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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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4271) : 윤천봉-윤천탁-윤치문(1)(附 예천여자고등학교 심마니 동아리, 30일 최우수 포스터논문상 수상...축하합니다/남예천농협 박두현·김옥희 부부, 2일 이달의 새농민상 수상...축하합니다/이현재 예천불교대학 학생회장, 26일 조계종 총무원장상 수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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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천봉('내故鄕 지킴이 活動 뿌듯' : ◇ 윤 천 봉(내故鄕지킴이 代表)) [讀者投稿] : 지금 내가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자연환경과 맑고 푸른 강과 산은 내 것이 아니라 잠시 우리가 빌려 쓰는 것으로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데로 후손들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고민을 하고 있던 나에게 마침 한국농어촌공사 예천지사가 추진하는 `내고향 지킴이'라는 단체가 새로 조직된다는 소식을 듣고 조금의 망설임 없이 참여하여 활동을 시작하였다. `모두가 꿈꾸는 농촌, 우리가 만듭니다'라는 슬로건 아래 환경정화 활동, 시설물 모니터링 및 유지관리, 환경정화 활동, 봉사와 나뭄 활동, 농업정보 공유, 4대강 홍보 등 우리 예천지역에는 46명의 지역주민이 `내고향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지난 2년여 간 `내고향 지킴이'로 활동하면서 국토청결운동으로 저수지, 하천주변 등 환경정화 행사를 하였다. 특히 4대강사업으로 추진되는 저수지 둑높이기 현장과 농경지리모델링 현장을 방문하여 시공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수행함과 동시에 저수지 둑높임으로 풍부한 수자원 확보하여 하천유지수를 방류함으로서 소하천 수질이 개선되고, 농경지 리모델링으로 저지대 농경지에 하천준설토를 성토하여 침수예방이 된다는 걸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4대강사업이 끝난 후에도 `내고향지킴이'가 농촌지역 여건에 맞도록 다양한 활동방안을 마련하고 추진하여 우리 농촌지역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지킴이의 한사람으로서 “우리 모두가 꿈꾸는 농촌, 풍요와 행복이 넘치는 내고향 예천”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다.(醴泉新聞 2012년 11월 29일 (목) 09: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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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천탁 : 승정원일기/ 정조 8년 9월 27일 (기묘) 원본1567책/탈초본84책 (27/51) 1784년 乾隆(淸/高宗) 49년/ ○ 李時秀, 以禮曹言啓曰, 今番上言回啓, 皆以草記爲之事, 命下矣。觀此各人等上言, 則盈德幼學申東煥, 以其七代祖?年, 壬辰倭亂時, 爲義兵將, 與釜山僉使鄭撥, 同時立?事, 援引權士敏·李彭壽追奬之例, 至請旌褒, 而士敏·彭壽, 旣有刊行考據之文蹟, 故事雖在於久遠, 褒固宜於追施, 而至於?年, 則渠所稱刊布縣誌, 旣難準信, 其家呈狀, 便屬私言, 今不可以子孫之褒揚, 輕施恩典。興德進士金澳, 以其七代祖鍊玉, 在丁酉, 赴死於忠武公李舜臣露梁之戰陣, 而其妻梁氏, 又赴水而死, 其子命彦, 亦投身以從, 一門之內, 忠烈俱備, 請蒙褒嘉之典矣。誠如其言, 果有其時可信之文跡, 一道士林之公議, 則事雖久遠, 不宜泯沒。忠州幼學林栽復, 以其五代祖亨業, 當丙子之亂, 手抱母柩, 得免傷害, 被拘虜庭, 能全素節, 請蒙旌褒之典, 而亨業, 乃故將軍慶業之弟, 則其忠其孝, 旣有所自, 或旌或贈, 非可?惜, 而言出遠裔, 事在年久, 莫重恩典, 有難輕許。竝令各該道道臣採取實蹟, 參互己見, 論理狀聞後, 更爲稟處。載寧進士梁道厦爲其父故學生弼成, 天性至孝, 父病而三斷指血, 親歿而七?