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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4226) : 윤상(5)(附 *예천초등학교 대통령기 독서대회 3부분에서 모두 최우수상 수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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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만년(晩年)에 정치하는 일에 피로하시어 모든 정무(政務)를 전하에게 위촉하시고 한가로이 즐겁게 휴양(休養)하면서 우연히 불당(佛堂)에서 중들에게 잿밥 먹인 일이 있었던 것인데, 전하께서는 어찌해서 즉위(卽位)하신 지가 한 달이 되지 못하였는데도, 도리어 선왕(先王)의 만년(晩年)의 실수를 본받고 선왕(先王)의 정력을 쓰셨던 시대와 태종(太宗)의 성규(成規)를 본받지 않으십니까? 《시경(詩經)》에 이르기를, ꡐ시초가 있지 않은 이는 없으나 종말이 있는 이가 적다.ꡑ고 하였으니, 시초를 근신하지 않는데 신 등은 그 종말이 어찌 될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통곡할 만한 것이 이 일입니다. 또 후궁(後宮)이 머리를 깎는 것은 신 등이 더욱 더 마음이 상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태종(太宗)께서 승하(昇遐)하실 때에 후궁(後宮)이 머리를 깎으려고 하는 이가 있으므로, 대행 대왕(大行大王)께서 옳지 않다고 하여 이를 중지시켰었는데, 지금은 어찌 그렇지 않고 마침내 계액 초방(桂掖椒房)128) 으로 하여금 도리어 방포(方袍)129) 가 거처하는 곳으로 삼아서 사망(邪妄)의 화(禍)를 궁중(宮中)으로부터 인도하게 되니, 신 등은 매우 전하를 위하여 애석하게 여깁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과단성 있는 결단을 널리 발휘하시고 여러 사람의 심정(心情)을 굽어 따르셔서 이익이 없는 비용을 빨리 중지시키고 후궁(後宮)이 여승(女僧) 되는 것을 금지시켜 나라의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나라의 근원을 튼튼하게 하여 종묘(宗廟)․사직(社稷)을 편안하게 하소서.ꡓ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인하여 윤상(尹祥)과 삼관(三館)130) 등에게 전교(傳敎)하기를,ꡒ그대들의 말도 대간(臺諫)의 말과 다름이 없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6책 222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왕실-비빈(妃嬪) / *왕실-국왕(國王) / *정론(政論) / *재정(財政) / *건설(建設)/ [註 122]금중(禁中) : 대궐 안. ☞ / [註 123]정근(精勤) : 중들이나 무당을 모아서 간절히 기도하면서 빌던 일. ☞ / [註 124]묘침(廟寢) : 종묘(宗廟). ☞ / [註 125]진대(賑貸) : 재난이나 흉년(凶年)이 든 해에 나라에서 곡식을 풀어서 어려운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던 일. ☞ / [註 126]치화(治化) : 착한 정치로 백성을 교화함. ☞ / [註 127]거만(巨萬) : 많은 수량. ☞ / [註 128]계액 초방(桂掖椒房) : 후비(后妃)의 궁전. ☞ / [註 129]방포(方袍) : 중이 입는 도포. ☞ / [註 130]삼관(三館) : 홍문관(弘文館)과 예문관(藝文館) 및 교서관(校書館). ☞(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세종실록 109권/ 세종 27년(1445 을축 / 명 정통(正統) 10년) 8월 12일(계축) 1번째 기사/ 소격전에서 비를 빌어 내리게 한 동지중추원사 윤상에게 말을 하사하다/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 윤상(尹祥)에게 말 1필을 내려 주었으니, 일찍이 소격전(昭格殿)에서 비를 빌어 비를 내리게 한 까닭이었다. 