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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 4797 : 중산십차랑-중원정도-지눌(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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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십차랑 : 仲山十次郞 / (관직) : 醴泉所長 , (소속) : 조선총독부직속기관 > 전매국 > 대구지방전매국 > 김천출장소 관내판매소/ 상위서지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1938년도/ 분류 도서 > 행정 > 직원록/ 제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www.history.go.kr/2014)
중산십차랑 : 仲山十次郞 / (관직) : 醴泉所長 , (소속) : 조선총독부직속기관 > 전매국 > 대구지방전매국 > 김천출장소 관내판매소/ 상위서지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1939년도/ 분류 도서 > 행정 > 직원록/ 제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www.history.go.kr/2014)
중산십차랑 : 仲山十次郞 / (관직) : 醴泉所長 , (소속) : 조선총독부직속기관 > 전매국 > 대구지방전매국 > 김천출장소관내판매소/ 상위서지 조선총독부및소속관서직원록 1940년도/ 분류도서 > 행정 > 직원록/ 제공 한국사데이터베이스(//www.history.go.kr/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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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정도 : 本府辭令 / 신문명 매일신보 1940/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每日申報/ 창간일 1905년 08월 11일 (一千九百五年八月十一日)/ 소장처 한국연구원/ 발간정보 석간 간기:일간 언어:국한문/ 일자(양력) 1940년 10월 01일/ 형태정보 크기: 면수:08 단수:16/ 기사위치 02면 11단/ 기사본문 : 古賀 房一(遞信書記), 安藤 淸一(遞信書記), 金子 强(道理事官) , 中原 正道(醴泉郡 郡守), 平川 博敏(高等官), 谷川 淡(道立醫院醫官)ㅡ 島田 兼一(土木主事), 石井淸太郞(技師), 池田 驅吉(技師), 大野 久作(技師), 平石 忠次(遞信副事務官), 三浦 一郞(遞信副事務官), 江口 賚夫(遞信副事務官), 大谷宗次郞(鐵道局技師), 文山 光烈(專賣局副事務官), ?坦 正藏(道理事官), 橫木 邦一(道理事官), 庄司 英次(道技師), 牛嶋 幸七(道立醫院醫官), 長野 祐廣(公立實業敎諭), 齋藤 大吉(土木主事), 垂水 新(産業技師), 名越 九郞(京城醫專書記)/ 제공 미디어가온 고신문(//www.history.go.kr/2014)
중원정도 : 本府의 昇級發令 - 郡守異動發令 / 신문명 매일신보 1940/ 분류 연속간행물 > 신문 > 每日申報/ 창간일 1905년 08월 11일 (一千九百五年八月十一日)/ 소장처 한국연구원/ 발간정보 석간 간기:일간 언어:국한문/ 일자(양력) 1940년 10월 02일/ 형태정보 크기: 면수:04 단수:16/ 기사위치 01면 10단/ 기사본문 : 磯田 正弘(技師), 高橋 隆三(鐵道局書記), 工藤 濟(鐵道局書記), 森本 喜德(陸軍兵志願者訓練所 敎授), 鈴本 三郞(師範學校敎諭), 上廻 儀一(道理事官), 渡邊 政敏(京畿道産業技師), 今村 新(穀物檢査所技師), 田中 俊輔(府理事官), 松本正太郞(遞信技師), 小林?