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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4582) : 임즐-임창덕-임창휘-임천봉-임춘(1)((附 예천인 장병국과 안중식, 5일 전국 한시백일장에서 가작 수상...축하합니다./호명면 김원혁, 5일 대한명인으로 등극...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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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즐 : 孝子 城隱 醴泉林公(隲)
墓碣銘/ 상위서지 예천의 금석문
1/ 분류도서 > 영남유교문화연구자료/
예천의 금석문 1/ 孝子 城隱 醴泉林公(隲)
墓碣銘/ 효자 성은 예천임공(즐)
묘갈명/ 성은(城隱)
임(林)공의 산소가 예천군 관내 덕율산 경좌의 언덕에 있고 배위(配位)를 합부(合?)하였다.
오랜 세월에 비갈이 깎이어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더니 후손들이 이것을 안타깝게 여기어 금년 봄에 공론을 모아 장차 고쳐 새우기를 작정하고 세기(世基),
병휘(秉暉),
봉규(鳳圭), 휘선(輝善)을 보내어 냇가의 움막으로 나를 찾아와 묘명을 청하거늘 내가 노쇠하고 문필을 못하므로 굳이 사양했으나 마지못하고 삼가 살펴보니 공의 휘(諱)는
즐(隲)이요 자(字)는 상협(相協)이요 호(號)는
성은(城隱)이요 임씨(林氏)니 적(籍)은 예천이다.
충절공(忠節公)
휘 팔급(八伋)이 중국으로부터 동으로 와서 신라 경덕왕 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냈으니 이 어른이 비조(鼻祖)가
된다. 휘 계미(季美)는 고려 금자광록대부 부안군(金紫光祿大夫扶安君)이니 공의
10대조가 되고 5대를 내려가 휘 광비(光庇)
시호 문열(文烈)이 더욱 드러난 분들이다.
고조 휘 춘(椿)은 증 봉익대부(贈奉翊大夫)
삼사사(三司事)로 호는 서하(西河),
시(諡)는 절의(節義)이다.
증조(曾祖)
휘 충세(忠世)는 증 이부상서(贈吏部尙書)요 조부(祖父)
휘 익(益)은 육도순무어사(六道巡撫御使)이다.
부친 휘 천봉(天鳳)은 진사(進士)로 판윤(判尹)에 이르렀으니
이같이 찬란한 계통이지만 생년졸년과 배위 성씨(配位姓氏)는 전해 오지 아니한다.
고려 말년에 생원에 올라 어사를 제수 받으니 곧은 소리가 조정 안에 진동했고 여섯 고을을 다스렸는데 치적이 현저하였다.
태조 임신(壬申)년에 벼슬을 사양하고 돌아와 여러번 부름에 응하지 아니했으니 그 성망이 사방에 떨치었다.
청백(淸白)으로 지조를 지키고 사자서(四子書)를 탐구해서 안에 쌓인 포부가 밖으로 드러났으며,
글씨가 물 흐르듯 했으니 이는 문장의 탁월함이다. 타고난 효성으로 어버이를 받들었고 부친의 상사(喪事)를 당해서는 묘 곁에 움막을 치고
3년을 시묘했으며 한번도 웃는 일이 없었으니 관찰사가 정문을 내려 표창했다.
정유(丁酉)년에 충효를 권장하는 뜻에서 정문을 수리하고 이 뒤로는 관장들이 보수를 계속했으니 이것은 효도가 오래 갈수록 드러남이다.
아들 계중(繼中)은 함안군수(咸安郡守)로 증공조참판(贈工曹參判)
예천군(醴泉君)이고,
사위는 수의부위(修義副尉)
박운실(朴云實)이다.
손자는 두 사람인데 맏이는 자번(自蕃)이니 형조판서(刑曹判書)
양양군(襄陽君)이요,
다음 자무(自茂)는 충찬위(忠贊尉)
돈용교위(敦勇校尉)
용양위부사직(龍?尉副司直)이다.
지금 이 일을 주간(主幹)하는 이는 후손 병훈(炳勳)과 태수(泰洙)다.
명에 말하기를 하늘이 내린 충정은 충성과 효성이다. 이분이 명철해서 그 진리 지키었네.
풍신(楓宸)에 비친 정성 육군(六郡)이 칭송하고 양산의 슬픔 만나
3년을 시묘했네.
