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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4299) : 이광윤(2)(附 <상현대천> 제4호, 발간...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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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51권/ 선조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6월 21일(신해) 6번째 기사/ 김제남․이원익․윤승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제남을 영돈녕부사로, 이원익(李元翼)을 판중추부사로, 윤승훈(尹承勳)을 지중추부사로, 이호민(李好閔)을 첨지중추부사로, 김늑(金?)을 첨지중추부사로, 유몽인(柳夢寅)을【글을 잘 지었다. 】 홍문관 전한으로, 이심(李?)을 홍문관 교리로, 원호지(元虎智)를 병조 정랑으로, 김흥국(金興國)을 형조 정랑으로, 소광진(蘇光震)을 형조 좌랑으로, 임업(林?)을 공조 좌랑으로, 이광윤(李光胤)을 호조 좌랑으로, 정입(鄭?)을 봉교로, 이선복(李善復)을 홍문관 저작으로, 민덕남(閔德男)을 대교로, 정호선(丁好善)을 홍문관 정자로, 심광세(沈光世)를 예문관 검열로, 김응서(金應瑞)를 충청 병사로, 심극명(沈克明)을 길주 목사(吉州牧使)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392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53권/ 선조 35년(1602 임인 / 명 만력(萬曆) 30년) 8월 11일(경자) 3번째 기사/ 홍경신․황치성․강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비(吏批)에 명하여 홍경신(洪慶臣)을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로, 황치성(黃致誠)을 상의원 정(尙衣院正)으로, 강첨(姜籤)을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으로, 정협(鄭協)을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으로, 조정견(趙庭堅)을 사헌부 장령으로, 문여(文勵)를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으로, 이선복(李善復)을 병조 좌랑으로, 이광윤(李光胤)을 홍문관 수찬으로, 이간(李侃)을 담양 부사(潭陽府使)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404면/【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59권/ 선조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2월 6일(계사) 5번째 기사/ 윤승훈․서인원․이구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윤승훈(尹承勳)을 좌상으로, 서인원(徐仁元)을 호조 참의로, 이구징(李久澄)을 문학으로, 소광진(蘇光震)․성준구(成俊耈)를 병조 좌랑으로, 이광윤(李光胤)을 홍문 교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44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69권/ 선조 36년(1603 계묘 / 명 만력(萬曆) 31년) 12월 12일(계사) 3번째 기사/ 남탁․김수현․이정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남탁(南晫)을 사헌부 장령으로, 김수현(金壽賢)을 사간원 정언으로, 이정험(李廷?)을 홍문관 교리로, 이광윤(李光胤)을 홍문관 수찬으로, 권흔(權昕)을 시강원 설서로, 심종도(沈宗道)를 포천 현감(抱川縣監)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553면/ 【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71권/ 선조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2월 4일(을유) 2번째 기사/ 최원․황우한․신식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최원(崔遠)을 지훈련원사(知訓鍊院事)로, 황우한(黃佑漢)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신식(申湜)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구사직(具思稷)을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 송석경(宋錫慶)을 시강원 필선(侍講院弼善)으로, 조중립(趙中立)을 사간원 헌납으로, 조탁(曺倬)을 시강원 문학(侍講院文學)으로, 이광윤(李光胤)을 예조 정랑으로, 최기남(崔起南)을 병조 정랑으로, 이현영(李顯英)을 형조 정랑으로, 김용(金涌)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강홍립(姜弘立)을 홍문관 수찬(弘文館修撰)으로, 문여(文勵)을 통례원 찬의(通禮院贊儀)로, 정광성(鄭廣成)을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로, 오익(吳翊)을 검열로, 임정(林?)