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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4399) : 이위수(2)-이유-이유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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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위수 : 연안 이씨/ *후세에 시에 이르기를*/ 昔我訥軒祖 晩年搬移此(석아눌헌조 만년반이차) 옛날 우리 눌헌공(李應) 할아버지께서 늦으막히 이곳에 옮겨 오셨네/ 始自南下時 金谷住幾祀(시자남하시 금곡주기사) 처음은 용인에서 남으로 오실 때 용문 금곡에 잠시 머무셔서/ 創建德進堂 藏奔有古紙(창건덕진당 장분유고지) 덕진당을 세우셨단 그 흔적 옛 기록에 있다네/ 復僑花府北 浙江桃谷裏(부교화부북 절강도곡리) 다시 안동땅[花府] 북쪽에 위치한 절강 도화곡 깊은 골자기에 옮겨 사시니/ 嘗構一茅亭 棲遲可樂只(상구일모정 서지가락지) 그곳에 자그마한 정자 한 칸 지어놓고 즐거히 세월 보내시는데/ 伯仲梅栗公 長枕聯大衿(백중매율공 장침연대금) 매촌공(李愈)도 여기서 많은 벗 사귀셨고 율리공(李憙)도 훌륭한 명성을 드날리셨네/ 燃燈江齎夜 相酬數君子(연등강제야 상수수군자) 장차 훗날 이름 빛낼 영웅군자들 글 짓고 시 읊어 주고받았네/ 不意龍蛇變 赴國伯仲死(불의용사변 부국백중사) 애닯도다 뜻밖에 임진란이 터졌으니 나라 살리려 두 형제분 일신 던져 떠나시고/ 烟雲無管領 亭爲水所憊(연운무관령 정위수소비) 마을 타는 끄으름 세상을 덮어 버리고 드나드는 물길조차 쉴 곳을 막았다네/ 湮沒棄瀛恨 鷗鷺下空沚(인몰기영한 구로하공지) 아련히 지나온 일족의 역사가 흔적없이 살아지며 산비들기 백로들만 드리우는 빈터로 변하였네/ 移建靑蛇春 興廢有數年(이건청사춘 흥폐유수년) 청사년 봄에 다시 터 옮기고 그럭저럭 여러 해 지나가고 말았네/ 王考愛吾窩 彈誠久經紀(왕고애오와 탄성구경기) 조부 애오와공[鼎基]께서 오래도록 지탱하게 정성을 다해/ 翼然臨泉上 楯霞生光紫(익연임천상 순하생광자) 임천샘가 나를 듯 다시 세우시니 난간에 안개 피어올라 자주빛 광채 감돌아드네/ 花樹自成村 地僻遠城市(화수자성촌 지벽원성시) 한집안 꽃가지마냥 옹기설기 모여 살고 저자거리 읍내와 멀리하고 있지만/ 評品花石間 幽與何時己(품평화석간 유여하시기) 꽃과 산과 물을 벗해 즐길 때에는 세월이 언제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를 만하니/ 種桃避秦世 採菊雁晉史(종도피진세 채국안진사) 무릉도원에서 혹독한 진[秦]나라의 착취 벗어나 국화가지 꺾던 태평성대 진[晉]의 옛일과 같으네/ 耕鑿生涯足 子弟或出仕(경착생애족 자제혹출사) 밭을 갈아 살아가는데 어려움이 없고 아이들은 들락 날락 벼슬살이 가끔하니/ 庾傾北海樽 謝携東山妓(유경북해준 사휴동산기) 후학 가르치며 배움을 거듭닦고 [孔隆] 벼슬유혹 뿌리치고 조용히 사네 [.謝安]/ 俯仰林泉畔 如鳥邱偶上(부앙임천반 여조구우상) 우러러 임천반[수풀과 샘이 솟는 좋은 집터]에 나는 새처럼 언덕위에 삽분 올라 앉아 있다네/(daum 2010)
이위수 : 투수남행 (投綬南行)/ 극악한 압제와 모질고도 끈질긴 질곡의 세월을 보낸 흔적도 아직까지 남아 있고, 이성계 이방원의 아들 손자가 권력을 악착스럽게 전단해온 500년 비운의 역사에서도 오로지 인간다운 역사에 충실하기 보다는 권력에 아첨하며 살아 온 풍조가 휩쓸었고, 이러한 사실을 온갖 미사려구로 호도(糊途)하는 글들이 넘쳐나는 풍토에서 그나마 모진 세파를 지혜롭게 헤어나며 인간다운 기백과 정신을 이어 오늘의 떳떳함을 보여주신 조상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은 이 조선 땅에 매우 드물 것이다. 이와 견줄만한 사연이 다음에 기록으로 남아 있다. 別坐(李垙) 公은 종동서 아우인 燕山君의 妻家가 거창 愼氏인 점이 주목되는 바 이미 연산의 사람됨을 알게 된 공은 그를 될 수 있는 한 멀리하기 위하여 벼슬길을 멀리한다. 공은 스스로 호를 半聾齋라 하여 벼슬길을 스스로 삼가하시고 상의원 별좌 직을 제수하였으나 나가지 않고 점畢齊 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寒喧堂 金宏弼과 同榜 生員을 하신 기록이 있다. 역사기록으로 볼 때 연산군은 점필제 김종직 문하의 많은 선비를 모함하여 죽인 무오 갑자사화(戊午 甲子士禍) 이후부터 용인 구수동에 은거하여 지냈다. 