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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602:장말손(3)-장맹우-장면식(1)(祝군청/예천방문1,437)
작성자장병창 @ 2016.11.29 06:56:24

  예천의 자랑(4602) : 장말손(3)-장맹우-장면식(1)(예천군, 25일 경북 단축마라톤대회 군부 3...축하합니다/예천방문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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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말손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張末孫(4)/ 2006-01-29 01:19:4/1 조회 (447) | 世祖實錄 十三年(1467)>十三年 五月/ ○壬辰/都摠使浚軍官金伯謙, 執吉州知印李英發、內需司奴玉山等來。 英發等齎李施愛啓書, 其書曰:/ 軍官玄得利供招云: “康孝文與本道將士謀逆, 遺書于都體察使韓明澮及申叔舟、金國光、韓繼禧、盧思愼相約云: ‘孝文稱有邊警, 領兵向平安道, 明澮啓孝文謀反, 盡率京中兵, 會于中路, 稱兵向京。我於去三月, 持此書如京, 密付諸處。 且道前件事意, 皆云: ‘汝所言合兵之計甚當。唯明澮則答書云: ‘詳在玄判官, 不煩我。 將此書密付孝文, 幷報所答。言孝文曰: ‘大事可成也。 將以到泊厚羅土島, 舟師從大軍之後, 躪殺道內婦女孩兒無遺矣。其始謀, 吾不細知, 吾於年前十一月十一日上京時, 孝文與我潛說此謀。 評事張末孫亦與謀, 吳凝及都事曺克治, 與孝文數相會議, 交結明白。臣據此, 竊意明澮等與孝文等, 中外相應, 回泊下三道兵船。 請兵于兀狄哈, 待發兵向京之後, 乘其空虛, 盡殺道內遺存婦女小童, 遂傾社稷。 幸而孝文及黨與, 未遂其謀, 自底滅亡, 兵船時亦不知去向。 臣於應變諸事, 盡心措置。 聞平安道及江原道, 與本道連境之地, 屯兵作陣, 聲息頗喧, 但未知某軍耳。 必是賊黨, 聞孝文之死, 自知其罪, 發憤興兵。 且下三道水陸諸將, 業已抄送舟師, 難掩其過, 恐亦發兵向京。 緣此沛鄕軍民, 日夜憂懼, 道途阻遠, 恐不及?衛。 故臣會議軍民, 領一千餘兵, 出咸興府待命。/ 上御思政殿, 召英發等, 問施愛反狀。 英發不以實對, 但曰: “本道人民皆云: ‘微施愛, 吾其魚肉矣。’” 上怒命杖之。 猶不直言, 姦詐百端, 搜其衣裝, 則有施愛稱節度使發馬文, 蓋爲施愛反間?朝廷者也。 上欲立斬之, 以其或有更鞫事, 姑囚義禁府獄。 玉山乃上之潛邸時奴也。 命永順君^溥、都承旨尹弼商、巴山君^趙得琳問之, 玉山對曰: “奴非親受此書於施愛而來, 奴前日來京, 還往吉州本家, 路遇萬自, 萬自授此書云: ‘汝潛邸時隨從人, 可易達此書, 終受賞賚。故持來。其言直實, 命饋酒食, 付內需司。 伯謙啓曰: “龜城君屯兵不發, 以待大軍。上嘉之曰: “龜城先遣兵, 據鐵嶺以守, 一可也; 觀勢持重不急進, 二可也; 招諭本宮奴, 使知施愛反逆, 三可也。伯謙又啓曰: “魚有沼所領軍士, ?, 軍裝器械, 殆不可用。 上曰: “雖百萬之衆, 器械不利, 將焉用之?”/ 도총사(都摠使) 이준(李浚)의 군관(軍官) 김백겸(金伯謙)이 길주(吉州)의 지인(知印) 이영발(李英發)과 내수사(內需司)의 종 옥산(玉山) 등을 잡아 왔다. 이영발 등이 이시애(李施愛)의 계서(啓書)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글에 이르기를, “군관(軍官) 현득리(玄得利)의 공초(供招)에 이르기를, ‘강효문(康孝文)이 본도의 장사(將士)와 반역을 꾀하고, 글을 도체찰사(都體察使) 한명회(韓明澮)와 신숙주(申叔舟김국광(金國光한계희(韓繼禧노사신(盧思愼)에게 주어 서로 약속하기를, 「강효문이 변경(邊警)이 있다고 칭하여 병사를 거느리고 평안도(平安道)로 향하면, 한명회(韓明澮)는 강효문이 반역을 꾀하였다고 아뢰어 경중(京中)의 군사를 모두 거느리고 중로(中路)에서 모여, 군사를 들어 서울로 향하자.」고 하여, 내가 지난 3월달에 이 글을 가지고 서울에 가서 몰래 여러 곳에 부치고, 또 전건(前件)의 사의(事意)를 말하였더니, 모두 이르기를, 「네가 말한 바 합병(合兵)의 계교는 매우 마땅하다.」고 하였는데, 오직 한명회는 답서하기를, 「상세한 것은 현 판관(玄判官)에게 있으니, 나를 번거롭게 하지 말고, 이 글을 가지고 가서 몰래 강효문에게 부치고, 아울러 대답한 바를 보고하라.」 하고는, 강효문에게 말하기를, 「대사(大事)가 성취될 만하니, 장차 후라토도(厚羅土島)에 정박한 주사(舟師)를 가지고 대군(大軍)의 뒤를 따라 도내의 부녀자와 아이들을 짓밟아 죽여서 남김이 없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처음의 모의는 내가 자세히 알지는 못하나, 내가 연전(年前) 1111일에 상경(上京)할 때에 강효문이 나와 더불어 은밀히 이 모의를 말하였고, 평사(評事) 장말손(張末孫)도 또한 이 모의에 참여하였으며, 오응(吳凝)과 도사(都事) 조극치(曹克治)도 강효문과 더불어 자주 만나 서로 회의(會議)하였으니, 교결(交結)한 것이 명백합니다.’ 하였습니다.