猶慕, 里鄕欽歎, 士論齊發, 至入於道伯, 故判府事臣兪拓基及李天輔之狀褒, 自先朝至有除職之特敎, 則可見其實行之有足憑信, 特許旌閭之典, 以示激勸之意。安岳私奴馬也之爲其主金?, 以天生盲人, 孝養其母, 行乞四隣, 求得盂飯, 養志便身, 始終如一, 及其母之死, 負土植木, 大風暴雨, 不離墳側, 年前本道道臣, 至有據實褒聞之擧, 雖承復戶之恩典, 而猶以未蒙旌閭, 有此呼?矣。盲人至孝, 旣異凡民, 本道登聞, 可驗實狀, 而金?今若生存, 則生前旌閭, 事係稀罕, 有難輕施, 令該道道臣採其虛實, 査其存歿, 更爲論理狀聞後稟處。安東幼學邊達遠, 以其父死孝於其祖, 其母殉節於其父, 兩世孝烈, 俱合旌褒爲言, 而一道章甫, 見方齊?於今道伯云, 則亦必有實行之可以考信者。谷城幼學金德普爲其母自割股肉, 以愈其夫之病, 冬月得?, 以療其父之腫, 至譬於古人氷魚寒筍, 而一縣人士, 亦方齊?於本道道臣云。眞若有可紀之實行, 則或旌或復, 亦可爲激勸遐俗之道, 竝令該道臣據實狀聞後稟處。忠州幼學沈民秀爲其母盡孝於舅姑, 從死於其夫云, 而別無表異之實跡。西原幼學卞至中爲其父盡孝於其祖父母, 而雜入夢語, 語涉荒誕。康津幼學文震謙, 稱其父孝行, 以爲斫指延壽, 求魚療病, 無愧古人云, 而此等稱道, 便成例談。安岳幼學宋匡振爲其母事其夫盡禮, 居喪哀毁。黃州騎士朴夢說爲其父斫指?血, 事親能孝。機張幼學朴東學等, 爲其同縣金鳳儀孝行, 平山幼學金漢鳳等, 爲其同府故學生金玧孝行, 醴泉幼學尹天鐸等, 爲其同郡高有完孝行, 文義幼學柳東植等, 爲其同縣故士人吳尙健三世孝行, 竝聯名上言, 至請旌褒之典, 而以他人稱揚同縣人之行誼, 雖與子孫之私言有異, 旣有該邑之守, 該道之臣, 則呈狀而訴其實蹟, 轉聞而許以旌褒, 事體當然, 其何敢猥徹天聽, 自犯于恩之罪乎? 此路一開, 後弊難防, 無論本事之虛實, 俱不當聽施, 方當同慶之日, 旣係遐遠之人, 則無足深責, 雖不請勘, 上言內辭緣, 一竝置之, 何如? 傳曰, 允。盈德幼學申東煥事, 興德進士金澳事, 忠州幼學林栽復事, 安東幼學邊達遠事, 竝依草記, 各令道伯從速據實狀聞, 以爲褒奬之地。載寧進士梁道厦父弼成孝行, 兩故相褒狀, 足爲憑信之端, 況有先朝除職之敎, 特許旌閭, 實合敦風勵俗之道, 卽令道伯棹楔後狀聞。安岳私奴馬也之爲其主金?, 有此上言, 蓋?以盲人, 孝行如此, 殊極可嘉, 今若生存, 令該曹施以加資之典, 或己身故, 特爲旌閭, 形止, 先令道伯狀聞。忠州幼學沈民秀, 西原幼學邊至中, 康津幼學文震謙, 朝家旣聞之後, 不可仍以置之, 令該道題給米布後, 狀聞, 可也。 (daum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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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치문(尹致文) : 1866(고종 3)-1894(고종 31), 유천면 화지리 출신, 본관은 파평, 용훈(龍勳)의 아들, 용력(勇力)이 절륜(絶倫)한 장사(壯士)로 1888년(고종 25) 4월 무과(武科)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헌부 감찰(1892)을 지내고, 유천면 화지리 고향으로 물러나 동학(東學)에 몰입하고, 동학농민군(1894)의 앞장을 서서 화지접(花枝接)을 마련하고 제폭구민(除暴救民)을 위해 활약하다가 예천읍으로 진격할 때(1894.음 8월 28일) 전사(戰死)하고 동학군의 세력도 예천 지방에서 쇠퇴하였다. 그의 가족은 문경군 산양면 위만리(渭滿里)로 피난가서 그의 대고모와 여동생이 출가한 후에 유천면 고산리(孤山里)에 돌아왔다.(醴泉郡誌 1988)
윤치문 : 사헌부 감찰을 지낸 예천의 군사 지도자 윤치문, 증손 영식/ 대상인물 윤치문(尹致文) : 1866~1894. 파평 윤씨. 경상도 예천군 유천면 고산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 지도자. 갑오년 이전 무관 직임을 역임. 1887년 충무위 부사용으로 임명되는 교지를 받고, 1888년 무과에 급제한 뒤에는 벼슬이 올라 1892년 6월 사헌부 감찰에 임명된다. 향리에 내려와 있던 그가 동학에 들어가는 배경은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농민군 조직에서 중요한 역할 을 맡고 군사활동에 앞장선다. 예천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합세하여 읍내를 공격하던 1894년 8월 28일(음) 굴머리 전투에서 전사한다./ 증언인물 윤영식(尹英植)/ 예천 가계도/ 정리자 신영우/ 출전 전봉준과 그의 동지들/ 동학농민전쟁의 중심지는 전라도와 충청도 땅이다. 각 군현에서 동학군들이 무장을 하고 모여서 잘못된 사회제도를 고치는 동시에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려는 목표를 가지고 벌떼처럼 일어났다. 