이전에는 기우행향사(祈雨行香使)에게 제일(祭日)에 비가 오면 곧 말을 주었었는데, 이때에 와서는 비로소 가을에 이르러 주었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4책 632면/ 【분류】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왕실-사급(賜給)(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세종실록 112권/ 세종 28년(1446 병인 / 명 정통(正統) 11년) 5월 23일(경인) 3번째 기사/ 홍해․정분․황치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해(洪海)로 숭덕 대부(崇德大夫)를, 정분(鄭?)으로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을, 황치신(黃致身)으로 호조 판서(戶曹判書)를, 홍약(洪約)․이진(李?)으로 아울러 중추원 부사(中樞院副使)를, 안지(安止)로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윤상(尹祥)으로 예문 제학(藝文提學) 겸 성균 사성(成均司成)을, 변효문(卞孝文)으로 경창부 윤(慶昌府尹)을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4책 67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문종실록 2권/ 문종 즉위년(1450 경오 / 명 경태(景泰) 1년) 7월 28일(경오) 1번째 기사/ 나이가 연만하여 귀로한 자에게 달마다 음식물을 내리도록 하다/ 예조(禮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ꡒ나이 많은 사람을 존대하는 것은 고금의 통한 의리이다. 전 제학(提學) 윤상(尹祥)과 전 도절제사(都節制使) 박언충(朴彦忠)․전 참판(參判) 노귀상(盧龜祥)․전 중추(中樞) 전흥(田興)․전 부사(府使) 윤유한(尹柳漢)이 모두 나이가 찼으므로 치사(致仕)하고, 시골에 돌아가 만년을 보내고 있으니, 그 도의 감사에게 하유하여 소재지의 수령으로 하여금 백 세 노인의 예와 같이 달마다 식물(食物)을 보내게 하되, 매양 사맹삭(四孟朔)582) 을 당하여 보고하여 시행하고, 이제부터 만일 당상관(堂上官)이 연만(年滿)하여 귀로(歸老)한 자가 있으면, 또한 이 예에 의하여 시행하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6책 264면/ 【분류】 *윤리(倫理) / *인사-관리(管理)/ [註 582]사맹삭(四孟朔) : 매철 첫달. 정월․4월․7월․10월. ☞(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단종실록 3권/ 단종 즉위년(1452 임신 / 명 경태(景泰) 3년) 9월 13일(임인) 4번째 기사/ 유한과 윤상에게 선온을 하사하다/ 전(前) 부윤(府尹) 유한(柳漢)․전 제학(提學) 윤상(尹祥)이 모두 늙어서 시골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서울에〉 와서 회장(會葬)569) 하니, 그들이 돌아갈 때에 그 집에 선온(宣?)을 하사하였다. 유한은 무인(武人)으로 태종(太宗)의 지우(知遇)를 얻어, 본 벼슬에 제배(除拜)되었다. 나이가 80이 넘었으나 기력이 아직 건강하여 말을 타고 험한 길을 달려도 조금도 쇠(衰)하지 아니하였다. 윤상(尹祥)은 본래 예천(醴泉) 고을의 아전이었는데,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착하며 더욱 역학(易學)에 깊어서 오랫동안 사석(師席)의 장(長)이 되었으니, 당시에 이학(理學)570) 의 종(宗)으로 추앙(推仰)되었다. 다만 성품이 편벽(偏僻)되고 강(剛)하여 동렬(同列)과 더불어 동이(同異)를 강론할 때에 조금이라도 자기와 다름이 있으면 문득 서로 꾸짖고 비방하니, 식자(識者)들이 이를 결점으로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6책 537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註 569]회장(會葬) : 임금이나 2품 이상의 문무관(文武官)․종친(宗親)들의 장례(葬禮)에 각사(各司)의 관원과 친척들이 참여하던 일. ☞ / [註 570]이학(理學) : 성리학. ☞(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월 5일(정사) 2번째 기사/ 권준이 전 예문관 제학 윤상을 작질을 올려 관직에 재배하기를 청하다/ 대사헌 권준(權?) 