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제목자랑4601:장말손(2)
작성자장병창 @ 2016.11.28 06:20:02

  예천의 자랑(4601) : 장말손(2)

---

 

  장말손 : 보물 제502호 장말손 초상(張末孫 肖像)/ //simjeon.kr/xe/2009.06.11/ 소재지 경북 영주시/ 지정일 1969.02.19/ 수량/면적 1/ 시대 조선시대/ 소유자 장덕필 / 관리자 장덕필/ 자료출처 및 참조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시대의 문신인 장말손을 그린 초상화. (). 세로 171, 가로 107. 비단 바탕에 채색./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북기리 장덕필(張悳必) 소장. 장말손상의 화폭은 얼굴 부위가 들어 있는 가운데 폭이 대폭(大幅)이며, 양어깨 부위에서 두 개의 소폭과 연결된 3폭으로 되어 있다. 화상은 오사모(烏紗帽)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상용 형식이나 복색(服色)에 있어서는 초기 공신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흉배 또한 중기 이후의 사라(紗羅)에 수놓은 흉배가 아니라, ()나라 복식 제도를 따른 직금(織金) 흉배여서 고식(古式)을 예시한다. 하지만 도화 시기를 말하여 주는 흉배의 문양은 공작 문양으로서 문관 1품을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장말손이 연복군(延福君)으로 봉하여진 1482(성종 13)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초상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적개공신상(敵愾功臣像) 제작에 있었던가가 의심된다. 그러나 이 장말손과 동시대인이자 역시 적개공신이었던 손소(孫昭) 및 오자치(吳自治)의 초상화가 각기 종손가에 전존되어 오고 있다. 3영정은 화폭·상용 형식·표현 기법에서 모두 동일하다. 이것은 결국 이 세 초상화가 같은 시기, 같은 화사에 의하여 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오사모는 초기에서 중기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왼쪽 단령이 트여 사이로 비치는 붉은 내공과 녹색 첩리(帖裡 : 철릭) 그리고 공수한 틈새로 보이는 흰 속옷 소매, 의자의 형태, 가지런히 한 방향으로 놓인 백피혜(白皮鞋), 원근법에 구애되지 않은 족좌대(足座臺) 등이 모두 조선 초기 공신도상의 특색을 보여 준다. 또한 채전이나 돗자리가 깔려 있지 않아 배경에 대한 인식은 아직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초상화로 연결되는 하나의 특색으로서 7분면의 취세를 표현하고 있다. 화가는 이미 상()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인물의 취세를 개발하였다. 이 점은 중기 이후에는 거의 획일적으로 구사되는 면이다. 필법에 있어서는, 장말손상은 안면 처리에 있어서도 초기의 초상화법을 예시하고 있다. 안색은 황색 살빛으로 시채한 뒤 갈색선으로 윤곽을 잡았는데 선염기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입술은 살빛보다는 홍기 나는 색으로 칠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당시만 해도 중기 초상화에서 보이는 고심세(高深勢)의 시도는 전혀 없다. 물론 육리문에 대한 이해도 역시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골격 자체에 대한 것은 충분히 인식한 듯이 인물 윤곽의 완연함과 함께 눈매의 표정이 탁월하다. 그리고 눈초리에는 이미 갈색계의 홍기가 미세하게 삽입되어 있다. 장말손영정의 회화사적 의의는 몇 안 되는 초기 공신상 중 하나라는 점 이외에도 선 위주의 표현 수단을 가지고 대상 인물의 요체를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daum 2010)

 

  장말손 : 장말손(張末孫) 영정/ 작년, 200969/ 장말손(張末孫)은 자는 경윤(景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세조(世祖) 13(1467) 예조좌랑(禮曹佐朗)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강순(康純)을 따라서 난군의 토벌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이 되고.../ san114.tistory.com/ 입산하는 사람들(daum 2010)

 

  장말손 : 장말손가의 불천위 제사/ 지난달, 2010 821()/ 고려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장계(張桂)를 시조로, 조선 세조 때 공신녹훈을 받은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송설헌은 장말손의 호다. 우리나라 인동 장씨들은 일반적으로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blog.daum.net/ 초암 이야기(daum 2010)

 

  장말손 : 인동장씨(仁同張氏)/ 2달전, 2010728 ()/ 중시조는 장의손(張義孫)으로 장계의 7세손으로 판관(判官) 역임. ▲안양공파(安襄公派): 중시조는 장말손(張末孫)이며 장안량(張安良)의 삼남으로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짐.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 태그: 인동장씨(仁同張氏)/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daum 2010)

 

