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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4436) : 이중량(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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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5권/ 명종 14년(1559 기미 / 명 가정(嘉靖) 38년) 6월 23일(계해) 2번째 기사/ 홍섬․이지신․이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섬(洪暹)을 예조 판서로, 이지신(李之信)을 예조 참의로, 【특명(特命)이다.】 이정(李楨)【이정은 맑고 대범하게 군(郡)을 다스려 백성들이 그를 사모하였다.】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이양(李樑)을 동부승지로,【이양은 당시에 전한으로 있으면서 총애가 한창 융성하였다. 상이 초배(超拜)하고 싶었지만 그 일을 어렵게 여기다가 마침내 전례(前例)를 끌어대어, 집의․사간․부응교 이상을 아울러 승지에 주의하도록 이조(吏曹)에 명해서 이양을 승지로 임명하였다. 이양은 임자년 과거에 급제하여 이때까지 8년이 되었지만, 그 사이에 거상(居喪)하느라 조정에 벼슬한 것은 6년에 불과하였는데, 금년 봄에 정랑이 되고 여름에는 이런 발탁이 있었다. 물의(物議)가 떠들썩하면서도 두려워서 감히 발론하지 못하였다. 이양은 왕비의 외삼촌으로서 어리석고 성질이 험악하며 재주도 천박하여 공론에 인정받지 못하였지만, 상이 윤원형에게 싫증을 느껴 이양을 등용하여 그 권력을 분산시키려고 하였다. 때문에 관계(官階)의 차서를 밟지 않고 초탁(超擢)시켜, 크고 작은 정사(政事)와 인물의 진퇴를 모두 먼저 이양에게 은밀히 물어본 뒤에 처리하곤 하였다. 이양은 그 총애를 과장하고자 하여 은밀히 사람들에게 누설하니, 듣는 이들이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이문형(李文馨)을 홍문관 직제학으로, 이중량(李仲樑)을 전한으로, 고맹영(高孟英)을 사헌부 집의로, 유순선(柳順善)을 응교로, 민시중(閔時中)을 장령으로, 황서(黃瑞)를 부응교로, 안방경(安方慶)을 교리로, 김첨경(金添慶)을 지평으로, 송하(宋賀)를 병조 정랑으로, 정윤희(丁胤禧)를 부교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52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5권/ 명종 14년(1559 기미 / 명 가정(嘉靖) 38년) 7월 12일(신사) 1번째 기사/ 오상․이문형․이중량․진식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오상(吳祥)을 가선 대부 홍문관 부제학【특명이다. 정청에 전교하기를, ꡒ내가 이 사람을 보건대 논사(論思)하는 부서의 장관(長官)에 합당하고 또한 2품에 승진시킬 만하기 때문에 특별히 한 자급을 더해준다.ꡓ 하였다.】으로, 이문형(李文馨)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이중량(李仲樑)을 홍문관 직제학으로, 진식(陳寔)을 전한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523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5권/ 명종 14년(1559 기미 / 명 가정(嘉靖) 38년) 11월 11일(무인) 1번째 기사/ 홍담․이중량․유창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홍담(洪曇)을 사간원 대사간으로,【이때 홍담은 도승지였는데, 이 망(望)에 주의(注擬)하라고 명하여 제수하였다. 홍담은 기국이 아주 좁았으나 스스로의 처신은 매우 검소하였다. 진복창(陳復昌)이 홍문관에 재임하고 있을 때 한번은 어깨를 걷어붙이고 일을 논하면서 ꡐ이 일은 이렇게 해야지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ꡑ고 하니, 홍담이 ꡐ이는 나랏일이다. 같은 벼슬아치로 어찌 노예처럼 반드시 너를 따라야 한단 말인가?