등이 상소하기를, ꡒ신 등이 그윽이 듣건대, 나이가 많고 학식이 있는 이를 높이고 중하게 여기는 것은 국가의 아름다운 일이요, 스승이 되는 유자(儒者)를 높이고 예우(禮遇)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높은 다스림입니다. 전하께서 왕세손(王世孫)으로서 성균관(成均館)에 입학(入學)하였을 때에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 윤상(尹祥)은 박사(博士)가 되어 전하의 예(禮)를 받았는데, 전하께서 예물을 드리고 스승의 예(禮)로써 배례(拜禮)한 자는 조신(朝臣) 가운데에서 오직 윤상 한 사람뿐입니다. 지난번에 나이가 많다고 하여 향리(鄕里)로 사퇴(辭退)하였으나 총명은 줄어들지 않고 기력이 오히려 건장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특별히 은혜를 더하여 작질(爵秩)을 올려서 관직에 제배(除拜)하시고, 소재지(所在地)의 감사(監司)로 하여금 돈독하게 효유(曉諭)하여 떠나 보내도록 하여서, 성조(聖朝)에서 스승이 되는 유자(儒者)를 높이고 중하게 여기는 아름다운 뜻을 빛내게 하소서.ꡓ하니, 전지(傳旨)하기를, ꡒ너희들의 말을 내가 아름답게 여긴다.ꡓ하고,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6책 657면/ 【분류】 *사상-불교(佛敎)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단종실록 10권/ 단종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1월 7일(기미) 1번째 기사/ 황효원이 윤상은 나이가 많아서 다시 등용함은 어렵다 아뢰다/ 사인(舍人) 황효원(黃孝源)이 당상(堂上)2143) 의 의논을 가지고 아뢰기를, ꡒ무릇 사람들이 학업(學業)을 받은 다음에야 이를 스승이라 이르는데, 전하께서 입학(入學)하였을 적에 윤상(尹祥)이 다만 스승의 예(禮)을 받았을 뿐이니, 어찌 이를 스승이라 이를 수 있겠습니까? 또 윤상은 나이가 많아서 다시 등용하기 어려우므로, 이미 거주하는 고을로 하여금 달마다 주육(酒肉)을 보내 주게 하였으니, 국가에서 이를 대우함이 후합니다. 헌부(憲府)의 청을 윤허(允許)하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ꡓ하니, 그대로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6책 658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왕실-사급(賜給) / *왕실-국왕(國王)/ [註 2143]당상(堂上) : 의정부(議政府). ☞(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단종실록 12권/ 단종 2년(1454 갑술 / 명 경태(景泰) 5년) 8월 28일(정미) 2번째 기사/ 전 예문 제학 윤상에게 옷을 내려 주다/ 전 예문 제학(前藝文提學) 윤상(尹祥)에게 옷 한 벌을 내려 주었다. 윤상은 치사(致仕)2690) 하여 예천(醴泉)에 사는데, 이때에 이르러 부묘(?廟)를 하례하기 위하여 내현(來見)하였다. 윤상은 일찍이 노산군(魯山君)이 입학(入學)하였을 때에 박사(博士)였기 때문에 이 명령이 있은 것이었다. 윤상은 학문(學問)이 정박(精博)한데, 더욱이 《역경(易經)》에 뛰어나고 시문(詩文)을 잘하며, 오랫동안 성균관(成均館)에 벼슬하여 학자(學者)들이 많이 스승으로 받들었다. 윤상은 하나하나 자상(仔詳)하게 사람들을 가르쳐 주며, 종일(終日)토록 정좌(正坐)하고 있었으나 일찍이 피로한 빛이 없었다. 당시에 김반(金泮)과 김말(金末)이 모두 숙유(宿儒)2691) 로서 사성(司成)2692) 을 겸(兼)하여 각기 소견(所見)을 고집하며 쟁론(爭論)하기를 서로 양보하지 않았으나, 학생(學生)들은 많이 윤상의 설(說)을 받들었다. 예천군(醴泉郡)에 살면서 여러 학생들을 가르치니, 사방의 학자들이 많이 그를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6책 706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 *사상(思想)/ [註 2690]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서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남. ☞ / [註 2691]숙유(宿儒) : 학식과 덕망이 높은 선비. ☞ / [註 2692]사성(司成) : 성균관 종3품 벼슬. ☞(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3월 