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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 4938 : 황여일(10)(附 예천교육지원청(교육장 최춘희), 15일 청도군에서 열린 제5회 평생학습박람회(경북)에서 ‘민화를 담은 생활 소품’ 전시로 우수상을 수상함...축하합니다./예천 출신 김현정, 18일 전통시장 활성화 아이디어 전국 공모에서 최우수상 수상...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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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晋州)에서 권율(權慄) 장군의 병영(兵營)에 있을 때, 후에 이충무공(李忠武公)이 백의종군 하면서 권율(權慄) 장군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 이 때에 이순신(李舜臣) 장군과 함께 전쟁이 일어날 기미를 함께 이야기하며, 바다에서 배를 타고 수전요해(水戰要害: 지세가 험조(險阻)하여 지키기에 편하고 공격하기 힘든 곳)를 논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이충무공(李忠武公)의 정왜록(征倭錄)에 실려 있는 것이다.
1596(선조 29, 丙申)년 5월에 선략장군행세자익위사사어(宣略將軍行世子翊衛司司禦)를 제수받았다. 1597(선조 30, 丁酉)년 승문원(承文院) 교리(敎理)에 올랐으며, 12월에는 경리(經理) 양호(楊鎬)와 제독(提督) 마귀(麻貴), 그리고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과 함께 울산의 도산성(島山城)을 공격하였다. 1598(선조 31, 戊戌)년 9월에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이 되었으며, 이 때에 명나라의 사신인 찬획주사(贊획主事) 정응태(丁應泰)의 무고(誣告)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의 조정에서는 나라의 안위가 위급함에 이에 대처하기 위해서 얼마나 고심을 하였겠는가? 크게 고심한 끝에, 그 당시 문장으로 가장 총망받는 사람을 가려 뽑아 보내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에 변무진주사(辨誣陳奏使)에, 정사(正使)로는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 (우의정)이, 부사(副使)로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선생 (이조판서)이, 서장관(書狀官)으로는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인 해월(海月) 선생이 뽑히게 되어, 10월 21(癸酉)일에 서울 서소문 모화관(慕華館)을 출발하게 되었다. 11월 10일 아침 의주(義州)에 도착하였으며, 12월 6(丙辰)일 압록강을 건넜다. 1599(선조 32, 己亥)년 1월 23(甲辰)일 비로소 북경(北京)에 도착하여 황성(皇城) 동문에 들어가서 옥하관(玉河館)에 유숙하게 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사신들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2월 25(乙亥)일 병부(兵部)에서 보내온 공문서인 자문(咨文)에는, 우리나라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와 같이 일이 이루어지지 않자 노심초사(勞心焦思)하며 대책을 마련 중에, 뒷일을 해월(海月) 선생이 맡아 수습하여 마침내는 일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당시에 우의정(右議政)으로 상사(上使)였던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 선생이 같이 갔던 사신일행(使臣一行)들과 어려웠던 상황에 대하여 주고받은 이야기를, 백사(白沙) 선생 문집(文集) 23권에 밝혀 놓았는데, 해월(海月) 선생이 이 일의 맹주(盟主: 동맹의 주재자)라 하였다. 그 당시 해월(海月) 선생은 사신(使臣)으로 명나라에 가서 많은 일화를 남겼는데, 그 중에서 몇 가지만을 소개하겠다. 해월(海月) 선생은 우리나라의 입장을 명나라 조정에서 받아들여지게 하기 위하여, 혼자 명나라의 수많은 조정 관리들과 접촉하고, 우리의 입장을 설명하였던 것이다. 