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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300:이광윤(3)-이광준(1)
작성자장병창 @ 2016.03.03 06:17:59

  예천의 자랑(4300) : 이광윤(3)-이광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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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윤 : 양서(瀼西) 이광윤(李光胤) 양서집(?西集)| │‥ 고문서/ 이민희 中河 | 2008.05.26. 16:47/ 양서집(?西集)/ 형태서지/ 권수제  양서선생문집(?西先生文集)/ 판심제  양서선생문집(?西先生文集)/ 간종  목판본/ 간행년  미상(1732년 이후 간행)/ 권책  연보(年譜), 원집(原集) 6권 합 3책/ 행자  10행 21자/ 규격  20.7×17.0(cm)/ 어미  上下二葉花紋魚尾/ 소장처  연세대학교 중앙도서관 / 소장도서번호  811.98/이광윤/양 /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속 13/ 저자/ 성명  이광윤(李光胤) : 생년  1564년(명종 19), 몰년  1637년(인조 15), 자  극휴(克休), 호  양서(?西), 본관  경주(慶州), 특기사항  조목(趙穆)의 문인(daum 2010)

 

  이광윤 : 서계 이득윤 서계집/ 2008.05.25/ 李弘復 金望遠의 女 李弘謙 朴坤元의 女 李弘咸(李弘信) 參奉 朴至元의 女 女 金光偉 女 洪純慤 女 鄭? 李光胤 校理, ?西 양서집(?西集) 李種茂의 女 朴荀의 女 李明胤 參奉 尹瓊의 女 李昌胤 張孝福의 女 李深 參奉 李洽.../ //cafe.daum.net/kungjulee/ 전통의 명문 경주이씨 종친회(daum 2010)

 

  이광윤 : 贈參判病栢堂朴公墓誌銘/ 2010.04.13/ 瀼西先生文集卷之六 墓誌의 기록이다 李光胤(1564~1637)은 號 瀼西이고 좌랑공(荀)의 여서(女?)이다. 1594년에 결혼하였고 그해 30세에 문과급제를 하였다. 贈參判病栢堂朴公墓誌銘 病栢堂公 墓誌銘 咸陽之朴。其先出於慶州.../ //cafe.daum.net/Jongleenpa/ 함양박씨 치암공파 지밀직부사공파 종친회(daum 2010)

 

  이광윤 : 이광윤(李光胤)/ 2009.08.29/ 26世 이광윤[李光胤 : 1564(명종10) - ( ? )] *익재공후 한당공파(閑堂公派) [문과] 선조(宣祖) 27년 (1594) 갑오(甲午) 별시(別試) 병과(丙科) 2위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18년 (1585) 을유(乙酉) 식년시(式年試) 3등(三等) 55위.../ //blog.daum.net/009448/ 야촌(이재훈)(daum 2010)

 

  이광윤 : 경주이씨 고문서/ 2008.12.24/ (李宗準)용재선생유고(?齋先生遺稿) 159 오천(梧川)이종성(李宗城) 오천집(梧川集) 158 양서(瀼西)이광윤(李光胤) 양서집(瀼西集) 157 설정(雪汀), 오계(梧溪) 이흘(李?)설정집(雪汀集)   156 석탄(石灘), 고산(孤山) 이존오.../ //blog.daum.net/009448/ 야촌(이재훈)(daum 2010)

 