두어줄 비문으로 다 적지 못하지만 높다란 이 비명이 산소에 빛을 내네. 갑진(甲辰)년 중양절(重陽節)에 문소(聞韶)
김정모(金正模)
삼가 짓다./ 제공 유교넷(//www.history.go.kr/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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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덕 : 한국근현대인물자료/ 이름 임창덕(林昌德)/ 민족구분 한국인/ 출신지 1) 慶尙北道 醴泉郡 醴泉面 西本洞(원적)/ 출전 1) 기념표창자, 507/ 현주소 1) 慶尙北道 大邱府 西千代田町/ 출전 1) 기념표창자, 507/ 경력 및 활동 1) 1914年 6月 3日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雇員. 11月 30日 任 朝鮮總督府 臨時土地調査局 書記補, 1920年 10月 31日 文官分限令第11條 第1項 第3號에 의하여 休職. 12月 20日 復職, 1934年 1月 9日 敍 勳8等 授 瑞寶章. 5月 1日 任 朝鮮總督府 稅務署屬 大邱稅務署 庶務課長, 1935年 3月 15日 敍 從7位, 1935年 현재 從7位 勳8等/ 출전 1) 기념표창자, 507/ 참고문헌 조선총독부시정25주년기념표창자명감(//db.history.go.kr/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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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휘(임창휘 氏 釜山大學에서 博士學位 取得) [記事] : 예천읍 왕신1리 태생의 임상희(65·전 재부산예천읍회장) 김귀자(60·보문면 작곡리 출생) 씨의 차남 임창휘(35) 씨가 2012년 8월 부산대학교에서 ‘몬테칼로 기법을 이용한 디지털 마모그라피 검출기의 신호 및 노이즈 분석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임창휘 씨는 현재 한국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醴泉新聞 2012.12.6)
임창휘 : 예천의 자랑 3125 : 권갑하(5)(祝 김유빈, 임창휘)/ 작성 장병창/ 씨의 차남 임창휘(35) 씨가 2012년 8월 부산대학교에서 ‘몬테칼로 기법을 이용한 디지털 마모그라피 검출기의 신호 및 노이즈 분석에 관한 연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임창휘 씨는 현재 한국원자력연구소에 근무하고.../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bulletin (daum 2016)
임창휘 : 조직등가비례계수기의 중입자가속기연구소의 135 MeV/u 탄소 이온에 대한 선형.../ 연구원) ; 문봉곤(한국천문연구원) ; 임창휘(한국원자력연구원) ; 문명국(한국원자력연구원) ; 하시시 키다무라(일본국립방사선연구소) ; 신고 고바야시(일본국립방사선연구소) ; 김성환(청주대학교) ; TEPC .../ scholar.ndsl.kr (daum 2016)
임창휘 : BK21 플러스 사업단 한국수력원자력연구소(김동환, 김성규), 한국기계 연구원(최도욱, 김한메), 한국표준과학연구원(허태훈), 한국에너지기술평가원(정성일), 한국전기 연구원(정시욱), 한국생산기술연구원(하경남), 한국원자력연구원(이재룡, 임창휘), 자동차.../ uwcms.pusan.ac.kr/user (daum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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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천봉(林天鳳) : ?-1408(태종 8), 예천읍 서본1리 성저리(城底里) 출신, 본관은 예천, 진사 춘(椿)의 증손자, 익(益)의 아들,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였고, 한성 판윤, 사선 부정(司膳副正)을 지냈다. 묘는 예천읍 대심리 하무실 대모곡 남향(大母谷南向)에 있다.(襄陽誌 1661, 族譜, 醴泉郡邑誌 1786)
임천봉 : 목내선(睦來善)/ 신종우의 인명사전 | 2010.06.30/ ...정착, 세거하여 후손들이 본관을 예천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계승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 인물로는 임천봉(林天鳳)이 고려에서 진사(進士) 판윤(判尹) 등을 지냈으며, 임순련(林舜連)이 봉익대부(奉翊大夫)에 올라 우문관(右文館.../ //www.shinjongwoo.co.kr(daum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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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춘 : 안동 금소리 예천임씨(醴泉林氏)
유적/ 2015.01.03/ 서하 임춘(西河 林椿)
고려 중·후기의 문인으로 예천임씨(醴泉林氏)의 시조.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문헌을 상고하면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cafe.daum.net/gaetuel/T...
의병정신선양..(daum 2015)