폭군 연산군이 누차 불렀으나 스스로 반농제(귀먹은 이)라는 자호를 쓸 정도로 못들은 척하여 지내시다가 용인에서 돌아 가셨다. 거창신씨 일가가 전부몰락하는 상황에서 공 내외분은 오로지 학문조차 폐하고 선영하에서 유유자적하시다가 한양 100리 밖 조상묘하에서 일생을 마치신 것이다. 이러한 기개는 조선왕조가 망하는 날까지 이어지며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한 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자부하고 있다. 한편 연산군의 장인 신승선과 별좌공의 장인 신승복과는 사촌간이다. 그러나 별좌공(李垙)은 연산군과의 처가로 종동서간이지만 한편 친가로는 바로 아래 아우이신 연성군(坤)은 연산군을 몰아내어 그를 귀양지까지 안치시킨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써 중종반정을 완벽하게 성공시킨 공신이 되었는 바 바로 아래 친동생되시는 분이 졸지에 공신이 되는 이러한 와중에서도 벼슬에 오르는 길보다는 초야를 선택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별좌공(垙)의 차자인 교위(위수) 공은 교위직(內禁衛彰信校衛)을 스스로 버리시고 낙남(落南)하여(投綬南行) 처음에는 예천 금곡에 덕천당(德川堂)을 세우고 후세교육에 힘쓰시는 한편 안동 절강 무릉(浙江 武陵)에 이르러 무릉정이라는 정자를 짖고 당시 영남일대의 사림들과 교유하면서 매촌(愈), 율리(熹), 눌헌(應) 등 삼형제를 퇴계 문하에 보내어 훌륭한 도학을 익혀 후일 나라의 위기에 동량이 되도록 하였다. 불행하게도 임진왜란이란 불가항력적인 전란에 임하여 수령들이 겁을 먹고 버리고 간 예천고을을 당시 용궁현감에 계시면서 예천성을 수성하였지만 재차 삼차 공격을 해온 적과의 예천성전투에서 전 가족도 함께 몰사하는 변고를 당하였을 뿐 아니라(매촌공) 한편 왕을 호종하던 차에 삭녕지방에서 적을 만나 항전하시다가 순절하신 분(율리공), 의병을 모집하여 경상도지역을 방어하시는 등 멸사봉공의 정신으로 고을과 나라를 지키는 데 힘쓰셨고(눌헌공), 전란이후에 겨우 수습한 가솔을 거두어 지금의 예천 송곡에 처음으로 자리를 정하였다.(daum 2010)
이위수 : 校衛公(李위壽)/ 자는 華甫이다, 성종 22년 신해(1491)생이시고, 벼슬은 內禁衛彰信校衛로 시작하였으나 이를 버리고(투수-投綬) 남하하여 慶北 醴泉 沙谷에 자리를 잡았다. 공께서는 용인 九水洞에서 공명을 초월하여 선영을 받들고 사시는 부친 별좌공(垙)이 중종 6년1511)에 돌아가시자 창신교위의 벼슬을 버리시고 남하하여(投綬南行) 경상도 예천 사곡(현재 경북 예천군 호명면 송곡동)에 은거하신 것이다. 부친이신 별좌공(垙)께서 이미 점필제(金宗直)의 문하로서 영남학파의 학통을 이어 온 만큼 영남성리학파에 대해 호감을 가지시고 세 분의 아드님과 사위분들은 모두 퇴계(이황)의 문하로 들어가게 되고 이분들은 모두 퇴계문인록에 올라 있다. 공은 조부이신 연안군과 당시 숙부이신 연성군(坤)은 물론이고 이시애란 평정공신이신 안양공(장말손) 공의 맏손서로서 당대에 권력의 중심에서 영달을 하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이은 사화와 선비들의 권력 다툼의 소용돌이를 피하여 부친의 유지를 따라 영남으로 남하하신 일은 참으로 현명한 하였다고 사료된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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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李濰) : 1669(현종 10)-1742(영조 18), 용궁면 무이1리 내무(內武) 출신, 자는 거원(巨源), 호는 용포(龍浦), 본관은 여주, 유학(幼學) 지태(之泰)의 아들, 환(煥)의 현손, 권오복(權五福)과 이동표(李東標)의 제자이다. 부모 슬하(具慶下)에서 유학(幼學)으로서 1691년(숙종 17) 증광 생원시에 3등 73위에 합격, 1702년(숙종 28) 식년 문과에 을과 5위로 급제하여 40년 동안에 벼슬은 말단직으로 우관(郵官)을 네 번 지냈고, 승권(承權)을 거쳐 사헌부 장령(掌令, 1733)에 임명되었으나 노병으로 사퇴하였다. 7읍에서 교수(敎授)로 성리학을 가르쳤고, 경학(經學)이 매우 밝고 특히 해서(楷書)에 능했다. 문집(文集)이 있고, 삼강사(三江祠, 三江書院)에 제향되었다.(訥隱集, 朝鮮寰輿勝覽 1929, 醴泉郡誌 1939, 竺山勝覽 1934, 嶠南誌 1937, 龍宮縣邑誌 1780, 司馬榜目, 文科榜目)