그 때 만나서 그들이 우리 나라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를,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인상을 자세히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 12권에 기록하여 남겨 두었다. 사실 해월(海月) 선생은 명나라 조정의 여러 관청을 다니면서, 진정서(陳情書)를 전달하고 우리나라의 무고(誣告)를 진설(陳說)하고, 통변(痛辨)하자, 각로(閣老: 재상)와 고위관리(高位官吏)들은, 그의 언변과 논술(辭語)이 분명하고 예절바른 태도에 모두들 감탄하고는, 다투어 서로 차와 술을 대접하며 나라의 치욕을 벗겨 줄 테니, 공(公)은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하였다고 한다. 당시 명나라의 관상가(觀相家)가 조선(朝鮮)의 사신 일행 중 해월(海月) 선생을 가리키며,
『時相者來 使行 指先生 曰黃書狀生於東國 稟得萬里氣像甚可異也. 在座人曰書狀生於東海 世居小國 何以稟得萬里氣也. 相者曰信不誣矣. 稟生東海之氣書狀之量 河海弘量矣 ○○稱歎』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국(東國)에서 태어났지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났으니 매우 이상합니다." 라고 하자, 함께 같이 있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황서장관(黃書狀官)은 동해(東海)에서 태어나 대대로 소국(小國)에서 살았는데, 어찌 만리기상(萬里氣像)을 타고 태어났겠습니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상가(相者)는 "참으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동해(東海)의 기(氣)를 받고 태어난 서장관(書狀官)의 도량(度量)은 하해(河海)와 같은 분입니다." 라며 크게 탄복을 했다고 한다. 또한 이에 따른 해월(海月) 선생의 가문에 전하는 일화가 있다. 그 당시, 명(明)의 신종(神宗) 황제도 해월(海月) 선생에게 "조선(朝鮮)은 삼천리(三千里) 강토(疆土)인데, 그대는 어찌하여 만리정기(萬里精氣)를 타고나서 명(明)을 치려 하느냐?" 라고 물었다 한다. 만일 여기서 바로 대답을 제대로 못하거나, 머뭇거린다면 모든 일은 허사가 될 뿐만 아니라, 나라에 커다란 재앙이 되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조선(朝鮮)이 일본과 연합하여, 고구려(高句麗)의 옛 땅을 찾겠다는 오해로 인하여 명(明)의 황제 앞에 해명(解明)키 위해 갔던 것이 아닌가?" 그러나 해월(海月) 선생은 그 자리에서 즉시 대답하였다. "예 신(臣)의 집 앞에는 만리창해(萬里滄海)가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참으로 절묘(絶妙)하고 적절(適切)했던 것이다. 그러자 신종(神宗) 황제는 무릎을 치면서, "조선(朝鮮)에는 너 하나밖에 없구나" 라고 하여, 그 자리에서 「여일(汝一)」 이라는 이름이 「너 하나밖에 없다」 는 뜻으로 전해져 왔다고 한다.
그리고 무사히 일을 해결하고 귀국하자, 집으로 돌아와서는 즉시 동해가 바로 보이는 마악산(馬嶽山) 중턱에다, 거주(居住)하고 있는 집과 같은 집을 지어 놓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실제의 해월(海月) 선생의 집은 정남향이라, 바다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명의 조정에서 조선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황제를 농락(籠絡)했다며 트집을 잡을까 하여, 바다가 바로 보이는 곳에 집을 지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집은 몇십년 뒤에 화재로 소실(燒失)되었는데, 그 집터가 지금은 밭으로 사용되고, 그 잔해가 아직도 간혹 나오고 있다고 후손들은 이야기하고 있다. 1599(선조 32, 己亥)년 3월 18(丁酉)일, 북경을 출발하여 귀국길에 올랐다. 4월 24(癸酉)일 압록강을 건너고, 4월 25(甲戌)일에 의주(義州)에 머물렀다. 윤 4월 기해(己亥)일에 복명(復命)했다. 이때 중훈대부(中訓大夫)가 되어 5월에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뵙고, 가을에는 도산간역소(陶山刊役所)의 감독(監督)직을 맡아 퇴계(退溪) 선생 문집(文集)을 처음 간행하였는데, 물자를 조달하며 이를 도왔다고 한다.