을 진산 군수(珍山郡守)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565면/ 【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71권/ 선조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2월 11일(임진) 4번째 기사/ 이효원․김용․강첨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효원(李效元)을 승정원 우승지로, 김용(金涌)을 사헌부 집의로, 강첨(姜籤)을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으로, 이광윤(李光胤)을 부교리(副校理)로, 유석증(諭昔曾)을 예조 정랑으로, 민덕남(閔德男)을 사간원 정언으로, 김수현(金壽賢)을 시강원 사서(侍講院司書)로, 권반(權盼)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박대겸(朴大謙)을 예조 좌랑으로, 이진선(李振先)을 병조 좌랑으로, 유성(柳惺)을 공조 좌랑으로, 신광립(申光立)을 성균관 전적(成均館典籍)으로, 성계선(成啓善)을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임업(林業)을 무장 현감(茂長縣監)으로, 김선징(金善徵)을 금구 현령(金溝縣令)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566면/ 【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73권/ 선조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4월 9일(기축) 2번째 기사/ 이덕형․윤훤․강홍립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덕형(李德馨)을 판중추부사로, 윤훤(尹暄)을 장악원 첨정으로, 강홍립(姜弘立)을 홍문관 교리로, 정근(鄭謹)을 군기시 첨정으로, 송선(宋瑄)을 군자감 첨정으로, 신지제(申之悌)를 세자 시강원 문학으로, 박효성(朴孝誠)을 개성부 경력으로, 송보(宋?)를 홍문관 수찬으로, 이광윤(李光胤)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오백령(吳百齡)을 익위사 위수(翊衛司衛率)로, 윤황(尹煌)을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이결(李潔)을 형조 좌랑으로, 엄인술(嚴仁述)을 회양 부사(淮陽府使)로, 이복순(李福純)을 위원 군수(渭原郡守)로, 이기수(李麒壽)를 정선 군수(旌善郡守)로, 박지진(朴知進)을 벽동 군수(碧潼郡守)로, 윤천구(尹天衢)를 함흥 판관(咸興判官)으로, 오이순(吳以順)을 강음 현감(江陰縣監)으로, 김극제(金克悌)를 해남 현감(海南縣監)으로, 박동점(朴東點)을 토산 현감(兎山縣監)으로, 조현남(趙顯男)을 흥양 현감(興陽縣監)으로, 남빈(南贇)을 음죽 현감(陰竹縣監)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60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73권/ 선조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4월 22일(임인) 3번째 기사/ 홍진․신잡․박이장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진(洪進)을【사람됨이 강퍅하고 편협한 데다 단신(短身)에 코주부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그의 용모를 비웃었다. 】 판의금부사로, 신잡(申?)을【사람됨이 재주가 없고, 자못 청렴하지 못하다는 이름이 있었다. 】 지의금부사로, 박이장(朴而章)을 이조 참의로, 성이문(成以文)을 예조 참의로, 김순명(金順命)을 제용감 정으로, 김극효(金克孝)를 선공감 첨정으로, 박지술(朴知述)을 형조 정랑으로, 유성(柳惺)을 공조 정랑으로, 신율(申慄)을 사헌부 지평으로, 권반(權盼)을 성균관 직강으로, 유순익(柳舜翼)을 병조 좌랑으로, 이오(李?)를 형조 좌랑으로, 김유(金?)