ꡑ 하였는데, 진복창이 아무 말도 못하였다.】 이중량(李仲樑)을 승정원 동부승지로, 유창문(柳昌門)을 홍문관 직제학으로, 정척(鄭?)【성품이 교만 방종하고 시기심이 많고 음험하였다.】을 사헌부 지평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535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경신 / 명 가정(嘉靖) 39년) 1월 17일(계미) 2번째 기사/ 심통원․안위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심통원(沈通源)을 이조 판서로, 안위(安瑋)를 형조 참판으로, 민기(閔箕)를 공조 참판으로, 유지선(柳智善)을 경상도 관찰사로, 정유(鄭裕)를 황해도 관찰사로, 정종영(鄭宗榮)을 강원도 관찰사로, 이중량(李仲樑)을 승정원 우부승지로, 이감(李戡)․윤부(尹釜)를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천관(天官)의 장(長)이 어찌 중대한 자리가 아니겠는가. 그런데도 거칠고 비루하며 탐욕스러운 심통원을 도리어 이런 자리에 앉혔으니 신은 통탄스럽게 여긴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541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경신 / 명 가정(嘉靖) 39년) 4월 16일(신해) 2번째 기사/ 어계선․이문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어계선(魚季瑄)을 승정원 도승지로, 이문형(李文馨)을 좌승지로, 강욱(姜昱)을 우승지로, 이중량(李仲樑)을 좌부승지로, 이우민(李友閔)을 우부승지로, 안사웅(安士雄)을 동부승지로, 윤의중(尹毅中)을 예조 참의로, 진식(陳寔)을 형조 참의로, 홍천민(洪天民)을 사헌부 집의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54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6권/ 명종 15년(1560 경신 / 명 가정(嘉靖) 39년) 8월 19일(임자) 1번째 기사/ 박충원․이양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박충원(朴忠元)을 사헌부 대사헌으로, 이양을 예조 참판으로, 이중량(李仲樑)을 예조 참의로, 강사상을 홍문관 부제학으로, 성세장을 동지중추부사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564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1561 신유 / 명 가정(嘉靖) 40년) 1월 4일(을축) 1번째 기사/ 이탁․윤서인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탁(李鐸)【풍도가 헌걸찼고 평소의 행실이 청렴 간솔했다.】과 윤인서(尹仁恕)를 동지중추부사로, 기대항(奇大恒)을 호조 참의로, 이중량(李仲樑)을 승정원 우승지로, 성의국(成義國)을 동부승지로, 이준민(李俊民)【성질이 허랑방탕하고 오만했으나 마음에 모난 데가 없어서 과실은 별로 없었다.】을 강릉 대도호부사(江陵大都護府使)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576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1561 신유 / 명 가정(嘉靖) 40년) 8월 2일(기미) 1번째 기사/ 송순․김개․남응운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송순(宋純)【간사하고 시기심이 많았다. 임백령(林百齡)에게 아부하였으므로 진복창(陳復昌)에게 미움을 받아 귀양을 갔었는데, 진복창이 패하자 돌아와 오래지 않아 기용되니 이는 윤원형이 힘써 도와주었기 때문이다. 전주(全州)에서 체직되어 돌아갈 때에 사람들에게 ꡐ내가 이후로는 다시 벼슬을 하지 않겠다.ꡑ고 말했었는데, 얼마후 소지(召旨)가 있자 사양하지 않고 나아가니 당시 나이가 70이었다. 사람들이 모두 비웃었다. 이미 서울에 도착해서는 윤원형의 집에 날마다 찾아가니 윤원형도 차츰 그를 싫어하였다. 그 간사하고 구차한 행동은 늙을수록 더욱 심하였다.】을 나주 목사로, 김개(金鎧)【간소하다는 이름이 있으나 실은 탐욕스럽고 꾀가 많았다. 