夫(遞信技師兼道技師), 若田 稔(穀物檢査所技師), 武內 健三(京畿道視學), 永井 宅洙(郡守), 瑞原 世甲(長湍郡 郡守), 森山 淸吾(平澤郡 郡守), 平田 俊弘(郡守), 趙炳禹(郡守), 松山 政義(郡守), 金子 薰(郡守), 豊川 敬三(郡守), ■本 祥資(道警視), 和島 秀綱(漆谷郡 郡守), 日出原基昌(高靈郡 郡守), 美村 文雄(郡守), 森山 嘉之(郡守), 谷口 德行(實業敎諭), 荒木 左右(中學校敎諭), 三浦 良輔(遞信副事務官), 古賀 房一(遞信副事務官), 安藤 淸一(遞信副事務官), 金子 强(道理事官), 大戶 政吉(道立議院醫官), 富?直次郞(道立議院醫官), 松山 齋昇(江華郡守), 安川 昌煥(安城郡守), 河原 邦典(陰城郡守), 平川 博敏(報恩郡守), 中原 正道(醴泉郡守), 金城 炳鎬(奉化郡守), 邊政敏(産業技手)/ 제공 미디어가온 고신문(//www.history.go.kr/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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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눌 : 신편 한국사 21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Ⅰ. 사상계의 변화 > 1. 불교사상의 변화와 동향 > 3) 수선사의 성립과 전개 > (1) 정혜결사의 취지와 창립 과정 : 知訥(1158∼1210)(註 0064 知訥은 自號가 牧牛子이고 諡號는 佛日普照國師이다. 그의 저술에는≪勸修定慧結社文≫(명종 20년 ; 1190)·≪眞心直說≫·≪修心訣≫·≪誡初心學人文≫(熙宗 원년 ; 1205) 등 각 1권,≪華嚴論節要≫3권(희종 3년 ; 1207)≪法集別行錄節要幷入私記≫(희종 5년)·≪圓頓成佛論≫·≪看話決疑論≫등 각 1권이 현존하며<六祖法寶壇經重刻跋> 1편(희종 3년)이 전해오고 있다. 그리고 知訥碑文에≪上堂錄≫1권·≪法語歌頌≫1권,≪海東文獻總錄≫에≪牧牛子詩集≫1권이 있다 하였으나 전하지 않는다. 이 밖에≪念佛要門(念佛因由經)≫1권이 전하나 眞撰 여부에 대해서 설이 분분하다. 이상의 저술과 함께 崔詵이 지은<曹溪山修禪社重創記>(희종 7년) 및 金君綏가 지은<曹溪山修禪社佛日普照國師碑銘> 등은 지눌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지눌 당시 수선사에 대해서는 李鍾益,≪韓國佛敎の硏究-高麗·普照國師を中心として-≫(國書刊行會, 1980)와 崔柄憲,<定慧結社의 趣旨와 創立過程>(≪普照思想≫5·6, 1992)을 참조하였다.)에 의해서 창립된 修禪社는 지눌 자신의 개인적 수행과정의 결과였으며 대사회적 신불교운동의 산물이었다. 수선사의 창립과정을 통하여, 지눌은 당시 불교계의 타락을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며 그 대안으로 頓悟漸修라는 禪理論에 입각하여 실천적 수행방법인 定慧雙修를 주창함으로써 心(眞心)에 대한 깨달음의 원리를 독창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結社라는 선의 집단적 수행형태를 택하였다. 수선사는 정혜(禪定과 智慧)를 오로지 닦기 위해 이루어진 신앙결사로 지눌불교의 출발점이자 마지막 결론이라 할 수 있다. 지눌은 의종 19년(1165) 나이 8세에 출가한 때로부터 명종 12년(1182) 25세에 普濟寺 談禪法會에 참석하기 이전까지 출가 후 18여 년의 수학기간을 거치면서 정혜결사의 기반을 닦았다. 지눌은 ??山派 宗暉禪師에게 출가하였다. 출가한 이유에 대해서 그의 비문에는 병약하였기 때문이라 하였으나, 이와 함께 아버지 鄭光遇가 황해도 洞州(瑞興)의 土姓으로 향리층 출신이었고 성균관 國學學正(정9품)이라는 말단관리였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당시 보수적인 소수의 문벌귀족이 독점적 지배체제를 구성하고 있던 현실에서 관직 진출에 한계를 느꼈던 아버지의 현실관이 작용하여 출가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해 볼 수 있다. ... 