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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연보 7 : 1528(중종 23)-1592(선조 25) 6월(附 예천군, 24일 서울국립민속박물관 평가에서 교육개발사업우수기관으로 선정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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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28(中宗 23) : 8월 18일 용궁에 남풍(南風)이 크게 불어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큰 나무들이 부러지고 뽑혔으며, 화곡(禾穀)이 모두 쓰러졌음.
1529(中宗 24) : 혜공 대사(惠空大師), 용문사 보광명전(龍門寺普光明殿)을 중수(重修)함
1530(中宗 25)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의하면 예천군의 토산물은 철, 왕골, 오미자(五味子), 설면(雪綿), 꿀, 송이버섯, 닥(楮), 지치(紫草), 은어, 붕어, 백화사(白花蛇), 인삼, 잣, 뽕나무, 석이버섯이고, 용궁현(龍宮縣)의 토산물은 철, 왕골, 배(梨), 은어(銀魚), 백화사, 잣, 감(柿), 꿀임. 또한 예천군의 원(院)은 망현(芒峴), 광덕(廣德), 호명(虎鳴), 황리(黃利), 우두(牛頭), 북원(北院), 모현(毛峴), 죽원(竹院)이고, 용궁현(龍宮縣)의 원은 천덕(天德), 석현(石峴), 성화천(省火川), 장안(長安), 용서(龍西), 진원(津院)임
1531(中宗 26) : 3월 7일 예천 등에 눈이 내림.
1533(中宗 28) : 6월 21일 경상도 진휼경차관 심연원(賑恤敬差官沈連源)이 복명(復命)하기를, "용궁현, 예천군의 다인현(多仁縣) 등지는 촌락이 쓸쓸하고 짚단도 없었으며, 집에 들어가 보면 한 말의 곡식도 없이 오직 관창(官倉)에만 의지해 목숨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어렵고 고통스러운 정상은 눈물겨웠습니다."라고 함.
1534(中宗 29) : 용문사 대장전(龍門寺大藏殿)이 중수됨
1536(中宗 31) : 이자, 기묘사화(己卯士禍) 후부터 벼슬에서 쫓겨나 용궁(龍宮)으로 물러나 있을 때 평소에 사이가 나쁘던 그의 동서인 함창인 김안로(咸昌人金安老)가 탐지(探知)하러 오는 것을 알고 괴화탕(槐花湯)으로 얼굴을 씻어 아픈 것으로 속임. ᄋ 5월 17일 사헌부(司憲府)가 왕께 아뢰기를, "예천 등의 수령(守令)은 비리(非理)로 가렴주구(苛斂誅求)한 사실이 분명히 나타났으니, 뒤에 추고하더라도 응당 파직할 죄입니다. 자기들이 반드시 파직될 것을 알면서 그 직에 그대로 있게 되면 심한 폐단을 일으킬 것이 틀립없습니다..."라고 하니, 전교하기를, "아뢴 뜻이 지당하니 먼저 파직시킨 뒤에 추고하라."라고 함(中宗實錄 第81卷)
1539(中宗 34) : 7월 19일 예천군 사람 노숙공(盧叔珙), 사헌부의 탄핵을 받음
1541(中宗 36) : 7월 11일 예천군수 장육(張陸), 사간원의 탄핵으로 이임함.
1542(中宗 37) : 2월 9일 용궁 등지에 지진이 있었음.
1544(中宗 39) : 2월 3일 예천, 용궁 등지에 지진이 일어남.
1546(明宗 1) : 3월 7일 김홍(金泓), 예천 군수로 부임함. ᄋ 3월 18일 예천군수 김홍, 용문면 선리 출신 서구연(徐九淵, 眞寶 守令)과 더불어 시관(試官)이 됨. ᄋ 3월 25일 예천군수 김홍, 감사(留而修謝 避嫌不肯來訪矣)의 뜻으로 쌀 5되와 포목 5필을 보냄(黙齋日記, 黙齋는 李文楗의 號)
1547(明宗 2) : 3월 7일 예천 등에 눈이 많이 내려 1척(尺)이나 쌓임. ᄋ 5월 13일 예천 등에 서리가 내림. ᄋ 5월 14일 예천, 용궁 등에 서리가 내림. ᄋ 7월 5일 경상도 감사 임호신(任虎臣)이 왕에게 치계하기를, "용궁의 객사(客舍), 관청, 형옥(刑獄), 마구(馬廐)가 물에 잠기고, 인가 20여 채가 떠내려갔습니다."라고 함.
