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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933:황여일(5)
작성자장병창 @ 2017.10.14 06:14:29

  예천의 자랑 4933 : 황여일(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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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음날 백사공이 이 일은 정말 중대사이다 하니 월사공(月沙公)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였고 이역관(李譯官)은 이루지도 못하고 해만 자초한다 하였고 나는 이루지 못한다 해도 해는 없을 것이라 생각하는데 서장관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해월공은 월사의 생각과 같다 하였다. 그리하여 병부로 소상서를 찾아가 정문을 올리고 진정을 하였더니 소상서 대답이 천자의 뜻이 전의(前議)와는 달라서 후의(後議)에 인준할 것이니 전의는 감히 품할 수 없다 하였다. 우리들이 여관에 돌아와서 백사공이 말하기를 이번의 병부로 찾아간 성과는 해월공이 수공(首功)이라 하였다. ! 공이 나의 선조 백사공과는 동년동월 생으로 날자만 공이 6일이 후이고 졸년 또한 백사공보다 4년 이후이다. 그런데 나라 사정이 날로 잘못되어 가서 이이첨(李爾瞻) 정인홍(鄭仁弘) 등이 안으로 붕당을 만들고 오랑캐와 왜놈들이 밖에서 엿보고 있기 때문에 나라의 위험이 일발(一髮)에 처하게 되어 있고 조정대신들이 화를 당하여 있었지만 오직 공만은 향산(鄕山)에 높이 누워 정치판에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으니 그 지조와 절개는 임종(林宗)의 세상과 격론하지 않는 것에 비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고 설방(薛方)의 깊은 산속에 숨어사는 것과 방불하다 하겠으니 내가 어찌 한마디 말을 아껴 선의(先誼)의 중함을 저버릴 수 있으리요. 드디어 명()을 하니 명에 왈()// 찬란하던 선조 시절에, 해월이란 신하 있었네./ 평해황씨(平海黃氏)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명족(名族)이지./ 덕망을 많이 쌓아, 일찍이 벼슬길에 나갔네./ 암행어사에도 발탁되었고, 호당(湖堂)에도 봉직하였지./ 임진년 왜란에는 나라가 위험해서./ 주상이 파천하고, 종사가 일발에 처했다네./ 병막(兵幕)에서 군사(軍師)의 임무로/ 말을 달려 급하게 뛰었지./ 백성을 달래기도 하고, 사족의 기율도 잡았다네./ 마침내 회복이 되어도, 그 공을 자랑하지 않았네./ 나라의 불행함이 있을 때, 주상께서 너가 적임이라 하였지./ 멀리 명나라에 가서, 심력(心力)을 다하여 협찬하였다네./ 늦게 정랑(正郞)에 오르니, 사류(士類)가 모두 감탄하였지./ 공이야 아무 꺼림낌없이, 바다가 좋다고 떠나셨지./ 누대짓고 국화심고, 정자나무에 맑은 바람이네./ 좋은 벼슬도 유혹할 수 없으니, 시끄러운 무함이 통할리 없지./ 바위산 같은 그 기품이여, 금강산의 기경이로다./ 숙도(叔度)의 문장에 왕약용(汪若容)의 충성이요./ 황정견(黃庭堅)의 글씨에 방옹의 시로다./ 시는 호사(豪士)의 무기요, ()는 대부(大夫)의 홀()이더라./ 높은 덕을 추앙함이여, 농인도 천인도 두루하였고./ 충성하고 또 현명함이여, 전생전귀(全生全歸)의 몸이로다./ 초손(肖孫)이 세의(世誼)를 찾아서, 나에게 명을 구하네./ 이 노래 지어 새김이여, 높은 저 비석이로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중추부사 원임규장각직제학(大匡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原任奎章閣直提學) 월성(月城) 이유원((李裕元) ()(daum 2010)

 