1601(선조 34, 辛丑)년, 선생의 나이 46세의 봄에 울진의 박곡(朴谷)을 얻어 박곡기(朴谷記)를 지었으며, 10월에는 예천군수를 제수받았으며, 12월에 예천 임소에 갔다. 1602(선조 35, 壬寅)년 2월에 중직대부(中直大夫)가 되었으며, 여름에 안동(安東) 박곡(朴谷)을 얻어 정자(亭子)를 지었으며, 후박곡기(後朴谷記)를 지었다. 6월 13일 부인(夫人) 김씨(金氏)가 임소에서 사망하자, 9월 13일 김씨 부인을 수곡(水谷) 동쪽 언덕에 장사지냈다. 1604(선조 37, 甲辰)년 봄에 완산이씨(完山李氏) 덕원군(德原君) 도정(都正) 추(樞: 成宗대왕의 4세손)의 여식과 혼인하였는데, 좌의정(左議政) 약포(藥圃) 정간공(鄭簡公), 탁(琢)의 외손녀(外孫女)이다. 1606(선조 39, 丙午)년에 금성현령(金城縣令)을 제수받았다. 또한 어모장군행룡양위부사과겸여고(禦侮將軍行龍○衛副司果兼如故)를 제수받았는데, 이 때에 명나라 군이 철병을 하기 위하여, 사신(使臣)의 상사(上使)로 한림편수(翰林編修) 주지번(朱之蕃)과 부사(副使)로는 급사(給事) 양유년(梁有年)이 천자(天子)의 조칙을 반포하였는데, 이 때 조정에서는 시문(詩文)에 능한 관리를 뽑아서 사신 일행을 접대하게 하였다. 이때 해월 선생은 이들과 함께 한강에 배를 띄우고 유람하며, 시를 주고받았는데 그 시 또한 해월선생문집(海月先生文集)에 기록되어 있다. 9월에는 영천(永川) 군수를 제수받았다. 이때 영천 지방에서 날뛰던 도적떼들은 해월(海月) 선생이 영천 군수로 부임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취를 감췄다고 한다. 1607(선조 40, 丁未)년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과 선생의 장자인 중윤(中允)과 더불어 임고서원(臨○書院)에서 포은(圃隱: 정몽주) 선생 문집의 교정을 보았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흩어지고 타서 소실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구본(舊本)과 서로 비교하여 빠진 부분을 보충하며 문집(文集)을 완성시키려고 하였으나, 일개 읍(邑)의 힘으로는 일을 끝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이다. 이때 경상감사(慶尙監司)인 유영순(柳永詢)에게 청하여, 경주(慶州)와 더불어서 수개월에 걸쳐 그 문집(文集)을 완집(完集)하게 하였다. 또한 포은(圃隱) 선생의 연보(年譜)에, 포은(圃隱) 선생의 후손이 숨겨 두었던 영정을 베껴서 그려 넣었다. 7월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의 공(功)으로, 선무원종훈이등(宣武原從勳二等)의 녹(錄)을 받았다. 1608(선조 41, 戊申)년 9월 22일에 아버지가 사망하였으며, 10월 19일에 어머니가 사망하였다. 1612(광해 4, 壬子)년 창원부사(昌原府使)를 제수받았다. 1613(광해 5, 癸丑)년 봄 관직을 그만두고 귀가하여서는, 춘추(春秋)를 좋아하여 손수 연의(演義) 책 2권을 썼는데, 책의 이름은 인경연의(麟經演義)이다. 1615(광해 7, 乙卯)년에 동래(東萊)부사를 제수받았다. 당시 동래(東萊)는,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왜적들의 소굴이 되어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여러 고을이 피폐해져 있었다. 해월(海月) 선생은 먼저 백성의 주거(住居)를 안정시키는 것을 급선무로 하였다. 거주하는 곳이 안정되지 않으면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되지 않아서 체통이 서지 않는다며, 전쟁에 불타 버린 곳을 깨끗이 씻어내고, 지붕을 잇게 하고, 처하는 일마다 태만히 하지 않고, 일을 처리하는데 엄숙하고 의지가 굳으니, 왜인들이 삼가 공경하고 복종하였다 한다. 또한 정치가 어지러운 세상이지만, 학교 세우는 일을 늦출 수 없다 하여, 학문을 하는 선비를 찾아서 사대(使臺)라는 직함을 주어 훈도(訓導)의 소임을 맡기고, 정부(政府)의 재정을 축내지 않게 하기 위해, 자신의 봉록(俸祿)으로 일을 시켜 목적하는 바를 이루었다.
