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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4388) : 이열도(1)(附 예천방문 1,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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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열도(李閱道) : 1538(중종 33)-1591(선조 24), 호명면 백송리(白金里) 출신, 자는 정가(靜可), 호는 우암(遇岩), 본관은 진보, 하(河)의 손자, 기린도찰방 굉(察訪宏)의 아들, 진남(鎭南, 參奉)ㆍ흥남(興南)ㆍ경남(慶南, 進士)의 아버지이다. 퇴계 이황(退溪李滉)의 종손(從孫) 겸 제자, 어려서부터 특출한 재예(才藝)와 영민(英敏)한 자질(資質)을 지니고 13세에 모친상(母親喪)을 당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호곡(號哭)하며 모든 일을 어른과 같이 하니, 향당(鄕黨)이 모두 그 효성(孝誠)에 감복(感服)하였고, 그때 벌써 4서 3경(四書三經)을 독파(讀破)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73년(선조 7) 가을에 아버지가 임지에서 별세하였다는 기별을 받고 달려가 시신(屍身)을 받들어 모셔와 장사(葬事)를 치루고 3년을 여묘(廬墓)하였는데, 그 곳을 지금도 '빈소골(殯所洞)'이라고 부른다. 복을 벗은 다음 1576년(선조 9)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 들고, 정자(正字), 박사,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예조 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다가 오래지 아니하여 뜻이 맞지 않는 동료(同僚)들의 시기로 강원도 회양군 화북면에 있는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으로 나갔고, 임기를 마치고, 고령 현감(高靈縣監)으로 부임하였을 때 청렴결백하고 선정을 베풀어 그의 어진 덕에 감복한 주민들이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그 뜻을 기리고 있다. 이어 평안도 도사(平安道都事)가 되고,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제수되었고, 이어 금산 군수(金山郡守), 강원도 도사(江原道都事)가 되었으나 환로에 큰 뜻이 없던 그는 사양하고 부임하지 않았다. 당시 경산 지방(慶山地方)이 흉년으로 폐국의 지경에 이르자 조정 대신들이 모두 그를 그 현감으로 추천하니 이 때만은 그도 사양하지 못하고 부임하여 녹봉을 굶주린 백성들에게 골고루 나눠주며 생활이 곤란한 주민들을 구휼하기에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 공평한 선정을 베풀고 충효 사상을 고취시키며 영농 방법을 지도하여 1년이 채 못되어 태평 안민의 고을로 만들었으니, 백성들의 어려움을 보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희생해 가며 애쓰는 그의 어진 덕품(德品)과 탁월한 지도력을 엿볼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찰사(觀察使)의 부름을 받고 가서 보니, 책 제목을 써달라는 개인적인 부탁이므로 그가 말하기를, "공사(公事) 아닌 사사(私事)로운 책 제목을 쓰라 함은 모욕적인 처사이므로 쓰지 못하겠소"라고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벼슬을 버리고 그 길로 고향 백송리(白松里)로 돌아와 내성천(乃城川) 층암 절벽대(層岩絶壁臺)인 선몽대(仙夢臺) 위에 1563년(명종 18)에 정자를 창건하였다. 이 때 이황(李滉)이 축하하러 와서 현판 3자와 한 구절의 시를 친필로 써 주었다. 그 후는 다시 벼슬하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으니, 그 청렴결백한 지조를 알 수 있다. 만약 그 청을 듣고 상관의 소청을 따랐으면 벼슬이 승진되고 출세도 하였을 것이나 사(私)를 물리치고 개결한 지조를 고수하여 선비의 청렴한 사표(師表)가 되었다. 호명면 월포리 우포리(愚浦里)의 본가에서 별세하여 묘는 호명면 백송리 백금리 난산 손좌(白金里卵山巽坐)에 있다. 여러 선비들이 지은 시 수백 편은 <선몽대지(仙蒙臺誌)> 2권 1질(秩)에 실려 간행되었다. 벼슬길에서는 청렴 강직했고, 가정에서는 효성이 지극했고, 생활면에서는 자연을 벗하고 즐길 줄 아는 멋을 지녔고, 당시 명필이었다. 