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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자랑4936:황여일(8)
작성자장병창 @ 2017.10.17 06:12:03

  예천의 자랑 4936 : 황여일(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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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의 마음이 허령(虛靈)하여 외물(外物)에 따라 쉽게 옮겨가니, 성색(聲色)과 취미(臭味)가 안에서 침식하고 분화(紛華)와 명리(名利)가 밖에서 유혹하면, 잠깐 사이에 황홀히 만 가지로 변하곤 한다. 따라서 만약 이 마음을 붙잡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지킴이 긴밀하지 못하면 마치 미친 물결과 사나운 말이 치닫는 것과 같아, 상실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마음을 보존함에는, 반드시 꾸준히 진작(振作)하고 정돈(整頓)하여 수렴(收斂)하고 함양(涵養)하여, 번잡하게 침노하는 외물로 하여금 자연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 감히 덤벼들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한 뒤에야 이 방촌(方寸)의 심지(心地)가 밝고 환하여 마치 구름이 지나간 태허에 자취가 없고 먼지를 쓸고 난 거울에 티끌이 없는 것과 같이 된다. 그런데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감에는 응사(應事)가 무궁하고 수작(酬酌)이 다단하여 취한 꿈을 미처 깨기도 전에 오장의 고화(膏火)가 들볶아 댄다. 게다가 득실과 영고(榮枯)가 어지러이 많고 희비와 우락(憂樂)이 한둘이 아니라, 운우(雲雨)가 아침저녁으로 뒤집히고 풍파가 잠깐 사이에 일어나곤 하니. 이러한 가운데 부침하고 낭패를 당한 나머지 혹 전도 착란하여 본심을 잃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오직 군자는 그렇지 않아 혼탁한 시속(時俗) 가운데 섞이어도 심지(心地)는 더욱 고결하고 급박한 환난의 즈음에 처해서도 지조는 더욱 확고하여, 부귀에도 흔들리지 않고 빈천에도 옮겨지지 않으며 위무(威武)에도 굽히지 않는 것이 마치 바다가 그렇게 뒤집히는 거센 파도에도 차거나 준 적이 없고 달이 저렇게 차고 이울면서도 끝내 본체에는 결손(缺損)이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중인(衆人)들의 마음이란 곧 저 강과 하천, 바위산과 멧부리, 쇠와 돌 따위와 같은 것이며,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高明)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인 것이다. 지금 그대가 이로써 헌()의 이름을 삼았으니, 마음을 보존하는 도리를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속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것인가? 아니면 범속한 중인이 되고 말까 깊이 두려워하여 군자의 학문에 스스로 힘쓰는 것인가? 내가 상상하건대, 서늘한 가을 고요한 밤, 만뢰(?)가 모두 잠들 즈음 바다가 잘 닦은 청동기울 같고 옥 바퀴의 달이 허공에 떠 있을 때, ()에 기대어 굽어보고 우러러보면 천지사방은 씻은 듯이 맑고 환하여 그 사이에 한 점 찌꺼기도 끼어 있지 않아, 그 창연(蒼然)히 푸른 빛과 교교히 밝은 빛이 모두 나의 가슴 속에 들어올 터이니, 바다와 달[해월(海月)]에서 뜻을 취함이 매우 크지 않겠는가. 하니, 황군이 대답하기를, “좋습니다, ()의 기()는 여기서 더할 나위 없습니다.” 하기에, 드디어 써서 그에게 주었다. 모월 모일에 기를 쓰노라. 후포역사연구회 신진철(daum 2010)

 

  황여일(黃汝一) : 자 회원(會元), 호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생졸년 1556 (명종 11) - ? (?), 시대 조선 중기, 본관 평해(平海), 활동분야 문신/관료 / 문신-조선중기 / 문신/ 과거 및 취재 [문과] 선조(宣祖) 18(1585) 을유(乙酉) 별시(別試) 을과(乙科) 1, [생원진사시] 선조(宣祖) 9(1576) 병자(丙子) 식년시(式年試) 3(三等) 17/ [상세내용] : 황여일(黃汝一)에 대하여 : 1556(명종 11)∼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평해(平海). 자는 회원(會元), 호는 해월헌(海月軒매월헌(梅月軒). 평해 출신. 응징(應澄)의 아들이다. 1576(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588년 검열이 되었는데, 하번사관(下番史官)임에도 불구하고 출입하였다 하여 파직되었다. 1594년 형조정랑이 되고 곧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내려갔는데, 얼마 뒤 도원수의 허락을 받고 일시 귀가하여 도원수와 함께 추고(推考)당하였다. 1598년 사서에 이어 장령이 되고, 이듬해 장악원정을 역임하였다. 1601년 예천군수가 되고 1606년 전적을 역임, 1611(광해군 3) 길주목사, 1617년 동래진병마첨절제사가 되었다. 평해의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조천록 朝天錄》·《해월집》 147책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 光海君日記, 國朝榜目, 燃藜室記述, 平海邑誌(daum 2010)