  황여일 :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62)| 조선비결역사/ coligny | 2004.06.09 15:53/ //cafe.daum.net/coligny/JGz1/67/ 해월(海月) 선생은 조선 중기[1556(병진)1622(임술), 명종 11∼광해 14]의 문신으로, ()가 여일(汝一)이며, ()가 회원(會元),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또한 호가 처음에는 하담(霞潭), 해월(海月), 매월(梅月)이며, 후에는 만귀(晩歸)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사동리(沙銅里) 생가의 연원(淵源)을 말한다면, 황씨(黃氏)의 시조가 되시는 락()이 중국의 강하(江夏)에서 우리나라 강원도(현재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의 월송정 북쪽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다가, 충절공(忠節公) 황서(黃瑞)가 군()의 북쪽에 있는 정명리(正明里)로 이주(移住)하여 살아왔었다. 그런데 해월(海月) 선생의 아버지되시는 창주공(滄州公), 사동리(沙銅里)의 사직(司直) 영덕정씨(盈德鄭氏) 정창국(鄭昌國)의 여식과 혼인하게 됨으로써, 사동리에 터를 마련하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해월(海月) 선생은 명종(明宗) 11(1556: 丙辰年) 10 21일 병오일 사시에 사동리(沙銅里: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2세 때부터 풍골이 뛰어나, 사람들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비범한 아이라고 하였으며, 5세 때부터 비로소 독서를 시작하였다. 8세 때에는 선생은 사동리 집에서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정명리(正明里)에 계신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선생에게 가서 수업을 받았다. 해월(海月) 선생은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외우고 그 이치를 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가르치는 대해(大海) 선생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아버지인 창주공(滄州公)"이 아이가 틀림없이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당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형제들인,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과 그의 형이 되는 군수인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선생이 찾아와서, 극찬을 하며 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해월(海月) 선생의 집안은 워낙에 가난하여 해월(海月) 선생의 어머니는, 10여 리씩 떨어진 대해(大海) 선생의 집으로 어린 아들이 매일 수업받으러 다니는데, 밥을 해서 먹여 보내지 못하고 조석으로 멀건 죽을 먹여 보내니 매우 가슴 아파하며, 사흘에 하루라도 진하게 쑨 죽이라도 먹여 보냈으면 하며,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1569(선조 2, 己巳)년 선생 14세 때에, 처음으로 간성시(杆城試) 진사시(進士試)에 진주죽서루(眞珠竹西樓)에 대한 시를 지어 장원을 하였는데, 그 당시 강릉 부사였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서 관청에 초대하였으며, 그를 칭찬하는 시를 한 수 남겼다. 1572(선조 8, 乙亥)5, 나이 20세 때에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의 여식과 혼인을 하였다.

 

  또한 가을에는 당시의 경상도 감사가, 안동부(安東府)에 와서 백일장을 열었다. 이때 선생은 동상(東床)에 있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어찌하여 시험장에 나가지 않느냐고 하자, 하는 수없이 해월(海月) 선생은 시험장에 입장하였던 것이다. 다른 과거 시험보는 선비들은 붓을 들어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선생은 코를 골며 그 옆에서 잠을 자다, 해가 기울어 시험장이 파할 무렵에서야 앞의 병풍이 쳐 있는 곳으로 나아가, 단번에 붓을 들어 쓰고는 그대로 제출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 글이 바로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에 있는, 치술령부(○述嶺賦)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이 향해진사시(鄕解進士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며, 당시 시험관은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생각하였고, 그의 이러한 일이 크게 소문이 났었던 것이다. 이때 선생은 약관(弱冠)의 나이였으며, 그때 그가 남긴 치술령부(○述嶺賦)는 잘 알려진 소문난 글인 것이다. 1576(선조 9, 丙子) 2월에 진사복시에서 3등을 하였으며, 7월에는 구담부(龜潭賦)를 썼다. 1577(선조 10, 丁丑)년 비로소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성균관에서 백호(白湖) 임제(林悌)와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더불어 시와 문장으로 일대(一代)를 구가(驅駕)하였다고 한다. 1585(선조 18, 乙酉)년 봄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옥계서당(玉溪書堂)을 찾아 배()를 올렸다. 같은 해 10 16일에 별시 을과(乙科) 1등으로 합격하여, 예문관검열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 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1586(선조 19, 丙戌)년 정월에 휴가를 받아 부모님을 찾아뵙고, 안동 예안(宣城)으로 가서 퇴계(退溪) 선생 유고(遺稿)의 교정과 편집을 보았으며, 10월에는 사가호당(賜暇湖堂)에 들어갔던 것이다. (선례로 보아 7품 이하의 벼슬로는 처음이라고 함) 1587(선조 20,丁亥) 9월에 예문관 대교가 되었으며, 1588(선조 21, 戊子)년 정월에 임금이 불러 편전에서 야간강의를 여러 차례 했으며, 이 때에는 선비들이 서로 의심하고 서로가 배반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혼란스러웠는데, 류성룡(柳成龍) 선생도 오랫동안 수습을 하지 못하였었다.