7일(임자) 2번째 기사/ 전 지중추원사 이균실 등의 나이가 많으니 아들․손자 등을 가자하여 서용하다/ 이조(吏曹)에 전지(傳旨)하기를, ꡒ전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이균실(李均實)․전흥(田興), 전 지동녕부사(知敦寧府事) 김점(金漸), 전 참판(參判) 노귀상(盧龜祥)․유맹문(柳孟聞), 전 제학(提學) 윤상(尹祥), 전 부윤(府尹) 유한(柳漢)․이심(李審)은 모두 나이가 많으니, 그 아들․손자․아우․조카 사위[女壻] 중에서 1인에게 자원(自願)에 따라 가자(加資)하여 서용(敍用)하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7책 1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단종실록 13권/ 단종 3년(1455 을해 / 명 경태(景泰) 6년) 3월 9일(갑인) 3번째 기사/ 전 예문 제학 윤상의 졸기/ 전 예문 제학(藝文提學) 윤상(尹祥)이 경상도(慶尙道) 예천군(醴泉郡)에서 졸(卒)하니, 예관(禮官)3137) 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치제(致祭)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7책 19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註 3137]예관(禮官) : 나라에서 의식을 행할 때 예를 집행하는 관원. ☞(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한국사연구휘보/ 한국사연구휘보 제108호 / 제목 조선초기 성리학과 수양론의 인식 / 저자/편자 琴章泰 역자 시대 조선 / 게재지 宗敎學硏究 18 17~34쪽 페이지 구분 논문 / 발행처 서울大學校 宗敎學硏究會 발행지역 서울 발행일 1999 / [목차] : Ⅰ. 성리학과 수양론의 인식배경/ Ⅱ. 卞季良의 ꡐ中ꡑ과 수양론/ Ⅲ. 尹祥의 성리설과 수양론/ Ⅳ. 도학적 수양론과 독서법/ Ⅴ. 조선초기 도학의 성격(www.history.go.kr 2009)
윤상 [記事] : 한국사연구휘보/ 한국사연구휘보 제109호 / 제목 조선초기 性理學과 修養論의 인식 / 저자/편자 금장태 역자 시대 조선 / 게재지 宗敎學硏究 18 페이지 17~34쪽 구분 논문 / 발행처 서울大學校 宗敎學硏究會 발행지역 서울 발행일 1999/ [목차] : Ⅰ. 성리학과 수양론의 인식배경/ Ⅱ. 卞季良의 ꡐ中ꡑ과 수양론/ Ⅲ. 尹祥의 성리설과 수양론/ Ⅳ. 도학적 수양론과 독서법/ Ⅴ. 조선초기 도학의 성격(www.history.go.kr 2009)
윤상(尹祥) : 자 실부(實夫), 호 별동(別洞), 생졸년 1373 (공민왕 22) - 1455 (단종 3), 시대 조선 전기, 본관 예천(醴泉)/ 활동분야 교육/사상 / 학자 / 학자, 문신, 과거 및 취재 [문과] 태조(太祖) 5년 (139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동진사(同進士) 2위/ [상세내용] 윤상(尹祥)에 대하여 : 1373년(공민왕 22)∼1455년(단종 3). 조선 초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예천(醴泉). 초명은 철(哲). 자는 실부(實夫), 호는 별동(別洞). 예천군의 향리인 선(善)의 아들로 태어나서 과거를 통하여 양반신분으로 올랐다. 향리 역(役)에 종사하면서 퇴식(退食)을 오가는 사이에 솔기름을 취하여 몰래 숨겨두었다가 밤에 책읽기에 쓸 정도로 끈기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성리학에 밝은 조용(趙庸)이 1392년(태조 1)에 역성혁명을 반대하여 예천에 유배되자, 조말생(趙末生)·배강(裵?) 등과 함께 수업하여 그 문인이 되고, 그해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이듬해에 생원시에도 합격하였다. 1396년(태조 5) 24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안동·상주 및 한성 서부 등지의 교수관(敎授官)을 거쳐, 예조정랑 때 서장관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와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가친이 연로하여 외직을 청하여 황간·영천(榮川)·대구 등지의 군사(郡事)를 맡은 뒤, 사성을 거쳐 대사성에 발탁되었다. 