치열한 싸움이 곳곳에서 벌어졌다. 경상도에선 모든 군현에서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북서부 일대와 남서부 지역에서는 동학농민군이 민보군·관군·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움을 벌였다. 예천도 그러한 곳의 하나이다. 동학 조직에 모인 농민들의 세력은 강대해서 보수지배층을 압도했고, 관아는 힘을 잃었다. 그러자 읍내에 있는 향리와 양반들이 집강소를 만들어 민보군을 결성하고 관아의 기능을 대신해서 동학농민군을 견제했다. 예천집강소는 일본군과 싸우려고 무기와 군량을 수집하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화적 행위로 간주하였다. 그래서 읍내 부근에서 활동하던 동학농민군을 체포하여 처형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이 때문에 외촌의 동학 조직과 읍내의 집강소는 날카롭게 대치하였다. 힘이 장사였던 윤치문은 예천군 유천면 일대에서 활약한 동학농민군의 선봉에 섰다. 예천에서 드물게 중앙정부의 실직을 역임한 윤치문이 왜 동학에 들어갔을까? 그 까닭은 명백하다. 일본군이 갑자기 경복궁을 습격해서 국왕을 위협하고 정권을 자의로 세웠다는 소식은 조선 사람들을 격분시켰다. 이때 젊은 무관으로서 궁궐을 출입했던 윤치문은 일본군과 싸울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당시 최대의 무장세력인 동학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후손들은 그러한 자세한 사정을 모른다. 우선 집안 내력부터 들으면서 당시 사정을 추적해본다
지금까지 선대에서 물려받은 교지와 호적단자를 소중히 보관하고 있습니다. 이게 우리 증조부님이 선략장군 충무위 부사용(宣略將軍 忠武衛 副司勇)이 되신 교지입니다. 이것은 통훈대부(通訓大夫)로 사헌부 감찰에 임명된 교지이지요. 감찰로 일하셨을 때 사헌부 관리들과 같이 정사에 참여해서 활동한 문서도 있습니다. 임진년 6월이라고 씌어 있지요. 경상도의 명문 양반가의 각 문중에서 지금까지 간직해온 고문헌들은 대개 논어, 맹자와 중국 시문이 기록된 책들이다. 선대에서 유학을 공부한 흔적들이다. 이와 함께 선대의 글을 모은 문집들도 많이 보인다. 예전의 생활상을 알려주는 문서류는 커다란 종이에 벼슬이름을 큼직하게 쓴 교지가 대부분이다. 어느 집에서는 기름을 먹인 교지를 여러 장 씩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 그러나 윤치문의 증손자 윤영식 씨가 제시하는 교지는 그 성격이 다르다. 종래 농민전쟁을 연구하면서 동학농민군을 주도한 층은 몰락양반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교지로 농민군 지도자 가운데 실직을 역임한 소장 관료층이 존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경상도 양반들은 19세기에도 여전히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다. 따라서 경상도에서 중요 벼슬을 한 젊은 양반이 동학에 들어가 활동한 사실은 새로운 관점을 가져야 할 것을 전해주는 것이다. 이 집안에는 재산도 적지 않았다. 제가 가지고 있는 땅은 증조부대에 가지고 있던 땅입니다. 그건 7대를 내려온 땅입니다. 저희는 파평 윤씨 판도공파(版圖公派)의 제학공파(提學公派)에 속해 있는데, 28세 되시는 양자 탁자 어른이 재산을 이루고 7대를 내려오도록 계기를 만들었지요. 제가 가지고 있는 호적단자는 모두 20매가 넘습니다. 건양 광무년이라고 쓴 것은 대한제국 때 만든 건데, 이것도 4매가 됩니다. 이 호적 단자는 희(喜)자 빈(彬)자가 호주로 되어 있지요. 5대조 할아버지입니다. 노비가 두 사람이 있다고 호적에 나와 있습니다. 고조부되시는 용(龍)자 훈(勳)자는 전답 팔십 마지기를 소유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선 적은 땅이 아니었죠. 화지와 고산 윤씨들은 대개 자작농인데 그 안에서도 적은 것이 아니지요. 이 땅은 제가 고스란히 물려받아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갑오년 이후에도 토지가 몰수되지 않아서 팔십 노인이 팔십 마지기 농사를 젊은 자부와 함께 지었지요. 일꾼 두 사람을 고용하고 동네 품을 많이 샀다고 합니다.