성품이 고고(孤高)하고 지절(志節)이 있어 세속에 아첨하지 않았고, 자제들에게 항상 훈계하기를, "과거(科擧)에 급제하고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은 진실로 분수에 달렸고, 벼슬자리의 높고 낮음은 명수(命壽)가 막히고 트임에 달렸으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 만약 욕심을 부려서 억지로 현달(賢達)하고자 하면 굴함이 클 것이요 세리(勢利)를 넘보면 몸을 망치는 것과 같다"라고 했고, 발자취가 한 번도 떠들석한 곳에 들지 않았으니, 집안 형편이 매우 가난했으되 공정(公正)하기가 매우 심했다. 혹 친구들이 재산을 윤택하게 하는 방도를 강구하라고 하면, 그는, "우리 집은 본시부터 유도(儒道)를 숭상하여 지금까지 전하여 내려왔는데, 내가 어찌 분수 밖의 것을 바라서 집안의 전통을 무너뜨릴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 치가(治家)에 법도가 있고, 안살림도 그러해서 상(喪)과 제(祭)에는 한결같이 퇴계 이황 가례(退溪李滉家禮) 대로 행하였으니 반드시 조상의 기일(忌日)이나 명절이 되면 경(敬)과 성(誠)으로 그 정성을 하여 정갈스럽게 했다. 그리고 매양 아름다운 경치를 만나면 문득 소요하면서 만사를 잊었다. 은계도 찰방(銀溪道察訪)일 적에는 관동(關東) 지방(江原道 一帶)을 유상(遊賞)하여 발자취가 널리 두루 닿았고, 집에서 두어 마정쯤 되는 곳에 가파른 바위 언덕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여기에 대(臺)를 쌓았고 선몽대(仙夢臺)라고 편액(篇額)한 것은 이황(李滉)이다.(襄陽誌 1661, 遇岩集, 醴泉郡邑誌 1786, 醴泉郡誌 1939, 朝鮮寰輿勝覽 1929, 族譜)
이열도(李閱道) : 1538~1581, 본관은 진보(眞寶)요, 호는 우암, 字는 정가(瀞可)이며, 호명면 백송의 찰방(察訪) 굉(宏)의 아들이고, 퇴계선생(退溪先生)의 종손이다. 13살 나던 해 모친상을 당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호곡하며 모든 일을 어른과 같이 하니 향당이 모두 그 효성에 감복하였으며 그때 벌써 4서 3경을 독파하여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1576년 별시 문과 二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고 벼슬이 예조좌랑(禮曹佐郞)에 이르고 만년에 선몽대(仙夢臺)를 지어 놓고 자연의 절경을 마음껏 즐겼으며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많이 노닐고 시를 읊었으며 호명의 백송리에 살았다.(虎鳴面홈페이지 2013)
이열도(李閱道, 1538~1591) | 내 고향 예천 백송/ 松河 李翰邦 | 2010.08.11. 00:26/ //cafe.daum.net/yngeo/ 1.이열도/ 이열도(李閱道, 1538~1591)는 호명면 백송리 행소리(白金里) 마을 출신이다. 자는 정가(靜可), 호는 우암(遇岩), 본관은 진성이다. 이굉(李宏)의 아들로 종조부 이황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1576년(선조 9)에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 벼슬을 시작으로 박사를 거쳐 사헌부감찰, 예조좌랑, 은계도찰방 등을 지내고, 고령현감으로 나가 선정비를 남겼다. 그 후 평안도사, 형조정랑, 금산(현 금천)군수를 거쳐 강원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 경산 지방에 흉년이 들자 조정 대신들의 추천으로 현령으로 나가 굶주린 백성에게 봉급까지 줄 정도로 정성을 다 쏟았다. 그뿐 아니라 공평한 일 처리, 충효 사상 고취, 영농 방법 지도 등으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찰사가 불러 책 제목을 써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열도는 당대의 명필가였기 때문이다. 이열도가 이르기를 “사사로운 책 제목을 쓰기 위해 임지를 떠나게 함은 모욕적인 처사입니다”며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1563년에 내성천의 절벽 위에 ‘선몽대(仙夢臺)’를 짓고, 제자를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 후 여러 번 벼슬에 불렸으나 오르지 않았다. 다만 자연을 벗하며 여러 선비와 시를 즐겼는데, 이때 지은 시 수백 편이 『선몽대지』2권에 실려 간행되었다. 퇴계 이황도 63세 때 선몽대의 창건을 축하하러 와서 현판 석 자와 한 구절의 시를 친필로 써준 것이 지금도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도 아버지 정재원이 예천군수로 있을 때 이곳에 들르기도 하였고, 다산의 선조가 창건 당시 지은 시가 남아 있기도 하다. 호명면 월포리 일하던 방에서 타계하였는데, 무덤은 백송리 난산(卵山)에 있다. 이열도는 아홉 고을의 골원과 중앙 요직을 할 때 청렴 강직하였고, 가정에서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1573년에 시묘한 곳을 지금도 ‘빈소골’이라 한다.