지눌은 이 승과에서 합격하였으나 승려로서의 출세의 길인 승계와 승직에 관심을 두지 않고, 개경을 떠나 홀로 남쪽으로 수행의 길을 떠났다. 그는 전남 昌平(지금의 潭陽郡 昌平面)의 淸源寺에 이르러 머물게 되었는데, 어느 날 우연히≪六祖壇經≫을 보다가 “眞如의 自性이 생각을 일으켜 비록 六根이 보고 듣고 지각하고 아나, 본성은 萬像에 물들지 않고 眞性은 항상 自在한다”는 대목에 이르러 불가사의한 진리의 경계를 처음으로 체험하게 된다. 이는≪육조단경≫에 나타난 華嚴의 性起思想이 깨달음의 체험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註 0067 吉熙星,<知訥의 心性論>(≪歷史學報≫93, 1982), 14쪽.) 이로부터 더 한층 세속적인 명리를 멀리하고 산림에 깊이 은둔하여 철저한 수도생활에 들어가 3여 년의 기간을 청원사에서 보냈다.≪육조단경≫에 의한 깨달음의 체험은 정혜결사의 출발점이자 결론이기도 하였던 정혜쌍수와 惺寂等持門이라고 하는 실천문의 지도원리가 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지눌은 여기서 수행을 끝내지 않고 명종 15년에 下柯山(지금의 醴泉 鶴駕山) 보문사로 옮겨 선문의 ‘卽心卽佛’이라는 말에 마음을 두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華嚴敎의 깨달아 들어가는 문은 과연 어떠한 것인가에 의심을 갖고 3년 동안 大藏經을 열람하였다. 그러던 중≪華嚴經≫ 如來出現品에 여래의 지혜가 중생의 마음속에 갖추어 있건만 어리석은 범부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라는 말에 이르러 크게 감격하였다.(註 0068 知訥,<華嚴論節要序>(≪普照全書≫, 普照思想硏究院, 1989).) 이는 선문의 ‘즉심즉불’과 화엄교의 깨달아 들어가는 문이 별개의 것이 아니고 상통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이다. 이로써 지눌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으로 일반 중생들의 수행체계는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리하여 지눌은 범부들이 최초로 믿어 들어가는 문에 대하여 의심을 갖게 되었는데, 드디어 당나라 때 화엄사상가인 李通玄의≪新華嚴經論≫에 보이는 十信初位에 대한 해석을 열람하여 그 실마리를 찾았다. 즉 “범부가 十信에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자신이 범부라는 것만 인정하고 자기의 마음이 바로 不動智의 부처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한 데에 이르러서 크게 감동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부처가 입으로 말한 것은 敎요 祖師가 마음으로 전한 것은 禪이다. 부처와 조사의 마음과 입은 반드시 서로 다르지 않는데, 어찌 근원을 궁구하지 않고서 각자가 익힌 것에만 집착하여 망령되게 논쟁을 일으켜 헛되이 세월만 보내겠는가”라고 하여 선과 교가 둘이 아니라는 禪敎一元의 원리를 발견하였다.(註 0069 0위와 같음.) 이것이 바로≪화엄경≫과 ≪신화엄경론≫에 의거하여 두 번째 깨달음을 경험한 것이다. ...(//db.history.go.kr/2014)
