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자랑4298:이광석(2)-이광옥-이광윤(1)
작성자장병창 @ 2016.03.01 06:15:34

  예천의 자랑(4298) : 이광석(2)-이광옥-이광윤(1)

---

 

 

  이광석 : “남한 쌀, 북한 광물자원 교환하자”/ 2011.04.19/ 한다는 게 국제사회가 고민한 결론”이라고 한 보고서에서 지적한 바 있다. 이광석 성균관대 교수도 지에스앤제이연구소에 기고한 글 ‘경제공동체를 향한 북한농업개발.../ blog.naver.com/kseog8847/ 엠텍코리아/자화육..(daum 2015)

 

  이광석 : [국회도서관 이야기] 금주의 서평 제199호 “누가 마지막.../ 2014.10.20/ 10억 명의 오염유발자, 10장 시장은 도덕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서평자 이광석(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미국 University of Hawaii 경제학 박사, 전 한국농촌경제연.../ blog.naver.com/ nalbook님의블로그(daum 2015)

 

  이광석 : [2013 우즈베키스탄/중간보고회 및 정책실무자연수].../ 2013.11.13/ 있어 한국의 사례, 우즈베키스탄 내 가공식품 회사 벤치마킹 방향 등을 성균관대학교 이광석 교수님이 발표하셨답니다. 이어 김경량 교수님의 농식품 클러스터에 대한.../ blog.naver.com/ykspians/ Young KSPians(daum 2015) 

 

  이광석 : [인사] 성균관대 보직교수/ 2013.01.17 | U'sLine [U's Line 김재원 기자]/ 성균관대학교 보직교수 인사 (1월 17일자) △인문사회과학캠퍼스 부총장 (겸) 스포츠단장 정규상 △자... 사회과학대학장 김정탁 △경제대학장 이광석 △경영대학장 최종.../ 10301^//usline.kr/n (daum 2015)

 

  이광석 : "대체휴일제 도입 땐 일자리 11만개 생긴다."/ 2012.02.22 | 연합뉴스 | 미디어다음/ 쓰겠다고 생각했다. 22일 이성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과 이해춘ㆍ이광석 성균관대 교수가 2012 경제학 공동학술대회에 낸 '우리나라 공휴일제도 개...// 관련기사// 대체공휴일 도입하면 일자리 11만개 만들 수 있어 2012.02.25 | 네트워크신문// 대체휴일 도입시 일자리 11만개·24조원 편익창출 2012.02.22 | 조선비즈 | 미디어다음// 국민 80% “대체휴일 도입되면 34만원 쓰겠다” 2012.02.22 | 이투데이// 관련기사 7건(daum 2015)

 

  이광석 : 공공부문 근무시간 올 여름 8-5제 추진/ 2012.02.22 | 매일경제 | 미디어다음/ 촉진하자는 아이디어가 학계에서도 제기됐다. 이성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과 이해춘ㆍ이광석 성균관대 교수는 이날 경제학 공동학술대회에서 발표한 '공휴일제도 개선에 대한 경제 파급.../ 10301^//v.media.daum.net/v (daum 2015)

 

  이광석 : [200자 경제뉴스] SK그룹, 중국 충칭에 석유화학 단지 外/ 2012.02.23 | 중앙일보 | 미디어다음/ 34만 원 가량을 쓸 계획인 것으로 조사됐다. 22일 이성태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과 이해춘·이광석 성균관대 교수가 2012 경제학 공동학술대회에 낸 '우리나라 공휴일제도 개선에 대한 경제...(daum 2015)

 

  이광석 : 예천의 자랑 2335 : 석종식 敎授1/ 작성 장병창/ (중앙대 교수), 윤용수(서울대 교수), 윤일권(배재대 교수), 윤희남(제일제당 상무), 이경광(과기원 교수), 이광석(성균관대 교수), 이규형(화산컨트리클럽 대표이사), 이기동(연세대 교수), 이동철(관동대 교수), 이동흡(임업연.../ 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bul.. (daum 2015)

 

  이광석 : 예천의 자랑 1808 : 예천대사전 제94권 오늘 나와(祝 김창균/예천방문 334)/ 교수), 윤학준(일본 호세대 교수), 윤희남(제일제당 상무), 이경광(한국생명공학연구원 선임연구부장), 이광석(성균관대 교수), 이덕수(영남대 교수), 이영대(한국직업능력개발원 연구위원), 이의활(대구가톨릭대 교수), 이준대(.../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 (daum 2015)