이유 : 여주이씨 역대 인물/ 2010.07.22/ ...三足堂公李埰]. 신계공이연휴[新溪公李延休]. 부사공이광진[府使公李光鎭]. 소헌공이식[笑軒公李식]. 용포공이유[龍浦公李濰]. 증참판공이구진[贈參參判公李구鎭]. 아정공이침[鵝亭公李?]. 묵헌공이만촌[?軒公李萬村]. 참판공이봉익.../ 여주이씨상서공파대종회(daum 2010)
이유 : 梅村 공(李愈)/ 자는 子欽이요 호는 梅村이다. 중종 17년 임오(1522) 생이시다. 명종 2년 정미(1547)년에 栗里, 訥軒 동생분과 함께 생원으로 함께 生員進士에 이르시고 삼형제가 같이 퇴계 문인으로 나아갔다. 퇴계 선생의 도산문현록(陶山文賢錄)에 기록하였으되 “이유는 자 자흠이요 호를 매촌이라 하는데 연안인(延安人)으로 醴泉 出生이다. 가정 임오에 형제가 함께 진사가 되고 퇴계 문하가 되었다. 4개의 읍을 다스려 치적을 쌓고 임진년에 용궁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하자 군사를 모아 외적에 대항하였다. 난리를 만나 뿔뿔이 흩어지는 민심을 수습하고 겨우 수백에 지나지 못하는 군사이지만 용궁 정재령(政在嶺)은 국가의 주요 보급로로서 이를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 막중한 바 그야말로 죽을 각오로 임하여 온갖 난관을 극복하고 (雪?爲誓衝冒矢石) 다수의 적의 목을 베고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보급로를 열어 차질이 없게 하였는데 다시 예천의병장으로 토적(土賊)을 잡아 一郡이 일단 안정을 취할 수 있게 질서를 잡아 나갔으며, 안동 임하(臨河)에서 의병을 모집할 임진 9월 17일 가장 먼저 창의에 동참하였다는 기록과 안동 의성 예안 일직 군위 비안군과 합세하여 마침내 안동향교에 진을 치고 동회전에서 혁혁한 공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용사잡록(정탁), 난중잡록(조경남)에 기록이 있다. 이로서 경상도 안찰사인 김수(金?)는 공에게 진충보국한 공으로 포상하였다“ 하며 이어 한편 기록에는 ”공의 자는 자수인데 첨추(僉正 벼슬과 中樞府使를 지내신) 仁文公의 曾孫으로 수를 72세라“ 기록한 바 있고 또한 ”泰川縣監 재임 시에 廉使 漢陰(文翼公 李德馨)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여 이를 주청하자 임금은 귀한 신발과 의상(表裏衣?)을 하사하였다” 한다. 그리고 “임진 5월 경상도 安集使 伯巖 金?(김인)이 경상도 각읍을 지킨 장수들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前 縣監 李愈로 하여금 醴泉을 지키고 土賊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國朝實記에도 “용궁현감 이유(李愈)는 적병과 더불어 교전하여 많은 수급을 노획하였으며 경상감사 백암 김인이 포상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醴泉邑誌(懶隱 李東標찬-숙종 때 인물 솔무덤에 유적이 있음)에는 ” 李愈는 義兵將으로서 적과 싸워 토멸하고 마침내 陣中에서 돌아가시니 시신을 찾을 수 없어 그의 관을 수습하여 장례를 지냈다.“ 라는 기록이 있고, 朝鮮名臣錄에도 ”이유의 호는 매촌이요 위수의 아들이다. 퇴계 문인으로 임진란에 적을 참획하여 공을 세웠으며 마침내 진중에서 돌아가시었다“는 기록을 이동표가 이를 장계하였다. 공은 간당들만 가득한 조정에 입사하지 않으시다가 명종 22년 정묘년에 在野人材를 천거하라는 교지에 따라 늦게 벼슬길에 오르셨는데 4개 읍을 다스렸는데 태천현감으로 재직 시에는 한음(이덕형)이 치적을 높이 평가하는 장계를 올려 임금으로부터 의복과 신발(表裏衣?)을 받았다고 하였다. 기록은 중복되지만 아직 정사에 기록이 누락되어 부득이 여러 자료를 모아 사실을 입증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 증명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며 이러한 기록은 세첩보유( 눌운 이병화 편)에서 참고한 것이니 앞으로 공의 기록은 사실에 상당한 기록으로 유의하기를 바라는 바이다.
