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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930:황여일(2)(祝예천군곤충유통사업단)
작성자장병창 @ 2017.10.11 06:16:53

  예천의 자랑 4930 : 황여일(2)(附 예천군곤충유통사업단, 농림축산부 공모사업에 선정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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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 본 글은 모두 외우고 문리를 이해할 줄 알아서 다른 아이와는 비교가 되지 아니하니, 대해공이 기특하게 생각하며 해월의 아버지에게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이 아이가 분명하다고 말했다. 14세 때 처음 간성(杆城) 향시에 응시해 진사 1등을 차지했다. 돌아오는 길에 삼척 죽서루(竹西樓)에서 시 한 수를 지었다. ‘어젯밤 은하수 신선 쪽배 내렸는데/ 삼척땅 취한 객 흥이 절로 나는구나/ 나 혼자 죽서루에 올라 아무도 없는데/ 옥피리 길게 불며 능파를 향한다네.//’ 당시 봉래(蓬萊) 양사언이 삼척부사로 있었는데,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라 만나보기를 청해 대면하고는 크게 칭찬했다. 20세에 수일(守一) 김귀봉의 딸과 혼인했다. 처가인 안동에 머물 때 경상도 감사가 안동에 와서 백일장을 열었다. 이때 학봉(鶴峯) 김성일이 지필을 준비해주며 해월에게 시험장에 가서 응시하기를 권유해 늦게 시험장에 들어갔다. 모두들 붓을 들고 글을 짓느라 바쁜데 해월은 한쪽에서 조는 듯이 있다가 석양 무렵 혼자 앉아 단번에 붓을 휘둘러 출품했다. 시관이 그 글을 보고 깜짝 놀라며 장원으로 뽑았다. 그 글이 치술령부, 당시의 광경이 영남 사림의 입에 회자되기도 했다. 1577년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당시 백호(白湖) 임제와 오산(五山) 차천로와 더불어 시와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1585 30세 별시에서 을과 1등으로 합격하고 예문관검열 겸 춘추관기사관에 발탁되었다. 이때 출사하면서 집안의 아우들에게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주었다. ‘만리 푸른 바다 백구의 몸으로 우연히 인간의 추잡한 세계에 들어가네(滄波萬里白鷗身 偶落人間滿目塵)’ 1588년 정월에는 임금이 불러 편전에서 여러 차례 야간강의를 하면서 국론 분열을 지적하며 조정의 화합을 도모할 것을 주문하고, 류성룡 같은 인재를 중용할 것을 권유했다. ◆일본에 통신사를 보낼 필요 없다고 주장 : 158911월 일본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 통신사를 보낼 것을 청하니 조정 대신들이 대부분 허락하자는 쪽으로 기울었으나 해월은 홀로 불가함을 역설하며 통신사를 두어도 전쟁은 나고 두지 않아도 날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통하지 않고 난에 대비하는 것이 낫다라고 했다. 학봉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주었다. ‘동해에 노련자 있어 그 사람 또한 바른말을 하였네. 많은 사람이 진을 높이는데 너 홀로 주나라 섬겼네. 변설로 삼군을 물리치니 무기 아닌 석 자 혀였지. 나의 일편심도 천추에 그대와 같다네(東海有魯連 其人亦抗節 擧世欲宗秦 爾獨戴周日 談笑却三軍 其機在寸舌 我有一片心 千秋與君說).’ 이에 해월은 즐겁게 십년 벗 만나니 한줄기 절개 서로 같구려…라는 시로 화답했다. 1590년 초여름 어느 날 친한 사이인 백호 임제의 집을 방문하니 임제가 무슨 책을 저술하고 있다가 해월을 보고는 책을 감추었다. 해월이 정색하며 무슨 책이기에 우리 사이에 감춘다는 말인가하자 백호도 해월의 강개한 성품을 아는지라 보여줬다. 그 책 제목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인데, 왕위를 찬탈한 세조에게 아부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정치판의 비정함을 파헤친 야심작이었다. 해월은 비분강개하며 그 자리에서 붓을 들어 발문을 지었다. 그리고 시 한 수를 지었다. ‘만고의 비장한 뜻으로, 새 한 마리 창공을 지나네. 찬 연기 동작(銅雀)대를 가리고, 장화(章華: 초나라 궁전 이름)는 가을풀에 묻혀 있네. 요순보다 앞선다고 경탄하고, 탕무(湯武)와 같다고 야단들이네. 상강에 둥근 달 밝은데, 눈물로 죽지가(竹枝歌) 듣고 있네.’ 당시로서는 모두 감추고 피하는 사안인데도 분연히 발문을 지은 점은 그의 강개한 성품을 보여준다 하겠다.

