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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931:황여일(3)(祝무학정)
작성자장병창 @ 2017.10.12 06:16:08

  예천의 자랑 4931 : 황여일(3)(附 예천 무학정, 1일 경북궁도대회 단체전(이상배,허회림.채번식,한응복,박래익)과 개인전(한응복) 우승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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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여일 : <울진군지>/ 2장 시() 1절 시()/ 6. () 2) 월송정(越松亭)/ 해월 황여일 시 / 海月 黃汝一 詩/ 해객이 뗏목을 타고 월송정을 찾아오니 // 청룡등 가운데에 부용봉이 어렸구나 靑蛇袖裏映芙蓉/ 동으로 푸른 바다 은거울 펴놓은 듯 東臨碧海開銀鏡/ 북으로 신령한 산 옥봉을 들었구나 北見靈驚擧玉峯/ 옛 고을에 사람 드물어 학이 된 정영위가 울었고 古廓人稀曾弔鶴/ 모래톱에 늙은 솔은 모두 용이 된고로 平沙松老盡成龍/ 둘레가 꽉 찼으니 준마로도 지나기 어려움을 알겠구나 定知周滿難通駿// 그 누가 신라의 화랑 술랑을 홀로 여기에 머물게 하였는고 // 하늘나라 옥황상제의 획책을 본떠서 模擬淸都煩帝畵/ 영경을 뚫어 열어 신봉을 시험하였는지 鑿開靈境試神鋒/ 겨울 나무 가지에 눈이 쌓여 까마귀도 자고 가기 어렵고 枝寒帶雪鴉難宿/ 깨끗한 모래사장에 서리마져 펴놓았으니 개미도 집을 짓지 못하네 沙淨鋪霜蟻不封/ 푸른 산색은 하늘에 닿아 구름 위로 뾰족 뾰족하고 黛色參千雲矗矗/ 서늘한 그늘은 땅을 깔아 녹음이 겹겹하다 淸陰滿地綠重重/ 바람이 불어와서 부는 퉁소 소리도 도우고 風來助亮吹簫響/ 달빛이 비추어 아릿다움을 더하니 눈내린 모습일세 月照增姸咀雪容/ 평읍을 하고 마고선녀가 봉도에 내려오니 平揖麻姑下蓬島// 멀리서 화조가 손님을 맞아 번거롭구나 // 정에 함께 오르니 땀이 흐르고 바야흐로 안계가 열리니 同登汗漫方恢眼/ 동해를 다 들여 마시어 가슴이 가득하네 盡吸滄溟始滿胸/ 칠성의 선유는 몽접1)을 빙자했고 七聖玄遊憑夢蝶/ 삼한의 중생을 보기엔 벌통 속의 벌떼인양 하여라 三韓群動視衙蜂/ 고요한 산수의 경치 선경 같은 속에서 천일을 보내니 烟霞物外消千日/ 인간 세상에서는 몇몇 해나 지났던고 風雨人間閱幾冬/ 봉가를 타고 올 때는 산이 적적했고 鳳駕來時山寂寂// 표륜2)을 타고 간 후에는 물이 넘실넘실 흐르더라 // 옥경동자는 어디에서 단약을 짓는고 玉童何處調丹軟/ 쇠솥 쓰던 당시에는 석농에다 구웠다는데 金鼎當時煮石濃/ 경장3) 빚어 한번 취해서 황홀한 기분이 되어 欲和瓊漿分一醉// 난새를 타고 돌아갔다 다시 또 와서 만나고 싶다 // 생전에 이 곳을 남겨 두고 간 것을 후회하여 前身應悔留玆地/ 북해 창오4)를 찾아 다니는 부질없음이여 /(daum 2010)

 

  황여일 : <울진군지>/ 2장 시() 1절 시()/ 9. 사원(寺院) 2) 수진사(修眞寺)/ 황여일 시 / 黃汝一 詩// 눈 덮인 산사에 오랜만에 돌아와도 頭白匡山愧晩歸/ 죽림은 옛날같이 사립짝 둘렀네 竹林依舊護仙扉/ 전일의 사정이야 속상한 말이지만 傷心欲說平時事/ 어찌 이 일을 주승의 잘못이겠소 奈此居僧一半非(daum 2010)

 

  황여일 : 남명학파(南冥學派) 관련(關聯) 인명록(人名錄)/ 이상필(문학박사, 경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편찬, 제공(2005 4)/ 황여일 1556-1622 회원 해월헌 평해 평해 한강문인1585문과 해월집/ 黃汝一 1556-1622 會元 海月軒 平海 平海 寒岡門人1585文科 海月集(daum 2010)