1448년(세종 30) 예문관제학으로서 원손(元孫: 단종)의 입학례를 거행할 때 특명으로 박사가 되어 선비들이 이를 영예로 여겼다. 오랫동안 성균관의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그 문하에 과거에 합격하여 이름난 사람들이 많았다. 문종 초에 고령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되니, 국왕이 사궤(食饋: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음식물)를 내렸는데, 고령으로 은퇴하는 재상에게 궤물(饋物)을 내리는 제도는 이에서 비롯되었다 한다. 향리에서 자제들을 가르치다가 3년여 만에 83세로 일생을 마쳤다. 조용을 통하여 정몽주의 학통을 이은 그는 특히 세종대에 성균관 교육에 종사함으로써 왕조 초기의 중앙학계에 성리학의 기운을 진작, 유지시키는 데 기여하였으며, 개별적으로는 김숙자(金叔滋)에게 《주역》을 가르쳐 정몽주 계열의 도통(道統)에 학문적으로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에 밝았을 뿐 아니라 문장에도 매우 능하였다. 저서로는 《별동집 別洞集》이 있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海東名臣錄, 筆苑雜記(daum 2010)
윤상 : 성명 윤상(尹祥), 시호 문정(文貞), 이명 철(哲), 자 실부(實夫), 호 별동(別洞) , 별동(?洞) , 악한(樂閒)/ 성명 : "윤상(尹祥)"에 대한 용례/ 전거 용례/ 國朝編年v09 强云許天使見之益加歎服東皐集補遺○許天使又問東方亦有能知孔孟心學箕子疇數者退溪錄示高麗禹倬鄭夢周本朝尹祥金宏弼鄭汝昌趙光祖李彦迪徐敬德等○退溪又論?齋金宗直非學問底人終身事業只在詞章之上又曰寒暄堂金宏弼之/ 國朝彙鑑v1 生員郭琦等上疏言前大司成金洋爲師儒二十餘年誨人不倦今雖年老請命還處函丈用慰多士之望上從之復命依文廟朝尹祥例賜米二十斛時泮貧不能自資門人申叔舟李石亨等常以米酒饋之/ 國朝彙鑑v1 二年春正月大司憲權?上疏言前藝文提學尹祥當殿下入學之時爲博士殿下所執贄而待以師禮者也?以年老辭退于鄕宜特加恩數進秩拜官祥氣力尙健聰明不減令所/ 紀年便攷v6 尹祥/ 紀年便攷v6 尹祥醴泉人善子字實夫初名哲號?洞又樂閒趙庸門人以醴泉縣吏雖在?役劇務不輟伊吾太祖壬申進士癸酉生?丙子文科/ 紀年便攷v7 依古制八歲入學遂?定制博士尹祥/ 紀年便攷v7 金末義城人定宗己卯生太宗丁酉十九明經科與金鉤金泮同被尹祥。選爲?監?祥泮經?頗有異同不相上下世宗朝掌?人多年成就人才博通經史?邃性理之學 成宗甲寅卒年八十六/ 紀年便攷v7 金鉤慶州人或云牙山人字直之號歸山尹祥門人太宗丙申以生員登親試官止判中樞?人醇謹禮學?尹祥後一人繼長成均博聞過與金泮金末同時被選於祥??監/ 紀年便攷v7 金鉤慶州人或云牙山人字直之號歸山尹祥門人太宗丙申以生員登親試官止判中樞?人醇謹禮學?尹祥後一人繼長成均博聞過與金泮金末同時被選於祥??監誨人不倦時?三金泮先逝鉤與末年踰八?官?一品入耆社謚/ 紀年便攷v7 善山人進琯子恭讓王己巳生初名滋中字士培號江湖散人吉再門人 太宗甲午司馬世宗己亥文科官止司藝受業於吉再尹祥?事小學明於易義放情丘壑?誨後進東方之學自叔滋而再傳至金宏弼?理學領袖性至孝居家事親皆?小學?子弟初/ 紀年便攷v7 守令勤慢○命刊高麗全史廣布中外○命百官團領???皇朝制照品穿着仍賜宗宰七十二人?各一疋○命前藝文提學尹祥月致食物祥在醴泉令所居官月致食物退老宰相之食物致之自祥始○上酌獻子文廟○命?臣妻年老者月致酒肉○梁誠/ 震乘總v1 親臨錫宴慰之賜鞍馬賜視疾醫衣一襲銀帶笠靴上見補泣下沾衿補亦泣酒?宗親皆起舞上亦起舞還宮夜已半矣○以尹祥爲大司成字實夫官參贊生有異質聰悟逈出及爲是任諸生爭先?衣耳提面授終日??不倦一時達官聞人皆其弟子國/ 見睫錄v2 尹祥字本醴川縣吏也太祖丙子登第學問精博授胄監敎誨諄切國朝以來爲師範之最室至參贊號別洞本傳/ 小華龜鑑v1 柳方善號泰齋國初進士主簿遭家禍不第訓進後學多出公卿徐居正韓明澮權擥皆其門人申穡號?軒尹祥號別洞以縣吏登第同成均掌敎?名賢多出門下玉沽號凝溪掌令安東精舍宋愉號雙淸堂進士克己子○後孫尤庵同春/ 歷代帝王紀年v01 醴泉人明於性理之學尹祥其門人也/ 歷代帝王紀年v01 退溪詩曰性理淵源未易明襄陽稱道二公名如何製術無傳後若傳高山獨感情蓋指趙庸尹祥二公也/ 國朝捷錄v01 尹 祥/ 文獻攷略v15 村權近梅軒權遇兄弟能明經學又能於文近定四書五經口訣又作淺見錄入學圖說第書羽翼之功不少其後任函丈者黃鉉尹祥金鉤金末金泮鉉之學無聞祥最精而能知作文鉤與末皆精而末則未免於固滯常時議論不相上下爭之不已受業者亦兩備/ 國朝人物志v1 太宗丙申文科判中樞院事嘗爲大司成訓誨不倦國朝榜目我朝立國之初任函丈者黃鉉尹祥金鉤金末金泮而鉉之學無聞祥最精而稍知作文鉤與末俱精而末則未免於固滯常時議論不相上下爭之不/ 國朝人物志v1 城人精於性理之學以生員太宗丁酉文科判中樞院事入耆社世宗朝掌敎成均館儒生與尹祥同在經旨討論頗有同異後爲世祖所重甲戌卒諡文長師友錄金鉤金末金泮皆博通經/ 國朝人物志v1 遂綴其端曳之而出由是名振天下稱以五歲神童而不名年十三受語孟詩書于金泮受易禮諸史于尹祥世宗文宗相繼禮陟端宗幼沖遜位時習年二十一方讀書三角山中乃大哭悉燒其書因亡(daum 2010)