1618(광해 10, 戊午)년 8월에 관직을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가 해월헌(海月軒)을 만귀헌(晩歸軒)이라고 고쳐 불렀다. 9월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를 제수받았다. 1619(광해 11, 己未)년에는 약포(藥圃) 정탁(鄭琢) 선생의 행장을 찬(撰)했다. 1620(광해 12, 庚申)년 가을에는 조정의 대신(大臣)들이 경상도 감사(嶺伯)로 추천했으나, 시를 써서 정중히 거절하였다. 1622(광해 14, 壬戌)년 4월 2일 병이 심해지자 부인 이씨에게 이르기를 "죽는 것은 정해진 운명이 있는 것이라"고 이르고는, 자제들을 가르쳐 훈계하기를(敎訓) "집을 잘 돌보는 것이(保護門戶) 내가 깊이 기원하는 바이다(深祝)" 라고 하고는 살아가기 위하여 하는 일(産業)과 죽은 뒤의 일(後事)에 대하여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家席) 편안히 운명하셨으니, 이때 선생의 나이 향년 67세였다. 이때 나라로부터, 증 가선대부 이조참판겸동지 경연 의금부 춘추관 성균관사 홍문관제학 예문관제학 세자좌부빈객(贈嘉善大夫吏曹參判兼同知 經筵義禁府春秋館成均館事弘文館提學藝文館提學 世子左副賓客)이라는 직함을 증직받았다. 8월 13일 평해군의 서쪽 오태산(五台山)에 간좌지원(艮坐之原)으로 안장(安葬)하였다. 선생의 위패(位牌)는 명계서원(明溪書院)에,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선생과 함께 모셔져 제향(祭享)되고 있다. 1774(영조 50년, 甲午)년에 문집(文集) 간행(刊行)을 시작하였고, 1776(영조 52년, 丙申)년 청명절(淸明節), 문집(文集) 7책 14권이 목판(木版)으로 완간(完刊)되었다. 책 서문(序文)을 보면, 영조(英祖) 50년인 1774(甲午)년 봄에 판각(板刻)을 시작하여 영조(英祖) 52년인 1776(丙申)년 봄 청명절(淸明節)에 목판(木版) 인쇄(印刷)를 끝냈다고 나와 있는 것이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 서문(序文)은 이상정(李象靖, 1711(肅宗 37)년∼1781(正祖 5)년) 선생이 쓰셨던 것이다. 이상정(李象靖) 선생은 본관이 한산(韓山)이고, 호가 대산(大山), 자는 경문(景文)이며, 1735(英祖 11)년에 사마시와 대과에 급제하여, 1739년에는 연원찰방(連原察訪)에 임명되었으나, 관직을 버리고 고향에 돌아와 대산(大山) 서당을 짓고, 제자들의 교육과 학문 연구에 힘썼다. 1753년에 연일 현감이 되었는데, 이 때에 퇴도서절요(退陶書節要), 심동정도(心動靜圖), 이기휘편(理氣彙編), 경제잠집설(敬齊箴集說) 등 사상적(思想的) 기초를 정립한 저술(著述)을 남겼으며, 또한 사례상변통교(四禮常變通巧), 심무출입설(心無出入說), 주자어절요(朱子語節要), 독성학집요(讀聖學輯要) 등 그 밖에도 많은 저술(著述)을 남겼다. 영남학파(嶺南學派)의 근원(根源)이 되는 이황(李滉) 선생의 사상(思想)을 계승하고 전승하는 입장에서 사상적(思想的) 터전을 마련한 분이다. 그는 정조(正祖)가 왕위에 오른 뒤 병조참지, 예조참의 등에 발탁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고종(高宗) 때 이조판서로 추증이 되었다.
해월(海月) 선생의 문집(文集)은 전체가 7책 14권으로 되어 있으며, 1∼4권까지는, 시(詩)이고, 5권은, 부(賦)와 대책(對策)과 론(論)이며, 6권은, 서(書), 7권은, 소(疏), 장계(狀啓), 교(敎), 전(箋), 표(表), 송(頌), 기(記), 서(序), 발(跋), 8권은, 잡저(雜著), 제문(祭文), 9권은, 은사시(銀○詩), 10∼12권은, 은사일록(銀○日錄), 13권은, 전(傳), 묘지(墓誌), 행장(行狀), 14권은, 부록(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 문집(文集)의 발문(跋文)을 쓴 이세택(李世澤, 1716(肅宗 42)년∼1777(正祖 1)년) 선생은 조선 후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진성(眞城)이며, 자는 맹윤(孟潤), 호는 조은(釣隱)이며 예안 출신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8대손이다. 1753(英祖 29)년에 정시문과 2등으로 급제하였으며, 1762년에 우부승지에 오르고, 이듬해 대사간이 되었으나, 신임사화의 죄인인 이광사(李匡師)를 정계(停啓)하지 않았다 하여 삼사(三司) 모두가 유배(流配)를 당하였다. 도승지 홍명한(洪名漢)과 병조판서 이지억(李之億) 등이 임금의 뜻에 따라 정계(停啓)에 응할 것을 권(勸)하였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성격 또한 대쪽같이 곧은 품성(品性)을 지닌 분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조(正祖)가 즉위하자 대사헌(大司憲)이 되었으며, 또한 찬집당상이 되었다. 또한 해월(海月) 선생의 신도비문(神道碑文)을 쓰신 분은 이유원(李裕元) 선생인데, 이항복(李恒福) 선생의 후손인 것이다. 이유원(李裕元, 1814(純祖 14)년∼1888(高宗 25)년) 선생은, 조선 말기의 문신(文臣)이며,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경춘(京春), 호는 귤산(橘山) 묵농(默農)이다. 1841(憲宗 7)년 정시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검열, 규장각 대교를 거쳐, 의주 부윤, 함경도 관찰사를 지내고, 고종(高宗) 초에 좌의정(左議政)에 올랐으나,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의 반목으로 1865(高宗 2)년 수원 유수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그 해 말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전임되고, 1873년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이 실각(失脚)하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로 서임되었다. 또한 학문(學問)에 능하여 임하필기(林下筆記), 가오고략(嘉梧藁略), 귤산문고를 남겼으며, 예서에도 능하였다.