를 형조 좌랑으로, 조계한(趙繼韓)을 공조 좌랑으로, 이광윤(李光胤)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민경기(閔慶基)를 홍문관 부수찬으로, 기협(奇協)을 예문관 검열로, 이희원(李希愿)을 홍주 목사로, 윤수연(尹粹然)을 장단 부사로, 이여기(李汝機)를 정선 군수로, 이직(李稷)을 무안 현감(務安縣監)으로, 구사직(具思稷)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남복규(南復圭)를 평안 평사(平安評事)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604면/ 【분류】 *인사(人事)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79권/ 선조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윤9월 20일(정유) 4번째 기사/ 이광윤․민경기․윤수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광윤(李光胤)을 홍문관 수찬으로, 민경기(閔慶基)를 사간원 정언으로, 윤수겸(尹守謙)을 세자 시강원 사서로, 권제(權濟)를 공조 좌랑으로, 이민성(李民宬)․윤양(尹讓)을 성균관 전적으로, 소광진(蘇光震)을 평안도 도사로, 구덕령(具德齡)을 창성 부사(昌城府使)로, 송몽룡(宋夢龍)을 고원 군수(高原郡守)로, 이자해(李自海)를 흡곡 현령(?谷縣令)으로, 현덕량(玄德良)을 인동 현감(仁同縣監)으로, 이두망(李斗望)을 교하 현감(交河縣監)으로, 조계종(趙繼宗)을 방답 첨사(防踏僉使)로, 이인경(李寅卿)을 벽단 첨사(碧團僉使)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669면/ 【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79권/ 선조 37년(1604 갑진 / 명 만력(萬曆) 32년) 윤9월 23일(경자) 4번째 기사/ 이광윤을 부교리로, 원호지 이극신을 정언으로 삼다/ 이광윤(李光胤)을 부교리(副校理)로, 원호지(元虎智)를 정언(正言)으로, 이극신(李克信)을 정언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4책 670면/ 【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92권/ 선조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10월 9일(경술) 3번째 기사/ 안위․황정록․이광윤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안위(安衛)를【위(衛)는 역적 정여립(鄭汝立)의 일가이다. 북쪽 변지에 귀양갔다가 임진년의 왜변을 만나 과제(科第)에 참방하게 되었고 이에 중번(重藩)을 지키게 되었으나 다른 재능은 없고 오직 사졸들에게 토색하여 권귀(權貴)에게 아첨하는 것만을 일삼았다. 】 충청 수사로, 황정록(黃廷祿)을 덕원 부사(德源府使)로, 이광윤(李光胤)을 성균관 직강(成均館直講)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5책 12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194권/ 선조 38년(1605 을사 / 명 만력(萬曆) 33년) 12월 10일(경술) 2번째 기사/ 박홍로․윤안성․홍가신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홍로(朴弘老)를 형조 판서로, 윤안성(尹安性)을 병조 참판으로, 홍가신(洪可臣)은 개성 유수로, 성이문(成以文)은 예조 참의로, 최천건(崔天健)을 행 사간원 대사간으로, 박효생(朴孝生)을 군자감 부정으로, 민여임(閔汝任)을 사헌부 장령으로, 송보(宋?)를 예조 정랑으로, 채경선(蔡慶先)을 이조 좌랑으로, 권흔(權昕)을 병조 좌랑으로, 유학증(兪學曾)을 예문관 검열로, 조인징(趙仁徵)을 담양 부사(澤陽府使)로, 이광윤(李光胤)을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최입(崔?)을 호군(護軍)으로, 이충양(李忠養)을 부호군(副護軍)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5책 14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208권, 선조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2월 22일(을묘) 1번째 기사/ 정사가 있어 정혹․박진원․이유홍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정사(政事)가 있었다. 정혹(鄭?)을 예조 참의로, 박진원(朴震元)을 병조 참지로, 이유홍(李惟弘)을 동부승지로, 정사호(鄭賜湖)를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최관(崔瓘)을 전라 감사(全羅監司)로, 이호의(李好義)를 홍문관 교리로, 이경탁(李慶倬)을 호조 좌랑으로, 신광립(申光立)을 정언으로, 조성립(趙誠立)을 예조 좌랑으로, 오익(吳翊)을 전적으로, 박상현(朴尙賢)을 감찰로, 유항(柳恒)을 예조 좌랑으로, 김낙(金珞)을 사평(司評)으로, 김상용(金尙容)을 안변 부사(安邊府使)로, 이인경(李寅卿)을 경원 부사(慶源府使)로, 조즙(趙?)