무릉정 현판을 걸 때 시를 쓰셨는데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다./ 暮厓細路覓幽棲 谷遼炯深樹影低 何處桃園花從水 武陵島外唱金鷄/ 栗里公과 訥軒公 두 분 아우님, 그리고 鄭元忠 玄璞 笑庵 姜士弼 邊克寧 鄭元沆 金? 鄭元? 李景? 曺繼益 權景龍 鄭元健 聚遠堂 曺光益 洪秀民 曺希益 蒙霽 李安道 芝山 曺好益 權景虎 曺謙益과 더불어 講親契를 세웠는데 공이 강친계의 계주시며 이분들은 姨從兄弟와 姨從媒胥의 사이였다. 강친계첩의 쓰인 제목의 싯구는 이러하다./ 思功謂陽日 歡深荊樹春 百年期莫逆 相與講親親/ 이 강친계는 선략장군(선략장군 장중우 부 연복군 장말손)의 외손자이거나 외손서들로서 공과 공의 두 아우분을 합하여 스물한 분인데 게첩과 계첩에 시문을 올려 세세연년토록 친분을 가지고자 하는 약속을 서명한 것으로 모양은 정방형 석자 크기로 네모난 기름먹인 한지 한 장에 올려져 있어 오늘 날까지 보존되어 왔다.(*내가 이 글이 실린 강친계첩을 본 그대로 적지만 글솜씨가 부족하여 다 못 적는다, 이관희)/ 공은 明宗이 정묘 6월에 붕하여 넉 달이 지난 10월에 장례를 지내고자하는 왕대비의 고집을 꺾는 상소를 올려 마침내 장일을 바로잡은 일은 율곡집에 있는 바 율곡(이이)도 공이 이를 분명하게 밝혀 대왕대비 윤씨의 판단을 옳게 함으로서 조정대신들 조차도 미처 생각지 못한 잘못을 바로 잡았다는 기록은 공이 성리학 이론에 매우 투철하였음을 입증하는 면을 보여 준다. 공의 묘소는 예천 호명산 선고비 묘하 동록에 모셨으며 배위는 문화류씨로 묘소는 함께 모셨다. 공의 후손은 1녀 진사 李淸(진주인 자 海益 녀 柳澤 진주인 문정의 여 金繼光)를 두시고 후일 判事(德承 생부 應 묘 안동 임북 세천산 눌헌공 영 후록)공을 계자하였으나 판사공은 三녀와 서자 三인을 두셨는데 서자인 英男공이 아드님(碩) 한분을 두셨으나 族譜상으로 이어 오지 못했다. 후일 을사, 갑술, 계유보 수단시에 누락되었던 것을 경신보 수단시에 광주상애곡(廣州桑厓谷)에 族人이 거주하는데 공의 후손(석)과 같은 단자를 보소에 내었기로 이를 증명할 만한 자료가 없어서 돌려보냈더니 후에 교정공(弘老)의 후로 투탁하였다고 하나 족보와 이조실록에 기록을 비추어 교정공 후손은 불명하다. 사평공파의 휘 碩이 곧 그 사람들이다.(daum 2010)
이유 : 연안이씨 별좌공파-/ 그리고 “임진 5월 경상도 安集使 伯巖 金?(김인)이 경상도 각 읍을 지킨 장수들에 대해 장계를 올렸는데 前 縣監 李愈로 하여금 醴泉을 지키고 土賊을 섬멸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하였다. 國朝實記에도 “용궁현감 이유는 적병과 더불어.../ (daum 2010)
이유 : 延李逸話/ 落南千里 李-연산군과의 동서간이라는 이유로 벼슬을 거절하고 영남땅에 숨은 별좌공 이광 武陵 浙江 相酬君子 李愈 李熹. 李應-안동 절강에 무릉정(武陵亭) 지어 영웅군자들과 교유한 사연 淸白吏 延原君 李光庭-묵묵히 소임을 다하며.../ (daum 2010)
이유 : 연안이씨 별좌공파 예천 호명 송곡/ ...지어 재사영웅과 교유하던 중 뜻밖에 임진란을 만나 의병에 참여하여 왜적을 몰아내는데 앞장서셨습니다. 매촌(李愈)공은 예천성에서 적을 격퇴하시고 이를 인연으로 이곳 예천 호명 송곡에 자리를 잡아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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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인 : 한국사료총서/ 1집 梅泉野錄(한국사료총서 제1집) > 梅泉野錄卷之三 > 光武五年辛丑 ① > 3. 李裕寅을 관찰사로 임명/ 以 李裕寅 爲 慶北觀察使 , 裕寅 大治第舍于 醴泉郡 。 (daum 2014)
이유인 : 한국사료총서/ 국역 梅泉野錄 > 『梅泉野錄』 제3권 > 光武 5年 辛丑(1901년) ① > 3. 李裕寅을 관찰사로 임명/ 李裕寅을 경북관찰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醴泉郡에다가 훌륭한 私第를 지었다. (daum 2014)
