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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자랑 4971 : 황효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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兵服을 입고 일본식 총기를 휴대하는 등 바로 日人이 흉도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풍문이 있으므로 방문한 김에 貴官을 만나 흉도 중에 일인의 有無, 또 그 죄상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고 모르는 체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國家經倫 등을 주장하는 意氣를 가진 무리가 아니라 단지 剽盜野賊에 불과하며 평판할 정도의 자가 아니다. 박영효 관계 운운과 같은 것도 그들이 財貨를 약탈하는 구실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일인이 흉도 중에 있다는 것은 사실 무근의 풍설로 우리나라의 하류 도배들의 집합 단체이다. 그러나 절친한 귀관이라 할지라도 그들과의 면회는 허락하기 어렵다.”면서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그러더니 술자리에서 公事를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없다고 하며 활빈당 이야기를 싫어하는 기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이번의 흉도 토벌의 공을 자랑하는 듯한 기색을 보고 거기에 편승하여 “士氣顯豪하고 勇壯한 휘하 장졸이 勅命을 받들고 흉도를 정토하여 이렇게 큰 공을 세울 수가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貴官의 훈련이 적절했던 공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勇將 밑에 弱卒이 없다.”는 등 크게 칭찬하고 물러났다. 생각하건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드러나게 운동을 해서는 도저히 성공할 가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대대장은 흉도를 조사할 때에는 매번 자신의 거실에서 신문하며 주위에 경계를 엄격히 하여, 서기를 시켜 받아 적게 하는 외에는 장교라 할지라도 듣지 못하게 하고 매우 비밀스럽게 조사했기 때문에 대대장 및 서기관을 제외하고 사실의 진상을 아는 자가 없으며, 다른 말들은 모두 떠돌아다니는 헛소문에 불과했다./ 더구나 國政을 논하는 것은 臣子의 도리가 아니라는 당국의 일반적 습속에 따라 철저히 함구하여 전부터 절친한 중대장 李奎煥과 같은 경우 어지간히 多辯인 인물인데도 본건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는 바가 없었다.
그 위에 탐문한 단서조차 얻을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중 숙소 주인인 이성초가 다행히 대대장의 서기와 친교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한 가닥의 단서를 얻었다. 이 자를 이용하여 서기를 매수하기로 결심하고, 李로 하여금 서기에게 상의하게 하였다. 이번에 활빈당이 진술한 조서와 대대장이 작성한 보고 서류 등의 일체를 손에 넣을 수만 있으면 상당한 보수를 주겠다고 밀담하였더니 서기는 크게 두려워하며 “국가 안위에 관련된 일이니 만약의 경우에 발각되면 그 죄가 삼족에 미치는 대죄이다.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꺼림칙한데 아무리 친구라 할지라도 그런 요구에 응할 수 없다.”면서 사절하고 돌아갔다. 그렇지만 李의 말로 서기는 가난한데 식구는 많아 의식에 어려움을 면치 못하는 사람이라면서 다소 동정심을 나타냈기 때문에 또다시 李를 사이에 세워서 다소 주머니 사정이 좋아지게 하였더니 간신히 관계 서류 일체를 베껴 주기로 상담을 끝냈다. 