을 강계 판관(江界判官)으로, 이광윤(李光胤)을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이사경(李士慶)을 북도 평사(北道評事)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5책 31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210권/ 선조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4월 8일(경자) 3번째 기사/ 홍경신․한백겸․민몽룡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경신(洪慶臣)을 좌부승지로, 한백겸(韓百謙)을 판결사(判決事)로, 민몽룡(閔夢龍)을 동지중추부사로, 유공량(柳公亮)을 황해도 관찰사로, 여유길(呂裕吉)을 봉상시 정(奉常寺正)으로, 이경기(李慶?)를 사옹원 정으로, 송석경(宋錫慶)을 사성(司成)으로, 성준구(成俊耈)를 사인(舍人)으로, 조성립(趙誠立)을 병조 정랑으로, 이광윤(李光胤)을 공조 정랑으로, 임기(林?)를 예조 좌랑으로, 유광(柳洸)을 공조 좌랑으로, 권설(權渫)을 감찰(監察)로, 홍치상(洪致祥)․황치성(黃致誠)․이성길(李成吉)【추솔하다. 】․윤길(尹?)을 전적(典籍)으로, 이기빈(李箕賓)을 삼도 통제사 겸 경상도 수군 절도사로, 성윤문(成允文)【탐욕스럽고 잔인하고 사나워서 가는 곳마다 이민(吏民)과 장졸들이 모두 원망하여 흩어졌다. 일찍이 제주 목사(濟州牧使)가 되어서는 군졸을 혹사하였는데 분김에 혹독한 형벌로 수십 명을 죽였다. 그 잔인함이 이와 같았으므로 물론이 분노하였다. 】을 수원 부사 겸 방어사로, 조수준(趙守準)을 여주 목사(驪州牧使)로, 최유원(崔有源)을 예빈 부정(禮賓副正)으로, 이유경(李有慶)【가난하게 살고 오활하였는데 두 번이나 불러도 오지 않았다. 】을 왕자 사부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5책 322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선조실록 213권/ 선조 40년(1607 정미 / 명 만력(萬曆) 35년) 윤6월 21일(임오) 4번째 기사/ 홍여순․유영순․윤국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여순(洪汝詢)을【고집이 세고 사나우며 탐욕스럽고 방종스러웠다. 】 동지로, 유영순(柳永洵)을 우윤으로, 윤국형(尹國馨)을 동지로, 조탁(曺倬)을 사간으로, 윤양(尹讓)을 장령으로, 이필영(李必榮)을 군기시 정으로, 이경기(李慶?)를 직강으로, 오백령(吳百齡)을 사인으로, 송석경(宋錫慶)을 부교리로, 이순경(李順慶)을 사예로, 조명욱(曺明勖)을 사서로, 임장(任章)을 형조 좌랑으로, 이광윤(李光胤)을 서천 군수(舒川郡守)로, 오여벌(吳汝?)을 울산 판관(蔚山判官)으로 삼았다. /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5책 34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광해군일기 75권/ 광해군 6년(1614 갑인 / 명 만력(萬曆) 42년) 2월 14일(병신) 7번째 기사/ 이광윤이 탐방해 의심스러운 사람을 체포해 보내라고 경상 감사에게 하유하다/ 전교하였다. ꡒ수상한 떠돌이가 산에서 내려왔을 때 한제(韓濟) 등이 체포되었다고 하니, 그 근처 마을 남녀 가운데 따라 다녔던 사람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이광윤(李光胤)으로 하여금 상세히 물색하고 은밀히 탐방하여 의심스러운 사람은 체포해서 보내라고 경상 감사에게 하유하라.ꡓ/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2책 279면/ 【분류】 *사법-치안(治安)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광해군일기 147권/ 광해군 11년(1619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12월 26일(을해) 5번째 기사/ 정광경․오여온에게 벼슬을 내리다/ 정광경(鄭廣敬)을 전한으로, 오여온(吳汝穩)을 응교로, 채겸길(蔡謙吉)․변응원(邊應垣)을 장령으로, 안응로(安應魯)를 헌납으로, 이광윤(李光胤)을 교리로, 민심(閔?)을 정언으로, 김시국(金蓍國)을 수찬으로, 남이흥(南以興)을 구성 부사(龜城府使)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3책 28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광해군일기 153권/ 광해군 12년(1620 경신 / 명 만력(萬曆) 48년) 6월 19일(을축) 1번째 기사/ 장령 이광윤이 대간들의 출사를 청하여 따르다/ 장령 이광윤(李光胤)이 이뢰기를, ꡒ〈대사간 이창후, 집의 정도, 사간 황익중, 지평 정결, 정언 오익환, 장령 안경이〉 【양사의 관원들이】 모두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권의는 신진으로서 일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기 때문에 약자는 깔보고 강자는 두려워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난번 일을 논할 때에 중신(重臣)을 곧바로 지척하는 잘못이 있었는데, 말은 비록 정도를 지나쳤지만 뜻은 취할 만하였습니다. 