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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338:이번(1)(祝군청,보건소)
작성자장병창 @ 2016.04.08 06:21:09

  예천의 자랑(4338) : 이번(1)(附 예천군, 7일 성별영향분석 도평가에서 우수기관 수상...축하합니다/예천군, 경북 보건시택사업평가에서 최우수 기관 선정...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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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李蕃) : 1470(성종 1)-1528(중종 23), 개포면 경진리 검암(劍岩, 集勝亭 뒷마을) 사람, 자는 덕림(德林), 본관은 덕산(德山), 진산군수 운달(珍山郡守雲達)의 아들, 5세에 어머니(縣監 辛寶重의 딸)를 여의었으나, 힘써 공부하여 지절(志節)이 있었고, 사귀는 분들이 모두 당대의 명사(名士)들이었다. 1493년(성종 24) 윤 5월 2일 교생(校生)으로서 경상도내 유생(儒生)들의 제술시(製述試)의 답안지 시(詩)·부(賦)·의(義)를 내어 2위를 차지하였다. 유학(幼學)으로서 1496년(연산군 2) 증광 진사시에 3등 99위로 합격, 1504년(연산군 10) 식년 문과에 병과 14위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承文院正字)가 되더니, 박사(博士)를 거쳐 예조 좌랑(禮曹佐郞)으로 승진하고,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가 사간원 헌납(司諫院獻納)으로 내직(內職)에 들었다. 1510년(중종 5)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집안의 아버지 유산을 계모가 모두 차지했으나, 그것에 개이하지 않았다. 집안 사람들이 그 일을 이상히 여겨 물으니 대답하기를, "나는 비록 이 재물이 없어도 끼니를 거르지는 않을 것이나, 계모는 이 재물이 아니면 먹고살기 어려울 것이므로 불문에 붙인다." 라고 하니,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탄복했다. 상복(喪服)을 벗고 예조 정랑(禮曹正郞),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이 되고, 또 장령(掌令)으로 승진하고,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성균관 사성(成均館司成)과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옮겼다가 청주 목사(淸州牧使)로 나가서 정사(政事)를 청렴하고 공평하게 하니, 백성들이 그 분명한 결단에 감복하더니, 오래지 않아서 사간(司諫)의 임명을 받고 돌아갈 때 그 이삿짐이 매우 썰렁했다. 이윽고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가 되었다가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자리를 옮기고,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가 제수(除授)되더니, 연고가 있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옮겼으나, 스스로의 잘못은 아니었고, 순천 부사(順天府使)로 나갔다가 벼슬자리를 그만 두고 시골로 돌아온 몇 년이 지난 뒤에 공조 참의, 예조 참의, 호조 참의(戶曹參議), 승정원 동부승지,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 후 승정원 도승지(承政院都承旨)에 이르렀다. 평생에 남에게나 벗들에게 놀란 얼굴빛을 보인 적이 일찍이 없었고 사귐에 끝까지 달라짐이 없었고 벼슬살이에서도 명분을 중히 여기고 법칙에 어김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사사로이 감히 청탁하지 못하였고, 또 밝고 삼가며 욕심이 없으며 시속(時俗)에 아첨하지 않으니 세상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공경했다. 1555년(명종 10) 10월에 이자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에서 이르기를, "하늘이 공에게 진작에 순화 직량(醇和直諒)한 성품을 주었고, 거기에다가 빛나는 재주와 넉넉한 민첩성을 더 보태어 놓고도 더 높은 관작(官爵)을 안주시고, 또 수명(壽命)도 오래도록 연장해 주지 아니하시니, 이 어찌 명수(名數)가 아닐까 보냐? 