그런데 15일에는 낮에 그런 중요한 서류를 취급할 수가 없으니 오늘밤 심야를 기다려 할 것이라고 하였다. 16일 첫 새벽 무렵이 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 李로 하여금 누차 재촉을 시켰지만 아직 일을 진행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하며, 그날 밤에는 철야를 해서 성취시킬 것이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17일 아침에 이르러 겨우 일건 서류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이보다 앞서 대대장은 이면에서 숙소 주인인 이성초의 가택 부근 또는 同家로 통하는 길목에 平服한 副校 몇 명을 보내어 소관의 동정 또는 출입하는 인물에 주의시키고, 표면에서는 配下의 장교 등에게 내심을 안심시켜 약간의 틈도 주지 않기 위해 여정이 쓸쓸하겠다는 따위의 명분을 꾸며서 방문하게 하거나, 아니면 會飮을 구실로 초대하거나, 어쨌든 小官의 운동을 에둘러 방비하고자 시도하는 흔적이 있었으므로 멍하게 표면은 무위를 가장하고 앉아서 時事의 응답을 하는 데 그쳤다./ 그는 또 흉도는 노상강도의 野賊에 불과하다고 말했지만 심중은 결코 그렇지가 않았다. 흉도가 태연자약하여 거리끼는 바도 없이 계획과 기도한 요점에 대해 도도히 진술하는 바, 어쩌면 강경한 후원자가 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품고 흉도의 계획이 성공하여 신 정부가 수립되면 뜻하지 않은 재난이 있을 것을 생각하여 囚禁 중인 흉도를 우대하여 특히 술과 담배를 허락하고 의식을 개선하고 공손하게 대하는 등 크게 주의를 加하고 있다고 했다./ 또 그들은 일개의 초적이라 할지라도 앞에 말한 것과 같은 의구심을 품을 뿐만 아니라 정부의 엄명이 있는 것으로 보여 밤낮으로 끊임없이 동서남북의 4문에 초병을 세우고 성내외에 무장한 병졸을 순라시키는 등 전선의 경계와 다를 바가 없이 용이하지 않은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곳 민심도 따라서 불안을 느껴 난리의 징조라는 등의 말까지 퍼지고 있었다./ 또 그곳에 재류하는 對馬人 八島善七은 대대장 이하 장교들과도 교제를 맺고 다소 신용을 얻어 매약 잡화 등을 장사하는 자인데, 이달 10일에 수금되어 있는 흉도의 부상 치료를 위해 불려 가서 營倉에 이르러 양 중대장의 입회하에 치료를 하였다고 한다. 그때에 八島가 일본말로 “너희들은 무엇 때문에 이렇게 보기 흉한 활동을 하였느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우리는 국가 존립에 관한 운동을 한 것인데 어찌 보기 흉하다고 말할 수 있겠느냐.”고 대답하고, 태연자약하여 조금도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이런 일로 두 번 獄囚를 만날 수 있었는데, 확실히 박영효와 연락이 닿아서 일을 꾸민 것인지, 이 한 가지만은 직접 물어 봐 달라고 부탁해 두었다. 위 부상자는 한 사람으로 후두부의 깊이 1寸쯤의 총상이었다고 한다./
別紙 중에 포박된 흉도의 압송 및 성명 등이 분명하지 않은 점이에 대해서는, 전부터 첩자로 이용하고 있는 한국 순검 朴吉浩(우리 순사에 해당)가 가져온 密報로, 그에 의하면, 낙동강의 하류 熊川郡 내에서 흉도를 포박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 扶安의 나루터로 나가 마산에 와서 일박하고, 여기서 승선시켜 副校 이하 15명의 병사가 통영에 호송한 것으로 그 흉도의 주소 성명은 아래와 같다고 함./ 京城居 河元洪 李炳煥 嚴極鳳 朴基好/ 釜山居 張泰元 (日語를 안다)/ 醴泉居 黃孝辰/ 元山居 金基見/ 平壤居 李性一/ 蔚山居 金七南/ 仁川居 李用郁 (日語를 안다)/ 이상의 10명으로 이들은 한국 경무서의 옥사에 일박 수감되었을 때에 조사한 내용이라고 한다./ 別紙를 첨부하여 이 점 보고드립니다./ 1900년 9월 19일/ 在馬山 日本領事館소 속 警部 境益太郞 印/ 領事 坂田重次郞 殿(//db.history.go.kr/ 2014)
황효진 : (56) 活貧黨就縛者의 진술에 관한 件/機密公第53號/ 서명 駐韓日本公使館記錄 15권|八. 機密馬山領事館來信 一·二/ 발신자 在馬山 領事 坂田重次郞/ 날짜 1900-09-21/ 분류 문서 > 개항기 > 주한일본공사관-통감부문서/ (56) 活貧黨就縛者의 진술에 관한 件機密公第53號 이번에 당국 慶尙道에서 일어난 活貧黨의 수령으로 생각되는 河元洪, 嚴柱鳳 외 9명이 앞서 포박되어 銃營·固城에 있는 地方隊에 압송된 바 있었는데, 이 당원들은 우리나라에 망명 중인 한인과 어떠한 기맥을 통하고 있다는 풍문이 있으므로 통영에 있는 우리나라 사람의 보호 및 정황 시찰을 겸해서 포박된 자의 실정을 정찰하기 위해 이달 11일 當館 소속 境 警部를 통영에 파견하였습니다.