 

  ◆한강에서 시를 주고받으며 명나라 사신 접대 : 1606년 여름 명나라 군이 철병하기 위해 중국 사신으로 상사(上使)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 양유년(梁有年)이 와서 조칙을 반포하게 되었다. 이때 조선 조정에서는 시문이 훌륭한 관리를 뽑아 사신 일행을 접대하게 했다. 이에 해월이 선발돼 한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며 사신과 시를 주고받았다. 이 시들은 해월문집에 기록돼 있다. 1607년에는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 2등의 녹(錄)을 받았다. 1612년 창원부사에 제수되고, 이듬해 봄에는 벼슬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때 지은 시다. ‘도성을 나오니 학을 탄 것처럼 가볍고/ 동문 밖 십리는 그림 속에 흘러가네/ 새로 보는 금수강산 화려하기만 하고/ 넓게 펼쳐진 물은 유리처럼 맑구나/ 한 발만 나와도 그 아름다움 알겠는데/ 2년 동안 왜 그렇게 얽매였는지/ 송어국 국화술에 노어회 생각하니/ 고향 생각이 더욱 간절하다네.’ 1615년 동래부사에 부임한 해월은 왜적의 소굴로 피폐해진 지역의 주거시설 정비 등 민생안정과 교육에 심혈을 쏟으니 백성들은 물론 왜인들도 감동했고, 임기가 끝난 후 사표를 내고 귀향했으나 백성의 청원으로 다시 1년 더 근무했다. 16188월에 벼슬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해월헌이라는 헌()의 이름을 만귀헌(晩歸軒)으로 바꾸어 걸었다. 9월에 통정대부 공조참의를 제수받았으나 …고기 잡고 나무 지며 야인과 벗하고, 왜가리 갈매기와 강가에 놀겠네…라는 시를 지어 은퇴의 뜻을 분명히 했다. 162242일 해월종택 정침에서 별세했다. 운명 전 병세가 조금 덜할 때 부인에게 죽는 것은 모두의 운명이니 슬퍼할 것은 없소. 자식들을 잘 훈계하고 문호를 잘 보호하시오. 이것이 내가 바라는 바요라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 황여일 약력 : 1556 울진 출생 △1569년 향시 장원 △1577년 성균관 수학 △1585년 별시 을과 1, 춘추관기사관 △1593년 형조정랑, 병조정랑 △1598년 사헌부 장령 △1601년 예천군수 △1615년 동래부사 △1620년 조정 대신들이 경상도 감사로 추천했으나 사양 △1766년 해월 문집 목판본(714) 발간(김봉규 記者 嶺南日報 2012-07-25)

 

  황여일 : 吟示醴泉歸侍高堂[海月罷醴泉郡守。歸侍親堂。日以宴。]/ 상위서지: 大海先生集 > 大海先生文集卷之一 > 詩/ 분류: 고도서 > 집부(集部) > 별집류(別集類)/ 제공: 한국국학진흥원/ 대해선생문집 (大海先生文集)/ 吟示醴泉歸侍高堂[海月罷醴泉郡守。歸侍親堂。日以宴。] ( 吟示醴泉歸侍高堂[海月罷醴泉郡守。歸侍親堂。日以宴。] )// 遠?今日過庭隅。小酌梅亭盡日娛。洞友苦期端午酒。老夫幸得不時需。//

 