〈성상과 같이 넓은 도량을 지닌 분이 관대하게 용서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잘못을 모르지 않으실텐데도 마침내 엄한 분부를 내려서 그들을 체직시켜 버리셨으니, 이 어찌 성인이 이른바 남의 사사로운 것을 들추어내는 것을 정직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를 미워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합사하여 피혐하는 계사에, 한편으로는 ꡐ권의가 강개해서 곧바로 지척하여 혼자 체직하는 명을 받았다.ꡑ 하고, 한편으로는 ꡐ유희분의 비난과 헐뜯음을 권의에게만 떠맡길 수 없다.ꡑ 하였습니다. 서로 더불어 체직당하기를 구하면서 그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은 것은, 그 실정과 일을 따져보면 한 사람의 간관을 편벽되게 옹호하는 것이 아니고, 또한 한 사람의 재상을 힘써 공격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번 양사의 피염하는 제사는】 대개 대간의 권위가 가벼워지고 언로가 막혀서 뒷날의 근심이 이루 다 말할 수조차 없게 될까 두려워하였기 때문이니, 나라를 위해 염려하는 것이 깊고도 원대하지 않습니까. 또한 법부(法府)가 해조를 추고하기를 청한 것은 바로 시정(時政)을 규찰하는 데 있어서의 상례이니, 한쪽 편의 자기 변명하는 말 때문에 〈그 사이에〉 인혐하게 놓아 둘 수는 없습니다. 〈반복해서 생각해 보아도〉 모두 피할 만한 혐의가 없습니다. 모두 출사하도록 명하소서.ꡓ하니, 따랐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3책 328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광해군일기 162권/ 광해군 13년(1621 신유 / 명 천계(天啓) 1년) 윤2월 17일(기축) 2번째 기사/ 교리 이광윤이 체직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교리 이광윤이 아뢰기를, ꡒ〈신은 시골의 미미한 사람으로 외람되게도 논사(論思)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고루하고 아는 것이 적어 조금도 취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바깥 사람들에게 조롱을 받은 지 오래입니다. 그런데〉 어제 양사가 피혐하였으므로 〈처치를 논의해야 했는데〉 본관의 동료들은 모두 사고가 있어서 신이 홀로 〈전 부수찬〉 윤성임과 함께 상의하고 참작하여 대사헌 〈유대건만 체직할 것을 청하고 나머지 양사의 많은 관원은 체직할 것을 청하지 못하였습니다. 구구한 소견에 특별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었고〉 다만 유대건의 논의가 전후로 같지 않은 점과 또 일개 유생의 상소로 대간을 모두 체직한다면 분쟁의 단서가 생길까 염려한 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지금 〈삼가〉 상께서 비밀리에 봉해서 내린 비답을 보니, 신이 고루하고 아는 것이 적어서 처치를 잘못한 죄가 큽니다. 〈결코 논사하는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없으니〉 신을 체직하소서.ꡓ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3책 367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광해군일기 165권/ 광해군 13년(1621 신유 / 명 천계(天啓) 1년) 5월 20일(신유) 2번째 기사/ 홍문관 교리 이광윤․박내장 등이 삭직을 청했으나 불허하다/ 홍문관 교리 이광윤(李光胤)․박내장(朴來章), 수찬 정양윤(鄭良胤)․유중룡(柳仲龍)이 아뢰기를, ꡒ삼가 어제 관학 유생들의 상소를 살펴보니, 〈대체적인 내용은〉 속히 이이첨의 그지없이 흉악한 죄를 바로잡고 이어 입을 다물고 적을 놓아준 삼사의 죄를 다스리자는 내용이었습니다. 신들이 외람되이 속해 있는 홍문관은 역시 삼사의 하나입니다. 이이첨의 죄악이 공론으로 크게 제기된 것을 듣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특별히 명을 받고 지방에 나가 있으면서 아직 일을 마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잠시 그 의논을 멈추고 먼저 세 명의 흉악한 자를 논핵하였던 것이지 그 사이에 털끝만큼도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선비들로부터 적을 놓아주었다는 배척을 받았으니, 신들이 어떻게 감히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면서 태연하게 직무를 수행하겠습니까. 