윤상 : 김남일의 儒醫列傳 68/ 尹祥(1373~1455)/ ‘鄕藥救急方’의 跋文을 쓴 儒醫/ 인생에서 운이라는 것은 중요한 삶의 요소이다. 그러나 운만 기다리는 사람에게 행운이 따르는 것은 아니다. 운과 노력이 모두 뒷받침되어야 진정으로 성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물로 尹祥을 꼽을 수 있다. 조선 초기에 활동한 尹祥은 鄭夢周의 학통을 잇고 있는 학자로서 과거에 급제한 후에 교육과 관련된 업무에 종사하였다. 尹祥이 출세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행운과 노력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예천군 향리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역성혁명에 반대한 鄭夢周의 제자 趙庸이 예천으로 유배를 오게 되어 그로부터 性理學을 전수받아 과거에 급제하여 조선 초기에 이름을 떨친 인물이 된 것이다. 1396년에 과거에 급제한 후 선산, 안동, 상주, 한성 등의 敎授官이 되었고, 예조정랑 때에 서장관으로 燕京에 다녀와서 성균관사예가 되었다. 1448년에는 특명으로 박사가 되어 선비들의 귀감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특히 오랫동안 성균관에서 교육에 종사하여 그의 가르침으로 과거에 합격한 인물하여 이름을 떨친 인물이 많았다고 한다. 그의 저서로 ‘別洞集’이 있다. 이 책의 2권에는 고려시대 醫書인 ‘鄕藥救急方’의 跋文이 나오는데, 이것은 그가 의학에 밝았기 때문이다. 그는 性理學의 기초인 易學에 밝았는데, 이것은 의학연구와도 이어진 것이다. ‘鄕藥救急方’의 跋文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鄕藥救急方은 매우 神驗함이 있다. 이 책에 싣고 있는 모든 약들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쉽게 알고 얻을 수 있는 약물들이며, 약물의 배합법과 복용법도 또한 일찍이 경험한 것들이다. 서울이나 큰 도시에는 의사가 있지만, 궁벽한 시골이나 후미진 고을에 사는 사람들이 위태로운 지경에 처하여 병세가 매우 긴박한 때 진실로 이 方書만 있다면 扁鵲이나 醫緩을 기다릴 필요 없이 사람마다 모두 구제될 수 있을 것이다.”/ 김남일(daum 2010)
윤상 : [한시산책] 윤상(尹祥)의 칠언절구/ 오늘은 윤상(尹祥)이라는 분의 칠언절구를 소개합니다. 시의 주제는 오랜 벼슬길에서 물러나는 당대의 명재상 황희(黃喜)선생을 기리는 내용입니다. 첫구와 다음 구에서 같은 글자를 겹쳐서 자신의 소회를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題 : 次 領議政黃相國乞骸詩 (차 영의정황상국걸해시)/ 盛 業 巍 巍 冠 百 揆 (성업외외관백규)/ 孤 忠 耿 耿 奉 天 ? (고충경경봉천안)/ 縱 然 嫌 老 歸 休 計 (종연혐노귀휴계)/ 其 奈 宸 衷 重 泰 山 (기나신충중태산)/ 눈부신 업적 홀로 높아 백관의 우두머리요,/ 빛나는 충심으로 언제나 임금을 받들었나니,/ 늙음이 싫어 설령 물러나 쉬고자 한다 해도,/ 임금의 마음에는 공의 존재 태산같이 높으리./ <어휘> : 乞骸 : 벼슬을 사직함, 百揆 : 백관의 으뜸가는 벼슬로 당시는 영의정을 일컬음, 孤忠 : 외로운 충성(忠誠), 남이 따라올 수 없는 충성심, 耿耿 : 빛남, 뛰어남, 天顔 : 임금의 얼굴 곧 임금을 지칭, 縱然 : 가령, 설령, 嫌老 : 늙음을 혐오함, 其奈 : 어찌하든, 어떻든, 宸衷 : 임금의 마음/ <지은 이> : 윤상(尹祥, 1373-1455), 자는 實夫(실부), 호는 別洞(별동). 경북 예천의 별동리에서 출생하다. 24세(조선 태조5년)에 문과에 급제후 주로 지방에서 유생들에게 학문을 가르치는 교수(敎授)의 직을 수행하다. 43세(태종 15년)에 형조와 예조의 정랑(正郞)을 거쳐 명나라에 서장관(書狀官)으로 다녀오다. 세종 11년(57세)에 성균 사성(司成), 63세에 大司成(대사성), 65세에는 집현전의 知製敎(지제교)를 맡아서 학문의 진흥에 노력하였다. 공의 나이 70세에 물러나기를 청하였으나 세종께서는 이를 허락지 아니하고 72세에 예문관 제학(提學), 이듬해에는 동지중추원사의 직을 제수하였다. 공은 78세에 벼슬에서 물러나기까지 유학의 진흥과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큰 선비로서, 향년 83세로 별세하였다.(구능회 客員 文化저널21 2009/02/23 [14:43])(daum 2010)