윤원형과 아주 가까이 지냈는데 속으로는 아부하면서 겉으로는 소원한 것처럼 하였으니, 또한 간교하지 않은가.】를 도총부 도총관(都摠府都摠管)으로, 남응운(南應雲)【유약하고 아첨을 잘하였다. 노복을 차지하려고 아우를 참소하니 사람들이 모두 천하게 여겼다.】을 동지중추부사로, 이중량(李仲樑)【어리석고 비루했다.】을 오위 장(五衛將)으로, 최옹(崔?)【언행을 꾸미기만 하고 실상이 없었다. 벼슬에 급급하여 분경(奔競)하기를 좋아하였다.】을 이조 좌랑으로, 윤지형(尹之亨)【분경을 하여 출세의 길을 구하였다.】을 예조 좌랑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599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記事] : 명종실록 27권/ 명종 16년(1561 신유 / 명 가정(嘉靖) 40년) 11월 16일(임인) 2번째 기사/ 이중량․김덕곤․이준민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이중량(李仲樑)을 승정원 우승지로, 김덕곤(金德?)을 공조 정랑으로, 이준민(李俊民)을 시강원 문학으로, 박율(朴栗)을 병조 좌랑으로, 안자유(安自裕)를 호조 좌랑으로, 김억령(金億齡)․이인(李認)을 홍문관 부수찬으로, 윤두수(尹斗壽)를 사간원 정언으로 삼았다./ 【태백산사고본】 / 【영인본】 20책 608면/ 【분류】 *인사-임면(任免)(www.history.go.kr 2009)
이중량 : 輓退溪先生(通政大夫 前 寧海府使 李仲樑 )| 陶山輓祭錄/ 李東耉 | 2010.01.10. 10:18/ //cafe.daum.net/dosanseowon/ 通政大夫 前 寧海府使 李仲樑/ 平生心契在山村 終始寧忘聖主恩 禮極黃扉新寵眷 貧深白屋舊田園 潭邊永絶淸?影 梅下難招灑落魂 越壑穿雲今己矣 芒鞋竹杖向誰門/ 평생에 마음이 바라는 山村에 있었지만/ 그렇다고 언제 聖主의 은혜를 입었던가./ 禮가 黃扉에 지극하니 임금의 새로운 은총이요/ 가난이 깊은 白屋은 舊日의 田園이더라./ 못 기슭엔 길이 맑고 파리한 그림자가 사라졌는데/ 매화꽃 그늘에서 시원하고 깨끗한 혼을 불러보기가 어려워라/ 골짜기를 넘고 구름 봉우리를 오르는 것도 이젠 그만이라네/ 짚신에 대지팡이를 끌고 어느 門前을 찾을꼬./ 李仲樑[1504~1582] 조선중기 문신, 본관 永川, 자 公幹, 호 賀淵, 聾巖 李賢輔의 4子, 68세에 강원도관찰사를 끝으로 공직에서 물러나 유유자적하였으며 효행과 학문이 뛰어났다. 賀淵文集이 있다. 영해 나라골(?良里) 三碧堂이 하연종택이다./ <출처 : //blog.daum.net/cacahoho(愛日堂)> (daum 2010)
이중량(李仲樑) : 본관(本貫) 영천(永川), 시대(時代) (1504∼1582), 자(字) 공간(公幹), 호(號) 하연(賀淵)/ 이력(履歷) / <예천 신문 고장의 인물> : 이중량(1504-1582)은 예천읍 고평리(高士坪) 사람으로, 자는 공한(公翰), 호는 하연(賀淵), 본관은 영천, 현보(賢輔)의 넷째 아들, 고평 사람 반사형(潘士泂)의 사위이다. 1528년(중종 29)에 진사가 되고, 1534년(중종 29)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에 들어가 검열을 거쳐 봉교(1536)로 승진하고, 이듬해 시강원 설서로 옮겼다. 그 후 승정원 주서(1537), 성균관 전적(1539), 병조 좌랑(1540), 사간원 정언(1541)을 역임하였다. 다시 사헌부 지평(1541)을 퇴계 이황과 함께 제수받았다가 병조 정랑으로 옮겼다. 그 후 지방으로 나가 경기도 도사(1542)에서 황해도 도사로 옮기고, 늙으신 부모 가까이 가기를 원하여 영천 군수(1543)로 옮겨서 선정을 하였다. 1549년(명종 4)에 서울로 올라가 종부시 첨정에 오르나, 부모 가까이에 있기 위하여 다시 지방으로 내려가 삼척 부사, 청송 군수(1550), 사헌부 장령(1557)에 다시 올랐다. 1558년(명종 13) 3월 12일에 왕이 승정원에 명령하기를, "중국 사신이 상을 주기를 원한 자인 이중량에게 말을 주라."라고 하였다. 그 후 사간원 사간(1558), 사헌부 집의를 거쳐 홍문관 교리(1559)에서 직제학으로 벼슬이 오르고, 경상도에 재해가 있자, 어사로 파견되었고, 다시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우부승지(1560), 예조 참의, 좌부승지를 거쳐 지방으로 내려가 상주 목사(1562), 경주 부윤(1563), 영해 부사(1567)로 선정을 하였다. 1571년(선조 4)에 서울로 가서 공조 참의에 올랐다가, 그 해 겨울에 종2품인 강원도 관찰사로 파견되어 도지사 생활을 하였다. 