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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 4937 : 황여일(9)(附 제3회 예천세계활축제&농산물축제, 13-16일 44만5천여명 찾아 농산물 9억5천만원 판매함. 축하합니다./이현준 예천군수, 16일 세계전통활연맹 초대회장을 추대됨.,,축하합니다/예천방문 1,4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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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5(선조 18, 乙酉)년 봄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선생의 위패가 봉안된 옥계서당(玉溪書堂)을 찾아 배(拜)를 올렸다. 같은 해 10월 16일에 별시 을과(乙科) 1등으로 합격하여, 예문관검열겸 춘추관기사관(藝文館檢閱兼 春秋館記事官)이 되었다. 1586(선조 19, 丙戌)년 정월에 휴가를 받아 부모님을 찾아뵙고, 안동 예안(宣城)으로 가서 퇴계(退溪) 선생 유고(遺稿)의 교정과 편집을 보았으며, 10월에는 사가호당(賜暇湖堂)에 들어갔던 것이다. (선례로 보아 7품 이하의 벼슬로는 처음이라고 함) 1587(선조 20,丁亥)년 9월에 예문관 대교가 되었으며, 1588(선조 21, 戊子)년 정월에 임금이 불러 편전에서 야간강의를 여러 차례 했으며, 이 때에는 선비들이 서로 의심하고 서로가 배반하여, 국론이 분열되어 혼란스러웠는데, 류성룡(柳成龍) 선생도 오랫동안 수습을 하지 못하였었다.
그 때 해월(海月) 선생을 불러서는, 어찌하면 화목하게 분란없이 안정케 할 수가 있을까 하며 해월(海月) 선생의 의견을 듣고서, 류성룡(柳成龍) 선생은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4월에는 고향에 돌아와서 해월헌(海月軒)을 지었는데, 현판은 영의정(領議政)으로 있던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선생이 썼으며,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상촌(象村) 신흠(申欽),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약포(藥圃) 정탁(鄭琢), 지봉(芝峯) 이수광(李○光) 선생 등등 수많은 인사들이 찬양하는 시와 글을 남겼다. 또한 7월에는 예문관봉교가 되었으며, 암행어사로 경상도에 내려갔었다. 1589(선조 22, 己丑)년 8월에 선조 임금이 불러 선정전에 입시(入侍)하여 여러 차례 야간강의를 하였다. 신묘(辛卯)일 이 날은 선정전에 입시(入侍)하여 병사(兵事)에 대하여 논했다. 이때 일본이 전쟁을 일으킬려는 조짐이 있어, 임금이 대신들을 불러 들였는데, 이때 정언신(鄭彦信), 이일(李鎰), 신립(申砬) 등을 만나 보았다.
11월에는 일본의 사신 현소(玄蘇)가 와서는 통신사를 보낼 것을 청하였는데, 조정 중론이 다 왜국에 사신을 보내자는 데로 기울어지자, 선생 홀로 불가함을 조목조목 들어서 반대하여 말하기를, 「양국이 국교가 열리어도 난은 일어날 것이며, 열리지 않아도 난은 일어날 것인데, 차라리 국교를 끊고서 난에 대비함만 같지 못할 것이다(抗言曰 通亦發 不通亦發 莫如不通之爲少自取也)」 라고 하였다. 그때에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이 그를 가리켜, 동해의 노중련(魯仲連)이라는 시를 지어주며 격려했다. 시(詩)에 이르기를,
동해유로연(東海有魯連) 기인역항절(其人亦抗節)/ 거세욕종진(擧世欲宗秦) 이독대주일(爾獨戴周日)/ 담소각삼군(談笑却三軍) 기기재촌설(其機在寸舌)/ 아유일편심(我有一片心) 천추여군설(千秋與君說)/ 동해(東海: 조선)에도 노중련(魯仲連)이 있는데,/ 그 사람 또한 절조를 지켜 굽히지 않는(抗節) 사람이로다./ 온 세상이 다 진(秦)나라를 (황제의 나라라고) 높이려 하였으며,/ 그대 홀로(해월 선생) 일본과 친하는 것을 탄식하며(戴周日),/ 담소(談笑)하며 삼군(三軍: 대군)을 물리치는데,/ 그 기지가 한치의 혀끝(寸舌)에 있구나./ 나 또한 한 조각 붉은 마음 있어,/ 천추(千秋)에 그대의 뜻(君說)과 함께 하노라.// 노중련(魯仲連)은 춘추전국시대의 제(齊)나라 사람으로, 기발하고도 웅대한 책략(策略)을 잘 구사하였으나, 고상한 절개를 지닌 분으로 세속을 초탈하여 전혀 벼슬할 뜻이 없는 분이었다. 