  황여일(黃汝一) : 본관(本貫) 평해(平海), 시대(時代) (1556(명종 11)1622), 이력(履歷) : 조선의 문신.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응경(應徑)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고, 1576(선조 9)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우고, 1594년 형조 정랑(刑曹正郞)을 거쳐 1598년 진주사(陳秦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서 종계변무(宗系辨誣)의 서장(書狀)을 가지고 명나라에 다녀왔고, 1611(광해군 3) 길주 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1617년 동래진 병마첨절제사(東萊鎭兵馬僉節制使)를 지낸 후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평해(平海)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평해황 인명록/ 황여일(汝一) : 1556~?, 조선의 문관,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 선조 9년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85년 문과에 급제하였고 청환직을 지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권율의 휘하에서 종사관(從事官)으로 공을 세우고 2등공신이 되었으며 1594년 형조정랑(刑曹正郞)을 거쳐 1598년 진주사의서 장관으로서 명나라에 건너가 문명을 떨쳤고 광해군 3년 길주(吉州)목사가 되었다. 그 후 동래진병마첨절제사를 지내고 참판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조천록(朝天錄)' 과 해월집 등이 있으며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daum 2010)

 

  황여일 : 해월헌(海月軒)/ 문화재지정 : 문화재자료 제 161(1985. 8. 5)/ 수량 : 3/ 소재지 :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소유자 : 황의석/ <문화재 안내> : 선조 51(1588)에 건립하여 헌종 13(1847)에 중수하였고,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1556. 10.211623.4.2)의 별구(別構)였다고 하며, 기성면 사동리 산정에 있었으나 후손이 현 위치에 이축하였다 한다. 정면 4, 측면 3칸의 팔작집으로 측면의 앞쪽 1칸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렸으며 지면에서 떨어져 지었다. 해월헌에는 선생의 유품으로 보이는 각대, 물통, 화살, 숟가락, 제기, 청동등잔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녹각(鹿角) 3점 등의 유물과 교지(敎旨) 수십 점이 있으며, 천군기(天君記) 등의 서적이 남아 있다. 특히 한석봉의 글씨라고 하는 병풍 1점이 있는데 낙관이 없으므로 확인할 길은 없다. 해월헌 전면에는 해월헌기(海月軒記), 제해월헌(題海月軒), 용청강운(龍淸江韻) 등의 현판이 걸려있다. 황여일의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海月), 본관은 평해이다. 어려서부터 문장으로 이름났고, 선조 9(1576) 사마시를 거쳐 1585년 별시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한 후, 선조 25(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우고 1594년 형조정랑을 거쳐 1598년 명나라에 비변사(정사 이항복, 부사 이정구, 서장관 황여일)로 갔을 때 마테오리치의 감수를 받아 손수 제작한 세계지도는 현재 숭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조천록(朝天錄)을 지었으며, 162342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나라에서 가선대부·이조참판 겸 동지·경연의금부·성균관사·홍문과제학·예문관제학·세자좌부빈객 등의 벼슬을 추증하였다. 선생의 묘소는 온정면 금천리 속칭 양곡(暘谷)의 오패산 중턱에 있다.(daum 2010)

 

  황여일 : 사동골댁집/ 기성면(箕城面) 사동리에 소재한 황의석(黃義錫)씨 집은 그 집의 택호(宅號)"골댁"이므로 '사동골댁집'이라고 하는데 이 집터는 풍수(風水)들이 강릉(江陵) 이남에서는 제일 좋은 집터라고들 한다. 지금부터 약 400 수십년 전 세종대왕(世宗大王) 때 정선군수(旌善郡守)를 지낸 권조(權組)라는 사람이 평해(平海)에 입향하여 이 집터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그 후 중종(中宗)때 그 사위가 되는 이명유(李命裕)라는 사람이 홍천군수(洪川郡守)로 있다가 중종사화(中宗士禍)에 몰리어 벼슬을 잃고 돌아오니 권씨(權氏)말이 "이 집터를 사위에게 물려줘서야 영원히 이름난 터()로서 가치가 유지된다고 하니 자네에게 물려주네" 하면서 이명유(李命裕)에게 물려주었다. 이명유는 그 뒤 사위인 정담(鄭湛) 군수의 부친인 정창국(鄭昌國)에게 물려주니 정창국은 판결사 황응징(黃應澄)(해월 황여일 선생의 부친)에게 물려주었으나 황 판결사는 딸이 없어 사위에게 물려주지 못하고 대대로 황씨(黃氏) 종손이 살아왔는데 지금의 해월헌(海月軒)의 안채(主舍)가 바로 이 집터이며 문화재 자료로 보호하고 있다.(daum 2010)

