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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연보 2 : 1165(고려 의종 19)-1389(고려 공양왕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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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65(毅宗 19) : 자엄 대사(資嚴大師)가 용문사 주지(龍門寺住持)로 부임하여 조응 대사(祖膺大師)의 시주 사재(施主私財)에 힘을 얻어 도장당(道場堂, 現 大藏殿) 3칸과 승방(僧房), 주소(廚所), 창고 등 93동을 짓기 시작함. 불반(佛盤), 당번(幢幡), 범안(帆案), 향로(香爐), 등공(燈공) 등을 받아들여 쓰고, 부초(釜초), 속해(束海), 족관(足灌), 분영(盆영) 등을 갖춤
1166(毅宗 20) : 용문사(龍門寺), 기존 건물의 지붕을 왕명으로 수리함
1170(毅宗 24) : 임춘(林椿, 醴泉西本), 무신의 난 때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생명을 보전함.
1172(明宗 2) : 6월 25일(壬戌日)에 좌승선 이준의(李俊儀)가 아뢰기를, "각 주 관하(州管下)의 53개 현(縣)에 각각 감무(監務)를 배치하고 안동 관하(安東管下)의 보주(甫州, 醴泉)는 태자(太子)의 태(胎)를 보관(保管)한 곳이므로 현령(縣令)으로 승격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명령하여 이 문제를 토의하게 하였으나 이준의(李俊儀)는 권력이 대단한 데다가 성질조차 고약하였기 때문에 그의 옳고 그른 데 대하여 어떤 사람도 감히 논의하지 못하였음(高麗史 19卷) ᄋ 태자(太子, 도, 後에 第22代 康宗)의 태(胎)를 용문사(龍門寺) 문밖 좌비봉두(左臂峰頭)에 묻고, 용문산 창기사(龍門山昌期寺, 或은 作基寺)라 개칭함과 동시 축성수법회(祝聖壽法會)를 설치하여 복전(福田)으로 승려들의 생활에 충당하도록 함. 또한 태자(太子)의 태(胎)를 용문사 경내에 묻었기 때문에 안동 관내(安東管內)에 있던 보주(甫州)를, 기양현(基陽縣)이라 개칭하고 현령(縣令)을 보냄. 기양현 현령(基陽縣縣令)은 조부(租賦), 공역(貢役)을 부과 징수(賦課徵收)하고 향토의 치안을 담당함. 이 때 감천현(甘泉縣)은 안동의 월경지(越境地)가 됨. ᄋ 용궁군(龍宮郡)에 감무(監務)를 설치함. ᄋ 7월 경상도(慶尙道)를 경상주도(慶尙州道)로 개칭함
1173(明宗 3) : 국내외가 크게 어지러워 용문사(龍門寺)에 3만승재(三萬僧齋)를 세우는 동시, 자엄 대사(資嚴大師)가 대장전(大藏殿) 3칸(堂三間, 寶物 145號)과 윤장대(輪藏臺) 2좌(寶物 684號)를 낙성하고 7일 간 법회(法會)를 열고 개태사(開泰寺)의 승통 영뇌(僧統潁뇌)를 초청하여 강연을 했는데 취학자(聚學者)가 300여 명이나 됨
1179(明宗 9) : 15년 간 지속되던 용문사(龍門寺) 93동의 중건 공사(重建工事)가 모두 마무리 됨과 동시에 선종 9문 학도(禪宗九門學徒) 500명을 모아 50일 간에 걸쳐 상호 담선회(相互談禪會)를 열고, 단속사(斷俗寺)의 효돈 선사(孝惇禪師)를 모셔다가 전등록(傳燈錄), 능엄경(능嚴經), 인악집(仁岳集), 설보집(雪寶集), 고송(枯頌) 등을 강의함
1185(明宗 15) : 용문사 경내(龍門寺境內)에 용문사중수비(龍門寺重修碑)를 세웠는데 산기상시 이지명(散騎常侍李知命)이 비문(碑文)을 짓고, 보제사(普濟寺)의 연의 선사(淵懿禪師)가 비문을 썼음. ᄋ 보조국사 지눌(普照國師知訥)이 보문사(普門寺, 보문수계)를 중건하였는데, 극락보전(極樂寶殿), 나한전(羅漢殿), 운계암(雲溪庵), 염불당(念佛堂, 大房), 산신각(山神閣), 반학루(伴鶴樓), 원당(院堂), 조실(祖室) 등을 중창(重創)하고, 나한전 본존석가존상(本尊釋迦尊像)의 표증 석탑(表證石塔)으로 운계암 뜰에 보문사삼층석탑(普門寺三層石塔)을 제조 건립함