 

  신이 이것을 근거하여 가만히 생각하니, 한명회 등이 강효문 등과 더불어 안팎으로 상응(相應)하여, 하삼도(下三道)의 수륙 제장(水陸諸將)의 병선(兵船)을 회박(回泊)시키고, 올적합(兀狄哈)에게 군사를 청하여, 〈강효문〉 군사를 발하여 서울로 향한 뒤를 기다렸다가 그 공허(空虛)한 틈을 타서 도내에 남아 있는 부녀자와 어린 아이들을 모두 죽이고, 마침내 사직(社稷)을 무너뜨리려고 한 것입니다. 다행히 강효문과 그 도당이 모사를 이루지 못하고 밑바닥까지 멸망하였으며, 병선(兵船)도 이제 또한 간 곳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신이 응변(應變)에 대한 제사(諸事)를 마음을 다해 조치하였습니다마는, 평안도와 강원도는 본도와 경계를 연한 땅인데, 둔병(屯兵)이 진()을 만들어, 성식(聲息)이 자못 시끄럽다고 하는데, 다만 어떤 군사인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이는 필시 반적의 무리들이 강효문의 죽음을 듣고, 스스로 그 죄를 알고 발분(發憤)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이고, 또 하삼도(下三道)의 수륙 제장(陸諸將)이 이미 주사(舟師)를 뽑아 보내어 그 허물을 가리기 어려워서, 군사를 발하여 서울로 향하는 것인가 두렵습니다. 이로 인하여 패향(沛鄕)의 군민(軍民)들이 밤낮으로 근심하고 두려워하는데, 길이 막히고 멀어서 방위[?]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신이 군민을 모아 의논하고, 1천여 군사를 거느리고 함흥부(咸興府)에 나와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사정전(思政殿)에 나아가 이영발 등을 불러 이시애의 반역한 정상을 불으니, 이영발이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고, 다만 말하기를, “본도의 인민(人民)이 모두 이르기를, ‘이시애를 숨기고 우리는 그 어육(魚肉)이 되겠다.’고 합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임금이 노하여 곤장을 치도록 명하였는데, 오히려 직언(直言)을 하지 않고 간사(姦詐)하기가 백단(百端)이므로 그 의장(衣裝)을 수색하였더니, 이시애가 절도사(節度使)라 칭하고 발급한 마문(馬文)이 있었다. 이는 대개 이시애의 반간(反間)이 되어 조정(朝廷)을 염탐하는 자이었다. 임금이 곧 참()하려고 하였으나, 혹 다시 국문할 일이 있을까 하여 우선 의금부(義禁府) 옥에 가두었다. 그리고 〈내수사 종〉 옥산(玉山)은 바로 임금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의 종이었다. 영순군(永順君) 이부(李溥)와 도승지(都承旨) 윤필상(尹弼商파산군(巴山君) 조득림(趙得琳)에게 명하여 신문하게 하니, 옥산이 대답하기를, “이놈이 친히 이 글을 이시애한테서 받아 온 것이 아니고, 이놈이 전일에 서울에 왔다 길주(吉州)의 본집으로 돌아가다가 길에서 만자(萬自)를 만났는데, 만자가 이 글을 주며 이르기를, ‘너는 〈성상께서〉 잠저(潛邸)에 계실 때 따랐던 사람이니, 이 글을 쉽게 전달할 수 있을 것이며, 마침내는 상사(賞賜)를 받을 것이라.’고 한 까닭에, 이를 가지고 왔습니다.” 하니, 그 말이 진실이므로 명하여 주식(酒食)을 먹이고, 내수사(內需司)에 붙이었다. 김백겸(金伯謙)이 아뢰기를, “귀성군(龜城君)이 군사를 주둔시켜 놓고 발정하지 아니하고 대군(大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고 말하기를, “귀성(龜城)이 먼저 군사를 보내서 철령(鐵嶺)을 점거하여 지키니, 첫 번째로 옳은 것이고, 형세를 관망하여 신중히 하고 급히 진격하지 않으니, 둘째로 옳은 것이고, 본궁(本宮)의 노복을 초유(招諭)하여 이시애의 반역(反逆)을 알게 하였으니, 셋째로 옳은 것이다.” 하였다. 김백겸이 또 아뢰기를, “어유소(魚有沼)가 거느린 군사(軍士)는 흙비[?]로 인하여 군장(軍裝)과 기계(器械)가 거의 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비록 백만의 무리라 하더라도 기계(器械)가 날카롭지 못하면 장차 어찌 쓰겠느냐?”하였다.(daum 2010)

 

  장말손(張末孫) : [시험관련 사항] /년도 : 세조(世祖) 5, 과거시험연도 : 1459 기묘, 시험명 : 식년시(式年試), 등위 : 병과3(丙科3)/ [인적 사항] 성명(姓名) : 장말손(張末孫), 자 : 경윤(景胤), 본관(本貫) : 인동(仁同)/ [이력 및 기타 사항] 시호 : 안양,적개공신/연복군(安襄,敵愾功臣/延福君), 소과 : 1453(계유) 생원시, 전력(前歷) : 생원(生員)/ [가족사항] () : 장맹우(張孟羽), () : 일명:안량(一名:安良), 조부(祖父) : 장경원(張敬源), 증조부(曾祖父) : 장순효(張純孝), 외조부(外祖父) : 고승안(高承顔), 처부(妻父) : 권영신(權永愼)(daum 2010)