임춘 : 한국사료총서/ 20집 輿地圖書 下(한국사료총서 제20집) > 慶尙道 > 密陽 > 樓亭/ 召樓 在嶺南樓西/ 林椿/ 詩曾聞圓橋臨滄濤樓閣玲瓏架巨鼇鼇傾海動群仙駭茫茫失去一峯高飛來?惚移於斯磅?千古當古壕突起連空如疊?百丈淸潭橫鴨綠水泛桃花出洞中居人宛是秦餘俗靑山影裡兩三家垂柳陰中千萬屋日暮郊原牛馬歸春深洲渚鳧?浴漁舟之子棹如飛溪岸不知盤幾曲洛城遷客來何時樓上欲窮千里目山耶雲耶遠一色?點長空行斷續天涯晩色正蒼然其奈思家心更速不用重來登此樓烟波好處使人愁○於一方耶予聞形勝未得寓目者久矣歲辛酉冬醴泉權相國孟孫以京畿觀察使移節是道技?幕下明年壬戌春行至密山從公于樓簿書之餘縱目以視奇觀勝賞果陋所聞非惟甲於南方直與騰王之閣岳陽之樓相爲??而仰有勝焉者樓之西又有一樓益近水焉訊之邑人曰府使安公質鮑舊址而營之邑人稱小樓而未有名焉予曰凡稱小者對大而言盖緣有嶺南舊樓而云爾然而結構之制雖未及舊樓軒楹開豁徒倚便穩設使軒盖?臻各有登臨宴息之所則斯樓之作誠不可小之也而?登斯以望茂林修竹連峯疊?長烟一空皓月千里與嶺南而同一觀也至若近而爽?侵軒淸湍激岸遠而牧者于馬巖耕者于牛島直望于林表則又有加於舊樓者奚可以小而稱也是?扁以美額曰其音而開其字曰召樓以召易小爾惡知之營是樓者勞於撫字明於聽斷州人比之召父登是樓者卒皆宣化南方遵召伯之舊政者則目之以召其亦庶幾乎舊增府使李忠傑目舊增制名臨鏡堂新增今名枕流堂(//db.history.go.kr/2014)
임춘 : 서명 : 醴泉/ 西河林椿[주:字耆之醴泉人□擧不第鄭仲夫之亂闔門遭禍公獨脫身/ 僅免窮厄而卒長於四六時亦奔放閑居詩曰病懷牢落掩柴關盡日秋聲在樹間策上治安知計誤賦/ 成歸去覺身閑胸中?磊偏宜酒眼峯嶸只受山多少經心千古事摠隨蝴蝶任??] / 상위서지 姓號譜彙v9/ 분류고도서 > 사부(史部) > 전기류(傳記類)/ 제공 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db.history.go.kr/2014)
임춘(林椿) : 고려 의종 초-명종 말, 예천읍 동본1리(東邑內 川西里)에서 출생하여 보문면 옥천리 지과실(知過谷)로 옮겨 살았다. 초명은 대년(大年),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본관은 예천, 광비(光庇)의 아들, 종비(宗庇)의 종자 겸 제자(從子兼弟子), 예천 임씨(醴泉林氏)의 중시조(中始祖)이다. 7세에 6갑(六甲)을 외우고, 경서(經書)와 백가서(百家書)를 통달한 신동(神童)이다. 무신의 난(1170) 때 온 집안이 화를 만났으나, 춘(椿)은 몸을 빼어 탈주하여 간신히 목숨을 건져서 예천 지과리(知過里)로 피난하여 도학(道學)을 강명(講明)하여 후진을 교육하였다. 진(晋) 나라 죽림칠현(竹林七賢)을 본떠서 만든 죽림고회(竹林高會) 중의 한 사람이고, 당시 쟁쟁한 학자인 오세재(吳世才), 조통(趙通), 황보 항(皇甫抗), 함순(咸淳), 이담지(李湛之), 이인로(李仁老) 등 강좌칠현(江左七賢) 중 한 사람으로서 시(詩) 짓기에 안간힘을 다했다. 한문(漢文)과 당시(唐詩)에 뛰어났고, 그의 시문(詩文)은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 1191)>에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설화집(說話集)인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 6권이 있고, 밀양의 영남루(嶺南樓)에 있는 시가 전한다. 문학(文學) 장르 중 가전(假傳)은 임춘(林椿)이 최초의 작가이다. 묘는 경기도 김포군 서촌 남압사 동남 백보 동구(京畿道金浦郡西村南鴨寺 東南百步洞口) 밖에 있고, 묘비가 있다. 삼사 상장군(三司上將軍)에 증직(贈職)되었다. 1710년(숙종 36) 충남 공주 기호서원(忠南公州岐湖書院), 1727년(영조 3) 보문면 옥천리 옥천서원(玉川書院)에 제향(祭享)되었고, 호남지방 흥양서원(湖南地方興陽書院)에도 제향되었는데 지금은 낙안(樂安)으로 옮겼다. 어려운 고사(故事)를 많이 써서 자신의 의사를 진정(陳情)하거나 또는 하사(賀謝)하는 글인 '계(啓)'는 임종비(林宗庇) 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규보(李奎報)는 말하고 있다. 고사(故事)로 대구(對句)를 구성하여 만든 사육문(四六文)은 그대로 임춘(林椿)에게도 전달되어 <서하집(西河集)>에 수록되어 있다. 당시는 무신 정권이어서 하극상의 혼란기였다. 많은 사람들이 당시 사회의 모순을 규탄하고 있을 때 임춘은 그러한 상황 자체를 시로 만들어 읊음으로써 극복해 냈다. 고려 때 시로써 임춘과 상벽을 이루었던 이규보도 "임춘의 청아한 시는 이름 날리기에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또한 친구 이인로도 "임춘의 시는 고려 세상을 주름잡았다."라고 하여 극구 칭찬하였다. 과연 임춘은 문장을 면밀하게 지어서 세상을 울렸다. 술과 돈을 의인화한 소설 두 편(麴醇傳, 孔方傳)을 지어서 전하고 있다. 이 두 편은 문학사적 의미에서는 설화 문학과 소설 문학을 연결시키는 과도기적 문예 활동이었다. 그리고 조선 초기에 처음 나타난 한문 소설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임춘은 33세로 일찍 죽어 재주를 다 펴지 못하였지만, 평생동안 이인로와 친하게 사귀었다. 이인로(李仁老)는 이르기를, "임춘의 문장은 고문(古文)을 배웠고, 시(詩)는 소아(騷雅)의 풍골(風骨)이 있어서 해동(海東)에서 벼슬하지 않은 사람으로 뛰어난 사람은 한 사람 뿐이다. 그가 죽은 지 20년, 배우는 사람들이 입으로 시를 읊으면서 마음으로 흠모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장차 굴송(屈宋)의 반열(班列)에 두려 한다."라고 하였고, 또 제문(祭文)에서 이르기를, "매서운 매와 눈 속의 소나무도 그 굳세고 열렬함에 견줄 수 없고 재주는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서로 다투고, 이름은 태산(泰山)과 같이 멸하지 않으리라"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인로는 임춘의 유고를 모아 문집 6권을 엮었고 <동문선> 등의 책에서도 수 많은 시와 제문, 그리고 국순전, 공방전 등이 실려 있다. 그 외에도 <성리종회(性理宗會)> 10편과 <삼재상수지학(三才象數之學)> 20편, <고승전(高僧傳)>이 있다고 하나 분명치 않다.