공이 평생에 남에게나 벗들에게 놀란 일굴 빛을 보인 적이 일찍이 없었고, 사귐에 끝까지 달라짐이 없었고, 벼슬살이에서도 명분을 중이 여기고 법칙에 어김이 없었으니, 사람들이 사사로이 감히 청탁하지 못하였고, 또 밝고 삼가며 욕심이 없으며 시속에 아첨하지 아니하니, 세상 사람들이 이 때문에 공경했으나 벼슬자리 또한 이 때문에 현달(顯達)하지 못했다."하였다.(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86 1895, 司馬榜目, 文科榜目, 成宗實錄,  醴泉郡誌 193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6권/ 중종 3년(1508 무진 / 명 정덕(正德) 3년) 6월 7일(계유) 2번째 기사/ 이세영․이자견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조가 아뢰기를, ꡒ이제 갈린 대원은 어느 품(品)의 관직에 의망(擬望)해야 하겠습니까?ꡓ하니, 전교하기를, ꡒ대간에게 죄가 없으니 평천하라.ꡓ하였다. 이세영(李世英)을 대사헌(大司憲)으로 삼고, 이자견(李自堅)은 대사간(大司諫), 이세인(李世仁)은 부제학(副提學), 안팽수(安彭壽)는 집의(執義), 유희저(柳希渚)는 전한(典翰), 안처성(安處誠)은 지평(持平), 이번(李蕃)은 헌납(獻納), 윤탕(尹宕)은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25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6권/ 중종 3년(1508 무진 / 명 정덕(正德) 3년) 8월 20일(을유) 1번째 기사/ 이번 등이 전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다/ 조강(朝講)에 나아갔다. 헌납(獻納) 이번(李蕃)․지평(持平) 한효원(韓效元)이 전의 일을 아뢰고, 영사(領事) 김수동(金壽童)․특진관(特進官) 조계상(曺繼商)도 이를 아뢰고, 기사관(記事官) 윤인경(尹仁鏡)․소세량(蘇世良)도 사사(史事)를 누설한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273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9권/ 중종 4년(1509 기사 / 명 정덕(正德) 4년) 8월 5일(을축) 6번째 기사/ 권균․김전․정수강․권민수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균(權鈞)으로 형조 판서를 삼고, 김전(金詮)으로 사헌부 대사헌을 삼고, 정수강(丁壽崗)으로 사간원 대사간을 삼고, 권민수(權敏手)로 집의(執義)를 삼고, 김극핍(金克?)으로 사간(司諫)을 삼고 허굉(許?)으로 장령(掌令)을 삼고, 한효원(韓效元)으로 장령을 삼고, 김식(金湜)으로 지평(持平)을 삼고, 이번(李蕃)으로 지평을 삼고, 오영년(吳永年)으로 헌납(獻納)을 삼고, 유인귀(柳仁貴)로 홍문관 교리를 삼고, 신엄(申儼)으로 교리를 삼고, 유관(柳灌)으로 정언(正言)을 삼고, 권희맹(權希孟)으로 정언을 삼고, 성세창(成世昌)으로 사과(司果)를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ꡒ세창(世昌)이 폐조(廢朝) 때에 그 아비 성현(成俔)의 죄에 연좌되어 청주(淸州)에 정속(定屬)되었었는데, 아비의 상중에 있으면서도 항시 기생(妓生) 하나와 사통(私通)하였었다.ꡓ 이때 조방언(趙邦彦)이 고을 교수(敎授)로 있었는데 자세하게 그 사정을 알고 있으므로, 세창은 항시 방언이 발설할까 두려워하여 무릇 방언의 요청을 받아들여 따르지 않는 것이 없었다. 세창이 이조 정랑(吏曹正郞)이 되자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ꡐ만약 조방언의 편지를 얻기만 하면 벼슬을 할 수 있다.ꡑ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35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물(人物) / *윤리-강상(綱常) / *역사-편사(編史)(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15권/ 중종 7년(1512 임신 / 명 정덕(正德) 7년) 5월 7일(경술) 4번째 기사/ 김전․박광영․오영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김전(金詮)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박광영(朴光榮)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오영년(吳永年)․윤세림(尹世霖)을 장령(掌令)으로, 김선(金璇)․이번(李蕃)을 지평(持平)으로, 박상(朴祥)을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574면/ 【분류】 *인사(人事)(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16권/ 중종 7년(1512 임신 / 명 정덕(正德) 7년) 8월 11일(임자) 9번째 기사/ 이자건․성운․이언호 등을 관직에 임명하다/ 이자건(李自健)을 대사헌으로, 성운(成雲)을 집의(執義)로, 이언호(李彦浩)․김굉(金?)