  장말손 : 慶州孫氏의 中興祖 ?林君 孫昭 3 - 孫昭와 그의 影幀/ 작년, 2009 1020/ 乙科 3, 丙科 7, 丁科 23人이 及第하였는데 丁科 23人 중에는 ?畢齋 金宗直도 있다.)에 成俊?張末孫 등과 함께 丙科로 及第한 7人 중에 들어있으며, “癸丑生으로 字는 日章인데 ?林君에 敍勳되었고, 諡號는 襄敏이다.../ blog.daum.net/ 눌인정사로의 초대(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간행물] 張末孫/ 권별(權鼈)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간행물] 장말손(張末孫)/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간행물] 甲申秋。吾友仲平。以書狀官。與伯寅在燕京。談箕都雲雨之思。用瀉鬱陶。仲平首爲詩伯寅。伯寅至七家嶺乃和。直以蒼松歲寒之節。擬其所思。遂來子休水之譏。甚可笑也。仲平於明年秋。以都事。赴咸吉道監司康相孝文幕。臨行。示余其詩。余次韻作 四首。二以贈仲平。一以立伯寅。末篇以寄景胤。景胤今在鏡城節度使許相琮幕府云。仲平。曹克治。伯寅。權慄。子休。蔡申保。景胤。張末孫。/ 김종직(金宗直)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 朝鮮時代 私奴婢 推刷와 그 實際-榮州 仁同張氏 所藏 古文書를 中心으로-/ 原文判讀과 正書 3. 文記에 나타난 推刷方法과 절차 Ⅳ. 肅宗年間 張末孫 功臣賜牌奴婢의 推刷事例 1. 證據文書의 제시 2. 關門의 내용과 추쇄과정 3. 訴訟을 통한 소유권 확인과 立案 Ⅴ. 맺음말/ 安承俊 | 韓國古文書學會(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간행물] 이조 참판에 추증된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선생의 행장(行狀)/ 조호익(曺好益)|태조(太祖)|원종훈(元從勳)|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장중우(張仲羽)|사우(士友)|주박(周博)|퇴계(退溪) 이황(李滉)|최황(崔滉)|서하(西河)|자하(子夏)|주자(朱子)|허자(許磁)|조희익.../ 김육(金堉)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장말손 : 【문화칼럼】옥적(玉笛)/ 5달전, 2010422 () | 동양일보 감싸서 수리한 옥피리가 충남중요민속자료 225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그 외 장말손(張末孫·1431~1486)이 세조 12(1466)에 함경도 회령에서 야인을 물리친 공을 세워 옥적을 하사...(daum 2010)

 

  장말손 : 꽃계에 핀 종가의 향기, 인동 장씨 연복군종택”/ 6달전, 2010317 () | 안동넷 | view 이 종택이 전체 인동 장씨 문중을 대표하는 종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이집은 연복군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는 종가이므로 인동장씨 연복군종택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daum 2010)

 

  장말손 : 초상화의 뜻이 몬가요~~~~~~!@?????????/ 5년전, 200551/ ...따라서 전기(13921550)·중기(15501700)·후기(17001910)3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의 화법은 장말손(張末孫) 등의 적개공신상(敵愾功臣像)이나 김시습상(金時習像)에서 보이듯 옅은 황토빛 살색을 주조(主調)로 안면을.../ 답변수: 1 | 조회수: 558(daum 2010)

 

  장말손 : 인동장씨의 조상들/ 4달전, 201052 ()/ ...는 장의손(張義孫)으로 장계의 7세손으로 판관(判官) 역임. ■ 안양공파(安襄公派): 분파조(分派祖)는 장말손(張末孫)이며 장안량(張安良)의 삼남으로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짐. 조선 세조 때 문과에.../ 답변수: 3 | 조회수: 4,346(daum 2010)

 