2.진보이씨 : 이열도(李閱道)의 자(字)는 정가(靜可)이며, 호(號)는 우암(遇巖)이다. 진보이씨(眞寶李氏)로 송안군(松安君) 이자수(李子脩)에게서 비롯되었다. 증조는 이식(李埴)인데 좌찬성 벼슬을 증직받았고, 할아버지는 이하(李河)인데 예천 훈도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이굉(李宏)인데 기린도찰방(?猖?道察訪)을 지냈다. 훈도공이 처음 예안에서 예천 금곡리(金谷里)로 이사했고, 찰방공이 또 금곡에서 그 고을 남쪽 백금리(白金里)로 옮겼다. 어머니는 안동김씨인데 부장(部將) 김수량(金遂良)의 딸이다. 이열도는 1538년 무술년에 백금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학업에 뜻을 두고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통달하여, 증조인 퇴계 이황이 매우 사랑하여 훌륭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경술년에 모친상을 당하니 나이 겨우 열세 살이었는데 밤낮으로 곡을 하고, 정성을 다하여 예문을 갖추어 마치 노성인과 같았다. 계유년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시자 한결같이 가례를 따랐고, 묘 옆에서 3년간 여막을 지켰다. 부인은 영양남씨(英陽南氏) 목사 남희석(南希奭)의 딸이고 여사(女士)의 행실이 있었다. 이열도보다 한 달 뒤에 돌아가셨는데 이열도 무덤에 합장하였다. 아들 이진남(李鎭南)은 참봉을 하였고, 임난 때 초의장군 곽재우를 따라 의거하였다. 다음은 이흥남(李興南)이니 계공랑이고, 다음 이경남(李慶南)은 진사다. 사위는 남흥달(南興達)인데 진사이고, 금우성(琴友聖)과 이영남(李榮男)과 조우인(曺友仁)은 승지(承旨)이다. 조우인은 정철의『관동별곡』 속편으로 『속 관동별곡(續關東別曲)』이라는 가사도 지었는데, 정철이 닿지 못한 곳에 대해 언급하고, 정철이 언급한 곳과는 중복을 피했다. 늙어서는 상주군 사벌면 매호(梅湖) 마을에서 자연을 벗 삼아 생활하면서 그 정치를 보고 『매호별곡(梅湖別曲)』을 읊었다. 무덤은 개포면 우감리 우감산(牛甘山)에 있고, 예천 다인(현 의성군)의 봉산서원(鳳山書院)에 재향되었다. 조우인은 시·글씨·그림에 두루 능하여 삼절(三絶)이라 일컬어 세상 사람의 추앙을 받았으며, 음악도 잘하였다.
3. 선몽대에서 지내다. : 이열도의 본관은 진성, 자는 정가, 호는 우암으로 호명면 백송리 출신이다. 아버지는 기린도찰방을 지낸 이굉이고, 어머니는 안동김씨 김수량의 딸이다. 증조할아버지는 1538년에 백금리 집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여느 아이들과 달랐다. 학업에 뜻을 두고 『육경(六經』과 『사서(四書)』를 통달하였고 미묘한 말씀과 심오한 뜻을 쉽게 이해하였다. 증조할아버지인 퇴계 이황이 매우 사랑하여 매우 훌륭하게 될 것이라 하였다. 만력 병자년에 처음으로 별시에 응시하여 병과 제일인으로 급제하였다. 괴원의 정자 벼슬에 보직되었다 신사년에 박사로 옮겼다. 임오년에 사헌부감찰이 되었다 곧 예조정랑이 되었고, 계미년에 은계군수로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을유년에 고령현감이 되어 현을 잘 다스렸다 하여 평안도사로 승진하였다. 정해년에 형조정랑의 벼슬로 조정에 돌아왔다. 이어서 금산군수 강원도사를 제수하였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이때 경산군에 폐풍이 있다 하니 대신들이 장계(狀啓)를 올려 특별히 이열도를 차출하여 일을 보게 하니 몇 달이 못 되어 학업을 일으켜 근본에 힘씀을 먼저 하니 1년 만에 교화가 행해졌고, 도신(道臣)이 장계까지 올렸다. 하루는 도백(道伯)이 보자 하거늘 가보니 책 표지에 제목을 써달라 청하는지라, 이열도가 큰 소리로 말하기를, “말할 것은 공사뿐이거늘 붓을 놀리라고 모독을 보이느냐” 하고 곧 탕건을 벗어 던지고 돌아와서는 다시 나아가 벼슬할 뜻을 두지 않고 ‘선몽대(仙夢臺)’에서 지냈다. ‘대(臺)’는 곧 퇴계 선생이 꿈속에서도 그리워하던 곳이고, 먼저 찰방공이 일찍부터 뜻을 두었는데 이열도가 뜻을 이어 집을 지은 것이다. 퇴계 선생이 손수 ‘선몽대’ 세 글자를 써주고, 또 시와 서를 주시니 때가 가정 계해년이다. 약포?서애?금계?학봉?한음?우복?청음 등 여러 선생이 다 차운했고, 절강에 사는 주대승(朱大勝)이란 사람은 풍문을 듣고 멀리 여기까지 찾아와서 차운했으니 다 우연한 일이 아니다. 금부도사를 지낸 류도헌(柳道獻)은 이열도의 묘갈명에서, “도산 선생이 도를 일으킴에 진실로 선비의 종가가 되었다. 공이 그 여서(餘緖)를 이어받았으매 우리 후진을 열어주었네, 정자가 있어 우뚝하였으니 퇴계 선생이 명명하였다. 초목이 아름다움에 문미(門楣)가 빛나도다. 백세의 뒤라도 듣는 자 경건한 마음을 일으킬 것이다” 하여 칭송하였다. 저 난산(卵山)을 우러러보니 선생의 묘소가 거기 높직하다. 내가 비석에 명을 지어 새기니 무궁토록 이어져 전해지리라.