 

  황여일 : 퇴계문인/ 김성일(金誠一, 鶴峯, 安東 金溪, 15381593) ▼ 본관(本貫) 의성(義城)/ → 이개립(李介立, 15461625, 省吾堂, 榮州 葛川, 醴泉 出生) 본관(本貫) 경주(慶州)/ → 황여일(黃汝一, 海月, 平海 沙洞, 15561622, 醴泉郡守) 본관(本貫) 평해(平海)/ → 김용(金涌, 雲川, 安東 川前, 15571620 醴泉郡守) 본관(本貫) 의성(義城)(daum 2010)

 

  황여일 : 사원일람<祠院一覽> 辛鍾友 著/ 황여일(黃汝一)/ #경상도(慶尙道) 평해(平海)/ *명계서원(明溪書院)/ 효종갑오건(孝宗甲午建)./ 제향. 황응청(호대해 현감 본평해). 황여일(호해월 참판 본평해)./ 祭享. 黃應淸(號大海 縣監 本平海). 黃汝一(號海月 參判 本平海).(daum 2010)

 

  황여일 : 평해황씨/ 매월헌(梅月軒) 황여일(黃汝一)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權慄)장군의 종사관이 되어 공을 세우고 참판에 이르렀다.(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1556~1622) () 평해(平海) () 회원(會元) () 해월헌(海月軒) 海月集(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본 평해(平海)/ ※ 포은선생문집(圃隱先生文集) (151.49 35&#52289;)/ 鄭夢周 (13371392) : 字 達可, 號 圃隱, 本貫 延日./ 木板本(重刊). - [發行地不明 : 發行處不明], 大正6(1917)./ 93: 年譜, 遺墨, 肖像 ; 26.1x19cm./ 四周雙邊. 半匡 ; 19.1x16cm.有界.1019.註雙行. 上下內向二葉花紋魚尾./ ...이 책은 대략 9종이 간행본이 있다... ⑤영천 초각본(永川 初刻本) : 선조 17(1584)에 유성룡이 왕명을 받아 교정하여 다시 편찬, 이듬해에 완성하였으나, 임진왜란으로 그 판본이 타버렸기 때문에 선조 47년에 영천군수 황여일(黃汝一)이 임고서원(臨皐書院)의 여러 선비들의 협조를 얻어 영천 초각본을 대본으로 하여 다시 개간한 것이다.../ 刊記 ; 丁巳(1917)重刊./ 詩集重刊序 ; 崇禎己亥(1659)...宋時烈./ 詩卷序 ; 正統三年(1438)...權採, 萬曆乙酉(1585)...盧守愼, 永樂己丑(1409)...卞季良./ 肖像末 ; 萬曆丁未(1606)./ 重刊跋 ; 崇禎己元後四丙寅(1866)...柳厚祚./ 詩跋 ; 正統四年(1439)...宗誠./ 文集跋 ; 柳成龍./ 詩集跋 ; 萬曆丁未(1606)...曺好益.(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본 평해(平海)/ 영주 문화유적 > 정각/ 풍월정(風月亭)/ 영풍군 장수면 갈산리 신동에 있으며 현감(縣監) 주윤숙(朱允淑)의 건립이다. 감사(監司) 배삼익(裵三益) 부사(府使) 황여일(黃汝一)의 시가 있으나 지금은 없다.(daum 2010)

 

  황여일 : 이개립(李介立)/ ...않았다. 1596년 산은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다음해 정유재란 때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의병을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데에.../ //www.shinjongwoo.co.kr(daum 2010)

 

