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이곳은 군민 여러분들의 자유로운 의견을 게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게재된 내용에 대한 답변은 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건전한 통신문화 정착과 군민의식함양을 위하여 실명으로 운영되며특정인 비방, 광고, 음란물, 유사 또는 반복 게시물 등은 사전 통보없이 삭제됨을 알려드립니다.
※게시판의 건전한 운영을 위하여 "예천군 인터넷 시스템설치 및 운영에 관한 조례 제6조" 에 해당하는 글은 사전예고 없이 삭제되며 "정보통신망 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70조"에 의하여 처벌될 수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글 등록시 제목이나 게시내용, 첨부파일등에 개인정보(주민등록번호, 사업자등록번호, 통장계좌번호 등)는 차단되오니 기재를 금합니다.
예천의 자랑 4685 : 정대훈-정도전-정동신(1)(附 예천방문 1,444)
---
정대훈 : 회원번호 홀수와 짝수 구분한 명단/ 2012.07.20/ 사)한국시조시인협회 회원번호 짝수회원 강경화,강권수... 전선구,전순표,전연희,전용신,전일희,전종선,전치탁,전태봉,전학춘,전향아,정강혜,정공량,정남채,정대훈,.../ cafe.daum.net/juggyegug... 죽계구곡 <竹..(daum 2016)
정대훈 : (제6회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 작품 : 1989)/ 2008.10.03/ pp.75∼80) ◐정대훈 시인 약력◑ -약력은 『火中蓮』에 수록된 것을 그대로 소개합니다. *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 백수 정완영 선생 추천으로 시조문학 등단.../ cafe.daum.net/tlfmfshgr... 시를 놓고 우..(daum 2016)
정대훈 : (2) 시조문학 등단자(1976~ 1980까지) 명단/ 2007.05.18/ 시조문학 등단자(1976~1980까지) 명단(등단자 62명) 1980... 風蘭韻/김옥중 *어머니 외 1편/최도규 *을숙도 갈대밭/정대훈 *가로수 곁에서/홍진기 *박꽃/민홍우 *여름호.../ cafe.daum.net/gayasijo/... 소가야 시조문..(daum 2016)
정대훈 : <2-1> 1976~ 1980까지 등단 작품(완료)/ 2007.06.14/ 등등 시조의 창작 발전 과정을 분석해 보고자 등단... 못 살아도 감볕 빌려 웃던 아낙 장독대 돌아선 옷자락 물신 배는 우리 맛. 80 *乙淑島 갈대밭/ 정대훈 칠백 .../ cafe.daum.net/gayasijo/... 소가야 시조문..(daum 2016)
정대훈 : 정대훈 헌책 가격 정보/ 2012.07.13/ 알라딘중고샵 | 배송정책: 알라딘,개인거래 500원 내 나라 내 노래여 - 장암 정대훈 시조시집 정대훈 | 글방 | 1986 헌책방: 새한서점 | 배송정책: 2만원미만 2000원 4.../ blog.naver.com/ksoldbook/ BSB is forever(daum 2016)
정대훈 : 정대훈(시조시인), [출생] 1931년, [직업] 시조시인, [학력] 동국대학교, 출처 인물백과(daum 2016)
정대훈 : 내 나라 내 노래여(장암 정대훈 시조시집) 시 > 국내시 측면손때 글방 정대훈 1986/ www.hanabook.co.kr
정대훈 : 예천의 자랑 1514 : 정대훈 시인(군청 16강 등. 축하/예천방문 40)/ 작성 장병창 2007-11-11/ 예천의 자랑(1514) : 예천 출신 정대훈 시조시인(附 예천군청 양궁선수 윤옥희와 장용호, 9일 국가대표 16강 진입...축하합니다/청원정 및 소천서원, 9일 도유형문화재 지정...축하합니다/예천방문 40) ------- 정대훈.../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 (daum 2016)
정대훈 : 하나북 - 인터넷헌책방 - 정대훈 시조시집-내 나라 내 노래여/ hanabook.co.kr (daum 2016)
