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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932:황여일(4)(祝장예진,안중식,김능수)
작성자장병창 @ 2017.10.13 06:15:37

  예천의 자랑 4932 : 황여일(4)(附 장예진 동본1리부녀회장, 10일 토탈공예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 수상...축하합니다./ 용궁면 안중식(14)과 호명면 김능수(28), 전국한시백일장에 장원...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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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월에 왕자를 모시고 비를 맞으며 덕원부(德原府)로 향하는데 영흥부(永興府)에 도착하니 북쪽 오랑캐놈들이 삼수(三水)에서 난동을 한다기에 사상(使相) 윤공(尹公)이 공에게 묻기를 눈앞에 호()와 왜()가 함께 침노하여 배와 등으로 적을 맞이하게 되었으니 무슨 계책으로 대처하면 좋겠소 하니 공이 답하기를 모든 일에는 완급(緩急)을 알아서 선후를 정해야 하는 법 함흥(咸興)의 적은 심장의 병이요 삼수(三水)의 도적은 지엽적 근심이 라 하고 곧바로 초유문(招諭文)을 지어 사방의 관문(關門)의 관리들의 처소에 효유하였다. 때마침 국경인(鞠景人)이란 자가 왕자와 호종관(扈從官)들을 사로잡아 적에게 항복하였다. 공은 크게 통탄하고 원망하면서 의병 이성임(李聖任)에게 밀통하면서 때에 따라 계책을 세우고 회령(會寧) 유생 신세준(申世俊) 등께 장사를 규합하여 국경인과 연수(連守) 등을 죽이게 하였으니 당시 윤공은 류영립(柳永立)을 대신하여 신임 감사가 되어 있었다. 윤공이 처음부터 공을 잘 아는 터라 주상께 고하고 종사관(從事官)으로 추천하여 작전에 참모를 하게 하니 공이 소모문(召募文)을 사방으로 돌려 백성을 보호하고 적을 막는데 많은 공을 세우니 윤공이 더욱 소중하게 생각하였다.

 