1550(明宗 5) : 장세희(張世禧, 虎鳴原谷), 은행(銀杏)나무를 심음(今有)
1551(明宗 6) : 예천불법문서사건(醴泉不法文書事件)이 일어남. 이 사건에 연계되어 직제학 이무강(直提學李無疆)이 파직됨
1552(明宗 7) : 1월 1일 예천군수 안종전(安從琠, 字而厚), 감사(致音問可慰也 卽修答以謝 爲子求琴張 無儲不得送副)의 뜻으로 꿀 1말, 진유(眞油) 1말, <단계찬요(丹溪纂要)> 2권 등을 보냄.(黙齋日記)
1553(明宗 8) : 7월 3일 예천군수 안종전(安從琠), 감사(致書問淸息矣 修答以謝之)의 뜻으로 종이, 돗자리, 꿀, 다식(茶食) 등을 보냄. ᄋ 11월 27일 용궁 등지에 지진이 일어났음.
1555(明宗 10) : 이윤탕(李允宕), 예천에 나타난 임꺽정을 자칭한 무뢰한(無賴漢) 50여 명을 물리치기 위하여 합천 군수(陜川郡守)에서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부임함
1556(明宗 11) : 9월 24일 권용(權鎔), 예천 군수로 부임함.(黙齋日記)
1557(明宗 12) : 5월 3일 예천 등지에 지진이 일어남.
1563(明宗 18) : 이열도(李閱道), 호명면 백송리에 선몽대(仙夢臺)를 창건함. 퇴계 이황(退溪李滉)이 대호(臺號) 3자를 기증함
1566(明宗 21) : 야옹정(野翁亭, 龍門渚谷), 권의를 위해 아들에 의해 창건됨. ᄋ 6월 2일 예천에 비와 우박이 섞여 내렸는데, 큰 것은 밤만하고, 작은 것은 개암만 하였음. ᄋ 10월 16일 예천에서 천둥 번개가 크게 침.
1567(明宗 22) : 함포재(咸浦齋, 下里芙草), 권의를 위해 아들에 의해 창건됨. ᄋ 1월 5일 용궁에 지진이 일어나 지붕의 기와가 조금 움직였음.
1568(宣祖 1) : 지보면 마산리에 완담사(浣潭祠)가 세워지고, 정구령(鄭龜齡), 정옹(鄭雍), 정사(鄭賜), 정환(鄭渙), 정광필(鄭光弼), 정영후(鄭榮後), 정영방(鄭榮邦)이 제향(祭享)됨
1569(宣祖 2) : 보문사 법당(普門寺法堂), 중수됨. ᄋ 5월 27일 헌납 민덕봉(閔德鳳) 등이 왕에게 아뢰기를, "용궁현감 이종(李悰)은 속안(續案)과 원안(元案)에 없는 일을 풍문으로 잘못 아뢰었으니, 체직(遞職)하소서."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근일 대간(臺諫)이 된 자가 늘 부언(浮言)을 가지고 논계하니, 나는 온당치 않게 생각한다. 앞으로 자세히 살피라."라고 하였음.
1571(宣祖 4) : 주세흥(朱世興), 주희(朱熹)의 영정(影幀)을 모시기 위하여 개포면 경진리 교회(敎會)마을에 영각(靈閣)을 창건함. ᄋ 예천군수 이구수(醴泉郡守李龜壽), 부임함
1573(宣祖 6) : 2월 23일 경상도 감사의 서장(書狀)에서 이르기를, "예천군의 첩정(牒呈)에 '반룡리(蟠龍里)의 낙동강 상류에 지난 12월 18일 진시(辰時)에 물이 끊어졌는데, 물이 끊어졌을 때에는 자나가는 사람의 신과 버선도 젖지 않았으며, 그 날 사시(巳時)에 전처럼 흘려내렸다.'하였습니다."라고 함.
