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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934:황여일(6)(附예천방문1,487)
작성자장병창 @ 2017.10.15 06:14:16

  예천의 자랑 4934 : 황여일(6)(附 예천방문 1,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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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에 대유(大猷)와 친분이 있는 한덕원(韓德遠), 덕구(德久) 형제들을 통하여 글을 보내, 대유(大猷)에게 화복(禍福)을 늘어놓으며 꾸짖고 타일렀으나 명령을 듣지 않자, 김수준(金秀俊), 최찬(崔贊) 등을 보내 진대유(陣大猷) 부자를 포박하여 넘겼다. 이보다 앞서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이 진대유(陣大猷)의 아들인 계수(桂樹)를 아병(牙兵)으로 삼아서 데리고 다녔다. 해월(海月) 선생이 "이 사람은 불순한 기가 있는데, 하필이면 가까이 두느냐" 고 충고하였으나, 박순남(朴順男)은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결과가 해월(海月) 선생의 말처럼 되자,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선견에 탄복했다 한다. 1593(선조 26, 癸巳)년 정월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부임해 갔으며, 형조정랑이 되었다. 6월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594(선조 27, 甲午)년에 다시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되었으며, 3월에 명나라 장수(將帥) 천총(千摠) 이영춘(李榮春)과 화전(火戰)의 비방(秘方)을 논하다가, 명나라의 화전(火戰) 사용법이 매우 뛰어나자, 선생이 그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간청하여서 허락받았다. 선생은 화전(火戰) 비법(秘法)을 기록하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보내고, 또한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방어한 일들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은 문장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고, 병법 또한 뛰어났다. 9월에는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이 선조에게 청하기를, 병영(兵營)에는 한순간에 일이 만 가지로 벌어지는 곳이므로, 문무를 고루 갖춘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데, 해월(海月)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주청하여, 불가피하게 권율(權慄)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진주(晋州)에서 권율(權慄) 장군의 병영(兵營)에 있을 때, 후에 이충무공(李忠武公)이 백의종군 하면서 권율(權慄) 장군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 이 때에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함께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함께 이야기하며, 바다에서 배를 타고 수전요해(水戰要害: 지세가 험조(險阻)하여 지키기에 편하고 공격하기 힘든 곳)를 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정왜록(征倭錄)에 실려 있는 것이다.

 

  1596(선조 29, 丙申) 5월에 선략장군행세자익위사사어(宣略將軍行世子翊衛司司禦)를 제수받았다. 1597(선조 30, 丁酉)년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에 올랐으며, 12월에는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제독(提督) 마귀(麻貴), 그리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함께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다. 1598(선조 31, 戊戌) 9월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이 때에 명나라의 사신인 찬획주사(贊획主事)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나라의 안위가 위급함에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을 하였겠는가? 크게 고심한 끝에, 그 당시 문장으로 가장 총망받는 사람을 가려 뽑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 정사(正使)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 (우의정), 부사(副使)로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 (이조판서), 서장관(書狀官)으로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인 해월(海月) 선생이 뽑히게 되어, 10 21(癸酉)일에 서울 서소문 모화관(慕華館)을 출발하게 되었다. 1110일 아침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으며, 126(丙辰)일 압록강을 건넜다. 1599(선조 32, 己亥) 123(甲辰)일 비로소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황성(皇城) 동문에 들어가서 옥하관(玉河館)에 유숙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신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2 25(乙亥)일 병부(兵部)에서 보내온 공문서인 자문(咨文)에는, 우리나라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대책을 마련 중에, 뒷일을 해월(海月) 선생이 맡아 수습하여 마침내는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상사(上使)였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이 같이 갔던 사신일행(使臣一行)들과 어려웠던 상황에 대하여 주고받은 이야기를, 백사(白沙) 선생 문집(文集) 23권에 밝혀 놓았는데, 해월(海月) 선생이 이 일의 맹주(盟主: 동맹의 주재자)라 하였다. 그 당시 해월(海月) 선생은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에 가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소개하겠다. 해월(海月) 선생은 우리나라의 입장을 명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혼자 명나라의 수많은 조정 관리들과 접촉하고,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 때 만나서 그들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자세히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12권에 기록하여 남겨 두었다. 사실 해월(海月) 선생은 명나라 조정의 여러 관청을 다니면서, 진정서(陳情書)를 전달하고 우리나라의 무고(誣告)를 진설(陳說)하고, 통변(痛辨)하자, 각로(閣老: 재상)와 고위관리(高位官吏)들은, 그의 언변과 논술(辭語)이 분명하고 예절바른 태도에 모두들 감탄하고는, 다투어 서로 차와 술을 대접하며 나라의 치욕을 벗겨 줄 테니, ()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의 관상가(觀相家)가 조선(朝鮮)의 사신 일행 중 해월(海月) 선생을 가리키며,