  토적 진대유(陳大猷)는 함흥의 건달배로 자기 딸을 두목에게 바치니 그 형세가 사뭇 감당하기 어려웠다. 공이 진()을 잘 아는 사람에게 부탁하여 달래 보았으나 소용이 없기에 김수준(金秀俊) 등을 특공대로 파견하여 진을 잡아 사상부(使相府)로 압송하였다. 처음에 도사(都使) 박순남(朴順男)이 진()의 아들 계수(桂樹)를 아장(亞將)으로 삼고 매우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공이 순남에게 말하기를 그 사람은 불순한 기미가 보이니 후에 반드시 좋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이라 하였는데 지금 와서 그 말이 사실이 되자 공의 선견지명에 모두 감복하였다. 8월에 행재소(行在所)와 연락이 되어 공이 눈물로 글을 지어 병사들에게 보이니 모두 조금씩 안심하기 시작하였다. 10월에 사상(使相) 윤공(尹公)이 대군을 출동하고자 남루(南樓)에 올라가 군사를 조발하는데 공이 작전과 법령을 발표하니 모든 장군들이 명을 따르지 않는 자 없었다. 계사년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 당도하니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제수하였고 5월에 공으로 하여금 해서(海西)에서 황장목(黃腸木)을 감시하게 하니 주상께서 직접 명하신 것이다. 6월에 병조정랑에 옮겨지고 지제교춘추관기주관(知製敎春秋館記注官)을 겸하게 하였다. 7월에 근친(覲親)을 하고 8월에 행재소에 돌아와서 10월에 대가(大駕)를 모시고 서울에 입성하였다. 갑오에 다시 형조정랑이 되었고 3월에 독운사(督運使)에 차출되어 명나라 장수 이영춘(李榮春)과 같이 화전(火戰)의 비방(秘方)을 논하여 그 방법을 자세하게 터득한 후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보고하고 또 글을 올려 군량미 쌓아둔 곳에 방어하는 방법 등을 조목조목 논하니 분명하고 확실한 의논이었다. 8월에 다시 병조정랑에 발령되고 현재 직함을 모두 겸임하게 하였다. 9월에는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장계를 올려 말하기를 변방의 형세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어서 작전상황이 시시각각 변하고 있기 때문에 문무를 겸비한 군사(軍師)가 필요로 하니 공을 종사관(從事官)으로 보내 달라 요청하여 다음 해 을미에 진주(晉州)의 도원수 막하로 부임하였다. 공은 부임하는 즉시 갈점산성(葛岾山城)에 올라가 지형지물을 살펴보고 나서 작전을 의논하니 권 원수가 크게 칭찬하였다. 병신에 세자익위사사어(世子翊衛司司禦)에 제수하고 겨울에 다시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고 또 다시 권 원수 막하로 가서 작전을 도와주었다. 12월에 명나라 장수 양경리(楊經理)와 마제독(麻提督) 등이 권 원수와 같이 합동으로 울산(蔚山)의 적을 토벌하는데 비바람이 몹시 춥고 눈까지 오고 있었다. 연합군이 진격하여 외채(外寨)를 탈환하니 적이 내성으로 도망가서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여러 무대가 성 밑에 나누어 진을 쳐서 성을 포위한지 십여 일이 되도록 적이 나오지 않았다. 공이 밤낮으로 맨발 맨손으로 고생하다 보니 수족이 모두 동상으로 얼어 터져도 조금도 쉬거나 풀어질 줄 몰랐다. 다음해 정유에 숭문원교리(崇文院校理)가 되었고 무술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에 제수되었으나 어버이의 노환으로 사양하였고 다시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승진하여 세자시강필선(世子侍講院弼善)을 겸하였고 다시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로 장령을 겸임하고 사간원헌납(司諫院獻納)으로 전보되었다. 그때 명나라 지원군 작전참모인 정응태(丁應泰)가 우리 주상을 본국에 무함하였는데 그 말이 너무 망칙하여 나라 안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리하여 조신을 극히 엄선하여 무고함을 밝히도록 명하자 공은 정부사(正副使)와 같이 밤을 도와 달려가서 다음해 기해 2월에 장계를 지어 올리고 4월에 복명을 하니 장악원정(掌樂院正)에 배하였고, 경자에는 집에 와서 있다가 의인왕후(懿仁王侯)의 부고를 받고 군청(郡廳) 빈소에 가서 성복(成服)을 하였다. 신축에는 울진 박곡(朴谷)에 별장을 짓고 그 곳에서 글을 읽으니 그 마을 이름이 고박(古朴)함을 좋아해서였다. 다시 고을 사람들과 모임을 만들어 남전(藍田) 여씨(呂氏)의 향약(鄕約)을 시행하기도 하였다. 가을에 예천(醴泉)군수로 발령되어 다음해 임인에 감사(監司)인 벽오(碧梧) 이공(李公)이 안동부 소속 수령들을 모아 잔치를 베푸니 공도 모당(慕堂) 홍공(洪公)과 같이 참석하여 모양을 그리고 계축()을 만들어 돌아왔다. 6월에 김부인(金夫人)의 상을 당하였다. 계묘년 봄에 벼슬을 버리고 집에 돌아와서 있다가 다음해 갑진에 이부인(李夫人)을 맞이하였고 금성(金城)현령에 발령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열성실록낭청(列聖實錄郎廳)으로 차출되어 갔다. 여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番)과 양유년(梁有年)이 나와서 문학이 훌륭한 대신들을 선발하여 한강에서 뱃놀이를 하는데 공도 참여하였고 얼마 후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조금 후에 사헌부 장령으로 다시 발령되어 중학교수(中學敎授)를 겸하게 하였고 7월에 감시(監試)의 시관(試官)에 차출되어 동당시(東堂試)의 시관(試官)이 되었고 다시 복시의 시관도 되었다. 영천(永川)군수로 발령되니 토적(土賊)들이 부임해 온 다는 소문을 듣고 사방으로 달아나서 치적이 훌륭하였다. 정미에는 포은(圃隱)선생의 문집을 임고서원(臨皐書院)에서 출간하였고 7월에는 선무원종이등훈(宣武原從二等勳)에 책록되고 철권(鐵券)을 하사 받았다. 무신 2월에 선조(宣祖)대왕께서 승하하시니 더 이상 벼슬에 뜻이 없었는데 6월에 친병(親病)으로 사표를 던지고 수락을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돌아왔다. 9월에 선친상(先親喪)을 당하고 10월에 또 자친상(慈親喪)을 당하여 하나 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를 준하고 여묘(廬墓)3년 하면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삭망(朔望)에는 꼭 집에 와서 궤연()에 전()을 올렸다. 경술에 선생이 55세니 백사(白沙) 이공(李公)이 정권을 장악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글을 올려 관동의 여건과 정치적 고질들을 상세히 보고하니 상당 부분이 수용되어 해결되었다. 신해에는 아들 중윤(中允)을 보내 회재(晦齋)와 퇴계(退溪) 두 선생이 정인홍(鄭仁弘)의 무함(誣陷)을 입은 것을 해명하게 하였고 10월에 길주(吉州)목사에 제수되고 통정(通政)으로 승진하였으나 사양하였다. 임자에 창원부사(昌原府使)가 되었는데 화교(華僑)의 상인들이 자주 창원지경에서 도적의 공격을 받았다고 고발해 오기에 공이 색출하여 다시는 못하게 하니 영남지방의 모든 화교들이 송덕비(頌德碑)를 세워 주었다.