그가 일찍이 조(趙)나라를 두루 유람할 때, 마침 진(秦)나라 왕은 백기(白起)를 시켜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조나라 군사 약 40만여(萬餘) 명을 전멸시키고, 동쪽으로 추격하여 조(趙)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을 에워싸니 조(趙)나라는 급박한 상황이 되었으나, 제후국들은 진(秦)이 두려워 감히 구원군을 출동시키지 못하였다. 위(魏)나라 왕이 장군 진비(晉鄙)를 시켜 조(趙)나라를 구원케 하였으나, 역시 진(秦)나라의 군대를 두려워한 나머지 탕음(蕩陰: 河南省)에 머물러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 그러자 위(魏) 왕은 객장군(客將軍: 타국 출신의 장군) 신원연(新垣衍)을 시켜, 몰래 조나라의 수도 한단(邯鄲)에 들어가 조(趙)나라 왕의 숙부인 평원군(平原君)을 통해 조(趙) 왕에게 이렇게 건의하게 했다. 「진(秦)나라는 예전의 제(齊)나라와 세력을 다투어 제왕(帝)을 칭하다가 얼마 뒤에 취소했습니다. 그런데 제(齊)나라는 점점 쇠약해지고 이제는 진(秦)나라만이 우뚝 강대한 나라가 되어버렸습니다. 따라서 진(秦)나라가 한단(邯鄲)을 포위한 것은 반드시 한단(邯鄲)을 차지하고픈 욕심에서가 아니라 다시 제왕(帝)의 칭호를 차지하고 싶기 때문이니 만약 조(趙)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진(秦)나라의 소왕(昭王)을 높여 제왕(帝)이라고 칭한다면 진(秦)왕은 기뻐서 철수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노중련(魯仲連)은 만나기를 꺼려하는 신원연(新垣衍)을 만나 말하기를, 「권모술수로 군사를 부리고 백성을 노예처럼 다루는 진(秦) 왕이 만일 제멋대로 제왕(帝)이 되어 그릇된 정치를 천하에 편다면 나는 동해에 빠져 죽겠습니다. 진(秦) 왕의 백성이 되는 일은 참을 수가 없습니다.」 라고 말했다. 또한 진(秦) 왕이 제왕(帝)이라 칭하게 되었을 경우 생기는 해로움을 예를 들어 설명하기를, 은(殷)나라 주왕(紂王) 때에 구후(九侯), 악후(鄂侯) 주문왕(周文王)이 모두 주(紂)왕의 삼공(三公)이었는데, 구후(九侯)가 미인인 그의 딸을 주(紂)왕에게 바치자 주(紂)왕은 그녀가 못생겼다고 하여 구후(九侯)를 소금에 절여 죽이자, 악후(鄂侯)가 이를 만류하니 그를 또한 포를 떠서 죽이고, 이 소식을 들은 주(周) 문왕(文王)이 탄식을 하자 그를 유리(?里)에 있는 감옥에 100일이나 가두었다가 그를 죽이려한 역사적인 사실 등등을 하나하나 들어 설명하고, 결국에는 신연원(新垣衍) 본인에게도 해가 미치게 될 것임을 말하자, 이에 신원연(新垣衍)은 그제서야 일어나 절하고서 사과하였던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진(秦)나라 장군은 곧 군사를 50여리나 물렸고, 또한 위(魏) 나라의 공자(公子: 信陵君) 무기(無忌)가 조(趙)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군명(君命)이라 속이고 위(魏)나라 장수 진비(晉鄙)의 군대를 탈취하여, 진(秦)나라 군대를 공격했으므로 진(秦)나라 군대는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갔던 것이다. 이에 조(趙)나라의 평원군(平原君)은 노중련(魯仲連)에게 봉작(封爵)을 세 번씩이나 주고자 했으나, 노중련(魯仲連)은 끝끝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이에 평원군(平原君)은 주연을 열어 천금(千金)을 바치며 장수(長壽)를 축원하니 노중련(魯仲連)은 웃으며, 「천하의 선비가 귀한 존재로 불리워지는 것은 남을 위해 우환을 물리치고 분쟁을 풀어주며 근심을 해결해 주고도 보상을 받지 않는 까닭입니다. 만일 보상을 받는다면 선비도 장사꾼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지요」 라며 거절했다. 평원군(平原君)과 작별하고 떠난 후 평생토록 다시 만나지 않았다. 그 후 이십여 년이 지나 연(燕)나라의 장군이 제(齊)나라의 요성(聊城: 山東省)을 점령했는데, 요성의 어떤 사람이 연(燕)나라 왕에게 연나라 장군을 참언(讒言)했다. 이에 참소(讒訴)를 당한 연(燕)나라 장수가 주살될 것을 두려워 요성(聊城: 산동성)에서 농성한 채 감히 연(燕)나라로 귀국도 못하고 굳게 지키니,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이 일년 이상이나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때 노중련(魯仲連)이 화복(禍福)을 논한 긴 편지를 써서 화살에 매달아 성안으로 쏘아 연(燕)나라 장군에게 보냈다. 