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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연보 5 : 1454(단종 2)-1472(성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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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4(端宗 2) :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 의하면 호수는 예천군(醴泉郡)이 781호, 용궁현(龍宮縣)이 396호, 다인현(多仁縣)이 311호, 은풍현(殷豊縣)이 75호임. 인구는 예천군이 3,800명, 용궁현이 2,125명, 다인현이 1,427명, 은풍현이 300명임. 간전 결수(墾田結數)는 예천군이 7,298결(結), 용궁현이 4,191결임. 역은 창락도 역승(昌樂道驛丞) 소속으로 유동역(幽洞驛), 통명역(通明驛)이 있고, 유곡도 역승(幽谷道驛丞) 소속으로 수산역(水山驛, 豊壤高山), 용궁신역(龍宮新驛, 龍宮大隱), 지보역(知保驛, 知保知保)이 있음. 도기소(陶器所)로는 예천군 금당곡(醴泉郡 金堂谷, 龍門)과 용궁현 양정리(龍宮縣陽正里, 豊壤)에 있는데 모두 하품(下品) 생산임. [예천군] : 별호는 인양(仁陽), 양양(襄陽), 또는 청하(淸河)임[淳化 때에 정한 것이다]. 군정(軍丁)은 시위군(侍衛軍)이 73명, 진군(鎭軍)이 95명, 선군(船軍)이 256명임. 땅이 기름지고 메마른 것이 서로 반반씩임. 간전(墾田)이 7,298결(結)임(논이 8분의 3이 넘는다), 토의(土宜)는 벼, 조, 콩, 보리, 메밀, 팥, 왕골, 뽕나무, 삼(麻)이며, 토공(土貢)은 여우가죽, 삵가죽, 노루가죽, 칠, 종이, 돗자리(席), 호도, 송이버섯, 은어이고, 약재는 당귀, 복령이다. 토산은 사철(沙鐵)이다.(多仁縣 동쪽 大谷灘에서 남. 練鐵, 正鐵로 貢納함). 평안도 평양부 함종현(咸從縣)에 입진(入鎭)한 성(姓)이 보주 이(甫州李) 등 11임. 함길도 함흥부 정평(定平) 도호부 입성(入姓)이 보주 전(甫州全) 등 48임, 함길도 영흥대도호부 예원군(預原郡)에 망입(亡入)한 성이 보주 고(甫州高) 등 52임. 함길도 영흥대도호부 영흥진(永興鎭)의 망입한 성이 다인 최(多仁崔) 등 17임. [감천현(甘泉縣)] : 신라 때의 칭호는 미상이다. 이는 1018년(고려 현종 9)에 길주 임내(吉州任內, 現 安東 所屬)에 붙였다. 호수 162호, 인구 524명이다. 감천의 성은 이, 김, 전(全), 문, 조(趙)이며, 속성(續姓)이 장(張), 최이다(모두 근본을 알지 못한다. 지금 향리가 되었다). 유동역(幽洞驛)이 있다. [은풍현(殷豊縣)] : 예전 적아현(赤牙縣)인데, 경덕왕이 은정(殷正)으로 이름을 고치고 예천군의 영현(領縣)을 삼았고, 고려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고쳐, 1018년(현종 9)에 안동 임내에 붙였었음, 호수는 75호, 인구는 307명, 군정(軍丁)은 시위군이 15명, 진군이 24명, 선군이 71명임. 