을 장령(掌令)으로, 이번(李蕃)․윤탕(尹宕)을 지평(持平)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60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16권/ 중종 7년(1512 임신 / 명 정덕(正德) 7년) 9월 11일(임오) 1번째 기사/ 지평 이번이 절도사 관찰사들이 모두 가솔을 데리고 가지 말도록 건의하다/ 조강에 나아갔다. 헌납 경숙(慶?)․지평 이번(李蕃)이 사냥 및 강징(姜?)․안방형(安邦炯)․이위(李緯) 등의 일을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번이 아뢰기를, ꡒ신이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 때에 보니, 감영(監營) 아전(衙前)에 정원(定員) 이외의 인원이 쓸데없이 많고 또 다소 부실(富實)한 자로서 군사(軍士)가 될 만한 사람들이 모두 아전으로 투속하므로, 이 때문에 군사는 약화하고 아전은 충실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절도사․관찰사를 모두 가솔을 데리고 가지 말도록 한다면, 백성들이 아전으로 투속하는 폐단이 없어지고 군사도 자연 충족하여질 것입니다.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613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政論)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人事) / *군사(軍事)(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18권/ 중종 8년(1513 계유 / 명 정덕(正德) 8년) 5월 24일(신묘) 4번째 기사/ 이번을 장령으로 삼다/ 이번(李蕃)을 장령(掌令)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4책 66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20권/ 중종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6월 19일(경술) 3번째 기사/ 이유청․손주․성몽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유청(李惟淸)을 호조 참판으로, 손주(孫澍)를 병조 참판으로, 성몽정(成夢井)을 대사헌으로, 조계상(曺繼商)을 경상도 관찰사로, 최숙생(崔淑生)을 대사간으로, 윤은필(尹殷弼)을 집의로, 이현보(李賢輔)를 사간으로, 박호(朴壕)․이번(李蕃)을 장령으로, 유부(柳溥)․신희정(辛熙貞)을 지평으로, 김선(金璇)을 헌납으로, 조방언(趙邦彦)을 홍문관 교리로, 조한필(曹漢弼)․이수동(李壽童)을 정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11월 20일(무인) 1번째 기사/ 정원에서 장령 이번의 봉전을 감할 수 없음을 아뢰다/ 정원이 아뢰기를, ꡒ장령(掌令) 이번(李蕃)은 전일에 사재감(司宰監)에 임명되어 5개월이 지났으니 봉전을 감하는 것은 면할 수 없습니다.ꡓ하니, ꡐ체직하라ꡑ 전교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43면/ 【분류】 *재정-국용(國用) / *재정-창고(倉庫)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21권/ 중종 9년(1514 갑술 / 명 정덕(正德) 9년) 12월 11일(기해) 7번째 기사/ 이번을 사헌부 장령으로 삼다/ 이번(李蕃)을 사헌부 장령(司憲府掌令)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4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21권/ 중종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3월 2일(기미) 2번째 기사/ 정광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여 장례를 준비시키다/ 정광필을 삼도감 총호사(三都監總護使)로 삼고, 병조 판서 신용개․예조 판서 김전․우참찬 이계맹을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로 삼고, 군기시 정 이위(李偉)․상의원 정 윤세호(尹世豪)․사복시 정 성운(成雲)․이조 정랑 소세양(蘇世讓)․예조 정랑 반석평(潘碩枰)․호조 좌랑 신승조(申承?)