이유인 : 李裕寅을 관찰사로 임명/ 상위서지매천야록(梅泉野錄)|梅泉野錄卷之三|光武五年辛丑 ①저자 黃玹/ 분류고도서 > 사부(史部) > 잡사류(雜史類)/ 제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1 (daum 2014)
이유인 : 被拿卽放 / 신문명 황성신문 1905/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황성신문/ 신문명 皇城新聞/ 창간일 1898년 03월 08일 (光武二年 三月八日)/ 소장처 국립 고궁박물관/ 발간정보 간기:일간 언어:국한문/ 일자(양력) 1905년 09월 14일 (大韓光武九年 九月 十四日 木曜)/ 일자(음력) 1905년 08월 16일 (陰曆 乙巳 八月 十六日 丙辰)/ 형태정보 크기:42.0*29.1cm 면수:04 단수:05/ 기사유형 雜報/ 기사위치 02면 03단/ 기사본문 : ●被拿卽放/ 前判書 李裕寅氏가 醴泉鄕第에 閑臥하얏다가 七月萬壽聖節의 參賀次 上來하야 尙今 漢城에 留連하더니 日昨에 日憲兵이 捉去該隊하야 義兵運動의 有無를 質問?고 卽時 放送하얏다더라/ 제공 미디어가온 고신문(//www.history.go.kr/2014)
이유인 : 李氏還京 / 신문명 황성신문 1900/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황성신문/ 신문명 皇城新聞/ 창간일 1898년 03월 08일 (光武二年 三月八日)/ 소장처 국립 고궁박물관/ 발간정보 간기:일간 언어:국한문/ 일자(양력) 1900년 11월 21일 (大韓光武四年 十一月 二十一日 水曜日)/ 일자(음력) 1900년 09월 30일 (陰曆 庚子 九月 三十日)/ 형태정보 크기:36.3*26.8cm 면수:04 단수:04/ 기사유형 雜報/ 기사위치 02면 03단/ 기사본문 : ⊙(李氏還京)前警務使李裕寅氏가 月前에 其家眷을 携同?고 醴泉鄕第로 不去?얏디가 三昨日에 還來入城?얏더라/ 제공 미디어가온 고신문(//www.history.go.kr/2014)
이유인(李裕寅) : ?-1907(융희 1), 김해에서 용문면 상금곡리로 이우(移寓)하여 1895년(공종 32)에 99칸 집을 짓고 현 용문중학교 뒤에 있는 송림(松林)을 가꿨다. 호는 희재(熙齋), 본관은 경주, 참정 이헌영(參政李헌永)의 아버지, 유직(裕直), 유태(裕泰)의 형,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양주 목사(楊州牧使), 한성판윤(漢城判尹), 법부 대신(法部大臣), 경상 감사(慶尙監司)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그는 원래 김해(金海) 사람인데, 벼슬을 얻기 위해서 한 가지 계교(計巧)를 생각해 냈다. 귀신을 부리고, 비와 바람을 마음대로 한다고 소문을 놓자, 임오군란(1882) 때 민비의 환궁(還宮)을 점쳐 득세한 무당 진령군(眞靈君)이 만나기를 청했던 것이다. 이유인은 수하인 부랑배들과 사전 약속을 하고 진령군을 산으로 모셔 내었다. 이리하여 귀신을 부리는 곡예는 시작되었다. 이유인이 동방적제장군(東方赤帝將軍)을 부르자 한 귀신이, 서방청제장군(西方靑帝將軍)을 부르자 또 한 귀신이 등대하였다. 모두가 부랑배들의 가장이지만 진령군은 오직 탄복할 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진령군의 추천으로 궁중의 사빈(師賓)이 되었다가 첫 부임이 양주 목사(楊州牧使)였고, 나중에 법부대신(法部大臣)이라는 대감(大監)이 되었기에 별명이 '양주 대감(楊州大監)'이 되었다. 1888년(고종 25) 파주 목사(坡州牧使)로서 전무 요원(電務要員)이 되어 기해전선(畿海電線)을 연로(沿路)에 가설하는데 공헌하여 선정비를 남겼고,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에서 덕수궁(德壽宮)으로 환궁(還宮, 1897)할 때 궁궐 수리의 책임을 맡았고, 한성 판윤(漢城判尹)으로 프랑스 사람 뮈텔(Mutel) 주교(主敎)를 왕에게 소개하여 국호(國號, 大韓帝國), 연호(年號, 光武)의 제정을 돕게 했다. 1898년(광무 2) 1월 21일 법부 대신(法部大臣)으로 부임하였는데, 이전의 한만(閒漫)하던 폐습을 다 없애고 규칙을 개정하여 대신 이하 모든 관원들이 날마다 오전 8시에 출근하여 오후7시에 퇴근하니 미진한 것이 모두 없어지게 되었다. 