 

  『時相者來 使行 指先生 曰黃書狀生於東國 稟得萬里氣像甚可異也. 在座人曰書狀生於東海 世居小國 何以稟得萬里氣也. 相者曰信不誣矣. 稟生東海之氣書狀之量 河海弘量矣 ○○稱歎』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국(東國)에서 태어났지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났으니 매우 이상합니다." 라고 하자, 함께 같이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해(東海)에서 태어나 대대로 소국(小國)에서 살았는데, 어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태어났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상가(相者)"참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동해(東海)의 기()를 받고 태어난 서장관(書狀官)의 도량(度量)은 하해(河海)와 같은 분입니다." 라며 크게 탄복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에 따른 해월(海月) 선생의 가문에 전하는 일화가 있다. 그 당시, ()의 신종(神宗) 황제도 해월(海月) 선생에게 "조선(朝鮮)은 삼천리(三千里) 강토(疆土)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萬里精氣)를 타고나서 명()을 치려 하느냐?" 라고 물었다 한다. 만일 여기서 바로 대답을 제대로 못하거나, 머뭇거린다면 모든 일은 허사가 될 뿐만 아니라, 나라에 커다란 재앙이 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조선(朝鮮)이 일본과 연합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찾겠다는 오해로 인하여 명()의 황제 앞에 해명(解明)키 위해 갔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월(海月) 선생은 그 자리에서 즉시 대답하였다. "예 신()의 집 앞에는 만리창해(萬里滄海)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절묘(絶妙)하고 적절(適切)했던 것이다. 그러자 신종(神宗) 황제는 무릎을 치면서, "조선(朝鮮)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여일(汝一)」 이라는 이름이 「너 하나밖에 없다」 는 뜻으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 그리고 무사히 일을 해결하고 귀국하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동해가 바로 보이는 마악산(馬嶽山) 중턱에다, 거주(居住)하고 있는 집과 같은 집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실제의 해월(海月) 선생의 집은 정남향이라, 바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명의 조정에서 조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황제를 농락(籠絡)했다며 트집을 잡을까 하여,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몇십년 뒤에 화재로 소실(燒失)되었는데, 그 집터가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고, 그 잔해가 아직도 간혹 나오고 있다고 후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1599(선조 32, 己亥) 318(丁酉),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4 24(癸酉)일 압록강을 건너고, 425(甲戌)일에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4월 기해(己亥)일에 복명(復命)했다. 이때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어 5월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가을에는 도산간역소(陶山刊役所)의 감독(監督)직을 맡아 퇴계(退溪) 선생 문집(文集)을 처음 간행하였는데, 물자를 조달하며 이를 도왔다고 한다.

 

  1601(선조 34, 辛丑), 선생의 나이 46세의 봄에 울진의 박곡(朴谷)을 얻어 박곡기(朴谷記)를 지었으며, 10월에는 예천군수를 제수받았으며, 12월에 예천 임소에 갔다. 1602(선조 35, 壬寅) 2월에 중직대부(中直大夫)가 되었으며, 여름에 안동(安東) 박곡(朴谷)을 얻어 정자(亭子)를 지었으며, 후박곡기(後朴谷記)를 지었다. 613일 부인(夫人) 김씨(金氏)가 임소에서 사망하자, 913일 김씨 부인을 수곡(水谷)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1604(선조 37, 甲辰)년 봄에 완산이씨(完山李氏) 덕원군(德原君) 도정(都正) (: 成宗대왕의 4세손)의 여식과 혼인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약포(藥圃) 정간공(鄭簡公), ()의 외손녀(外孫女)이다. 1606(선조 39, 丙午)년에 금성현령(金城縣令)을 제수받았다. 또한 어모장군행룡양위부사과겸여고(禦侮將軍行龍○衛副司果兼如故)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에 명나라 군이 철병을 하기 위하여, 사신(使臣)의 상사(上使)로 한림편수(翰林編修)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로는 급사(給事) 양유년(梁有年)이 천자(天子)의 조칙을 반포하였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시문(詩文)에 능한 관리를 뽑아서 사신 일행을 접대하게 하였다. 이때 해월 선생은 이들과 함께 한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시 또한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기록되어 있다. 9월에는 영천(永川) 군수를 제수받았다. 이때 영천 지방에서 날뛰던 도적떼들은 해월(海月) 선생이 영천 군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1607(선조 40, 丁未)년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선생의 장자인 중윤(中允)과 더불어 임고서원(臨○書院)에서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 문집의 교정을 보았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흩어지고 타서 소실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본(舊本)과 서로 비교하여 빠진 부분을 보충하며 문집(文集)을 완성시키려고 하였으나, 일개 읍()의 힘으로는 일을 끝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경상감사(慶尙監司)인 유영순(柳永詢)에게 청하여, 경주(慶州)와 더불어서 수개월에 걸쳐 그 문집(文集)을 완집(完集)하게 하였다. 또한 포은(圃隱) 선생의 연보(年譜),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 숨겨 두었던 영정을 베껴서 그려 넣었다. 7월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공()으로, 선무원종훈이등(宣武原從勳二等)의 녹(錄)을 받았다. 1608(선조 41, 戊申) 922일에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며, 1019일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1612(광해 4, 壬子)년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제수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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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487