 

  이광석 : 이광석 (대학교수), [출생] 1952년, 경북 예천, [직업] 대학교수, [학력] 하와이 대학교 대학원, [소속] 성균관대학교, 출처 인물백과(daum 2015)

---

 

이광옥(李光玉) : 호명면 직산리 가느미(艮山) 전의 이씨(全義李氏) 입향조, 자는 자윤(子潤), 호는 매옹(梅翁), 여주 목사 수아(壽雅)의 증손자, 이조 정랑 곤옥(崑玉)의 동생, 1589년(선조 2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서울에서 가느미로 이거하여 대대로 살고 있다.(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80 1786, 醴泉郡誌 1939)

 

  이광옥 : 임란기 경상좌도의 의병항쟁/ e-Book/ 최효식 지음 |  국학자료원 |  2004.09.30/ 책본문 : .풍기에서 김대현金大賢.곽수지郭守智가, 예천에서 전현감 이유李兪, 진사 이광옥李光玉.권욱權旭, 영해에서 찰방 조현趙玹.생원 이함李涵.유학 백견룡白見龍, 의성에서 신홍도申弘道.../ 218페이지(daum 2010)

---

 

  이광윤(李光胤) : 본관은 경주이고 자는 극휴이며 호가 양서인데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1594년(선조 27)의 별시 문과에 급제했다. 벼슬이 홍문관 교리에 이르고 1603년(선조 36)에 성절사의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갔을 때 적벽부의 운자를 이용하여 오언 절구 팔수를 읊으니 훌륭한 작품이라고 한다. 청주에서 하금곡으로 와서 살았다.(龍門面홈페이지 2013)

 