 

  황여일(黃汝一) [專門資料] : 발행일 2006-12-30(daum 2010)

 

  황여일 [專門資料] : 제문(祭文) [문인(門人) 황여일(黃汝一)]/ 저자 황여일(黃汝一)/ 발행처 한국고전번역원/ 발행일 2007-01-27(daum 2010)

 

  황여일 : ▣ 해월 황여일(海月 黃汝一)/ 경북 울진군 기성면(기성면)에 있는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23)의 별당/ 지정번호 : 경북문화재자료 제161/ 지정연도 : 1985 85/ 소재지 :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시대 : 조선시대/ 크기 : 정면4칸 측면3/ 분류 : ()/ 198585일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161호로 지정되었다. 1588(선조 21) 해월 황여일이 세운 별당으로 황의석이 소유·관리하고 있다. 원래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沙洞里) 산꼭대기에 있던 것을 후손들이 지금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 정면 4, 측면 3칸의 팔작지붕집으로 정면의 앞쪽 1칸은 마루를 깔고 난간을 돌렸으며 지면에서 떨어져 지었다. 해월의 유품으로 보이는 서각·물통·화살·숟가락·제기·청동등잔과 용도를 알 수 없는 녹각(鹿角) 3점 등의 유물과 교지 수십 점이 있으며, 《천군기(天君記)》 등의 서적과 한호(韓濩) 글씨라는 병풍 1점이 있는데 낙관이 없어 확인할 수 없다. 해월헌 앞쪽에는 해월헌기(海月軒記)’‘제해월헌(題海月軒)’‘용청강운(龍淸江韻)’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내한(內翰) 황군(黃君)이 마악(馬嶽) 아래 작은 집을 짓고 헌()을 이름 하여 해월(海月)이라 하고는, 나에게 기()를 지어주기를 청했다. 이에 내가 말하기를, “천하 만물 중 능히 본체를 잃지 않는 것이 드무니, 쇠보다 강한 것이 없지만 녹이면 둥글거나 짧은 것을 손길 가는 대로 이룰 수 있고, 둘보다 굳은 것은 것이 없지만 부수면 모래도 되고 가루도 되어 문드러진 채 바람에 흩날려버리고 만다. 뿐만 아니라 높은 바위산과 멧부리도 무너져 내릴 때가 잇고 깊은 하천과 강물도 터져 쏟아질 때가 있다. 그러나 유독 바다란 것만은 온갖 시내를 다 받아들이고도 넘치지 않고 미려(尾閭): )바닷물이 빠져나간다는 구멍. <장자(莊子)> 추수(秋水)천하의 물중에 바다보다 큰 것이 없으니, 모든 시내가 물려드는 것이 어느 때나 그칠지 모르지만 물이 차지 않고, 미려에서 빠져나가는 것이 어느 때나 끝날지 모르지만 물이 줄지 않는다.” 하였다. 끊임없이 물을 삼키는데도 줄어들지 않으며, 눈처럼 흰 풍랑이 이리저리 미친 듯이 치달리고 교룡과 고래, 악어 등이 물기둥을 내뿜으며 출몰하여도, 결코 터지거나 깨어질 근심이 없다. 그리고 달이 허공에 있음에 구름이 가리면 맑고 깨끗한 광채를 사람들이 볼 수 없지만 구름이 걷힌 다음 우러러보면 그 밝은 빛은 여전하며, 차고 이우는 상사(常事)와가리우고 먹히는 변고가 천지가 있은 이래로 얼마나 많이 있어 왔는지 모를 지경이지만 그 둥근 바퀴와 하얀 달빛은 오랠수록 더욱 새로우니, 군자가 달에서 취하는 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의 마음이 허령(虛靈)하여 외물(外物)에 따라 쉽게 옮겨가니, 성색(聲色)과 취미(臭味)가 안에서 침식하고 분화(紛華)와 명리(名利)가 밖에서 유혹하면, 잠깐 사이에 황홀히 만 가지로 변하곤 한다. 따라서 만약 이 마음을 붙잡음이 독실하지 못하고 지킴이 긴밀하지 못하면 마치 미친 물결과 사나운 말이 치닫는 것과 같아, 상실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려울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군자가 마음을 보존함에는, 반드시 꾸준히 진작(振作)하고 정돈(整頓)하여 수렴(收斂)하고 함양(涵養)하여, 번잡하게 침노하는 외물로 하여금 자연히 고개를 숙이고 물러나 감히 덤벼들지 못하게 한다. 그렇게 한 뒤에야 이 방촌(方寸)의 심지(心地)가 밝고 환하여 마치 구름이 지나간 태허에 자취가 없고 먼지를 쓸고 난 거울에 티끌이 없는 것과 같이 된다. 그런데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감에는 응사(應事)가 무궁하고 수작(酬酌)이 다단하여 취한 꿈을 미처 깨기도 전에 오장의 고화(膏火)가 들볶아 댄다. 게다가 득실과 영고(榮枯)가 어지러이 많고 희비와 우락(憂樂)이 한둘이 아니라, 운우(雲雨)가 아침저녁으로 뒤집히고 풍파가 잠깐 사이에 일어나곤 하니. 이러한 가운데 부침하고 낭패를 당한 나머지 혹 전도 착란하여 본심을 잃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오직 군자는 그렇지 않아 혼탁한 시속(時俗) 가운데 섞이어도 심지(心地)는 더욱 고결하고 급박한 환난의 즈음에 처해서도 지조는 더욱 확고하여, 부귀에도 흔들리지 않고 빈천에도 옮겨지지 않으며 위무(威武)에도 굽히지 않는 것이 마치 바다가 그렇게 뒤집히는 거센 파도에도 차거나 준 적이 없고 달이 저렇게 차고 이울면서도 끝내 본체에는 결손(缺損)이 없는 것과 같다.