4. 자연을 벗하며 여러 선비들과 시로써 즐겼다 : 이열도는 자연을 벗하며 여러 선비와 시로써 즐겼다. 이 가운데 이열도의 작품을 비롯해 퇴계 이황, 약포 정탁, 서애 류성룡, 학봉 김성일, 한음 이덕형, 청음 김상헌의 작품이 선몽대에 걸려 있는데 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先人庭法久歸虛 옛사람 가르침이 헛된 지 오래지만, / 遺志猶存乃意如 남긴 뜻 아직 있어 내 마음 같구나. / 數架?楹今得就 작은 집 처마 기둥 이제야 완성하니, / 棲遲非但世情疎 성근 인정 때문에 떠돌지는 않았으리. / 小亭高架鏡中虛 작은 정자 오똑하니 물속에 어리고, / 遠浦長天望豁如 나루 멀리 넓은 하늘 훤히 트였구나. / 孤鶩落霞呈百態 오리와 노을은 온갖 자태 빚어내고, / 晩風秋雨又疎疎 늦바람에 가을비 부슬부슬 내리누나. / 倚山臨水聳層虛 산자락 물가에 우뚝하게 솟았으니, / 霧戶松窓錦繡如 안개 대문 솔 창문 비단과 같구나. / 久伴閑僧仙?靜 스님과 같이하여 자리는 조용하니, / 邇來殊覺俗緣疎 세속 인연 적음을 요즈음에 깨닫네. / 주인(主人) 이열도(李閱道, 1538~1591) / 寄題仙夢臺 선몽대에 부치다 / 松老高臺揷翠虛 늙은 솔 높은 대 허공에 꽂혀 있고 / 白沙靑壁畵難如 흰 모래 푸른 벼랑 그림보다 낫구나. / 吾今夜夜?仙夢 나 이제 밤마다 신선 꿈을 꾸나니 / 莫恨前時?賞疎 지난날 못 봄을 한탄하지 말게나. / -遇巖之勝, 多魔不遇, 至今夢想不已, 聊以一絶寄意, 且以名臺云. 嘉靖癸亥, 陶山. 우암의 뛰어난 경치를 일이 많아서 보지 못하여 지금에 이르도록 꿈속에서도 생각이 나지만, 겨우 시 한 수에 마음을 붙이고 또 그것으로 대의 이름을 삼는다. 가정 계해년(1563), 도산. // 次退溪先生韻 퇴계 선생의 운에 차운하여/ 主人能自卜淸虛 주인이 스스로 맑은 이곳 잡았으니 / ?苑玄都此不如 신선들 사는 곳도 이곳만은 못하리. / 夢罷幾回臺上臥 꿈 깨어 누운 곳 몇 번을 둘러보니 / 滿天明月看星疏 밝은 달빛 가득하여 별들이 드물구나. /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 // 敬次 삼가 차운하다 : 高臺登眺若憑虛 높은 대 올라보니 허공에 기댄 듯 / 漁釣生涯我不如 고기잡이 생활을 나는 닮지 못하였네. / 花落半庭春事晩 낙화는 뜰에 가득 봄 일이 늦었건만 / 碧?松影更蕭疎 푸른 처마 솔 그림자 다시금 쓸쓸하네. /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 1542~1607). // 敬次 삼가 차운하다 / 半畝松陰倒碧虛 아늑한 솔 그늘 푸른 허공 가렸으니 / 玉壺今日興何如 술 마시는 오늘의 흥취가 어떠한가? / 憑君更聽儒仙句 그대 따라 다시금 신선 노래 들으니 / 便覺塵緣立地疏 세속의 인연이야 하찮음을 깨닫겠네. /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 1538~1593).// 次仙夢臺韻 선몽대 운자에 차운하여 : 山橫蒼壁地凌虛 비낀 산 푸른 벼랑 허공에 솟았고, / 水釣林耕?自如 고기잡이 밭갈이가 모두 자유롭네. / 未到此臺名已好 이곳에 오기 전 이름 이미 높았지만 / 賞情飜動世情疏 오락가락하는 마음 인정이 성글구나. / 漢陰, 李德馨(1566~1645). -辛卯首夏, 九世孫宜翼, 在龍宮任所, 新揭此板. 신묘년(1831) 초여름에 9세손 의익(1794~?)이 용궁 임지에 있을 때 이 시판을 새로 걸었다. // 沙白川明澹若虛 흰 모래 맑은 내 허공인 듯 깨끗하니 / 玉山瓊圃較何如 수려한 산 들판과 비교하니 어떠한가? / 仙區萬里應難到 만 리 멀리 신선 세상 오기가 어려우니 / 來往斯亭且莫疏 이 정자에 오고 감을 뜸하게 하지 마소.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 //cafe.daum.net/yngeo/ 영남지리답사(daum 2010)