 

  그 때 해월(海月) 선생을 불러서는, 어찌하면 화목하게 분란없이 안정케 할 수가 있을까 하며 해월(海月) 선생의 의견을 듣고서, 류성룡(柳成龍) 선생은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4월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는데, 현판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썼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상촌(象村) 신흠(申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약포(藥圃) 정탁(鄭琢), 지봉(芝峯) 이수광(李○光) 선생 등등 수많은 인사들이 찬양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또한 7월에는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며,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내려갔었다. 1589(선조 22, 己丑) 8월에 선조 임금이 불러 선정전에 입시(入侍)하여 여러 차례 야간강의를 하였다. 신묘(辛卯)일 이 날은 선정전에 입시(入侍)하여 병사(兵事)에 대하여 논했다. 이때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려는 조짐이 있어,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들였는데, 이때 정언신(鄭彦信), 이일(李鎰), 신립(申砬) 등을 만나 보았다.

 

  11월에는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는 통신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 중론이 다 왜국에 사신을 보내자는 데로 기울어지자, 선생 홀로 불가함을 조목조목 들어서 반대하여 말하기를, 「양국이 국교가 열리어도 난은 일어날 것이며, 열리지 않아도 난은 일어날 것인데, 차라리 국교를 끊고서 난에 대비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抗言曰 通亦發 不通亦發 莫如不通之爲少自取也)」 라고 하였다. 그때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그를 가리켜, 동해의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시를 지어주며 격려했다. ()에 이르기를,

 