정대훈 : 예천의 자랑 1790 : 예천대사전 제90권 오늘 나와(祝 김유미. 장수동/예천방문 316)/ 작성 장병창/ 판서, 17081~17083쪽), 정대위(1902년 예천군수, 17803~17804쪽), 정대임(1592년 예천군수, 17805~17808쪽), 정대훈(시조문학가), 정덕채(묘 예천), 정도전(1398졸 예천투옥, 17809~17810쪽), 정동신(1777년 예천군수, 17810~178.../ www.ycg.kr/open.content/ko/participate/free.. (daum 2016)
정대훈 : 내 나라 내 노래여 - 시조시집 정대훈/글방/1986년/150쪽/ 5,000원 정대훈의 시조집 내 나라 내 노래여. 입니다. 헌책의 흔적이 약간 있을 뿐 양호한 상태입니다. 작가사인본입니다./ www.oldbookshop.co.kr (daum 2016)
정대훈 : 성파문학상 수상시조집 ‘화중련’/ 붙인 것이다. 김교한 김상훈 최재호 임종찬 김용태 박재두 이월수 최우림 정대훈 정해송 김춘랑 민홍우 류준형 이우걸 전일희 홍진기 김정희 전치탁 ... 동안 성파시조문학상 수상자와 수상작들이 소개돼 있다. 우리나라 시조문학.../ gudoin.byus.net/zboard (daum 2016)
정대훈 : <시조문학> 출신문인 명단(1961~2007)/ 밭/정대훈 *가로수 곁에서/홍진기 *박꽃/민홍우 *여름호(23호) *매미소리/남진원 *비구니(比丘尼)/정석주 *무심천/정운화 *동경/룡진호 *봄 호(22호) *학/라병순 *?a/심성찬 *물무늬/이도현 *추석날 밤 외1편/김영수 *환한 교실에.../ sijomunhak.kr/gnu4/bbs (daum 2016)
---
정도전 : 삼봉집(三峯集)/ 저자 鄭道傳/ 발행자 민족문화추진회/ 날짜 1977/ 분류 고전국역서 > 문학 > 문집류(文集類)/ 편찬자 김도련 김동주 신호열 윤남한 등/ 초록 한영우(韓永愚) Ⅰ. 정도전(鄭道傳)의 생애 1. 정도전의 가계(家系) 단양팔경(丹陽八景)의 하나에 삼봉(三峰)이라는 곳이 있다. 이곳에는 정도전의 출생과 관련된 전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다.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이 젊었을 때 이곳을 지나다가 어떤 상(相) 보는 사람을 만났다. 상 보는 사람은 그에게 10년 후에 혼인하면 재상이 될 아이를 가질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정운경은 그 말대로 10년 뒤에 삼봉에 다시 돌아와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서 아이를 얻게 되었다. 그 아이를 길에서 얻었다 해서 이름을 도전(道傳)이라 하고, 부모가 인연을 맺은 곳이 삼봉이므로 호(號)를 삼봉(三峰)이라고 지었다. 정도전의 어머니는 산원(散員) 우연(禹淵)의 딸로서, 우연은 우현보(禹玄寶)의 족인(族人)인 김전(金?)이라는 중이 여비(女婢)와 통하여 낳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정운경의 장모는 여비의 딸인 셈이요, 여비의 딸이 바로 정도전의 외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도전의 출생 배경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단양 지방의 거족(巨族)이던 우현보의 집안에서는 이 사실을 굳게 믿었고, 이 때문에 정도전은 뒤에 대간(臺諫)의 고신(告身)을 얻지 못하여 출세에 큰 지장을 받게 되었다. 정도전이 고려의 구가 세신(舊家世臣)들과 정치적 갈등을 가졌을 때, 구신들로부터 가계(家系)가 바르지 못하고 불분명하며 미천하다는 험구를 여러 차례 듣고, 또 특히 우현보 일족과는 가장 심각한 구원(仇怨) 관계를 갖게 된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도전의 부계(父系)를 보더라도 그의 가문이 현족(顯族)이 되지 못함은 사실이다. 봉화 정씨(奉化鄭氏) 세보에 의하더라도 정도전의 가계는 고조(高祖) 정공미(鄭公美)로부터 비롯된다. 그는 안동군 봉화현의 향리(鄕吏) 호장(戶長)임. 이었다. 