이광윤(李光胤) : 1564(명종 19)-1637(인조 15), 용문면 하금곡리 사람,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瀼西), 본관은 경주, 익재 제현(益齋齊賢)의 후손, 섬계 잠(剡溪 潛, 成均進士)의 2자, 덕윤(德胤, 1553生, 字克欽, 進士)의 동생, 명윤(明胤)창윤(昌胤, 1572生, 字克裕, 進士)의 형이다. 3세에 한자를 배웠고, 8, 9세에 문장을 잘 지었고, 초서로 유명하여 신동(神童)이라 칭찬이 원근에서 자자했다. 경상감사 유전(慶尙監司柳琠, 1531-1589, 文化人)이 9세인 그에게 새끼 제비를 두고 글을 지어보라고 하였다. 이에 짓기를, "처마 끝의 어린 저 제비/ 날마다 지저귀며 깃을 가꾸네/ 서풍(西風) 불어 가을 들면/ 구만리 높이 떠서 강남 가리(有燕生鄒壁裏巢/ 日夜니남長羽毛/ 何時剩値西風起/ 飛上秋天萬里高/)"라고 하였다. 유 감사가 크게 칭찬하였다. 15세에 향시(鄕試)에 응하여 두 번 다 합격하였고, 17세에 도회(都會)에서 장원하였다. 18세에 또 향시에서 장원하였다. 1585년(선조 18)에 식년 진사시(進士試)에 3등 85위로 합격하여 소촌도 찰방(召村道察訪)이 되었고, 얼마 안 있어 특진(特進)하여 비안 현감(比安縣監), 그 해인 1594년(선조 17) 겨울에 18세로 전주 별시 문과(全州別試文科)에 병과(丙科) 9위로 급제하여 옥당(玉堂)에 뽑혔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거쳤다. 내직으로는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 직강(直講), 사예(司藝), 익위사 익찬(翊衛司翊贊) 및 공조(工曹), 예조(禮曹), 병조(兵曹), 호조(戶曹) 등 5조(五曹)의 좌랑(佐郞)과 호조, 예조, 공조 등 3조의 정랑(正郞)이 되었다. 또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의 양사(兩司)에 들어가서 정언(正言), 장령(掌令)이 되었고, 옥당(玉堂, 弘文館)에 들어가 수찬(修撰), 교리(校理)를 두 번하였고, 부교리(副校理)를 세 번, 부제학(副提學) 등을 거치면서 바른 글을 써서 속된 간신배들을 제거하고 학문을 부흥시켰다.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사옹원 정(司甕院正)과 사섬시 정(司贍寺正)을 거쳐서 통례원 우통례(通禮院右通禮)에 이르렀다. 겸직한 것은 지제교 겸 문학(知製敎兼文學), 문사랑청 문사(門事郞廳門事), 교정랑청 교정(校正郞廳校正) 등이다. 청(廳)의 낭관(郎官)을 겸한 것은 두 번이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사(都事)와 안반종사(按伴從使)와 초계(草溪)와 영천 군수를 거쳐서 성주 목사(星州牧使)에 이르렀다. 무릇 44회나 관(官)을 옮겼다. 그러나 공경(公卿)의 위치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운명이다. 임진왜란(1592) 때 성오당 이개립(省吾堂李介立), 매당 권욱(梅堂權旭)과 더불어 창의하여 크게 공을 세웠다. 1603년(선조 36)에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明) 나라 서울 옥하관(玉河館)의 연의(演儀)에 참석하여 문명(文名)을 날렸고, 1606년(선조 39) 4월에 완성한 5대 사고(史庫)의 역사(役事)에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강관 춘추관 기주관(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으로서 참가하였다. 1624년(인조 2)에 대궐에 나아가 진소(陳疏)하니 임금이 가상(嘉尙)하게 받아들였다. 만년(晩年)에 한강 정구(寒岡鄭逑), 백암 김륵(柏岩金륵), 서애 유성룡(西崖柳成龍), 죽전 김광엽(竹田金光燁) 등과 도의를 강마(講磨)하여 임천(林泉)에서 늙으니 문장과 덕업이 영남 유림(嶺南儒林)의 으뜸이 되었다. 1631년(인조 9)에 감기가 더쳐서 1637년 12월에 용문면 하금곡리의 사제(私第)에서 죽었다. 1638년 2월에 예천읍 생천리 제동 을좌(堤洞乙坐)에 안장(安葬)되었다. 