송성담(宋性潭)은 임춘의 축문(祝文)을 지어 이르기를, "성품은 밝고 곧고, 천품과 문장의 조화는 영원하니 산처럼 높고 물처럼 깊다."라고 하였다. ᄋ 고려 때는 예천읍내 대부분이 늪이었는데, 임춘은 서본리 굴모리에 물길의 굴을 뚫어 그 아래 서정자들(西亭子坪)에 물을 데어 주었는데, 그 수로를 "임춘천(林椿천)"이라고 하였다. 임춘은 고려 의종 때 진사가 되었으나 무신의 난 이후에는 예천의 지과실에 숨어살면서 그 집을 희문당(喜聞堂)이라 하였다. ᄋ 여러 번 벼슬에 부름을 받았으나 사양하였다. 후인이 옥천서원(玉川書院)을 지어 제향하였고, 불조묘(不跳廟)는 영주 운문리(榮州雲文里)에 있다. 임춘의 유고 <서하선생집(西河先生集)>이 있다. 이 문집에 대하여는 일화(逸話)가 있다. 문집을 발간한 이는 임춘의 친우(親友) 이인로(李仁老)였는데, 병란(兵亂) 중에 민멸(泯滅)될까 염려하여 운문사(雲門寺) 고승 담인(高僧淡印)이 청동항아리에 넣어 야계천(耶溪川)에 묻어두었는데, 그 후 500년 후인 1713년(숙종 39) 운문사 주지 인담(雲門寺住持印淡) 스님이 꿈에 도사(道士)가 나타나서 문집이 소장된 곳을 계시하기에 날이 밝아서 그 속을 파보니 항아리가 있고, 그 속에 문집과 담인(淡印)이 평시 사용한 물건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고 이렇게 하여 <서하선생문집(西河先生文集)>이 재간행되었다 한다. ᄋ 후손은 감천면, 보문면, 개포면, 용문면, 지보면, 예천읍 등 예천군내에 산재하고 있고, 문경군 등지에도 살고 있다. 안동 지방에 산거하는 예천 임씨(醴泉林氏)는 모두 임춘의 후예인데 북후면 도진동(北後面道津洞)에 정착한 임씨(林氏)는 양양군(襄陽君) 8세손 두현(斗賢) 의 후손이고, 신전동(薪田洞)에 정착한 임씨는 양양군(襄陽君)의 동생 부사직 자무(副司直自茂)의 현손 문근(文根, 1577-1667)의 후손이다. 5세손 윤덕(允德)이 충남 부여에 퇴거하여 그 후손들이 부여와 당진의 순성 등지에 살았고, 순창군으로도 봉해졌던 13세손 중연(中沇)의 자손들은 전북 순창과 전남 화순 일원에 자리 잡았다. 특히 중연의 아들인 선미(先味)가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살았으므로 일부 자손들이 그대로 두문에 거주했다고 믿어진다. 한편 14세손 자번(自蕃)의 자손인 양양군파는 15세손 문종(文宗)의 대에 일부가 예천으로부터 경북 안동으로 이거하고, 17세손 수량(壽良)의 후계(後繼)가 문경과 충주, 제천 등지에 산거했던 것 같다. 또한 18세 손 두영(斗榮)이 경북 의성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족보에 나타나 있고, 역시 18세손인 철시(哲時)가 예천에서 영주로 이거한 이래 자손들이 강원도 원주, 영월, 경북 봉화, 영주 등지로 옮겨가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양양군파는 이외에 울산, 군위, 청송, 선산 등지에도 세거하였던 것 같다. 그리고 자무(自茂)의 자손인 사직공파는 15세손 대부터 예천, 영주, 상주 등지를 세거의 터로 삼았다고 믿어진다. 이들 지역이 예천 임씨의 자손들이 여러 대를 거쳐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지켜온 곳이기 때문이다. 1930년에 이르러 예천 임씨는 경북 안동군 일원과 선산군 고아면, 문경군 산양면, 예천군 유천면, 영주군 이산면 등지에 집성촌을 이루었다. 1980년 대에는 예천군 일대, 문경군 일대, 의성군 다인면, 안동군 일원, 영주군 일원에 많은 자손들이 모여 살고 있다. 임춘은 정중부의 난을 피해 예천의 지과리(知過里, 現 普門面 玉泉里)로 옮겨 희문(喜聞)이라는 당(堂)을 짓고는 여러 번 부름을 받고 기피했다. 부여, 순창, 경주, 금성, 진주, 울진, 옥야 등 각 관향은 그의 자손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임춘 : 임춘 (고려 문인) [林椿]/ 출처: 브리태니커/ 고려 중기의 문인./ 고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고려 건국공신의 자손으로 할아버지 중간(仲幹)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충경(忠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 광비(光庇)와 큰아버지 종비(宗庇),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지내 구귀족사회에서 일정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큰아버지 종비 아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청년기부터 문명을 날리며 귀족자제다운 삶을 누렸다. 