한 마지기가 2백 평이니까 팔십 마지기면 만 6천 평이지요. 5인 가족이 경작 가능한 면적은 서른 마지기 정돕니다. 저희는 논이 많아서 52마지기가 넘는데 유천면 성평과 고산에 많고 예천읍 치실, 실리, 한질꼬 등지에 있습니다. 밭은 22.5마지기인데 성평과 치실, 실리 등지에 있지요. 예천읍으로 되어 있는 실리는 유천면과 이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땅이 한데 모여 있어서 일하기에 편하지요. 산도 6천 평 되지요. 산 두 정보는 유천면 고산과 가동에 있고 또 실리에도 있어요. 윤치문이 서울에 가서 무과에 급제한 것은 1888년 4월의 일이다. 어떤 과정을 거쳐 경상도의 작은 고을 출신이 서울까지 가게 되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지만 무과 급제 이전부터 그는 종9품직 무관 벼슬인 충무위 부사용에 임명되는 교지를 받고 있다. 품계는 그보다 훨씬 높아서 종4품이었다. 또 충훈부 도사가 되기도 한다. 아마 힘이 장사였다고 하니 그 때문에 중용되었을 수가 있겠다. 저희 증조부님은 힘이 장사라고 해요. 전해오는 얘기를 들으면, 초가지붕을 새로 올릴 때 이엉을 얹지 않습니까? 볏짚을 길게 엮은 것을 둘둘 말아서 지붕에 펴서 얹어놓지요. 이 무거운 걸 혼자서 던졌답니다. 언젠가는 힘껏 던진 이엉이 볏짚은 다 빠지고 볏짚을 묶은 대만 올라왔다고 합니다. 이 붉은 교지는 증조부님이 무과에 급제한 걸 보여줍니다. ‘광서 14년 4월 교지 한량윤치문 무과병과 제팔백육십일인 급제 출신자(閑良 尹致文 武科丙科 第八百六十一人 及第出身者)’라고 씌어 있지요. 종4품은 꽤 높은 품계인데 어떻게 그리 높은 벼슬까지 올라가셨는지 저희는 모르지요. 이것은 무과에 급제할 때 쓰신 모자에 달았던 깃입니다. 또 이건 깎지예요. 활을 쏠 때 뼈로 만든 이 깎지를 씁니다.
유천면의 일가들은 윤치문의 집안을 감찰댁으로 부른다. 1892년 6월 사헌부 관리들이 정사에 참여한 명단에 윤치문의 이름이 나온다. 이와 함께 그의 후손 영식 씨가 자랑스럽게 내보이는 유품은 무과급제 할 때 사용했다는 길다란 깃하고 무관이 활을 쏠 때 착용했던 깎지이다. 깎지는 뼈로 만들어 하얀색이 도드라진다. 윤 감찰이 어떻게 동학에 들어가게 되었는지 이 문제도 잘 알 수가 없다. 후손의 말도 그렇다. 증조부님께서 동학에 들어 가셨다는 말은 전해 들어 알고 있는데 왜 들어가시게 되었는가는 우리도 잘 모르지요. 동학에 들어가서 활동하다 돌아가셨고, 증조부님이 돌아가신 후에 가족들은 피난을 가서 고생을 많이 하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증조부님은 예천 읍내로 들어가는 그 굴머리에서 벌어진 전투 중에 돌아가셨습니다. 굴머리 전투는 예천 일대의 동학농민군이 읍내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전투였다. 예천에서는 전라도와 달리 읍내의 향리들이 집강소를 설치하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민보군을 만들었다. 외촌을 장악한 동학과 읍내의 집강소는 서로 대립하다가 마침내 크게 충돌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의 읍내 점거는 실패하였다. 화지와 금당실 양쪽에서 협공하려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읍내를 방어하던 민보군의 반격은 완강하였다. 그 직후 일본군이 동학의 근거지를 기습한 까닭에 재기도 불가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동학에 들어갔던 사람들은 호된 보복을 받았다. 오래 살아왔던 터전에서 밀려나 사방으로 흩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고조부님은 증조모님하고 남은 가족과 함께 피난하셨지요. 저 깊숙한 곳으로 가셨어요. 산양면 위만리라고. 그때 고조부님에겐 아직 출가하지 않았던 따님이 있었어요. 저에겐 증대고모님이지요. 여러 해 동안 위만리에 사시면서 거기서 증대고모님을 시집보내셨다고 합니다. 화지와 고산에서 동학에 들어갔던 집들은 고난이 심했답니다. 읍내에서 와서 불을 지르고 다니고…. 그런데 다행히 이 집은 모면했지요. 바로 이 집이 우리 증조부님이 살던 집입니다. 집이 낡아서 고쳐지었지만 터는 그대로지요. 이 집에도 불을 놓으려고 왔답니다. 그런데 이웃에서 나서서 자기네 집이라고 하면서 불을 못 놓게 했답니다. 