지눌([최효찬의 ‘서울大 勸獎圖書 100選 읽기’] (24) 지눌의 ‘보조법어’…부처는 밖에 있지 않고 내 마음에 있다) [記事] : ‘보조법어’는 심재열의 번역본(보성문화사)에 지눌의 핵심사상이 소개돼 있다. 보조국사열반800주년기념사업회가 펴낸 ‘보조국사의 생애와 사상’(불일출판사)을 먼저 읽고 ‘보조법어’를 읽는 편이 바람직하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을 짚고 일어나라.’ 이 문장은 820년 전 이 땅에서 불교의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이 됐다. 이는 ‘정혜결사문’의 첫 문장이다. 정혜결사문은 당시 고려불교가 왕권과 유착해 극심한 모순을 드러내고 있을 때, 보조국사 지눌(1158~1210년)이 제창한 일종의 불교 개혁 선언문이다. 흔히 요즘도 경제나 정치 또는 종교가 혼란상을 보이며 갈피를 잃을 때 ‘기본으로 돌아가자’고 말한다. 지눌이 만든 정혜결사문도 그렇다. 고려불교가 계율을 지키는 불교, 마음을 닦는 불교, 지혜를 참구하는 불교로 돌아가자며 ‘계·정·혜(戒·定·慧)’의 ‘삼학(三學)’을 제창했다. 그가 정혜결사문이라고 한 것은 ‘정혜’의 전제로 ‘계’를 지키는 게 포함돼 있기 때문이다. 불교가 타락한 것은 불교적 삶의 기초인 계율을 게을리 했기 때문이라고 지눌은 생각했다. 그는 계율을 지키고 마음을 닦으며 지혜를 구하는 것이 불교의 기본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지눌은 정혜결사문에서 먼저 ‘명리를 버리라’며 이렇게 질타한다. “그러나 우리들이 조석으로 하고 있는 자취를 돌이켜 보건대 불법을 빙자해 ‘내다, 남이다’ 하는 상만 꾸미고 명예와 이해의 길로만 달리어 욕망의 티끌 세계에 빠져서 도덕은 닦지 않고 옷과 밥만 허비하니 아무리 출가한들 무슨 공덕이 있겠는가.” 스님들이 속인들처럼, 아니 오히려 속인보다 더 세속의 명예와 이익을 탐한다는 지적이다. 정혜결사문을 반포하면서 불교 개혁에 나선 지눌은 오늘날 한국 불교의 전통이 된 조계종을 확립했다. ‘땅에서 넘어진 자 땅에 의지해서 일어나라’는 말은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마음 닦음은 지눌이 지향한 수심(修心)불교의 핵심이다. 지눌에 의하면 우리는 본시 부처의 마음을 갖추고 있다. ‘인간은 비록 나고 죽는 괴로움 속에 던져져 있으나 본래부터 부처와 추호도 다르지 않은 성품, 즉 부처의 마음을 타고났다. 부처의 마음을 확연히 깨치고 생활 속에 드러내도록 수행을 하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게 지눌의 생각이었다. “스스로 부처의 마음을 닦고, 스스로 부처의 도를 이룬다”는 말은 이 같은 수심불교의 기본을 잘 드러낸다. 법화경에 장자의 아들 이야기가 나온다. 부러울 것 없이 모든 것을 가진 장자의 아들이 우연히 집을 나갔다. 여기저기 떠돌며 거지처럼 문전걸식하는 동안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다. 아들은 이제 고향이 어디인지도 잊어버렸다. 걸식하며 떠돌다 자기 집까지 오게 됐다. 수십 년이 지났어도 아버지 장자는 자기 아들임을 한눈에 알아보고 맞으려 했으나 아들은 두려운 마음에 도망을 친다. 장자는 하인을 시켜 아들을 유인해 자기 집에 데려와 아들이란 내색을 않고 허드렛일에서부터 재산 관리까지 몇 년 동안 훈련을 시킨다. 마침내 아들이 재산을 관리할 능력을 갖추자 장자는 동네 사람들을 모아 잔치를 베풀고 그가 바로 어릴 때 집을 나간 아들임을 밝히고 자기의 전 재산을 물려줬다. 집을 나가 거지 신세로 떠도는 아들이 바로 우리 중생이다. 윤회하는 세계를 여기저기 떠돌며 고생하는 우리들 모습이다. 그가 마침내 고향집에 돌아가 아버지의 전 재산을 물려받듯, 우리도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지눌은 주장했다. 그것은 번뇌망상과 경거망동을 털어버리고 본래의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를 견자본성(見自本性)이라 한다. ‘본성을 보는 것’이란 의미인데, 그게 바로 깨달음으로 가는 길이라 한다. 지눌은 깨달음의 과정을 ‘돈오점수(頓悟漸修)’의 개념으로 설명했다.