 

  장말손 : 보물 제502호 장말손 초상(張末孫 肖像)/ //simjeon.kr/xe/2009.06.11/ 소재지 경북 영주시/ 지정일 1969.02.19/ 수량/면적 1/ 시대 조선시대/ 소유자 장덕필 / 관리자 장덕필/ 자료출처 및 참조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조선시대의 문신인 장말손을 그린 초상화. (). 세로 171, 가로 107. 비단 바탕에 채색./ 경상북도 영주시 장수면 북기리 장덕필(張悳必) 소장. 장말손상의 화폭은 얼굴 부위가 들어 있는 가운데 폭이 대폭(大幅)이며, 양어깨 부위에서 두 개의 소폭과 연결된 3폭으로 되어 있다. 화상은 오사모(烏紗帽)에 단령을 입고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상용 형식이나 복색(服色)에 있어서는 초기 공신상의 특징을 보여 준다. 흉배 또한 중기 이후의 사라(紗羅)에 수놓은 흉배가 아니라, ()나라 복식 제도를 따른 직금(織金) 흉배여서 고식(古式)을 예시한다. 하지만 도화 시기를 말하여 주는 흉배의 문양은 공작 문양으로서 문관 1품을 시사해 준다. 그러므로 장말손이 연복군(延福君)으로 봉하여진 1482(성종 13) 이후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초상화를 그리게 된 계기가 적개공신상(敵愾功臣像) 제작에 있었던가가 의심된다. 그러나 이 장말손과 동시대인이자 역시 적개공신이었던 손소(孫昭) 및 오자치(吳自治)의 초상화가 각기 종손가에 전존되어 오고 있다. 3영정은 화폭·상용 형식·표현 기법에서 모두 동일하다. 이것은 결국 이 세 초상화가 같은 시기, 같은 화사에 의하여 제작되었음을 의미한다. 오사모는 초기에서 중기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형태를 보이고 있다. 왼쪽 단령이 트여 사이로 비치는 붉은 내공과 녹색 첩리(帖裡 : 철릭) 그리고 공수한 틈새로 보이는 흰 속옷 소매, 의자의 형태, 가지런히 한 방향으로 놓인 백피혜(白皮鞋), 원근법에 구애되지 않은 족좌대(足座臺) 등이 모두 조선 초기 공신도상의 특색을 보여 준다. 또한 채전이나 돗자리가 깔려 있지 않아 배경에 대한 인식은 아직 들어 있지 않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초상화로 연결되는 하나의 특색으로서 7분면의 취세를 표현하고 있다. 화가는 이미 상()그리기에 가장 적합한 대상인물의 취세를 개발하였다. 이 점은 중기 이후에는 거의 획일적으로 구사되는 면이다. 필법에 있어서는, 장말손상은 안면 처리에 있어서도 초기의 초상화법을 예시하고 있다. 안색은 황색 살빛으로 시채한 뒤 갈색선으로 윤곽을 잡았는데 선염기는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입술은 살빛보다는 홍기 나는 색으로 칠하였으나 전체적으로 가라앉은 느낌을 주고 있다. 이 당시만 해도 중기 초상화에서 보이는 고심세(高深勢)의 시도는 전혀 없다. 물론 육리문에 대한 이해도 역시 표현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골격 자체에 대한 것은 충분히 인식한 듯이 인물 윤곽의 완연함과 함께 눈매의 표정이 탁월하다. 그리고 눈초리에는 이미 갈색계의 홍기가 미세하게 삽입되어 있다. 장말손영정의 회화사적 의의는 몇 안 되는 초기 공신상 중 하나라는 점 이외에도 선 위주의 표현 수단을 가지고 대상 인물의 요체를 표출하였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daum 2010)

 

  장말손 : 장말손(張末孫) 영정/ 작년, 200969/ 장말손(張末孫)은 자는 경윤(景胤),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세조(世祖) 13(1467) 예조좌랑(禮曹佐朗)으로 이시애(李施愛)의 난() 때 강순(康純)을 따라서 난군의 토벌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이 되고.../ san114.tistory.com/ 입산하는 사람들(daum 2010)

 

  장말손 : 장말손가의 불천위 제사/ 지난달, 2010 821()/ 고려 때 직제학(直提學)을 지낸 장계(張桂)를 시조로, 조선 세조 때 공신녹훈을 받은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을 중시조로 하고 있다. 송설헌은 장말손의 호다. 우리나라 인동 장씨들은 일반적으로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blog.daum.net/ 초암 이야기(daum 2010)

 

  장말손 : 인동장씨(仁同張氏)/ 2달전, 2010728 ()/ 중시조는 장의손(張義孫)으로 장계의 7세손으로 판관(判官) 역임. ▲안양공파(安襄公派): 중시조는 장말손(張末孫)이며 장안량(張安良)의 삼남으로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짐.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 태그: 인동장씨(仁同張氏)/ 숲이 좋으면 새가 날아든다(daum 2010)

 

