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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213;윤건차(6)-윤경원-윤경의(1)(祝예묵회)
작성자장병창 @ 2015.12.13 06:15:31

   예천의 자랑(4213) : 윤건차(6)-윤경원-윤경의(1)(附 예묵회, 9일 제14회 서화전...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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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건차 : 일본의 동아시아 인식(日本의 東아시아 認識) [學術저널]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논문으로, 역사문제연구소에서 2000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 : 한국의 일본지성 수용의 문제점(韓國의 日本知性 收容의 問題點 [赦罪와 妄言사이에서]와 [國家主義를 넘어서]를 中心으로) [專門記事]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기사로, 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사)에서 1999년 8월에 발행한 <역사비평> 1999년 가을호(통권 48호) 386~401쪽(16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 : 일본 역사학의 한국관에 대한 진지한 성찰(日本 歷史學의 韓國觀에 對한 眞摯한 省察 『日本의 論理 』(정재정, 현음사)) [專門記事]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기사로, 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사)에서 1998년 8월에 발행한 <역사비평> 1998년 가을호(통권 44호) 395~403쪽(9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 : 일본의 사회진화론과 그 영향(企劃2 : 社會進化論 收容의 比較史的 檢討 : 日本의 社會進化論과 그 影響) [專門記事]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기사로, 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사)에서 1996년 2월에 발행한 <역사비평> 1996년 봄호(통권 34호) 313~324쪽(12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 : 그 유랑의 세월 일본땅의 조선인, 그 학대와 차별의 역사(特輯2 : 海外同胞 移民哀史, 그 流浪의 歲月 日本땅의 朝鮮人, 그 虐待와 差別의 歷史) [專門記事]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기사로, 역사문제연구소(역사비평사)에서 1991년 8월에 발행한 <역사비평> 1991년 가을호(통권 16호) 204~218쪽(15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 :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그 이후(日本의 歷史敎科書 歪曲 그 以後) [專門記事]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기사로, 우리교육(초등)에서 1990년 8월에 발행한 책 55~61쪽(7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 :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그 이후(日本의 歷史敎科書 歪曲 그 以後) [專門記事]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기사로, 우리교육(중등)에서 1990년 8월에 발행한 <중등우리교육> 1990년 8월호(통권 제6호) 55~61쪽(7쪽 分量)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 : 歷史認識を考える [學術저널]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2007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 : 왜 한․일 양국에 이 문제를 제기하는가(왜 韓․日 兩國에 이 問題를 提起하는가 =韓․日兩國になぜこの問題を提起するのか) [學術저널] : 지보면 신풍리 출신 윤건차(尹健次, 1944- , 日本 神奈川大 敎授)의 논문으로, 한일민족문제학회에서 2002년에 발행한 책에 수록되어 있다.(daum 2009)

 