 

  예천세계활축제 제3(醴泉世界활祝祭場 찾은 觀覽客 魅了시킨 키르키즈스탄 '발로 활쏘기' 公演!) [記事] : 3회 예천세계활축제 첫날인 201710 13일 관람객 3 6천여명이 축제장을 찾아 성공축제로 자리매김할 것이란 전망 아래 축제 둘째 날인 14일 주말을 맞아 전국 각지에서 예천세계활출제장으로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특히 발로 활을 쏘는 것으로 세계 각국에서 호평을 받은 키르키즈스탄 곡예활쏘기 공연이 펼쳐져 관람객들을 매료시켰으며, 활사냥 체험장 그리고 활 서바이벌 체험장과 예천농산물 축제장은 관람객들이 서로 부딪히는 등 북새통을 이루고 있다. '키르키즈스탄 곡예활쏘기 공연'은 축제 기간 중 12회 축제 공연마당에서 펼쳐져 공연자가 몸을 거꾸로 세워 발가락으로 활시위를 당겨 과녁을 맞히는 신기에 가까운 묘기에 관람객들은 뜨거운 박수로 화답하는 등 색다른 볼거리에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활사냥 체험장'은 남산공원에서 체험할 수 있으며, 6곳에 입체과녁을 맞히면 동물울음 소리가 나는 등 현장감이 넘치고 있으며, 네 번째 코스에는 움직이는 과녁을, 마지막 7번 코스에는 소원풍선을 불어 맞혀서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아 5천 원의 체험료에도 불구 참여자가 붐비고 있다. 또한, 행사장 가운데에 마련된 '활 서바이벌'은 주 행사장 중간에 마련된 3개의 코트에서 이루어지는데 2개 코트에서는 대회가, 1개 코트에서는 무료 체험이 이루어지며, 5명이 한 팀이 되어 총이 아닌 활로 하는 서바이벌 게임에 옆에서 관람하는 이도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기에 충분하다. 3회 예천세계활축제 관계자는 "이번 축제는 이색적인 볼거리와 체험거리가 가득해 다른 축제와 차별화돼 많은 관람객들이 발걸음 하고 있으며 축제를 더욱 짜임새 있게 운영해 참여자가 만족하는 축제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밝혔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7-10-14 오후 2: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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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세계활축제 제3(人波! 人波! 3回 醴泉世界활祝祭 및 2017 醴泉農産物 祝祭場 북새통...) [記事] : 큐피트의 화살!!! '3회 세계활축제'가 개최되고 있는 예천읍 한천변과 남산 일원에는 개막식과 함께 수많은 관람객들이 몰려들어 축제추진위원회 관계자는 "올해로 세 번째 맞이하는 이번 축제가 꼭 성공할 것이란 확실한 예감을 갖게 됐다"며 싱글벙글이다. 축제장에 마련된 각종 부스에는 전국에서 축제 관람을 위해 방문한 수많은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며, 21회 노인의날 기념식 및 어르신건강축제장에는 예천군 관내 12개 읍면에서 출전한 300여명의 어르신대표들의 건강체조를 보기 위해 1천여명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루었다. 또 아프리카 콩고팀의 공연에 이어 추수감사제, 한국안데스 문화원 공연, 품바 공연장에는 발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관람객이 넘쳐나자 이현준 군수는 얼굴에 환한 미소를 머금고 축제추진위원회 관계자들을 격려하는 등 축제장 분위기가 달아오르고 있다. 오후 430분에 개최될 거리퍼레이드는 취타대, 공군 의장대, 육군 군악대 등 100여명이 대열을 형성하고 이현준 군수를 비롯한 23개국의 전통활연맹 참가국, 세계전통활시연단이 그 뒤를 따르며 화려하고 멋진 향연을 펼칠 계획이어서 벌써부터 들뜬 분위기다. 이번 축제는 오늘(2017 1013)~16(4일간)까지 예천읍 한천체육공원과 남산공원 일원에서 '3회 예천세계활축제'와 더불어 '2017 곤충나라 Clean 예천농산물대축제'가 동시에 열리고 있어 축제장을 찾는 관람객들은 축제도 즐기고 예천의 우수농산물의 관람과 구입도 하고 있다. 3회 예천세계활축제의 체험 행사로는 "국궁, 목궁, 석궁, 양궁, 신기전, 활사냥 등이 준비되어 있으며, 레크리에이션 게임은 팀별 경기를 할 수 있는 활 서바이벌, 말타고 활쏘기, 큐피트의 화살, 풍선을 쏴라 등으로 축제 관람을 위해 방문한 모든 관람객들이 체험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다. 