를 낭청(郞廳)으로, 우찬성 장순손․이조 판서 박열․호조 판서 고형산을 국장 도감 제조(國葬都監提調)로 삼고, 제용감 정(濟用監正) 유인귀(柳仁貴)․내자시 정(內資寺正) 김굉․군기시 부정(軍器寺副正) 조호(曺浩)․의정부 사인 성세창(成世昌)․홍문관 부응교 홍언필(洪彦弼)․선교감 첨정 이기(李?)․공조 정랑 이원화(李元和)․예조 좌랑 정응린(鄭應麟) 등을 낭청으로, 지중추부사 안윤덕(安潤德)․유담년(柳聃年)․남곤을 산릉 도감 제조(山陵都監提調)로, 사재감 정(司宰監正) 구지신(具之愼)․종부시 정(宗簿寺正) 윤세림(尹世霖)․선공감 부정 이번(李蕃)․내섬시 부정 박기수(朴期壽)․사재감 부정 박담손(朴聃孫)․상의원 첨정(尙衣院僉正) 이은(李誾)․병조 정랑 임추(任樞)․형조 정랑 이만손(李萬孫) 신한(申瀚)․승문원 교리 연구령(延九齡) 등을 낭청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63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23권/ 중종 10년(1515 을해 / 명 정덕(正德) 10년) 12월 6일(무오) 1번째 기사/ 박열․이자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열(朴閱)을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으로, 이자견(李自堅)을 호조 참판(戶曹參判)으로, 임유겸(任由謙)을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으로, 김근사를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행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으로, 이번(李蕃)을 집의(執義)로, 유관(柳灌)을 장령(掌令)으로, 홍언필(洪彦弼)을 응교(應敎)로, 유윤덕(柳潤德)․윤지형(尹止衡)을 지평(持平)으로, 신광한(申光漢)을 헌납(獻納)으로, 김영(金瑛)을 교리(校理)로, 박수문(朴守紋)을 부교리로, 박세희(朴世熹)를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127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26권/ 중종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8월 11일(경신) 6번째 기사/ 박광영․성세창․이번․유관․공서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광영(朴光榮)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성세창(成世昌)을 사헌부 집의로, 이번(李蕃)을 사간으로, 유관(柳灌)․공서린(孔瑞麟)을 장령으로, 한윤창(韓胤昌)․이수동(李壽童)을 지평으로, 문관(文瓘)을 헌납으로, 윤자임(尹自任)을 정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20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26권/ 중종 11년(1516 병자 / 명 정덕(正德) 11년) 8월 13일(임술) 1번째 기사/ 집의 성세창과 사간 이번 등이 남곤․임권의 출사를 명할 것을 청하니 따르다/ 집의 성세창과 사간 이번 등이 남곤․임권의 출사를 명할 것을 청하니 이를 명소(命召)하여 출사케 하였다. 곤과 권이 다시 사퇴하였으나 허락치 않으므로 드디어 출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20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39권/ 중종 15년(1520 경진 / 명 정덕(正德) 15년) 4월 3일(경신) 4번째 기사/ 권균․채침․이번․김극개․이겸․황사우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권균(權鈞)을 예조 판서(禮曹判書)로, 채침(蔡?)을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로, 이번(李蕃)을 사간원 사간(司諫院司諫)으로, 김극개(金克愷)․이겸(李謙)을 장령(掌令)으로, 황사우(黃士祐)를 지평(持平)으로, 김영(金瑛)을 홍문관 부응교(弘文館副應敎)로, 소세량(蘇世良)․황효헌(黃孝獻)을 수찬(修撰)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64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39권/ 중종 15년(1520 경진 / 명 정덕(正德) 15년) 6월 14일(경오) 1번째 기사/ 사간 이번이 죄인이 복죄한 형상을 분명히 드러내어 중외에 일러야 함을 아뢰다/ 조강에 나아갔다. 