 

  황여일 : <울진군지> 1장 인물 제1절 유현(儒賢)/ 황여일(黃汝一) :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호는 해월(海月)이며 본관은 평해다. 공은 용모가 빼어나고 재질이 남보다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었고, 어려서부터 가훈을 이어받아 세속에 초연하였으며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도학과 의리를 숭상하고 학문을 즐겨하니 문장이 넓어 아는 것이 많았다. 또 조정에서 임금을 섬기는데 명분과 절개로 충실하게 복무하였다. 공이 13세 때 경전과 사기를 해득하여 향시에 장원급제하였고, 1584년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 겸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을 거쳐 호당(湖當)에서 경전을 강의하고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 이조(吏曹)와 병조정랑(兵曹正郞)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지냈으며 후에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공은 한강(寒岡) 정구(鄭逑),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 등으로부터 성리학(性理學)의 학통을 이어받은 분으로 1583년에 조정에서 문묘배향(文廟配享)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오현(五賢)의 배향을 적극 주장하였고, 1598년에는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명나라 무변진주사(誣辯陳奏使)로 가서 문명(文明)을 떨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선조(宣祖)를 호종하였고, 권율(權慄) 장군과 함께 행주대첩(幸州大捷)과 진주성싸움에서 공을 세워 16077월 선무원종이등훈(宣武原從二等勳)을 받았다. ()이 집안에서 후진에게 학문을 장려할 때에는 덕행을 앞세우니 많은 선비가 나왔으며 또한 평해향중의 눈을 뜨게 하여 세칭 해월선생이라 하였다. 그리고 1622년에 영민하니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안하고 제향하였다. 저서로는 조천록(朝天錄), 주자절요주석(朱子節要註釋)이 있고 문헌으로 선조실록·광해군일기와 유집(遺集) 7권이 있으며 유물로는 만국곤여지도(萬國坤輿地圖)가 있다.(daum 2010)

 

  황여일 : <울진군지>/ 1장 인물 제11절 과제(科第)/ 2. 조선시대 1) 문과(文科)1) (1)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에 등재된 사람/ 황여일(黃汝一) : 1576(선조 9)에 진사(進士), 1585(선조 18)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參議).(daum 2010)

 

  황여일 : 해월(海月) 황여일의 별구(別構)로서 각대, 제기, 천동장, 녹각 등의 유물과 교지(敎旨)와 같은 선생의 유품이 남아있다. 문화재명 ; 해월헌(海月軒), 소재지 : 기성면 사동리 433 (문화재자료 제 161)(daum 2010)

 