이열도 : 백송파 9세 우암 이열도李閱道| 내 고향 예천 백송/ 松河 李翰邦 | 2010.08.10. 21:42/ 이열도의 자는 정가靜可이고 호는 우암遇巖이다. 굉宏의 아들로서 가정嘉靖 무술년(1538년)에 태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였다. 선몽대仙夢臺를 지었을 때는 선생께서 손수 편액을 쓰고 시詩를 지어 보냈다.// "노송은 높이 솟았고 대臺는 푸른 산에 우뚝하구나. / 흰 모래와 푸른 벽은 그림으로도 표현하기 어렵도다 / 나는 이제 밤마다 신선의 꿈을 꿀 것이니, / 한탄하지 마라,진작에 경치 구경하지 않았는지를." / 졸년은 54세였다. / 松老高臺揷翠虛 白沙靑壁?難如 吾今夜夜?仙夢 莫恨前時?賞疎 (가정嘉靖계해癸亥도산陶山) / -경상북도,1998, 퇴계학연구 제18집,424쪽 // *열도閱道에게 답함 : 편지를 보고 잘 있다니 반갑다. 여기는 모두 여전하다. / 추증한 직함을 별지에 써서 보내니 삼가 기억하거라. / 그리고 시험응시에 조심하여 노력하여라. // **열도에게 답함 : 사람이 와서 편지를 보고 잘 알았다. 이 곳은 모두 여전하다. / 다만 혜(온계공 5子)의 병이 걱정인데 지금은 좀 차도가 있다. / 네가 이번에 오지 못한 것은 노마奴馬의 사정 때문이니 / 전날에 증조의 묘제에 아무 까닭없이 안 온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 무슨 잘못이 있겠느냐? / 당부하는 것은 학업에 힘써서 충신忠信과 겸근謙謹으로 / 일상의 조신操身을 삼는 것이 좋겠다. // 이열도는 퇴계가 손자들 중에 가장 촉망을 두터이 한 사람이며, 忠信 謙謹의 상조훈常操訓을 끼쳤다. 선몽대를 쌓아 퇴계의 시를 얻었다. 門徒錄 이열도 / -권오봉,1996,이퇴계의 實行儒學,학사원 185쪽/ 출처 :진성이씨 후손들이여!/ 글쓴이 : 松河(李翰邦)(daum 2010)
이열도 : Re:Re:백송파 9세 우암 이열도李閱道(사진)| 예천 백송/ 松河 李翰邦 조회 0 | 2010.08.10. 21:40 / 松河(李翰邦) / 찰방공과 우암공 묘소가 있는 난산卵山은 태봉胎峰처럼 알봉으로 생겼다. 사두혈巳頭穴이라고도 하고 노서하전老鼠下田(쥐가 먹이를 찾으러 들로 내려 오는 형국)형국이라고도 한다.(daum 2010)
이열도 : re:백송파 9세 우암 이열도李閱道(사진)/ 2006.04.19/ " 묘소 앞 전경 (선몽대 입구) 사두혈 난산 (입향조 굉 할뱀 및 우암할배 묘소가 있으며 매년 시사를 지내는 난산 ) 묘두. 용맥 묘소 앞 개구리 바위 묘소 앞 전경 비석 우암 할뱀 묘소 우암 할뱀 묘소 전경 "/ //cafe.daum.net/jinsunglee/ 진성이씨 후손들이여!(daum 2010)
이열도(李閱道) : 본관(本貫) 진보(진성) 眞寶(眞城), 시대(時代) (1538-1591), 자(字) 정가(靜可), 호(號) 우암(遇岩)/ 이력(履歷)/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이열도(1538-1591)는 호명면 백송리 행소리(白金里) 마을 출신으로, 자는 정가(靜可), 호는 우암(遇岩), 본관은 진성, 굉(宏)의 아들, 종조부 이황의 제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재주가 있어 1576년(선조 9)에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들어가 정자 벼슬을 시작으로 박사를 거쳐 사헌부 감찰, 예조 좌랑, 은계도 찰방 등을 지내고, 고령 현감으로 나가 선정비를 남겼다. 그 후 평안도 도사, 형조 정랑, 금산(現 金泉) 군수를 거쳐 강원도 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에 큰 뜻이 없어 사양하였다. 그러나 그 이듬해에 경산 지방에 흉년이 들자 조정 대신들의 추천으로 현령으로 나가 굶주린 백성에게 봉급까지 줄 정도로 정성을 다 쏟았다. 그 뿐 아니라 공평한 대민 사무 처리, 충효 사상 고취, 영농 방법 지도 등으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관찰사가 불러서 책 제목을 써 달라는 부탁을 하였다. 이열도는 당대의 명필이었기 때문이다. 이열도가 이르기를, "사사로운 책 제목을 쓰기 위해 임지를 떠나게 함은 모욕적인 처사입니다."라고 거절하고 그 자리에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내성천의 절벽 위에 '선몽대(仙夢臺)'를 짓고(1563), 제자들을 가르치며 여생을 보냈다. 