  윤건차(<파워인터뷰> “日本, 天皇制 廢止해야 眞正한 民主化 된다” : 윤건차 日 가나가와大 敎授) [記事] : 재일교포 2세 학자인 윤건차(70) 일본 가나가와(神奈川)대 교수가 최근 방한,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재일동포가 이야기하는 일본과 한국’에 대해 연속 세 차례 특강을 해 관심을 끌었다. 윤 교수는 해방 전 일본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자이니치(在日·재일 조선인을 일컫는 일본어)라는 자의식을 갖고 살아온 지식인이다.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던 20대 때 우리말을 독학하며 한국 및 일본의 역사와 사상을 연구해온 그는 ‘현대 한국의 사상’ ‘현대일본의 역사의식’ 등의 저작을 펴내며 주목을 받아왔다. 특히 2000년 국내에 번역된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은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로 나뉜 1980∼1990년대 한국지식인사회의 풍경을 객관적으로 그려낸 명저로 평가된다. 지난 10월 10일 서울대 특강 후 서울 시내 덕수궁에서 만나 그가 보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시대 일본의 동향과 한·일 관계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서울대 국사학과 특강 때 일본사회의 과제를 천황제 폐지로 제시해 놀랐다. 그게 가능하다고 보는가?  =“가능하지 않다.”  ♦그럼 왜 과제로 제시했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얘기한 것이다. 일본사회의 과제는 천황제와 조선 문제라는 것을 부각시키려고 한 얘기다. 일본이 천황제를 하고 나서 조선을 침략한 거니까 천황제와 조선 문제 해결은 일본의 과제다. 우리의 과제는 남북통일, 즉 분단을 극복하는 것이다. 남북분단의 기본원인은 일본군의 한반도 주둔에서 찾을 수 있다. 연합군이 일본군을 무장해제 하러 한반도에 진주하면서 분단이 됐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우리의 첫 과업은 통일이고, 두 번째는 천황제를 없애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일본인이 아니니 다른 말로 일본의 민주화라고 말하면 된다. 그게 바로 천황제 폐지를 뜻한다. 우리나라의 문제는 통일이다. 다만 통일은 민주적으로 해야지 무력으로 하면 안 된다. 재일교포는 사실상 분단시대를 사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통일이고, 그것은 일본과 한국, 북한 그리고 재일사회의 민주화에서 시작된다.”  ♦천황제와 조선 문제를 일본의 과제로 제시하는 것은 새로운 시각이다?  =“천황제와 조선은 일본사회의 사상적 과제다. 자이니치 입장에서 볼 때 천황제는 메이지(明治)유신 이후부터 본격화한 것인데 서구열강들이 들어오니 식민지화를 피하려고 천황을 데려와 거기에 정치, 경제 모든 것을 집중시키고 충성하게 하려는 구조를 만든 것이다. 뭉쳐서 싸우겠다는 것이다. 천황을 핵심으로 한 민족공동체를 이뤄 서구 열강에 대해 저항한다는 논리인데 그것이 순식간에 침략의 방향으로 나갔다. 조선과 중국 등을 침략한 것이다. 천황은 일본이 주변국을 침략하는 과정에서 일본 사람들의 정신세계에 깊이 뿌리 내리게 됐다. 천황이 직접 한 것이라기보다 주변에 있는 정치인들이 천황을 이용한 것인데 그게 일본사회의 특징이 된 것이다. 패전 때 일본인 병사와 민간인이 350만 명, 중국 등 아시아인이 2000만 명 죽었다.”  ♦패전에도 불구하고 천황제가 2차대전 이후에도 존속된 이유를 무엇이라고 보는가?  =“2차대전 전범 아돌프 히틀러 등은 다 죽은 반면, 천황은 천수를 누렸다. 미군이 들어왔을 때 미국에서는 천황 퇴위론이 제기됐는데 미 군정은 그렇게 하려면 100만 명의 군대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일본인 마음속에 천황이 들어 있기에 그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곧바로 미국과 소련이 대결하는 냉전 시대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천황을 이용해 일본을 종속시키고 동맹군을 만드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해 천황을 살린 것이다. 그러니 원수가 아니라 상징으로 존속시킨 것이다.”

 