  이광윤 : 강호사시가 [대학보고서]/ 2007.01/ 4 李光胤(1564∼1637): 瀼西集 [藏六堂六歌] 我已忘白鷗 나도 이미 백구를 잊고 白鷗亦忘我 백구도 나를 잊었네. 二者皆相忘 서로가 서로를 잊어 不知誰某也 누가 누군지 알지 못하니, 何時遇海翁 언제나 해옹을.../ Daum 지식(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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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광준 [記事] : 영천이씨 관찰사(諱광준)의 漢詩와 예천의 전설/ 글쓴이: 溪巖/ 2008.05.09 23:52/ //cafe.daum.net/younglee.co/ 학봉일고(鶴峯逸稿) 제2권 / 나의 벗들 손을 잡고 남정에 가서(南亭携我友)/ 마주 보며 시냇가에 둘러앉았네(鼎坐碧溪濱)/ 삼년 만에 본 얼굴들 머리 하얀데(白髮三年面)/ 창파 건너 만리 먼 길 가는 나라네(滄波萬里人)// 약속이나 한 것처럼 서로 만났다(相逢如有約)/ 이별을 고하자니 맘 상하는데(告別却傷神)/ 다리 가의 수양버들 부산스러워(多事橋邊柳)/ 수심 지은 이마 역시 찌푸려지네(愁眉亦爲嚬)// [(예천의전설)명나라장수의 무례함을 혼내준 대성전의 대들보] : 예천향교는 흑응산 동쪽 송대 언덕에 있는 조선시대 공립학교로 초창년대는 조선 태종 7년(1407)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그 후 1656년 군수 심유행, 1658년 군수 이휘조 등이 수 차례 중건한 것으로 보아 조선후기 건물로 보이며 대성전, 명륜당, 내삼문, 동소문으로 공자 5성과 국내 8현을 비롯한 23성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임진왜란 때의 일이다. 정유년에 명나라 마귀(麻貴)라는 장수가 왜군을 토벌하기 위해 예천 고을에 주둔하려고 하니, 많은 군대를 수용할 만한 큰 건물이 없어 공자 위패를 모셔 놓은 향교의 대성전(大成殿)에 장졸들을 데리고 들어오려 하였다. 아무리 명나라 군사가 우리나라를 도와 준다고는 하나 그 당시 유림들은 자기네의 생명보다 더 떠받들어 모시는 공자님의 위패가 있는 대성전에 군사를 주둔시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하며, 마 장군(麻將軍)에게 몇 번이나 만류하면서 다른 장소로 정하자고 간청하였으나 무인(武人)인 마귀에게 대성전이 금기의 장소로 통할 까닭이 없었다. 유림들은 부득이 대성전 안에 모신 공자님의 위패를 위시한 모든 위패들을 정산서원(鼎山書院)으로 옮기었다. 이때 마 장군은 휘하에 많은 장졸을 거느리고, 위세 당당히 앞장서서 대성전 안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앉자마자, 갑자기 대성전 안에 있는 몇 아름이 넘는 굵고 큰 대들보가 벼락치는 소리를 내면서 뒤틀려 돌아갔다. 대들보의 뒤틀리는 소리에 그렇게도 거드럭거리던 마 장군은 혼비백산하여 단걸음에 대성전을 뛰쳐나와 달아나고 말았다. 대성전 대들보가 너무 굵고 커서 평소엔 그 안쪽을 볼 수 없었으나, 뒤틀어지는 바람에  그 안쪽을 살펴보니 군수 이광준(郡守 李光俊)이라고 쓴 글자 다섯 자가 보였다고 한다. 마 장군이 달아난 후 대들보는 안쪽으로 되돌아가서 차츰 제자리에 놓여지게 되면서 뒤틀어질 때 보였던 글씨도 그 후로는 보이지 않았으며, 지금도 그때 뒤틀려졌던 흔적이 대들보에 남아있다고 한다.(예천군청)(daum 2008)

 

  이광준 : 관찰사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2.가족 이야기/ 2009.03.31/ 관찰사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2.가족 이야기 조 : 이세헌(李世憲) 생부 : 이여해(李汝諧) 모 : 일선(一善) 김씨 김형손(金亨孫)의 딸 형제 : 이광언(李光?), 이광양(李光良) 집안이력 이광준의 본관은 영천이다. 그의 .../ //cafe.daum.net/yclee/ 영천이씨대종여로(daum 2010)

 