문집(文集)이 있고, 1650년(효종 1)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써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하금곡리 유전(柳田)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예천읍 생천리의 정산서원 어서각(鼎山書院御書閣)에 제향되었다. [豊山人 金應祖의 墓碣銘] : ...아! 그의 금도(襟道)가 넓고 상쾌하였고, 재주가 무리를 압도하였다. 또 비유적으로 말하면, 먼 길을 말을 달려서 고삐를 놓고 그냥 뛰도록 하는 것 같고, 문학과 문사랑청(門事郞廳)의 문사(門事)를 겸하였으니 당시에 있어서 극히 영선(榮選)이었다. 이미 시(詩)를 잘 하는 10명 중에 뽑혔고, 또 문장을 잘 하는 36명 중에도 선발되었으니 명성이 조정을 기우렸다. 그러나 일에 임(臨)하여 구차스럽게 남과 같지 아니하며 속임수에 따르지 안했다. 영의정 윤승훈(領議政尹承勳)을 지지하다가 뭇 소인들의 무고와 훼방을 받았다. 윤승훈을 구출하려다 해를 당한 선비들을 상소하여 구해 주었다. 이이첨(李爾瞻), 이위경(李偉卿) 등이 인륜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그릇치므로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상소를 올려 치기를 청하다가 도로 엄중한 견책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만년에 누차 봉계(封啓)를 올려 정성을 다하였다. 빨리 덕있는 사람을 공경하고 무력한 백성을 화합하게 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을 것이며, 학문을 숭상하고 일으키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또 어찌 꼭 스스로 땔나무를 질머져 가면서 단련하며 몸소 불을 때어 밥을 지어 가면서까지 학문을 논해야 하겠을까 마는 지금 사람들이 바야흐로 공리(功利)에만 급급하나 이 말이 귀한 줄을 아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지방의 군(郡)과 주(州)의 책임자로 머뭇거리면서 유연(柔軟)히 누어 있어 아무 거리끼는 것이 없었지만 학문을 일으키는데 뜻을 두었다. 초계(草溪)에 있을 때 관찰사(觀察使)가 장계(狀啓)를 올려서 포상하였다. 그 고을 백성들이 비를 세워 덕을 기렸다. 그가 집에 있을 때는 효도와 우애(友愛)의 행실을 돈독(敦篤)히 하였다. 12세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집상(執喪)하는 것이 어른 같았다. 1597년(선조 30)에는 또 부친상(父親喪)을 당하였다. 슬퍼하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럴 수가 없었다. 동기(同氣)를 사랑하고 제사를 받드는 것은 모두 지성으로 하였다. 평생 살림살이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며칠 씩 머물러 술잔을 주고받는 시를 지어 화답(和答)하여 바람과 달에다 품은 뜻을 부치니, 그 높은 풍도(風度)와 아담한 운치(韻致)는 먼 데 사람이나 가까운 데 사람이나 다 사모하는 바가 되었다. 그가 재주와 포부를 다 펴지 못한 것을 모두 아깝게 생각하였다... 저작(著作)한 시문(詩文)이 약간 권(卷) 집에 보관되어 있다. 명(銘)에 가로되, "바른 붓은 간흉(奸兇)을 쫓을 수 있고/ 맑은 글은 나라를 빛낼 수 있고/ 인(仁)을 미루어 백성을 건질 수 있네/ 풍속을 바꾸어서 학교를 일으켰으니/ 누구만 못하여 공경이 못되었나/ 죽지 않고 길이 남을 손/ 만고(萬古)에 꽃다운 그의 이름이도다/"(宣祖實錄, 明宗實錄 附錄, 醴泉郡邑誌 1780 1841, 醴泉郡誌 1939, 襄陽誌 1661, 族譜, 韓國人의 族譜)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여지도서 / 慶尙道 / 醴泉 / 人物 / 高麗 林民庇 毅宗朝擢第官至同中書門下平章事爲相挺然有古風好善周急確實無華故武夫悍卒亦知景仰年七十三致仕謚文靖 林宗庇 工於四六 林椿 宗庇從子毅宗時人以文章鳴世屢擧不第鄭仲夫之亂闔門遭禍椿脫身僅免卒窮夭而死號西河先生有集行於世 高麗史云西河人未知何據 林支 漢元宗時以本郡吏從征東都叛將崔宗 崔積 崔思等有功欲賞以職支漢辭請以尙州管內多仁縣移屬本郡元宗許之 林惟正 登第官至祭酒工於集句有百家衣集 本朝權孟孫 登第官至藝文館大提學謚/ <하권0396-4>/ 齊平 尹祥 以縣吏登第學問精深誨人不倦長成均凡十有六年官至藝文館提學年七十八退老于鄕學者集雲八十三卒近代師儒之最 流寓本朝趙庸 洪武壬申謫居詳眞寶縣 孝子本朝林? 