그 다음 증조 정영찬(鄭英粲)은 비서랑 동정(秘書郞同正)을 지냈고, 조부 정균(鄭均)은 검교 군기감(檢校軍器監)을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두 벼슬은 모두가 실직이 아닌 산직(散職)에 불과하다. 실직에 오른 것은 아버지 정운경에 이르러서이다. 정운경은 충숙왕 때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공민왕 때에 형부 상서(刑部尙書)에까지 오르고, 수령 재임시에는 선정을 베풀어서 ≪고려사(高麗史)≫ 열전에는 양리전(良吏傳)에 등재되었다. 정운경은 이렇듯 봉화 정씨로서는 처음으로 벼슬다운 벼슬을 하였지만 처신이 청렴결백하여 가산(家産)은 보잘 것이 없었다. 정도전과 그의 두 남동생 및 누이동생은 정운경으로부터 약간의 노비를 상속받았다고 하므로 아무리 가난했다 하더라도 중소지주적(中小地主的) 경제 기반은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도전의 집안은 신분적으로는 향리에서 출발하여 사족(士族)으로 성장한 전형적인 신흥 사대부라 할 것이며, 경제적으로는 중간계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1389년 11월에는 이성계ㆍ조준과 협의하여 우왕을 신돈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키고, 왕족 가운데서 공양왕(恭讓王)을 맞아들였으며, 그 공으로 공신에 피봉되고 삼사우사(三司右使)에 승진하였다. 공양왕 2년에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오르고, 명나라에 성절사로 가서 윤이(尹彛)ㆍ이초(李初) 등이 이성계를 무고한 사실을 변명하였다. 즉 그들은 이성계가 종실이 아닌 요(瑤)를 공양왕으로 맞이하였고, 또 명나라를 침범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명나라 황제에게 무고하였던 까닭에 명나라는 이성계를 크게 불신하고 있었던 것이다.공양왕 3년(1391)에 그는 삼군 도총제부(三軍都摠制府)의 우군총제사(右軍摠制使)에 올랐다.
5군(五軍) 제도를 파하고 3군을 설치한 것은 이성계 일파가 군사권을 장악하기 위한 조처로서 이성계가 도총제사, 조준이 좌군총제사를 각각 차지하였다. 군사 제도의 개혁도 기본적으로는 그의 계획에 의한 것으로, 조선 왕조 개창 후에는 의흥삼군부(義興三軍府)로 개편하고 그 책임의 자리에 앉아 계속 병권을 장악하였다.전제 개혁에 의하여 경제권을 장악하고, 군제 개혁에 의하여 군사권을 장악한 다음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완성하기 위하여 그는 반대파인 이색(李穡)ㆍ우현보(禹玄寶) 등을 탄핵하다가 도리어 패하여 봉화(奉化)로 유배되었으며, 다음해 공양왕 4년(1392) 4월에 다시 고려 왕조를 옹호하던 정몽주(鄭夢周)ㆍ김진양(金震陽) 등의 탄핵을 받아 예천(醴泉)의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때 이성계는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고, 조준ㆍ남은 등도 유배되어 이성계 일파는 큰 위기에 봉착하였다. 이에 위급해진 이성계 일파는 역성혁명의 반대파 영수인 정몽주를 격살하고, 이어서 같은 해 7월에 정도전ㆍ조준ㆍ남은 등은 50여 명의 신하들과 함께 이성계를 신왕(新王)으로 추대하여 드디어 역성혁명을 성공시키기에 이르렀다.... 자료제공 한국고전번역원/ 제공 한국고전종합DB(//www.history.go.kr/2014)