   이광준 : 관찰사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1.생애 이야기| ▩―···永川李氏(역사자료)/ [溪巖]환암공파[영양군25세]/ 2009.03.31 20:09/ //cafe.daum.net/yclee/ 성명 : 이광준(李光俊), 1531년 1609년, 본관 : 영천(永川), 자 : 준계(俊季), 호 : 학동(鶴洞),   출생지 : 의성(義城), 출신지 : 의성(義城), 분묘지 : 의성(義城) 하현(霞峴), 입사경로 : 1562년 별시 병과 급제, 내관직 :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 형조 참의(刑曹參議), 외관직 : 청송부사(靑松府使), 강릉부사(江陵府使), 중화부사(中和府使), 충주목사(忠州牧使), 강원도 관찰사(江原道觀察使),  증직 및 기타 : 가선대부 예조참판겸 동지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嘉善大夫 禮曹參判兼 同知義禁府 春秋館 成均館事 五衛都摠府 副摠管)/ @왜적을 물리치다 : 이광준은 임진년(1592) 봄에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제수되었는데, 부임한지 얼마 안 되어 왜구가 득실거리는 통에 여러 고을이 와해되었다. 공은 힘을 가다듬고 군대를 다스려 반드시 지켜낼 계책을 세웠는데, 적장 길성(吉成)이 격문을 전하여 돌렸다. 그리하여 격문을 가진 자가 강릉부로 오자, 공은 즉시 목을 베게 하고는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산을 점거하였는데, 적병이 갑자기 몰려와 종일토록 힘을 다해 싸워 적을 무수히 목 베고 사로잡았다. 행재소(行在所)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가상하게 여겨 공을 포상하고 품계를 올려 주었으나, 뒤이어 본도의 순찰사가 공의 강직함을 두려워하여 거짓으로 장계를 올려 파직되었다./ @뛰어난 목민관 : 임진왜란 당시 해서(海西)의 중화군(中和郡)은 적이 쳐들어오던 초기에 사사로이 서로 단결하여 왜적을 매우 강력하게 토벌하니, 이 때문에 난리에 피해를 입은 것이 더욱 혹독하였다. 조정에서는 충의(忠義)를 칭찬하고 특별히 부(府)로 승격시킨 다음 부사를 선임하도록 명하였는데, 이광준이 부의(副擬)로 제수되었다. 이광준이 부임하니 온 경내가 잿더미가 되어 창고에는 한 말의 곡식도 없었으며 명나라 원군이 길에 이어져 군량을 공급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아울러 흉년과 질병이 유행하여 굶어 죽은 시신이 널려 있었다. 그는 궤주(潰走)하여 흩어진 관리와 백성들을 날짜를 정하여 즉시 모이게 하니, 감히 조금도 늦은 자가 없었다. 이광준은 마침내 자신의 옷과 음식을 줄이고 밤낮으로 돌아다니면서 부상당한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굶주린 자들을 구휼하였다. 또 둔전(屯田)을 크게 설치하고 농기구들을 마련해주었으며, 병사들을 조련하고 군기(軍器)를 수리하였으며, 학교를 중건하고 공청(公?)을 다시 세워 일이 모두 각기 조리가 있으니, 온 경내가 공을 부모처럼 떠받들고  마음을 다하여 명령을 따랐다. 몇 년이 안 되어 도망했던 자들이 모두 돌아와서 백성과 물건이 번성했으며 황무지를 모두 개간하여 창고가 충실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번 장려를 입어 특별히 비단의 겉감과 안감을 하사받았으며, 임기가 끝나자 또 3년을 유임(留任)하였다. 부(府)의 백성들은 송덕비를 세워 사모하는 마음을 다하였으며, 그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송덕비아래에 모여 곡하고 제물을 올렸다.

 

  @강직한 성품 : 이광준은 강직하고 방정하여 권세가에게 굴하지 않았다. 젊어서 참판(參判) 심의겸(沈義謙)과 함께 급제하여 교분이 매우 두터웠다. 심의겸이 이조 전랑으로 정권을 잡고 힘써 그를 추천하여 장차 청요직에 앉히려 하였다. 그러나 그는 교분을 끊고 왕래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오랫동안 하급관료로 주현(州縣)을 다스렸다. 고을을 다스릴 때 백성을 편리하게 하였고, 아전들을 단속하였으며 호족들을 제압하여 가는 곳마다 명성이 자자하였다.(daum 2010)

 

  이광준 : 빙계서원 복향식 및 학동 이광준(李光俊) 선조님/ 추가배향 고유행사 (06.06.21)/ 경상북도 의성군 춘산면 빙계리 산73-1번지/ 1556년(명종 11)에 회당(悔堂) 신원록(申元祿)이 창건하여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을 봉향하였다. 창건 시에는 의성읍 장천(현 남대천 상류)에 위치하여 선조9년(1576년) 장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선조 33년 학동 이광준(李光俊)이 춘산면 빙계리로 이전 후 晦齋 이언적(李彦迪)·西厓 류성룡(柳成龍) 鶴峯 김성일(金誠一)·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위패를 모셨다.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 2002년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착공한 복원공사가 마무리되어 지역유림의 뜻을 모아 이건의 공적을 기려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을 추가 배향함으로써 6현을 봉향하고 있다. (2006년 6월 21일)/ ○사업비:18억 6천만 원/ ○사업규모:건물9동, 주차장, 기타./ ○주요건물:사당, 강당, 문루, 삼문, 고직사, 서재, 화장실, 협문(daum 2010)

 