성은 오, 박, 김, 신(申)임. 상을곡성(上乙谷城, 은풍현 남쪽 34리에 있고, 둘레가 980보인데, 안에 샘이 10개, 시내가 하나 있고, 또 군창(軍倉)이 있어, 예천과 안동 임내인 풍산, 감천 군창이 물건을 아울러서 들여다 둔다). 문경현(聞慶縣)의 속성(續姓)이 은풍 박 등 2임. [용궁현(龍宮縣)] : 원래 신라의 축산(竺山, 園山이라고도 함)인데, 995년(고려 성종 14)에 올려서 용주 자사(龍州刺史)로 삼았다가, 1005년(목종 8)에 이를 폐지하고, 1013년(현종 3)에 용궁군(龍宮郡)으로 낮추어서 상주 임내(任內)에 붙였으며, 1172년(명종 2)에 비로소 감무(監務)를 둠. 조선에서 그대로 따랐다가, 1413년(태종 13)에 예(例)에 의하여 현감(縣監)으로 고쳤음. 사방 경계는 동쪽으로 예천에 이르기 22리, 서쪽으로 상주의 무림부곡(茂林部曲)에 이르기 11리, 남쪽을 예천 다인현(多仁縣)에 이르기 20리, 북쪽으로 예천에 이르기 14리 거리임. 하풍진(河豊津)이 있는데, 그 근원은 셋이니, 하나는 상주 임내인 산양현 사불산(四佛山)에서 나오고, 하나는 순흥 소백산에서 나오고, 하나는 봉화의 태백산 황지(黃池)에서 나와서 현 남쪽에서 합류함. 군정(軍丁)은 시위군이 42명, 진군이 41명, 선군이 116명임. 토성은 김, 박, 전(全)이요, 내성(來姓) 이 곡(曲, 중국에서 귀화 )임. 촌성(村姓)이 정(鄭), 윤이요, 속성(續姓)이 조(曺, 鎭海에서 옴), 오(長기에서 옴), 엄(영월에서 옴) 손(평해에서 옴. 모두 향리가 됨)임. 땅이 메마르고, 기후는 따뜻하며, 논이 9분의 3임. 토의(土宜) 는 벼, 콩, 조, 왕골이요, 토공(土貢)은 꿀. 밀. 칠. 돗자리(席, 또 鎭獻에 이바지함), 여우가죽, 삵가죽, 노루가죽이며, 약재는 맥문동, 백부자, 원지(遠志)이요, 토산은 은어, 사철(沙鐵)임(縣 남쪽 無訖灘, 鵲灘, 修正灘에서 남. 明柳에 鐵場이 있고, 세공은 正鐵 8,878斤임). 도기소(陶器所)가 현 남쪽
양정리(陽正里)에 있음(下品임). 비룡산 석성(飛龍山石城)은 현 남쪽 5리에 있음(높고 험하며, 둘레가 324보인데, 안에 샘 3이 있고, 군창이 있음), 역이 지보(智保), 신역(新驛)이며, 봉화가 비룡산(飛龍山)으로, 현 남쪽에 있음(동쪽을 醴泉 西庵에 應하고, 북쪽을 尙州 任內인 山陽 所山에 應함), 월경처(越境處)는 예천 임내인 고림(高林)이 현 북촌(北村)으로 넘어 들어왔고, 예천 임내인 다인현이 현 동촌(東村)으로 들어옴. ᄋ 진주목 편에 강성현(江城縣)의 속성(續姓) 6 중 김(용궁에서 왔음)이 있음. ᄋ 5월 21일 세조가 4공신 등을 거느리고 경회루 아래에서 풍정(豊呈)을 올렸는데, 예천군 이수(醴泉君李洙) 등이 시연(侍宴)함. ᄋ 7월 22일 용궁현감 이우양(李遇陽), 사헌부의 탄핵으로 이임함. ᄋ 8월 17일 의정부에서 예조(禮曹)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예천군의 노존례(魯存禮)는 아버지가 병이 들자 인분의 달고 쓴 맛까지 보면서 간호하고, 아버지가 죽으니 몸소 흙을 져다 무덤을 만들고, 시묘하여 살기를 3년 동안 하였으며, 또 서매(庶妹)가 가난하여 지게된 부채를 자기의 재산으로 갚아주고, 또 전토(田土)을 베어 주었습니다."라고 함.