정도전(정도전, 醴泉에서 치른 受難의 獄苦)/ 독자기고// 안승욱(보문면 출생)/ 요즈음 KBS에서 방영되고 있는 주말 드라마 정도전은 시청율 상위권을 기록하며 바야흐로 인기리에 큰 호응을 보이고 있다. 여말 선초의 시대를 인도한 사상가이고 유학자이며 책략가로서 위대한 정치가인 그를 육백년이 지난 오늘에 이르는 시점에 다시 재현하며 이를 조명하는 것은 그의 행적에서 보여주는 메시지와 파란만장한 사회활동에서 영향을 끼친 시대적 공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정도전은 우리의 고장 예천과는 전혀 무관할 것이라 여겼던 이외의 사건이 짧은 한 토막 사실(史實)로 스쳐지나 갔기에 이 기회에 이를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다만 고려사회의 적폐를 혁신해보고자 하는 그의 집념에 의한 행적과 별개로 할 수 없는 연장선상의 사건이었다. 그가 꿈을 펼치며 활동하던 시대는 원의 지배를 벗어나고자 과감한 개혁을 단행하려던 공민왕(31대) 집정 기 이후로써 사랑하던 왕비 노국공주를 잃어버린 공민왕은 실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요승 신돈을 등용하고 그의 비첩 반야를 총애하여 아들을 낳아 후에 공민왕 다음의 우왕 창왕으로 이어진 고려 말의 어지러운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왕권의 문란이 극도에 달하고 정치 경제를 비롯한 사회적 피폐가 날로 더해감에 따라 이를 바로 잡아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보려는 야심으로 이에 정도전은 이성계라는 무장을 등에 업고 역사적 대업을 향하여 한발 한발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이성계는 우왕과 최영의 명을 받고 조민수와 함께 고구려의 옛 땅을 다시 찾기 위한 요동정벌에 나선다. 최영이 총사령관이 되어 요동정벌에 앞장서려고 하였으나 우왕이 자기 곁을 지켜달라고 만류함으로써 이성계들에게 5만의 군사와 모든 군권을 맡기고 개경을 출발하였다. 이성계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이소역대(以小逆大)라고 하여 불가하다는 등 의 사불가론(四不可論)을 내세우며 압록강을 건너기 전 위화도에서 회군을 감행하고 개경으로 되돌아온다. 고양이에 생선을 맡긴 격이었다. 중과부적의 사항에서 최영은 이성계들에게 몰락당하고 만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기울어져가는 고려왕조로서는 결정타가 되는 혁명사건이었다. 정도전은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수구 반대세력을 물리치고 수차 유배의 길에서도 다시 일어나 그의 뛰어난 지략을 발휘하여 이성계로 하여금 새로운 왕조를 건국하려는 일념에서 일관하였다. 우왕은 그의 생모가 신돈의 비첩인 반야로써 신씨 설을 구실로 열 살밖에 안 되는 창왕과 함께 차례로 몰아내고 진짜를 세운다는 폐가입진(廢假立眞)명분을 들어 왕 씨 성의 요가 공양왕(34대)으로 등장한다. 공양왕 집권4년은 전제개혁을 둘러싼 주도권 싸움으로 반목과 암투가 극도에 이르고 목은 이색 등 수구 세력들이 유배를 당하는 난세에서 고려사직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저항하던 정몽주 일파의 역습을 받아 정도전은 또 나주로 유배를 당했다가 이듬해 봄에 고향 영주로 돌아오게 된다. 이 때에 정도전은 포주 감옥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된다. 포주는 지금의 예천을 이르는 옛 지명으로서 고려사직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하여 이성계의 수종으로 뛰어난 책객 정도전을 먼저 제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분노한 극열 수구 잔존세력 일당이 조정에서 멀리 떨어진 예천까지 몰려와 죽을 만큼의 고초를 가하였음에도 위기를 모면하게 된 것은 시대적 대세를 거역하지 못하는 불가항력적인 요행이었다고 생각한다. 고려를 최후까지 지키려던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에게 사살되어 고려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태조 이성계는 드디어 개경의 수창궁에서 조선조를 건국(1392. 7. 12)하게 된다.
정도전은 조선조 건국의 일등 수훈으로서 태조를 도와 500년의 기틀을 닦고 굳건한 조선조 정치이념을 다지게 된 것은 정도준의 높은 학문적 탁견의 영향이다. 태조7년 왕자의 난 한복판에서 억울하게 이방원에게 피살되어 풍운아적인 그의 생을 마감하게 된다.(醴泉新聞 2014년 05월 29일 (목) 12:58:32)