  이광준 : 永川李氏 선조님 문헌소개 2 : 학동일고: 이광준(李光俊)| ▩―···永川李氏(문서자료)/ [유장]행암공파[영양군24세]/ 2008.12.27 22:10/ //cafe.daum.net/ 서명  학동일고 (鶴洞逸稿) : 저자 성명 이광준 (李光俊), 자 준수 (俊秀), 호 학동 (鶴洞), 판사항 木活字本, 간년 1959/ 권수 2/  광곽   四周單邊, 半葉匡郭 : 15×22, 有界, 10行20字, 註雙行/ 판심   上下向花紋魚尾, 上下白口/ 책크기   20×30cm/ 사부분류   별집류/ 학동일고』조선 중기의 문신, 이광준(李光俊 ; 1531∼1609)의 시문집이다. 이광준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준수(俊秀), 호는 학동(鶴洞). 성균관생원 세헌(世憲)의 손자이며, 여해(汝諧)의 아들이다. 성균관의 유생으로 1561년(명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典籍), 형조좌랑(刑曹佐郞)·정랑(正郞)을 거쳐 하동현감(河東縣監), 창령현감(昌寧縣鑑)으로 나아갔다. 이어 다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1592년 문무겸비라 하여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아갔다. 이 때 왜구가 대거 침입하여 여러 읍이 무너지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쳤다. 이 공으로 통정(通政)으로 승진하고, 1599년 충주목사(忠州牧使), 1603년(선조 36)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江原都觀察使)를 역임했다. 그 뒤 모든 벼슬을 사직하고 구봉령(具鳳齡)과 더불어 덕의(德義)를 강론하며 지냈다.(daum 2010)

 

  이광준 : 학범정사 - 학동 이광준(鶴洞 李光俊) 공을 위해 세운 건물/ 2007.08.07/ 경북 의성군 금성면 산운1리 474/ 학록정사는 영천이씨 산운 입향조<山雲 入鄕祖>인 학동 이광준<鶴洞 李光俊> 공을 위해 세운 건물이며 공<公>은 창녕현감 예천군수를 지냈으며 1603년에는 강원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를 지냈다./ //nexruby.tistory.com/ Ruby Tour 여행(daum 2010)

 

  이광준 : 의성 소우당(素宇堂)/ 2009.10.29/ 수정계곡 아래 검은 구름이 감도는 것이 보여 마을이름을 산운이라 하였다. 영천이씨의 입향조는 학동 이광준(李光俊)이며, 조선 명종 때부터 영천이씨가 산운리에 거주하게 되었다. 옛부터 산운, 수정을 茶上, 茶中, 茶下로 불렀다고 하나 .../ //blog.naver.com/hanpig2000/ hanpig2000님의 블로그(daum 2010)

 

  이광준 : 영천이씨(永川李氏) 의성의 산운(山雲)마을/ 2009.11.16/ 영천이씨 집성촌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것. 그때 입향조가 조선시대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던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이후 의성에서 대감마을로 불리면서 양반촌으로 이름을 알린다. 2대째인 이민성(李民宬)은 참의를 지냈는데 중국에서.../ //blog.daum.net/jeon1954/ 여름과가을사이(daum 2010)

 

  이광준 : 의성 산운마을 점우당(漸于堂)/ 2009.03.31/ 연간에 영천이씨(永川李氏)가 처음 입향하였다고 전하며, 그 입향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 : 1531~1609)이라 한다. 점우당은 현 소유주인 이병직의 증조부인 죽파(竹坡) 이장섭(李章燮)이 1900.../ //blog.daum.net/kelim/ ▒☞ 계림의 국토박물관 순례 ☜▒(daum 2010)

 

  이광준(李光俊) [專門資料] : 발행처 한국국학진흥원/ 발행일 2009-01-23/ 자료소개  조선 중기의 문신, 이광준(李光俊 ; 1531∼1609)의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준계(俊季), 호는 학동(鶴洞). 성균관생원 세헌(世憲)의 손자이며, 여해(汝諧)의 아들이다. 성균관의 유생으로 1561년(명종 16)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전적(典籍), 형조좌랑(刑曹佐郞)·정랑(正郞)을 거쳐 하동현감(河東縣監), 창령현감(昌寧縣鑑)으로 나아갔다. 이어 다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1592년 문무겸비라 하여 강릉부...(daum 2010)

 

  이광준(李光俊) [專門資料] : 발행처 한국국학진흥원/ 발행일 2009-01-23/ 자료소개 : 조선 중기의 문신, 성균관생원. 1562년(명종17,壬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강릉부사가 되었으나,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행재(行在)에 갔다가 얼마 뒤에 충주목사가 됨. 1603년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시고, 그 뒤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구봉령(具鳳齡)과 덕의(德義)를 강론하며 지냄. 1609년 죽음.(daum 2010)

 

  이광준(李光俊) [專門資料] : 점우당(漸宇堂)/ 금성면 산운마을은 학동(鶴洞) 이광준(李光俊)이 입향한 후 400년을 넘게 영천이씨가 대를 이어 거주하는 곳이다. 점우당(漸于堂)은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말끔하게 정돈된 잔디마당과.../ 한국국학진흥원  | 2009.01.23(daum 2010)