연(燕)나라 장군은 이 편지를 받아 읽고 사흘 동안이나 울면서 갈등으로 밤낮을 지새다가, 결국 탄식하다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요성(聊城)안은 혼란해졌고 제(齊)나라 장군 전단(田單)은 마침내 요성(聊城)을 함락시켰다. 전단(田單)은 제(齊)나라로 돌아와서 왕에게 노중련(魯仲連)의 공적을 아뢰니, 제(齊)나라 왕은 노중련(魯仲連)에게 벼슬을 내려주려고 했다. 그러나 노중련(魯仲連)은 바닷가로 몸을 피해 달아나 숨어 살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부귀를 누리는 몸이 되어 남에게 굽히는 것보다는 차라리 가난하고 천하게 살면서, 세상을 가볍게 보고 내 마음 내키는 대로 살아가리라.」
1590(선조 23, 庚寅)년 5월에 예문관봉교(藝文館奉敎)가 되었다. 선생은 백호(白湖) 임제(林悌)와 매우 절친한 사이여서, 하루는 그의 집을 방문하니 백호(白湖) 임제(林悌)가 무슨 글을 쓰고 있다가 선생을 보고는 그 책을 싸서 감추자, 선생이 정색을 하고 무슨 일인데 어찌하여 반드시 감추어야만 하느냐고 하자, 임공(林公) 역시 해월(海月) 선생이 크게 절조가 있는 사람인 것을 알고는 그 책을 보여 주었는데, 그 책 표지의 제목이 원생몽유록(元生夢遊錄)이었다. 그때 선생은 그 책을 읽어 보고는 즉석에서 붓을 들어 발문을 써서 주었으며, 그에 대한 발문과 시도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있다. 10월에는 한양최씨(漢陽崔氏)인 병마절도사 원(垣)의 여식을 부인으로 맞아들였다. 또한 선생이 손수 주자(朱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범준의 심잠(范浚心箴)을 써주면서 마음을 깊이 경계하기 위하여 큰아들인 중윤(中允)에게 주어 항상 외우게 하였다고 한다. 1591(선조 24, 新卯)년 12월 선조 임금으로부터 예문관 봉교로 다시 부름을 받고, 대학(大學)등 여러 서적을 하사 받았다. 1592(선조 25, 壬辰)년 사헌부감찰이 되었으며, 4월에는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이 되었다. 이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서 왜적들이 강원도를 지나 함흥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장수들이 갑옷을 버리고, 지방 수령들은 북으로 달아나는 상황에서, 고산도찰방(高山道察訪)으로 있던 해월(海月) 선생이, 함경 감사 류영립(柳永立)에게 "함흥은 많은 군사들이 지키고 둘러싸여 있는 근본이 되는 요충지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철령에 있는 군대가 뒤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의지할 수 없게되어 실패하는 경우, 안변이북 함흥까지 군대가 물러나게 된다면 어찌해 볼 도리가 없으니, 나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병마(兵馬)를 미리 조련하고, 성을 굳게 지켜서, 남쪽 군을 지원하여 적으로 하여금 철령을 넘지 못하게 한다면 그 얼마나 좋은가? " 라는 서신을 보내 권유하였다. 그러나 류영립(柳永立)은 끝끝내 따르지 않았다. 급기야 적이 철령을 넘으니 함경도는 이미 어찌해 볼 수가 없게 되자, 조정에서는 류영립(柳永立)을 물러나게 하는 한편, 대신 칠계(漆溪) 윤탁연(尹卓然)이 함경 감사가 되었다. 병풍(屛風) 고개에 있던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도 도망하여 난대(鸞臺)로 들어가고, 토병(土兵)이 난을 일으키니, 적이 이르기도 전에 창고는 어지럽게 흩어지고 텅비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이 다 해월(海月) 선생의 말대로 된 연후에야, 류영립(柳永立)은 후회하고 탄복을 했다 한다. 또한 회령부(會嶺府)의 아전인 국경인(鞠景仁)이, 왕자 임해군(臨海君) 진(진)과 순화군(順和君) 보(보)와 이들을 배행(陪行)한 대신 및 지방 수령 등, 수십인을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넘기고 투항했다.