  ♦존재하나 통치는 하지 않는다는 상징으로서 천황을 규정한게 평화헌법인데?  =“일본 헌법 1조에 ‘천황은 일본국의 상징’이라고 기술돼 있다. 그리고 9조에는 국제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군대를 두지 않겠다고 돼 있다. 천황을 살리되 전쟁은 못하게 한 게 일본의 평화헌법이다. 그런데 천황제는 정치시스템으로만 있는 게 아니라 공무원 조직이나 군대, 회사에 모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위에서 지시하면 복종해야 하고 자기주장을 하면 안 되고, 저항해도 안 된다는 것이 일본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 한국 사람들은 항상 싸우며 이견을 제시하는데 일본에서는 그런 게 불가능하다. 천황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사람들은 이런 관념을 옛날부터 계승해왔다는 점에서 저항하지 않는다.”  ♦일본사회에서 일본이 민주화하려면 천황제가 폐지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  =“소수지만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학자들인가?  =“학자라기보다 시민운동가, 글을 쓰면서 활동하는 지식인 운동가들이 그렇게 주장한다.”  ♦정치인들은 어떤가?  =“야당조차도 그런 얘기는 안 한다. 옛날 일본 공산당이 그렇게 주장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천황제 얘기를 안 한다. 일본인들 마음속에 깊이 뿌리박힌 천황제를 부정하면 의회에 들어갈 수 없으니 얘기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럼 소수의 사람이 천황제 폐지를 얘기하는 셈인데 천황제를 신줏단지처럼 여기는 극우세력은 어떤 집단인가?  =“극우는 사회가 어지러워지고 경제가 힘들어질 때 피해의식을 갖고 제일 약한 고리를 공격한다. 그것이 바로 재일 조선인이다. 일본사회에서 눈에 보이는 제일 약한 사람들은 조선인밖에 없다. 외국인노동자가 있긴 하지만 고정된 집단이 아니고, 장애인이 있지만 신체적인 약자에 대해선 공격하기 어려우니 사회적 존재로서 약자는 조선인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건드리는 것이다. 극우파들의 주장에 대해 다른 사람들이 문제 제기를 안 하니 자꾸 목소리가 커지고 언론에서 이들의 주장을 받아주니 영향이 커 보이는 것이다.”  ♦아베 정부가 워낙 우경화로 치달으니 극우파들의 목소리도 커지는 것 같다. 한·일 문제를 고민해온 분으로서 아베 정권을 어떻게 보는가?  =“아베 정권에 대해선 말하기가 어렵다.”  ♦아베 정권에 대해 말하기 어렵다고 선을 긋는 그에게 “아베시대 한·일관계에 대해선 어떻게 보느냐”고 바꿔 물었더니 “아베 같은 사람과는 대화하거나 교류할 필요가 없다”며 이렇게 얘기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것도 일본이고 조선을 식민지로 만든 것도 일본이다. 그런데 아베는 침략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그런 사람과는 사귈 수 없다. 2000만 명을 죽인 나라의 정치책임자가 그런 침략 사실을 모른다고 하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직접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는데도 군 위안부에 대해서도 모른다고 한다. 또 한·일 간의 모든 것은 한일협정으로 해결됐다고 한다. 그런 주장은 역사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과는 사귀지 말아야 한다.”

 