 

  계축에 집에 돌아와 춘추연의(春秋演義)를 짓고 또 주역연의(周易演義)도 지었다. 을묘에 동래부사(東萊府使)에 추천되어 부임하니 당시 큰 난리를 치룬 뒤라 백성이 사방으로 흩어져 돌아오지 못하고 있고 농지가 모두 황폐하여 있는지라 공이 백성들의 마음을 정하는데 주력하고 사방으로 흩어진 백성을 모아오며 학자를 찾아서 백성들을 훈도하는 임무를 수여하고 공의 봉급을 모두 나누어 농사와 공부에 열중하니 고을 인심이 크게 좋아지고 왜인(倭人)까지도 경복하였다. 병진에 시를 지어 집으로 돌아갈 뜻을 비치니 그 해가 바로 환갑이었다. 정사에 조신(朝臣)들이 동서(東西)로 나누어 정쟁이 심화되자 탄식하며 시를 지으니 「소부의 들리는 귀보다 차라리 갈관의 안들리는 귀가 좋겠고 기자처럼 종이 되기보다 차라리 집이나 지키는 일꾼이 낫겠네()」하였다. 임기도 끝이 나고 하여 사표를 내고 집으로 돌아왔더니 동래(東萊) 백성들이 청원을 올려 일년만이라도 더 있게 하여 주십시요 하니 나라에서 1년을 연기하여 주기에 사양하다가 부득이 1년을 더 있다가 무오 8월에 마치고 집에 와서 다시는 벼슬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도교시(渡橋詩)를 지어 뜻을 보였다. 9월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배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여 주었으나 공이 말하기를 새들도 마시고 쪼는 것이 모두 때가 있는 법 무엇 때문에 허둥댈 필요가 있겠는가 하고 이백(李白)의 백수와송운(白首臥松雲)이란 시구(詩句)를 취하여 앞으로 은퇴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을미에는 불이설(不移說)을 지어 자제들에게 보이고 벼슬에 뜻을 빼앗겨서 마음공부가 독실하지 못함을 후회하였다. 경신에 아들 중윤을 진주특사(陳奏特使)로 중국에 보내고 가을에 대신들이 영백(嶺伯)으로 추천하였으나 시로써 사양하기를 「그대들은 번거롭게 인간의 부침을 말하지 마시오. 이 몸은 본래부터 강호에 사는 몸이라오(煩君莫道升沈事 本是江湖自在身)」하고 마침내 나가지 않으니 당시의 공론이 높이 평가하였다. 임술에 중윤(中允)이 승지(承旨)가 되어 근친(覲親)을 왔다. 몇 달 전에 오랑캐놈들이 철기(鐵騎) 천여기로 압록강을 건너와 용천((龍川)까지 노략질을 하니 계책을 올리는 자가 말하기를 조금 천천히 대처하자기에 중윤이 계()를 올려 말하기를 우선 담략이 있는 자를 골라 정탐을 하게하고 한편으로 지연작전을 쓰는 것이 좋겠다 하였더니 박승종(朴承宗)이 큰 소리로 황모가 화친을 주장한다 하였다. 공이 중윤을 보는 자리에서 너의 말은 참으로 주상이 적당하게 묻는 것을 신하된 자가 꼭 맞는 대답을 하였지만 언젠가 말썽의 소지가 될 것이라 하더니 과연 다음해 시세 사람들의 농간의 대상이 되었으니 공의 세상 보는 안목이 출중한 것을 이러한 유에서 엿볼 수 있다 하겠다.