 

  그렇다면 중인(衆人)들의 마음이란 곧 저 강과 하천, 바위산과 멧부리, 쇠와 돌 따위와 같은 것이며, 군자의 마음은 바로 광대하고 고명(高明)하여 길이 변치 않는 바다와 달인 것이다. 지금 그대가 이로써 헌()의 이름을 삼았으니, 마음을 보존하는 도리를 얻음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시속 가운데서도 변치 않는 것인가? 아니면 범속한 중인이 되고 말까 깊이 두려워하여 군자의 학문에 스스로 힘쓰는 것인가? 내가 상상하건대, 서늘한 가을 고요한 밤, 만뢰(?)가 모두 잠들 즈음 바다가 잘 닦은 청동기울 같고 옥 바퀴의 달이 허공에 떠 있을 때, ()에 기대어 굽어보고 우러러보면 천지사방은 씻은 듯이 맑고 환하여 그 사이에 한 점 찌꺼기도 끼어 있지 않아, 그 창연(蒼然)히 푸른 빛과 교교히 밝은 빛이 모두 나의 가슴 속에 들어올 터이니, 바다와 달[해월(海月)]에서 뜻을 취함이 매우 크지 않겠는가. 하니, 황군이 대답하기를, “좋습니다, ()의 기()는 여기서 더할 나위 없습니다.” 하기에, 드디어 써서 그에게 주었다. 모월 모일에 기를 쓰노라. 후포향토지킴이 신진철(daum 2010) 황여일 : 南嶽府君 宗宅/ 2009.04.12/ ...사는 蓬萊는 다만 인간 세상에 있다네. 蓬萊只是在人? 이 詩는 府君의 仲兄 龜峯公의 사위로 姪壻인 海月 黃汝一7)公이 지은 詩로서, 南嶽府君의 衣冠 容態와 氣象을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즉 南嶽府君의 外貌를 금강산에.../ //cafe.daum.net/yngeo/ 영남지리답사(daum 2010)

 

  황여일 : 해월헌 -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별구(別構)/ 2007.08.07/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433/ ...선조 51(1588)에 건립하여 헌종 13(1847)에 중수하였고,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1556.10.211623.4.2)의 별구<別構>였다고 하며, 기성면 사동리 산정에 있었으나 후손이 현 위치에 이축하였다 한다.../ //nexruby.tistory.com/ Ruby Tour 여행(daum 2010)

 