1455(端宗 3) : 3월 9일 전 예문제학 윤상(尹祥)이 예천군에서 졸(卒)하니, 왕이 예관(禮官)을 보내어 조문(弔問)하고 치제(致祭)함. 능골(醴泉栢田)에 안장(安葬)됨. ᄋ 6월 28일 급제 권득경(及弟權得經)의 어머니가 임금에게 글을 올리기를, "첩의 나이 이미 70인데다 풍병까지 더하여, 명이 조석에 달렸습니다. 자식 권득경이 지난 갑술년(1454)에 죄를 범하여 예천에 부처(付處)되었으니, 빌건대 첩이 사는 상주로 옮겨 주셔서 서로 만나보게 하여 주소서,"하니, 의정부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음. 정부에서 의논하여 아뢰기를, "사령장(告身)을 돌려주시고 방환(放還)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음.
1455(世祖 1) : 9월 11일 예천군 이수(醴泉君李洙)가 죽음. ᄋ 9월 11일 병조(兵曹)에서 아뢰기를, "연해(沿海)에는 진(鎭)을 설치하고 있으나, 내륙의 주현(州縣)에도 거진(巨鎭)을 설치하고 근방의 여러 고을을 중익(中翼), 좌익(左翼), 우익(右翼)에 분속시키도록 하소서... 안동도(安東道)는 그 중익을 안동, 용궁 등 8개 군현으로 하고, 좌익은 봉화, 우익은 예천 등 4개 군현으로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랐음.
1456(世祖 2) : 문종왕비 이모부 권산해(文宗王妃姨母夫權山海), 사육신(死六臣)의 죽음을 듣고 지보면 대죽리 자택 지붕 위에서 떨어져 자결함. ᄋ 10월 15일 중추원부사 권맹손(權孟孫)이 죽으니, 조회(朝會)와 저자(朝市)를 정지하였음.
1457(世祖 3) : 최운서(崔雲緖 : 本貫 江陵, 大護軍) 금성대군이 화를 입을 때에 예천으로 유배됨. ᄋ 3월 2일 사헌부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경상도 도사 주백손 (朱伯孫)은 그 아내가 경상도의 용궁에 거주하고 있는데도 일찌기 아뢰지 않고 있다가 부임한 후에 아내로 하여금 그대로 지경 안에 거주하게 했으며, 또 주백손은 병이 나서 농사철에 담부(擔夫)를 내어 가마에 실리어 갔으니, 청컨대 고쳐 임명하소서."하니, 왕이 그대로 따름. ᄋ 6월 27일 이유(李瑜)가 순흥(順興)에 있으면서 몰래 군소배(群少輩)와 결탁하여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여 임금이 명령하여 우보덕 김지경(右輔德金之慶)을 예천에 보내어 이유의 공사에 관련된 사람들을 국문하게 함. ᄋ 8월 14일 왕, 친히 수결(手決)한 용문사교지(龍門寺敎旨, 寶物 729號) 를 내림. ᄋ 9월 24일 왕이 형조(刑曹)에 전지(傳旨)하여 예천에 충군(充軍)한 속고치 김치근(速古赤金致謹)을 석방함. ᄋ 10월 20일 병조(兵曹)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여러 도(道)의 중익, 좌익, 우익을 혁파하고, 양탁(量度)하여 거진(巨鎭)을 설치하여 소속된 바의 모든 고을을 마감하여 계문(啓聞)합니다. 상주진(尙州鎭)에 용궁, 예천을 속하게 할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름.
1459(世祖 5) : 6월 17일 사헌부(司憲府)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군의 백성 성부(成富)가 고발하기를, '아비가 고을 아전 임재(林才)와 승산(勝山) 등에게 장(杖)을 맞아 죽었는데, 군사 조부(郡事趙敷)는 농사철에 백성을 사역시킨 일이 드러날 것을 두려워하여 이를 덮어두려고 도모하여 즉시 임재 등을 체포하지 않고, 관청의 쌀, 베, 잡물을 가지고 성부에게 주어 장사(葬事)를 돕게 했다.'고 하니, 청컨대, 형률에 의하여 죄를 주소서."하였으나, 임금은 조부가 공신이므로 이를 용서하고, 다만 사령장(告身)만 거두고서 경상도의 밀양부에 유배시켰다가 조금 후에 명하여 이를 놓아주게 함.