전시 행사는 "세계의 활과 화살 전시, 전국 활화살 만들기 작품 전시 등이 마련되었으며 16일에 개최되는 세계전통활문화포럼, 세계전통활연맹 창립대회 등은 이벤트행사 뿐만 아니라 학술 연구도 함께 마련된 축제로 관람객들에게 볼거리와 즐길 거리"를 제공하고 있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7-10-13 오후 12:2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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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한시회(12回 醴泉 全國 漢詩白日場 : 詩題 追慕 "문제공 치암 박충좌 선생") [記事] : 「제12회 전국 한시백일장」이 예천한시회 주관으로 201710 14일 오전 10 30분 전국 2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예천진호국제양궁장 내 문화체육센터에서 열렸다. 이번 한시백일장은 고려말기 문신인 박충좌 선생의 공적과 학문의 뜻을 기리기 위해 추모 문제공 치암 박충좌 선생을 시제로 결정하여 참가자들의 열띤 경쟁이 이어졌다. 백일장 개최 이후에는 박충좌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창건된 용문면 상금곡리에 위치한 금곡서원과 한국서예의 요람인 초정서예연구원을 방문하여 지역의 우수한 문화자원을 참가자들에게 소개했다. 매년 개최되는 한시백일장은 위인들의 업적과 삶을 재조명하고 후손들에게 가르침과 지혜를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예천발전의 밑거름이 되고 있으며, 우리 고장의 수려한 관광지와 우수한 문화재를 알리는데 앞장서고 있다. 한편, 치암 박충좌선생은 고려시대 충숙왕 떄 문과에 급제하였고 전라안렴사에 임용되었으며 지공거, 판전민도감사, 찬성사의 주요직을 수행하였다. 온후하고 검소한 선생의 성품과 학문을 본받고 추모하기 위해 조선 선조 때 예천군 용문면에 금곡서원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醴泉뉴스 201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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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군 방문(()傳統市場 庶民經濟살리기 國民運動本部, 醴泉郡 訪問 : 3回 醴泉世界활祝祭 觀覽 및 傳通市場 場보기) [記事] : ()전통시장 서민경제살리기 국민운동본부(이사장 도동환)는 제3회 예천세계활축제의 성공과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20171014일 오후 1230분 예천군을 방문했다. 이날 국민운동본부 회원 400여명은 활축제장 메인무대에서 환영식을 갖고 예천 상설·중앙시장으로 이동해 지역 농·특산물을 구매하는 등 장보기 행사를 실시했다. 또한, 장보기행사 후에는 제3회 세계활축제와 농산물대축제를 관람하면서 활 체험과 농산물 구입을 하고, 도효자공원 등 지역의 명소를 방문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통시장 서민경제살리기 국민운동본부는 2009년부터 매월 1회 전국 전통시장을 방문해 장보기행사를 추진하며 서민경제 살리기에 힘쓰고 있다. 이날 이현준 군수는 환영식에서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예천군을 방문한 국민운동본부 회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하며, 예천군도 전통시장 활성화와 서민경제 살리기에 앞장서겠다.”고 말했다.(醴泉뉴스 201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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