  장말손([不遷位 紀行 .25] 송설헌 장말손(1431~1486) : 邊方의 敵들을 掃蕩한 松雪軒에게 世祖가 下賜한 佩刀(寶物 第881). 文武 함께 갖춰 檄文과 對話로 敵 물리치다) [記事] : 글씨 : 土民 전진원/ '탁월한 학식과 충성심성종도 극찬/ 이시애 난 평정 후 예조참판 등 올라/ 낙향한 후 속세와 거리 둬 유유자적// 조선 전기 문신인 송설헌(松雪軒) 장말손(1431~86).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송설헌은 세조 때 강순의 휘하에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움으로써 공신의 녹훈을 받고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졌으며, 불천위에 오른 인물이다. 송설헌이 별세한 후 성종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에서 그에 대해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고 성실하며(性質純穀)/ 학식은 통달하였네(學識疏通)/ 충성스럽고 의로운 도리는(忠義之道)/ 실로 마음 깊이 새겨 잊지 않는 바였네(實所佩服)’라고 표현했다. ◆문무 겸비, 변방의 적 소탕에도 큰 역할 : 송설헌은 145323세 때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459(세조 5)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점필재 김종직도 함께 급제했다. 승문원 박사와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1465년에는 함길도 병마도사(兵馬都事)로 부임, 함길도 절제사(節制使) 강순의 막하에서 활약했다. 몇 달 후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돼 경성절도사(鏡城節度使) 허종의 막하에서 각지를 순찰하며 민정을 살폈다. 당시 과거 동기인 김종직이 시를 보냈다. '황금 갑옷 담비 갑옷 입은 나그네의 정이(金甲貂 遊子情)/ 쓸쓸히 낙엽 떨어지는 변방성에 울리네(蕭蕭落木響邊城)/ 시서를 벗삼아 온 글 잘하는 장군이니(詩書從事詩書將)/ 요망한 기운을 변방에서 싹 쓸어버릴 것을 기쁘게 보리라(喜見妖氣塞外淸).’ 송설헌은 이처럼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송설헌이 1466년 회령(會寧)에 이르러 변방을 지키고 있을 때, 여진족 아지발(阿只拔)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송설헌은 성벽을 튼튼히 하고 격문(檄文)과 대화로 적을 달래 물리쳤다. 그리고 해안으로 쳐들어온 해적도 소탕했다. 당시 남다른 교분을 나누던 허백당(虛白堂) 홍귀달이 각별히 '듣거니 그대 담소로 적을 물리쳐(聞君談笑能却賊)/ 자잘한 무리 얼씬도 못했다지(魚樵不敢近城池)라 읊은 시를 보내왔다. 변방의 적들을 소탕하고 이해 겨울 조정에 돌아오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패도(佩刀·보물 제881)와 옥피리(玉笛), 은잔(銀盃)을 하사했다. 은잔은 6·25 전쟁때 잃어버렸다 한다.

 

  ◆이시애 난 평정한 공로로 공신에 올라 : 1467 2월에 예조좌랑에 올랐고, 5월에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시 함경도로 떠났다. 송설헌은 강순 막하에서 전략 수립에 참여하면서 길주, 흥원, 북청 등지에서 이시애의 반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반군의 토벌이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이시애는 경성으로 퇴각했다. 그 후 이시애 등이 토벌군 진지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 동안 함길도(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시애 난은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해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가 길주에서 중앙집권적 정책에 대한 지역 사람들의 불만에 편승해 일으킨 반란이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저항했으나 세조가 왕족인 귀성군(龜城君) 이준을 병마도총사로 삼고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대장을 맡은 토벌군을 출동시켜 난을 평정케 했다.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2도로 분리되었다.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준, 허종, 강순, 어유소 등 40여명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慨功臣)으로 녹훈되었다. 이 난 평정 공로로 송설헌도 2등 공신에 올랐고, 적개공신상훈교서(敵慨功臣賞勳敎書: 보물 제604)와 함께 땅 100결과 은 50, 말 한 필, 노비 10명 등을 받았다. 그리고 내섬시 첨정(內贍寺 僉正)에 특진되었다. 2년 후인 1469년에는 공신회맹록(功臣會盟錄: 보물 제881)이 내려졌다. 그 후 공조참의, 예조참의, 예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의 벼슬에 올랐다. ◆관직 사임 후 화장(문경)으로 이거 : 47세가 된 해인 1477년에는 낙향해 살 곳으로 당시의 예천 화장(花庄),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를 찾아보고 점지해 두었다. 5년 뒤인 1482년 봄에 벼슬을 사임하고 화장으로 물러나 송설헌(松雪軒)을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보내게 된다. 이 해 가을 연복군에 봉()해졌다. 14866(음력)에 별세하니 왕(성종)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치르게 했다. 또한 나라의 지사(地師)로 하여금 산소 자리를 예천군 호명촌 뒷산에 정하고 장사를 지내게 했다. 가을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으로 증직(贈職)하고, 3대를 추증(追贈)했다. 그리고 시호 '안양(安襄: 화목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이 安이고, 일로 말미암아 공이 있는 것을 襄이라 한다)’을 내렸다. 1489년에는 나라(충훈부)에서 그려놓았던 송설헌 영정이 하사되고, 신주를 사당에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하는 '부조()’의 명이 내려졌다.