  ♦그는 “역사를 부정하는 사람들과는 사귀지 않아도 된다”는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면서 “위안부 피해자들이 얘기하는 것은 들어줘야 한다”고 재차 강조했다. 그는 너무 톤이 센 주장을 했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곧 “다만 우리도 살아야 하니, 정치적 교류는 하지 않는 대신 경제적 교류나 무역만 하고 지내면 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청년 시절 경험을 쏟아냈다.  =“물론 내 얘기가 극단적으로 들릴 것이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제일 중요한 것을 부정하는 사람과는 얘기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부부도 서로를 인정하지 않으며 지낼 수 없듯 국가관계도 마찬가지다. 아베 같은 사람들에게 맞춰가며 살 필요는 없다는 거다. 재일교포는 그런 역사를 겪어왔다. 지금은 취직할 수 있게 됐지만,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만 해도 대학을 나와도 취직이 되지 않아 막노동을 하며 살았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온 존재다. 그러니 지금 좀 끊어져도 살 수 있다. 내가 대통령 같으면 주한일본대사관을 폐쇄하고, 항공편도 폐쇄하자고 말하고 싶다. 침략 사실을, 남북분단의 책임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얘기를 하나. 그들 때문에 전쟁을 했고 그들 때문에 몇백만 명이 죽고 희생됐는데… 그런 역사를 모른다고 하면 안 된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2기 정권은 민주당 정권 뒤에 들어섰는데, 민주당 정권이 다시 권력을 잡을 것으로 보는가?  = “그럴 가능성은 없는 것 같다. 일본정치는 나빠질 수밖에 없다. 다른 길이 없다.”  ♦당분간 그렇다는 얘기인가?  =“당분간이 아니라 쭉 나빠질 것으로 본다.”  ♦향후 아베 집권 동안 그렇다는 얘기인가?  =“아니 계속 더 나빠지고 사회 경제적으로 더 어려워질 것으로 본다.”  ♦엔저 효과로 경제가 살아난다는 얘기가 많은데?  = “그건 그저 환상에 불과하다. 일본경제는 어려워지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얘기가 지배적이다.”  ♦야스쿠니(靖國)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보는가?  =“우리는 야스쿠니 분사를 요구하고 있는데 그 요구를 계속하면 된다. 위패가 그곳에 있다 없다 해서 뭐가 달라지지는 않지만 정신적인 문제이니 요구를 지속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고 본다.”  ♦내년은 한일협정 50주년이자 해방 70주년인 해인데 한·일 양국이 어떤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보나?  =“현 상태는 뭐가 잘 될 수 없는 구조다. 50주년, 나아가 70주년 기념사업을 안 해도 된다. 다만 우리가 일본 측에 뭔가 문제 제기를 하고 그런 것을 역사로 남기고 가면 된다.”  ♦한국정부나 사회가 자이니치에 대해 뭘 해야 할까?  =“남북분단, 남북대립 상태이니 한국정부가 북한에 대해 할 수 있는 건 제한돼 있지만 재일교포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고 했더니 그는 “이것은 반드시 써달라”면서 재일교포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요즘엔 한국 국적자가 대부분이지만 조선 국적인 사람들, 말하자면 무국적자들도 여전히 몇만 명이 있다면서 한국정부가 큰 틀에서 이들을 포용해 줄 것을 당부하며 이같이 말했다.  =“김대중·노무현정부 때에는 그런 무국적자들도 모두 한국에 올 수 있었다. 모두 다 입국 증명서를 냈다. 동포니까. 재일교포는 조국이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에서 양쪽 다 갈 권리가 있는 사람들이다. 뭐 때문에 조국에 못 가느냐. 어떤 사람은 북을, 어떤 사람은 남을 조국으로 볼 수 있다. 양쪽에 다 친척이 있다면 다 갈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 그런데 한국정부가 조선 국적을 가진 사람들에 대해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는다며 적대시하고 한국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다. 한국정부가 그래서는 안된다.”

 