이 소식을 들은 해월(海月) 선생은, 천지에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국경인(鞠景仁)의 무리들을 용서할 수 없다 하여, 창의사(倡義士) 이성임(李聖任)과 만나 의병을 일으킬 계획을 하게 되어 이른 아침부터 깊은 밤까지 기회를 따라 계책을 강구하였다. 회령(會嶺)의 유생(儒生) 신세준(申世俊), 오응태(吳應台), 나정언(羅廷彦), 임순(林恂)으로 하여금 장사들을 규합케 하여, 경성(鏡城)을 지키는 회령사람들을 은밀히 타일러, 명나라 군사들이 왜적들을 다 멸한 다음에 괴수들을 토벌한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여, 국경인(鞠景仁), 함연수(咸連守) 등을 일시에 잡아 참살(斬殺)하였다. 또한 함흥토적(咸興土賊) 진대유(陣大猷)와 그의 아들인 계수(桂樹) 부자가 왜적에게 투항해서 백성들을 해치는 행패가 심했다. 이에 대유(大猷)와 친분이 있는 한덕원(韓德遠), 덕구(德久) 형제들을 통하여 글을 보내, 대유(大猷)에게 화복(禍福)을 늘어놓으며 꾸짖고 타일렀으나 명령을 듣지 않자, 김수준(金秀俊), 최찬(崔贊) 등을 보내 진대유(陣大猷) 부자를 포박하여 넘겼다. 이보다 앞서 도사(都事) 박순남(朴順男)이 진대유(陣大猷)의 아들인 계수(桂樹)를 아병(牙兵)으로 삼아서 데리고 다녔다. 해월(海月) 선생이 "이 사람은 불순한 기가 있는데, 하필이면 가까이 두느냐" 고 충고하였으나, 박순남(朴順男)은 이를 무시했던 것이다. 그러나 후에 결과가 해월(海月) 선생의 말처럼 되자, 사람들은 모두 선생의 선견에 탄복했다 한다. 1593(선조 26, 癸巳)년 정월에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로 부임해 갔으며, 형조정랑이 되었다. 6월에는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었다. 1594(선조 27, 甲午)년에 다시 형조정랑(刑曹正郞)으로 되었으며, 3월에 명나라 장수(將帥) 천총(千摠) 이영춘(李榮春)과 화전(火戰)의 비방(秘方)을 논하다가, 명나라의 화전(火戰) 사용법이 매우 뛰어나자, 선생이 그 사용법을 가르쳐 주기를 간절히 간청하여서 허락받았다. 선생은 화전(火戰) 비법(秘法)을 기록하여,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보내고, 또한 그 동안 모아 두었던 방어한 일들에 대한 글을 올리기도 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은 문장에만 뛰어난 것이 아니고, 병법 또한 뛰어났다. 9월에는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 장군이 선조에게 청하기를, 병영(兵營)에는 한순간에 일이 만 가지로 벌어지는 곳이므로, 문무를 고루 갖춘 사람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데, 해월(海月)이 아니면 안 되겠다고 주청하여, 불가피하게 권율(權慄) 장군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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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회 예천세계활축제&농산물축제, 13-16일 44만5천여명 찾아 농산물 9억5천만원 판매함. 축하합니다.