그 이듬해에 벼슬을 그만 두고 고평 마을에 와서, 살던 집 동쪽에 이안당(怡顔堂)이란 정자를 짓고, 이웃 노인들과 사귀면서 여생을 보내다가 타계하였다. 무덤은 호명면 황지리 소망실(小望谷)에 있다. 이중량은 천성이 두텁고 무거우며, 순박하고 곧으며, 일 처리에 치밀하고 도량이 넓었다. 저서로 <이안당집(怡顔堂集)>이 있다. <장병창 논설위원>/ (daum 2010)
이중량(李仲樑) : 1504년(연산군10,甲子)∼1582년(선조15,壬午).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공간(公幹). 증조부 휘 효손(孝孫), 조부 휘 흠(欽), 외조부 충순위(忠順衛) 휘 권효성(權孝誠), 처부(妻父) 휘 반세형(潘世형), 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 휘 현보(賢輔) 할아버지의 아들이시다. 1528년(중종23,戊子) 진사시에 합격하시고, 1534년(중종29,甲午)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시어, 권지승문원정자에 임명되시고, 곧 예문관에 선임되시어 1536년(중종31,丙申)까지 검열·대교·봉교를 역임하셨다. 1537년(중종32,丁酉) 세자시강원설서·승정원주서를 거쳐, 경상도관찰사인 아버지 현보의 관하 수령이 명사를 위한 지대물(支待物)진상을 상찰(詳察)하지 않았다는 내용의 장계를 보고하지 않았다고 파면되셨다. 1539년(중종34,己亥) 어머니의 상을 마치신 뒤, 예문관봉교에 복직되시고, 곧 성균관전적에 승진, 이후 예조좌랑·정언을 역임하셨다. 1541년중종36,辛丑) 11월 사헌부지평에 승진되셨고, 곧 병조정랑·경기도도사를 거쳐, 1542년(중종37,壬寅) 황해도도사에 개수되셨으며, 이듬해 양친(養親)을 위하여 영천군수를 자원하셨다. 1549년(명종4,己酉) 종부시첨정으로 입조하신 뒤 삼척부사로, 1550년(명종5,庚戌) 청송부사에 체직되셨으며, 1554년(명종9,甲寅) 통훈대부(通訓大夫)에 오르시면서 안동대도호부사가 되셨다. 1557년(명종12,丁巳) 아버지의 상을 마치시고, 사헌부장령에 복직되셨고, 이후 사간·집의를 거쳐, 1559년(명종14,己未) 특명으로 홍문관에 선임되시어 교리·전한·직제학을 역임하셨다. 그해 11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자하시면서 승정원동부승지에 발탁, 이후 1561년(명종16,辛酉)까지 우부승지·예조참의·좌부승지·우승지·5위장을 지내셨고, 1562년(명종17,壬戌) 상주목사로, 1563년(명종18,癸亥)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신 뒤, 경주부윤에 체직되셨고, 1564년(명종19,甲子) 경주부의 군액이 많이 결핍되었다 하여 파직되셨다. 1567년(선조즉위년,丁卯) 행영해부사로 복직되시고, 1570년(선조3,庚午)공조참의, 곧 강원도관찰사에 체직되셨으나, 1572년(선조5,壬申) 병사(兵事)를 소홀히 하였다고 파면되셨다. 이후 승지(勝地)를 유력하면서 유유자적하시다가 돌아 가셨다. 성품이 과묵하시고 겸손하셨으며, 효행과 학행이 뛰어 나셨다. 20여년 간 외관으로서 선정을 베푸셨고, 특히 영해부사로 계실 때는 유민정착에 힘써 칭송을 받으셨다./【참고문헌】中宗實錄, 明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daum 2010)
이중량 :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賀淵先生文集/ 李仲樑 (1504∼1582) ; 字 公幹, 號 賀淵, 本貫 永川./ 石印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1961./ 2卷2冊 ; 30x20.7cm./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인 이중량의 시문집이다. 이중량은 현보(賢輔)의 아들이며 1534(중종 29)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이 문집은 1961년 후손 상교(祥敎)가 편집, 간행하였다. 