  ♦이명박정부에 이어 박근혜정부도 그렇게 한다는 얘기인가?  =“그렇다. 간첩사건 때문에 그렇다고 하는데 그런 사람이 간첩활동을 할 수 있다고 보지 않는다. 이미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는 거듭 “한국정부가 그런 사람도 포용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면서 “김대중·노무현정부 때 그 사람들에게 입국증명서를 줬는데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또 하나, 재일교포 자녀들이 공부하는 학교, 예컨대 오사카(大阪)의 국제코리아 학원처럼 중립적인 학교에 대해서는 지원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제언했다.  ♦조총련계 학교에 대해선 정부가 공식 지원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물론 어려울 것이다. 그렇지만 조총련계 학교에 대해서도 기본적인 교육이 진행될 수 있는 정도는 도와줬으면 한다. 한국정부가 하기 힘들다면 민간에서라도 나서서 교육을 지원해야 한다.  ♦재일 조선인, 즉 자이니치들이 냉전 시대 틀에서는 핍박을 받고 남한·북한·일본 사이에서 고생하며 살아온 것은 사실인데, 글로벌 시대에는 자이니치에 대한 생각이 좀 달라지는 것 아닌가.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글로벌 노마드 개념을 제시하며 “글로벌 시대에는 이민자처럼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고 했다. 자이니치는 글로벌 시대를 준비해온 냉전 시대의 노마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자이니치는 옛날에 취직도 못 할 정도로 차별을 당했다. 요즘에는 대학교수도 되고 다른 분야에서도 대부분 잘 되지만 여전히 은행 취업은 제한된다. 자이니치는 일본 이름을 쓸 것을 요구당하고 의식도 그렇게 강요된다. 탈냉전 시대 들어 좋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자이니치 3세, 4세들은 대부분 가족이나 출생 문제로 비슷한 고민을 하게 된다. 일본인과 똑같지 않다는 데서 오는 고민, 일본의 머저리티 집단과 다르다는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다고 마이너리티라고 해서는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뭔가 정체성 문제를 분석하려면 자이니치라는 표현을 쓸 수밖에 없다. 자이니치는 다른 말로 하면 민족이다. 그러니까 민족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다. 요즘 세대는 민족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래도 제1 정체성은 민족, 자기 출생의 내력이나 이력, 뿌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본이든 북한이든 미국이든 자기의 역사를 자각해야 하는데 그것은 역사의식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그래야만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어떻게 나가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글로벌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이니치로서의 정체성 문제는 남아 있다는 얘기인데?  =“정체성 문제는 남아 있다. 재일교포 1세는 조국이라는 고향이 있다. 자기가 자라난 곳이 있기 때문이다.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늘 조국과 고향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런데 나는 2세로서 그런 감정은 없다. 그렇다고 내가 태어난 교토를 고향으로 얘기할 수 있나 하면 그렇지도 않다. 내 마음이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러면 어떻게 얘기하나?  =“할 수 없이 고향을 말할 때엔 아버지 고향인 경북 예천을 얘기한다. 그런데 그곳에는 아주 옛날 한 번밖에 가보지 못했다. 그러니 상상의 고향이다.” ♦예천에서 왔는데 교토(京都)에서 태어났다고 얘기한다는 건가?  =“교토도 그렇게 고정된 고향은 아니다.”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교수는 한 인터뷰에서 강상중 세이가쿠인(聖學院)대 학장 덕분에 일본사회에서 자이니치에 대한 관심이 일본사회에서 높아졌다고 얘기한 적이 있는데?  =“강상중은 일본사회에서 인기 있는 학자지만 극단적으로 말하면 자이니치를 버린 사람이다. 