아울러 신들을 삭직하도록 하소서.ꡓ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33책 377면/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승정원일기/ 인조 4년 4월 3일 (을해) 원본12책/탈초본1책 (21/24) 1626년 天啓(明/熹宗) 6년/ 李明漢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吏曹, 李明漢爲通政大夫兵曹參知知製敎兼春秋館修撰官, 權?爲通訓大夫行司諫院司諫兼春秋館編修官, 尹知敬爲通訓大夫行成均館司成知製敎, 趙靖爲通訓大夫行通禮院相禮, 辛二字缺 爲通訓大夫行世子侍講院弼善, 李光胤爲通訓大夫行掌樂院僉正知製敎, 閔應恢爲通訓大夫行司憲府持平, 秦尙弘爲通訓大夫行工曹佐郞, 郭天衢爲通訓大夫行成均館典籍, 呂爾徵爲通訓大夫行世子侍講院司書, 金南重爲通訓大夫行弘文館副修撰知製敎兼經筵檢討官春秋館記事官, 三字缺通善郞行內資寺直長蔡亨後, 將仕郞社稷署參奉睦□善外, 閔機爲通訓大夫行公州牧使, 尹義立爲嘉善大夫行延安府使, 成?爲通訓大夫行懷仁縣監者。(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승정원일기/ 인조 5년 9월 20일 (계미) 원본19책/탈초본1책 (4/9) 1627년 天啓(明/熹宗) 7년/ 李德泂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刑曹判書李德泂, 吏曹佐郞李景奭, 應敎鄭弘溟, 校理李行遠, 兵曹正郞李景義, 說書鄭維城, 知事朴東善, 副修撰李昭漢, 刑曹正郞李鍵, 南海縣監池達沂, 庇仁縣監梁斗南, 碧沙察訪田大年, 成歡察訪崔振溟, 江原都事尹之復, 典籍尹孝立․朴文溟, 內贍副正李如珪, 司饔正李光胤。(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승정원일기/ 인조 5년 12월 22일 (을묘) 원본19책/탈초본1책 (3/10) 1627년 天啓(明/熹宗) 7년/ 蔡亨後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刑曹佐郞蔡亨後, 判敦寧李德泂, 宗簿正宋象仁, 司饔正李景嚴, 司藝李光胤, 副修撰李行遠, 禮曹佐郞尹絳。(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승정원일기/ 인조 6년 9월 5일 (임술) 원본22책/탈초본2책 (2/4) 1628년 崇禎(明/毅宗) 1년/ 洪瑞鳳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有政。以洪瑞鳳爲大司憲, 金湜爲大司諫, 李省身爲掌令, 鄭弘溟爲執義, 特旨, 以權濤爲司諫, 沈之源爲獻納, 金堉爲吏曹正郞, 李性源爲持平, 李廷圭爲北評事, 張維爲新?君, 崔擇善爲郭山郡守, 任孝達爲掌令, 李坰爲持平, 金槃爲宗簿正, 李光胤爲內贍正, 金南重爲副校理, 權潗爲司藝, 吳端․呂爾徵爲直講, 趙錫胤爲典籍, 柳景緝爲正言, 辛應望爲興陽縣監, 吳達升爲禮曹正郞, 金榮祖爲副修撰。(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記事] : 승정원일기/ 인조 6년 10월 8일 (을미) 원본23책/탈초본2책 (3/7) 1628년 崇禎(明/毅宗) 1년/ 洪? 등에게 관직을 제수함/ ○ 以洪?爲判決事, 趙絅爲直講, 李光胤爲右通禮, 崔?爲宗簿正, 愼天翊爲禮曹正郞, 李行建爲禮曹佐郞, 李有養․金柱宇爲刑曹正郞, 鄭廣敬爲同知, 柳恒爲吉州牧使, 羅德憲爲安岳郡守。(www.history.go.kr 2009)
이광윤 : [ 간찰 > 학자 에 대해서/ 065 이광윤(李光胤)-경주/ * 상태는 세월의 흔적으로 인해 테두리부분에 약간 흠이 있지만 양호하다./ * 싸인이 있다./ 크기는 28-28.5센티./ 1564(명종19)-?. 조선시대의 학자.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瀼西). 본관은 경주(慶州). 제현(霽賢)의 후손. 1585년(선조18) 진사(進士)가 되고 1594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부제학(副提學)을 지냈다. 초서(草書)로써 이름을 떨쳤다.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 이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祭享).(daum 2010)
이광윤(李光胤)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선조(宣祖) 27년, 과거시험연도 : 1594 갑오, 시험명 : 별시(別試), 등위 : 병과2(丙科2)/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이광윤(李光胤), 자 : 극휴(克休), 호 : 양서(瀼西), 본관(本貫) : 경주(慶州), 거주지(居住地) : 예천(醴泉)/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585(을유) 진사시, 전력(前歷) : 찰방(察訪), 관직(官職) : 교리(校理)/ [가족사항] 부(父) : 이잠(李潛), 조부(祖父) : 이곤(李鯤), 증조부(曾祖父) : 이공린(李公麟), 외조부(外祖父) : 강응청(姜應淸), 처부(妻父) : 박순(朴荀)(daum 2010)