  장말손 : 慶州孫氏의 中興祖 ?林君 孫昭 3 - 孫昭와 그의 影幀/ 작년, 2009 1020/ 乙科 3, 丙科 7, 丁科 23人이 及第하였는데 丁科 23人 중에는 ?畢齋 金宗直도 있다.)에 成俊?張末孫 등과 함께 丙科로 及第한 7人 중에 들어있으며, “癸丑生으로 字는 日章인데 ?林君에 敍勳되었고, 諡號는 襄敏이다.../ blog.daum.net/ 눌인정사로의 초대(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간행물] 張末孫/ 권별(權鼈)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간행물] 장말손(張末孫)/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간행물] 甲申秋。吾友仲平。以書狀官。與伯寅在燕京。談箕都雲雨之思。用瀉鬱陶。仲平首爲詩伯寅。伯寅至七家嶺乃和。直以蒼松歲寒之節。擬其所思。遂來子休水之譏。甚可笑也。仲平於明年秋。以都事。赴咸吉道監司康相孝文幕。臨行。示余其詩。余次韻作 四首。二以贈仲平。一以立伯寅。末篇以寄景胤。景胤今在鏡城節度使許相琮幕府云。仲平。曹克治。伯寅。權慄。子休。蔡申保。景胤。張末孫。/ 김종직(金宗直)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 朝鮮時代 私奴婢 推刷와 그 實際-榮州 仁同張氏 所藏 古文書를 中心으로-/ 原文判讀과 正書 3. 文記에 나타난 推刷方法과 절차 Ⅳ. 肅宗年間 張末孫 功臣賜牌奴婢의 推刷事例 1. 證據文書의 제시 2. 關門의 내용과 추쇄과정 3. 訴訟을 통한 소유권 확인과 立案 Ⅴ. 맺음말/ 安承俊 | 韓國古文書學會(daum 2010)

 

  장말손[專門資料] :[간행물] 이조 참판에 추증된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선생의 행장(行狀)/ 조호익(曺好益)|태조(太祖)|원종훈(元從勳)|연복군(延福君) 장말손(張末孫)|장중우(張仲羽)|사우(士友)|주박(周博)|퇴계(退溪) 이황(李滉)|최황(崔滉)|서하(西河)|자하(子夏)|주자(朱子)|허자(許磁)|조희익.../ 김육(金堉) | 한국고전번역원(daum 2010)

 

  장말손 : 【문화칼럼】옥적(玉笛)/ 5달전, 2010422 () | 동양일보 감싸서 수리한 옥피리가 충남중요민속자료 225호로 지정되어 보관되고 있다. 그 외 장말손(張末孫·1431~1486)이 세조 12(1466)에 함경도 회령에서 야인을 물리친 공을 세워 옥적을 하사...(daum 2010)

 

  장말손 : 꽃계에 핀 종가의 향기, 인동 장씨 연복군종택”/ 6달전, 2010317 () | 안동넷 | view 이 종택이 전체 인동 장씨 문중을 대표하는 종택은 아니기 때문이다. 엄밀히 말해 이집은 연복군 장말손(張末孫, 1431-1486)을 불천위(不遷位)로 모시고 있는 종가이므로 인동장씨 연복군종택이라고 하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daum 2010)

 

  장말손 : 초상화의 뜻이 몬가요~~~~~~!@?????????/ 5년전, 200551/ ...따라서 전기(13921550)·중기(15501700)·후기(17001910)3기로 나눌 수 있다. 전기의 화법은 장말손(張末孫) 등의 적개공신상(敵愾功臣像)이나 김시습상(金時習像)에서 보이듯 옅은 황토빛 살색을 주조(主調)로 안면을.../ 답변수: 1 | 조회수: 558(daum 2010)

 

  장말손 : 인동장씨의 조상들/ 4달전, 201052 ()/ ...는 장의손(張義孫)으로 장계의 7세손으로 판관(判官) 역임. ■ 안양공파(安襄公派): 분파조(分派祖)는 장말손(張末孫)이며 장안량(張安良)의 삼남으로 시호(諡號)는 안양(安襄),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짐. 조선 세조 때 문과에.../ 답변수: 3 | 조회수: 4,346(daum 2010)

 

  장말손([不遷位 紀行 .25] 송설헌 장말손(1431~1486) : 邊方의 敵들을 掃蕩한 松雪軒에게 世祖가 下賜한 佩刀(寶物 第881). 文武 함께 갖춰 檄文과 對話로 敵 물리치다) [記事] : 글씨 : 土民 전진원/ '탁월한 학식과 충성심성종도 극찬/ 이시애 난 평정 후 예조참판 등 올라/ 낙향한 후 속세와 거리 둬 유유자적// 조선 전기 문신인 송설헌(松雪軒) 장말손(1431~86). 시호는 안양(安襄)이다. 송설헌은 세조 때 강순의 휘하에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 공을 세움으로써 공신의 녹훈을 받고 연복군(延福君)에 봉해졌으며, 불천위에 오른 인물이다. 송설헌이 별세한 후 성종이 내린 사제문(賜祭文)에서 그에 대해 '타고난 성품은 순수하고 성실하며(性質純穀)/ 학식은 통달하였네(學識疏通)/ 충성스럽고 의로운 도리는(忠義之道)/ 실로 마음 깊이 새겨 잊지 않는 바였네(實所佩服)’라고 표현했다. ◆문무 겸비, 변방의 적 소탕에도 큰 역할 : 송설헌은 145323세 때 사마양시(司馬兩試)에 합격하고, 1459(세조 5)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 점필재 김종직도 함께 급제했다. 승문원 박사와 사헌부 감찰 등을 거쳐 사간원 정언이 되었고, 1465년에는 함길도 병마도사(兵馬都事)로 부임, 함길도 절제사(節制使) 강순의 막하에서 활약했다. 몇 달 후 북평사(北評事)에 임명돼 경성절도사(鏡城節度使) 허종의 막하에서 각지를 순찰하며 민정을 살폈다. 당시 과거 동기인 김종직이 시를 보냈다. '황금 갑옷 담비 갑옷 입은 나그네의 정이(金甲貂 遊子情)/ 쓸쓸히 낙엽 떨어지는 변방성에 울리네(蕭蕭落木響邊城)/ 시서를 벗삼아 온 글 잘하는 장군이니(詩書從事詩書將)/ 요망한 기운을 변방에서 싹 쓸어버릴 것을 기쁘게 보리라(喜見妖氣塞外淸).’ 송설헌은 이처럼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송설헌이 1466년 회령(會寧)에 이르러 변방을 지키고 있을 때, 여진족 아지발(阿只拔)이 많은 무리를 이끌고 쳐들어왔다. 송설헌은 성벽을 튼튼히 하고 격문(檄文)과 대화로 적을 달래 물리쳤다. 그리고 해안으로 쳐들어온 해적도 소탕했다. 당시 남다른 교분을 나누던 허백당(虛白堂) 홍귀달이 각별히 '듣거니 그대 담소로 적을 물리쳐(聞君談笑能却賊)/ 자잘한 무리 얼씬도 못했다지(魚樵不敢近城池)라 읊은 시를 보내왔다. 변방의 적들을 소탕하고 이해 겨울 조정에 돌아오니, 임금이 크게 기뻐하며 패도(佩刀·보물 제881)와 옥피리(玉笛), 은잔(銀盃)을 하사했다. 은잔은 6·25 전쟁때 잃어버렸다 한다.