증조부님은 바로 이웃한 집과 담도 없이 한 집안과 다름없이 살아왔답니다. 피난 가서 있을 때도 이 이웃에서 지켜줬지요./ 갑오년 이후 동학에 대한 탄압은 곧 수그러들었다. 일제의 침략이 격화되어 나라의 사정이 갈수록 어려워진 까닭에 관청에서나 향반들이 동학 가담자를 탄압할 여력이 없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 윤치문의 가족들은 고향 마을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윤치문의 아버지 윤용훈은 1905년 재력을 이용해서 높은 품계를 받기도 한다. 지금까지 집안에 보존해온 칙명을 보면 정2품 가선대부로 올라가고 있다. 갑오년이 지나간 꼭 10년 뒤의 일이다. 영릉을 보축할 때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러한 증거로 그가 이전과 다름없이 사회활동을 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향 동네에서는 대접이 달랐다. 일부 사람들의 일이겠지만 동학에 들어가 마을에 피해를 입혔다는 이유로 해꼬지를 하려는 시도도 있었다고 한다. 윤치문의 젊은 부인 진주 강씨는 고난의 세월을 견디어야 했다. 홀로 시아버지를 모시면서 오직 어린 자식의 미래에만 모든 기대를 걸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야 했던 것이다. 물레와 길쌈이 그의 동반자였다.
저희 증조모님이 길쌈을 하던 베틀이 안채 옆에 있었지요. 지금은 베틀을 받치던 돌만 남아 있습니다. 참기 어려울 때는 허벅다리를 날카로운 나무로 찔렀다고 합니다. 저도 증조부님을 닮아서 그런지 성격이 강직합니다. 잘못된 일을 보면 참지 못하지요. 그래서 손해 보는 것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가 참으로 살기 좋은 나라가 되어야 하는데 갑오년에 저희 증조부님이 바라셨던 것이 그러한 나라가 아니었겠습니까? (daum 2014)
윤치문(尹致文) : 1866~1894. 파평인(坡平人). 가선(嘉善) 윤용훈의 아들. 용력이 절륜(絶倫)한 장사로서 고종 25년(1888) 무과 급제.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1892년 고향으로 물러나 동학에 몰입하고 고종 31년(1894) 동학농민군의 앞장을 서서 화지접(화지에서 접주)을 마련하고, 제구포신(除舊布新)을 위해 활약하다가 예천읍으로 진격할 때(1894. 8월 28일) 전사하고 동학군의 세력도 예천지방에서 쇠퇴하였음. 남쪽(화지)과 북쪽(용문)에서 함께 예천관아로 진격하기로 했었지만 왠 일인지 북쪽에서 내려오질 않았고, 화지접이 한천교에서 남쪽의 동학군 7000명이 몰살을 당했던 역사적인 곳이었음에도 기념비하나 세워지지 않았고 위의 윤치문 선생은 묘비하나 없는 현실이 마음 아팠다. 벼슬도 버리고 3족이 멸하게 되었던 꽃다운 스물여덟의 장렬한 죽음을 우리는 이리 푸대접해도 되는 것인지. 위의 첫번째, 두번째 사진은 동학군 12명이 관군에 의해 생매장 당했던 곳에 세워진 비석이고, 세번째 사진은 용문사에 있는 보물 제684호 윤장대(회전식 불경보관대-윤장대를 돌리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아래 두 사진은 '초간정'이라는 예천 권씨 초간 권문해선생의 정자이다. 권문해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대동운부군옥>을 저술했다. 겨우 왕릉에서 심부름하는 정도의 사람을 문화재청 다니는 사람이 왔다고 예천 쇠고기를 대접해 주시는데 몸둘 바를 모르겠더라는... 예천은 한우와 참기름이 유명하다고 한다. 쇠고기육회는 맛있게 먹었고 어느 분이 예천 참기름을 선물로 주셔서 들고왔다./ //cafe.daum.net/dlavlwnd33/ 임피중33 친구들!(daum 2010)
윤치문(尹致文) : 1866 - 1894, 경북 예천군 유천면 고산동(醴泉郡 柳川面 孤山洞) 출생. 본관 파평(坡平). 1888년 무과(武科)에 입격하고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의 관직을 받았다. 1894년 갑오동학혁명에 참가하여 이해 8월 민보군(民保軍·反東學農民軍)과의 "굴머리" 싸움에서 전사했다./ (daum 2010)
윤치문 : 사이버인권관 - 정보관/ ...)자 행범(幸範), 호 송은(松隱). 전북 부안군 진서면 진서리(扶安 郡 鎭 ..... 인권인물|동학혁명38. 윤치문(尹致文) (1866 - 1894) 경북 예천군 유천면 고산동(禮川郡 柳川面 孤山洞) 출생. 관 파평( ..... 인권인물|동학혁명.../ (daum 2010)