1191(明宗 18) : 임춘(林椿, 醴泉邑人)의 시문(詩文)이 <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실림
명종 때 : 국자좨주 임유정(國子祭酒林惟正, 西本), 서본리 굴모리 근처에 나무를 심어 숲을 이루게 하고, 유정수(柳汀藪)라 함
1193(明宗 20) : 운문산(雲門山)에서 김사미(金沙彌)의 난이 일어나자 왕은 대장군 전존걸(大將軍全存傑), 장군 이지순(將軍李至純, 執權者 李義旼의 子) 등으로 하여금 치게 함. 그러나 이지순(李至純)이 적과 밀통하므로 전존걸은 화가 나서 "만일 내가 법으로서 이지순을 다스린다면 그의 아버지가 반드시 나를 해(害)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적의 세력이 더욱 커질 것이니 누구에게 죄를 돌려야 할까?"라고 탄식하고, 기양현(基陽縣, 醴泉)에서 약을 먹고 자살함
1194(明宗 24) : 중서시랑평장사 임민비(中書侍郞平章事林民庇, 醴泉東本), 사망함
1203(神宗 6) : 이좌(李佐) 등 경주(慶州)의 별초군(別抄軍)이 난을 일으켜 운문(雲門), 울산 등지의 난민과 함께 1월에 기양현(基陽縣)에 침입함. 이 때 집권자 최충헌(崔忠獻)이 파견한 남도초토사 치병마좌도사 최광의(南道招討使置兵馬左道使崔匡義)가 군사를 이끌고 기양현(基陽縣)에 와서, 이 곳 흑응산성(黑鷹山城)에서 태백산(太白山)의 두목 아지(阿只)를 비롯한 많은 적들을 사로잡기도 하고 죽이기도 함. 아지 등은 개경(開京)으로 보내어 옥중에서 굶기어 야위어 죽게함. 최충헌이 이 사실을 왕께 아뢰자, 왕이 중사(中使)를 보내어 조서(詔書)를 가지고 보약(補藥)을 내려 주어서 최광의(崔匡義)를 치하(致賀)함(高麗史 100 列傳 134 丁彦眞傳)
1204(神宗 7) : 경주 등지의 민란 평정을 계기로, 최충헌(崔忠獻)의 강력한 주장에 의하여 경상도를 상진안동도(尙晋安東道)라 하고, 기양현(基陽縣)을 보주(甫州)로 승격하여 지사(知事)를 두게 됨
고려 때 : 청룡사석조비로자나불좌상(靑龍寺石造毘盧遮那佛坐像, 龍門仙里, 寶物 425號), 제작 안치됨
고려 중엽 : 예천화전리석불좌상(醴泉花田里石佛坐像, 柳川), 제작 안치됨
1222(高宗 9) : 임춘(林椿, 醴泉人)의 <서하집(西河集)>이 초간(初刊)됨
1274(元宗 15) : 삼중대광 벽상공신 임지한(三重大匡壁上功臣林支漢, 西本)의 공로로 상주 관내(尙州管內)인 다인현(多仁縣)이 보주(甫州)에 편입됨. 경주의 최종(崔宗), 최적(崔積), 최사(崔思)의 무리가 청송 주왕산(靑松周王山)에 만여 병력을 모아 놓고 이웃 고을 수령(守令)을 죽이고, 곡식을 약탈하고 서울을 침범하려 하자, 정남대장군 임지한(征南大將軍林支漢)의 용맹과 계략으로 만여 적을 생포함. 이 공으로 다인현(多仁縣)은 보주(甫州)의 월경지(越境地)가 됨
1276(忠烈王2) : 장한문(張漢文), 보주부사(甫州副使, 醴泉郡守)로 부임함. 한문의 처음 이름은 준(悛), 1258년(高宗 45) 문과에 장원 급제(壯元及弟), 1276년(忠烈王 2)에 경상도 보주 부사(慶尙道甫州副使)를 지냈는데, <고려사> 권 제107의 권단전(傳)에서, "권단이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 現 道知事)로 있을 때(1276)...보주 부사 장준(甫州副使張悛)은 집이 단산(丹山, 現 丹陽)에 있어 보주(甫州)와 가까웠고...장준은 과거(科擧)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한 자이다..."라고 기록함.