그 후 여러 차례 벼슬에 불리어졌으나 오르지 않았다. 다만 자연을 벗하며 여러 선비들과 시로써 즐겼는데, 이 때 지은 시 수 백 편이 <선몽대지>2권에 실려 간행되었다. 퇴계 이황도 63세 때 선몽대의 창건을 축하하러 와서 현판 석 자와 한 구절의 시를 친필로 써준 것이 지금도 전하고 있고,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도 아버지 정재원이 예천 군수로 있을 때 이 곳에 들리기도 하였고, 다산의 선조가 창건 당시 지은 시가 남아있기도 하다. 호명면 월포리 일하던 방에서 타계하였는데, 무덤은 백송리 난산(卵山)에 있다. 이열도는 아홉 고을의 골원과 중앙 요직을 할 때에 청렴 강직하였고, 가정에서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상을 당하여 시묘(1573)한 곳을 지금도 <빈소골>이라고 한다. <장병창 논설위원> / (daum 2010)
이열도 : 진성이씨(眞城李氏) 역사인물(歷史人物)/ 이열도(李閱道):1538(중종 33, 무술)~1591(선조 24, 신묘). 본관 眞城. 자는 靜可. 호는 遇巖. 宏의 子. 1576년(선조 9) 문과 급제. 정랑을 역임. 은퇴 후 仙夢臺에서 소요하며 지냄. 鄭琢;柳成龍;黃俊良;金誠一 등의 題詠詩가 전함. ▣참고:國朝榜目, 眞城李氏譜, 집필:김태안(daum 2010)
이열도 : <국조 문과 방목>/ 이열도(李閱道) 선조(宣祖) 9년(1576년), 별시(別試) 병과1(丙科1)/ > 인적사항 자(字) 정가(靜可), 본관(本貫) 진보(眞寶)/ > 가족사항 부(父) 이굉(李宏), 조부(祖父) 이하(李河), 증조부(曾祖父) 이식(李埴), 외조부(外祖父) 김한철(金漢哲)/ > 이력 및 기타 전력(前歷) 유학(幼學), 관직(官職) 예조/좌랑(禮曹/佐郞)(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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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1,378
이현준(觀覽客 60萬名, 經濟的 波及效果 6百54億 원 以上 期待 : 李鉉濬 郡守 '2016 醴泉世界昆蟲엑스포 關聯 特別인터뷰') [記事] : 2016 예천세계곤충엑스포가 70여일 앞으로 다가왔다. 예천군은 △도시브랜드 제고 △군민의 실질 소득 증대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국제 박람회로 성공시키기 위해 이현준 군수를 중심으로 전 공직자들이 밤낮 없이 뛰고 있다. 본지는 이현준 예천군수로부터 2016 예천세계곤충엑스포 준비 상황 등 전반적인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편집자 주>/ ▲앞으로 70여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는데 준비 상황은? =올해 3번째로 개최되는 '2016 예천세계곤충엑스포'는 '곤충과 함께하는 똑똑한 미래'라는 주제와 '곤충의 작은 날갯짓, 미래를 꿈꾸다'라는 슬로건으로 개최됩니다. 이번 엑스포는 국내 곤충산업 선도 지역으로 위상을 높이고, 곤충산업이라는 미래 신 성장 동력을 확보하여 본격적인 신도청시대의 중심지로 도약하고자 하는 군민의 염원이 담긴 엑스포입니다. 예천군의 청정 이미지와 곤충산업의 메카라는 브랜드를 국내외에 알리고 미래 식량자원으로 주목받고 있는 곤충을 주제로 곤충요리교실과 곤충요리 경연대회를 개최하여 식용곤충산업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등 곤충산업과 관광을 접목하여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분주하게 준비하고 있습니다. 곤충엑스포 행사장은 곤충주제관, 곤충 놀이관, 곤충 산업관, 파브르의 정원 등으로 조성하여 세계곤충학회에서 인증한 세계최대의 곤충박람회라는 위상에 걸맞은 엑스포 행사장을 조성할 계획입니다. 