 

  ■'송설헌 불천위이야기 : “후손이 모나지 않게 살아가길…" 사당의 담장을 둥글게 쌓아, 송설헌 불천위 신주를 모시고 있는 연복군종택(영주시 장수면 화기리)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송설헌의 손자 장응신이 31세 나이에 아버지 장맹우(46세 별세)에 이어 요절하면서 죽기 전 어지러운 정국에 휘말리지 않고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조용히 은둔하며 살고, 남 앞에 나서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고, 후손이 그런 곳을 찾아내 자리잡은 곳이다. 지금은 물론 주변에 안내표지까지 있다. 현재 송설헌 16세 종손 장덕필씨 부부가 살고 있다. 종손은 선조의 유훈에 따라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덕분에 집안의 소중한 유물들을 잘 보존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연복군종택의 불천위사당은 다른 종가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보통 종택의 우측(동편) 뒤쪽에 사당을 두는 데 비해, 연복군종택 사당은 종택(동향) 좌측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불천위 사당의 담장을 둥글게 쌓은 점이다. 통상 담장은 사각으로 각지게 만들어져 있다. 연복군종택 사당 담장을 둥글게 한 것은 후손들이 모나지 않게 살아가라는 선조의 가르침을 표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400여년 된 사당은 초가였다가 기와집으로 바뀌었고, 불천위 내외 신주만 봉안하고 있다. 4대조 신주는 종택의 다른 방에 모셔왔다고 한다. 종손은 4대조 신주를 함께 모시면 그 조상들 기제사 때마다 들락날락해야 하는 만큼, 불천위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 처음부터 사당에는 불천위 신주만 봉안했다고 들려줬다. 4대조 신주도 현 종손의 부친이 후손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고자 근래 조매(땅 속에 묻음)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씨가 20여년 전 부친 신주(사후 3년 뒤에 마련)를 만들기 위해 밤나무를 잘라 준비해뒀는데 신주용으로는 쓸 일이 없어져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것을 보관하고 있으며, 최근 모 서원에서 위패를 만들기 위해 밤나무를 원했으나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당은 설·추석과 기제사, 그리고 종부가 들어올 때만 연다. 불천위 제사는 합설로 양위 기일(고위 67, 비위 57)에 지낸다. 종택 사랑채인 화계정사(花溪精舍)에서 지내며, 제관은 20~30. 편은 두 틀을 올린다. 제주는 가양주를 담가 사용하다 지금은 종부 건강도 안좋고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제수는 '조동율서 이시재중(棗東栗西 梨枾在中)’, 즉 대추는 동쪽 끝에 놓고 밤을 서쪽 끝에 놓으며, 배와 감은 중앙에 놓는다. 종손의 조상에 대한 정성과 예의는 각별했다. 사당과 유물각을 둘러볼 때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등 의관을 정제한 뒤 안내했고, 유물각에 들어서서는 자리를 펴고 연복군 영정 앞에서 재배를 한 뒤 안내했다. 김봉규 기자 ■장말손 약력 : △1453년 사마양시 합격 △1459년 문과 급제 △1463년 사헌부감찰, 사간원정언 △1476년 공조참의, 예조참의 △1482년 가선대부 연복군 △1486년 별세, 시호 '안양(安襄)’ 1862년 예천 송계서원에 위패봉안 제향

 

  ■송설헌의 '패도에 얽힌 일화 : 6·25때 인민군이 탐내 땅속에 묻어뒀다. 27년 후 당시 종손의 꿈에 송설헌이 현몽 묻혀진 위치 알려줘 기적적으로 되찾아. 여진족 아지발 무리를 물리친 공으로 임금에게 받은 패도가 지금까지 보존돼 올 수 있었던 것과 관련, 후손의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일화가 있다. 6·25 전쟁 당시 연복군종택은 여러 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다. 한 인민군이 종가의 유물 중 패도를 탐내 가져가려고 땅 속에 묻어 감춰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후퇴하는 바람에 미처 그 패도를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없어진 패도가 어떻게 됐는지,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종손(현 종손 부친)은 집안의 귀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종가에서 처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패도는 27년 후에 찾게 된다. 당시 종손은 추원사(追遠祠) 건립 문제로 고민이 많았는데, 꿈에 연복군이 현몽해서 패도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패도를 찾을 수 있었고, 종손에게 쏠렸던 의심도 사라지게 되었다. 기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종손의 간절한 마음에 하늘이, 조상이 감동한 것일까. 패도를 다시 찾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탓에 칼집의 일부가 부식됐고, 당초의 원형이 다소 훼손돼 후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같은 사연이 있는 패도는 198610월 보물 제881호로 지정됐다. 손잡이가 금으로 장식돼 있고, 칼집이 상아와 은사(銀絲) 등으로 된 이 패도는 길이 13.8. (嶺南日報 2011-06-01)