1278(忠烈王 4) : 3월 15일(戊戌日), 왕명으로 보주(醴泉), 용궁군의 공부(貢賦 : 租稅, 貢納)는 태부(大府)와 영송 소부(迎送小府) 등의 창고에 바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다 원성전(元成殿, 대장공주 전)으로 보내어 바치도록 함(高麗史 28卷)
1281(忠烈王 8) : 8월 정축일(丁丑日) 왕이 공주와 함께 보주(甫州)에 들리니 부사(副使, 郡守) 박린(朴璘)이 개울(漢川) 위에 모정(茅亭)을 짓고 연회(宴會)를 베풀었으므로 측근자들이 모두 그를 칭찬하였고, 다음으로 안동부(安東府)에 이르니 부사 김균(府使金균)이 채붕(채棚)을 가설하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왕을 맞이함. 안동 판관 이회(安東判官李檜)는 백성들의 재물과 노력을 아끼어 쓸데 없는 비용을 절약하기에 노력하였고, 또 거행을 잘못하였으므로 내료(內僚)들이 모두다 그를 비난함. 그래서 이회(李檜)를 보주 부사(甫州副使)로 옮기고, 박린(朴璘)을 안동 판관(安東判官)으로 옮겼음(高麗史 29卷)
1294(忠烈王 20) : 7월 28일(丙子日), 직사관 권한공(權漢功, 柳川星坪)을 원(元) 나라에 보내어 황제의 생일을 축하함
1308(忠烈王 34) : 4월 5일(癸巳日), 원(元) 나라에서 환자 살륵(宦者撒勒)을 파견하여 향폐(香幣)를 보내었고, 황태후(皇太后)의 명령으로 처녀들을 선발하게 함. 살륵(撒勒)은 우리 나라의 용궁현(龍宮縣) 출신임(高麗史 32卷)
1309(忠宣王 1) : 8월 3일(癸丑日) 권한공(權漢功) 등, 혁대(革帶)를 하사(下賜)받음(高麗史 33). ᄋ 10월 기축일(己丑日) 왕이 게시문(揭示文)을 궁전 중문(宮殿中門)에 붙여 이르기룰, "권한공 등을 제외한 기타 사람들은 특별히 소환하기 전에는 왕궁(王宮)에 들어오지 못한다."라고 함(高麗史 33卷)
1310(忠宣王 2) : 9월 5일(己卯日) 권한공,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使)로 임명됨(高麗史 33卷)
1311(忠宣王 3) : 4월 21일(壬戌日) 권한공, 지밀직사사(知密直司使)로 임명됨(高麗史 34卷). ᄋ 7월 1일 권한공, 밀직사(密直使)로 임명됨(高麗史 34卷)
1312(忠宣王 4) : 6월 28일(壬辰日) 권한공, 첨의 평리(僉議評理)로 임명됨(高麗史 34卷)
1313(忠宣王 5) : 8월 권한공, 지공거(知貢擧)로 됨(高麗史 73卷)
1314(忠肅王 1) : 1월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를 경상도(慶尙道)로 다시 개칭함
1321(忠肅王 8) : 3월 임신일(壬申日) 권한공, 형장(刑杖)을 맞고 먼 바다섬으로 귀양감(高麗史 35卷)
1326(忠肅王 13) : 7월 25일(丁卯日) 왕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감천군 전언(甘泉君全彦) 등을 1등 공신(一等功臣)으로 봉(封)하고 토지와 노비를 줄 것이며, 그 부모와 처자들도 각각 차등있게 관작(官爵)을 줄 것이다."라고 함.(高麗史 35)
1327(忠肅王 14) : 11월 24일(戊子日) 왕이 교서(敎書)를 내리기를, "내가 원(元) 나라 서울에 체류한 지 5년 간 간신(奸臣)들이 왕위를 다른 사람에게 옮기려고 음모할 때 시종(侍從)하던 신하들이 시종일관(始終一貫) 절개를 지켜 나를 도왔다. 그 공로를 기록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감천군 전언(甘泉君全彦), 상호군 최안도(上護軍 崔安道, 龍宮人) 등을 1등 공신으로 삼고, 토지와 노비를 줄 것이고, 그 부모와 처자들에게도 차등있게 작위(爵位)를 줄 것이다."라고 함.