천황제와 조선 문제가 일본의 문제라는 얘기를 하지 않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 얘기를 하면 일본 언론이 상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런 면에서 그는 일본 언론과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려는 사람이다. 제 경우 8, 9년 전만 해도 아사히(朝日)신문에서 글을 써달라고 했는데 요즘에는 더 이상 그런 요청이 오지 않는다. 천황제 폐지 얘기를 하는데 어떻게 청탁을 하겠나.”  ♦자이니치 지식인 중에서는 선생님이 제일 적극적으로 일본의 문제를 얘기하는 것 같다?  =“재일 조선인 문제를 얘기하는 사람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이제 마지막 단계다.”  ♦요즘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자이니치 정신사를 쓰고 있다. 80% 정도 썼다.”  ♦자이니치 정신사에 대해 정리하겠다는 의지를 갖게 된 동기는?  =“우리는 재일 조선인으로서 남한·북한·일본 등 3개의 나라 사이에서 살고 있다. 그런 상황을 정확하게 정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년이 한일기본협정 50주년이고 해방 70주년이니 한 시대가 마감되는 상황이다. 내가 쓰지 않으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재일교포 1세대가 거의 없어지는 상황인데 2세로서 1세를 잘 알고, 1세대를 이해하는 사람으로서 정리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들었다. 내가 마음먹고 쓰지 않으면 자이니치 역사를 남기기 어려운 상황이 된다. 책이나 자료로는 전체상을 볼 수 없는 상황이니 예부터 들어온 얘기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자료는 언제부터 모았나?  =“언젠가 쓸 것이라 생각해서 10년 전부터 모았다. 벌써 100명 이상 구술을 했다. 밀항한 사람을 찾아내 구술을 하는 게 어려운 일인데 그런 일을 오래전부터 해왔다. 소설가의 경우 작품은 결과물이다. 그런데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고 어떤 생활을 했고, 어떤 배경에서 그런 작품을 썼는지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그런 것을 정리해왔다. 물론 여러 사람이 부분적으로 해온 것은 많다. 이번에 내가 종합적으로 하려는 것이다 .”  ♦혼자 하기는 어려운 방대한 작업인데?  =“물론 어렵다. 그렇지만 나는 제자가 없다. 그래서 혼자 한다. 하나의 모토를 갖고 지속적으로 자료를 발굴하고 구술하고 글을 쓰는 것이다.”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 연구도 혼자 했는가?  =“그렇다. 그 책을 집필할 때 3명 정도가 도와줬지만 책임은 혼자 져야 하는 것이니까 혼자 했다고 볼 수 있다.”  ♦100명을 인터뷰 했으면 기초 구술작업은 끝난 것 같은데?  =“아직 남아 있다.”  ♦얼마나 더 할 건가?  =“재일 정치범을 더 해야 한다. 1970년대 많은 재일 유학생이 (한국 정부기관에) 붙잡혀갔다. 그 유학생들이 어떤 고생을 했는지를 쓰려고 한다. 자이니치 사상사, 자이니치 고뇌사, 자이니치 고투사가 될 것 같은데 그런 투쟁은 본국과의 권력관계에서 나온 거니까 유학생들을 체포했던 한국의 기관 소속인사들의 얘기도 듣고 싶은데 관련자들이 말을 하려 하지 않아 참으로 어렵다.”  ♦육영수 여사를 저격한 문세광 씨도 포함되나?  =“문 씨에 대해서는 쓸 수가 없다. 이런 사건이 있었다고 써야 하는데 배경이나 역사적 사실을 알 길이 없다. 오사카에 살고 있다는 그의 가족과 형제들에게 물어봐야 하는데 그 사람들에게 물어봤자 아무것도 말하지 않을 게 뻔해 쓸데없는 일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일본 명문 교토대와 도쿄(東京)대를 졸업한 뒤 37세 때 가나가와대에 채용돼 교수가 됐다. 이 대학에서 33년 동안 가르쳤고 내년에 정년퇴직을 한다. 일본의 주류지식인 사회에 동화되지 않고 자이니치 지식인으로서 독보적인 세계를 만들어왔다는 게 경이롭다고 했더니 “나는 자이니치의 중심이 아니다”고 말했다. 그럼 누가 중심이냐고 물었더니 “그런 것은 없다”고 단답형으로 답했다. 과거의 힘들었던 시절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가나가와대에서는 어떻게 견디셨나?  =“학교에서는 수업만 했고 쓸데없는 얘기는 바깥에서 했다.”(웃음)  ♦어떤 것을 가르쳤나?  =“한국 문제와 역사 문제를 가르쳤다.”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만의 지적인 세계를 만들며 살기가 어려웠을 텐데?  =“나는 가만히 혼자서 일을 해왔다. 그러니 다른 일은 못 했다. 사람이란 혼자 일을 할 때 제일 어렵다.” (인터뷰 = 이미숙 國際部長 文化日報 2014-11-14)