1462(世祖 8) : 3월 5일 사헌부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조근(趙瑾)을 예천군에 유배하소서."하니, 명하여 유배하지 말도록 함.
1463(世祖 9) : 3월 4일 예조(禮曹)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옛 순흥(順興, 現榮州市)의 소헌왕후 태실(昭憲王后胎室)과 옛 은풍(殷豊, 現 上里面 鳴鳳里)의 문종대왕 태실(文宗大王胎室)은 석난간(石欄干)과 전석(전石)이 조금 물러났으니, 청컨대, 풍수학 관(風水學官)을 보내어 봉심(奉審)하고 수즙(修葺)하게 하소서."하니, 왕이 전교하기를, "어찌 반드시 따로 보내야 하겠느냐? 마땅히 도순찰사 이극배(李克培)로 하여금 봉심하여서 아뢰게 하라."함.
1464(世祖 10) : 경상도(慶尙道)의 안렴사(按廉使)를 관찰사(觀察使)로 개칭함. ᄋ 9월 11일 사헌부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하성위 정현조(河城尉鄭顯祖)의 종 상좌(上佐) 등이 예천군에 살면서 그 위세를 믿고서 부채계권(負債契券)을 거짓으로 꾸며서 편민(編民)을 침해하여 못 살게 굴고 합부로 재물과 곡식을 빼앗으니, 심지어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한 자도 있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도망하여 숨고 나타나지 않으니, 비록 일이 유사(宥赦) 전에 있었다 하나, 추가 징수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니, 청컨대 그 도의 관찰사로 하여금 몰래 끝까지 수색하여 체포하게 하고 그 무리도 아울러 죄를 주고 함부로 빼앗은 재물을 징수하게 하소서."하니, 왕이 그대로 따름.
1466(世祖 12) : 7월 12일 병조(兵曹)에서 군기(軍器)를 상정(詳定)하여 아뢰기를, "예천 등에는 향각궁(鄕角弓) 36장(張), 마전(磨箭)통전(筒箭) 각 18부(部), 장창(長槍) 15자루, 중창(中槍) 21자루, 환도(環刀) 36파(把), 궁현(弓弦) 72개, 철갑(鐵甲) 2령(領), 대쟁(大錚) 1개, 중쟁(中錚)소쟁(小錚) 각 2개, 고(鼓) 2개, 대각(大角)소각(小角) 각 2개입니다. 용궁은 향각궁 17장, 마전 9부, 통전 9부, 장창 7자루, 중창 10자루, 환도 17파, 궁현 34개입니다. 이상의 군기는 1년에 한 번 제조하는데, 기모(旗모)는 2년 만에 한 번 제조합니다. 상공(上貢)하는 수량 외에는 모두 거진(巨鎭)에 간수해 두고, 갑주(甲冑)와 쟁(錚)과 고각(鼓角)은 다만 거진에서만 제조하여 바치게 하소서."라고 함. ᄋ 11월 2일 용궁현감 송수은(宋守殷), 문폐사(問弊使)의 탄핵으로 이임함. ᄋ 11월 10일 예천군수 김지(金祗), 왕의 형조(刑曹) 전지(傳旨)에 의해 이임함.
1467(世祖 13) : 용문사 대장전(龍門寺大藏殿)을 보수함. ᄋ 현득형 득리 형제(玄得亨得利兄弟),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의거하여 싸우다가 순국함. ᄋ 3월 10일 예천군수 정종주(鄭宗周), 이임함.