또한 동년 2월 13일에는 몸소 감옥서(監獄署)에 가서 갇힌 죄인들을 낱낱이 재조사하여 그 중에 억울하게 갇힌 죄인들을 분간하였다. 동년 6월 25일에는 법부 대신(法部大臣)과 겸직으로 있던 고등재판소 재판장(高等裁判所裁判長)이 해임되었다. 그 후 경무사(警務使), 궁내부 특진관(宮內府特進官, 1899.8.28)이 되었으나 뒤에 왜적의 국모 시해사건(國母弑害事件, 乙未事變, 1985)을 규탄하는 상소를 올리고 귀양갔다. 1899년(광무 3) 1월 5일에 임금이 조서(詔書)를 내려 고금도 유배(流配) 10년 죄인 이유인을 특별히 방송(放送)하라 하였다. 1900년에는 '경자 향약(庚子鄕約)'(新定鄕約節目)을 예천향교(醴泉鄕校)에서 실시하였는데, 이는 권세가 이유인의 향권(鄕權) 장악 시도와 양반층들의 향리층(鄕吏層)에 대한 우위 확보를 위한 것이 영합되어 마련되었다. 경상도 관찰사(1901.1-1901.12)를 지낸 후 경무사(警務使)가 되었다. 1904년(광무 8) 심상진(沈相震)과 함께 보안회(保安會)를 조직, 그 부회장(副會長)으로서 배일운동에 앞장섰다. 1905년에는 보안회장(保安會長)으로서 일본 공사(公使)를 만나 일본의 우리 나라 황무지 개간권을 직접 항의하였다. 그러자 일본 공사는 시위 군중을 해산시키면 개간권의 신청을 철회하겠다고 하였다. 그러나 시위 군중들은 먼저 철회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겠다고 완강히 맞섰다. 그리하여 도처에서 일본군과 충돌이 일어났고, 그러면 그럴수록 구국군중운동은 전국적으로 펴져 나갔다. 그러자 친일적인 왕조 정권도 확대해 가는 군중의 반대운동에 위압을 느껴 일본측의 요구를 철회시키고 이에 대한 결의를 격환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동년 공진회(共進會) 사건으로 구속, 이듬해 석방되었다. 그 후 계속 항일운동을 하면서 왜경을 피해 다니다가 1907년에 김해에서 잡혀 그 날 밀양(密陽)까지 압송되다가 갑자기 사망하였는데, 왜경(倭警)이 보낸 의사(醫師)의 진단은 경기(警氣)로 인한 뇌막염(腦膜炎)이었다고 하였다. 지보면 마전리 구마전(舊麻田)에 관찰사 이유인(觀察使李裕寅)의 송덕비(頌德碑)가 있다. 양주대감(楊州大監)이라고 더 많이 알려졌다.(慶尙道先生案, 嶠南誌 1937, 醴泉郡誌 1939)
이유인 :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고종 25년(1888) 파주 목사로 재직할 때 전무위원(電務委員)에 차출되어 기해 전선(畿海電線)의 가설을 감독하여 살폈다. 이듬해 별군직으로 근무하였으며, 1890년 양주 목사를 거쳐 1891년 12월 한성부 판윤에 임명되었고 그 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1896년 중추원 일등 의관에 임명되고 칙임관 2등에 서임되었다. 이듬해 덕수궁 수리의 임무를 맡았고, 그가 천주교인이었기 때문에 당시 조선교구장인 뮈텔(Mutel, G.C.M.) 주교를 고종에게 소개하여 대한제국 국호와 광무연호의 제정을 돕게 하였다. 1898년 법부대신이 되고,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이 해 경기 재판소와 한성 재판소가 설치되어 민사 · 형사재판을 관할하게 되자 경기도의 재판은 경기 관찰사 가, 한성부의 재판은 한성부 판윤이 맡아서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였다. 이어 법부 대신으로 특별법원장을 맡고, 중추원 일등 의관이 되었다. 