仕至監察爲父居廬三年末嘗見齒事聞旌閭 金? 其父早死以?得行喪及壯?歿廬墓年爲父仍居三年事聞拜架閤庫錄事 潘濡 爲父居廬三年事間旌閭 權節山 爲母居廬三年事聞旌閭 尹奕 郡吏也養父母家雖貧未嘗闕酒肉及歿哀毁踰禮事聞旌閭 盧珣 進士也少失父鞠於其祖珍珍年六十居母廬罹疾幾死珣奉藥先嘗禱於北辰求以身代嘗糞味苦疾果愈 烈女權氏 安東權啓生女年二十其夫宋孝從死親自負土葬於家北率五?先兒朝夕不離墓側終三年一曰有虎攬子而去權氏左手扶子右手拒虎呼曰皇天有知乞賜照臨虎乃棄去 新增 人物權五紀 文科以承文副正字選拜藝文館?閱止執義號拙齋 權五福 五紀之弟/ <하권0397-1>/ 文科官至校理早受業於??齋 金宗直門下戊午之禍興金馹孫等同被極刑號睡軒有文集行于世鄕人立祠享之 太斗南 文科官至執義以文章鳴于世 張孟羽 延福君末孫之子文科官至校理 權文海 文科官至左承旨有所撰大東韻玉二十卷號草澗 鄭琢 文科 宣廟朝官至左議政謚貞簡號藥圃鄕人立祠享之 當?丙子 命進?像 御製其銘銘曰筵中偶聞取覽厥像遺像偉然 穆廟名相百年之後入于 楓宸特題其銘以聳嶺人 曹友仁 萬曆乙巳文科昏朝坐詩案??三載酷被?掠癸亥 改玉官至承旨 朴廷薛 孝宗朝登第官至參判 金賓 孝宗朝登第官至參判 李東標 肅廟癸亥擢魁科歷銓卽舍人止參議號懶隱有學行風節 當?辛酉筵臣以力主淸議樹立卓爾建白 特贈吏曹判書 流寓本朝張末孫 天順己卯文科以 世祖朝敵愾功臣封延福君謚安襄 李光胤 益齋 齊賢之後文科官至校理號?西 權檣 忠定 ?之弟正德己卯登/ <하권0397-2>/ 賢良科以南床選入翰苑官至正郞以己卯賢 當?丙寅 贈副提學號霽村 朴從鱗 嘉靖丙辰文科選翰苑歷三司止銓郞 丁允祐 貳相 應斗之子文科官至監司 新增孝子李介立 隆慶丁卯進士以孝行擢授縣監 肅宗朝褒贈參判號省吾 魯瑞麟 郡吏也父病斷指垂口得甦 肅宗朝事 聞旌閭 新增烈女洪氏 習讀 文經濟之妻事在三綱行錄事 聞旌閭 呂氏 文應周之妻卽洪氏之歸事在三綱行錄事 聞旌閭 文氏 命周之女未?遭壬辰亂賊先刃其父?水女呼哭從溺事 聞旌閭 申氏 李宓之妻宓隨父大憲瀣朝京歿于燕訃至忽有白鳩來止于肩貌甚??馴擾異常每申氏號哭鳩輒承淚飮之常不離於側人以爲幽感申氏號哭平生無異袒括白衣疏食以終其身事 聞旌閭 李氏 權尙?之妻年二十八夫歿哀毁過禮冬月不著絮袍年過七?而食素終身 肅宗朝事 聞旌閭 朴氏 權國柱之妻六十偏寡淚盡繼血遂至喪明素食以終八耆事 聞/ <하권0397-3>/ 旌閭(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二 / 丙申萬曆二十四年宣祖二十九年上 / 五月  / 初三日 己巳  / 洪世英拜承旨 鄭期遠拜司諫 崔天健拜持平 元士立拜古阜 李邦俊拜萬頃 蔡夢先拜谷城 鄭光績拜刑議 李光胤拜刑佐 柳寅吉拜兵正○保安察訪 / <2권0181>/ 權景虎領興源江板子到龍山(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三 / 丙申下 / 八月  / 初六日 辛丑  / 余見希輔及羅級○李鐵拜掌令 李光胤拜禮佐 鄭賜胡拜僕正 沈說拜戶正 李惟恕拜公判 南瑾拜水原(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四 / 丁酉萬曆二十五年宣祖三十年 / 正月  / 初六日 丁卯  / 大風兪大進拜 聖節使 李軫賓拜書狀官 金宇?拜大成 裵應?拜羅州 尹?拜承旨 安重吉拜 二字缺 金澤龍拜司藝 申之悌拜文學 李覺拜司諫 李必亨拜獻納 裵興立拜慶尙右水使 洪慶臣拜持平 李光胤拜正言○傳曰柳寅吉爲復?軍郞廳書狀官改差尹?爲其代(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六 / 壬寅下 / 八月  / 十一日 庚子  / 柳根拜忠淸監司 李侃拜潭陽 文礪拜弼善 李廷龜拜禮判 趙庭堅拜掌令 李光胤拜戶正 李汝誨拜奉常判官 李善復拜兵佐 洪慶臣拜判校 蔡衡拜慶尙都事 朴東說拜相禮 申景逸拜濟用直長 李/ <035_0465>/ 光胤拜修撰 李好義拜司藝 洪汝諄拜右參贊 姜籤拜輔德 黃致誠拜尙衣正 宋山海拜禁火別坐 尹?