  황여일 : <울진군지>/ 1장 금석문 제2절 신도비/ 4. 해월 황여일선생 신도비명(海月黃汝一先生神道碑銘)/ 위치 :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나라 만력(萬曆) 26년은 우리 선조(宣祖) 무술년으로 모함을 바르게 변명하는 변무사가 명나라로 가야되는 중대한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의논하였으나 적합한 인물을 찾기가 어려웠는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을 진주정사(陳奏正使), 월사(月沙) 이정구(李庭龜)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정하니 당시의 중망(重望)이 세분 선생에게 맡겨지게 되니 국가의 안위가 달려있게 되었다. 백사 이공(李公)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동행한 월사와 해월은 모두 문장으로 소문이 높았었는데 실지(實地)에서 나로서는 도저히 따르지 못하겠다고 하였다. ! 해월 선생은 두 분과는 도의(道義)의 교분으로 국사에 올라있고 사림(士林)들이 전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이목에 밝게 알려져 있는데도 아직까지 신도비를 세우지 못하고 있더니 사손(祀孫) 면구(冕九)가 사종질(四從姪) ()과 함께 천리 길을 찾아와 나에게 새길 글을 청하니 내가 공손하게 대답하기를 나는 백사의 후손인데 우리 집에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공()의 신도비명을 오천(梧川) 이상공(李相公)에게 청하려 했으나 미루다가 백년 뒤에 다시 나에게 당부하여 하게 하니 면구는 지금에야 선대(先代)의 뜻을 이루는 셈이고 또 다시 세의(世誼)를 다지고저 함이지만 나로서 본다면 글을 제대로 할줄 모르는 내가 감히 공의 업적을 잘 묘사하는데 적당한 사람이라 말할 수 있으리요. 그러나 공의 자손을 만나고 보니 도저히 사양만 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행장을 살펴보니 공의 휘()는 여일(汝一)이요 자는 회원(會元)이며 해월은 그의 호이다. 기성황씨(箕城黃氏)는 대대로 망족(望族)인 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첨의평리(僉議評理) 문하시중(門下侍中)으로 시()는 충절(忠節)이요, 휘는 서()인데 익대원훈(翼戴元勳)이 되어 현()을 군()으로 승격하였으니 상조(上祖)이시고 휘 종량(宗亮)은 호부전서(戶部典書), 휘 용기(龍起)는 내자소윤(內資少尹)이요, 조선시대에 와서 휘 유보(有甫)는 중랑장(中郞將)인데 휘 후()를 생하니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이요, 휘 옥숭(玉崇)을 생하니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이니 판관이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보곤(輔坤)이니 성균생원(成均生員)이요, 조의 휘는 우()니 성주목사(星州牧使), 고의 휘는 응징(應澄)이니 호는 창주(滄洲)요 장예원판결사(掌隸院判決事)이며, ()는 숙부인(淑夫人) 영덕 정씨(鄭氏)니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인 창국(昌國)의 따님이요 성균사성(成均司成)인 자함(自咸)의 증손이다. 가정(嘉靖) 병진은 우리 명종(明宗) 11년인데 공이 평해군 사동리(沙銅里)에서 태어나시니 아버지 창주공(滄洲公)의 관후함을 닮았다. 어려서부터 영오(穎悟)하였고 조금 커서는 중부(仲父)이신 대해공(大海公)에게 수학하여 듣기만 하면 외우고 말만하면 사람들을 놀라게 하였다. 나이 겨우 열 살에 문리(文理)와 문장이 날로 높아져서 부실한 끼니에도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였기에 열세 살에 경사(經史)를 모두 독파하였다.

 

  선조(宣祖) 기사(己巳)에 간성향시(杆城鄕試)에 응시하여 제일을 차지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죽서루(竹西樓)에 올라가 시 한수를 지으니 「어젯밤 은하수 신선쪽배 나렸는데 삼척땅 취한 객이 흥이 절로 나는구나. 나 혼자 죽서루에 올라 아무도 없는데 옥피리 길게 불며 능파를 향한다네()」라 하였다. 당시 양봉래(楊蓬萊) 사언(士彦)이 삼척부사로 있었는데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라 불러 맞이하여 말을 걸어보고 대단히 귀중하게 생각하였고 조운강(趙雲江) ()이 그 운을 따라 시를 지으면서 만나보지 못한 아쉬움을 나타내 보였다. 열일곱 되는 해(임신)에 수진사(修眞寺)에 들어가 공부하면서 3년을 문밖에 나오지 아니하였으니 후에 차오산(車五山)이 공에게 시를 주었는데 평생을 시전삼백편(詩傳三百篇)에 입술이 닳았다라는 구절이 있다. 공이 20세 을해에 시전과 서전을 손수 써서 토를 달아놓고 시서아사(詩書亞師)라 이름하였다. 송대(宋代) 유현(儒賢)들의 학설에 더욱 치력하여 자세히 연구하기를 생각하니 구봉(龜峯) 김공(金公)이 한번에 영재임을 알아보고 딸을 주어 사위가 되었다. 처가에 머물고 있을 때 마침 안동(安東)에서 도시(道試)가 있기에 뒤늦게 참가하여 장원을 하였으니 문집 중에 치술령부()가 바로 그 것인 바 석천(石泉) 권공(權公)이 그 글을 보고 찬탄하기를 맥맥히 문장가의 유향이 보인다 하였다. 그해 가을에 관동감시(關東監試)에서 수괴를 차지하였으며 이듬해 22세 정축에 진사 복시(進士覆試)에 합격하고 다음해(정축)에 성균관에 입학하여 차오산(車五山) 임백호(林白湖) 등과 더불어 같이 공부하게 되었다. 10월에는 사인(舍人)들만 모이는 자리에 참석하니 원래 사인을 거치지 못한 사람은 참석치 못하게 되어있는 자리인데도 공이 평상복으로 참석하였다는 것은 그 당시 시문의 명망이 높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공이 28세인 계미에 학봉(鶴峯) 선생을 찾아뵙고 근사록(近思錄)의 강의를 들었는데 이때부터 성리학(性理學)을 연마하여 상당한 성취를 보였다. 이해 8월에 오현(五賢)을 문묘(文廟)에 배향(配享)하기를 청하는 상소에 찬성하였던 20여인이 처음에는 같이 하기로 굳게 약속하였으나 나중에는 흐지부지 꼬리를 감추려 하기에 홀로 의연하게 주장하며 말하기를 이 같은 정도(正道)와 이 같은 공론(公論)을 그렇게 미적미적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조정에 나가나 사림에 있으나 무엇이 도움이 되겠는가 하고 드디어 소()를 지어 상소하였고 학봉 선생을 한강에서 전송하면서 우복(愚伏) 정공(鄭公)에게 말하기를 표연이 동해바다를 밟고 싶다 하였으니 당시 학봉에게 쏟아지는 여론이 분분하여 곱지 않기 때문이었다.