법부대신 재직 시 김홍육사건(金鴻陸事件) 처리에 있어 왕의 조칙을 위조한 죄로 유(流) 10년에 처해졌다가 얼마 후 특방되었다. 1899년 중추원 의관 ·경무사를 거쳐 궁내부 특진관에 임명되었다. 1900년에는 을미사변의 원수를 갚기를 주장하고, 이어 시무 15조를 진언하였다. 이해 다시 경무사가 되고, 이어 평리원 재판장 임시서리가 되었다. 1901년 경상북도 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다시 중추원 의관에 임명된 뒤 시종원 경 ·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으며, 다시 평리원 재판장 임시서리를 역임하였다. 이해 말에 탁지부 대신 임시서리가 되었고, 1903년 2월 13일 한성부 판윤이 되었으나 이달 24일 시종원 경에 임명되고, 이어 경무사 서리를 거쳤다. 1904년 중추원 부의장이 되었고, 다시 궁내부 특진관을 지냈다. 이해 심상진(沈相震) 등과 함께 보안회(輔安會)를 조직하여 부회장으로 있으면서 배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또다시 궁내부 특진관이 되었으며, 공진회 사건(共進會事件)으로 구속되기도 하였다. 【참고문헌】 高宗實錄, 淸選考, 陰晴史, 大韓每日申報(daum 2010)
이유인 : 福泉(복천) : 醴泉 龍門 省峴/ 2006.08.22/ ... 뒤에는 푸른 산이 솟아 있고, 앞에는 큰 들과 용문천이 있으며, 밑에는 연못이 있어서 경치가 매우 아름답다. 처음에 李裕寅이 세우고 옥서정이라 하였는데, 예천권씨가 사서 병암정이라 고쳤다 한다. 柳葉盃家(유엽배집) 복천에 있는 정씨의...(daum 2010)
이유인 : ... 1848대 한성부윤 이유인(李裕寅) 고종 29년(1892) 1월 17일 3. 1851대 한성부윤 이유인(李裕寅) 고종 29년(1892) 2월 20일 4. 1867대 한성부윤 이유인(李裕寅) 고종 29년(1892) 7월 17일 5. 1877대 한성부윤 이유인(李裕寅) 고종 30년(1893)...(daum 2010)
이유인 : ... 정2품 李裕寅을 中樞院1等議官에, 종2품 李啓興을 中樞院1等議官에 敍任하는 건에 대한 上奏書(제594호)(daum 2010)
이유인 : 서울六百年史 - 1831~1860/ ... 한성부윤 이유인 (李裕寅) 고종28년 (1891)12월 2일 1847대 한성부윤 민경호 (閔京鎬) 고종29년 (1892) 1월17일 고종28년 (1891) 1월17일 1848대 한성부윤 이유인 (李裕寅) 고종29년 (1892) 1월17일 1849대 한성부윤...(daum 2010)
이유인 : 서울六百年史 - 1861~1890/ ... 규 (洪 圭) 고종30년 (1893) 1월 4일 1877대 한성부윤 이유인 (李裕寅) 고종30년 (1893) 1월14일 1878대 한성부윤... 신헌구 (申獻求) 고종30년 (1893) 8월 8일 1881대 한성부윤 이유인 (李裕寅) 고종30년 (1893)10월25일 1882대 한성부윤...(daum 2010)
이유인 : ... 4월 23일) → 內部大臣署理贊政 金明圭, 議政府贊政法部大臣 李裕寅 발신처 議政府議政署理贊政 朴定陽(1898년 4월 23일) 수신처 內部大臣署理贊政 金明圭, 議政府贊政法部大臣 李裕寅 발신자 議政府議政署理贊政 朴定陽 발신일 1898년 4월...(daum 2010)
이유인 : ... 재판해달라는 照會 제3호. 발수신 外部大臣 趙秉式(1898년 1월 27일) → 法部大臣 李裕寅 발신처 外部大臣 趙秉式 (1898년 1월 27일 ) 수신처 法部大臣 李裕寅 발신자 外部大臣 趙秉式 발신일 1898년 1월 27일 수신자 法部大臣 李裕寅...(daum 2010)
이유인 : ... 推給해달라는 照會 제4호. 발수신 外部大臣 李道宰(1898년 2월 7일) → 法部大臣 李裕寅 발신처 外部大臣 李道宰 (1898년 2월 7일 ) 수신처 法部大臣 李裕寅 발신자 外部大臣 李道宰 발신일 1898년 2월 7일 수신자 法部大臣 李裕寅(daum 2010)
