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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682:정대임(1)
작성자장병창 @ 2017.02.15 06:13:45

  예천의 자랑 4682 : 정대임(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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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대임 : 한국자료총서/ 20집 輿地圖書 下(한국사료총서 제20) > 補遺篇 (慶尙道) > 永川郡誌 > 人物/ 鄭大任 高麗 名臣 襲明 十五世孫沌雅?整端重寡默多大節少許許壬辰之亂奮不顧身倡義討賊設伏唐旨山下敎 賊無數又拏邑城屯倭巖兵四門外因風縱火賊沒數爛死一倭不返左道得全實賴一?之功也癸巳除 醴泉郡守 追擊龍當比安倭斬獲亦多冬與 兵使 朴晉● 慶州太和 之賊馳突合戰之除矢丸碎甲●不退避終日力戰以成大功左道一路之賊一時潰散無再北之患甲午登武科未及陞品而卒於軍中 大任 自變亂之後奮義忘身遇賊輒戰其盡忠立功爲一道之第一每以政愾自勵不以勳名爲心獻●之際讓功於邑宰 金閏國 前後事蹟載其時 兵使 朴晉 書啓中 首相 柳成龍 徵毖錄 贈 戶曹參判(//db.history.go.kr/2014)

 

  정대임 : 조선왕조실록/ 선조 44, 26(1593 계사 / 명 만력(萬曆) 21) 115(을묘) 1번째 기사/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하다/ 사시(巳時)에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각각 의견을 말하라.” 하였다. ... 박진이 아뢰기를, “경주(慶州) 최문병(崔文炳)은 자인현(慈仁縣)을 지키면서 국곡(國穀)을 수호, 4월에서 8월까지 버티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청송 부사(靑松府使) 정신(鄭愼)은 한인보(韓仁溥)와 함께 힘을 다해 성을 지키면서 군량을 많이 도왔고, 의성 현령(義城縣令) 이여온(李汝溫)도 군량을 잘 조달하였으니, 그 공이 가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응수(權應銖)는 경의 부하(部下)에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장수가 될 만한가?”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처사가 전도되고 군졸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주살(誅殺)이 지나치기 때문에 인심이 붙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천(永川)에서 세운 공은 덮어둘 수가 없습니다. 정대임(鄭大任)도 성심으로 적을 쳐서 그 공이 권응수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대임은 어떤 사람인가?”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그 위인을 보건대 장수가 될 만했습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 나는 글을 모르므로 목민관(牧民官)은 될 수 없다. 장수로 정하여 내려보내어 일대(一隊)를 담당하게 해준다면 적들을 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의 뜻이 가상했습니다. 그리고 영천에서의 공을 모두 권응수에게 돌리고 자신의 공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관직에 있는가?” 하였다. 아뢰기를,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원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 아룀을 끝내고 차례대로 물러갔다. /【태백산사고본】 2544 4A/【영인본】 22119 /【분류】 *의생활-관복(官服) / *군사-전쟁(戰爭) / *외교-()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db.history.go.kr/2014)

 

  정대임 : 조선왕조실록/ 선수 26, 25(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 81(무자) 10번째 기사/ 별장 권응수가 적을 격파하고 성을 회복하다/ 별장 권응수(權應銖)가 영천(永川)의 적을 격파하고 그 성을 회복하였다. 당시 왜적 1천여 명이 영천성에 주둔하여 안동(安東)에 주둔한 적과 서로 응하여 일로(一路)를 형성하고 있었다. 영천의 사민(士民)이 여러 곳에 주둔한 의병과 연결하여 공격하기 위해 박진(朴晋)에게 원조를 요청하자, 박진이 별장인 주부 권응수를 보내어 거느리고 진군하여 공격하게 하였다. 권응수가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세아(鄭世雅조성(曺誠신해(申海) 등의 군사를 거느리고 진군하다가 영천의 박연(朴淵)에서 적병을 만나 격파하고 그들의 병기와 재물을 거두었다. 이에 여러 고을의 군사를 모아 별장 정천뢰(鄭天賚) 등과 함께 진군하여 영천성에 이르니 적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다. 권응수가 군사를 합쳐 포위하고 성문을 공격하여 깨뜨렸다. 권응수가 큰 도끼를 가지고 먼저 들어가 적을 찍어 넘기니 여러 군사들이 용약하여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면서 진격하였다. 적병이 패하여 관아의 창고로 들어가자 관군이 불을 질러 창고를 태우니 적이 모두 불에 타서 죽었고, 도망쳐 나온 자도 우리 군사에게 차단되어 거의 모두 죽었으며, 탈출한 자는 겨우 수십 명이고 머리를 벤 것이 수백 급()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 성을 수복하여 아군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안동 이하에 주둔한 적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하였으므로 경상좌도의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권응수는 용맹스러운 장수로 과감히 싸우는 것은 여러 장수들이 따르지 못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상으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고 방어사가 되었으며, 정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정세아는 병력이 가장 많았으나 군사들을 권응수에게 붙이고 행진(行陣)에 있지 않았으므로 상을 받지 못하였으며, 나머지는 차등있게 상직(賞職)이 주어졌다./【태백산사고본】 626 31A/【영인본】 25626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db.history.go.kr/2014)