  황여일 : 澗松堂文集(문고 보관)/ 海月先生文集 (古枕 810.819 64)/ 黃汝一 (15561622) ; 字 會元, 號 海月軒, 本貫 平海./ 木板本.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英祖52(1776)./ 零本1(147) ; 30x19.7cm./ 四周雙邊. 半匡 ; 19.6x15.4cm.有界.1020.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조선 중기의 문신인 황여일의 시문집이다. 황여일은 응징(應澄)의 아들이며 평해(平海) 사람이다. 선생은 1576(선조 9)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585년 문과에 급제 후 한원(翰院)에 뽑혀 검열, 대교(待敎), 봉교를 거쳐 1592년 임진왜란 때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공을 세우고 1597년 승문원교리, 이듬해 사서, 장령, 필선, 사예를 역임,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를 변명하고 1606년 영천군수(永川郡守)가 되었다. 1607년 선무원종훈으로 공신권(功臣券)을 하사 받고 1611(광해군 3)년 길주목사(吉州牧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1716년 동래부사(東萊府使), 1618년 공조참의로 환조(還朝)하여 1620년 경상관찰사로 대신(大臣)이 추천했으나 반대파의 저지로 이루지 못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고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봉향되었다. 이 문집은 1776(영조 52)년 후손 상하(尙夏)외 이형복(李亨福) 등이 간행하였다./ 【枕澗亭文庫】에는 零本 1책이 수장되어 있다./ 卷之 7. ; 上請從祀五賢文廟, 辭權元師從事, 辭侍講院司書./ 狀啓 ; 在北靑狀啓./ ; 慶林君金命元敎./ ; 謝 賜半?, 賀 王世子領 天朝欽賜冕服箋./ ; 擬宋淮南巡撫使范仲淹進太平民所食烏昧草./ ; ??淵頌./ ; 朴谷, 後朴谷, 重修圃隱鄭先生碑閣./ ; 平海黃氏族譜, 永陽先生案, 櫓金將軍(應河)./; 書林白湖元生夢遊錄, ?同舟契軸序, 南秀才(孝慤)九老契帖./ 卷之 8. 雜著 ; 遊內迎山錄, 不移說, 召募咸鏡道義兵文, 花樹會文, 殿策題./ 祭文 ; 祭從弟景元(), 祭從弟渾元(有一)再祥, 祭鶴峯金先生, 祭張公(希道), 祭朴大丘(弘長), 祭尹君聘, 祭叔父大海先生, 祭藥圃鄭先生, 祭朴大庵, 祭碧雲主人, 祭朱孝子(景顔), 臨河鄕社鶴峯金先生奉安文, 祭主屹山, ?弗山, 祭伽倻津, 祭笠巖, 祭祈雨, 敬殿慰安祝文(daum 2010)

 

  황여일 : <국조 문과 방목>/ 황여일(黃汝一) More Info./ 선조(宣祖)18(1585), 별시(別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1556, 병진, () 회원(會元), () 해월(海月), 본관(本貫) 평해(平海)/ > 가족사항 부() 황응징(黃應澄), 조부(祖父) 황연(黃璉), 증조부(曾祖父) 황세충(黃世忠), 처부(妻父) 김수일(金守一), () 황중윤(黃中允)/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1576(병자) 진사시, 전력(前歷) 진사(進士), 품계(品階)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官職) 부사(府使), 한림(翰林)(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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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곤충유통사업단, 농림축산부 공모사업에 선정됨...축하합니다.

 

  예천군곤충유통사업단(醴泉郡 昆蟲流通事業團, 農林畜産部 公募事業 選定) [記事] : 예천군 곤충유통사업단은 최근 농림축산식품부에서 공모한 2017년도 곤충유통사업단 구성 공모사업에서 사업단으로 선정됐다. 곤충유통사업단의 사업기간은 2년으로 지원사업비는 연 26천만원이고 올해 전국에서 한 곳을 시범운영하게 되며, 곤충자원의 광역·대량유통이 가능하도록 농가조직화, 품질관리, 마케팅 등을 지원한다. 올해 예천군 곤충사육농가는 50여 농가로 지난해보다 2배 이상 증가했으며 식·약용곤충 생산량도 고소애 11t, 꼴벵이 15t 등으로 급격히 늘어났으나 곤충자원과 가공상품을 판매할 경로가 없어, 주로 개인이나 소매 또는 온라인을 통한 소량 유통으로 소비활성화에 어려움을 겪어 왔다. 예천군 곤충유통사업단은 경북지역 곤충생산농가 조직화, ·약용곤충의 공동집적 및 선별가공을 통한 품질관리, 식용곤충에 대한 거부감 해소를 위한 곤충자원 홍보 및 마케팅 등의 활동을 하게 된다. 또한, 누에제품을 생산하는 예천군 양잠농업협동조합, 동물사료회사 ㈜케이씨피드, 식품유통업체 샘초롱과 ㈜ 만경, 식품개발전문기관 경북바이오산업연구원과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경북대학교와 상주잠사곤충사업장에서 곤충농가교육 과정을 개설해 사육기술 향상을 위한 사업에 주력할 계획이다.(鄭安鎭 記者 慶北每日新聞 2017.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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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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