번뇌에 싸인 범부가 여래(부처)로 변해가는 과정은 돈오점수, 즉 ‘단박에 깨달아 점차로 닦는 것’밖에 없다고 했다. 그는 돈오점수의 과정을 아기가 어른이 되는 과정에 비유한다. “비록 본래의 성정이 부처와 다르지 않음을 깨달았으나 오랫동안의 습기(習氣·번뇌로 인한 버릇)는 갑자기 버리기가 어렵다. 깨달음에 의해 차츰 닦아지고 익혀져서 공이 이뤄지게 된다. ‘성인의 태’를 길러 오랫동안을 지나 서서히 성인이 되는 것이니, 이것을 ‘차츰 닦는다.’고 한다. 마치 어린이가 태어났을 때 모두 갖춰진 것으로 보여 남들과 다르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 기관이 아직 낱낱이 충실하지 못하기에 긴 세월이 지난 뒤 비로소 제대로 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깨달음의 경지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점차 익히며 얻는 것이라는 얘기다. 지눌은 ‘수심결’에서 ‘돈오돈수’에 대해 ‘돈오점수’를 주창했듯 ‘화엄경’을 공부하면서 선과 교가 둘이 아닌 ‘선교일원’임을 밝히려 노력했다. 당시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는 선불교는 언어문자로 수행하는 교불교와 서로 원수처럼 봤다고 할 정도로 대립과 갈등이 극심했다. 지눌은 손가락(문자)에 집착해 달(진리, 부처)을 보지 못하는 교불교나 손가락을 무시한 채 달의 방향을 모르는 것이나 잘못되기는 마찬가지라고 단언했다. 지눌은 선과 교가 하나 될 수 있는 길을 찾기 위해 예천 보문사에서 대장경을 열람한다. 그가 가장 관심을 가진 내용은 ‘마음이 부처’라는 선의 근본 요지와 계합하는 경전의 말씀을 찾는 일이었다. 선과 교가 대립하던 당시에 선승인 그가 교불교의 경전인 대장경을 3년 동안 열람했다는 사실은 아주 파격적인 일이다. 대장경을 열람한 지 3년 만에 그는 화엄경과 이통현의 ‘화엄론’에서 선과 교가 둘이 아님을 확신하고 “부처가 말한 것은 교요, 조사(종파의 종조)가 마음에 전한 것은 선이다”라고 설파했다. 이 말은 뒤에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란 말로 정형화됐고 선과 교를 아우르는 ‘선교회통’의 원리가 됐다. 지눌은 ‘조계선’을 주 골격으로 하고 ‘화엄교’를 그 살로서 선교일치를 전개한 것이다.
1198년 41세 때, 지눌은 지리산 상무주암에 들어가 마지막 정진에 돌입했다. 그리고 ‘대혜어록’의 “선은 조용한 곳에도 시끄러운 곳에도 있지 않다”라는 구절에서 마침내 큰 깨달음을 얻고 더 이상 고요한 곳에 머물지 않고 다시 대중 속으로 내려와 송광사를 거점으로 정혜결사 운동을 본격적으로 펼치게 된다. 오늘날 송광사가 조계종의 발상지로 조계총림이 자리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다. 여기서 ‘대혜어록’을 통한 지눌과 대혜의 만남은 한국 불교 사상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선불교와 대혜의 ‘간화선’과의 첫 만남이기 때문이다. 즉 점진적으로 일정한 수행 단계를 거치지 않고 화두를 통해(간화선) 곧바로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수행법이 선불교에 도입된 것이다. 지눌은 선과 교가 대립한 고려불교를 조계종이라는 큰 강으로 합류시켜 새로운 장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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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