拜刑佐 尹游拜典設別坐 宋珽拜氷庫別坐 趙厚世拜戶正 北部參奉 李哲光 司瞻參奉 李元男相換○府啓方物進 上居半不準請濟用監色官 戶曹郞廳竝罷依 允又啓曰亂離以後京中士子散處四方今聞科奇貧士之難於久留者臨時來華而因該曹事目方考講小學許多士子一二日內決難畢講將使多士輩有無故停擧之慮該曹考講事目姑爲停止何如(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七 / 甲辰下 / 閏九月  / 二十三日 庚子  / 元虎智拜正言 李光胤拜副應敎 李元信拜典籍○府啓昌城府使 具德齡爲人??請遞禁 / <035_0592>/ 府假郞廳請革罷○權昐 金德謙來見○ 以下二日缺(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죽계일기 / 竹溪日記卷之八 / 乙巳下 / 十二月  / 初十日 庚戌  / 崔天健拜大諫 閔汝任拜掌令 成以文拜禮議 李奎文拜全羅水使 李光岳拜訓鍊都正 蔡慶先拜吏佐 兪學曾拜檢閱 尹調元拜兵佐 洪可臣拜松留 申景?拜?山 金?拜昌原 康昱拜監察 朴弘老拜刑判 李光胤拜咸都 宋●(馬+專)拜禮正 趙仁徵拜潭陽 / <035_0722>/ 工正 郭說 戶正 鄭孝誠相換(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임진기록 / 壬辰記錄 下 / 圃翁家譜略敍草稿 二 / ...洪慶臣曰李光胤有學術. 曰成浹識時務. 曰鄭基南精簡有才略. 曰韓伯溫有學行. 曰韓守謙性溫良. 曰安崇儉孝悌忠信. 曰吳長向學不怠. 曰曺明勖志學. 曰黃應淸曰金玄遇向善業學. 至老不怠. 有膽略善於言辭能奉使外國及出入賊中哨探動靜者. 則曰僧惟政. 居家孝悌爲一鄕矜式. 慷慨徇國可堪入官者. 則曰李璣玉曰梁克選曰琴應壎. 文章特異善於辭命者. 則曰洪春壽能文博言. 曰丁景蘭辭藻精鍊. 曰李光胤文詞鍊磨. 曰洪慶臣文詞淸古. 有勇力善射. 或善用刀槍. 或能負重疾走. 或有膽氣不?先登者. 則曰卞弘達. 能知/ <167>/ 稼穡之務. 勸民耕種. 辨燥濕之宜. 開墾荒廢作屯田者. 則曰李泳造曰成浹曰安夢說. 善於理財或煮海爲鹽. 或卽山鑄鐵. 能以此易彼. 變遷貿易. 商物販賣興利之用者. 則曰南瑞. 通算法善於會計. 調度軍食. 不失?銖者. 則曰朴而直曰鄭象獻曰朴至仁. 有巧性能制造槍刀. 或曉解煮取焰?. 能造鳥銃大小砲及守城器械者. 則曰南瑞. 仍啓曰. 臣謹就其十條中. 收拾見聞. 開列如右. 而人之才料. 或優於厥條內所稱. 且或有所不逮者. 各人名下. 皆有注脚. 以記其實. 此外或有不可以一藝名者. 准條輒錄. 亦不避其疊記之煩. 如郭再佑等. 皆有守禦之才. 已有...(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상 / 溪巖日錄 二 / 癸丑 / 八月  / 五日  / 雨未少已, 終日如注, 昏黑愛上始回, 詢其久則留可興十日, 留京九日, 初一日乃發, 見察訪及會伯書, 與本院幸無苛促, 或意吳肅羽之恕護, 而近以朝家事擾,/ <상 215>/ 鄭造 尹?及館儒李偉卿, 請廢慈殿 / 亦未暇念此也, 肅羽覆書亦至, 大君安置于宮城北門外, 百官更請移置喬桐, 已允下, 項者鄭造 尹?及館儒李偉卿, 請廢慈殿, 造 ?以玉堂處置遞, 後鄭昌言 閔貴達等, 上?亦述鄭尹意, 皆館儒而偉卿黨也, 館儒鄭復亨 李安眞 權?等, 又上?乞斬造 ? 偉卿, 因削籍偉卿等六七人, 檢閱 嚴惺亦停擧, 偉卿等六七人及上?儒生五六人, 李昌後 韓纘男二人之子, 亦在停中, 李韓上?訴之, 因致上怒, 嚴惺方入侍, ?命削出門外, 李安眞 權? 鄭復亨等, 亦命削儒籍禁錮終身, 造 ?以朝著不靜亦削職, 而嚴惺同事四館四五人, ?削奪官職矣, 昨日因士安聞陶院從享事, 京中論議紛?, 金中淸 李光胤 朴守誼 守謹等, 列書南中人之仕于京者, 呈于漢陰相公, 實遂其計, 而李靑松叔姪名下, 獨不著署, 相公疑之, 以是淸胤輩深怨靑松, 盖夏間? 憬輩, 列書北人名, 呈文尹方伯, 僞爲士林公論, 而中淸適爲禮郞, 乘時用力, 啓達於朝, 命下議大臣領台及原任大臣, 皆聞其大?一樣回居云.(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상 / 溪巖日錄 二 / 癸丑 / 十二月  / 十二日  / 陰寒, 聞奇相行至豊基, 墜輿致傷, 不得進, 李光胤再持酒?謁鄭.(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상 / 溪巖日錄 二 / 甲寅 / 九月  / 七日  / 陰, 見院長金寧越澤龍回文, 趙?判從享之關已到, 明以十三日, 聚議節目, 固料此事, 必至於遂矣, 奈斯文道統何, 士林公議何, 晦?蒙亂, 至於此極, 無非時運使然, 當何論哉, 當吳奫?