 

  ◆이시애 난 평정한 공로로 공신에 올라 : 1467 2월에 예조좌랑에 올랐고, 5월에 이시애의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다시 함경도로 떠났다. 송설헌은 강순 막하에서 전략 수립에 참여하면서 길주, 흥원, 북청 등지에서 이시애의 반군을 대파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반군의 토벌이 순조로이 진행되었고, 이시애는 경성으로 퇴각했다. 그 후 이시애 등이 토벌군 진지에서 목이 잘림으로써 3개월 동안 함길도(함경도)를 휩쓴 이시애의 난은 평정되었다. 이시애 난은 회령부사를 지내다가 상을 당해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가 길주에서 중앙집권적 정책에 대한 지역 사람들의 불만에 편승해 일으킨 반란이다.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저항했으나 세조가 왕족인 귀성군(龜城君) 이준을 병마도총사로 삼고 허종, 강순, 어유소, 남이 등이 대장을 맡은 토벌군을 출동시켜 난을 평정케 했다. 이 난으로 길주는 길성현으로 강등되고, 함길도는 남·2도로 분리되었다.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이준, 허종, 강순, 어유소 등 40여명은 정충적개공신(精忠敵慨功臣)으로 녹훈되었다. 이 난 평정 공로로 송설헌도 2등 공신에 올랐고, 적개공신상훈교서(敵慨功臣賞勳敎書: 보물 제604)와 함께 땅 100결과 은 50, 말 한 필, 노비 10명 등을 받았다. 그리고 내섬시 첨정(內贍寺 僉正)에 특진되었다. 2년 후인 1469년에는 공신회맹록(功臣會盟錄: 보물 제881)이 내려졌다. 그 후 공조참의, 예조참의, 예조참판 겸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의 벼슬에 올랐다. ◆관직 사임 후 화장(문경)으로 이거 : 47세가 된 해인 1477년에는 낙향해 살 곳으로 당시의 예천 화장(花庄),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를 찾아보고 점지해 두었다. 5년 뒤인 1482년 봄에 벼슬을 사임하고 화장으로 물러나 송설헌(松雪軒)을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삼아 유유자적하게 보내게 된다. 이 해 가을 연복군에 봉()해졌다. 14866(음력)에 별세하니 왕(성종)이 부음을 듣고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제사를 치르게 했다. 또한 나라의 지사(地師)로 하여금 산소 자리를 예천군 호명촌 뒷산에 정하고 장사를 지내게 했다. 가을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등으로 증직(贈職)하고, 3대를 추증(追贈)했다. 그리고 시호 '안양(安襄: 화목하기를 좋아하고 다투지 않는 것이 安이고, 일로 말미암아 공이 있는 것을 襄이라 한다)’을 내렸다. 1489년에는 나라(충훈부)에서 그려놓았던 송설헌 영정이 하사되고, 신주를 사당에 영원히 모시도록 허락하는 '부조()’의 명이 내려졌다.

 