부(賦)의 「망자재배부(芒刺在輩賦)」는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 항상 등에 가시를 짊어지고 사는 것과 같아서 늘 불안한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함을 비유한 것이고, 「운부(雲賦)」는 사람의 생활이 제도에 얽매여 있어 자유롭지 못함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구름과 같이 생멸과 변화가 자유롭게 형성되는 세계를 동경한 글이다. 「열산유심정(熱散由心靜)」은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을 읊은 것으로, 마음이 고요하면 온갖 번뇌가 사라진다고 설명하였다. 「관부여승사(官府如僧舍)」는 관청에 사건이 없으니 조용하기가 절과 같다고 하여 자신의 성정으로 관아가 한가롭다는 것을 은연중에 나타낸 것이다. 「관동행록(關東行錄)」은 관동지방을 돌아보며 풍물·인심·풍속·교육 등을 소상하게 기록한 것이다. 이밖에 「답퇴계(答退溪)」·「제퇴계상공문(祭退溪相公文)」등이 있어 이황(李滉)과 친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부록의 「국조실록초략(國朝實錄抄崙)」은 1543(중종 38)년부터 1561(명종 16년까지 저자에 관계된 부분을 수록하였다./ 序 ; 權相圭./ 目錄./ 卷之 1. 賦(2首), 詩(64首)./ 卷之 2. 詩(107首)./ 書 ; 答退溪(2), 上碧梧兄, 上碧梧及兄諸弟, 與金伯榮(富仁)./ 箋 ; 辭謝 召命./ 啓辭 ; 請遞刑曹佐郞成詢黃海都事尹果./ 祭文 ; 祭退溪李相公, 祭虎巖兄./ 跋 ; 書家君酒祭二禮說後./ 年譜./ 附錄 ; 贈遺, 輓詞, 墓碣文, 家狀, 行狀, 墓誌銘, 墓碣銘./ 後? ; 李文鉉, 白淳愚./ 跋 ; 金榥./ 國朝實錄抄崙.(daum 2010)
이중량 : <국조 문과 방목>/ 이중량(李仲樑) More Info./ 중종(中宗)29년(1534년), 식년시(式年試) 병과8(丙科8)/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04년, 갑자, 자(字) 공간(公幹), 본관(本貫) 영천(永川), > 가족사항 부(父) 이현보(李賢輔), 조부(祖父) 이흠(李欽), 증조부(曾祖父) 이효손(李孝孫), 외조부(外祖父) 권효성(權孝誠), 처부(妻父) 반세형(潘世형)/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28(무자) 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관직(官職) 강원/감사(江原/監司)(daum 2010)
이중량 : 부(父) 이현보(李賢輔) 1467(세조13)~1555(명종10), 조선의 문신. 자는 비중(비仲), 호는 농암(聾巖)·설빈옹(雪●翁), 시호는 효절(孝節). 현감(縣監) 흠(欽)의 아들. 1498년(연산군 4)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교서관(校書館)의 벼슬을 지내고 검열(檢閱)이 되었다. 1504년 정언(正言)으로 있을 때 서연관(書筵官)의 비행을 논했다가 안동(安東)에 유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지평(持平)에 복직, 밀양(密陽)·안동(安東)의 부사(府使),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지내고, 1523년(중종18) 성주 목사(星州牧使) 선정(善政)을 베풀어 왕으로부터 표리(表裏)를 하사 받았다. 그뒤 병조 참지(兵曹參知)·동부승지(同副承旨)·부제학(副提學) 등을 거쳐 대구 부윤(大丘府尹)·경주 부윤(慶州府尹)·경상도 관찰사·형조 참판(刑曹參判)을 지내고, 1542년 호조 참판(戶曹參判)에 이르러 은퇴를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온천욕(溫泉浴)을 핑계로 낙향했다. 1546년(명종 1) 상호군(上護軍)이 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올랐으며 1545년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되었다. 자연을 노래한 많은 시조(時調)를 지었고, 10장(章)으로 전하던 「어부사(漁父詞)」를 5장으로 고쳐 지은 것이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전한다. 예안(禮安)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모(母) 안동권씨(安東權氏) 충순위(忠順衛) 권효성(權孝誠)의 女/ 자는 明達(명달), 조선 때 崇政大夫(숭정대부)를 거쳤고, 孝(효)로써 旌閭(정려)가 세워졌다.(daum 2010)