  동해유로연(東海有魯連) 기인역항절(其人亦抗節)/ 거세욕종진(擧世欲宗秦) 이독대주일(爾獨戴周日)/ 담소각삼군(談笑却三軍) 기기재촌설(其機在寸舌)/ 아유일편심(我有一片心) 천추여군설(千秋與君說)/ 동해(東海: 조선)에도 노중련(魯仲連)이 있는데,/ 그 사람 또한 절조를 지켜 굽히지 않는(抗節) 사람이로다./ 온 세상이 다 진()나라를 (황제의 나라라고) 높이려 하였으며,/ 그대 홀로(해월 선생) 일본과 친하는 것을 탄식하며(戴周日),/ 담소(談笑)하며 삼군(三軍: 대군)을 물리치는데,/ 그 기지가 한치의 혀끝(寸舌)에 있구나./ 나 또한 한 조각 붉은 마음 있어,/ 천추(千秋)에 그대의 뜻(君說)과 함께 하노라.// 노중련(魯仲連)은 춘추전국시대의 제()나라 사람으로, 기발하고도 웅대한 책략(策略)을 잘 구사하였으나, 고상한 절개를 지닌 분으로 세속을 초탈하여 전혀 벼슬할 뜻이 없는 분이었다. 그가 일찍이 조()나라를 두루 유람할 때, 마침 진()나라 왕은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조나라 군사 약 40만여(萬餘) 명을 전멸시키고, 동쪽으로 추격하여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에워싸니 조()나라는 급박한 상황이 되었으나, 제후국들은 진()이 두려워 감히 구원군을 출동시키지 못하였다. ()나라 왕이 장군 진비(晉鄙)를 시켜 조()나라를 구원케 하였으나, 역시 진()나라의 군대를 두려워한 나머지 탕음(蕩陰: 河南省)에 머물러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자 위() 왕은 객장군(客將軍: 타국 출신의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시켜, 몰래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들어가 조()나라 왕의 숙부인 평원군(平原君)을 통해 조() 왕에게 이렇게 건의하게 했다. 「진()나라는 예전의 제()나라와 세력을 다투어 제왕()을 칭하다가 얼마 뒤에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제()나라는 점점 쇠약해지고 이제는 진()나라만이 우뚝 강대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진()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한 것은 반드시 한단(邯鄲)을 차지하고픈 욕심에서가 아니라 다시 제왕()의 칭호를 차지하고 싶기 때문이니 만약 조()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진()나라의 소왕(昭王)을 높여 제왕()이라고 칭한다면 진()왕은 기뻐서 철수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노중련(魯仲連)은 만나기를 꺼려하는 신원연(新垣衍)을 만나 말하기를, 「권모술수로 군사를 부리고 백성을 노예처럼 다루는 진() 왕이 만일 제멋대로 제왕()이 되어 그릇된 정치를 천하에 편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겠습니다. () 왕의 백성이 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진() 왕이 제왕()이라 칭하게 되었을 경우 생기는 해로움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를, ()나라 주왕(紂王) 때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주문왕(周文王)이 모두 주()왕의 삼공(三公)이었는데, 구후(九侯)가 미인인 그의 딸을 주()왕에게 바치자 주()왕은 그녀가 못생겼다고 하여 구후(九侯)를 소금에 절여 죽이자, 악후(鄂侯)가 이를 만류하니 그를 또한 포를 떠서 죽이고, 이 소식을 들은 주() 문왕(文王)이 탄식을 하자 그를 유리(?)에 있는 감옥에 100일이나 가두었다가 그를 죽이려한 역사적인 사실 등등을 하나하나 들어 설명하고, 결국에는 신연원(新垣衍) 본인에게도 해가 미치게 될 것임을 말하자, 이에 신원연(新垣衍)은 그제서야 일어나 절하고서 사과하였던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진()나라 장군은 곧 군사를 50여리나 물렸고, 또한 위() 나라의 공자(公子: 信陵君) 무기(無忌)가 조()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명(君命)이라 속이고 위()나라 장수 진비(晉鄙)의 군대를 탈취하여, ()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므로 진()나라 군대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던 것이다. 이에 조()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노중련(魯仲連)에게 봉작(封爵)을 세 번씩이나 주고자 했으나, 노중련(魯仲連)은 끝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평원군(平原君)은 주연을 열어 천금(千金)을 바치며 장수(長壽)를 축원하니 노중련(魯仲連)은 웃으며, 「천하의 선비가 귀한 존재로 불리워지는 것은 남을 위해 우환을 물리치고 분쟁을 풀어주며 근심을 해결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는 까닭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선비도 장사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라며 거절했다. 평원군(平原君)과 작별하고 떠난 후 평생토록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 후 이십여 년이 지나 연()나라의 장군이 제()나라의 요성(聊城: 山東省)을 점령했는데, 요성의 어떤 사람이 연()나라 왕에게 연나라 장군을 참언(讒言)했다. 이에 참소(讒訴)를 당한 연()나라 장수가 주살될 것을 두려워 요성(聊城: 산동성)에서 농성한 채 감히 연()나라로 귀국도 못하고 굳게 지키니, ()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일년 이상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때 노중련(魯仲連)이 화복(禍福)을 논한 긴 편지를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연()나라 장군에게 보냈다. ()나라 장군은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사흘 동안이나 울면서 갈등으로 밤낮을 지새다가, 결국 탄식하다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요성(聊城)안은 혼란해졌고 제()나라 장군 전단(田單)은 마침내 요성(聊城)을 함락시켰다. 전단(田單)은 제()나라로 돌아와서 왕에게 노중련(魯仲連)의 공적을 아뢰니, ()나라 왕은 노중련(魯仲連)에게 벼슬을 내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노중련(魯仲連)은 바닷가로 몸을 피해 달아나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부귀를 누리는 몸이 되어 남에게 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세상을 가볍게 보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리라.