나이 20세를 전후한 1170년(의종 24)에 무인란이 일어나자 그의 삶은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다. 1차 대살육 때 일가가 화를 당하여 조상대대의 공음전(功蔭田)조차 일개 병사에게 빼앗겼다. 개경에서 5년 정도 숨어 지내면서 출사(出仕)의 기회를 엿보았으나 친지들로부터도 경원 당하자 살아남은 가속을 이끌고 영남 상주의 개령으로 옮겨가 7년여의 유락생활(流落生活)을 했다. 남아 있는 그의 글 중 많은 부분이 이 당시에 씌어진 것인데 대부분 실의와 고뇌에 찬 생활고를 하소연하는 것들이다. 당시 정권에 참여한 아는 인사들을 통해 여러 번 자천(自薦)을 시도하여 정권에 편입하려 했다. 1180, 1183년에 절친한 친구였던 이인로와 오세재가 연이어 과거에 합격했는데 이때쯤 개경으로 다시 올라와 과거준비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뒤 경기도 장단(長湍)으로 내려가 실의와 곤궁 속에서 방황하다가 요절했다. 이인로가 그의 문집 서문에 쓴 것에 의하면 "청춘삼십 백의영몰"(靑春三十白衣永沒)이라 하여 30세에 죽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그가 남긴 글 가운데 "나이 40에 양귀밑털이 다 희어졌다"는 말이 있어 1152년에 태어난 이인로와 동년배인 듯하다. 따라서 그는 30대 후반에 요절한 것으로 보인다. 이인로·오세재 등과 더불어 죽림고회(竹林高會)에 나가 술을 벗하며 문학을 논하여 고려 중기 문단을 대표하는 문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주기사상(主氣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기질이나 개성을 중시하는 문장론을 주장했다. 고사를 많이 사용하여 문장을 아름답게 수식하는 변려문을 많이 남겼으나 속으로는 한유(韓愈)가 주장했던 고문운동(古文運動)에 찬동하여, 〈답영사서 答靈師書〉에서 명유(名儒)라고 했던 사람은 모두 당·송대의 고문가(古文家)였다. 김부식 이래로 소동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던 당시 문풍(文風)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 문집으로 〈서하집〉이 있으며, 한국 가전문학(假傳文學)의 선구적 작품인 〈국순전 麴醇傳〉·〈공방전 孔方傳〉을 남겼다.(daum 2010)
임춘 : [고려] 林椿(임춘)| 大東詩選 (대동시선)/ 又玄 | 2010.08.10. 22:18/ //cafe.daum.net/hanmunbu/Qoo4/ 林椿 : 字耆之 西河人 再擧不第 武人之亂 闔門遭禍脫身僅免窮厄而死/ 임춘 : 자는 기지. 서하인이다. 두 번 급제하지 못했고, 무인의 난 때 대궐 문에서 몸을 빼어 달아나 겨우 화를 면했으나 결국 액을 당해 죽었다./ 聞鶯 : 田家?熟麥將稠 綠樹時聞黃栗留/ 似識洛陽花下客 殷勤百?未能休/ 꾀꼬리 소리 들으며 : 시골에 오디 익고 보리 장차 무성한데/ 푸른 나무에 자주 들리는 꾀꼬리 머무는 소리/ 낙양을 아는 척하는 꽃 아래 나그네/ 은근히 백 번 흐느끼며 쉬지를 않네.// 冬日途中 : 凌晨獨出洛州城 幾許長亭與短亭/ 跨馬行衝微雪白 擧鞭吟數亂峯靑/ 天邊日落歸心促 野外風寒醉面醒/ 寂寞孤村投宿處 人家門戶早常?/ 겨울 날 길 가면서 : 첫 새벽에 혼자 낙주의 성을 나왔네/ 장정 단정 몇 군데나 지나왔노/ 말께 올라 보슬눈 흰 데를 밟으며 가고/ 채찍 들고 푸른 봉우리들을 읊으며 세어보네/ 하늘 가에 해가 지니 돌아갈 맘 서둘러지고/ 벌판에 바람이 차니 취한 얼굴이 깨는구나/ 적막한 외로운 마을에 하룻밤 묵으려하니/ 집마다 모두 일찍이 문을 잠갔어라/ (한국고전번역원 譯)// 戱贈星州? : 紅粧待曉帖金鈿 爲被催呼上綺筵/ 不?長官嚴號令 ?嗔行客惡因緣/ 乘樓未作吹簫伴 奔月還爲竊藥仙/ 寄語靑雲賢學士 仁心不用示蒲鞭/ 성주의 백부장이 되어 : 새벽에 단장하고 금비녀 꽂고서/ 재촉해 불리워서 잔치 자리에 올랐네/ 원님의 엄하신 호령은 안 무섭고/ 부질없는 과객의 궂은 인연을 탓할 뿐/ 누에는 올랐어도 퉁소 부는 짝이 되어주지 않고/ 달로 달아나 약 도적한 선녀가 되는구나/ 청운의 학사님께 말 부치노니/ 어진 마음으로 부들포 채찍을 제발 쓰지 마옵소/ (한국고전번역원 譯)// 與李眉?會湛之家 : 久因流落去長安 空學南音戴楚冠/ 歲月屢驚羊胛熟 風騷重會鶴天寒/ 十年計活挑燈話 半世功名抱鏡看/ 自笑老來追後輩 文思宦意一時?/ 이미수와 더불어 즐기는 집에서 만나다 : 오래도록 유락하여 서울을 떠나서/ 초나라 관을 쓰고 남방 음곡 썼네/ 세월은 꿈깨고 나니 양의 어깨살 익는다./ 시와 술로 다시 모이니 추운 때로구나/ 10년 동안 살아온 일을 등 돋우고 이야기하세/ 반세상 허튼 공명을 거울 당겨 들여다보네./ 늙어 후배들 따라다니는 것 스스로 우스워라/ 글 생각 벼슬할 뜻이 둘 다 쇠한 주제에/ (한문고전번역원 譯)// 次友人韻 : 十載崎嶇面?埃 長遭造物小兒猜/ 問津路遠?難到 燒藥功遲鼎不開/ 科第未消羅隱恨 離騷空寄屈平哀/ 襄陽自是無知已 明主何曾棄不才/ 우인이란 시에 차운하다 : 얼굴에 먼지 가득 10년간 기구한 신세/ 조물 애녀석이 나를 늘 시기했네./ 나루 길은 멀어 떼로 이르기 어렵고/ 선단은 언제 익으리 솥을 상기 못 열었네./ 과거는 아직도 나은의 한을 지녔고/ 이소에 부질없이 굴원의 설움을 부쳤것다./ 양양이 제 워낙 지기가 없은 게지/ 명주가 언제 일찍이 재주 없다 버리셨는가./ (한국고전번역원 譯)// //cafe.daum.net/hanmunbu/ 한문방(漢文房)(daum 2010)