 

  정대임 : 조선왕조실록/ 宣祖 44, 26(1593 癸巳 / 명 만력(萬曆) 21) 115(乙卯) 1번째 기사/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하다/ ○乙卯/巳時, 上御便殿, 謂大臣等曰: “卿等各言所懷。沈忠謙對曰: “近觀國勢, 漸就危迫, 如久病彌留, 元氣萎弱。 若不投以瞑眩之藥, 日漸焦槁, 終至於不可救矣。 大臣旣已下去, 急以此意, 通于經略, 合勢進擊, 決一死戰可也。 兩湖物力, 一戰則猶或可支, 若持久, 則勢難支吾矣。上曰: “中原, 旣已講和, 總兵豈肯擊之? 必須上達于朝廷, 而又使經略、提督回, 心然後可擊。柳成龍曰: “前聞總兵之言, 似有進擊之意, 且見石尙書通經略書, 有便宜從事之語。 此意下書于左相, 與總兵秘密議定, 相議進戰爲當。同知中樞府事朴晋曰: “淸河縣監鄭應聖, 與興海郡守崔輔臣, 終始堅守, 故民皆耕穫, 至今保存。 其功不小, 而未知賞職幾何? 延日縣監洪昌世, 與李守一, 軍功相等, 而守一已陞堂上, 昌世則尙未蒙賞, 似爲?悶。 梁山郡守邊夢龍, 親自突擊, 手斬七級, 分遣軍官, 龍堂賊船, 盡爲焚蕩, 而功不如夢龍者, 反居其上, 似有?悶之意。上曰: “功高而賞小, 或未蒙賞者, 卿一一言之。晋對曰: “慶州崔文炳, 把截慈仁縣, 守護國穀, 自四月至八月, 拒守不退。 靑松府使鄭愼, 與韓仁溥, 竭力守城, 多助軍糧。 義城縣令李汝溫, 亦能接濟軍糧, 其功可嘉。上曰: “權應銖, 卿之部下人, 其人能將乎?” 晋曰: “處事顚倒, 不愛軍卒。成龍曰: “過爲誅殺, 故人心不附, 然不能掩永川之功矣。 鄭大任, 誠心討賊, 其功與應銖無異。上曰: “鄭大任, 何如人?” 成龍曰: “臣見其人, 可堪爲將。 自言我不解文, 不可爲牧民之官, 若定將下送, 令自當一隊, 則可以討賊云, 其志可尙。 且永川之功, 歸美於應銖, 而渠則口不言功。上曰: “何官?” 對曰: “醴泉郡守也。上曰: “依願爲當。晋曰: “鄭起龍, 接戰時, 下馬斬賊, 旋卽上馬, 此事甚難。 趙儆幾爲賊所殺, 賴起龍得免。上曰: “古者, 或拔用於行伍之中。 如起龍者, 不當置於判官。成龍曰: “起龍, 年少有才略。 且長於牧民, 接待天將, 極盡其誠, 至親自刈草。 尙州人皆曰: ‘判官可陞牧使, 而判官不必出也。如此之人, 今所罕見。晋曰: “以常人言之, 蔚山白丁張五石、私奴金善進等, 皆力戰有功。上曰: “如此之人, 必須除職, 可以聳動。晋曰: “慶州李克福、定虜衛崔奉天、興海李敦、朴應聖等, 當變初, 道無將主, 親自領軍, 力戰有功, 而皆爲賊所害。” ()〔上〕命注書, 詳書姓名。 忠謙曰: “我國法令, 旋立旋廢, 雖似未安, 如庶人着帽事, 人情皆以爲非便。 聖意雖欲一依華制, 或有假稱唐兵, 中路作賊之弊。 義州則服色混淆, 不無奸細之事矣。上曰: “予意庶人着小帽; 禁軍着氈笠, 則赴戰似爲簡便, 而書吏, 則《大典》各有所着之物, 人人皆挾竹機, 逢雨輒着可也。 唐將見之, 每爲嘲笑, 改之何妨?” 啓訖, 以次退。/【태백산사고본】 2544 4A/【영인본】 22119 /【분류】 *의생활-관복(官服) / *군사-전쟁(戰爭) / *외교-()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db.history.go.kr/2014)

