화를 향상시키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결론을 내리고 조국의 동포들을 돕고자 개인의 사비로 유한양행을 설립하였다. 그는 그 후 탁월한 경영능력으로 최상의 제품을 생산하는 국내 최대 제약회사로 키웠다. 종업원 거주제, 전문경영인 도입 등 당시로는 획기적인 기업문화를 만들어내었으며 대한민국 최초로 자신의 기업을 일체의 혈연관계가 없는 경영인에게 물려 주었을 뿐 아니라 유언으로 자신의 전재산을 사회에 헌납했다. 생전에 자신의 돈을 털어 교육기관(54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세웠고 60년대에는 한국직업학원과 유한공업고등학교 유한중학교를 차례로) 설립하고 자선단체를 만드는 등 세계적으로 유래를 찾아보기 힘든 위대한 기업가이자, 박애주의자였다. 그의 사후 유한양행은 오직 제약회사에 집중하면서 오늘날까지 단 한번도 적자를 내지 않은 우량기업이 되었다. 2006년도 상반기 유한양행의 매출액은 2079억의 영업이익 370억원 당기순이익 337억원으로 현재도 한미약품을 제치고 업계 2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제약업계의 기둥으로 지금도 계속 성장하고 있다. 유일한의 성공노트를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항상 투명성을 우선하라. 2. 항상 참신한 계획과 능동적인 활동으로 정직하고 성실한 삶을 살아라. 3. 머리 좋은 천재보다는 일에 대한 취미와 열의를 가진 사람이 되라. 4. 능동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건강에 유의하라. 5. 오늘 최선을 다하라. 6. 한결 같게 진실하게 일하라. 7. 정성껏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 봉사하라. 8. 기업은 사회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을 잊지 말라.(daum 2010)
유일한 : -마에스트로 (정직과 나눔을 실천한 기업인) 유일한/ 2010.06.13/ 글 박인택/ 그림 박지훈 / 감수 김동철 정직과 나눔을 실천한 기업인 유일한 사실 처음 책 제목을 보았을때 유일한이 누구지? 잘 몰랐다. 책 첫장을 넘기면 유한공업고등학교 사진이 보이면서 유일한의 동상이 있다. 학교와 유일한은.../ (daum 2010)
유일한 : 정직과 나눔을 실천한 기업인 유일한/ 2010.01.04/ 저학년 어린이에게 알려주는 자랑스러운 우리나라의 기업인, 유일한 박사! 유일한 박사는 9살의 어린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가 스스로 학비를 벌며 어렵게 공부를 하고, 동양인이라는 설움을 이기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여 미국에서도.../ //blog.naver.com/jmcho2005/ 큰나무 里 木 (녹색마음)(daum 2010)
유일한 :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존경 받을 기업인, 유일한(펌)/ 2005.11.15/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존경 받을 기업인, 유일한/ 1895년 9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부친 유기연은 성공한 상인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 유기연은 장남인 유일한을 외국에 보내 교육을 시키기로 함. 1904년 9살의.../ //blog.daum.net/sym14/ 마음을 열고 나누는 곳(daum 2010)
유일한 : '나라 사랑의 민족 기업인' 유일한 박사/ 2007.03.16/ '나라 사랑의 민족 기업인' 유일한 박사 독립운동가 유일한(柳一韓) 선생 [1894. 12. 13~1971. 3. 11] "민족이 건강해야 독립도 하고 강한 국가가 될 수 있다" "기업에서 얻은 이익은 그 기업을 키워 준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blog.daum.net/notable/ 과거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daum 2010)
---
@예천방문 1,336
예천노인전문요양원(대구수성대학교 社會福祉科 學生 22名 '醴泉老人專門療養院' 어르신들 慰勞.) [記事] : 대구 수성대학교 사회복지과 야간부 학생들이 2015년 11월 27일 예천노인전문요양원(원장 반용부)을 방문했다. 지난 11월 6일 주간부 학생들의 호응에 힘입어 야간부 학생들도 어려운 시간을 내어 신민정 학과장과 김종배 교수를 비롯하여 22명의 학생들이 방문했다. 강당에서 시설소개 및 운영 그리고 어르신들 입소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회도 가졌으며, 시설전체(예천노인전문요양원, 유천재가지원센터, 주간보호센터, 제1고향의 집, 제2고향의 집)를 찬찬히 둘러보며 어르신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져보기도 했다. 반갑게 맞아주시는 어르신들을 보며 같이 웃고 인사하며 훈훈한 분위기가 이어졌으며, 수성대학교 측에서 후원해 준 케이크, 떡, 음료수, 과일 등으로 푸짐한 자리를 만들어 학생들과 직원들이 같이 둘러 모여 질의응답시간도 가져 보았다. 요양보호사 자격에 관한 질문과 근무여건 등 여러 질문들이 오고 갔으며 학생들의 견학 소감도 들어 볼 수 있었다. 학생들은 "요양원이 처음이라 잊지 못할 좋은 견학이 되었고 특히 너무 깨끗하고 직원들의 표정도 아주 밝아서 훗날 부모님을 모셔도 안심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반용부 원장은 "학생들 모두 진정한 사회복지사인이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오늘 견학이 좋은 밑거름이 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5-11-27 오후 10:34:51)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