임춘 : 억구유(憶舊遊)-임춘(林椿)| 고향땅과 사람들/ 松河 李翰邦 | 2010.01.07. 16:25/ //cafe.daum.net/yechosa57/AQko/ 억구유(憶舊遊)-임춘(林椿) : 놀던 일 떠올리며-임춘(林椿)/ 春風折柳洛橋東(춘풍절류낙교동) : 봄바람에 낙교 동쪽에서 버들 꺾었는데/ 一別如何信未通(일별여하신미통) : 한 번 이별 한 뒤에 어찌 소식 한번 없는가/ 自是思君心更苦(자시사군심갱고) : 이제부터 그대 생각하면 더욱 괴로워/ 容華應滅去年紅(용화응멸거년홍) : 얼굴의 화려한 빛 지난해보다 줄었을 거야/ //cafe.daum.net/yechosa57/ 예천초등57회동창회(daum 2010)
임춘 : 방량시인(放浪詩人) 임춘(林椿) 밀양을 보고/ 고려 중엽의 西河 林椿(1148-1186)은 이곳 밀양의 빼어난 경치는 으뜸이라 했다/ 遊密州書事(유밀주서사) : 밀주(密州)에 놀면서 보고 듣고 한 일을 적는다/ 山郡多佳麗 名高冠一方(산군다가려 명고관일방)/ 地靈人自傑 野沃歲頻穰(지영인자걸 야옥세빈양)/ 路控舟車會 風存禮義鄕(로공주거회 풍존예의향)/ 多儒如蜀郡 絶景甲餘抗(다유여촉군 절경갑여항)/ 松菊荒彭澤 烟波動岳陽(송국황팽택 연파동악양)/ 山深禽格? 天與水蒼茫(산심금격책 천여수창망)/ 峀碧開新障 湖淸倚淡粧(수벽개신장 호청의담장)/ 際天排樹幄 拂雪조茶槍(제천배수악 불설조다창)/ 四序叢筠綠 千門細柳黃(사서총균록 천문세류황)/ 杯盤饒海陸 絃管妙宮商(배반요해륙 현관묘궁상)/ 遇勝添詩興 餘閒泥酒觴(우승첨시흥 여한니주상)/ 春行鳧渚暖 暮宴鳳樓凉(춘행부저난 모연봉루량)/ 夢覺西窓月 衣凝燕寢香(몽각서창월 의응연침향)/ 賞心幷樂事 乘興放淸狂(상심병낙사 승흥방청광)/ 久被山川住 飜磋道路長(구피산천주 번차도로장)/ 殘霞望勝閣 夜雨聽瀟湘(잔하망승각 야우청소상)/ 鞭促征鞍發 心隨去雁忙(편촉정안발 심수거안망)/ 嫌無王勃筆 霞鶩記南昌(혐무왕발필 하목기남창)/ 산 많은 고을에 아름다운 곳 많아/ 명성이 높기로 한 방면의 으뜸/ 땅이 영특하니 사람들 절로 걸출하고/ 들 비옥하니 해마다 자주 풍년드네/ 길은 배와 수레가 몰려드는 도회지요/ 풍속은 예의를 보존한 마을이다./ 선비 많기로 촉군(蜀郡)과 같고/ 뛰어난 경치는 여항(餘杭)보다 낫다./ 솔 국화는 팽택(彭澤)보다 거칠지만/ 안개와 파도는 악양(岳陽)이 움직이다./ 산 깊으니 새 울음 특이하고/ 하늘은 물과 함께 아득하구나./ 뫼 푸르니 새로운 장벽이 열리고/ 호수 맑으니 담박한 단장 의지할 만하다./ 하늘 끝에는 나무 장막 배열하고/ 눈을 헤치니 차의 새싹이 하늘거린다./ 사시사철 떨기 대나무 푸르고/ 일천 문에는 가는 버들이 누르구나/ 술 소반에는 바다와 육지 안주 풍성하고/ 관현악에는 궁조 성조의 음률이 오묘하구나./ 승지(勝地)를 만나 시흥(詩興)을 더하고/ 여가의 한가함에 술잔에 흠벅 취하다./ 봄이 오면 오리 노는 물가도 따뜻하고/ 저녁 제비는 봉황누대도 서늘하다/ 꿈은 글하는 서창(書窓) 꿈을 깨고/ 옷에는 잔치 자리의 향기가 짙다./ 마음 감상에 즐거운 일까지 겸하여/ 흥을 타고 청광(聽狂)을 마음껏 하였네./ 오래 산천에 머무르게 되니/ 오히려 갈 길 먼 것을 안타까이 여기다./ 쇠잔한 안개 속 등왕각(?王閣) 바라보고/ 밤비를 소상강(瀟湘江)의 빗소리로 듣다./ 채찍 재촉하여 안장 메어 떠나니/ 마음은 가는 기러기 따라 바쁘다./ 왕발(王勃)만한 필력이 없어/ 낙하(落霞)와 고목(孤鶩)으로 남창 기록 못함이 아쉽다./ (西河集, 卷二 張十六)(서하집, 권이 장십육)// 밀주(密州)에 놀면서 보고 듣고 한 일을 적는다“라는 이 詩는 첫머리에 이 ”산군(山郡)은 가려(佳麗)한 곳이 많아 명성(名聲)이 일방(一方)의 으뜸“이라고 말한 뒤에 지기(地氣)는 신령스러워 인재(人材)가 걸출(傑出)하고 전야(田野)는 비옥(肥沃)하여 해마다 풍년(豊年)인데 교통(交通)은 열러 주(舟), 거(車)가 집합(集合)하는 요충(要衝)이고 풍속(風俗)은 순후하여 예의(禮義)의 고장이라는 것, 선비가 많기로 촉군(蜀郡)과 같고 경치는 뛰어나 항주( 杭州)를 능가한다고까지 칭찬하였다. 그는 이어서 사계절(四時節) 취죽(翠竹)과 천문(千門)의 세류(細柳),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광(風光)을 배경으로 해육진미(海陸珍味)의 배반(盃盤)과 관상묘곡(宮商妙曲)의 관현(管絃)을 즐기는 것을 描寫(描寫)하고 있다. 당시 중앙 무신(中央 武臣)들의 피비린내 나는 정권(政權) 싸움을 생각하면 임춘(林椿)의 시(詩) 속에 나타나는 이 고장의 모습은 마치 태평성대(太平聖代)와 같은 느낌이다.