 

  4 2일에 병이 심하여 가인(家人)을 모아 훈계를 끝으로 자리를 바로 하고 서거하시니 향년이 67세이시다. 부음이 들리자 공훈(功勳)으로 위로하는 차원에서 가선대부이조참판(嘉善大夫吏曹參判)을 추증하고 겸하여 동지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同知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世子左副賓客) 등을 추증하였다. 이해 813일에 군의 서쪽 오대산(五台山) 간좌(艮坐)에 장사하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조문하러 오는 자가 한두 고을이 아니었다. 농부에서 하인까지 산역(山役)을 돕지 않은 자 없었고 제문과 만장(輓章)이 수없이 많았지만 병화에 모두 불타고 단지 월사(月沙) 이공 백주(白洲) 이공 청계(淸溪) 오공 등 제공의 글 몇 편만 집에서 전하고 있을 뿐이다. 공의 품성이 탁영하여 보통 사람과는 많이 다르고 포부는 광달(曠達)하여 구애됨이 없었으며 준정(雋正)한 기량과 굉원(宏遠)한 식견이 하해와 같아서 얼마라고 헤아릴 수가 없다. 일찍이 가정의 교육으로 시례(詩禮)에 습성이 되었고 나중에는 사우(師友)들을 좇아 의리의 대개(大槪)와 쇄소응대(灑掃應對)에서부터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격치(治國格致)의 요체에까지 모두 실지 행동으로 깨달아 얻었으며 심학도(心學圖) 및 동서명(東西銘) 등을 좌우에 붙여두고 항상 보면서 성찰의 자료로 하였다. 문장에 있어서는 혼후방일(渾厚放溢)하여 유속(流俗)의 얕은 재치와는 비교할 수 없다 하겠다. 소시에는 양봉래(楊蓬萊), 이아계(李鵝溪), 김주은(金酒隱) 제공들이 모두 외우(畏友)로 칭하셨고 윤월정(尹月汀), 류서애(柳西厓), 이한음(李漢陰), 김학봉(金鶴峯), 신상촌(申象村), 김동강(金東岡), 정약포(鄭藥圃), 서약봉(徐藥峯), 정한강(鄭寒岡), 한유천(韓柳川), 이월사(李月沙), 장여헌(張旅軒), 홍만전(洪晩全), 송호봉(宋壺峯), 홍모당(洪慕堂), 이지봉(李芝峯), 우리 백사공(白沙公) 등 여러 선배들이 서로 더불어 연원을 강구하고 마탁상자하여 혹은 시를 주고받았고 혹은 편지들이 오고 갔다. 공이 과거로 출사하여 나라일로 30여년 한결같이 충근(忠勤)으로 일관하였고 국방에 보좌할 때는 죽음을 각오하였으며 명을 받고 일에 임하면 분명하고 명쾌하게 칼로 짜르듯 하여 나라를 편안하게 하였고 나라의 억울한 무함(誣陷)도 시원하게 해결하였으니 이것이 공의 대개이다.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 같은 것은 사람들이 모두 피하고 꺼리는 문건인데 공은 능히 발문을 지었고 조정이 붕당으로 갈라져 그 화를 피하기 어려웠는데 공은 그 기미를 미리 보고 물러나서 한 점의 누도 없으니 그 마음은 얼음처럼 차고 투명하여 구름을 헤치고 만리창공(萬里蒼空)을 보는 것 같았으며 양친을 뜻으로 봉양하면서 육순의 나이에도 친히 돌보시며 성()과 경()을 극진히 하였기에 사람들이 모두 효자라 칭하니 창주공(滄洲公)에게 그렇게 하셨다.