  ■'송설헌 불천위이야기 : “후손이 모나지 않게 살아가길…" 사당의 담장을 둥글게 쌓아, 송설헌 불천위 신주를 모시고 있는 연복군종택(영주시 장수면 화기리)은 사람들의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송설헌의 손자 장응신이 31세 나이에 아버지 장맹우(46세 별세)에 이어 요절하면서 죽기 전 어지러운 정국에 휘말리지 않고 자손이 번성할 수 있는 곳을 찾아 조용히 은둔하며 살고, 남 앞에 나서지 마라"고 유언을 남겼고, 후손이 그런 곳을 찾아내 자리잡은 곳이다. 지금은 물론 주변에 안내표지까지 있다. 현재 송설헌 16세 종손 장덕필씨 부부가 살고 있다. 종손은 선조의 유훈에 따라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자리잡은 덕분에 집안의 소중한 유물들을 잘 보존해올 수 있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연복군종택의 불천위사당은 다른 종가와 몇 가지 다른 점이 있다. 우선 보통 종택의 우측(동편) 뒤쪽에 사당을 두는 데 비해, 연복군종택 사당은 종택(동향) 좌측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불천위 사당의 담장을 둥글게 쌓은 점이다. 통상 담장은 사각으로 각지게 만들어져 있다. 연복군종택 사당 담장을 둥글게 한 것은 후손들이 모나지 않게 살아가라는 선조의 가르침을 표현한 하나의 방법이라는 설명이다. 400여년 된 사당은 초가였다가 기와집으로 바뀌었고, 불천위 내외 신주만 봉안하고 있다. 4대조 신주는 종택의 다른 방에 모셔왔다고 한다. 종손은 4대조 신주를 함께 모시면 그 조상들 기제사 때마다 들락날락해야 하는 만큼, 불천위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여겨 처음부터 사당에는 불천위 신주만 봉안했다고 들려줬다. 4대조 신주도 현 종손의 부친이 후손들에게 부담을 덜어주고자 근래 조매(땅 속에 묻음)했다고 한다. 그래서 장씨가 20여년 전 부친 신주(사후 3년 뒤에 마련)를 만들기 위해 밤나무를 잘라 준비해뒀는데 신주용으로는 쓸 일이 없어져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그것을 보관하고 있으며, 최근 모 서원에서 위패를 만들기 위해 밤나무를 원했으나 주지 않았다고 한다. 사당은 설·추석과 기제사, 그리고 종부가 들어올 때만 연다. 불천위 제사는 합설로 양위 기일(고위 67, 비위 57)에 지낸다. 종택 사랑채인 화계정사(花溪精舍)에서 지내며, 제관은 20~30. 편은 두 틀을 올린다. 제주는 가양주를 담가 사용하다 지금은 종부 건강도 안좋고 해서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제수는 '조동율서 이시재중(棗東栗西 梨枾在中)’, 즉 대추는 동쪽 끝에 놓고 밤을 서쪽 끝에 놓으며, 배와 감은 중앙에 놓는다. 종손의 조상에 대한 정성과 예의는 각별했다. 사당과 유물각을 둘러볼 때는 갓을 쓰고 도포를 입는 등 의관을 정제한 뒤 안내했고, 유물각에 들어서서는 자리를 펴고 연복군 영정 앞에서 재배를 한 뒤 안내했다. 김봉규 기자 ■장말손 약력 : △1453년 사마양시 합격 △1459년 문과 급제 △1463년 사헌부감찰, 사간원정언 △1476년 공조참의, 예조참의 △1482년 가선대부 연복군 △1486년 별세, 시호 '안양(安襄)’ 1862년 예천 송계서원에 위패봉안 제향

 

  ■송설헌의 '패도에 얽힌 일화 : 6·25때 인민군이 탐내 땅속에 묻어뒀다. 27년 후 당시 종손의 꿈에 송설헌이 현몽 묻혀진 위치 알려줘 기적적으로 되찾아. 여진족 아지발 무리를 물리친 공으로 임금에게 받은 패도가 지금까지 보존돼 올 수 있었던 것과 관련, 후손의 정성이 얼마나 지극했는지를 엿보게 하는 일화가 있다. 6·25 전쟁 당시 연복군종택은 여러 종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 본부로 사용됐다. 한 인민군이 종가의 유물 중 패도를 탐내 가져가려고 땅 속에 묻어 감춰두었다. 그러나 갑자기 후퇴하는 바람에 미처 그 패도를 챙기지 못하고 떠났다. 그런데 문제는 없어진 패도가 어떻게 됐는지, 어디에 묻혀있는지를 알 수 없었다는 점이다. 당시 종손(현 종손 부친)은 집안의 귀중한 보물을 잃어버린 점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종가에서 처분한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길까지 받기도 했다. 그러나 패도는 27년 후에 찾게 된다. 당시 종손은 추원사(追遠祠) 건립 문제로 고민이 많았는데, 꿈에 연복군이 현몽해서 패도가 있는 위치를 알려주었다. 그래서 패도를 찾을 수 있었고, 종손에게 쏠렸던 의심도 사라지게 되었다. 기적이라고 할 만한 일이다. 종손의 간절한 마음에 하늘이, 조상이 감동한 것일까. 패도를 다시 찾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탓에 칼집의 일부가 부식됐고, 당초의 원형이 다소 훼손돼 후손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이같은 사연이 있는 패도는 198610월 보물 제881호로 지정됐다. 손잡이가 금으로 장식돼 있고, 칼집이 상아와 은사(銀絲) 등으로 된 이 패도는 길이 13.8. (嶺南日報 2011-06-01)

 