 

  이광준(李光俊) : [시험관련 사항] : 왕/년도 : 명종(明宗) 17년, 과거시험연도 : 1562 임술, 시험명 : 별시(別試), 등위 : 병과15(丙科15)/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이광준(李光俊), 자 : 준계(俊季), 호 : 학동(鶴洞), 본관(本貫) : 영천(永川), 거주지(居住地) : 미상(未詳)/ [이력 및 기타 사항] : 전력(前歷) : 유학(幼學), 관직(官職) : 강원/감사(江原/監司)/ [가족사항] : 자(子) : 이민성(李民宬), 부(父) : 이여해(李汝諧), 조부(祖父) : 이세헌(李世憲), 처부(妻父) : 신권(申權)(daum 2010)

 

  이광준(李光俊) : 본관(本貫) 영천(永川), 시대(時代) (1531, 중종20-1609, 광해군 1), 자(字) 준계(俊季), 호(號) 학동(鶴洞)/ 이력(履歷) 영남문집 학동일고(鶴洞逸稿) 이광준(李光俊) : 부(父) 여해(汝諧) 거(居) 의성(義城), 2권1책, 행장(行狀) ; 김응조(金應祖) 찬(撰). 공(公)은 1531년(중종26) 출생,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성균관학(成均館學).전적(典籍), 형조(刑曹)의 좌(佐)·정랑(正郞)을 거쳐 하동현감(河東顯監),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나아갔다. 이어 다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내자사정(內資寺正)을 거쳐 1592년 문무겸비(文武兼備)라 하여 조의(朝議)로 특선(特選)되어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아갔다. 이때 왜구(倭寇)가 대학(大學)침입(侵入)하여 열파(列파)이 와해(瓦解)됨에 창의(倡義)하여 왜적(倭賊)을 패주(敗走)시킴으로써, 통정(通政)으로 포상(褒賞) 증질(增秩)되었다. 이후 1593년 왜적(倭賊)으로 회신(灰燼)된 중화(中和)부사(府使)로 특선(特選)되었고, 1599년에는 충주목사(忠州牧使), 1603년에 강원관찰사(江原觀察使)를 엮임하였다.(daum 2010)

 

  이광준(李光俊) : 1531년(중종26,辛卯)∼1609년(광해군1,己酉).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준계(俊季), 호는 학동(鶴洞). 성균관생원 휘 세헌(世憲) 할아버지의 손자이시며, 처부(妻父) 휘 신권(申權), 부 휘 여해(汝諧)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다. 성균관의 유생으로  1562년(명종17,壬戌)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내자시정(內資寺正)을 거쳐 강릉부사가 되셨으나, 감사와 뜻이 맞지 않아 그만두고, 행재(行在)에 가셨다가 얼마 뒤에 충주목사가 되셨다. 1603년(선조36,癸卯) 형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시고, 그 뒤에는 벼슬에 뜻이 없어 구봉령(具鳳齡)과 덕의(德義)를 강론하며 지내셨다. 【참고문헌】宣祖實錄, 國朝榜目, 星湖文集(daum 2010)

 