이중량 : 형(兄) 이석량(李碩樑) 장사랑(將仕郞)(daum 2010)
이중량 : 형(兄) 이문량(李文樑) 찰방(察訪)/ 이문량(李文樑) 1498년(연산군4,戊午)∼1581년(선조14,辛巳), 자는 대성(大成), 호는 벽오(碧梧),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농암 휘 현보(賢輔) 할아버지의 둘째 아들(영양군 11세손)이시며, 어머니는 안동권씨(安東權氏)로 충순위(忠順衛) 효성(孝誠)의 딸이시다. 1520년(중종 15) 이후 장사랑·통사랑·종사랑·적순부위(迪順副尉)·병절교위(秉節校尉) 등의 많은 음직(蔭職)이 내려지고, 1559년(명종 14) 평릉도찰방(平陵道察訪)이 제수되었다. 특히, 이황(李滉)과는 이웃에 살면서 절친하였는데, 1564년(명종 19) 이황(李滉)과 함께 청량산(淸량山)을 유람하면서 시를 읊고 학문을 토론하기도 하셨다. 뒤에 이황의 고제가 된 휘 이덕홍(李德弘)·황준량(黃俊良) 등을 초년에 가르치신 적도 있다. 효성이 지극하시고 우애가 독실하였으므로 사람들은 중국 삼국시대의 백미(白眉) 마량(馬良)에 비유하였다.(daum 2010)
이중량 : 형(兄) 이희량(李希樑) 현감(縣監)/ 이희량(李希樑):1501(연산군 7, 신유)~1565(명종 20, 을축). 본관 永川. 자는 가허(架虛). 호는 호암(虎巖). 賢輔의 第三子. 음보(蔭補)로 彦陽 奉化縣監 역임. 보충:禮安 汾川으로부터 ?基 逸園의 寶盖亭에 옮겨와 살면서 외조부(外祖父) 權公의 제사를 받들었다고 함. ▣참고:安東鄕土誌(daum 2010)
이중량 : 제(弟) 이계량(李季樑) 현감(縣監)/ 이계량(李季樑):1508(중종 3, 무진)~?. 본관 永川. 농암(聾巖) 현보(賢輔)의 第五子. 彦陽 咸昌 義興縣監 역임. 부친상(父親喪)을 마친 뒤 李滉의 천거로 거창군수(居昌郡守) 역임. ▣참고:永川李氏譜(daum 2010)
이중량 : 제(弟) 이숙량(李叔樑) 진사(進士)/ 이숙량(李叔樑) : 1519년(중종14,己卯)∼1592년(선조25,壬辰),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대용(大用), 호는 매암(梅巖)으로 농암선생(聾巖先生) 휘 현보(賢輔) 할아버지의 여섯째 아들이시고, 일찍이 이황(李滉)의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는데, 학문이 깊고, 문장은 청려전아(淸麗典雅)하고 필법은 절묘하셨다 한다. 1543년(중종38, 癸卯) 24세에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셨으나 벼슬에 뜻을 두지 않으시고 성리학(性理學)의 연구에만 치중하셨는데, 후일 천거에 의하여 왕자사부(王子師傅)에 임명되셨으나 부임하지 않으셨다. 임진왜란 때에는 격문을 지어 의병의 궐기를 촉구하시기도 하셨으나 난중에 돌아 가셨다. 그리고, 할아버지는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자는 경임(景任), 호는 육림당(六休堂) 또는 태암(苔巖)으로 부르는 이주(李狼) 할아버지와 함께 연경서원의 건립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셨다. 예안(禮安)의 연경서원(硏經書院)에 제향(祭享) 되셨다./【참고문헌】燃藜室記述, 嶺南人物考, 東儒師友錄(daum 2010)
이중량 : 제(弟) 이윤량(李閏樑) 내의원판서(內醫院判書)/ 이윤량(李閏樑):1516(중종 11, 병자)~1589(선조 22, 기축). 본관 永川. 자는 자구(子構). 호는 행암(杏巖). 賢輔의 子. 李滉 문인(門人). 문과(文科) 급제. 內醫院正 판사(判事) 역임. 의학(醫學)에 두루 통함. 일찍이 명(明)나라에 가있을 때, 황제(皇帝)로부터 관작(官爵)과 상(賞)이 내려지는 영예를 입었으나 이를 받지 아니하고, 다만 盆松 몇 그루만을 가지고 돌아와 이것을 집 남쪽 암대(巖臺)에다 심어 만년(晩年)의 嘯詠거리로 삼음. 金富仁 黃俊良 吳守盈 琴蘭秀 등과 교계(交契)가 깊었음. ▣참고:退溪門人錄(daum 2010)