이광윤 : 목판본 瀼西先生文集 6권 3책 완질...李光胤(1564~) 선조 27년 갑오별시 병과2위/ (daum 2010)
이광윤(李光胤) : 본관(本貫) 경주(慶州), 시대(時代) (1564-1637), 자(字) 극휴(克休), 호(號) 양서(瀼西)/ 이력(履歷)/ 이광윤(李光胤) 1564(명종19)∼? : 조선의 문신.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瀼西), 齊賢(제현)의 후손. 1585년(선조18) 進士(진사)가 되고 1594년 別試文科(별시문과)에 丙科(병과)로 급제, 副提學(부제학)을 지냈다. 草書(초서)로써 이름을 떨쳤다. 都承旨(도승지)에 追贈(추증), 仁山書院(인산서원)에 祭享(제향)되었다.(daum 2010)
이광윤 :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이광윤(1564-1637)은 용문면 하금곡리 사람으로, 자는 극휴(克休), 호는 양서(瀼西), 본관은 경주, 잠(潛)의 둘째 아들이다. 1585년(선조 18)에 진사가 되고, 임진왜란(1592) 때는 하금곡리의 이개립, 제곡리의 권욱과 더불어 예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공신이 되었다. 그 공으로 소촌도 찰방(1594)을 제수받고 비안 현감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 후 내외직을 두루 거쳤는데, 내직으로는 성균관의 전적, 직강, 사예와 익위사의 익찬 및 5조의 좌랑과 3조의 정랑이 되었다. 또 삼사(三司)에 들어가서 정언, 수찬, 부교리, 교리, 지평, 장령 등을 하였다. 또 정3품 벼슬인 장악원 정, 사옹원 정, 사섬시 정을 거쳐서 통례원 우통례에까지 벼슬이 이르렀다. 통례원은 임금을 만나는 절차나 제사 사무를 맡은 관청이었다. 외직으로는 강원도와 함경도의 도사와 초계와 영천의 군수를 거쳐서 성주 목사에 이르렀다. 무릇 44차례나 벼슬을 옮겼다. 그리고 사신(1603)으로 중국 명나라에 가서 문장가로서 이름을 날렸고, 5대 사고를 만드는 일(1606)에도 참가하였다. 간신배 이이첨을 제거하기 위한 상소를 올리다가 오히려 엄중한 견책을 받기도 하였다. 학문을 일으켜야 한다고 항상 강조하여 당시 10대 시인과 36대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초서와 예서를 잘 썼고, 일할 때에는 절대로 남을 속이지 않았다. 1631년(인조 9)부터 몸이 쇠약해져서 하금곡리 집에서 여생을 보냈다. 정구, 김륵, 유성룡, 김광엽 등과 서로 사귀면서 학문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당시 문장과 선행이 영남 유림의 으뜸이 되었다. 무덤은 예천읍 용산리 제동(堤洞)에 있고, 도승지(1650)에 증직되었다. 하금곡리 유전동(柳田洞)의 인산서원(仁山書院)과 예천읍 생천리의 정산서원(鼎山書院)에 제향되었고, 문집이 있다. 김응조(金應祖)가 시로써 이광윤을 추모하기를, "바른 붓은 간신배를 쫓았고, 맑은 글은 나라를 빛내었네. 어짐으로 백성을 건졌고, 풍속을 바꾸어 학교를 일으켰네... 죽지 않고 길이 남을 것은, 영원한 그의 꽃다운 이름이도다."라고 하였다. <장병창 논설위원>/ //cafe.daum.net/geugdang/ 경주이씨 국당공파(daum 2010)
이광윤 : 문헌(文獻) :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년 4월)/ 이광윤 1564-1637 극휴 양서 월성 청주 월천한강문인금응조참조 양서집/ 李光胤 1564-1637 克휴 양西 月城 淸州 月川寒岡門人金應祖참조 양西集(daum 2010)
이광윤 :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이광윤(李光胤)/ #경상도(慶尙道) 예천(醴泉)/ *인산서원(仁山書院) : 영조 을사건(英祖乙巳建) (1725) 용문면 하금곡리/ 제향. 권맹손(호송당 판서 본예천). 이문좌(호세촌 안협현감 본경주). 권오기(호졸재 좌통례 본예천). 이광윤(호양서 부제학 증도승지 본경주) 김경언(호눌재 병조정랑 본순천). 권용(호선계 상서원직장 수중추부사 본예천)./ 祭享. 權孟孫(號松堂 判書 本禮泉). 李文佐(號細村 安峽縣監 本慶州). 權五紀(號拙齋 左通禮 本醴泉). 李光胤(號讓西 副提學 贈都承旨 本慶州) 金慶言(號訥齋 兵曹正郞 本順天). 權墉(號仙溪 尙瑞院直長 壽中樞府使 本醴泉).(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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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대천> 제4호, 발간...축하합니다.