 

  다음해 갑신에 별시(別試)인 동당과(東堂科)에 수석을 차지하였고 다음해 을유에는 대책별시(對策別試)에 을과(乙科) 제일을 차지하여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에 발령받고 출사를 시작하니 집을 떠나면서 집사람에게 시를 지어 주어 「만리 푸른 바다 백구의 몸으로 인간의 추잡한 세계로 잘못 들어가네(滄波萬里白鷗身 偶落人間滿目塵)」하였다. 다음해 병술에 휴가를 빌어 부모님을 찾아뵙고 2월에는 구백담(具栢潭)을 찾아뵈었으며 다시 백운정사(白雲精舍)를 찾아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강하였다. 공이 일찍이 말하기를 조금 늦게 태어나서 퇴계(退溪) 문하에 가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라 하더니 때마침 도산(陶山)에서 퇴계 선생의 문집을 간행하기에 공이 그곳에 가서 편수에 힘을 다하였고 10월에는 예괴원(隸槐院)에서 임시로 부정자(副正字)를 맡아 보셨으며 11월에는 호당(湖堂)에 파견되어 근무하게 되었다. 정해에는 예문관 대교(待敎)에 발령되었고 무자년 어느 날 밤에는 주상을 모시고 강()을 하시다가 말씀 올리기를 근자에 사림이 두 편으로 갈라져 있어서 국론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으니 원하옵건대 화평(和平)정책을 쓰도록 하옵소서. 이러한 때 인재가 절실하게 필요하니 류성룡(柳成龍) 같은 인물은 경륜이 있는 사람이니 거두어 쓰심이 어떠하시올지 하였다. 8월에는 명을 받들고 태백산사고(太白山史庫)에 가서 책들을 거풍하고 돌아왔다. 10월에는 해월헌(海月軒)이 낙성을 하니 아계(鵝溪) 이공(李公)이 기문(記文)에 이르기를 군자의 마음이 바다와 달과 같이 광대고명하여 변함이 없는 것이니 군()이 해월(海月)로 이름한 것은 이미 작심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였다. 기축에 춘추관기사관(春秋館記事官)으로 부름을 받고 입조하였는데 8월에 왜놈들이 침략할 조짐이 있기에 정언신(鄭彦信), 이일(李鎰), 신립(申砬) 등을 따라 주상 앞에 나아가서 전쟁에 대비할 문제들을 논하였다. 그 후 일본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 우리에게 통사(通使)할 것을 청하니 조정대신들이 허락하자는 쪽으로 의논이 정해져 가는데 공이 홀로 반론을 제기하면서 통사를 하여도 전쟁은 터지고 통사를 안 하여도 전쟁은 날 것이니 차라리 통하지 않고 작게 당하는 것이 낫다 하였다. 학봉이 이 소문을 듣고 시를 지어 주었으니 「동해에 노연자 있어, 그 사람 또한 바른 말 하였네. 많은 사람이 진을 높이는데, 너 홀로 주나라 섬겼네. 변설로 삼군을 물리치니, 무기 아닌 석자 혀였지. 나의 일편심도 천추에 그대와 같다네(東海有魯連 其人亦抗節 擧世欲宗秦 爾獨載周日 談笑却三軍 其機在寸說 我有一片心 千秋與君說)」하였다. 겨울에 사초(史草) 사건으로 파직되어 집에 돌아와서 주서절요(朱書節要)의 주()를 내시고 다음해 경인에 서용(敍用)으로 풀려나니 양사(兩司)에서 한결같이 고집하였으나 윤허하지 아니하고 5월에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로 발령하면서 옛 직책을 모두 겸직하게 하고 운학대성(韻學大成)을 하사하였다. 공이 항상 점필재 선생의 기절을 좋아하더니 점필재의 죽음을 원통하게 생각하여 지은 임백호(林白湖)의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에 발문(跋文)을 지었다. 그 내용이 당시로서는 모두 감추고 피하는 문건인데도 공이 분연히 발문을 하였다는 것은 공의 뜻이 강개함을 볼 수 있다 하겠다. 신묘에 다시 예문관봉교로 제수하고 특별히 경악관(經幄官)으로 초대하여 대학전서(大學全書)를 하사하였다.