  황여일 : 이항복(李恒福)/ 2009.10.24/ ...순간이었으나 이항복은 당시 공조참판인 월사 이정구(李廷龜) 1564~1635)를 부사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을 서장관으로 대동하고 명나라 연경으로 건너가 명나라로 하여금 정응태를 파면케 하여 사건을 무마하였다 계축옥사 당시 .../ //blog.naver.com/kne24240(daum 2010)

 

  황여일 : 난중일기 (합천 체류분)/ 2009.04.08/ ...맑다. 몹시 더웠다.24) 원수(권율)의 군관 박응사(朴應泗)와 류홍(柳洪) 등이 와서 봤다. 원수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사람을 보내어 문안하므로 곧 사례하는 답장을 보냈다. 안방으로 들어가 잤다.25) 6 8[양력 721]<.../ //blog.daum.net/qhwnd128/ 강석정의 사랑방(daum 2010)

 

  황여일 : 영주...의산서원/ 2009.07.21/ ...않았다. 1596년 산은현감(山隱縣監)에 임명되고, 다음해 정유재란 때 체찰사종사관(體察使從事官) 황여일(黃汝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金景瑞)가 의병을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은 데에 사감을.../ //blog.daum.net/12977705/ 저 산길 끝에는 옛님의 숨결(daum 2010)

 

  황여일 : 한국 고소설사의 시각/ e-Book/ 간행위원회 지음 | 국학자료원 | 2006.05.11/ 책본문 : ...수적으로 많다 하더라도 子虛를 생육신 元昊로 보고, ‘海月을 선조 때의 문신 黃汝一로 본다면 子虛之友海月居士란 문장은 성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元昊는 1397(태조 .../ 538페이지(daum 2010)

 

  황여일 : 임진왜란과 한중관계(역비 한국학 연구총서 14)/ e-Book/ 한명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8.11.15/ 책본문 : ...라 선박들의 대단한 수송능력에 부러움을 표시한 바 있었다..o3) 또 황여일(黃汝一)은 명에서 실어 오는 군량의 접수를 담당하면서 보았던 명나라 선박들의 선제綠燎j)에 주목하였는데.../ 125페이지(daum 2010)

 

  황여일 : 고소설연구 제5/ e-Book/ 한국고소설학회 지음 | 국학자료원 | 2007.07.05/ 책본문 : ...하나씩 풀리면서 오히려 ..海月文集..의 진위마져 문제로 제기58)되고 보면 海月은 黃汝一이다라는 등식 하에 내려졌던 임제설은 대단한 도전을 면할 수 없게 된다. 여기에 최근에.../ 126페이지(daum 2010)

 

  황여일 : 근세일기문의 성격연구/ e-Book/ 윤원호 지음 | 국학자료원 | 2006.04.28/ 책본문 : ...받고 있는 전투인 것이다. 이제 그 한 예를 들어본다. 저녁에 원수 종사관 황여일(黃汝一)이 보러 와서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임진년에 왜적을 무찌른 일에 대하여 칭탄하지 않은.../ 168페이지(daum 2010)

 

  황여일 : 안동의 인물 - 귀봉(龜峯) 김수일(金守一)/ 2009.03.31 () 오후 9:49/ ...딸은 둘인데, 장녀는 을유년에 문과 급제한 행사헌부장령(行司憲府掌令) 황여일(黃汝一)에게 출가하였고, 둘째는 사옹봉사(司饔奉事) 박수근(朴守謹)에게 출가하였다. 용은 퇴계 선생의 아들 첨정(僉正) ()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52녀를...(daum 2010)

 

  황여일 : 안동넷 > 문화생활/ 안동의 인물 - 약포(藥圃) 정탁(鄭琢)/ 2008.07.28 () 오후 5:42/ ...오랜 관직생활 때문에 그의 문하에는 황여일(黃汝一), 황지(黃遲) 등 극소수의 제자만 있다. 숙종 26년 향내 사람이 예천군 호명면 황지동에 도정서원을 세워 정탁. 윤목 부자를 향사 고종 때 훼철령을 받았으나 신기하게도 옛 건물이 그대로...(daum 2010)

 