 

  1590(선조 23, 庚寅) 5월에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가 되었다. 선생은 백호(白湖) 임제(林悌)와 매우 절친한 사이여서, 하루는 그의 집을 방문하니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무슨 글을 쓰고 있다가 선생을 보고는 그 책을 싸서 감추자, 선생이 정색을 하고 무슨 일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감추어야만 하느냐고 하자, 임공(林公) 역시 해월(海月) 선생이 크게 절조가 있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그 책을 보여 주었는데, 그 책 표지의 제목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이었다. 그때 선생은 그 책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붓을 들어 발문을 써서 주었으며, 그에 대한 발문과 시도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있다. 10월에는 한양최씨(漢陽崔氏)인 병마절도사 원()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또한 선생이 손수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범준의 심잠(范浚心箴)을 써주면서 마음을 깊이 경계하기 위하여 큰아들인 중윤(中允)에게 주어 항상 외우게 하였다고 한다. 1591(선조 24, 新卯) 12월 선조 임금으로부터 예문관 봉교로 다시 부름을 받고, 대학(大學)등 여러 서적을 하사 받았다. 1592(선조 25, 壬辰)년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4월에는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들이 강원도를 지나 함흥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갑옷을 버리고, 지방 수령들은 북으로 달아나는 상황에서,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있던 해월(海月) 선생이, 함경 감사 류영립(柳永立)에게 "함흥은 많은 군사들이 지키고 둘러싸여 있는 근본이 되는 요충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철령에 있는 군대가 뒤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의지할 수 없게되어 실패하는 경우, 안변이북 함흥까지 군대가 물러나게 된다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니,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병마(兵馬)를 미리 조련하고, 성을 굳게 지켜서, 남쪽 군을 지원하여 적으로 하여금 철령을 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얼마나 좋은가? " 라는 서신을 보내 권유하였다. 그러나 류영립(柳永立)은 끝끝내 따르지 않았다. 급기야 적이 철령을 넘으니 함경도는 이미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류영립(柳永立)을 물러나게 하는 한편, 대신 칠계(漆溪) 윤탁연(尹卓然)이 함경 감사가 되었다. 병풍(屛風) 고개에 있던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도 도망하여 난대(鸞臺)로 들어가고, 토병(土兵)이 난을 일으키니, 적이 이르기도 전에 창고는 어지럽게 흩어지고 텅비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해월(海月) 선생의 말대로 된 연후에야, 류영립(柳永立)은 후회하고 탄복을 했다 한다. 또한 회령부(會嶺府)의 아전인 국경인(鞠景仁), 왕자 임해군(臨海君) ()과 순화군(順和君) ()와 이들을 배행(陪行)한 대신 및 지방 수령 등, 수십인을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투항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해월(海月) 선생은, 천지에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국경인(鞠景仁)의 무리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창의사(倡義士) 이성임(李聖任)과 만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게 되어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기회를 따라 계책을 강구하였다. 회령(會嶺)의 유생(儒生) 신세준(申世俊), 오응태(吳應台), 나정언(羅廷彦), 임순(林恂)으로 하여금 장사들을 규합케 하여, 경성(鏡城)을 지키는 회령사람들을 은밀히 타일러, 명나라 군사들이 왜적들을 다 멸한 다음에 괴수들을 토벌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국경인(鞠景仁), 함연수(咸連守) 등을 일시에 잡아 참살(斬殺)하였다. 또한 함흥토적(咸興土賊) 진대유(陣大猷)와 그의 아들인 계수(桂樹) 부자가 왜적에게 투항해서 백성들을 해치는 행패가 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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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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