영사(領事) 김전(金詮)이 아뢰기를, ꡒ진회(秦檜)와 조정(趙鼎)은 양립할 수 없는 형세이므로, 진회가 죄에 빠뜨리고자 몰래 흉당(凶黨)을 끌어다가 우익(羽翼)으로 삼아 언로(言路)에 벌여 두고 정인(正人)의 변명하기 어려운 죄를 엮어 만들어서 제 간사한 꾀를 성취하였는데, 접때 용사(用事)하던 무리가 바로 이와 서로 비슷하니, 소인이 술수를 쓰는 것은 이처럼 두렵습니다.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소인은 과연 제 무리를 끌어다가 두는 것이나, 당시 대간의 말 중에도 어찌 쓸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겠는가?ꡓ하매, 사간(司諫) 이번(李蕃)이 아뢰기를, ꡒ군자와 소인의 구별은 예전부터 어려운 것이나, 윗사람이 잘 밝혀서 살피기만 한다면 천하의 사정(邪正)이 어찌 그 정상을 숨길 수 있겠습니까?ꡓ하니, 상이 이르기를, ꡒ접때는 사람을 지극히 좁게 써서 다만 한두 사람을 의망(擬望)하여 반드시 그 하나를 제수하였으니 매우 부당하다.ꡓ하였다. 이번이 아뢰기를, ꡒ도직(盜直)의 설치는 지극히 분요(分擾)합니다. 이번에 죄인을 잡았으나, 중외에 분명히 드러내어 알리지 않았으므로 중외 사람들 중에 모르는 자가 많으니, 죄인이 복죄(伏罪)한 형상을 분명히 드러내어 중외에 일러서 분요가 없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ꡐ그리하라ꡑ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5책 666면/ 【분류】 *왕실-경연(經筵) / *정론-정론(政論) / *역사-고사(故事) / *사법-치안(治安)(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 신사 / 명 정덕(正德) 16년) 6월 6일(병술) 7번째 기사/ 이윤번․이번․이귀령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윤번(李允蕃)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이번(李蕃)을 사간으로, 이귀령(李龜齡)을 헌납(獻納)으로, 김희열(金希說)을 정언(正言)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6책 4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42권/ 중종 16년(1521 신사 / 명 정덕(正德) 16년) 7월 12일(신유) 3번째 기사/ 신영홍․이번․남세준․조수함․권희맹 등에게 가자하다/ 전교하기를, ꡒ도감 낭관 우통례(右通禮) 신영홍(申永洪)․사복시 정(司僕寺正) 이번(李蕃)․선공감 정(繕工監正) 남세준(南世準)․봉상시 첨정(奉常寺僉正) 남효의(南孝義)․정주 목사(定州牧使) 허순(許淳)․판관(判官) 조수함(趙守?)․장악원 정(掌樂院正) 권희맹(權希孟)․나주 판관(羅州判官) 김경사(金敬思)․통사(通事) 안훈(安訓) 이화종(李和宗) 이세규(李世規)는 각각 한 품계씩 가자하고【영홍․이번․세준․희맹․안훈․화종은 당상에 오르고, 허순은 가선(嘉善)을 제수받았다.】도감 낭관 사도시 부정(司?寺副正) 김극개(金克愷)․홍문관 응교 채침(蔡?)․예빈시 첨정(禮賓寺僉正) 이희보(李希輔)․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홍수(洪脩)․사섬시 첨정(司贍寺僉正) 남효순(南孝純)․감조관 군기시 판관(監造官軍器寺判官) 박비(朴?)․상의원 판관(尙衣院判官) 유상령(柳尙齡)은 직을 올리고, 소통사(小通事) 김석숭(金石崇)은 실직(實職)를 제수하고, 도감상사 강례습독관(都監常仕講隷習讀官) 안처륜(安處倫)․박사증(朴思曾)은 녹직(祿職)으로 올려 제수하고, 분예빈시 별좌(分禮賓寺別坐) 김응청(金應淸)․홍윤선(洪潤先)과 군기시 별제(軍器寺別提) 윤곤손(尹?孫)은 녹직을 제수하고, 상사(上使)의 삼촌 조카 김종건(金從建)은 어모군직(禦侮軍職)을 제수하고, 오진형(吳進亨)․최석이(崔石伊)는 각각 한 품계씩 가자하고, 부사의 동복 형인 진석강(陳碩江)은 절충(折衝)을 더하고, 석연(碩淵)․석한(碩瀚)과 삼촌 조카 진현(陳賢)은 각각 한 품계씩을 가자하고 삼촌 조카 진빈(陳贇)은 군직(軍職)으로 올리라.ꡓ하고, 또 전교하기를, ꡒ도승지는 명나라 사신에게 가서 ꡐ대인이 청한 바는 지금 다 그대로 하였다. 그러나 종건에게는 사복(司僕)을 제수해야겠는데 지금 빈 자리가 없어서 은대(銀帶)를 내리고 승직시켰다.ꡑ 하고, 겸하여 15일에 연회를 베풀겠다는 뜻을 알리라.ꡓ하였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6책 53면/ 【분류】 *외교-명(明) / *인사-관리(管理)(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43권/ 중종 16년(1521 신사 / 명 정덕(正德) 16년) 11월 9일(정사) 4번째 기사/ 신상․윤은보․이번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신상(申?)