---
정동신 : 조선왕조실록/ 정조 7권, 3년(1779 기해 / 청 건륭(乾隆) 44년) 6월 14일(병인) 2번째 기사/ 지방관들의 죄를 논핵, 지방의 일을 살피고 비변사와 예조의 복주를 듣다/ 차대(次對)하였다. 영남 암행 어사(嶺南暗行御史) 황승원(黃昇源)이 복명(復命)하였다. 무술년1683) 겨울 황승원이 안렴(按廉)하라는 명을 받들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돌아와서 서계(書啓)와 별단(別單)을 올렸으므로 등대(登對)하여 품처(稟處)할 것을 명하였다. 서계(書啓)에서 전 좌도 병마 절도사(左道兵馬節度使) 백동준(白東俊), 전 좌도 수군 절도사(左道水軍節度使) 유진항(柳鎭恒), 밀양 부사(密陽府使) 윤광유(尹光裕), 순흥(順興)의 전 부사(府使) 홍배호(洪配浩), 양산 군수(梁山郡守) 임제원(任濟遠), 풍기 군수(豊基郡守) 조사충(趙思忠), 영천 군수(永川郡守) 김도순(金道淳), 의성 현령(義城縣令) 서탁수(徐琢修), 경산 현령(慶山縣令) 김상귀(金相龜), 창녕 현감(昌寧縣監) 유한녕(兪漢寧), 용궁 현감(龍宮縣監) 박기정(朴基正), 군위 현감(軍威縣監) 유한경(兪漢炅), 고령 현감(高靈縣監) 홍대현(洪大顯), 언양 현감(彦陽縣監) 박장헌(朴長?), 칠원 현감(柒原縣監) 송흥석(宋興錫), 신녕 현감(新寧縣監) 서매수(徐邁修), 의령 현감(宜寧縣監) 이언광(李彦光), 현풍(玄風)의 전(前) 현감(縣監) 김재균(金載均), 장기 현감(長?縣監) 오태언(吳泰彦), 김천 찰방(金泉察訪) 신대윤(申大尹)이 잘 다스리지 못한 것을 논핵하였는데, 차등있게 감죄(勘罪)하였다. 별단(別單)에 대략 이르기를, “역로(驛路)의 조잔(凋殘)함이 근일보다 더 심한 적이 없었습니다. 위토(位土)가 천포(川浦)로 들어간 것은 영구히 면제시킬 것을 허락하고 숫자에 의거 대급(代給)하여 준다면 백성들에게는 대가(代價)를 징수하는 고통이 없고 역마(驛馬)는 궐액(闕額)되는 폐단이 없어야만 역로가 원상을 회복할 것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시노비(寺奴婢)를 추쇄(推刷)하는 폐단이 타도(他道)에 견주어 더욱 극심하니, 추쇄관(推刷官)을 혁파하는 것이 실로 거꾸로 매달린 것을 풀어주고 물에 빠진 것을 건져주는 혜택이 됩니다. 비총법(比摠法)은 전대로 준행하고 있습니다만 문안(文案)을 조사하여 보면 유망(流亡)으로 인하여 해마다 감축되고 있어 곧 지상(紙上)의 귀록(鬼錄)이 되어 있는데도 신공(身貢)을 거두어 들이는 것은 한결같이 전의 비총에 의거하여 징납(徵納)하고 있기 때문에 강보(襁褓)의 아기와 인족(隣族)의 침징(侵徵) 등 허다한 폐단이 한결같이 전일과 같습니다. 비총법을 변통시키지 않는다면 폐단을 바로잡을 방도는 실로 그 길이 없으니, 한 번 이정(釐正)하는 것을 그만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인재(人才)로는 예천(醴泉)의 전 참봉(參奉) 박손경(朴孫慶)은 효성과 우애, 재주와 학식이 훌륭하여 좌도(左道) 인사(人士)들의 추앙(推仰)을 받고 있는데 깊은 산속에서 흰 머리로 가난을 지키면서 글만 읽고 있습니다. ... 이에 앞서 황승원이 예천 군수(醴泉郡守) 정동신(鄭東藎),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철운(李喆運), 사천 현감(泗川縣監) 김명련(金命璉)이 불법을 저지른 것 때문에 봉고(封庫)하고 계파(啓罷)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하교하기를, “영남은 큰 도(道)이다. 작년에 흉년이 든 끝에 특별히 어사를 파견한 것은 반드시 백성들의 고통을 상세히 적발하여 기필코 실효를 있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이제 서계(書啓)를 열람하건대 어사(御史)가 여러 달 동안 분주하여 진실로 노고가 많았다. 그러나 대저 수령(守令)을 파출(罷黜)시킴에 있어 먼저 그 죄상을 장계(狀啓)에 열거하면 암행(暗行)하는 의의가 어디 있겠는가?