林椿은 [題嶺南寺(제영남사)] [嶺南寺竹褸(영남사죽루)] 등의 시(詩)도 있는데, [題嶺南寺]는 고시체(古詩體)로서/ 曾聞圓嶠臨蒼濤 樓閣玲瓏駕巨鼇(증문원교임창도 누각령롱가거오)/ 鼇傾海動群仙駭 茫茫失去一峯高(오경해동군선해 망망실거일봉고)/ 飛來?惚移於斯 磅?千古當古壕(비래황홀이어사 방박천고당고호)/ 突起連空如疊玉 百丈淸潭橫鴨綠(돌기연공여첩옥 백장청담횡압록)/ 水貶桃花出洞中 居人宛是奏餘俗(수폄도화출동중 거인완시주여속)/ 靑山影裏兩三家 垂柳陰中千萬屋(청산영리양삼가 수류음중천만옥)/ 日暮郊原牛馬歸 春深洲渚鳧覽浴(일모교원우마귀 춘심주저부람욕)/ 漁舟之子棹如飛 溪岸不知盤氣曲(어주지자도여비 계안부지반기곡)/ 洛城遷客來何時 樓上欲窮千里目(낙성천객래하시 루상욕궁천리목)/ 山耶雲耶遠一色 雁點長空行斷續(산야운야원일색 안점장공행단속)/ 不用重來登此樓 烟波好處使人愁(불용중래등차루 연파호처사인수)// 일찍이 푸른 바다 신선 사는 원교에/ 영롱한 누각이 큰 자라 타고 있었는데/ 자라 기울고 바다 흔들려 신선들이 놀라고/ 높은 봉우리 하나를 아득히 잃어버렸다지./ 그게 문득 이곳으로 옮겨 날아와서는/ 옛 성 해자 앞에 천고토록 웅크리고 있네./ 공중에 옥을 쌓듯 우뚝 솟아서/ 백 길 맑은 못에 짙푸른 물이 비끼고/ 복사꽃 띄운 물이 골짝에서 나오니/ 주민은 완연히 선진의 풍속/ 푸른 산 그림자 속에 두 세집이요/ 수양버들 그늘 속에 천이요 만 집/ 해 저문 들녘에 소와 말은 돌아오고/ 봄 깊은 물가에는 물오리 헤엄친다./ 어부가 젓는 배는 나는 듯한데/ 계곡을 몇 구비나 틀고 돌았나./ 서울을 떠난 손은 어느 때 떠나왔나/ 누각 위에서 천리 길 멀리 보려네./ 산인가 그름인가 멀어서 한 빛인데/ 먼 하늘 기러기 점 끊어졌다 이어지네./ 하늘가에 저무는 모습 참으로 창연하여/ 고향 집 생각 다급한 마음을 어찌하나/ 다시 와서 이 누각에 오르지 말자/ 풍경 좋은 곳이 시름을 자아내나니// 라는 글에는. 물 위에 뜬 도화(挑花)는 무릉도원(武陵挑源)을 연상케 하는데 수양버들 속에 천백(千百)의 가옥(家屋)이라든가 해 저문 교외(郊外)에 한가롭게 돌아오는 우마(牛馬)들은 그 번화(繁華)스럽고 평화스러움을 한결 더 잘 보여준다. 임춘은 이러한 자연풍광(自然風光)에 대해서뿐 아니라 이 고장의 인재 문물(文物)에 관해서도 탄이(坦夷)를 마지않았다. <嶺南樓題詠詩文-密陽文化院>// ...// 임춘(林椿 1148-1186) 고려 의종·명종 때 문인·학자.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예천임씨(醴泉林氏)의 시조.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였으나 과거에 여러 번 낙방하였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鄭仲夫)의 난으로 공음전(功蔭田) 등의 재산을 빼앗기고 피신한 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 등과 함께 강좌칠현(江左七賢)의 한 사람으로 지내면서 현실적 관심을 진하게 드러내는 가전체소설 《국순전(麴醇傳)》 《공방전(孔方傳)》 등을 남겼다. 특히 그의 문학은 강렬한 현실지향성을 자아인식을 통하여 표출한 데에 의의가 있다.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이인로가 엮은 유고집 《서하선생집》이 있다. 무신정변(武臣政變)(1170년)에 죽지 않고 개성(開成)을 탈출한 방량시인(放浪詩人) 임춘(林椿)은 이곳에 와서 오래 머물면서, 여러 시편(詩篇)을 통하여 이 고장의 자연 풍광(自然 風光)과 인재 문물(人材 文物) 등 당시의 정황(情況)을 잘 표현하였다./ 출처 : //kr.blog.yahoo.com///cafe.daum.net/miryang2020/ 밀양2020(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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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인 장병국과 안중식, 5일 전국 한시백일장에서 가작 수상...축하합니다.