곤충엑스포가 가장 무더운 7월 말에서 8월에 개최되는 것을 감안하여 더위를 식히며 엑스포를 관람할 수 있도록 70m 규모의 워터슬라이드를 갖춘 '벅스 워터파크'를 조성하고, 아울러 다양한 문화공연, 이벤트 등 최고의 여가레저 공간을 조성하여 2012년 보다 발전된 엑스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입장권 판매 및 예약 현황은? =예천곤충엑스포조직위원회는 '2016 예천세계곤충엑스포' 입장권 판매 대행 은행으로 NH농협은행 예천군지부와 금년 1월에 판매 대행 계약을 체결하고 지역농협, 곤충엑스포 조직위, 예천군 공무원 등이 다양한 경로로 판매하고 있습니다. 입장권 예매 목표를 50만 매로 잡고 판촉 활동을 진행 중이고, 현재 목표량의 60% 정도 판매됐으며, 앞으로 인터파크, 티켓링크 등에서도 판매하며, 온라인 판매를 14개소로 확대할 계획입니다. ▲관람객 목표 인원은? =이번 엑스포 기간이 휴가와 방학기간이고 곤충테마 전문 엑스포인 관계로 가족단위 관람객과 어린이, 학생을 비롯해 휴가철 각종 모임 등으로 많은 관람객이 다녀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지난 2012년도에는 23일 간 85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간 것을 고려할 때 금년에는 다소 줄 것으로 예상되어 관람객 60만 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만 여름철 기상과 여건 등이 순조로울 경우 이를 훨씬 상회하는 더 많은 방문객이 우리 고장을 찾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행사의 내실을 다지기 위한 방안과 경제적 파급 효과 전망은? =전문기관의 분석에 의하면 2016 예천세계곤충엑스포 개최에 따른 방문객 유치와 그에 따른 방문객의 소비지출을 통해서 파급되는 경제적 효과는 총 6백54억 원 정도 유발될 것으로 예상되며, 부가가치는 평균 2백25억 원, 신규 고용은 평균 1천3백49명 정도가 창출될 것으로 추정됩니다. 특히, 올해는 행사의 내실을 다지고 경제적 파급 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곤충열차를 예천읍내로 통과시켜 관광객의 소비를 유도하여 예천군민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 효과는 물론 지역경제에 활력을 불어넣을 계획입니다. 아울러, 곤충산업의 관광자원화로 예천의 브랜드 가치 상승, 곤충산업 기여, 지역민의 자긍심 고취, 체감경기 상승 등 많은 파급 효과가 있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세계곤충엑스포를 표방하고 있다. 외국인 관람객 유치 계획은? =우리 예천세계곤충엑스포는 2012년에 세계곤충학회에서 세계최대 곤충박람회임을 인증한 바 있습니다. 올해는 이에 걸맞게 국제적인 곤충박람회를 지향하고자 세계곤충엑스포라고 지칭하였습니다. 이번 엑스포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40여개 국의 주한 외교사절을 부부동반으로 초청할 예정이고 엑스포 기간 중 국내 여행 중인 외국 관광객을 대상으로 여행사와 연계한 팸투어를 진행하여 참여한 외국인이 SNS를 통하여 자국의 지인들에게 곤충엑스포를 홍보할 수 있도록 계획하고 있습니다. 곤충엑스포 공식 홈페이지를 한글뿐 아니라 영어와 중어 서비스를 제공하여 외국인의 곤충엑스포에 대한 정보 접근성을 용이하도록 개선할 계획입니다. ▲곤충의 도시 이미지를 한 단계 끌어올리기 위한 방안은? =2008 함평세계나비곤충엑스포가 막대한 재원 투입과 행사 이후 적자 때문에 규모가 20분의 1에 불과한 나비축제로 축소 운영되는 반면, 예천군은 2007년 첫 엑스포 개최 당시 60만여 명의 관람객과 7백50여억 원의 경제효과를 얻었습니다. 2012년 엑스포는 85만여 명 관람객이라는 성공적인 결과와 함께 1천억 원의 경제적 파급 효과는 물론 국제곤충학회로부터 '세계최대곤충박람회'로 인증을 받는 등 곤충산업 분야에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예천군은 곤충산업에 관심을 갖고 1998년 전국지자체 최초로 산업곤충연구소를 설립한 이래 친환경농업 육성을 위해 화분매개곤충 증식기술 개발과 보급에 앞장서 왔습니다. 2014년 농림식품부의 지역곤충자원사업화지원 호박벌특화센터 유치 및 2015년 예천곤충연구소는 생물다양성 관리기관, 꿀벌 농업생명자원 관리기관으로 지정됐습니다. 