  장말손(張末孫) : 분류 인물 > 영남유학인물자료/ 생성일 1431(세종 13)-1486(성종 17)/ 초록 : 본관 :인동, 옥산(仁同, 玉山), 출신지 :인동 예천(醴泉), 분묘지 :예천 호명산(虎鳴山), 주요 관직 :함길도 병마도사(咸吉道兵馬都事), 함길도 경차관(咸吉道敬差官), 해주 목사(海州牧使);승문원 박사(承文院博士), 공조 참의(工曹參議), 이조 참의(吏曹參議), 예조 참의(禮曹參議), 시강원우부빈객(侍講院右副賓客)/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장말손 : 송설헌기(松雪軒記) / 구분 영남 유교문화 유물/ 분류 유물-유적 > 영남 유교문화 유물/ 초록 : 송설헌(松雪軒)에 걸려 있는 권세윤(權世淵)1911년에 지은 송설헌기(松雪軒記)이다. 송설헌의 유래와 송설헌 주인의 인품을 칭찬하고 있다. 푸르고 푸르면서 우뚝한 것이 소나무이고, 희면서도 차가운 것이 눈[]이다. 솔에 눈이 지나가면 곧고 굳은 절조가 드러나고, 눈이 솔과 만나면 그 흰 자태가 더욱 드러난다. 그 고결함은 주인의 풍격과 마음을 상징한다고 하였다. 송설헌은 인동장씨 장말손이 예천 땅 화장(花庄)에 터전을 마련하고 거처를 지으면서 붙인 당호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인동(仁洞)에서 경기도 창동(倉洞)에 옮겨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장말손 : 송설헌중건운(松雪軒重建韻) / 구분 영남 유교문화 유물/ 분류 유물-유적 > 영남 유교문화 유물/ 초록 : 송설헌(松雪軒)에 걸려 있는 송설헌중건운(松雪軒重建韻)으로, 송설헌을 중건하고 나서 1899년에 후손 장복안(張復顔이만규·유응목(柳膺睦), 후손 장경문(張敬文)이 지은 7언율시 4수가 실려 있다. 송설헌은 인동장씨 장말손이 예천 땅 화장(花庄)에 터전을 마련하고 거처를 지으면서 붙인 당호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인동(仁洞)에서 경기도 창동(倉洞)에 옮겨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장말손 : 송설헌(松雪軒) / 영남유교문화유물/ 구분 영남 유교문화 유물/ 분류 유물-유적 > 영남 유교문화 유물/ 초록 : 송설헌(松雪軒)에 걸려 있는 편액이다. 송설헌은 인동장씨 장말손이 예천 땅 화장(花庄)에 터전을 마련하고 거처를 지으면서 붙인 당호이다. 연복군 장말손은 조선 세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이시애(李施愛)의 반란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慨功臣) 2등에 책록, 연복군에 봉해지고, 예조 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51세 되던 해 외직인 해주 목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에 사임하고 물러났다. 퇴임 후 인동(仁洞)에서 경기도 창동(倉洞)에 옮겨 살다가, 다시 미리 보아 두었던 예천(醴泉) 화장(花莊 : 지금의 문경시 산북면 내화리)에 낙향하여 터전을 마련했다./ 자료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유교넷(//www.history.go.kr/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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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맹우 : 옛모습 그대로 지닌 인동장씨종택/지난달, 2010813 ()/ 건축은 조선 초기 선비 장응신(張膺臣)의 옛 집이다. 연복군 장말손(張末孫, 1431~?)의 손자로, 아버지 장맹우(張孟羽, 1470~1511)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황해 도사로 좌천된 후 갑자기 병사하자 동생 장응필과 함께 영주시.../ cafe.daum.net/cln-daegu/ 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daum 2010)

 

  장맹우 : 문무(文武)를 겸비한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 작년, 2009 810/ ...의 증손녀이자 권영신(權永愼)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2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홍문관 교리를 지낸 장맹우(張孟羽)이며, 2남은 선략장군(?將軍) 장중우(張仲羽)이며, 두 딸은 호군(護軍) 박인량(朴寅亮) 및 진사 이정수.../ cafe.daum.net/mundann/ 구선재(daum 2010

 

  장맹우 : 옛모습 그대로 지닌 인동장씨종택/지난달, 2010813 ()/ 건축은 조선 초기 선비 장응신(張膺臣)의 옛 집이다. 연복군 장말손(張末孫, 1431~?)의 손자로, 아버지 장맹우(張孟羽, 1470~1511)가 김안로의 미움을 받아 황해 도사로 좌천된 후 갑자기 병사하자 동생 장응필과 함께 영주시.../ cafe.daum.net/cln-daegu/ 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daum 2010)

 