 

  장말손(張末孫) : 분류 인물 > 영남유학인물자료/ 생성일 1431(세종 13)-1486(성종 17)/ 초록 : 본관 :인동, 옥산(仁同, 玉山), 출신지 :인동 예천(醴泉), 분묘지 :예천 호명산(虎鳴山), 주요 관직 :함길도 병마도사(咸吉道兵馬都事),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 해주 목사(海州牧使);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조 참의(吏曹參議), 예조 참의(禮曹參議), 시강원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장말손 : 송설헌기(松雪軒記) / 구분 영남 유교문화 유물/ 분류 유물-유적 > 영남 유교문화 유물/ 초록 : 송설헌(松雪軒)에 걸려 있는 권세윤(權世淵)1911년에 지은 송설헌기(松雪軒記)이다. 송설헌의 유래와 송설헌 주인의 인품을 칭찬하고 있다. 푸르고 푸르면서 우뚝한 것이 소나무이고, 희면서도 차가운 것이 눈[]이다. 솔에 눈이 지나가면 곧고 굳은 절조가 드러나고, 눈이 솔과 만나면 그 흰 자태가 더욱 드러난다. 그 고결함은 주인의 풍격과 마음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송설헌은 인동장씨 장말손이 예천 땅 화장(花庄)에 터전을 마련하고 거처를 지으면서 붙인 당호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인동(仁洞)에서 경기도 창동(倉洞)에 옮겨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장말손 : 송설헌중건운(松雪軒重建韻) / 구분 영남 유교문화 유물/ 분류 유물-유적 > 영남 유교문화 유물/ 초록 : 송설헌(松雪軒)에 걸려 있는 송설헌중건운(松雪軒重建韻)으로, 송설헌을 중건하고 나서 1899년에 후손 장복안(張復顔이만규·유응목(柳膺睦), 후손 장경문(張敬文)이 지은 7언율시 4수가 실려 있다. 송설헌은 인동장씨 장말손이 예천 땅 화장(花庄)에 터전을 마련하고 거처를 지으면서 붙인 당호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인동(仁洞)에서 경기도 창동(倉洞)에 옮겨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장말손 : 송설헌(松雪軒) / 영남유교문화유물/ 구분 영남 유교문화 유물/ 분류 유물-유적 > 영남 유교문화 유물/ 초록 : 송설헌(松雪軒)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송설헌은 인동장씨 장말손이 예천 땅 화장(花庄)에 터전을 마련하고 거처를 지으면서 붙인 당호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인동(仁洞)에서 경기도 창동(倉洞)에 옮겨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장말손(張末孫) : 1431(세종 13)-1486(성종 17), 호명면 원곡리 안찔 인동 장씨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 입향조(入鄕祖), 자는 경윤(景胤), 호는 송설헌(松雪軒),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옥산군 안양(玉山君安良)3, 1453(단종 1)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 1459(세조 5) 식년 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 6위로 급제, 1463(세조 9)에 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를 거쳐 한성부 참군(漢城府參軍),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 1465(세조 11)에 함길도 병마도사(咸吉道兵馬都事), 예조 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禮曹參判兼五衛都摠府副摠官), 세자시강원 우부빈객(世子侍講院右副賓客) 등을 지내고, 1467(세조 13) 5월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강순(康純)을 따라서 토벌에 공을 세워 정충출기 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功臣) 2등이 되고, 내섬시 첨정(內贍寺僉正)에 승진했다. 1469(예종 1) 공신록(功臣錄) 1()을 하사(下賜)받았고, 1470(선동 1)에 장악원 부정(掌樂院副正)을 거쳐 1471(성종 2)에 장악원 정(), 오위 부사직(五衛副司直), 1473(성종 4)에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 1476(성종 7)에 사직(司直)에 오르고, 1479년 해주 목사(海州牧使)를 지내고, 1482(성종 13)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졌다. 만년(晩年)에는 예천군 화장(花庄, 現 聞慶市)에 송설헌 학사(松雪軒學舍)를 세우고 여생을 보냈는데 17세기에 그의 주손(冑孫)이 영주시 장수면화기리(榮州市長壽面花岐里) 18번지에 이주하면서 이건(移建)하였고, '화계정사(花溪精舍)'라고 개칭하였다. 이 건물은 정면 3, 측면 2(7.57mx4.45m) 팔작(八作) 지붕이다. 묘는 호명면 원곡리 호명산 병좌(虎鳴山丙坐)에 있다. 화기리(花岐里) 꽃개에 있는 <장말손영정(張末孫影幀, 1489年 下賜, 寶物 502), <장말손홍패(張末孫紅牌, 1459)>, <장말손백패(張末孫百牌, 1453, 寶物 501>가 있다. 직제학공파(直提學公派)가 족보를 편찬한 것은 계해보(癸亥譜, 1683), 신묘보(辛卯譜, 1771), 계해보(癸亥譜, 1803), 갑술보(甲戌譜, 1874), 경신보(庚申譜, 1930), 을미보(乙未譜, 1955), 병진보(丙辰譜, 1977)이다. 병진보에 의하면 동정공파(同正公派), 주부공파(主簿公派), 안양공파(安襄公派), 판관공파(判官公派) 4파로 나뉘어 있는데, 말손은 안양공파에 속한다.(成宗實錄, 新增東國輿地勝覽 1530, 海東雜錄 4, 襄陽誌 1661, 醴泉郡邑誌 1770 1786, 醴泉郡誌 1939, 嶠南誌 1937, 文化遺蹟總攬)