이중량 : 제(弟) 이연량(李衍樑)/ 이연량(李衍樑):생몰년 미상. 본관 永川. 윤량(閏樑)의 弟. 李滉 문인(門人). 효행(孝行)이 卓異하고 글씨에 능함. 司僕正 역임. 스승 李滉의 考終時에 여러 자제들과 함께 한결같이 그 곁을 지킴. ▣참고:退溪門人錄(daum 2010)
이중량 : 문헌(文獻) ■동각잡기 하(東閣雜記下) 본조 선원 보록 2/ ○ 지중추 이현보(李賢輔)가 71세에 외간상(外艱喪 : 아버지의 상사)을 당하여 여막살이를 하고 삼년상을 마치자, 호조 참판에 제수되었다. 얼마 안 되어 병을 핑계하고 온천에 목욕하겠다고 향리인 예안(禮安)으로 돌아가니, 은퇴할 생각을 한 것이었다. 조관(朝官)들이 서울을 비우다시피 나와 전송하였다. 중종이 그 욕심 없고 사양함을 가상히 여겨 지중추에 제수하였고, 인종과 명종이 모두 가상히 여겨 장려하여 품계가 여러 번 올라 숭정대부에 이르렀다. 나이 89세에 죽었다. 그 때에 아들 중량(仲樑)은 안동 부사, 희량(希樑)은 의흥 현감(義興縣監), 계량(季梁)은 봉화 현감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복과 장수를 잘 누렸다고 일컬었다.(daum 2010)
이중량 : ■文峯先生文集卷之一 詩(문봉선생문집권지일 시)/ 送賀淵李公 仲樑觀察關東(송하연리공간중량관찰관동)/ 又向關東路。遙遙玉節遲。海城春發後。山館月明時。戀闕燈前夢。尋眞雪裏詩(우향관동로。요요옥절지。해성춘발후。산관월명시。연궐등전몽。심진설리시)/ 。梅花無處寄。千里祗相思。(。매화무처기。천리지상사。)(daum 2010)
이중량 : ■栢潭先生續集卷之三 七言律詩(백담선생속집권지삼 칠언율시)/ 李觀察使公幹仲樑挽詞(이관찰사공간중량만사)/ 早年龍化數聲雷。飛上靑雲步武開。一道觀風留?舍。七城共理好?裁。子游室裏(조년룡화수성뢰。비상청운보무개。일도관풍류?사。칠성공리호?재。자유실리)/ 初承眄。仲擧懸中幾見陪。華屋邱山回首處。哀歌涕濕舊澹臺。(초승면。중거현중기견배。화옥구산회수처。애가체습구담대。)(daum 2010)
이중량 : ■栢潭先生續集卷之三 七言律詩(백담선생속집권지삼 칠언율시)/ 李觀察使公 仲樑挽詞(이관찰사공간중량만사)/ 名鄕寂寞絶遺芳。千古斯文感慨長。溪上煙霞含怨血。汾陽山水帶愁光。冠巾白(명향적막절유방。천고사문감개장。계상연하함원혈。분양산수대수광。관건백)/ 日烏衣巷。歌管東風綠野堂。却憶聾巖無復繼。典刑今又慟公亡。公兄察訪文樑(일오의항。가관동풍록야당。각억롱암무복계。전형금우통공망。공형찰방문량)/ 。去年下世。(。거년하세。)(daum 2010)
이중량 : ■雪月堂先生文集卷之二 詩(설월당선생문집권지이 시)/ 挽李監司仲樑(만리감사중량)/ 大器人爭識。淸門世共談。四朝二品爵。一子七孫男。宅近靑山郭。亭臨碧水潭(대기인쟁식。청문세공담。사조이품작。일자칠손남。댁근청산곽。정림벽수담)/ 。百年來往地。今日鎖煙嵐。(。백년래왕지。금일쇄연람。)(daum 2010)
이중량 : ■嘯皐先生文集卷之二 觀光錄(소고선생문집권지이 관광록)/ 挽李監司仲樑(만이감사중량)/ 汾水源淸濯肺腸。明時臺閣好騰翔。聾巖有子推眉白。善谷多賢頌髮黃。興孝幾(분수원청탁폐장。명시대각호등상。농암유자추미백。선곡다현송발황。흥효기)/ 城毛氏檄。分憂一路召公棠。屋山幽宅平生計。煙鎖林亭舊醉鄕。(성모씨격。분우일로소공당。옥산유댁평생계。연쇄림정구취향。)(daum 2010)
이중량 : ■金先生憂亭集卷之六 附錄(김선생우정집권지6 부록)/ [祭文 金振宗,羅允明,黃博,李仲樑,南應龍,李?枕等]([제문 김진종,나윤명,황박,이중량,남응룡,이?침등])/ 維年月日。兵曹正郞金振宗,羅允明,佐郞黃博,李仲樑,南應龍,李?枕等云(유년월일。병조정랑김진종,나윤명,좌랑황박,이중량,남응룡,이?침등운)/ 云。惟靈。山河鍾秀。篤生大人。方其韋布。志在經綸。首登黃甲。早著敭歷。(운。유령。산하종수。독생대인。방기위포。지재경륜。수등황갑。조저양력。)/ 飛龍九五。盟參太室。?,穀之才。蕭,曺之匹。道直謗積。元老是斥。天鑑孔(비룡구오。맹참태실。?,곡지재。소,조지필。도직방적。원로시척。천감공)/ 昭。召還台列。爰秉國鈞。再光??。安危係身。衆望如山。一疾不?。大化難攀(소。소환태열。원병국균。재광??。안위계신。중망여산。일질부?。대화난반)/ 。九重震悼。百僚?傷。某等久?周行。仰贍容光。恭陳菲薄。庶幾來格。嗚呼哀(。구중진도。백료?상。모등구?주행。앙섬용광。공진비박。서기래격。오호애)/ 哉。尙饗。(재。상향.)(daum 2010)