예천세계활축제 제3회(第3回 醴泉世界활祝祭&農産物祝祭 44萬 5千餘名 찾아 農産物 9億5千萬 원 販賣!) [記事] : 가을이 무르익어가는 가운데 예천군이 활을 주제로 4일간 개최한 제3회 예천세계활축제를 비롯한 농산물대축제 등에 44만 5천여 명이 넘는 관람객이 다녀간 것으로 파악되고 농·특산물 9억 5천만 원을 판매하는 성과를 거뒀다고 밝혔다. 지난(2017년 10월) 13일부터 4일간 열린 2017 곤충나라 Clean예천농산물대축제는 제3회 예천세계활축제와 동시에 개최함으로써 매일 다채로운 행사를 마련해 관광객, 출향인, 자매결연 단체 등 많은 인파가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뤘다. 이번 축제에 농·특산물 판매행사에 참여한 작목반은 스스로 서비스의 질을 높이고 최고 품질의 농·특산물만을 엄선해 판매하는 것으로 입소문이 나 관광객들이 믿고 구매하면서 농가소득을 올리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된 것으로 분석된다. 예천군 관계자는 "절찬리에 판매된 품목은 쫄깃한 식감과 특유의 향이 풍부한 '표고버섯', 예천의 대표 특산품인 고소한 참기름 등은 물량이 부족할 만큼 인기리에 매진되는 사례를 보였고 축제 기간 판매고는 전년도 보다 3억 원이 늘어나 예천 농·특산물의 인기를 실감했다"고 말했다. 이현준 군수는 "활이라는 독특한 소재로 마련된 축제가 좋은 반응을 보여 많은 관람객들이 다녀갔고, 농산물축제는 청정지역 우수 농특산물 판로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번에 나타난 문제점은 보완하여 다음 축제를 더 알차게 준비 하겠다"고 밝혔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7-10-17 오전 9: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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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준 예천군수, 16일 세계전통활연맹 초대회장을 추대됨.,,축하합니다,
이현준(「世界 傳統 활 聯盟」 創立 : 初代會長으로 李鉉濬 郡守 推戴, 大陸別 國家別 支部 支會 結成) [記事] : 한국활의 중심이자, 동서양 활 문화의 접점에 있는 예천군이 활의 역사성을 바탕으로 2017년 10월 16일 「세계전통활연맹」(world traditional archery org - WTAO)을 창립했다. 활은 인류의 보편문화로 국가별로, 문화권별로 각기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다. 한국의 활은 멀리 쏘기에 특화되었고, 아마존에서는 작은 활로 물고기를 잡는다. 밀림의 활은 새를 잡기 위해 좁고 날카로우며, 초원의 활은 힘이 있고, 프랑스나 유럽의 활들은 하늘에 표적이 있다. 다양한 활쏘기의 유형처럼, 각 나라별로 특징적인 신화와 전설, 의례와 놀이가 전승된다. 그러나 주몽이나 로빗훗, 최근 어벤저스에도 등장하는 활의 영웅들은 언제나 우리를 설레게 한다. 아직도 활은 우리의 삶 가까이에 있다. 최근 활과 관련된 게임만 하여도 온라인, 모바일을 포함하여 50여개가 넘고 있다. 이러한 활의 전통문화는 올림픽을 계기로 하나의 규칙을 강조하는 스포츠 경기로 바뀌었고, 대중적 향유에서 멀어져갔다. 그러나 최근 유네스코가 문화다양성 가치를 천명하면서, 활이 가지는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졌다. 이러한 두 가지의 가치를 모두 간직한 곳이 바로 예천이다. 예천은 활의 민족 대한민국의 활과 화살을 제작하는 인간문화재를 모두 보유하고 있으며,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김진호, 윤옥희, 장용호 선수를 배출했으며 세계적인 규모의 예천진호국제양궁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동서양 활문화의 접점이자 최고봉에 있는 예천은 세계전통활연맹 창립에 충분한 역사적 조건을 가진 곳이라는 점에 이견이 없다. 여기에 2014년부터 시작된 예천세계활축제는 활을 통한 축제를 지향하는 세계 최초의 축제로 예천의 브랜드를 높이고 있다. 이번 세계전통활연맹 창립에는 프랑스, 터키, 일본, 페루, 미국 등 모두 25개 국가의 활 관련 전문가들이 참여하였고, 트루크소이 등 2개의 국제조직도 참석했다. 이날 창립식에서 세계전통활연맹 초대 회장으로 이현준 군수가 추대되었으며, 대륙별 국가별로 지부 지회를 결성하여 협력 네트워크를 갖추기로 하였다. 초대 회장인 이현준 예천군수는 “활을 통해 예천의 브랜드 효과를 높이며, 향후 유네스코 국제조직으로 인가를 받고, 활문화를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시키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을 밝혔다. 한편, 예천군은 활을 통한 국제협력을 시작하여 2015년 부탄 및 몽골과 활문화 진흥을 위한 교류와 MOU를 진행하였고, 금번 예천세계활축제를 통해 프랑스 크헤삐 엉 발루와시와, 터키의 베이올루시, 인도네시아 족 자카르타와 활문화 교류 협력을 위한 MOU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예천군은 활문화를 통한 새로운 국제문화도시로써의 위상을 높이기 시작했다.(醴泉뉴스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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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방문 1,489
예천군번영회(安東-醴泉 相互訪問 行事 : 醴泉활祝祭場·龍門寺서 열려) [記事] : 경북도·안동시·예천군·신도청지역상생발전포럼(회장 신현수)이 공동 주최하고 안동상공회의소·영남일보·예천군번영회가 주관하는 ‘안동-예천 교류협력 증진을 위한 상호방문’ 행사가 2017년 10월 14일 예천세계활축제장과 용문사 일대에서 안동시민 14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열렸다.(인터넷뉴스팀 記者 嶺南日報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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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