 

  장말손(張末孫) : 1431~1486, 본관은 인동(仁同)이요, 字는 경윤(景胤)이며, 옥산군(玉山君) 안량(安良)의 아들이다. 1453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1459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였고,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정충포의 적개공신(精忠布 義 敵愾功臣)의 훈호(勳號)를 받고 가선대부 예조참판(嘉善大夫 禮曹參判)으로 연 복군(延福君)으로 봉군(封君)되었고 시호(諡號)는 안양공(安襄公)이며 호명리 원곡에서 살았다.(虎鳴面홈페이지 2013)

 

  장말손 : 보물 제502-장말손 초상(張末孫 肖像) -조선/ 작년, 2009 64/ 종목 보물 제502/ 명칭 장말손 초상(張末孫 肖像)/ 수량/면적 1/ 지정일 1969.02.19/ 시대 조선시대 /장말손은 조선시대(朝鮮時代)의 문신(文臣)으로서 자는 경윤(景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그는 세조(世祖) 13(1467) .../ cafe.daum.net/tang-hwa/ 조계사 불화반(daum 2010)

 

  장말손 : 문무(文武)를 겸비한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 작년, 2009 810/ 문무(文武)를 겸비한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 충의(忠義)와 도()를 실천하다.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의 자는 경윤(景胤)이고 아버지는 현감(縣監) 안량(安良)이며 어머니는 단양지씨(丹陽池氏).../ cafe.daum.net/mundann/ 구선재(daum 2010)

 

  장말손 : 종목 보물 제502/ 명칭 장말손 초상(張末孫 肖像)/ 분 류 유물 / 일반회화/ 인물화/ 초상화/ 수량/면적 1/ 지정일 1969.02.19/ 소재지 경북 영주시/ 시대 조선시대/ 소유자 장덕필/ 관리자 장덕필/ 일반설명 | 전문설명 : 조선시대 문신인 장말손을 그린 초상화로, 크기는 가로 107, 세로 171㎝이다. 장말손(14311486)은 세조∼성종 때의 문신으로, 이시애의 난(1467)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적개공신이 되었는데 이 그림은 그 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그림은 3폭으로 연결되었는데, 얼굴부위가 들어있는 가운데 폭과 양어깨를 표현한 2개의 폭이 이어져 있다. 의자에 앉은 전신상으로, 얼굴을 살색으로 칠한 후 갈색으로 윤곽을 잡았으나 선의 짙음과 흐림이 없는 옛 기법을 사용하였다. 입술은 붉은 기가 돌고 눈매의 표정이 살아있으며,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을 준다. 목 위로 바짝 올라간 관복, 팔뚝 아래에 있는 의자의 손잡이, 가지런한 두 발, 각진 옷의 윤곽선, 금실로 공작을 수놓은 흉배에서는 조선 전기의 화풍을 엿볼 수 있다. 또한 머리에 쓴 사모의 꼬리가 잠자리 날개 모양에 수평으로 퍼져 있고, 오른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세, 몸의 풍채가 과장되지 않고 옷자락이 벌려져 있는 점은 조선 중기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이 초상화는 흉배의 공작모양에서 장말손이 연복군으로 봉해진 성종 13(1482)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조선 전기의 초상화가 몇 점 전하지 않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초상화 연구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공신도라 할 수 있다./ cafe.daum.net/ashaabc/ 함안초등학교 제56회 동기생들의방(daum 2010)

 