 

  공이 처음에는 호를 하담(霞潭)이라 부르다가 해월(海月)로 하였고 만년에는 다시 만귀(晩歸)라 하였으며 좋은 천석(泉石)을 찾아 여생을 보내면서 평민의 의관으로 촌로(村老)들과 어울려 농담도 하고 술도 마시니 아무도 조정대신임을 알지 못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진퇴소장(進退消長)의 이치를 살펴서 벼슬할 수 있을 때 나가고 불가면 물러난다 하였으니 공이야 말로 실천하신 분이라 할 수 있다. 후에 고을 사람들이 공을 명계서원(明溪書院)에 배향하여 추모하고 있다. 공이 평일 저술한 글들이 모두 불에 타고 남은 것이 시() 몇 권 부() · () · () · () · () · () · () · 잡저(雜著) 등이 2, 행장(行狀) · 묘지(墓誌) 및 은사일기() 3권 등이 발간되어 세상에 전하고 있다. ()는 증정부인(贈貞夫人) 의성김씨(義城金氏)니 찰방(察訪) 수일(守一)의 따님이며 이조판서 진()의 손으로 처음에 안동 수곡(水谷)에 장사하였다가 후에 다시 오대산(五台山)으로 이장하였고, 유처취처(有妻娶妻)인 한양최씨(漢陽崔氏)는 병사(兵使) ()의 따님이니 묘는 옥락동(玉落洞)에 모셨고, 계배(繼配)에 정부인 완산이씨(完山李氏)니 덕원도정(德原都正) ()의 따님이요 경흥군 수방(秀芳)의 손이니 묘는 계하(階下)에 부장하였는데 단아하고 현숙하며 마음이 곱고 자애하였다. 8 2녀를 두었으니 장남은 중윤(中允)이니 승지요, 다음은 중직(中直)이니 종사랑(從仕郞)이요, 중민(中敏)이니 승사랑(承仕郞)이요, 중헌(中憲)이니 선교랑(宣敎郞)이요, 중순(中順)이니 종사랑이요, 중경(中敬)이니 장사랑(將仕郞)이요, 중원(中遠)이니 장사랑이요, 중량(中亮)이니 무과(武科)이다. 여는 이영명(李榮明) · 이유필(李有馝)에게 출가하였다. 중윤이 중헌의 아들 석래(石來)를 입사하였고 유자(幼子)에 석우(石友)와 석심(石心)이요, 두 딸은 군수 조정융(曹廷融)과 사인 정기덕(鄭基德)에게 출가하였다. 석래의 자에 규()와 기()와 근()이요, 규의 자에 세중(世重)과 세항(世恒)과 세태(世泰)니 첨추(僉樞), 세중의 자에 상하(相夏)와 헌하(憲夏)와 경하(景夏), 상하의 자에 선()이요, 선의 자에 치문(致文)과 치응(致應)이요, 치문의 자에 면구(冕九)와 진구(振九)이다. 중직의 자에 석립(石立)이요, 석립의 자에 재호(載浩), 재호의 자에 익한(翼漢)이요, 익한의 자에 창하(昌夏)이다. 중민의 자에 석흥(石興)이요 두 딸은 정수석(鄭綏碩) · 박서규(朴瑞奎)에게 출가하였다. 석흥의 자에 박()과 배(), 박의 자에 세겸(世謙)이요, 세겸의 자에 운하(運夏)이다. 중헌의 자에 석래(石來)니 백부에게 출계하고, 석평(石平)이니 증사복시정(贈司僕寺正)이요, 석붕(石朋)이요, 석보(石寶)니 호군(護軍)이요, 석령(石齡)이요, 여는 권덕여(權德輿이문윤(李文胤)에게 출가하였다. 석평의 자에 숙()이니 증좌승지(贈左承旨), 승지의 자에 세원(世元)이니 증호조참판(贈戶曹參判)이요, 참판의 자에 수하(受夏)니 동중추(同中樞)이다. 중순의 자에 석로(石老), 두 딸은 사인 이영(李英)과 생원 변지두(邊之斗)에게 출가하였다. 석로의 자에 사자(嗣子) 옥이요, 옥의 자에 세용(世鎔)이요, 세석(世錫)이요, 세용의 자에 승하(承夏)요 시하(始夏)이다. 중경의 자에 석운(石云)이요 석금(石今)이요 여는 사인 박소(朴沼)에게 출가하였다. 석운의 자에 해()요 증()이요, 해의 자에 세빈()이요 세흠(世欽)이요 세탁(世鐸)이요, 세빈의 자에 명하(鳴夏)요 중하(重夏)이다. 중원의 자에 석삼(石三)이요 석미(石眉)요 석기(石奇), 석삼의 자에 호()요 보(土保), 호의 자에 세창(世昌)이요, 세창의 자에 일하(一夏)이다. 중량의 사자는 석진(石眞)이요, 석진의 자에 균()이요, 균의 자에 세억(世億)이요, 세억의 자에 일하(一夏)요 재하(再夏)이다. 내외자손이 번다하여 못다 기록하겠다.