 

  윤건차(윤건차 敎授는… 23歲 때 ‘가갸거겨’ 獨學 … 詩集 펴내기도) [記事] : 1944년 교토(京都)에서 태어나 교토대와 도쿄(東京)대에서 교육학을 전공했다. 현재 가나가와(神奈川)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저서로 ‘현대일본의 역사의식’ ‘일본 - 그 국가·민족·국민’ ‘한·일 근대사상의 교착’ ‘교착된 사상의 현대사’ 등이 있다. 1997년과 2001년 방한해 서울대 교육학과와 국제지역원에서 초빙교수로 강의를 한 바 있다. 지난 10월 서울대 국사학과 초청으로 ‘재일동포가 이야기하는 일본과 한국’ 3회 연속 특강을 했다. 그는 이번 인터뷰를 우리말로 했다. 유년시절 집에서 부모님이 하는 대화를 들었을 뿐 정식으로 배우지 않았다는 그에게 어떻게 우리말을 그렇게 잘 하느냐고 했더니 겸연쩍은 듯 “아닙니다” 라고 말하며 이렇게 답했다. “자이니치로서 정체성을 고민할 무렵이던 23, 24세 때 한국어를 독학했다. 대학원에 들어가면서부터 ‘가 갸 거 겨’하며 혼자 외우며 익혔다. 그 당시는 한·일관계가 나빠 한국어를 어디서 배우기도 어려웠다. 말은 자유롭게 하지만 글은 이메일을 쓰는 정도다.” 그는 대학교수가 되기 전 10년간 무역회사에 다녔다고 했다. “취직이 안 되니 공부를 계속했고, 대학원 진학 후에도 무역회사에 다니며 박사논문을 썼다”고 했다. 그가 37세 때 도쿄 인근의 가나가와대에 취직이 됐다. 이 대학에서 줄곧 역사와 사상, 교육문제를 가르쳐온 그는 그간 13권의 저작을 펴냈고, ‘겨울의 숲’이란 제목의 시집도 펴냈다. 저술가 겸 시인인 셈인데 시집을 내게 된 동기를 물었더니 “시인이 됐으면 좋았는데 시가 더 어려운 것 같다 ”면서 “시작(詩作)은 여가생활”이라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경북 예천, 어머니는 경남 창녕 출신이다. 부모님에 대해 물었더니 “아마 공부하고 싶어 일본에 건너오신 것 같은데 교토에 정착한 뒤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자그마한 장사를 하며 지낸 것 같다”며 엷게 웃었다.(文化日報 2014-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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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원(윤경원 氏 포스텍 化學 博士學位 取得) [記事] : 개포면 태생의 윤경원(33) 씨가 포스텍 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기초과학연구원 복잡계자기조립연구단 우수연구상을 수상했다. 윤경원 씨는 경진초등, 예천중, 대창고, 고려대학교 신소재화학과를 졸업했으며, IBS 복잡계자기조립연구단, 포스텍 화학과에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 윤씨는 “고향 어르신들의 큰 관심과 사랑에 깊은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며 “더 열심히 공부해 고향 예천과 국가의 이름을 높이는 과학자가 되어 그 은혜를 갚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현재 고향 개포면에는 부모님(윤창수(63), 전외분(59))이 거주하고 있으며, 부모님은 소백산 쑥돈영농조합법인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醴泉新聞 2014년 12월 26일 (금) 10:1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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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경의 : 조선왕조실록/ 순조 25권, 22년(1822 임오 / 청 도광(道光) 2년) 10월 3일(갑진) 3번째 기사/ 이덕현 등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경상좌도 암행 어사 김정균이 서계를 올리다/ 경상좌도 암행어사 김정균(金鼎均)이 서계(書啓)를 올려, 동래 전 부사(東萊前府使) 이덕현(李德鉉), 영천 전 군수(永川前郡守) 이덕빈(李德彬), 풍기 전 군수(?基前郡守) 이귀성(李龜星), 영덕 전 현령(盈德前縣令) 박제상(朴齊尙), 영산 전 현감(靈山前縣監) 이해존(李海存), 용궁 현감(龍宮縣監) 윤복의(尹復誼), 칠곡 부사(漆谷府使) 유득원(柳得源), 봉화 현감(奉化縣監) 한종운(韓鍾運), 창녕 현감(昌寧縣監) 이준수(李俊秀), 진보 현감(眞寶縣監) 엄저(嚴著), 청도 군수(淸道郡守) 정동면(鄭東勉), 예천 군수(醴泉郡守) 윤경의(尹景儀), 군위 현감(軍威縣監) 이정간(李正幹), 양산 전 군수(梁山前郡守) 신석림(辛碩林), 영양 전 현감(英陽前縣監) 박이현(朴彛鉉), 좌병사 이민수(李民秀) 등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논하니, 모두 경중에 따라 처벌하게 하였다. 또 인동 부사(仁同府使) 구재철(具載哲)의 치적을 논하니, 승서의 은전을 시행하라고 하였다. 별단에 군정(軍政)·전결(田結)·환상(還上)의 세 가지 폐단과 관방(關防)의 허술함과 역로(驛路)의 피폐 등에 대해 개진하였는데, 묘당으로 하여금 좋은 방도를 채택하여 시행하라고 하였다./【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21장 B면 /【영인본】 48책 209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軍事) (daum 2014)