  장말손 : 보물881(장말손 유품 )| …─ 보물/ 미탁 | 2010.08.26. 09:48/ //cafe.daum.net/inje66/NWfK/ 적개공신 회맹록/ 패도/ 장말손 유품 보물881/ 소재지; 경북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18/ 이 유품은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14311486)의 패도(佩刀)와 적개공신회맹록(敵愾功臣會盟錄)이다. 패도(佩刀)는 조선 세조(世祖) 12(1466)에 함경도(咸鏡道) 회령(會寧)에서 야인(野人)을 물리친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옥적(玉笛) 1(), 은배(銀盃) 1()을 함께 하사(下賜)받았다. 칼자루는 용()의 머리를 조각하고 모발문(毛髮文)과 비늘 등을 묘사하여 금()으로 도금(鍍金)하였다. 칼집은 죽피(竹皮)이며 상아(象牙)로 장식하여 은사(銀絲)로써 5등분으로 엮었다. 칼의 총길이는 13.8cm, 너비는 1.4cm이다. 적개공신회맹록(敵愾功臣會盟錄)은 세조 13(1467)에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이 되어 예종(睿宗) 원년(1469) 3월에 내린 회맹록(會盟錄)이다. 이 회맹록은 비단 4()을 이어 5단으로 하였고, 위로 첫단은 왕의 교서(敎書), 아래 4단에는 110, 2 23, 312명 공신들의 군호(君號), 관작(官爵), 성명(姓名) 이 적혀 있다. 특히 3등 이하의 공로자(功勞者) 명단(名單)과 훈호(勳號)를 볼 수 있어 이시애 난에 참전한 인물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적개공신 회맹록 보물881-1/ 소재지; 경북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18/ 적개공신(敵愾功臣)이란 세조 13(1467)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인물들을 가리킨다. 이것은 예종 원년(1449)에 작성된 것으로 비단 4폭을 이어서 5단으로 하였다. 위의 첫단은 왕의 교서이고, 아래 4단에는 110, 223, 3 12명 공신들의 군호, 관작, 성명이 적혀 있다. 여기서 장말손(張末孫)2등 공신에 봉해졌다. 또한 3등 이하의 공로자의 명단도 적혀있는데, 이는『조선왕조실록』에는 나와 있지 않다. 이 점은 이 문서가 이시애의 난에 참가한 인물들을 파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를 제공한 것으로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패도 보물881-2/ 소재지; 경북 영주시 장수면 화기리 18/ 패도(佩刀)는 세조 12(1466)에 함경도 회령에서 오랑캐를 물리친 공으로 왕으로부터 옥적(옥피리) 1()과 은배(은잔) 1쌍과 함께 하사받은 것이다. 칼자루에는 용머리를 새기고 용의 머리카락과 비늘 등을 표현하여 금을 입혔으며, 칼자루는 대나무 껍질이고, 코끼리의 상아로 장식하여 은실로 5등분해서 엮었다. 총길이는 13.8, 너비는 1.4㎝이다. 오랜 기간동안 지하에 묻혀 있어서 패도(佩刀)의 일부가 부식되어 당초의 모습을 약간 잊은 것이 아쉽다.(daum 2010)

 