 

  정대임 : 조선왕조실록/ 宣修 26, 25(1592 壬辰 / 명 만력(萬曆) 20) 81(戊子) 10번째 기사/ 별장 권응수가 적을 격파하고 성을 회복하다/ ○別將權應銖擊破永川賊, 復其城。 時, 倭賊千餘人屯據永川城, 與安東屯賊, 相應爲一路。 永川士民連結義兵, 諸屯欲擊之, 請援于朴晋, 晋遣別將主簿權應銖, 領率進攻。 應銖領義兵將鄭大任、鄭世雅、曺誠、申海等進兵, 遇賊兵于永川朴淵走之, 收其兵器、財物, 乃集數邑兵與別將鄭天?等進薄永川城, 賊閉城不出, 應銖合軍圍之, 攻破城門。 應銖持大斧, 先入斫賊, 諸軍???而進, 賊兵敗入官倉, 官軍縱火焚倉, 賊皆燒死, 走出者被我軍遮殺殆盡, 獲脫者僅數十人, 斬首數百級, 遂復其城, 軍聲頗振。 安東以下屯賊, 皆撤向尙州, 慶尙左道數十邑獲全。 應銖勇悍敢鬪, 諸將莫及。 事聞, 賞加通政, 爲防禦使, 大任爲醴泉郡守。 鄭世雅兵最多, 而以兵屬應銖, 不在行陣, 故賞不及, 其餘賞職有差。/【태백산사고본】 626 31A/【영인본】 25626 /【분류】 *군사-특수군(特殊軍) / *군사-전쟁(戰爭) / *외교-()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db.history.go.kr/2014)

 

  정대임 : 人物/ 상위서지: 여지도서(輿地圖書) > 補遺篇 (慶尙道) > 永川郡誌/ 저자: 미상/ 분류: 고도서 > 사부(史部) > 지리류(地理類)/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국사료 총서/ 人物/ ...鄭大任 高麗名 臣襲明十五世孫沌雅?整端重寡黙多大節少許許壬辰之亂奮不顧身倡義討賊設伏唐旨山下敎/ <하권0937-1>/ 賊無數又拏邑城屯倭巖兵四門外因風縱火賊沒數爛死一倭不返左道得全實賴一?之功也癸巳除醴泉郡守追擊龍當比安倭斬獲亦多冬與兵使...//

 