上也, 啓下該曺, 禮判 李爾瞻, 以依願回啓, 今此之遂, 以啓辭答允耶, 抑以隣近儒士會議, 方伯上達後, 朝廷別爲處置, 得蒙成命/ <상 256>/ 五賢從祀 / 耶, 榮川士論, 亦不得明白, 近於?糊, 如以爲不可, 則當直云不可, 抑以幷祀諸弟爲宜, 則當云此人, 不可獨先, 而乃泛以同時幷擧爲稱, 盖榮人皆切不可直以彼輩, 托付時人, 大北之勢方熾故, 禍患可畏, 不得堅正秉論者也, 呂泉惟 金堂諸 朴及 金仲熊 李光胤等外, 皆不一, 諸朴慮若會議, 必有異同, 徑言于方伯曰, ?議翕然, 權方伯信之, 禮安則李?等, ?上書于尹方伯暉陽, 若士林公論, 朝廷信之, 謂本縣士論, 雖已無疑, 猶欲知隣邑, 公議行移, 詢問奉化, 則又皆中淸徒黨, 必翕然矣, 大?以近邑士議言之, 安東試可否時, 以彼輩誘?, 可?多而否?少, 榮川又不明快, 禮奉又以無異辭爲啓, 則朝廷何從而知之, 大臣之議, 主上之許, 其亦固然也, ?當路用事之重臣名?, 皆與彼輩爲腹心, 極力是措, 仁弘 爾瞻以下, 無不致力, 且用趙門以如是會, 而豈有不得成之理乎, 李??痔爾瞻, 光胤之折支碩光, 中淸之表裡權奸, 李?之虛張威?, 不可一一擧, 而其餘付托鄙陋險?不良之輩, 置之不掛於口也.(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상 / 溪巖日錄 四 / 甲子 / 三月  / 四日  / 晴, 早食行五里許, 遇孝仲還鄕, 盖於歲前, 出使毛都督營, 賊平始至京歸覲也, 道話移時, 踰利夫峴, 歇馬于三田渡, 乘舟下, 所過江花江柳, 春景芳媚, 只以?後江山, 似有愁色, 人世治?, 固未可料也, 楮子島中, 朴自興亭?侈麗, 今則只有頹垣, 人間事飜覆如此, 江岸人家, 花柳輝映, 正如?圖, 而亭閣甚佳, 未知誰其主也, 下淸潭過東湖, 處處亭宇, 玲瓏可愛, 至漢江暫憩村舍 濟川亭基傍, 李大燁亭甚壯, 新造而遇變, 正與朴一樣也, 然猶不毁, 今爲功臣之物云, 夕到林業家, 已黑暗矣, 張旅軒道拜掌令, 昨已入城, 慶監 閔聖徵, 頃於賊變之初, ?陷一道, 以聞變觀望狀啓, 曺承旨友仁等二十餘人, 卞誣上?, 以義兵義糧等事, 希功上?者, 不可勝計, 尙州 李埈 黃廷? 金知復 高仁繼, 或拜官或擬望, 其他鄭彦宏琴 金中淸 李光胤等, 大爲弊事, 琴以募得義糧爲言, 黃與金, 皆拜別提, 尙州之?, 直言義糧幾石.(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한국사료 총서/ 계암일록 하 / 溪巖日錄 五 / 庚午 / 六月  / 十一日  / 或雨或止, 午權晦卿過, 話間大注, 入夜復雨, 趙錫朋爲奉常主簿, 李判事泳道氏之力也, 初趙月川談, 李兄以忠判, 蓄州妓爲妾, 李公大怨月川爲牛, 月川聞之怒, 李公?踵一不見, 李公益怨之, 癸丑年間, 金中淸 李光胤輩在都下, 列書南鄕人之官于京者, 呈文禮曺, 請月川從祀陶院, 李公與其姪別坐君, 獨不署名, 以是其間如水火, 然其後妾子孝順學書于錫朋, 以是力請于鄭吏判除是職, 盖錫朋往在大北之時, 以廢倫收議, 甚得人言, 癸亥以後, 全不擬望, 李公之盡心, 何以有此, 吏判夫人, 李公之三從?, 以是吏判亦親之, 非但官令其身, 又能聽其言, 雖以朴景範之獲罪, 倫紀猶且復用, 盖其本性, 喜人親己, 苟其所功, 不論賢愚, 務爲引進, 信聽兪若曾之言, 論救郭天衢, 至於入啓, 大爲人笑, 而以南? 朴敦復爲禮佐, 又欲通淸班, 信曺希仁之言, 以曺明?爲榮川守, 而以希仁欲爲說書, 又信李判事之言, 用朴景範, 而洪有炯, 亦李之所擧也, 如此之類, 不可勝記.(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신인본[新件] 선대 실록 편수관 명단/ 만력(萬曆)3223) 임진3224) 의 변란에 춘추관(春秋館)과 성주(星州)․충주(忠州)에 분장(分藏)했던 선대조(先代朝)의 실록(實錄)은 모두 병화(兵火)로 불타 버렸고, 전주(全州)에 소장했던 실록만이 병화를 면하였으므로 처음에는 해주(海州)로, 다음에는 영변(寧邊)으로 옮겼다가 다시 강화(江華)로 옮겨 봉안하였다. 상(上)이 춘추관에 명하여 이 본(本)3225) 에 의거하여 3질을 인출(印出)하고, 구인본[舊件]3226) 은 강화의 마니산(摩尼山)에 보관하고 신인본[新件]은 춘추관과 안동(安東)의 태백산(太白山), 영변(寧邊)의 묘향산(妙香山)에 분장케 하였으며, 초본(草本) 1질은 강릉(江陵)의 오대산(五臺山)에 보관하게 하였다. 구인본은 5백 76권이고 신인본은 각기 2백 59권인데 이는 책의 장정에 크고 작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역사(役事)는 계묘3227) 7월에 시작하여 병오3228) 4월에 완성하였다. 