윤상 : 윤별동 선생의 침착성과 참을성/ 이 이야기가 전하는 곳은 경북 예천군 보문면 미호리이며 이야기의 주인공 별동(別洞) 윤상(尹祥, 1373~1455) 선생은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이며 대학자인데, 그에 대한 일화(逸話)가 다음과 같이 전해오고 있습니다. 미호리에는 조선 세종 때 대사성(大司成)까지 역임하고 유림(儒林)의 종장(宗匠)으로 추앙(推仰)받은 윤별동(尹別洞) 선생을 모신 사당(祠堂)이 있으며, 마을 앞을 흐르는 내성천(乃城川)은 낙동강(洛東江)의 상류(上流)로 맑고 넓은 백사장(白沙場)이 명사십리(明沙十里) 펼쳐 있는 미호유원지(眉湖遊園地)로 인근의 등산코스와 자연휴양림(自然休養林)이 있는 학가산(鶴駕山)이 바라보이고 있습니다. [장지문에 얹혀 있는 물그릇에 담긴 침착성] : 별동 선생이 아직 젊었을 때, 예천군 관아(官衙) 사또(員) 밑에서 일을 보고 있을 때였는데 어느 여름날 윤상이 보통 인물이 아닌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또가 그의 침착성을 시험하기 위하여 그가 모르게 장지문 위에 물을 한 그릇 떠서 올려놓고, "지금 소나기가 쏟아져 들어오니 급히 장지문을 내리라"고 그에게 명(命)하였습니다. 한참 지난 후에 "장지문을 전부 내려놓았습니다."라고 사또에게 보고하니, "장지문 위에 아무 것도 없더냐?"고 물었습니다. 그는 서슴없이 "장지문 위에 물이 한 그릇 얹혀 있었습니다." 하고 대답을 하니 사또는 다시 "그러면 장지문 위에 물그릇이 있는 것을 어떻게 알았지?"하고 되물었습니다. "장지문을 내리기 전에 장지문 위를 막대기로 훑어보니 막대기 끝에 무엇이 닿기에 공상을 놓고 올라가 보니 물이 한 그릇 있어서 조심하여 물그릇을 내려놓고 장지문을 내려서 닫았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윤상의 침착성에 탄복한 사또는 그 후 모든 일을 마음 놓고 그에게 맡겼으며 크게 출세(出世)할 인물임을 알았다고 합니다. [거위의 죽음을 면케 한 참을성] : 윤상이 먼 길을 가던 중, 날이 저물어 어느 주막에 들게 되었습니다. 주막에 앉아 밖을 내다보고 앉았노라니, 주인의 손자인 듯한 대여섯 살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구슬 한 개를 가지고 대문 밖에 나가서 놀다가 그만 구슬을 손에서 떨어뜨리자 그 때 마침 아이의 옆에서 먹이를 찾던 거위가 구슬이 먹이인 줄 알고 널름 집어삼키고 말았는데, 한참 후 주인집에서는 야단법석이 났습니다. 아기가 가지고 있던 구슬은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던 가보(家寶)로 여기던 것으로 구슬이 없어졌으므로 큰일이었습니다. 그 때 이 주막에 있는 손님은 윤상 한 사람밖에 없었으니 구슬을 훔쳐간 것으로 의심받아 막무가내로 내놓으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내일 아침까지만 기다려주면 찾아 준다고 하였지만 계속 실랑이를 하자, 주인은 하인들에게 시켜 그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관가에 끌고 가려고 하였습니다. 이때 윤상은 태연한 자세로 저기 있는 거위도 다리를 새끼로 매어 멀리 못 가게 내 옆에 같이 있게 해주면 내일 아침 식전(食前)까지 틀림없이 구슬을 돌려주겠다고 주인에게 사정하였습니다. 주인은 그의 말에 반신반의(半信半疑)하였지만 이미 날도 저물고 하였으니 그렇게 하겠노라 하면서도 그가 밤새 달아날까 싶어 기둥에 꽁꽁 묶어 놓고는 그 옆에 새끼로 다리를 묶은 거위를 함께 묶어 놓고서는 날이 새기를 기다렸습니다. 이튿날 날이 밝자, 윤상 옆에 다리가 묶인 거위는 똥을 누게 되었고, 따라서 어제 저녁에 주워 먹은 구슬도 함께 따라서 나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윤상은 주인을 불러서 거위의 똥 속에서 구슬이 있으니 찾으라고 하였습니다. 구슬을 찾은 주인은 묶은 줄을 풀어주면서 백배사죄(百拜謝罪)하면서 "거위가 구슬을 먹은 줄 알면서 왜 그런 말을 하지 않고 밤새도록 묶여 고생하였느냐"고 물었습니다. 