이유인 : ... 閔德裕를 保放하라는 내용이다. 마지막 보고서는 1898 년 2월 17일에 京畿觀察使 吳益泳이 議政府贊政法部大臣 李裕寅에게 보낸 것으로서, 京畿道 楊州郡 海等村面 靈菊里 具召史獄事 初覆檢案과 永平郡 一東面 水八里 柳明元 尹在一獄事 査案을...(daum 2010)
이유인 : ... 6년 (1902) 9월16일 1932대 판윤 장화식 (張華植) 광무 6년 (1902) 9월17일 광무 7년 (1903) 2월12일 1933대 판윤 이유인 (李裕寅) 광무 7년 (1903) 2월13일 광무 7년 (1903) 2월24일 1934대 판윤 민경식 (閔景植) 광무 7년 (1903) 2월24일 광무...(daum 2010)
이유인 : ... 구금한 상태에서 안경수 권형진은 선고 즉시 익일 새벽 고종의 밀칙을 받은 경주이씨 상서공파 34대손 李裕寅(한성판윤 7회 최다기록자)이 사형을 집행하였고 그 다음날 미리 평리원에 구금되었던 안서현 장군과 큰집의 장손 줄기들은 3족이.../ 출처 : KBS 역사스페셜 시청소감(daum 2010)
이유인 : ... 아쉽다'고 해 '금당 맛질 반서울' 이란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특히 이 말은 을미사변 뒤에 전 법무대신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이곳으로 낙향해 살면서 고관들이 자주 오갔다 해서 생겨난 말이 라고도 전해진다. 이처럼 이 마을을 둘러싸고...(daum 2010)
이유인 : ... 奎 17813 책수 전1책 책설명 平理院案 一 건명 本年 5월 28일 警務使 申奭熙가 裁判所長 李裕寅에게 보고한 것에 대한 外部 訓令에, 俄公使 馬去寧 出來時 李大峻이 라는 자가 俄文 1封函을 御札이라 칭하며 俄使에게...(daum 2010)
이유인 : ... 위치에 예천권씨 소유의 정자가 있었으나 소실되었고, 현 병암정은 구한말(舊韓末) 법부대신을 지낸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의 "옥소정" 을 개명한 것이다. 이유인이 아름다운 경관에 감탄한 나머지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여 인근 군(郡)에서...(daum 2010)
이유인 : ... 하며, 30세 때에는 임금 앞에서 대국을 하여 의흥현감(義興縣監)을 제수받았습니다. 점치기와 술수에 능통하였던 이유인(李裕寅, 1843∼1907)은 진령군(眞靈君)의 도움으로 고종22년(1885)에 무과에 급제하고, 양주목사가 되었고, 명성황후와...(daum 2010)
이유인 : ... 말이 생겼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그러나 이 말은 을미사변 뒤 한성판윤과 법무대신을 지낸 양주대감 이유인(李裕寅)이 이곳으로 낙향해 살면서 고관들이 자주 오갔다 해서 생겼다는 설도 전해진다. 예천읍에서 서남쪽 928번 지방도를 따라 가다...(daum 2010)
이유인 : ... 1893년 무당인 진령군(眞靈君) 이씨(李氏)가 민비의 총애를 받아 전횡을 일삼자 목을 벨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이유인(李裕寅)·민영주(閔泳柱) 등이 삼사(三司)의 관학유생들을 선동, 안효제의 목을 벨 것을 상소하게 하여 제주...(daum 2010)
이유인 : ... 그의 자손들이 가세<家勢>가 쇠미<衰微>하여 타인에게 전매될 때 구한말<舊韓末> 법무대신<法務大臣> 이유인<李裕寅>(양주대감<楊州大監>)이 매입하여 1899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한 것이다. 지금의 건물은 영남 북부지방의 전형적인 사대부...(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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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