전후의 관원을 아울러 기록한다.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신 이덕형(李德馨)/.../ 어모 장군(禦侮將軍) 행 용양위 부호군 겸 춘추관 편수관(行龍?衛副護軍兼春秋館編修官) 신 경섬(慶暹)/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이광윤(李光胤)/ 통훈 대부(通訓大夫)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行弘文館校理知製敎兼經筵侍讀官春秋館記注官) 신 권진(權縉)/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1책 172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왕실-국왕(國王)/ [註 3223]만력(萬曆) : 명 신종(明神宗)의 연호. ☞ / [註 3224]임진 : 1592 선조 25년. ☞ / [註 3225]이 본(本) : 전주 사고본을 말함. ☞ / [註 3226]구인본[舊件] : 전주 사고본. ☞ / [註 3227]계묘 : 1603 선조 36년. ☞ / [註 3228]병오 : 1606 선조 39년. ☞ / [註 3229]행 동중추부사 : 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비명(碑銘)에 의하면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로 되어 있음.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이직언(李直彦). ☞(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85권/ 선조 30년(1597 정유 / 명 만력(萬曆) 25년) 2월 21일(임오) 2번째 기사/ 정언 이광윤이 사직할 것을 건의하다/ 정언(正言) 이광윤(李光胤)이【문장을 잘하고 재국(才局)이 있었다. 】 아뢰기를, ꡒ신이 접반사(接伴使)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의주(義州)에서 돌아오는데 해주(海州) 일로가 사신(使臣)이 경유하지 못하는 길인 줄을 까마득히 모르고 전진하다가 재령(載寧)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세한 사정을 알았습니다. 그리하여 길을 바꾸어 평산(平山)으로 향하려고 했는데 눈녹은 물이 창일(漲溢)하여 부득이 연안(延安)으로 길을 잡았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은혜로운 명령이 갑자기 이르러 황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다가 바삐 와서 사례합니다. 그러나 이미 금법(禁法)을 범하였으므로 결단코 직에 있기는 어려우니 속히 파척(罷斥)의 명을 내리시어 신의 죄를 바루소서.ꡓ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재차 아뢰는 것은 번독(煩瀆)스럽다고 하여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3책 16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사법(司法) / *외교-명(明)(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36권/ 선조 34년(1601 신축 / 명 만력(萬曆) 29년) 4월 22일(기축) 7번째 기사/ 이헌국․황기․성계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가 있었다. 이헌국을 완성 부원군(完城府院君)으로, 황기(黃沂)【위인이 어리석었다. 전에 수령이 되어서는 탐오(貪汚)한 것으로 일을 삼았다. 】를 개성부 경력으로, 성계선(成啓善)을 병조 정랑으로, 이광윤(李光胤)을 강원도 도사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236면/ 【분류】 *인사(人事)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