1469(睿宗 1) : <경상도속찬지리지(慶尙道續撰地理志)>에 의하면 예천군(醴泉郡)에 제언(堤堰) 21개, 관개 결수(灌漑結數)가 220결(結) 89부(負)가 있고, 용궁현(龍宮縣)에 제언 8개, 관개결수가 133결이 있음. ᄋ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화문석 공장(花紋席工匠)의 정원이 예천군에 20명, 용궁현에 12명임. ᄋ 1월 6일 명 나라에서 군사를 징발하라는 명령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무사를 징발하였는데, 용궁인 고수연(高壽延)고수영(高壽永) 등에게 군장(軍裝)을 갖추고 말을 타고 오라고 함. ᄋ 2월 6일 경상좌도 절도사 한치의(韓致義)가 예천군에서 흰 꿩을 잡아 왕에게 바침. ᄋ 3월 14일 왕이 호조(戶曹)에 전지(傳旨)하여 난신(亂臣) 최계지(崔戒之)장익지(張益之)장순지(張順之)변자의(卞自義) 등의 예천 밭을 봉보부인(奉保夫人)에게 주게 함. ᄋ 3월 24일 왕이 난신 장순지(張順之)의 예천 밭 2결(結)을 우승지 윤계겸(右承旨尹繼謙)에게 내려 줌. ᄋ 6월 22일 대호군 정난종(鄭蘭宗, 豊壤靑谷)이 아뢰기를, "신이 살고 있는 용궁 등지에서는 맹호(猛虎)가 사람을 해쳐서 전후로 해를 입은 자가 10여 구(口)에 이르고, 또 이 달 12일에는 신의 얼종제 정의(孼從弟鄭義)가 그 가동(家동) 몇 명과 더불어 대낮에 문을 지키다가 해를 입었으니, 다른 고을 다른 마을에서도 해를 당한 자가 반드시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는데, 이를 잡는 자가 없으니 백성들이 매우 근심하고 있습니다."하니, 경상좌도절도사 임자번(林自蕃, 醴泉人)에게 치서(馳書)하기를, "용궁 등지에 맹호가 사람을 해하여, 한 마을에서 상해를 입은 사람이 많아 10여 명에 이른 것은 매우 작은 사고가 아니니, 급속히 이를 잡도록 하라. 맹수의 피해가 이와 같은 데도 이를 즉시 잡지 않는 것은 반드시 소재 수령이 급급히 치보(馳報)하지 않은 소치이니, 아울러 속히 국문하여 아뢰라."함. ᄋ 8월 3일 왕이 승정원에 명령하여 김초를 추국(推鞫)하게 하니, 김초가 말하기를, "신이 용궁 사람 안수의(安修義)의 첩의 딸을 첩으로 삼은 지 여러 해가 되었는데, 그 뒤에 한치의(韓致義)가 빼앗아서 가까이 하였습니다. 첩의 오라비 춘동(春同)이 신에게 말하기를, '한치의가 말하기를, 「나와 김초는 평소에 서로 친한데, 뒷날에 어떻게 서로 보겠느냐? 그러나 김초는 시골의 고신(孤臣)이니, 어찌 감히 나한테 말을 하겠느냐?」하였습니다.'하였으나, 신이 그 말을 듣고 조금도 개의치 않으니, 한치의가 신의 집에 네 번이나 투자(投刺)하였는데, 신이 만나지 않고 절간(折簡)을 보내어서 희롱하였습니다. 이철견(李鐵堅)이 신에게 한치의에게 글을 부친 까닭을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김초는 영해(嶺海)의 고한(孤寒)이요, 한치의는 경화(京華)의 벌열(閥閱)이다. 문벌이 같지 않으니 빼앗는 것도 진실로 당연하나, 김초는 급제 출신으로 다른 길을 거쳐서 벼슬하지도 않았고, 한치의는 그 누이를 팔아서 재상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으니, 누가 어질고 누가 어질지 않은가? 만약 문벌이 좋다 하여 내 첩을 빼앗았다면, 정승, 왕자, 왕손 같은 이는 남의 아내나 첩을 수 없이 빼앗을 수 있는 것이다. 한치의가 비록 정승의 아들이요, 수빈(粹嬪)의 아우일지라도, 나를 이렇듯 천시해서는 안될 것이다.'하고, 신이 또 말하기를, '발설할 수 없는 일이 있다.'하였더니, 이철견이 묻기에 신이 대답하기를, '우리 부조(父祖) 이래로 권위를 팔어서 관직 하나라도 얻은 사람은 없다.'하였습니다."함. 놓아주도록 명령하니, 김초가 이미 집으로 돌아갔는데, 밤 초고(初鼓)에 의금부에 가두도록 명함.