을 전라도 관찰사로, 윤은보(尹殷輔)를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번(李蕃)을 사간원 대사간으로, 최세절(崔世節)을 장례원 판결사(掌隷院判決事)로, 정응린(鄭應麟)을 사헌부 집의로, 윤인경(尹仁鏡)을 사간원 사간으로, 윤지형(尹止衡)을 사헌부 장령으로, 황사우(黃士佑)․박명손(朴命孫)을 지평으로, 이영부(李英符)를 헌납으로, 김안정(金安鼎)을 홍문관 교리로, 이반(李?)과 장계문(張季文)을 정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6책 8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번 [記事] : 중종실록 43권/ 중종 17년(1522 임오 / 명 가정(嘉靖) 1년) 1월 25일(계유) 3번째 기사/ 윤은보․이번 등이 이장곤에 관해 대신의 의견을 따르지 말 것을 아뢰다/ 대사헌 윤은보(尹殷輔)․대사간 이번(李蕃) 등이 차자 올리기를, ꡒ신 등이, 이장곤(李長坤)에게 고신(告身)을 도로 줌은 공편하지 못한다는 일을 가지고 한 달이 넘도록 논계(論啓)하였으나, 아직까지 윤허를 받지 못하니 실망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대범 임금이 마음을 털어놓으면서 중한 일을 부탁하게 되는 사람은 대신인 법이니, 대신이 된 사람은 마땅히 마음과 힘을 다해 도리대로 나라에 헌신하여 변란을 치르면서도 지조를 두 가지로 하지 않고, 죽음에 당하여도 몸을 돌보지 않아야 거의 임금이 중한 일을 부탁한 뜻에 부응하게 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당초에 장곤을 크게 임용(任用)할 만하다고 여기시어, 하급(下級) 관료(官僚)에서 발탁하여 공경(公卿)의 자리에 두시되, 나가면 장성(長城)처럼 믿으시고 들어오면 주석(柱石)처럼 의지하시게 되어, 돌보고 신임하기를 지극하게 하셨다 할 수 있으니, 마땅히 성의를 다해 보답할 일을 하기를 죽음을 피하지 않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나이 젊은 신진의 부류들에게 야합하였고, 전조(銓曹)의 장관이 되어서는 가려서 임용한 것이, 모두 경박한 일 만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을 권력있는 요직에 배치하여 실로 난의 계기가 되었으니, 어찌 그의 지혜가 미치지 못한 것이겠습니까? 대개 환득 환실(患得患失)하여 자신만 온전할 자리를 도모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니, 대신의 지조가 어찌 이런 것이겠습니까? 이에 앞서 대간(臺諫)이 공론에 따라 여러 날을 복합(伏閤)하면서 먼 변방으로 귀양보내기를 청하자, 전하께서 단지 고신(告身)만 거두고 극진하게 용납하여 너그럽게 용서하시므로 공론이 이미 쾌하지 못하게 여겼었는데, 겨우 한 달이 지나자 갑자기 도로 돌려주도록 명하셨으니, 이는 어찌 전하께서 죄있는 신하는 돌보시면서 명령이 일정하지 않음은 돌보지 않으십니까? 전하께서 매양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것으로 말을 하시지만, 신 등은 더욱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이 진실로 사리에 합당한 것이라면 전하께서 마땅히 허심 탄회하게 받아들이셔야 하지만 만일 사리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어찌 대신들의 말이라고 해서 구차하게 따를 수 있겠습니까? 지금 대신들이 한편으로는 성상의 뜻에 영합하고 한편으로는 장곤을 비호하여, 이미 고신(告身)을 거두어야 한다고 하였다가 다시 딴 말을 하여 성상께서 따를 바를 모르게 하고 공론이 오래 굴하도록 하였으니, 대신들의 의논이 사리에 합당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 대신들의 말을 따르지 마시고 시급히 성명(成命)을 거두시어 공론이 통쾌해지게 하소서.ꡓ/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16책 95면/ 【분류】 *정론-간쟁(諫諍)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www.history.go.kr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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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7일 성별영향분석 도평가에서 우수기관 수상...축하합니다.