그가 18일에 돌아와 보고한 바에 의하면, 동 경부는 전부터 그곳에서 日本人 도매상을 영업으로 하는 李聖樵란 자를 이용하여 노심초사한 끝에 고성 지방대장의 秘書 某를 통해 韓國 정부에 대한 동 대장의 활빈당 포박자 조사에 관계되는 보고서 사본이라는 것을 입수하였습니다. 이 보고서에 의하면, 그들 당원이 大隊長의 訊問에 대해서 한 진술의 요점은 “이번의 활빈당은 전적으로 朴泳孝가 기획한 바로서 그 목적은 日·露의 朝鮮 분할을 거부하고, 국가의 안태를 꾀하는 데 있으며, 그 자금으로 금 50만 원을 조선 남부에서 모아 일본에서 병기를 구입하고 올해 10월 일본을 이용하여 京城을 덮쳐 義和君을 황제로 받들 계획이다. 운운”하는 것이었습니다(이상 요점은 이달 19일에 전보). 그래서 別紙 대대장의 보고서 原文 요점의 사본 甲, 乙 및 참고를 위해 同上 번역문(원문에 불명한 점이 적지 않기 때문에 추측을 가하여 번역한 곳도 있으므로 다소 오역된 점이 있을지도 모름) 및 境 경부의 복명서를 진달하니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점 보고 드립니다. 敬具. 1900년 9월 21일在馬山 領事 坂田重次郞印在京城 特命全權公使 林權助 殿[活貧黨을 조사한 固城地方 隊長의 報告書 寫本][活貧黨을 조사한 固城地方 隊長의 報告書 寫本] 이번에 포박당한 활빈당원을 當隊에 압송해 온 당일 그들 一同이 진술하는 바에 의하면, 그들은 발기문을 박영효로부터 받고 그 취지를 富民에게 전하여 돈 幾萬 兩을 모금하여 본국에 다시 후환이 없도록 조치한 뒤 올해 10월에 이르러 당원들이 각처에서 봉기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들을 本 營倉 內에 枷囚한다. 이번 보고 중에 나열하는 賊徒의 형적에 대해서 앞서 전보한 바가 있는데, 엄중 조사한 후 보고하라는 回訓이 있었으므로 査問한 바에 의하면, 河와 嚴두 사람은 실제로 박영효의 지휘를 받았기 때문에 作亂의 죄를 면하기 어렵다. 그러나 3李·趙·朴의 무리는 단지 河·嚴 두 사람의 사주를 받은 것에 불과하므로 罪責이 없다. 어린 두 아이와 같이 필경 남의 심부름을 하러 다니는 하인의 무리로 콩과 보리를 변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이니 방면하여도 지장 없으리라 믿는다. [活貧黨 訊問調書][活貧黨 訊問調書] 訊問보고一. 朴泳孝가 명령하기를 蔚山의 부호 兩朴 및 梁山 부호 安과 金中軍에 명하여 돈 50만 兩을 출금케 하여 지폐로 교환해 오면 이를 밑천으로 하여 護國의 계획을 할 것이라고 하며, 이 令符를 주었다.一. 울산의 부호 朴으로부터 出金한 돈 4만 兩 및 密陽의 세 부호, 울산의 두 부호, 양산의 부호 김중군 등으로부터 출금한 돈은 모두 釜山 絶影島에 居住하는 金泰奉 앞으로 외환어음으로 보내게 하여 수령하고, 합계 수십만 兩을 迫間의 손을 거쳐 日本에 있는 박영효에게 外換으로 송금하였다. 그리고 위의 환금의 영수증 및 영부는 大隊長에게 제출하였다.一. 도대체 박영효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하면 근래에 일본과 러시아가 밀약을 맺고, 조선의 서북은 러시아가 이를 관할하고, 삼남은 일본이 이를 관할하고자 하는 기획이 있기 때문에 박영효가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해 계획하는 바가 있어 金鳳儀에게 명하여 영부를 지니고 삼남지방에 명령하게 하였다.
一. 아무리 의화군, 박영효가 일본에 의해 衣食한다고는 하나 일·러가 일시에 모국을 망치게 함을 보는 것은 정말이지 통분의 극치이기 때문에 일·러 양국이 조선을 해치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50만 圓의 돈을 요하는 것이다.一. 올해 10월에는 의화군, 박영효가 경성으로 돌아와서 나라를 위해 도모할 작정이다. 조선 8도에는 지금 말할 만한 사람이 없다. 이것이 오로지 귀국 준비를 하는 이유이다.