윤상은 허허 웃으면서 "거위가 구슬을 먹었다고 하면 급한 마음에 어제 당장 구슬을 찾기 위하여 주인장께서 그 거위를 죽였을 것이니 내가 하룻밤만 고생하면 구슬도 찾고 거위도 죽이지 않을 것이 아니요"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침착성과 참을성을 가지고 모든 일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윤상은 마침내 높은 벼슬도 하였고 큰 학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단종(端宗) 임금께 큰 절을 받은 윤상] : 영조 때 어사(御使) 박문수(朴文秀, 1691~1756)가 경상도 북부지방인 안동, 순흥(順興), 예천의 원님들과 영주 부석사(浮石寺) 누마루에서 연회를 벌였을 때의 일입니다. 원님들을 수행하던 이속(吏屬)들은 누마루 아래에 있었는데 그 중에서 안동사람이 뽐내면서 “안동이 최고”라고 뻐겼습니다. 이에 맞서 순흥 사람이 "우리 고을 옛 어른인 안 문성공이 안동부사로 갔을 때 너희 할아버지들이 발을 씻겨 드렸으니 순흥이 안동보다 더 낫다"고 자랑했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예천사람이 "그 까짓게 대수냐? 우리고을 별동 선생은 단종(端宗) 임금이 입학할 때 세종(世宗) 임금을 모신 자리에서 큰절을 받았으니 예천이 최고"라고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런 말을 누마루 위에서 듣고 있던 박 어사가 세 고을 원님들을 불러서 "연회에서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니 어서 돌아가서 저들의 다툼을 판결하십시오. 그러나 내가 생각건대 예천이 가장 최고인 것 같소."라고 했답니다. 이 이야기는 정조·순조 때에 걸쳐서 이루어진 "연조귀감" 이라는 책에 실려 있습니다. ※ 이 이야기는 안동을 비롯한 경북북부지역에서 전승되고 있습니다. ※ 박장영 님은 현재 전통문화콘텐츠박물관에서 학예실장으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출처] 윤별동 선생의 침착성과 참을성 - 박장영(安東넷 2009-06-19 오전 1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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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초등학교 대통령기 독서대회 3부문에서 모두 최우수상 수상...축하합니다.
예천초등학교(醴泉初, 第35回 國民讀書競進大會에서 優秀한 成績 거둬 : 初等部, 어머니部, 一般部(敎師) 最優秀賞 受賞) [記事] : 예천초등학교(교장 김영한)는 대통령기 ‘제35회 국민독서경진대회’에 초등부, 어머니부, 일반부(교사) 단체 및 개인부문에서 최우수상을 대거 수상하는 영예를 이뤘다. 이번 대회는 독서생활화운동 정착을 위해 치러졌으며 자유 독서 후 독후감을 제출하는 방식으로 지난 9월 4일까지 공모하였다. 본교는 예천군 새마을문고 주최로 치러진 대회 참가를 위해 초등부, 어머니부, 일반부(교사)의 우수독후감을 엄선하여 응모하였다. <초등부> 단체 최우수, 개인 최우수 3-5 김보미, 우수 4-2 윤채은, 5-1 박정원/ <어머니부> 단체 최우수, 개인 최우수 임정은, 우수 정분선, 우수 윤정온/ <일반부(교사)> 단체 최우수, 개인 최우수 엄수범, 우수 조규원/ 초등부 최우수상을 받은 김보미 학생은 “평소 독서활동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글쓰기활동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라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김영한 교장은 “독서는 인성을 가꾸고 창의력을 키우는데 최고의 원동력이 된다.”고 하며 “앞으로도 예천초등학교는 인성과 지혜를 갖춘 인재를 기르기 위해 다양한 독서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醴泉뉴스 2015.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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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