 

  임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머물게 하고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을 제수하였다. 4월에 왜적이 우리의 주군(州郡)을 연파(連破)하고 우리의 군대는 소문만 듣고도 무너져 도망한다는 소식을 듣고 관찰사(觀察使) 류영립(柳永立)에게 말하기를 미리 우리 병사들을 정비하여 부성(府城)을 방비하는 것이 좋다 하였으나 관찰사가 듣지 않고 있다가 왜병이 철령(鐵嶺)을 넘어온 후에야 후회막급으로 후퇴하여 간신히 한 곳만을 보전하고 있는데 또다시 토적(土賊)들이 작난을 하여 군량을 도적맞고 나서야 처음으로 공의 계책에 경복하였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이달 29일에 주상께서 피난을 떠나시고 서울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전하여 듣고 공이 통곡을 하면서 주상이 욕을 보면 신하된 자 죽는 길 밖에 없다 하고 말을 타고 서쪽을 향하여 달렸으나 길이 막혀서 갈 수가 없었다. 5월에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과 칠계부원군(漆溪府院君) 윤탁연(尹卓然)이 왕자를 모시고 북쪽으로 오다가 안변부(安邊府)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공은 말을 달려 길가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두 분을 만나 그간의 고초를 서로 위로하였다. 선전관(宣傳官) 이규문(李奎文)은 공과는 동갑인데 검찰사(檢察使)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관서(關西)로부터 와서 공에게 말하기를 우리들은 노부모가 모두 남쪽에 계시는데 서쪽으로 주상을 찾아가야 하지만 길이 막혀 있으니 배를 하나 구하여 곧장 남으로 가자고 하기에 공이 만류하면서 말하기를 불가하다 지금 같이 국가가 판탕(板蕩)되는 날에 마땅히 주상을 먼저 하고 부모가 다음인 것이니 나는 설한령(雪寒嶺)을 넘어 서쪽으로 주상을 찾아갈 것이라 하였더니 규문(奎文)이 억지를 부리기에 공이 울면서 말하기를 오늘 나의 길이 주상을 다행히 찾아뵙고 생명을 부지한다면 부모는 얼마든지 뵈올 수 있는 날이 있을 것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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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무학정, 1일 경북궁도대회 단체전(이상배,허회림.채번식,한응복,박래익)과 개인전(한응복) 우승함...축하합니다.

 

  무학정(慶北弓道大會 團體戰,個人戰 '優勝' : 醴泉 武學亭) [記事] : 안동 민속축제기념 경북 궁도대회에서 예천 무학정(사두 허후길)이 단체전, 개인전 우승을 차지했다. 2017 101일 안동시 영락정에서 열린 경북궁도대회에는 40개 팀 2백여명이 참가해 기량을 겨뤘다. 이상배, 허회림, 채번식, 한응복, 박래익 등 5명이 참가한 단체전에서 우승을, 개인전 우승은 한응복, 개인전 3위는 허회림 선수가 차지하여 활의 고장 예천을 빛냈다. 이날 참가한 무학정 임원과 선수들은 예천세계활축제와 전국궁도대회 참여를 위해 홍보를 하기도 했다.(醴泉新聞 20171011() 11:2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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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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