  정대임(鄭大任) : 醴泉郡守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鄭公墓表/ 상위서지: 愼庵集 禮 > 愼庵文集卷之九 > 墓表/ 분류: 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신암문집 (愼庵文集)/ 醴泉郡守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鄭公墓表 ( 醴泉郡守贈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鄭公墓表 )// 086/ 昔穆陵之世,長蛇起陸,食我封彊,?輿播越,八路幾?,惟時嶺之士大夫,群起赴難,拔距??,賊不能支,終成復國之績,在永川,則鄭公大任其首也,公初,從族兄湖?世雅遊,及聞難,卽仗劒馳見曰,君父在草莽,豈吾輩偸活時耶,遂草檄,聚義士,得數十百人,?金潤國,棄城逃,遣人責之使還,節度使朴晉, 檄公隷麾下,或以爲辱,公笑曰,苟可以滅賊,寧辭屈耶,遂分兵設伏,遇敵輒?,?其酋,奪其牛馬器仗,軍勢大振,時賊據本郡,四出剽掠,公謀於湖?,請傍邑諸義軍,以爲援,權公應銖朴公毅長,皆來會,/ 087/ 金潤國,亦涕泣乞效,遂與定約束,四面鼓?,撒灰縱火, 賊大亂遁走,乘而?,其溺水蹈火相躪藉,死者無?,賊在安東以北者,首尾隔斷,退屯于尙州,餘黨散洛比安龍宮之間,公率輕脫進擊,斬獲甚衆,比安缺守,道臣啓請,公權署縣事,癸巳夏,以突擊前鋒,赴蔚山,與賊遇,身被數十創,猶殊死戰,賊遂退,節度使權應銖,列聞于朝,進階中訓,守醴泉郡,冬佐節度幕,甲午春,登武科,時賊爲天兵所逐,至鳥嶺,觀察使韓孝純,欲襲擊之,公不可,以兵扼其要,截其往來,賊夜遁,公積勞成疾,?還第,旣病??,皆殲賊?羞語/ 088/,六月八日,遂終,距其生癸丑,爲四十二,某月日從葬于王龜洞先兆向午之原,訃聞特贈兵曹參議, 己酉,錄宣武原從功,加贈戶曺參判,兼同知義禁府事,嗚呼,世敎衰,士大夫知利,而不知義,知私其身, 而不知殉其國,雖職事所在,一遇變故,亦且回互顧望,至或棄而去之,如雉免逃者,多矣,如公者,名不在簡書,位不登執?,無慶賞,以誘於前,無刑法以驅其後,而乃奮起,草茅激,勸忠義,抗百途方張之寇,屹一路保障之勢,其兵謀師律夫,豈平日所事,而德義之勇,忠信之甲,有非老將宿?所能及者,是果無所本,/ 089/ 而然哉,公素有至行,痛不得終養,每遇節日,就先墓, 號哭三周,祭訖,閱日不御酒肉,稍長,自奮好學,尤喜朱子書,與湖?公講辨質難,大抵皆?節砥行之事也,故其臨難,首事奮義,效忠一戰,而復永川,再戰而定龍宮比安,三戰而掃?蔚山之賊,以成國家中興之基,?假之以年,仗鉞專?,其功業之盛,?出於權都師李忠武諸公之下哉,?,朴晉金潤國,皆竊以爲己功,及晉自劾追啓,?贈之典,亦未足以酬其萬一,觀公我自殉國,何勞之有之語,顧無事於爲公憾焉,而又何以强千古英雄之氣哉,公之先/ 090/ 迎日人,在麗,有諱襲明,以直諫,?,中世,入我朝, 有工曹判書諱光厚,寔公七世祖也,曾祖以淑,祖允淡,考容,皆不仕,?金氏,贈參判應生之女,配貞夫人,鷄林金氏,參奉乾之女,生三男,長良弼,主簿,次良輔良佑,良弼一男,元頀,女適閔恬李琛朴昌宇生員, 良輔四男,以頀是頀之頀,惟頀女適朴明復李廷蘭曹士佶黃克復楊時春,良佑二男,就頀進頀,女適閔?黃鋌朴元揆,內外曾玄孫男女,百餘人,八世孫允燮,與余善,日以公實記,來示余,請所以表公墓者,晩慤曾讀塤?所爲狀,及大山李先生所撰碣銘,竊有/ 091/ 所景慕者,久之,今以托名爲榮,不敢以不文辭,//

 

  정대임(鄭大任) : 영남(嶺南) 의병(義兵)/ 서명: 燃藜室記述/ 저자: 이긍익(李肯翊)/ 분류: 고전국역서 > 역사 > 사서류(史書類)/ 제공: 한국고전번역원/ 연려실기술 제17/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 9월에 영천에 있던 적군이 봉고어사(封庫御史)라고 자칭하면서 신녕을 향하여 오는데, 안동(安東) 의병장 권응수가 정대임(鄭大任)정세아(鄭世雅)조성(曺珹)신해(申海) 등과 함께 박연(朴淵)에서 만나 죽인 적들이 매우 많았다. 이때 영천 백성들이 그 고을에 주둔하고서 웅거한 적군을 무찌르려고 응수 등에게 구원을 청하여 왔으므로 응수 등이 함께 진군하여 추평(楸坪)에서 군사의 위엄을 보이니, 적들이 성문을 닫고 나오지 못하는데도 군사들은 적군을 두려워하여 감히 전진하지 못하였다. 응수는 담략과 용맹이 있어 곧장 군사 몇 사람을 베어 죽이고 뛰쳐 나가 군사들의 앞장을 섰다. 모든 군사들이 합세하여 성을 포위하고서 성문을 부수고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진격하니 적군은 관사로 도망갔다. 바람을 따라서 불을 지르니 거의 다 타죽고 혹 물에 빠져 죽기도 하였다. 수백여 명을 죽였으므로 시체 썩는 냄새가 길에 가득하여 사람들이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기재(寄齋)에는, “응수가 군사 천여 명을 모집하여 한 사람당 섶 한 묶음씩을 들고서 밤에 영천을 공격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안동 이하 여러 곳에 주둔하고 있던 적군이 모두 철수하여 상주(尙州)로 향해 갔으므로 좌도 수십 고을이 안전하게 되었다./ 병사 박진(朴晉)이 즉시 장계를 올려서 응수는 통정에 올랐고 기재에는, “절충조방장(折衝助防將)으로 발탁되었다.”고 하였다. 대임은 예천 군수(醴泉郡守)가 되었으며 조성 등에게는 차등 있게 상으로 관직을 주었다./ 정대임은, 본관이 영일(迎日)이다. 임진년에 의병을 일으켜서 적군을 토벌하였고, 계사년에 공으로 예천군수에 임명되었다. 용궁(龍宮)비안(比安)에 머물고 있던 적군을 추격하여 죽이고 사로잡은 숫자가 매우 많았고, 또 병사 박진을 수행하여 경주울산에 있던 적군을 쳐부수었다. 뒤에 병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정대임(예천군수 1593.7.17-1593.11.5이후) : 징비록 본문 [징비록]/ 유성룡 저 | 을유문화사/ ...로 달아났다. 이리하여 진은 경주 성안에 들어가 만여 석의 곡식을 얻었다.이 일이 조정에 알려지자 박진을 가선(嘉善)으로 올렸고, 응수는 통정 (通政)으로, 대임은 예천군수(醴泉郡守)로 삼았다. 진천뢰란 원래는 없었던 것으로, 군기시(軍器寺)의 화포장(火砲匠.../ 징비록 > 징비록 본문 > 1 > 좌병사(左兵使) 박진(朴晋).../ 예천(醴泉)에 대한 KRpia-한국의 지식콘텐츠 고전문학자료이다.//