1470(成宗 1) : 2월 30일 병조(兵曹)에서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은 제색 군사(諸色軍士)가 708명인데, 지금 680명으로 정하고, 용궁은 262명인데 지금 220명으로 정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름.
1471(成宗 2) : 11월 2일 왕이 경상도관찰사 오백창(吳伯昌)에게 하서(下書)하기를, "이제 들으니, 용궁 사람 김효문(金孝文)의 자부(子婦)는 근친(覲親)으로 인하여 상주의 본가에 돌아갔다가, 사노 지중(私奴池衆)과 서로 간통하고는 머리를 깎고 돌아오지 않았는데, 일이 발각되자 그 여자를 추국하되, 단지 장(杖) 80대를 논죄하고, 지중은 속전(贖錢)을 거두었다고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죄는 무겁고 벌은 가벼우니, 경(卿)은 어찌 이와 같이 하였느냐? 그 사유를 갖추어 치계(馳啓)하라."하고, 인하여 사헌부집의 정은(鄭垠)에게 명하여, 다시 지중의 옥사(獄事)를 국문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그것은 그 당시 정은이 공사(公事)로 본도에 갔었기 때문임. ᄋ 12월 26일 예천군수 성계증(成繼曾), 사헌부의 탄핵으로 이임함
1472(成宗 3) : 1월 14일 왕이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기를, '부사맹 성계증(副司猛成繼曾)이 상언(上言)한 상소에서 이르기를, "전에 예천군수가 되었을 때, 대사헌 김지경(大司憲金之慶), 장령 홍귀달(掌令洪貴達, 後 龍宮縣)이 그의 청을 좇지 않았음을 혐의하여, 허위로 죄과를 얽어 핵논(劾論)하여 파직시켰다.'라고 하니, 그 상언한 정유(情由)를 국문하여 아뢰라."라고 함.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성계증은 일찌기 예천 군수가 되어 많은 계략으로 관물(官物)을 집으로 보내었고, 또 재집(宰執)에게 간알(干謁)하여 뇌물을 바쳐서 입신(立身)한 까닭으로 사헌부에서 논핵하여 파직시킨 것이다."라고 함. ᄋ 1월 14일 대사헌 김지경, 장령 홍귀달이 와서 아뢰기를, "김지경은 지난 번에 죽은 아내의 제사로 인하여 백자(柏子)와 진자(榛子)를 예천군수 성계증에게 청하였더니, 성계증이 신에세 백자 2두(斗), 진자 1두를 보냈으며, 홍귀달도 또한 근친(覲親)으로 인하여 함창에 갔었는데, 성계증이 감사의 말을 듣고 먹을 것을 넉넉히 주었습니다. 그런데 신 등이 무슨 혐의가 있겠습니까?"라고 함. ᄋ 2월 1일 병조(兵曹)에서 왕께 군액(軍額) 감소 계획을 아뢰기를, "예천은 708명 가운데에서 전에는 28명을 줄여 680명으로 정하였는데, 이제는 60명을 줄여 620명으로 정하게 하고, 용궁은 262명 가운데에서 전에는 42명을 줄여 220명으로 정하였는데, 이제는 40명을 줄여 180명으로 정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름. ᄋ 5월 21일 예천 관노 자고미(官奴者古未)의, 유서(柳서)가 난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한 죄는, 율이 참부대시(斬不待時)하고, 가산(家産)을 적몰(籍沒)하는 것에 해당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그대로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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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