  이광준 : 문헌(文獻)/ 1. ■岳麓先生文集卷一  詩 輓鶴洞李監司光俊(악록선생문집권일  시 만학동이감사광준) 明時多閥閱。田畝樂餘光。福履尊三達。家聲重兩郞。去思留峴石。遺化詠南棠(명시다벌열。전무악여광。복리존삼달。가성중양랑。거사류현석。유화영남당)。他日循良傳。治功不數黃。 (。타일순량전。치공부수황。)// 2. ■旅軒先生續集卷之八 碑碣誌銘 觀察使鶴洞李公墓誌銘(■여헌선생속집권지팔 비갈지명 관찰사학동이공묘지명) : 公之胤前郡守民?。奉公行狀。來索壙銘。顯光辭以?荒。則郡守强之益堅。玆不獲已。遂據本狀而約之。公姓李氏。貫永川。諱光俊。字俊秀。其先有諱暉。當高麗忠烈王時。討哈丹賊有功。授別將。累官至上護軍。其子永堅。典工判書。卽公九代八代祖也。數世後。自永川移居于軍威縣西村。曾祖諱宗林。贈通訓大夫通禮院左通禮。祖諱世憲。成均進士。贈通政大夫承政院左承旨兼經筵參贊官。考諱汝諧。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三贈皆以公貴也。?一善金氏。卽判事諱成美之後。諱亨孫之女公。生於嘉靖辛卯七月己未。自幼篤志力學。登壬戌文科。由成均學諭。例陞至典籍。歷刑曹佐郞正郞河東昌寧縣監林川醴泉郡守。時兩親俱在巍齡。公克致專城之養。萬曆壬午。丁內艱。甲申。丁外艱。服?。除靑松府使。轉成均司成內資寺正江陵中和府使掌隷院判決事忠州牧使刑曹參議江原道觀察使。是公履歷也。歲己酉(1609)七月某日。終于正寢。享年七十九。朝廷遣禮官。賜弔祭。明年正月。葬義城西霞峴兌坐震向之原。公天性剛方。律己以正。其在成均。多士莫敢侮焉。居官守法。不畏强禦。壬辰春。拜江陵。赴任未幾。倭寇充斥。列郡瓦解。公?氣治兵。爲必守計。賊將吉成傳檄而行。持檄者來府。公卽令斬之。遂領軍據山。賊兵突至。終日力戰。斬獲甚多。行在所聞而嘉之。褒賞陞秩。旋以本道巡察憚公剛直。誣啓被罷。公於是直赴行在所。時海西中和郡。其在賊初。私相團結。討賊甚力。以此被?尤酷。朝廷褒以忠義。特陞爲府。仍命擇宰。公以副擬受除。旣赴任。擧境丘墟。儲無斗粟。天兵絡繹。糧餉克艱。加之以饑饉?疫。餓莩枕藉。公卽令吏民之潰散者。刻日聚集。莫敢少後。乃自削衣貶食。日夜拮据。?循瘡痍。賑救飢荒。又大設屯田。措給農具。操練卒伍。繕治軍器。重創學校。營建公?。事皆各有條理。一境戴若父母。盡心趨令。未數朞。流亡畢還。民物繁庶。荒蕪四闢。倉庾盈實。屢蒙嘉奬。特加表裏。瓜旣滿。又仍三載。府民建碑致慕。及聞公歿。聚哭設奠於碑下焉。公自觀察使期滿而還後。婆娑優遊者幾十年。雖在高齡。猶康寧無衰氣。兩子立朝。頻來省覲。朝夕列侍。怡愉如也。見者榮歎焉。夫人平山申氏。高麗太師壯節公諱崇謙之裔。曾祖允完縣令。祖宗輔奉事。考權宣務郞。夫人治家嚴而有法。敎訓諸子。一以義方。鄕里稱之。生於嘉靖己丑。終於萬曆己丑。享年六十一。合公墓。贈貞夫人。生三男一女。男長民宖。承仕郞。次民宬。文科左承旨。次民?。文科前郡守。女適鄭士信。文科判決事。承仕郞娶部將周命新女。生一女。適士人金光岳。承旨前娶士人權文淵女。後娶察訪南以仁女。俱無出。養弟之子廷機爲後。民?前娶生員李山岳女。早歿。後娶郡守洪龜祥女。生五男四女。男長廷相。生員。次廷?廷機廷材廷彬。俱業儒。女長適士人李?。次適察訪朴?衢。次適進士申弘望。次適士人宋世彬。判決事生二男二女。男長億。早天。次?。進士。女長適洗馬柳?。次適士人金時?。曾孫男女。總若干人。公剛明端重。識量幹局。不但百里之才。而位不稱德。然壽考福履。世罕與比。天之餉公者。其亦不爲不厚也哉。銘曰。起自鄕村。早?朱門。可謂擢也。八?專城。治必有聲。可謂績也。玉飾衣冠。方面任官。豈非達乎。祿及庭英。贈賁所生。豈非赫乎。三胤成行。仲李顯揚。慶之發也。壽享高齡。終待時平。福之益也。內外有孫。宜綿後昆。香火之陳。寧有熄哉。//

 