1328(忠肅王 15) : 7월 16일(丙子日) 매려와 역륵미실불화가 원(元) 나라로 돌아가므로, 왕이 최안도를 평양까지 보내어 금은, 비단, 모시 등을 선물로 주었으나 매려는 받지 않음(高麗史 35卷)
1330(忠惠王 1) : 4월 9일(庚寅日) 전언(全彦, 甘泉人), 찬성사(贊成事)로 임명됨(高麗史 36卷)
1331(忠惠王 2) : 1월 용궁 감무(龍宮監務)의 무고(誣告) 당한 사건을 상주목 사록 정운경(尙州牧司錄鄭云敬, 鄭道傳 父)이 해결함. ᄋ 2월 5일(庚戌日) 최안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임명됨(高麗史 36卷)
1341(충숙왕 2) : 3월 초1일 왕이 예천군(醴泉君) 권한공(權漢功)의 첩인 강씨(康氏)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호군(護軍) 박이자적(朴伊刺赤)을 시켜 궁 안으로 불러들이게 함.
1347(忠穆王 3) : 권중달(權仲達, 柳川星坪)의 딸, 목은 이색(牧隱李穡)과 결혼함.
1349(忠定王 1) : 9월 20일(戊寅日)에 정승 예천부원군 권한공(政丞醴泉府院君權漢功, 柳川星坪), 죽음(高麗史 37卷)
1354(恭愍王 3) : 6월 21일(辛亥日) 최원(崔源, 龍宮人), 용성군(龍城君)으로 봉(封) 해짐(高麗史 38卷). ᄋ 7월 22일(辛巳日) 신중전(申仲전, 殷豊人)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使)로, 최유(崔濡, 龍宮人)는 용성부원군(龍城府院君)으로 임명됨(高麗史 38卷) ᄋ 11월 18일(乙亥日) 전라도 도순문사 신중전(都巡門使申仲전), 왜적의 귀를 왕에게 바침(高麗史 38)
1360(恭愍王 9) : 4월 16일(壬申日) 권중화(權仲和, 柳川星坪人), 왕명으로 답례사(答禮使)로서 장사성(張士誠)에게 감(高麗史 39卷)
1361(恭愍王 10) : 11월 28일(乙亥日) 왕, 충주에 머뭄(高麗史 39卷) ᄋ 12월 15일(壬辰日) 왕,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왕의산(王衣山, 龍宮德溪)을 거쳐 어림성(御臨城, 龍門仙里)에 이르러 성을 수축(修築)함. 경석법(輕石法)의 이 성 축조에는 김손(金遜, 後에 이 城 아래 下里面 栗谷里 큰밤실에 寓居)의 공이 큼. 그리고 복주(福州, 安東)에 이름(高麗史 39卷)
1362(恭愍王 11) : 2월 25일(辛丑日) 왕, 복주(福州)를 출발함(高麗史 40권). ᄋ 2월 27일(癸卯日) 왕, 상주(尙州)에 머뭄(高麗史 40卷). ᄋ 2월 29일(乙巳日) 간신 김용(奸臣金鏞) 등이 용장 이방실(勇將李芳實)의 홍건적 격퇴의 공을 시기함. 이방실이 용궁 현청(龍宮縣廳)에 이르렀는데, 만호 박춘(萬戶朴椿)이 왕의 전지(傳旨)를 전하니, 이방실이 뜰에 내려 꿇어 앉음. 대장군 오인택(大將軍吳仁澤)이 칼을 빼어 처서 옷을 벗기니, 거꾸러져 기절하다가 한참 만에 다시 살아나서 담을 넘어 달아남. 박춘(朴椿)이 뒤따라 오자 이방실은 그의 칼을 빼려는데 어사중승 정지상(御史中丞鄭之祥) 등이 뒤에서 칼로 쳐죽임.