一. 돈 50만 원을 무엇을 위해서 사용하느냐고 하면, 이로써 일본의 軍器를 구입하여 10월에 군사를 일으켜 바다를 건너 경성을 덮쳐 의화군을 황제로 받드는 계획에 요하는 것이다.一. 올해 11월에 일이 성취된 뒤에 斷髮令을 발포하여 일본적 개화를 시행할 것이다.一. 일본이 과연 삼남지방을 자국의 영토로 하여 그 의지를 행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50만 냥을 밑천으로 하여 꾀어서 일본을 응징할 것이다.一. 원래 조선은 일본과 형제의 나라이기 때문에 개화만이라도 이끈다면 부족함이 없을 것이라고 한 말을 구실로 하여 일본이 만일 삼남지방을 점령하고자 하면, 박영효는 역시 이에 대해서 계획이 있다. 이것이 삼남의 부호로부터 금전을 모은 까닭으로, 우리들은 결코 草賊이 아니라 참으로 나라를 생각하는 志士이다.一. 돈 50만 원이 한데 모이면 박영효는 일본을 권유하여 한국을 안정시켜 의화군을 황제로 받들고, 그런 뒤에 일본에 등을 돌리려고 한다. 돈 50만 원의 주선은 실로 이러한 용도에 이바지하게 하기 위해서이다.一. 이 거사는 전적으로 호국안민에 있다. 그리고 일본과 조선은 원한이 있는 나라이다. 이를 갚기 위해 돈 50만 원을 요한다. 날마다 訊問한 내용은 위와 같다. 活貧黨의 情況視察 報告在馬山 日本領事館소 속 警部 境益太郞領事 坂田重次郞 1900년 9월 19일活貧黨의 情況視察 報告 이번에 蔚山, 梁山 등의 각지에서 폭도가 봉기하여 그 세력이 창궐하여 民財를 빼앗고 갈수록 폭위를 떨치기 때문에 당국 정부는 鎭衛 第3聯隊(즉 銃營)에서 100명을 파병하여 진압하라고 명을 내리고 同地로 향하게 하였다. 그런데 적도는 熊川郡의 연안 洛東江을 내려갈 때에 관병에 의해 나포되어 當港에서 승선시켜 통영으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의 賊情 정찰을 하기 위해 출장 명령을 받고 11일 오전 9시에 출발하여 그날 鎭海에서 숙박하고, 이튿날 12일 이른 아침에 출발하여 오후 5시에 이곳에서 順路를 통과해야 되는 통영 東門에 도착하였다. 문에는 2명의 哨兵이 兵哨를 서서 총검을 들고 엄중하게 경계를 하여 출입하는 자마다 일일이 신분을 확인하였다. 小官도 역시 멈춰서라는 口令에 접하고 말을 멈춰 서게 하였다. 1명의 상등병이 먼저 명함을 보며 무엇 때문에 왔는지 물었기 때문에 통상적인 경찰 사무상 우리 인민의 보호 단속을 위해 순회하는 것이라는 취지로 대답하였다. 副校(우리 曹長에 해당)가 나와서 거듭 묻기에 앞의 말을 되풀이하여 이에 대답하니, 그렇다면 통행해도 지장 없다고 하여 이렇게 허가를 얻어 간신히 동문에 들어가 매양 止宿하는 李聖樵의 집에 이르렀다. 얼마쯤 있다가 한 병졸이 대대장 參領(우리 少佐에 해당) 李鐘觀씨의 명함을 들고 와서 “친교가 있는 貴官이 통영에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오늘 저녁에는 서둘러야 할 용무가 많으니 내일 아침에 병영으로 나오시면 서로 옛정을 나누자.”고 제의하였다. 이는 본 여행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것이다. 13일 이른 아침에 명함을 내밀도 면회를 청하였더니 대대장은 크게 호의로 상대하며 時事의 인사와 또한 快談을 나누었다. 그런데 때마침 정부의 電命으로 또다시 賊地에 파병해야 하는 動員評議가 한창이어서 대장 이하 장교가 회동하는 때이므로 兇徒 운운하고 담화를 나누는 것이 득책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대대장이 한가할 때에 다시 면회하겠다고 하고 물러났다.