 

  정대임 : 의병대장 창대 정대임(義兵長 昌臺 鄭大任. 1553-1594) 장군 종택| 종택&집성촌/ archi(鏞和) 조회 34 | 09.11.20 01:36 //cafe.daum.net/gjyw9/InXW/68/ 의병대장 창대 정대임(義兵長 昌臺 鄭大任.1553-1594)장군 종택/ 정대임(鄭大任): 1553(명종8)~1594(선조27) ()는 중경(重卿), ()는 창대(昌臺). 영천군 대전동에서 출생하였다. 고려 명신 습명(襲明)16세손이다. 1592(선조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대파, 이어 영천(永川)에서 전공을 세우고 이듬해 돌격장(突擊將)으로 울산태화진(蔚山太和津)에서 역전한 공으로 예천군수(醴泉郡守)가 되었다. 1594년 무과에 급제한 뒤 왜군과 싸우다 42세 일기로 전사(戰死)했다. 후에 나라에서 통정대부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증직을 내리고 선무원종공신 2등에 기록되고 광해군 원년에 가선대부 호조참판 겸 동지의부사로 가증되었으며 영천시 과전동 창대서원에 봉안되었다. 출처: //blog.daum.net/bosar/13430782(daum2010)

 

  정대임 : 16代 昌臺 정대임(鄭大任) [1553(명종 8)1594(선조 27)] /생원공파| 자랑스런 선조/ archi(鏞和)/ 2009.11.20 01:43/ //cafe.daum.net/gjyw9/NOCo/129/ 정대임(鄭大任)에 대하여 :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중경(重卿), 호는 창대(昌臺). 영천 출신. 아버지는 용()이며, 어머니는 증참판 김응생(金應生)의 딸이다. 증조부 윤식(允湜)에게 수학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당지산(唐旨山)에서 복병으로 적을 크게 무찌르고 이어 7월에 영천전투에 참가, 의병 100여명을 이끌고 의병대장 권응수(權應洙)의 휘하에 들어가 중총(中摠)의 직책을 맡고 활약하였다. 그 뒤 영천에서 신령으로 이동하는 적군을 권응수와 함께 요격, 박연(朴淵)에서 대승하고 영천수복에 공을 세웠다. 용궁·비안의 전투에서도 다수의 적을 참획(斬獲)하고 병사 박진(朴晉)과 함께 경주탈환전에 용명을 떨쳤다. 이듬해 태화강(太和江)의 적군을 공격, 종일 역전하여 많은 전과를 올린 공으로 1593년 비안현감·훈련원첨정·예천군수·경상좌도 병마우후를 역임하였다. 1594년 무과에 급제, 승품(陞品)되기도 전에 적군과 싸우다가 죽었다. 그 뒤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고, 가선대부(嘉善大夫호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다. 창대서원(昌臺書院)에 제향되었으며, 공산회맹(公山會盟)때 창화한 시 한 수가 전한다.(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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