  황여일 :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1556~1662)| 조선비결역사/ coligny | 2004.06.09 15:53/ //cafe.daum.net/coligny/JGz1/67/ 해월(海月) 선생은 조선 중기[1556(병진)1622(임술), 명종 11∼광해 14]의 문신으로, ()가 여일(汝一)이며, ()가 회원(會元),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또한 호가 처음에는 하담(霞潭), 해월(海月), 매월(梅月)이며, 후에는 만귀(晩歸)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사동리(沙銅里) 생가의 연원(淵源)을 말한다면, 황씨(黃氏)의 시조가 되시는 락()이 중국의 강하(江夏)에서 우리나라 강원도(현재 경상북도) 울진군 평해의 월송정 북쪽에서 터를 잡고 살아오다가, 충절공(忠節公) 황서(黃瑞)가 군()의 북쪽에 있는 정명리(正明里)로 이주(移住)하여 살아왔었다. 그런데 해월(海月) 선생의 아버지되시는 창주공(滄州公), 사동리(沙銅里)의 사직(司直) 영덕정씨(盈德鄭氏) 정창국(鄭昌國)의 여식과 혼인하게 됨으로써, 사동리에 터를 마련하고 살게 되었다고 한다. 해월(海月) 선생은 명종(明宗) 11(1556: 丙辰年) 10 21일 병오일 사시에 사동리(沙銅里: 경북 울진군 기성면 사동리) 집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2세 때부터 풍골이 뛰어나, 사람들은 보통 아이들과는 다른 비범한 아이라고 하였으며, 5세 때부터 비로소 독서를 시작하였다. 8세 때에는 선생은 사동리 집에서 남쪽으로 10여 리 떨어진 정명리(正明里)에 계신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선생에게 가서 수업을 받았다. 해월(海月) 선생은 한 번 들은 것은 그대로 외우고 그 이치를 통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를 가르치는 대해(大海) 선생은 매우 기이하게 생각하였고, 아버지인 창주공(滄州公)"이 아이가 틀림없이 우리 가문을 일으킬 사람이다" 라고 하였다 한다. 당시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형제들인,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과 그의 형이 되는 군수인 약봉(藥峯) 김극일(金克一) 선생이 찾아와서, 극찬을 하며 이 아이가 큰 인물이 될 것이 틀림이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해월(海月) 선생의 집안은 워낙에 가난하여 해월(海月) 선생의 어머니는, 10여 리씩 떨어진 대해(大海) 선생의 집으로 어린 아들이 매일 수업받으러 다니는데, 밥을 해서 먹여 보내지 못하고 조석으로 멀건 죽을 먹여 보내니 매우 가슴 아파하며, 사흘에 하루라도 진하게 쑨 죽이라도 먹여 보냈으면 하며, 마음 아파했다고 한다. 1569(선조 2, 己巳)년 선생 14세 때에, 처음으로 간성시(杆城試) 진사시(進士試)에 진주죽서루(眞珠竹西樓)에 대한 시를 지어 장원을 하였는데, 그 당시 강릉 부사였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이 시를 보고 크게 놀라서 관청에 초대하였으며, 그를 칭찬하는 시를 한 수 남겼다. 1572(선조 8, 乙亥)5, 나이 20세 때에 구봉(龜峯) 김수일(金守一) 선생의 여식과 혼인을 하였다.

 

  또한 가을에는 당시의 경상도 감사가, 안동부(安東府)에 와서 백일장을 열었다. 이때 선생은 동상(東床)에 있었는데,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어찌하여 시험장에 나가지 않느냐고 하자, 하는 수없이 해월(海月) 선생은 시험장에 입장하였던 것이다. 다른 과거 시험보는 선비들은 붓을 들어 중얼거리고 있었는데, 선생은 코를 골며 그 옆에서 잠을 자다, 해가 기울어 시험장이 파할 무렵에서야 앞의 병풍이 쳐 있는 곳으로 나아가, 단번에 붓을 들어 쓰고는 그대로 제출하고 나왔던 것이다. 그 글이 바로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에 있는, 치술령부(○述嶺賦)인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은 이 향해진사시(鄕解進士試)에서 장원으로 뽑혔으며, 당시 시험관은 크게 놀라며 괴이하게 생각하였고, 그의 이러한 일이 크게 소문이 났었던 것이다. 이때 선생은 약관(弱冠)의 나이였으며, 그때 그가 남긴 치술령부(○述嶺賦)는 잘 알려진 소문난 글인 것이다. 1576(선조 9, 丙子) 2월에 진사복시에서 3등을 하였으며, 7월에는 구담부(龜潭賦)를 썼다. 1577(선조 10, 丁丑)년 비로소 성균관에서 수학하였고, 성균관에서 백호(白湖) 임제(林悌)와 오산(五山) 차천로(車天輅)와 더불어 시와 문장으로 일대(一代)를 구가(驅駕)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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