  장말손 :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 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 1431~1486 본관 인동장씨(本貫 仁同張氏)는 우리 숙천공파(肅川公派)의 파조(派祖)이신 9세조 휘 임정(諱 林楨)할아버님의 장자이신 10세조 상호군공(上護軍公) 휘 인량(諱 寅亮) 할아버님의 장인(丈人)되신다. 우리 숙천공후 영남파를 이룩하게 된 것은 단지 연복군께서 1482(성종13) 52세의 나이로 예조참의 겸 오위도총부도총관의 벼슬을 사임하시고 영남땅 예천(醴泉) 화장(花庄)으로 낙향(落鄕) 하실 때 장인을 따라 같이 낙향함으로서 시작 되었다 할 것이다 . 그 후 500여 년간(금년으로527) 화장과 예천 일원에 散在하여 후손(後孫)이 세거(世居) 중이며 현재는 3천여 호에(이북황해도 신계제외) 종원이 8천여 명을 헤아리고 있다. 영남의 숙천공파 후손은 모두가 연복군의 외손(外孫)이 된다. 연복군은 1431(세종13) 태어나시고 명()은 말손(末孫), ()는 경윤(景胤), 이고 호()는 송설헌(松雪軒), 시호(諡號)는 안양(安襄)이시다. 1453(단종1)에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셨는데, 이때 점필재(?畢齋) 김종직(金宗直) 선생과 동방(同榜)하였다고 한다. 1459(세조5)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셨는데 이때에도 점필재(?畢齋) 선생과 함께하셨다고 한다. 이러한 인연으로 점필재(?畢齋),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澾)과 서신을 왕래하며 교분이 두터웠다고 하였다. 그 후 연백군은 승문원박사(承文院博士)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함길도 병마도사(兵馬都使)로 부임하였고 함길도 절제사 강순(康純)의 막하에서 활약 하셨으며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되어 경성절도사 허종(許倧)의 막하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어루만져 인심(人心)을 얻었다. 1467(세조13)에 예조좌랑 겸(禮曹佐郞兼) 예문관응교(禮文館應敎)에 오르셨는데 그 해 5월 함경도 길주(吉州)에서 이시애(李施愛)가 난()(세조13)을 일으키자 연복군은 강순(康純)의 막하에서 반란(反亂)을 평정하는데 공훈(功勳)을 세웠고 그 공으로 적개공신이등(敵愾功臣二等)에 책봉(冊封)되었다. 그 후 1476(성종7) 왕의 명()으로 충훈부(忠勳府)에서 적개공신(敵愾功臣)으로서의 영정(影幀)이 그려졌다고 한다. 1482(성종13) 52세의 나이로 예조참의(禮曹參議) ()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莩摠官)의 벼슬을 사임(辭任)하고 예천(醴泉) 화장(花庄)으로 물러나와 송설헌(松雪軒)을 지으시고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 삼아 유유자적(悠悠自適) 하든 그 해에 연복군에 봉해지고 영정각(影幀閣) 기공비(紀功碑)가 세워졌으며 적개공신록권(敵愾功臣錄券)을 하사(下賜)받았다. 1483년에 가선대부(嘉善大夫) 연복군이란 군호를 받으셨으며 1486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하직하자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춘추관, 성균관사, 세자 시강원찬선에 증직되었고 안양(安養), 성행화순왈안인사유공왈양(性行和順曰安因事有功曰襄)이란 시호(諡號)를 받으셨다. 그 후 1489년 충훈부에서 그려 놓았던 영정을 내리시고 불천지위를 명하셨고, 1847년 원 영정과 같게 이모 한 부본을 그려 받아 현재 함께 봉안하고 있다. 화기(花岐)리에 있는 종택(宗宅)은 연복군의 손자이신 생원공 장응신이 30세에 요절(夭折)하면서 장자(長子) 인통훈대부 부사직 장윤희에게 벼슬도 하지 말고 부자도 되지 말고 남의 앞에 나서지도 말며 조상과 후손을 보존할 수 있는 터를 찾아 은둔하며 살라고 유언을 남겨 연복군의 현손(玄孫)이신 총좌위대호군 장언상이 선조 때에 이곳 화계(花溪)(영주시, 장수면, 화기리[꽃계])로 이주하여 400년 이상을 지켜오고 있다고 한다. 1971년에 국비로 영정각을 세웠고 1988년에 국비로 유물각을 준공하였으며 2005년에 유물각을 재차 개축하였으며, 유물각에는 연복군의 6대손인 장계의 고려홍패, 연복군의 홍패, 백패, 3점이 보물501, 연복군 영정이 보물502, 상훈교서가 보물 604, 공신회맹록과 패도 2점은 보물881, 인동장씨 고문서 11점과 녹패 1점과 장언상 교지 6점이 보물1005호로 지정되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종택 내에는 사당과 영정각, 유물각, 송설헌이 있으며 유물각내에는 많은 고문서(古文書)와 교지(敎旨)등이 소장(所藏)되어 있다.

 

  사당은 학사 김응조의 추원제기의 기록에 의하면 선조 계사년에 7대손 장주남이 건립하여 현재까지 523년간 보존되어 왔으며 불천위 제사를 받들고 있다고 한다. 음력 3월과 9월의 초정일에 추원사에서 향사를 올렸는데 시절이 바쁜 관계로 요즈음은 첫째 주 일요일에 올린다고 한다. 이때는 생식을 위주로 하며 전국의 후손 60~70여명이 참여하며(명절에는 100여명 정도) 10월 첫째 주 일요일에는 예천 범우리에서 묘사를 지내며 기제사를 올리고 있다고 한다. 한 종택에 이렇게 많은 유물(遺物)을 소장하고 있는 연복군(延福君)의 종택인 이곳이야말로 우리 지역의 또 다른 자랑거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아끼고 널리 알려야 할 일임이 분명할 것이다.(숙천공후, 박원우(동일), 조사정리)(daum 2010)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페이지만족도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성에 만족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