1364(恭愍王 13) : 1월 최유(崔濡, 龍宮人), 원(元) 나라 병사 1만 명으로써 덕흥군(德興君)을 받들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를 포위함. ᄋ 10월 원(元), 최유를 고려로 압송함. ᄋ 11월 최유, 사형됨
1367(恭愍王 16) : 정우(鄭寓), 지보주사(知甫州事)로 부임함
공민왕 때 : 왜구(倭寇)들이 침입하여 원산성(圓山城, 龍宮鄕石)에서 싸움
1377(우王 3) : 예천백 권중화(醴泉伯權仲和, 柳川星坪), 양주(楊州)의 회암사나옹화상비문(檜岩寺懶翁和尙碑文)을 예서(隸書)로 씀. ᄋ 4월 정당문학 권중화(政堂文學權仲和), 동지공거(同知貢擧)로 됨(高麗史 73卷). ᄋ 5월 6일(癸未日) 왕이 말하기를, "왜구가 서울 바로 곁에까지 침입하였는데 점괘(占卦)를 좇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면서 정당문학 권중화를 철원(鐵原)으로 파견하여 집 지을 자리를 선택하려 하다가 최영(崔瑩)이 이를 간(諫)하였으므로 마침내 그만 둠(高麗史 133卷). ᄋ 10월 15일(庚申日) 정당문학 권중화, 서연(書筵)에서 정관정요(貞觀政要)를 강독(講讀)함(高麗史 133卷).
1378(우王 4) : 11월 권중화, 서운관(書雲館) 회의를 진행함.
1379(우王 5) : 10월 25일(戊子日) 삼사(三司)좌사 권중화, 회암(檜岩)에 가서 도읍터를 잡음
1380(우王 6) : 12월 문하찬성사 권중화(門下贊成事權仲和), 명(明) 나라에 감(高麗史 134卷)
1381(우王 7) : 7월 경상도 안렴사(慶尙道按廉使)가 보고하기를, "왜적이 축산도(丑山島)에 들어가서 안동 등지를 침공하려 하니, 보주 보문사(甫州普門寺)에 장서(藏書)한 역사 서적들을 내지(內地)로 옮기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으므로 사관(史官)을 보내어 역사 서적들을 충주 개천사(忠州開天寺)로 옮김(高麗史 134卷)
1382(우왕 8) : 윤 2월-3월 평해삼척위진우계 등 동해안에서 영월예안영주순흥보주(醴泉)안동 등에 왜적이 침입함.(高麗史 134卷)
1389(昌王 1) : 감찰규정 하륜(監察糾正河崙), 신돈(辛旽)의 자행(恣行)을 공박하다가 지보주사(知甫州事, 現 醴泉郡守)로 좌천됨. 군치(郡治)에 대한 의욕이 없어 풍류로 세월을 보냄
1389(恭讓王 1) : 11월 22일(丙戌日) 김저(金佇, 金遜, 下里栗谷)가 옥중에서 돌연히 죽음.(高麗史 45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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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