윤치문 : 1894년 8월 예천의 동학란 전투기록/ ...발각되어 체포되었다. 적들은 크게 고함을 지르며 이 포로들을 빨리 죽이려고 하였다. 그 가운데 윤치문(尹致文)이란 자가 대도를 뽑아 그를 베는 시늉을 하면 말하기를 , “너희들은 부중에서 순찰을 도는 병졸들인데 여기까지 왔다니.../ (daum 2010)
윤치문 : 예천군동학농민전쟁 : 제목 1894년 8월 예천의 동학란 전투기록./ 초 2일 병오 [初二日丙午] : 동도들이 사방 경계의 도로를 나누어 점거하여 상인들의 통행을 막아서 시장이 제 모습을 갖추지 못하였다. 초 3일 정미 [初三日丁未] : 동도의 기세가 날로 치솟았다. 마침내 군의 창고에서 조총·화약·연환(鉛丸)을 꺼내 부병에게 나누어주고 날마다 훈련을 시켰다. ○ 밤 이경(二更, 오후 9~11시)에 북부(北部) 용산(龍山) 사람이 급하게 보고하기를, “상주(尙州) 갈곡(葛谷)의 동도 6~7명이 갑자기 침입하여 노략질을 합니다”라고 하였다. 사람을 보내 구해 주고 3명을 잡아서 가두었다. ○ 밤 삼경(三更, 오후 11~오전 1시)에 북부 귀산(龜山) 사람이 급하게 보고하기를, “화적 수십 명이 각각 무기를 들고 밤을 틈타 노략질을 하고 몽둥이로 때려서 거의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하였다. 급히 부병 10명과 광천(廣川)의 민정(民丁) 수십 명을 징발하여 달려가서 구하도록 하였다.
초 10일 갑인 [初十日甲寅] : 축시(丑時, 오전 1~3시)에 본군의 병사가 적당(賊黨)을 추격하여 감천(甘泉) 《안동(安東) 땅에 속하며 예천군에서 동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다》의 경계에 이르자, 적들이 민가에 들어가서 휴식을 취하였다. 부병들이 사방을 포위하였으나 적들이 대도(大刀)와 철추(鐵鎚)로 맞서 싸워서 부병들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에 힘이 센 백재봉(白在鳳)·김태운(金太云)·배태산(裵太山)이 곧장 앞으로 치고 들어가서 칼을 쥔 자의 손목을 잡자, 그는 칼을 땅에 떨어뜨렸다. 이어서 그의 상투를 잡고 문 밖으로 던지자 여러 사람들이 그를 묶었다. 삽시간에 모두 11명을 잡고, 그들의 조총·환도·철추 등을 거두어 돌아왔다. 그리고는 곧장 그들에게 따져서 물었더니 그들은 다만, “일이 이미 여기에 이르렀으니 변명할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동인(東人)이다. 너희들이 우리를 죽인 뒤에 어찌 감히 살 수가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여러 사람들은 모두 격분하였다. 이때 둘러서서 바라보던 부병들 수백여 명이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화적을 섬멸하라는 조정의 명령과 감영의 지시가 이미 내렸는데 이와 같은 화적들을 어찌 잠시라도 살려둘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겹겹이 에워싸서 데리고 가서 모래사장에 묻었다. 이날에 군수는 감영(監營)에 보고하였다. ○ 금곡포덕소(金谷布德所)에서 통문을 보내 지난 밤 잡아간 적 11명을 석방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날에 답장을 써서 말하기를, “집강소를 설치한 것은 화적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또 순영문(巡營門), 감영으로부터 화적을 초멸하라고 신칙하는 감결을 받고 항상 살펴보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귀산동의 주민이 급보를 보내와서 병사를 보내 포위하여 적당 11명과 총·칼·철추 등을 포획하였다. 도적질한 흔적이 이미 드러나서 다시 논의할 것이 없었으며 거주지와 성명을 조사하는 것이 불필요하여 당일에 파묻어 죽였다. 지금 보내온 통문을 보건대 그 가운데서 귀접(貴接), 금곡의 도인(道人)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전혀 사리에 맞지 않다. 이른바 도인이란 자가 어떻게 밤을 틈타 타인을 겁략할 수가 있단 말인가? 도(道)와 적(賊)은 원래부터 구별이 있으니 그것을 혼돈하여 의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라고 하였다.