2015년 국내 최초로 인공수정을 통한 꿀벌 정부장려품종1호 '장원'을 개발해 현재 경북도기술원 및 울릉군과 협력해 울릉도 나리분지에 신품종 '장원'대량 생산 보급기지를 조성 중에 있습니다. 지난 달 중앙정부에서 '제2차 곤충산업육성 5개년 계획'을 발표하고 2015년 3천억 원 규모의 곤충시장 규모를 2020년까지 5천억 원 규모로 확대할 계획이라고 밝혔습니다. 예천군은 화분매개곤충을 활용한 친환경농업 선도와 곤충산업의 6차산업화 등 곤충산업 육성에 체계적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산업곤충연구의 선도 기관으로 유용곤충 사육기술 개발, 곤충사관학교 및 꿀벌 대학운영, 유용곤충 상품개발을 통하여 유용곤충 사육기반을 확충해 나갈 계획입니다. 이와 함께 금년 세 번째로 개최되는 2016 예천세계곤충엑스포에서 도시브랜드 제고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으며 곤충산업의 메카로 더욱 확고한 입지를 굳힐 예정입니다. ▲이전 곤충엑스포와 차별화 시킨 점은? =이전 2007, 2012 곤충엑스포는 곤충을 소재로 한 다양한 놀이공간을 함께 배치하여 곤충세계의 신비로움, 청정자연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배우는 기회가 될 수 있도록 에듀&엔터테인먼트 엑스포를 구현하였다면 2016 예천세계곤충엑스포는 에듀&엔터테인먼트와 더불어 곤충의 산업화와 곤충식품에 중점을 두어 타 곤충 축제와의 차별화를 모색하고 있습니다. 지구상 마지막 미개발 자원으로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미래 신 성장 동력으로써 곤충산업의 비전을 제시, 곤충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종합적으로 선보일 곤충주제관과 미래 식량 자원으로 각광받지만, 아직 우리에게 생소한 곤충을 활용한 음식, 곤충요리경연대회, 곤충푸드 쿠킹쇼, 곤충푸드 체험교실 등 곤충놀이관에서는 곤충식품에 관한 모든 것을 만나 볼 수 있습니다. 국내 곤충관련 관련 제품을 생산·판매하는 기업들이 참여하여 제품전시와 함께 최신기술과 정보교류를 통해 미래 고부가가치 곤충산업의 발전을 도모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곤충산업관과 농림축산식품부와 함께 생명산업대전을 같이 개최하여 미래 먹거리 산업으로써 곤충을 알리는 한편 곤충도시 예천의 입지를 굳힐 예정입니다.
▲군민과 출향인들이 협조 할 부분과 당부 사항은? =이번 예천세계곤충엑스포는 미래 성장 동력 산업이 될 곤충산업의 성장가능성과 잠재력을 바탕으로 우리 군이 갖고 있는 곤충산업기반을 지역발전의 원동력으로 승화시켜 나가고자 개최하는 국제 규모의 박람회입니다. 지금, 우리 군은 경북도청 이전으로 경북의 새로운 중심도시로 발전해 나가고 있고 군민과 출향인 모두가 큰 기대와 희망을 안고 있습니다. 예천세계곤충엑스포의 성공적인 개최로 예천의 새로운 성장 동력을 확보하고 우리 지역의 미래 비전을 함께 실현해 나가야 할 때입니다. 군민 여러분께서는 우리 지역을 찾는 많은 관람객들이 예천의 아름다운 기억을 가지고 돌아가도록 친절한 서비스와 관람객 우선의 배려 마음으로 이번 엑스포를 통해 따뜻한 예천의 정을 보여 줍시다. 많은 관람객이 예천을 찾아주실 수 있도록 출향인께서는 경북 예천에서 세계최대 곤충박람회가 개최됨을 적극 홍보해 주시고 성공적인 엑스포가 될 수 있도록 군민 여러분과 경향 각지의 출향인 독자 여러분의 성원을 당부 드립니다.(醴泉新聞 2016년 05월 20일 (금) 09:4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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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