이중량 : ■知退堂集卷之十一 東閣雜記坤 本朝璿源寶錄 [5](지퇴당집권지십일 동각잡기곤 본조선원보록 [5])/ ○李知樞賢輔。七十一歲。丁外憂廬墓。服?。除戶曹參判。未幾。謝病乞浴。(이지추현보。칠십일세。정외우려묘。복?。제호조참판。미기。사병걸욕。)/ 歸鄕禮安。蓋爲退休計也。縉神傾都出餞。中廟嘉其恬退。除授知中樞。仁廟明(귀향예안。개위퇴휴계야。진신경도출전。중묘가기념퇴。제수지중추。인묘명)/ 廟。特加褒奬。累階崇政。年八十九而卒。時嘉靖乙卯間也。子仲樑爲安東府使(묘。특가포장。누계숭정。년팔십구이졸。시가정을묘간야。자중량위안동부사)/ 。希樑爲義興縣監。季樑爲奉化縣監。一時榮養備至。人稱其福壽有終。(。희량위의흥현감。계량위봉화현감。일시영양비지。인칭기복수유종。)(daum 2010)
이중량 : ■草澗先生文集卷之一 詩○五言絶句(초간선생문집권지일 시○오언절구)/ 串坪。次李監司仲樑令公韻。有意客重到。無情春易暮。聊將酒一壺。慰我香山(곶평。차이감사중량령공운。유의객중도。무정춘역모。요장주일호。위아향산)/ 老。(노。)/ 附原韻(부원운)/ 有酒客不到。客來春已暮。春歸客亦歸。奈此江村老。(유주객부도。객래춘이모。춘귀객역귀。내차강촌로。)(daum 2010)
이중량 : 예안인물(禮安人物)/ 이중량(李仲樑) : 본(本) 영천(永川) 현보(賢輔)의 아들. 이황과 사귐이 좋았다. 문과 급제. 벼슬은 관찰사.(daum 2010)
이중량 : 賀淵公 李仲樑의 년보| [유장]행암공파[영양군24세] | 2008.12.31. 20:46/ //cafe.daum.net/yclee/Vuho/ 賀淵公 李仲樑의 년보/ 三碧堂은 永川李氏 賀淵公派 종택이다./ 李仲樑(字 公幹 號 賀淵) : 1504년 9월19일 예안현 분천리 출생/ 1582년 3워19일 考終 향년79세/ 선고 숭정대부 行 지중추부사 諱 賢輔이시다.(제4자 중량)/ 1528년 司馬詩에 합격(24세),퇴계 선생과 동방급제./ 1534년 병과에 급제 ,퇴계 선생과 동방급제 승문원 예문관 검열./ 1536년 待敎/ 1537년 시강원 설서 승정원 주서./ 1539년 봉교 성균관 전적 (모친상 5월10일 考終)/ 1540년 병조좌랑/ 1541년 사간원정언 사헌부지평 병조좌랑/ 1542년 경기도사/ 1543년 永川군수/ 1549년 종적시검정 삼척부사/ 1550년 청송부사/ 1554년 안동대도호부사/ 1555년 부친상 (음 6월13일 考終)/ 1557년 사헌부장령 / 1558년 사간 사헌부집의 홍문관 교리/ 1559년 응교 직제학 災傷어사 승정원 동부승지/ 1560년 우부승지 예조참의 좌부승지/ 1561년 우승지/ 1562년 상주목사/ 1563년 경주부윤 (가선대부 종2품)/ 1564년 軍額결핍관계로 파직당함/ 1567년 영해부사/ 1571년 공조참의/ 1571년 강원도 관찰사겸 병마수군절도사/ 1572년 파직됨(兵事에 소홀히 하였다고 파면되다.)/ 그 후 강산과 명승지를 유력하였다./ 20여년간 외직을 근무하면서 선정을 베풀었고 특히 영해부사가 되어서는 류민정착에 힘을 써서 칭송을 많이 받았다./ 15대손 鍾建 拙譯(daum 2010)
이중량(李仲樑) : [시험관련 사항] 왕/년도 : 중종(中宗) 29년/ 과거시험연도 : 1534 갑오,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병과8(丙科8)/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이중량(李仲樑), 자 : 공간(公幹), 본관(本貫) : 영천(永川)/ [이력 및 기타 사항] 소과 : 1528(무자) 진사시, 전력(前歷) : 진사(進士), 관직(官職) : 강원/감사(江原/監司)/ [가족사항] 부(父) : 이현보(李賢輔), 조부(祖父) : 이흠(李欽), 증조부(曾祖父) : 이효손(李孝孫), 외조부(外祖父) : 권효성(權孝誠), 처부(妻父) : 반세형(潘世?)(daum 2010)
이중량 : 영덕 삼벽당(09.4.26)/ 블로그/ 2009.04.26/ ; 경상북도 영덕군 창수면 인량리 118호/ 이 건물은 조선중기의 문신인 하연공파(賀淵公派) 이중량(李仲樑, 1504~1582)의 종택이다. 이중량은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1467~1555)의 넷째 아들로 중종(中宗) 23년(1528).../ //blog.daum.net/snowofsong/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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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