그런데 볼일이 있어 외출한 宿所主人 이성초를 도중에 병영에서 불러서는 대대장이 직접 同人을 인견하고 말하기를 “이번에 일본 경무(小官을 일컬음)가 이곳에 온 것은 결코 他意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營倉에 수감 중인 賊情을 알아보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대는 깊이 그의 신변에 주의하여 어떠한 인물이 출입하는가, 또 어떠한 수단을 취하는가, 그 동정 하나하나를 本營에 통보하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훗날 욕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협박했다고 李는 두려운 나머지 나에게 털어놓았다. 14일에 재차 파견하는 인원은 4小隊長 金副尉가 거느리고 출발하였다. 그 후 대대장은 公事에 다소 짬이 생겨 박주로 친구를 만나 옛정을 새로이 하자는 뜻을 전해 왔기 때문에 곧 營內로 찾아갔더니 대대장은 자신의 거실로 안내하여 극진히 대접하고 조선 일류의 酬酌에 여념이 없어 조금도 격의가 없는 것 같았다. 때마침 다른 사람이 없는 좋은 기회를 얻었으므로 그럴싸하게 활빈당 봉기의 건으로 담화를 옮겨 “小官은 이번에도 전례대로 우리 상민과 어민 등을 보호·단속하기 위해 이곳에 출장 온 것이다. 그런데 길에서 들으니 ‘이번에 울산 지방에서 봉기한 활빈당이 捕獲되어 營倉에 구금되어 있다. 그 당원 중에는 일본인도 끼어 있다. 兵服을 입고 일본식 총기를 휴대하는 등 바로 日人이 흉도에 가담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는 풍문이 있으므로 방문한 김에 貴官을 만나 흉도 중에 일인의 有無, 또 그 죄상 등을 상세히 알 수 있다면 다행이겠다.”고 모르는 체하고 물었더니 “그들은 國家經倫 등을 주장하는 意氣를 가진 무리가 아니라 단지 剽盜野賊에 불과하며 평판할 정도의 자가 아니다. 박영효 관계 운운과 같은 것도 그들이 財貨를 약탈하는 구실에 불과하다. 더군다나 일인이 흉도 중에 있다는 것은 사실 무근의 풍설로 우리나라의 하류 도배들의 집합 단체이다. 그러나 절친한 귀관이라 할지라도 그들과의 면회는 허락하기 어렵다.”면서 화제를 딴 데로 돌렸다. 그러더니 술자리에서 公事를 이야기하는 것도 재미없다고 하며 활빈당 이야기를 싫어하는 기색이 있을 뿐만 아니라 정상을 쉽사리 알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으므로 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이 득책이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이번의 흉도 토벌의 공을 자랑하는 듯한 기색을 보고 거기에 편승하여 “士氣顯豪하고 勇壯한 휘하 장졸이 勅命을 받들고 흉도를 정토하여 이렇게 큰 공을 세울 수가 있었던 것도 전적으로 貴官의 훈련이 적절했던 공으로 돌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勇將 밑에 弱卒이 없다.”는 등 크게 칭찬하고 물러났다. 생각하건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드러나게 운동을 해서는 도저히 성공할 가망이 없을 뿐만 아니라, 더구나 대대장은 흉도를 조사할 때에는 매번 자신의 거실에서 신문하며 주위에 경계를 엄격히 하여, 서기를 시켜 받아 적게 하는 외에는 장교라 할지라도 듣지 못하게 하고 매우 비밀스럽게 조사했기 때문에 대대장 및 서기관을 제외하고 사실의 진상을 아는 자가 없으며, 다른 말들은 모두 떠돌아다니는 헛소문에 불과했다. 더구나 國政을 논하는 것은 臣子의 도리가 아니라는 당국의 일반적 습속에 따라 철저히 함구하여 전부터 절친한 중대장 李奎煥과 같은 경우 어지간히 多辯인 인물인데도 본건에 관해서는 한 마디도 말하는 바가 없었다. 그 위에 탐문한 단서조차 얻을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중 숙소 주인인 이성초가 다행히 대대장의 서기와 친교가 있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여기에 한 가닥의 단서를 얻었다. 이 자를 이용하여 서기를 매수하기로 결심하고, 李로 하여금 서기에게 상의하게 하였다.
이번에 활빈당이 진술한 조서와 대대장이 작성한 보고 서류 등의 일체를 손에 넣을 수만 있으면 상당한 보수를 주겠다고 밀담하였더니 서기는 크게 두려워하며 “국가 안위에 관련된 일이니 만약의 경우에 발각되면 그 죄가 삼족에 미치는 대죄이다. 입 밖에 내는 것조차 꺼림칙한데 아무리 친구라 할지라도 그런 요구에 응할 수 없다.”면서 사절하고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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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