  장맹우 : 문무(文武)를 겸비한 송설헌(松雪軒) 장말손(張末孫)/ 작년, 2009 810/ ...의 증손녀이자 권영신(權永愼)의 딸이다. 자식으로는 2 2녀를 두었는데, 장남은 홍문관 교리를 지낸 장맹우(張孟羽)이며, 2남은 선략장군(?將軍) 장중우(張仲羽)이며, 두 딸은 호군(護軍) 박인량(朴寅亮) 및 진사 이정수.../ cafe.daum.net/mundann/ 구선재(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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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면식(醴泉郡農業技術센터 장면식 所長 3810個月 公職生活 마감하고 名譽로운 退任!) [記事] : 38년간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명예롭게 퇴임하는 장면식 예천군농업기술센터 소장의 퇴임식이 20151229일 오전 11시 농업인회관 3층에서 이현준 군수, 농업인단체장, 직원, 가족 등 200여명의 축하 속에 3810개월의 공직생활을 마감했다. 이현준 군수는 축사를 통해 "38년간 정들었던 공직을 떠나는 장면식 소장의 명예로운 퇴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정든 이 자리를 떠나도 예천군 후배 공직자들과 농업인들을 기억하면서 제2의 인생을 아름답게 개척하시길 기원드린다."고 말했다. 장면식 소장은 퇴임사에서 "77 2월 예천군농업기술센터에서 공직생활을 시작, 38 10개월 동안 지역 농민들의 소득증대를 위해 열심히 일해 왔으나 막상 떠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과 후배 공직자들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는지 아쉬움이 남는다."고 밝혔다. 장 소장은 "나의 잘못으로 선후배님들의 마음을 다치게 했다면 오늘 이 시간 이후 잊어 달라"는 부탁과 함께 "농업 전문가로서 군 관내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며 농민들과 함께 숨 가쁘게 달려온 지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고 회고했다. "2007년 곤충엑스포 당시 깜둥이 소리를 들어가면서 일을 추진할 때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때로는 직원들을 혹사시키며 농업인 단체들과 함께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쳤을 때 뒤에서 감격의 눈물을 흘렸고, 내년 곤충엑스포도 꼭 성공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장 소장은 "20세부터 인생 모든 기간을 농업기술센터에서 보냈으며, 그동안 열심히 살 수 있도록 도와주신 선배 공직자, 동기 친구들, 그리고 후배 공직자님들, 마지막 공직 생활에 유종의 미를 거들 수 있도록 배려해 주신 이현준 군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장 소장은 끝으로 "일반인으로 돌아가 농촌지도자회 가입과 동네 새마을 지도자를 하는 등 앞으로 재능기부를 통해 함께 살아가는 제2의 인생을 살아 갈 것"이라며 "오랫동안 함께 근무했던 동료공직자 여러분 정말 고맙고, 퇴임 후에도 예천군 농업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용문 출신인 장면식 소장은 용문초등학교~용문중학교~예천농업고등학교~한국방송통신대학교 졸업~772월 예천군농업기술센터에서 공직생활을 시작하여 용문면 상담소장~농업경영담당~인력육성담당~원예기술담당을 거쳤다. 이어 2004년부터 농촌지원과장~기술보급과장을 거친 후 20151월부터 예천군농업기술센터소장을 역임해 왔다. 예천군수 표창, 도지사 표창, 지방경찰청장 표창, 농림축산식품부장관 표창, 농촌진흥청장 표창 등 다수의 수상기록이 그의 근면 성실한 공직생활을 엿보게 한다. 특히, 장 소장은 과·소장으로 재임 기간 동안 탁월한 업무능력을 발휘하여 부서평가 최우수, 우수, 장려를 비롯해 행정혁신 경진대회 최우수, 예산조기집행 최우수, 농촌진흥청주관 연구공로상 수상, 분야별 최우수농업기술센터 수상, 종합분야 전국 최우수농업기술센터상을 수상했다. 또한, 탑푸르트단지 농업인 대통령상, 농림축산식품부장관상, 행정자치부장관상 등 수많은 상을 수상하여 농업전문가로서의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받고 있으며, 예천군의 위상을 높였음은 물론, 장 소장이 농업관련 업무 지도력에 탁월했음을 인증했다. 녹색혁명에서 백색혁명으로 농가소득증대에 기여했으며, 곤충산업의 활성화와 곤충엑스포 성공적 개최, 친환경바이오센터 운영으로 친환경농업 기반구축과 예천참우 생균제 사업장 운영으로 예천참우 브랜드화, 시설원예 및 특화작목 기술개발 보급했다. 장 소장은 농기계임대사업소 운영, 농촌지도자, 생활개선회, 농업경영인, 4-H회원 육성으로 농촌지도사업 활성화 등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예천군 관내 최고의 농업전문가로 후배들의 영원한 귀감으로 남게 됐다. 가족은 부인 박갑순 여사와 1 1녀를 두고 있다.(金相國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5-12-29 오후 1:5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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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25일 경북 단축마라톤대회 군부 3...축하합니다.

 

  예천군 수상(慶山·盈德, 道內 市郡對抗 短縮마라톤 ·郡部 優勝) [記事] : 신도청 이전을 기념하고, 육상인구의 저변 확대 및 중·장거리 선수를 발굴 육성하기 위한 신도청 이전기념 2016년 시·군대항 단축마라톤대회’ 20161125일 경북도내 16개 시·150여명의 선수 및 동호인이 참가한 가운데 경북도청 일원에서 개최됐다. 이번 대회 시부 10단축마라톤에서는 경산시가 종합 우승을 차지한 가운데 영주시와 구미시가 각각 2위와 3위에 입상했다. 군부에서는 영덕군이 종합 우승을 차지했고, 의성군과 예천군이 각각 2위와 3위에 올랐다...(이상환 記者 大邱新聞2016-11-27, 21:1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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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437

 

  예천곤충생태원(醴泉昆蟲生態院 四季節 모두 볼거리 體驗거리 가득) [記事] : 예천곤충생태원에서는 겨울철 야외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수서곤충 등 살아있는 곤충들을 체험할 수 있도록 곤충생태체험관 3층에 특별 전시장을 마련해 관람객들을 맞고 있다. 전시장에는 물방개, 게아재비, 장구애비, 물자라, 왕잠자리 유충 등 수서곤충은 물론 넓적 사슴벌레, 장수풍뎅이, 거저리(밀웜), 귀뚜라미 등 겨울철에는 좀처럼 보기 힘든 곤충들을 전시해 곤충생태원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다양한 곤충의 세계와 체험거리를 제공한다. 그 동안 곤충이 활동하지 않는 계절에 곤충생태원을 찾는 관람객들은 살아있는 곤충을 체험할 수 없어 많은 아쉬움이 있었지만 올해 처음으로 기획한 살아있는 곤충 특별전시가 관람객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어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추진할 계획이다. 자녀와 함께 영주에서 방문한 관람객은 애들이 곤충을 워낙 좋아해서 가끔씩 찾지만 겨울에도 이렇게 살아있는 곤충들을 직접 보고 체험할 수 있어 살아있는 계절에 구애받지 않고 현장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어 매우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예천군 관계자는 지난 7월 개관한 곤충멀티체험관과 함께 어느 때 방문해도 재미있는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가득한 다양한 프로그램 개발로 곤충생태원을 방문하는 모든 관람객들이 만족할 수 있도록 운영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다.”고 밝혔다.(醴泉新聞 20161128() 10: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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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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