만약 인장(印章)을 찍은 문서(文書)를 가지고 있다면 조정에 돌아와 감죄(勘罪)할 것을 논한 다음 비록 극률(極律)에 처하더라도 불가할 것이 없는데 단지 이초(吏招)만을 신빙하여 곧바로 먼저 봉고(封庫)하였으니, 이는 바로 금령(禁令)인 것이고 또 뒷날의 폐단에 관계되는 것이다. 그 나머지 수령들에 대해 논단(論斷)한 데에서 직무를 제대로 봉행한 일단(一端)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수령들의 부임한 시기가 그다지 선후의 차이가 없는데도 어사가 아뢴 가운데서 혹 논하기도 하고 논하지 않기도 한 것은 또한 무슨 일 때문인가? 더구나 본도(本道)는 70개의 고을이 있는 넓은 지역이니, 그들의 속에 품은 억울함을 위로 아뢸 수 없는 것과 치료(治療)할 수가 없는 병폐라서 개혁하여 소생시킬 수 없는 것이 한정할 수 없을 만큼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폐단을 이야기한 것은 두서너 건(件)에 불과하였다. 역로(驛路)의 절참(絶站)에 대해 이는 조정에서 알고 있는 것이므로 바야흐로 폐단을 바로잡을 정사를 강구하고 있는 중이다. 노비(奴婢)의 비총(比摠)에 대해 말했는데 이는 조정에서 알고 있는 것으로 이미 연석(筵席)에서 계칙하는 거조가 있었다. 통영(統營)의 전환(錢還)에 대해 말했는데 이것도 조정에서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또 방색(防塞)하게 한 명(命)을 내린 것이다. 그 가운데 안동(安東)의 궁결(宮結)과 진주(晉州)의 채전(債錢)에 대해서는 혹 듣지 못했던 것을 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곡부(穀簿)를 사열(査列)한 데 이르러서는 또한 매우 소루하게 하여 조심하지 않은 것은 도리어 비랑(備郞)이 적간(摘奸)한 것만도 못하였다. 또 더구나 백성을 침학하는 정사와 불법한 일을 저지르는 것은 오로지 무식한 변장(邊將)에게 있는 것이며, 이번에 특명(特命)으로 염찰(廉察)하게 한 것은 대개 격외(格外)에서 나온 것인데, 16개의 진(鎭)에는 하자가 없는 것으로 미봉(彌縫)하였으니, 진실로 또한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봉서(封書) 내용의 조건(條件)으로 말하면 사실 유무(有無)를 막론하고 애당초 앙복(仰覆)하지 않은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가? 별단(別單)이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펴 보았으나 또 어찌도 그렇게 허술함이 심한가? 이 서계(書啓)를 보면 영남 일도(一道)는 태고(太古)의 순후한 풍속이 있으므로 남쪽 지방은 돌아볼 걱정이 없다고 하더라도 될 것이다. 아! 인재(人才)가 점점 예전과 같지 못하여 국가의 기강이 날로 더욱 실추되고 있다. 지난해 관서(關西)에 어사(御史)를 보냈을 적에는 사명(使命)을 봉행함에 있어 사실과 어긋나게 하였고, 이번에 또 이렇게 하였으니, 이 뒤로는 어사를 보내지 않음으로써 백성과 고을로 하여금 감히 조정을 가볍게 여기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낫겠다. 한심스러운 마음 견딜 수 없다. 그것이 조정에서 계칙 면려하는 방도에 있어 원습(原?)1690) 의 노고가 있었다는 것 때문에 부당하게 용서할 수는 없다. 경상도 암행어사 황승원을 파직시키라.” 하였다./【태백산사고본】 7책 7권 46장 A면/【영인본】 45책 108면 /【분류】 *농업-전제(田制) / *윤리(倫理) / *왕실-의식(儀式)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육운(陸運) / *재정-역(役) / *재정-국용(國用) / *재정-전세(田稅) / *신분-천인(賤人) / *인사-관리(管理)/ [註 1690]원습(原?) : 높고 평평한 곳과 낮고 질퍽한 곳을 말하는 데 곧 사명(使命)을 받들고 험난한 먼 길을 두루 돌아다니는 것을 뜻함. ☞(//db.history.go.kr/2014)
---
@예천방문 1,444
유천재가노인지원센터(慶州 所在 하나老人福祉센터 關係者들 柳川在家老人支援센터 찾아 先進地 見學!) [記事] : 하나노인복지센터(센터장 전소영:경주시 소재)는 2017년 2월 17일 시설 수용자들에게 질높은 서비스로 수용자 및 가족들로부터 호평받고 있는 유천재가노인지원서비스센터(센터장 김미자)를 찾아 견학을 실시했다. 하나노인복지센터 직원 5명과 유천재가노인지원서비스센터 직원 4명이 함께 각 기관별로 진행한 이날 토론에서 사업에 대한 소개와 상호 기관 간 장점을 공유하고 부족한 점은 개선방법을 찾는 등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또한 신입직원들에게 사례관리에 대한 기본적인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지역의 재가노인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함에 있어 더 질 좋은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도록 하고 견학과 교육 후에는 용궁순대를 메뉴로 식사를 함께하며 예천의 맛과 멋을 풍미했다. 김미자 센터장은 "먼 길 찾아오신 하나노인복지센터 직원분들에게 감사드리고,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직원 상호간 서로의 노하우를 공유하여 복지서비스의 향상을 이룰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됐다"고 만족감을 표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7-02-17 오후 1:52:25)
본 페이지의 관리부서는 홍보소통과전산정보팀(☎ 054-650-6073)입니다.
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