11일 을묘 [十一日乙卯] : 소야 접주가 유천 접주 조성길을 압송하고 그 죄안(罪案)을 기록해 보내면서, 이미 떠들썩하게 할안(割案)을 하였으니 마음대로 조치하기 바란다고 하였다. ○ 금곡에서 통문이 도착하였다. 그 내용에, “방금 저희 접소의 도인 몇 명이 파묻혀 죽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접소의 인원들을 일일이 점고하였더니 빠진 자가 5인이었습니다. 이에 문초할 때 초기(草記)한 성명을 베껴서 통문으로 보내 주시면 비교해 보는 자료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당일에 답장하기를, “도적질한 흔적이 이미 탄로가 났고 죄상이 모두 드러났다. 그래서 애당초 그 거주지와 성명을 조사하지 않았다. 어떻게 서로 비교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이해하기 바란다”라고 하였다. 감천 도평(道坪) 이종해(李鍾海)가 동생의 시신을 내어달라고 와서 고하였다. 즉시 다짐(?音)을 작성해 올리도록 하였다. 그 내용에, “제 동생 정호(正浩)는 나이가 38세로 농사도 짓지 않고 장사도 하지 않으며 잡기장(雜技場)을 떠돌아 다녔습니다. 지난달 7일에 금곡접소에 입도한다고 하였는데 10일 낮에 길가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 제 동생이 화당 11놈(漢)과 같이 귀산 등지를 침학하다가 도소(都所)에 체포되어 이미 파묻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동기 사이의 정리(情理)에서 그것을 듣고 매우 놀라서 종제 천석(千石)과 백활(白活)을 도소로 보내 바로 분부를 들었습니다. 그 분부에는, ‘네 형이 이번에 화당들과 함께 마을을 침학하여 무기로 사람을 해쳤다’라고 하였습니다. 제 동생을 법대로 정죄(定罪)하였으니 변명할 말은 없습니다. 이미 죽은 시신을 제 종제에게 내어주셨으니 매장하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전 영장 이유태가 황소 1마리를 내어 군사들을 위로했으며, 전 참봉 박기양이 벼 40석을 군량미에 보태었다. 12일 병진 [十二日丙辰] : 동도들은 화적 11인이 파묻혀 죽은 뒤로 더욱 관청과 대치하는 모습을 보였다. 무리들을 나눠 사방 경계의 시로(市路)를 막아 물샐 틈 없이 지켰으며, 양곡과 땔감을 실은 수레를 보면 곧장 빼앗아 불을 질렀으니, 부중(部中)의 원성이 자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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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여자고등학교 심마니 동아리, 30일 최우수 포스터논문상 수상...축하합니다.