해월(海月) 선생은 국가에 큰 공(大功)을 세우고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는데, 이는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의 일인자(一人者)로 일컬어졌던 당대(唐代) 한유(韓愈)의 여우양양서(與于襄陽書)에 나오는 다음 구절들을 보면, 그 이유를 잘 대변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士之能享大名顯當世者 莫不有先達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前焉./ 士之能垂休光照後世者 亦莫不有後進之士負天下之望者爲之後焉莫爲之前 / 雖美而不彰 莫爲之後 雖盛而不傳』 / 선비(士)로서 명성을 올려 그 시대에 유명하게 되는 자는, / 그 사람보다 선배(先輩)로서 천하(天下)의 인망(人望)을 갖고 있는 자가 앞서서 추천(推薦)하지 않는 일은 없고, / 또 선비(士)로서 뛰어난 공적을 남겨 후세까지 명성을 나타내는 자는, / 그 사람의 후배로서 천하의 인망(人望)을 얻고 있는 자가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는 자가 없다. / 앞서서 추천하지 않으면 후배는 아무리 아름다운 재주와 덕을 지니고 있어도 세상에 나타날 수가 없고, / 뒤에서 이를 밀어 세우지 않으면 선배의 사업이 아무리 성대(盛大)해도 후세에 전해지지 않는다(不傳).(daum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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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교육지원청(교육장 최춘희), 15일 청도군에서 열린 제5회 평생학습박람회(경북)에서 ‘민화를 담은 생활 소품’ 전시로 우수상을 수상함...축하합니다.
예천교육지원청(醴泉敎育支援廳, 平生學習博覽會서 ‘優秀賞’ 受賞 : 민화를 담은 生活 소품 展示) [記事] : ‘제5회 평생학습박람회’가 2017년 10월 13일부터 15일까지 청도군에서 열린 가운데 예천교육지원청(교육장 최춘희)이 작품 전시관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경상북도교육정보센터에서 주관한 이번 작품 경진대회에는 경북 시ㆍ군 별 총 22개 기관이 참여했으며, 예천교육지원청은 “새천년의 혼을 담은 민화, 생활 속으로!”라는 주제로 전통 민화가 생활 속의 다양한 작품으로 만들어 질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 우수상 수상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최춘희 교육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민화의 또 다른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어 더 큰 의미가 있었다.”고 했다.(醴泉뉴스 2017.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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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 출신 김현정, 18일 전통시장 활성화 아이디어 전국 공모에서 최우수상 수상...축하합니다.
김현정(慶北道 主催 傳統市場 活性化 아이디어 公募, 醴泉郡 出身 김현정 氏 '最優秀賞' 受賞!) [記事] : 경북도가 급격한 유통환경의 변화로 어려움에 처한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해 2017년 5월 30일부터 한 달 동안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시장별 특성화 방안, 서비스 및 마케팅 개선 등 전통시장 활성화를 위한 아이디어를 공모한 결과 예천군 김현정 씨가 최우수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경북도는 공모 결과 전국에서 총 66건의 다양한 아이디어가 접수되었으며, 심사위원회에서 창의성, 사업 적합성, 파급효과, 구체성 등에 중점을 두고 엄격한 심사 끝에 최우수상 2건, 우수상 4건, 장려상 12건 등 총 18건을 최종 선정했다. 최우수상의 영예는 시장별 컬러마케팅을 통한 이미지 개선 및 방문객 증대 방안인 '색색마켓 프로젝트'를 제시한 김현정(37 )씨가 선정되어 도지사 표창과 함께 상금 100만 원을 받았다. 한편, 경북도는 당선작 아이디어를 책자로 발간하여 전국 전통시장관련 기관 단체 및 상인회 등에 배포하고 (재)경상북도경제진흥원 홈페이지(//www.gepa.kr)에도 게시하여 적극 홍보할 계획이다.(정차모 記者 醴泉인터넷뉴스 2017-10-18 오전 11:3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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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