  3. ■旅軒先生續集卷之八 碑碣誌銘(여헌선생속집권지팔 비갈지명)/ 左承旨敬亭李公墓誌銘(좌승지경정이공묘지명) : 李氏籍永川。其一派遷居軍威。有七世。又分而遷義城。抵公爲二世。公諱民宬。字寬甫。曾祖贈承政院左承旨諱世憲。祖贈吏曹參判諱汝諧。考行江原道觀察使諱光俊。?貞夫人平山申氏。高麗太師壯節公諱崇謙之後。宣務郞權之女。公生于隆慶庚午一月壬申。幼而聰穎。僅七八歲。已曉文義。器度端重。藻思發越。見者已識其爲非凡。遂能致勤積功。以至成就。己丑。丁內艱。丁酉。登廷試。授承文院正字。辛丑。拜承政院注書。壬寅。除世子侍講院說書。陞司書。差奏請使書狀官往還。癸卯。拜禮曹佐郞。移兵曹佐郞兼知製敎。甲辰。陞正郞。乙巳。朝議欲補天官郞。爲當路者??。以公應濟州點馬之命。人有?其過海之危者。公笑應之曰。濯足南溟。振衣漢拏。豈不快哉。旣到州。鈴束從人。嚴飭三邑。點馬之外。一無所撓。?竣事。卽發廻船。辭朝四十餘日而復命。遂托以親病。?家南歸。戊申春。除司憲府持平。時朝廷方罪權奸。竝黜其趨附。公論事公平。一時?罹。賴公得免者亦多。有一諫長。構暗昧。將劾相臣李德馨。公終始力折之。?不得發論。未幾。遞拜文學。其冬。復拜持平。賜暇湖堂。己酉。選入玉堂。差遠接使從事。以親病不赴。秋。丁外艱。癸丑。拜禮曹正郞弘文修撰。陞校理。鄭造以掌令發論。請別處大妃。欲因爲廢黜計。獻納柳活附會之。公與一二僚上?。極論造活之罪。公論莫不?之。李爾瞻亦構陷李德馨。公極救之。終不能止。仍坐罷而歸。甲寅復拜校理。辭遞。乙卯。拜修撰。爾瞻又欲論李元翼。公知不能止。辭疾南歸。前在光海追尊生母時。百官進賀箋。公以知製敎。有魯國成風之語。爾瞻論以不敬。削奪官爵。自此閒廢多年。左右圖書。晝夜讀玩。殆忘寢食。癸亥反正。卽以宗簿寺正兼司憲府掌令。拜奏請使書狀官。當由海路。人皆危?。公怡然就途。及至皇都。朝論乖張。沮?百端。而呈文辨誣。周旋得宜。竟得請而還。甲子。以成均司成。陞秩除刑曹參議。病不赴。乙丑。拜同副承旨。未幾。陞左承旨。丙寅秋。辭遞復拜。又病辭。丁卯冬。又拜承旨。戊辰秋。辭遞。前後任?舌數十箇月。夙夜宥密。啓沃良多。事務雲委。擧行如流。院中皆稱道之。己巳夏。除刑曹參議。辭以病。八月十五日。疾終于正寢。享年六十。訃聞。自上震悼。特命致賻。中外士流。莫不嗟惜。其年十一月三日。葬于先大夫塋下。卽義城縣西霞峴兌坐震向之原也。翌年庚午秋。公之季前郡守民?。來謂顯光曰。葬兄之日。不及致銘于壙。故敢以請焉。顯光亦嘗有知許之分。不敢牢辭。遂奉閱其行狀。則大槪如右。公以英特之姿。加文學之博。通遍古籍。該貫無遺。留意世務。?有商量。可謂適用之才也。知公者。皆望其大有展布矣。而公於勢利所在。謙退遜避。若將?焉。故進寸退尺。前後出入臺閣。?勉而行。旋卽退歸。是以未嘗淹三年在朝。唯以杜門燕居。看書吟詩爲事。平生著述。無慮累千篇。淸新雅健。有古作者風。今收拾無所失墜。圖所以傳之也。然文章特其餘事耳。公之孝友。乃其所立本也。而行己也端。發言也和。處事也審。接人也寬。此皆實德也。公前娶士人權文淵之女。後娶察訪南以仁之女。俱無出。以郡守之子廷機爲後。方在?筵下。銘曰。生挺器材。幼礪志操。宦業外由。豈公之奧。無心俗營。絶意苟冒。不喜紛華。恒戒放倒。懼己流?。疾人驕傲。?立旣貞。自有攸好。貫穿書史。今古胸中。撰詠是事。追古人風。一味恬靜。俗子時同。沈淪猶適。心懷常融。退思雖堅。人望益隆。天奪遽促。萬事雲空。遺篇留世。必有知公。//

 

  4. ■栢潭先生文集卷之一 七言絶句(백담선생문집권지일 칠언절구) : 答李俊秀光俊。書其尾。氷壑淸風徹骨寒。人間熱惱隔仙山。病窓夜夜南飛夢(답이준수광준。서기미。빙학청풍철골한。인간열뇌격선산。병창야야남비몽) 。幾繞閑雲太乙壇。公所居義城縣。有氷山。六月常 。(。기요한운태을단。공소거의성현。유빙산。육월상호。)//

 