예천여자고등학교(醴泉女高 心理學 동아리 ‘심마니’, 最優秀 포스터論文賞 受賞 : 大邱ㆍ慶北 靑少年 學術한마당에서 優秀한 成績 거둬) [記事] : 예천여자고등학교(교장 곽호열) 심리학 동아리 ‘심마니’(회장 황지언, 지도교사 김현우)가 「제4회 대구ㆍ경북 청소년 학술 한마당 대회」에서 최우수 포스터논문상을 수상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매일신문과 대구시교육청, 경상북도교육청, 경북대학교의 공동 주최로 2016년 1월 29일과 30일 이틀간 경북대학교에서 열렸다. 대구, 경북 내의 고교 48개교에서 제출한 총 306편의 논문제안서 중 사전 심사를 거쳐 논문 126편과 포스터 논문 34편이 최종 발표에 참가하였는데, 예천여고의 ‘심마니’는 이 가운데 경북 포스터논문 부문에서 당당히 최우수상을 받았다. 논문 발표에 참가한 학생은 2학년 조효서 학생과 1학년 황지언, 안지은, 전진, 김지원 학생이다. 학생들은 2015년도 동아리 활동의 일환으로, 예천지역 고등학생 57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통해 청소년의 교우관계와 정신건강(공격성, 신체증상, 우울), 삶의 만족도에 대한 성별, 연령별 비교 연구를 실시하였고, 그 결과 교우관계는 여학생들이 남학생보다 좋은 반면, 정신건강은 남학생이 더 건강한 것으로 나타났고, 특히 남녀 학생 모두 가정에 대한 만족도가 상대적으로 높게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논문 발표자로 나섰던 조효서 학생은 “농촌 청소년에 대한 사회관계와 만족도 연구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 이 주제를 탐구하게 되었다”며 “동아리 활동과 대회 참가 모두 뜻 깊은 경험이었다.”고 밝혔다. 예천여고는 최근 수년간 학생들이 창의적으로 활동주제를 정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면서 학업적, 인성적 발전을 도모하는 내실 있는 동아리 활동을 운영해 오면서 대학 진학에서도 훌륭한 성과를 보여주고 있어, 이번 청소년 학술한마당 대회의 수상은 예천여고가 경북의 창의 인성 교육을 선도하는 지역의 명문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되리라 기대된다.(醴泉뉴스 2016.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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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예천농협 박두현·김옥희 부부, 2일 이달의 새농민상 수상...축하합니다.
남예천농업협동조합(南醴泉農協(組合長 김재기) 박두현·김옥희 夫婦 '이달의 새農民賞' 受賞者로 選定..) [記事] : 남예천농협(조합장 김재기)의 조합원 용궁면 향석1리 박두현·김옥희 부부가 농협중앙회에서 선정·시상하는 '이달의 새농민상' 수상자로 선정되어, 용궁면에서는 1994년 무이2리 이희종 씨가 수상한 이후 두 번째 수상자로 2016년 2월 2일 농협중앙회 본관 대강당에서 시상식이 열렸다. 새농상이란? 자립·과학·협동의 새농민운동 3대 정신을 앞장서 실천함으로서 농가소득 증진과 영농과학화 및 지역농업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선도 농업인에게 주는 영예로운 상으로 새농민운동의 확산을 위하여 1966년부터 농협중앙회에서 매월 15농가를 선정, 시상하고 있는 상이다. 박두현·김옥희 부부는 1985년부터 수박농사를 시작하여, 현재 20여동의 수박 하우스 재배를 하고 있으며, 연간 약 1억여 원 이상의 소득을 올리는 억대 농업인이며 특히 용궁원예회의 회원으로 꿀벌을 이용한 생력화재배로 착과율 저하방지와 당도향상, 미생물을 이용한 병해충 예방, 방제작업 등으로 농약의 사용량을 크게 줄여 친환경 농업을 실천하고 있다. 박두현 씨는 농촌지도자 및 용궁면 농업경영인회 사무국장을 역임하고 있으며, 배우자 김옥희 씨는 농가주부모임과 생활개선회 회원으로 각종 지역행사에서 지역농산물 알리기 등으로 지역의 봉사활동에도 적극 앞장서고 있다. 이달의 새농민상 수상자에게는 상패와 기념품을 비롯해 부부동반 해외 선진농업연수, 농업생산력 증진을 위한 자금지원 등의 혜택이 주어지며, 농장은 농업기술현장 교육장으로 지정되어 귀농 또는 후계농업인들의 현장교육 공간으로 이용된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6-02-04 오후 1: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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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 예천불교대학 학생회장, 26일 조계종 총무원장상 수상...축하합니다.
이현재(이현재 醴泉佛敎大學 學生會長 : 曹溪宗 總務院長賞 受賞) [記事] : 예천불교대학 1기 이현재 학생회장이 2016년 1월 26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신도회 창립 제61주년 기념식에서 영예의 조계종 총무원장상을 수상했다. 이 회장은 지난 수년간 신행활동과 불법 홍포에 앞장섰을 뿐만 아니라 지난 해 예천불교대학 학생회장을 역임하며 불우이웃돕기 일일찻집, 김장 나눔 봉사 활동 등을 통해 포교에 앞장서왔다. 이현재 회장은 "앞으로도 불제자로서 불교발전을 위해 더욱 더 앞장서고 소통과 화합을 통해 우리 지역발전을 위해 매진하겠다."고 밝혔다.(남주희 記者 醴泉新聞 2016년 02월 03일 (수) 11: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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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