상현대천 제4호(尙賢大川 第四號) [冊] : 이민녕(李民寧), 심대보(沈大輔), 권석종(權錫鍾)이 편집한 책으로, 273쪽, 사진, 도표, 27cm이다. 대창인쇄소(大昌印刷所)에서 인쇄하여 예천상현회(會長 鄭希隆)에서 2015년 12월에 발행하였다. 목차는 다음과 같다.
發刊辭(會長 鄭希隆) =3/ 祝刊辭(경북 문경·예천 국회의원 이한성) =5/ 祝刊辭(예천군수 이현준) =7/ 祝刊辭(예천군의회의장 이청우) =9/ 祝刊辭(예천교육지원청 교육장 허정두) =11/ 1. 貞簡公 藥圃 鄭琢先生의 功德과 時中(1)(李民寧) =13/ 2. 28宿와 慶尙北道 新 道廳所在地 醴泉(11) =19/ 3. 說約으로 擬議해 보는 孔子의 仁과 孟子의 仁義(|||) =27/ 4. 易理와 現代科學으로 擬議한 浮石寺의 三才(1V) =31/ 5. 大有?之 大壯?으로 同而異한 丙申年 韓半島(V) =47/ 6. 28宿와 瞻星臺(崔博文) =53/ 7. 第一太極圖(李珏寧) =57/ 8. 宇宙의 創始論(尹泰宣) =63/ 9. 推句(1)(鄭希隆) =65/ 10. 老人處世 明心寶鑑(11) =71/ 12. 健康한 삶을 爲한 長壽寶鑑(編輯者 注) =73/ 13. 비슷한 漢字와 略字(尹泰鉉) =83/ 14. 季節別 故事成語(編輯者 注) =89/ 15. 祝辭와 受胙 嘏辭란?(黃東燮) =111/ 16. 唐四柱(李廷鎭) =133/ 17. 시조탐구(황만수) =135/ 18. 緝熙(1)(尹傅鏞) =139/ 19. 얼시구, 절시구, 조을시구 考察(11) =145/ 20. 夢心齋에 얽힌 이야기(林樂相) =151/ 21. 四友堂과 七十二賢(權丁淑) =155/ 22. 元曉大師와 瑤石公主 考察(禹南燮) =161/ 23. 栗谷 李珥 先生 遺蹟 探訪(朴榮晩) =163/ 24. 泗溟大師의 遺跡地를 찾아서(沈大輔) =169/ 25. 孝 이야기(說話)(權寧萬) =185/ 26. 歷史 探訪記(權錫鍾) =189/ 27. 夢中情談(邊正義) =199/ 28. 문화유산들의 이야기(홍승수) =205/ 29. 民族 大移動 한가위를 보내며(尹勉植) =209/ 30. 狀況에 맞는 中庸의 道를 찾아 行하라(金昌一) =213/ 31. 禮의 意味(林時悳) =215/ 32. 이응태 400년만의 외출(김하주) =219/ 33. 槐木(權外淑) =223/ 34. 梅花꽃이 피었다(1)(李京子) =225/ 35. 슬픈 봄비(11) =229/ 36. 家長은 아무나 될 수 없다(趙東稷) =231/ 37. 도덕적 생활신조(박영노) =235/ 38. 風水 明堂이야기(權泰守) =237/ 39. 周易을 工夫하면서(李畢媛) =241/ 40. 프란치스코 敎皇의 訪韓(林炳台) =245/ 41. 물, 이것이 窮禁하다(1)(鄭義杰) =247/ 42. 漢詩(冬至有感)(11) =251/ 43. 아름답게 살기 爲한 老人 10戒銘(黃江燁) =253/ 44. 書藝作品(朴文秀 落照詩)(權宅樑) =257/ 45. 書藝作品(李忠模) =259/ 46. 書藝作品(金英順) =261/ 47. 書藝作品(柳丁姬) =263/ 尙賢會 발자취 =267/ 醴泉尙賢會 會員名簿 =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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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