  5. 이광준(李光俊) 敬亭集(奎5348), 李民宬(朝鮮)著. 13卷 遺補 合4冊 木板本 31.5×20.5cm. 四周雙邊 半郭:20.7×14.9cm. 有界 10行 19字 注雙行. 敬亭 李民宬(1570∼1629)의 詩文集으로 그의 養子 李廷機가 1664년(顯宗  5)에  간행한 것으로 짐작된다. 李民宬의 본관은 永川, 字는 寬甫, 觀察使 李光俊의  아들.  1597년(宣祖 30) 庭試文科에 甲科로 급제. 注書, 說書, 兵曹正郞, 濟州點馬御史, 正言,  修撰 등을 지내고 仁祖反正 後엔 書狀官으로 復職, 明에 다녀와서 承旨에 오르고  丁卯胡亂이 일어나자 慶尙左道義兵將이 되어 활약했으며 吏曹參議에  이르렀다.  {卷1∼11}까지가 모두 詩이며 {卷12}에 賦, 辭, 序文이 실렸고, {卷13}에 酊庵記, 望日軒記  등  8편이 실렸으며, 論으로 東海無湖汐論, 守道不如守官論, 孟子不尊周論, 階伯論,  刪後無詩論과 3편의 祭文, 銘, 讚, 啓辭, 跋文, 書 등이 실려 있다. 이에 이어  「敬亭集補遺」라 하여 玉堂處置箚 1편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板本엔 13卷 외에 續集 4권이 더  있는데 續集 {卷1,2}가 朝天錄 上이며 {卷3}이 朝天錄 下이다. {卷4}에 明나라  皇帝에게 올린 奏本, 秘密狀啓 등이 실려 있다. 또 年譜도 2권이 있는데 {卷1}엔 敬亭의  年譜가 실려 있고 {卷2}는 부록으로 門下生 申悅道(1589∼1647)와 丁範祖가  쓴  行狀이  각각 있으며, 旅軒 張顯光(1554∼1637)이 지은 壙銘과 樊巖 蔡濟恭이 지은 墓碣銘을  위시하여 崔??, 申適道 등의 祭文, 輓詞가 실려 있다. 敬亭은 詩文과 글씨에  능했으며  특히 詩에 뛰어났다는 것은 仁祖·孝宗 당시의 巨儒인 龍洲趙絅, 旅軒 張顯光, 東溟  鄭斗卿등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趙絅은 序文 中에서 "公之文章, 不亶擅一國名,  有味乎天下之口也……"라 하여 우리나라에서만 文名을 독차지했을 뿐 아니라  天下의  口味를  맞게  하였다고 극찬했으며, 鄭斗卿 역시 序文에서 "披讀其文章  本諸六經  참以先秦漢魏六朝唐宋 흘于皇明 其有諸書 無不貫穿……有似小陵者  有似昌黎者  有似唐宋請名家者……向之聞於洛下稱文章巨擘者 信不虛矣"라 하여, 저 先秦에서부터 明에  이르기까지의  中國의 文章들을 모조리 섭렵했으며 따라서 그의 文章 솜씨는 唐의 杜甫를 닮은 것도  있고 韓愈와 흡사한 것도 있어 文章의 거벽이라고 들은 말이  있었는데  알고보니  헛소문이 아니라고 하였다. 다른 板本에 있는 年譜에 보편, 樊巖 蔡濟恭은 敬亭의  行狀을  撰한 가운데서, 敬亭이 燕京에 있을 때 中國人으로부터 李謫仙(李太白)이란  別稱을  들었다고 하였다. {권13}에 실린 論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1}守道不如守官論:唐의  柳宗元의 說을 반박하여 「守道不如守官」을 말한 孔子의 근본 의도는 道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함에 있다는 것을 논한 것이다. {2}孟子不尊周論:「孟子不尊周」를  말한  宋나라 司馬光의 말을 反駁한 것이다. {3}階伯論:황산 벌에서 있은 羅唐연합군과의  싸움에서 자기의 妻子까지 죽이면서 勇戰하다가 最後를 마친 百濟의 階伯將軍을 評하여  「殘忍」하다고 한 史臣들의 評에 對해 그 不當性을 力說하고, 千秋에 길이 빛날  忠臣임을 論한 것이다. {4}刪後無詩論:孔子가 詩 三百篇을 刪定한 뒤엔 世上에  詩가  없다고  慨嘆한 宋나라 邵雍의 見解에 우선 贊同한 뒤에 邵雍의 刪後란 궁극적으론  詩가  없다는 뜻보다는 그 詩를 刪定할 수 있는 聖人이 끊어졌다는 뜻일  것이란  自身의  견해를 붙인 것이다. {5}東海無潮汐論:우리나라의 東海엔 潮水가 없다는 說을  강력히  否認한  論이다. 東海는 끝없이 넓고 크기 때문에 그 조수가 우리의 눈에  뜨이지  않을  뿐이지 조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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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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