 

  내가 우리 선조 백사공(白沙公)께서 변무사(辨誣使)로 가셨을 때 일기를 살펴보니 정문(呈文)을 매일 같이 올려도 아무 소식이 없어서 조정에서는 공론이 흉흉하고 유언비어가 난무하고 있었는데 해월공이 우리가 소상서(蕭尙書)를 직접 찾아가서 애걸복걸하여 소상서의 의중을 알아보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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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예진 동본1리부녀회장, 10일 토탈공예 전국대회에서 최우수상 수상...축하합니다.

 

  장예진(장예진 支部長 토탈工藝 最優秀賞) [記事] : 대한여성능력개발협회 예천문경지부 장예진(58·예천읍 동본1리 부녀회장) 지부장이 2017 1010일 서울 국회의사당 전시실에서 개최된 ‘2017년 제1 DIY 토탈공예 전국대회에서 전체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이번 대회는 이용주 국회의원 및 대한민국 여성능력개발협회가 공동 주최하여 4차 산업혁명시대를 대비한 여성들의 경쟁력 함양과 일자리 창출을 위해 마련됐다. 예천문경지부 대표로 참가한 장예진 지부장은 내 마음에 소리를 그리다주제로 캘리그라피 50점을 출품해 전체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장예진 지부장은 예천읍에서 핑크풍선아트를 운영하며 학교, 복지회관 등에서 공예 강의를 하고 있다.(醴泉新聞 20171012() 09:2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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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궁면 안중식(14)과 호명면 김능수(28), 전국한시백일장에 장원...축하합니다.

 

  김능수와 안중식(김능수,안중식 氏 全國漢詩白日場 壯元) [記事]  호명면 김능수 씨가 2017 928일 열린 제36회 봉화청량문화제 전국한시백일장(시제 '축백두대간봉화수목원개장')에서 영예의 장원을 수상했다. 이에 앞서 9 14일 열린 문경전국한시백일장에서 용궁면 안중식 씨가 장원(시제 '문경시중부내륙권교통중심지부각')을 차지했다.(醴泉新聞 20171012() 15: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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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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