 

  윤경의 : 조선왕조실록/ 純祖 25卷, 22年(1822 壬午 / 청 도광(道光) 2年) 10月 3日(甲辰) 3번째 기사/ 이덕현 등의 다스리지 못한 정상을 경상좌도 암행어사 김정균이 서계를 올리다/ ○慶尙左道暗行御史金鼎均書啓 : “論東萊前府使李德鉉, 永川前郡守李德彬, ?基前郡守李龜星, 盈德前縣令朴齊尙, 靈山前縣監李海存, 龍宮縣監尹復誼, 漆谷府使柳得源, 奉化縣監韓鍾運, 昌寧縣監李俊秀, 眞寶縣監嚴著, 淸道郡守鄭東勉, 醴泉郡守尹景儀, 軍威縣監李正幹, 梁山前郡守辛碩林, 英陽前縣監朴彛敍, 左兵使李民秀不治之狀,/ 竝令從輕重勘處。 〔又〕論仁同府使具載哲有治績, 施以陞敍之典。 別單: 陳軍、田?、三(弊)〔弊〕及關防虛?、馹路凋弊等事, 令廟堂, 從長採施。/【태백산사고본】 25책 25권 21장 B면 /【영인본】 48책 209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군사(軍事) (daum 2014)

 

  윤경의 : 승정원일기/ 순조 21년 6월 30일 (무신) 원본2142책/탈초본110책 (28/57) 1821년 道光(淸/宣宗) 1년/ ○ 李禹錫爲昌陵令, 趙在修爲司饔直長, 鄭東老爲禮賓直長, 鄭東老爲內贍直長, 金熙臣爲密陽府使, 尹景儀爲醴泉郡守, 廣興主簿單李憲英, 軍資直長單李普澈, 南履煥爲司僕主簿, 宋在誼爲禮賓直長, 韓季?爲禁府都事, 趙雲會爲翼陵令, 任希季爲安城郡守, 金鎔爲?城郡守, 沈魯榮爲廣州判官, 安廷喜爲知禮縣監, 李海慶爲咸悅縣監, 李漢奎爲司宰直長。 (dau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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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묵회, 9일 제14회 서화전...축하합니다.

 

  예묵회(第14回 醴墨會 書畵展) [冊] : 예묵회에서 2015년 12월 9일부터 11일까지 예천군문화회관 전시실에서 전시한 작품집으로, 28쪽, 서화, 30cm이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초대의 글(정옥자 예묵회 회장) =3/ 격려사(이현준 예천군수) =4/ 축사(이철우 예천군의회의장) =5/ 축사(정희융 예천문화원장) =6/ 安堂 南貞順의 畵 =7/ 佳恩 柳玉秀의 畵 =8/ 芝谷 邊國花의 書畵 =9/ 召和 鄭玉子의 書畵 =10/ 一星 鄭仁子의 書畵 =11/ 幽亭 金大娥의 書畵 12/ 仙和 洪承璉의 書畵 13/ 浦栗 辛碩煥의 書 =14/ 淸南 高正珠의 畵 =15/ 蓮華 趙金子의 書 =16/ 省潭 金在植의 書畵 =17/ 芝涯 金美淑의 書畵 =18/ 眉山 尹昇熙의 書畵 =19/ 梅隱 張英子의 畵 =20/ 守黨 鄭義杰의 書畵 =21/ 靖軒 權在和의 畵 =22/ 幽泉 全炳琸의 書畵 =23/ 芝香 權在鳳의 書畵 =24/ 娥蓮 金容姬의 畵 =25/ 지도강사 權丞世의 書畵 =26/ 예묵회 연혁, 수강생 모집 =27/ 예묵회 주소록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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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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