 

  예천군 수상(醴泉郡, 性別影響分析評價 ‘優秀機關’ 受賞 : 道知事 機關表彰 受賞) [記事] : 예천군은 2016년 4월 7일 오전 10시 경주 더케이호텔에서 열린 성별영향분석평가 워크숍에 참석해 23개 시ㆍ군을 대상으로 실시한 성별영향분석평가에서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도지사 기관표창을 수상했다. 성별영향분석평가란 법령ㆍ계획ㆍ사업 등 주요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과정에서 여성과 남성의 특성과 사회ㆍ경제적 격차 등의 요인들을 체계적으로 분석하고 평가해 해당 정책이 성 평등 실현에 기여하도록 하는 제도이다. 이에, 예천군은 성차별적 요소를 제거하고 남녀에게 공평한 혜택을 주도록 하는 성별영향분석평가제도의 안정적 정착과 운영 활성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우수기관으로 선정되어 ‘우수상’ 을 수상하게 됐다. 또한, 이날 행사는 제도의 실질적인 효과를 높이고 추진기관 간 정보공유 및 발전방안을 모색하기 위해 성별영향분석평가 추진과제 평가결과 및 발굴된 우수사례를 발표하는 시간도 함께 마련됐다. 예천군 주민복지과장은 “앞으로도 예천군이 추진하는 주요 정책에 대한 체계적인 성별영향분석평가로 성차별적 원인을 사전에 점검하고 예방하는 등 실질적인 성 평등 실현에 앞장 설 계획” 이라고 밝혔다.(醴泉뉴스 201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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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경북 보건시택사업평가에서 최우수 기관 선정...축하합니다.

 

  예천군보건소(‘온 郡民이 健康한 醴泉! 함께 웃는 幸福한 醴泉! 2015年 慶北 保健施策事業 評價에서 ‘最優秀 機關’ 選定) [記事] : 예천군은 2016년 4월 7일 상주시문화회관에서 열린 ‘제44회 경상북도 보건의 날’ 기념식 행사에서 2015년 경상북도 보건시책사업 평가에서 ‘최우수’ 기관으로 선정되어 기관 표창을 수상했다. 예천군은 ‘온 군민이 건강한 예천! 함께 웃는 행복한 예천!’을 비전으로 17개 평가지표에서 맞춤형 통합건강서비스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결과 각 분야에서 높은 성적을 받아 2015년 경상북도 보건시책사업 평가에서 ‘경상북도 최우수 기관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보건시책사업 우수기관 선정을 위해 25개 시ㆍ군 보건소를 대상으로 2015년 실적을 기준으로 정부합동평가지표와 보건정책사업 충실도, 도정발전기여도 등 보건의료사업 전 분야에 걸쳐 종합적으로 평가했다. 이번 수상으로 예천군보건소는 2015년도 치매극복관리사업 최우수, 저출산극복사업 우수 기관상 등 보건사업 각 분야에서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어 경상북도 보건사업의 선두기관으로 자리매김했다. 보건소 관계자는 “이번 수상을 계기로 지역주민에게 맞는 새로운 건강사업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개인별 맞춤형건강관리와 보건향상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醴泉뉴스 2016.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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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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