장병국과 안중식(문향의 고장 포항서 최세윤 義兵將 高貴한 넋 기리다 : 포항문화원 漢詩白日場 現場取材) [記事] : 단풍이 생을 다하고 낙엽이 되는 만추(晩秋)를 맞아 전국 한시인들이 포항을 찾아 뛰어난 필력을 선보였다. 포항문화원은 2016년 11월 5일 오전 10시 문화원 강당에서 ‘제38회 포항문화원 전국 한시백일장’을 펼쳤다. 이날 백일장에는 전국에서 100여명의 한시인들이 모여 뜨거운 열기를 보였다. 그 뜨거웠던 한시백일장 현장을 찾아봤다.지난 5일 오전 10시 포항문화원 3층 강당은 전국에서 모인 한시인들로 붐볐다. 도포자락 휘날리며 멀리 서울에서 온 한시인부터 중후하게 걸친 중절모가 매력적인 한시인까지. 저마다 모습은 달랐지만, 한시에 대한 열정과 포항문화원 한시백일장에 대한 관심은 같았다. 올해 백일장의 시제는 ‘추모 최세윤 의병대장 서거 일백주년(追慕 崔世允 義兵大將 逝去 一百周年)’으로 압운은 현장에서 발표됐다. 배용일 포항문화원장은 “포항에는 한말 왜적의 침입에 맞서 겨레와 나라를 지키고자 살신성인한 선열들이 있었다. 충의의 사표로 청사에 빛나는 산남의진의 제3대 최세윤 의병대장과 이 고장 수백의 의병들”이라며 “최세윤 의병대장은 제3대 의병대장으로 추대돼 흐트러진 산남의진(山南義陳)의 대오를 정비해 영일, 영천, 경주, 영덕, 청송, 의성 일대의 지역을 중심으로 결사항전 중 체포돼 8년간 옥고를 치르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최세윤의 부인과 아들 역시 최세윤 대장의 뜻을 받드는 등 최세윤 대장 일가의 충·열·효의 구현은 포항정신의 등불이 됐다”고 강조했다. 배 원장은 “오늘 이 자리에 모인 많은 한시인들이 최세윤 의병대장 서거 100주년을 맞아 최 대장을 기리는 한시를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고, 현재 혼란스런 정국의 바른 길잡이를 최 대장의 삶을 통해 제시해 주길 바란다.”고 밝혔다. 시제와 압운이 발표되자 한시인들은 시를 짓기 위해 강당과, 강의실 등 곳곳으로 나눠졌다. 4시간 남짓의 시간동안 한시인들은 시제와 압운이 적힌 종이를 바라보며 사색에 잠기기도 하고 붓펜을 들고 고뇌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이내 시구가 떠올랐는지, 정성스런 필체로 시를 짓는 모습이었다. 문화원은 이날 백일장을 위해 전국에서 포항을 찾은 한시인들을 위해 보양식인 추어탕을 준비하는 등 섬세한 진행으로 포항이 문향의 고장임을 널리 알리고 참가자들에게 전통문화계승 발전에 이바지했다는 평을 받았다. 심사위원들의 열띤 심사 끝에 장원 1명과 차상 2명, 차하 3명, 참방 5명, 가작 22명이 선정됐다.‘제38회 포항문화원 전국 한시백일장’ 장원에는 대구의 이용옥 씨가 차지해 상금 70만원을 받았다... 이외에도 가작에 장병국(예천)·...·안중식(예천)... 씨가 선정되는 등 이날 백일장에서 총 33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이경관 記者 慶北道民日報 2016.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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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명면 김원혁, 5일 대한명인으로 등극...축하합니다.
김원혁(紅蔘 유황오리 飼育 專門家 김원혁 代表(52.虎鳴面 稷山里) '大韓명인'으로 登極...) [記事] : 홍삼.유황을 섞어 먹인 유황오리와 오리알 생산에 혼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예천 홍삼 유황오리 김원혁 대표(52.호명면 직산리)가 대한민국 대한명인으로 추대되어 2016년 11월 5일 광화문 광장에서 열린 명인 인증식에서 명인패와 인증서를 받아 국내 최고의 유황오리 전문가로 등극했다. 김 대표는 지난 1997년부터 홍삼 유황오리와 오리알 생산에 뛰어들어 유황의 강한 독성과 홍삼을 섞은 사료개발에 거듭되는 실패에도 좌절하지 않고 연구와 기술 개발에 매진, 단백질과 비타민 등 영양소가 일반보다 훨씬 많이 함유된 오리와 오리알을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사육 40여 일 만에 출하되는 일반오리와 달리 홍삼 유황오리는 2년 이상 사육이 필요하므로 생산단가는 높은 편이지만 주문이 밀려들고 특히 예천 홍삼 유황오리 진액은 암 환자들 사이에 인기를 끌며 전국으로 주문이 쇄도하고 있다. 김 대표는 "오리들에 홍삼 부산물을 비롯해 인삼, 청미, 깻묵, 옻나무, 쑥, 열무 등 각종 산야초와 생균제(방선균, 유산균, 효모균)를 배합한 특수사료를 공급한 결과 비타민 E를 비롯해 단백질, 지질, 칼슘, 인, 철 등이 보통 오리보다 2배 가까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국민이 신뢰하는 먹거리 제공과 예천 홍삼 유황오리는 항생제를 쓰지 않고 친환경적으로 사육하다 보니 어려움은 많지만, 명품 오리를 생산한다는 자부심으로 명인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고 더욱더 연구 개발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1천여 마리의 홍삼 유황오리와 생활하고 있는 김 대표는 연 매출 15억의 부농으로 유황오리 진액과 유황 오리사육 특허를 소유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출범한 대한명인은 국악, 공예, 인문, 음식 등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최고의 전문가에게 수여되는 상이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6-11-07 오전 9:2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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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