1582(宣祖 15) : 권문해(權文海), 초간정(草澗亭, 龍門竹林)을 창건함
1583(宣祖 16) : 권욱(權旭), 함취정(咸聚亭)을 소제곡리(小渚谷里, 龍門渚谷)에 창건함. ᄋ 강여성(姜汝성), 용궁(龍宮)에 침입한 왜구(倭寇)와 싸우다가 순국함
1585(宣祖 18) : 예천군 관아(醴泉郡官衙), 중국의 의방서(醫方書)인 <단계찬요(丹溪纂要)>를 간행함. ᄋ 권문해(權文海), 증조부 권오복(曾祖父權五福)의 <수헌시집(睡軒詩集)>을 간행함
1589(宣祖 22) 권오상(權五常), 예천권씨종가별당(醴泉權氏宗家別堂, 寶物 457號, 龍門竹林)을 창건함. ᄋ 사헌부지평 우복룡(司憲府持平禹伏龍), 용궁 현감(龍宮縣監)으로 부임함
1590(宣祖 23) : 손흥지(孫興智), 용두정(龍頭亭, 豊壤臥龍)을 창건함
1592(宣祖 25) 4월 : 14일 일본군이 부산포(釜山浦)에 상륙하여 임진왜란이 일어남. ᄋ 16일 용궁현감 우복룡(龍宮縣監禹伏龍), 병영 후원장(兵營後援將)으로 용궁현(龍宮縣)과 예천군(醴泉郡)에서 징발한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경주 병영(慶州兵營)으로 달려가기 위해 출발함. ᄋ 21일 우복룡(禹伏龍)의 군사, 하양(河陽)에 이르러 도적 60명을 잡아 괴수 3명만 목베고 나머지는 용서하여 함께 진군케 함. ᄋ 영천(永川)에 이르러 하양 군사 500여 명을 만나 반란군임을 확인하고 모두 죽임(<懲琵錄>과 <大東野乘> 26卷과 35卷, <燃黎室記述> 15卷에서는 叛亂軍으로 誤認했다고 함). ᄋ 우복룡의 군사 중 예천의 관병(官兵)으로 된 선발대(先發隊)가 경주(慶州) 30리 밖까지 이르러 도적의 공격을 받아 선발대의 영장(領將)이 전사(戰死)하는 혼란한 틈을 타서 하양(河陽)에서 잡았던 도적들을 탈취 당함. ᄋ 우복룡, 경주에 도착하여 인솔해 온 예천, 용궁의 군사 3천 명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복속(服屬)시켜 유일한 후원병(後援兵)이 되게 함. ᄋ 27일 가등청정(加藤淸正)이 거느린 왜(倭) 제2군이 경주를 거쳐 비안(比安)에 이르러 그 중 일부만 예천의 다인현(多仁縣)으로 옮겨 주둔하고, 주력 부대는 비안에서 용궁현(龍宮縣)의 하풍진(河豊津) 쪽으로 진군(進軍)함.
1592(宣祖 25) 5월 : 1일 당초 왜적은 비안(比安)을 거쳐 용궁의 하풍진(河豊津)을 건너 문경으로 진출함. ᄋ 2일 왜적(倭敵)이 용궁현(龍宮縣)의 포내 우망리(浦內憂忘里)에 이르렀을 때, 이 곳 정영후(鄭榮後)의 처 한씨(韓氏)가 시누이 정씨(鄭氏)와 함께 자결(自決)함. ᄋ 3일 예천군수 변양우(邊良祐), 근왕(勤王)을 핑계삼아 예천을 버리고 죽령(竹嶺)으로 넘어감. ᄋ 왜적(倭敵), 풍양면 삼강리 하풍진(河豊津)의 낙동강을 건너 용궁현 달지(龍宮縣達池, 現 聞慶永順五龍)에 이름. 이 때 이 곳의 강찬(姜纘)이 홀로 싸워 적을 많이 죽임. 용궁 원산성(龍宮圓山城)의 관군(官軍)은 달지(達池)에 허수아비를 세워놓고 성의 동쪽 문으로 입성한 왜군에 의해 대패(大敗)됨. ᄋ 왜적이 우리 조정에 전해 오기를, "정탁(鄭琢, 醴泉高坪)과 이덕형(李德馨)을 내보내라"라고 함. ᄋ 적은 문경 조령(聞慶鳥嶺) 쪽으로 감. ᄋ 임란(壬亂)으로 도로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경상도를 2분(二分)하여 좌도(左道)는 경주, 우도(右道)는 상주에 감영(監營)을 둠에 따라 예천군과 용궁현(龍宮縣)은 경주 감영(監營)의 우도(右道)의 소속이 됨. ᄋ 15일 비변사(備邊司)가 왕에게 아뢰기를, "용궁현감 우복룡(禹伏龍)은 여러 고을이 무너질 때 유일하게 자기 고을을 지켰을 뿐 아니라 나가서 싸우기까지 하였으니, 그 공로가 적지 않습니다. 특별히 중한 가자(加資)를 주어 다른 사람들을 권장시키소서."하니, 임금이 따랐음. ᄋ 26일 영덕현감 안진(盈德縣監安璡)이 경상우순찰사(慶尙右巡察使)에 치보(馳報)하여 이르기를, "경상좌도(慶尙左道)의 여러 읍(邑)은 다 왜적의 굴혈(窟穴)이 되었고, 영해부사 한효순(寧海府使韓孝純), 용궁현감 우복룡(龍宮縣監禹伏龍), 예안현감 신지제(禮安縣監申之悌)가 각각 외로운 성을 지킵니다."라고 함.
1592(宣祖 25) 6월 : 11일 안동(安東)에서 진사 배용길(進士裵龍吉)이 의병을 모아, 예안현감 신지제(禮安縣監申之悌)의 관군(官軍)과 함께 용궁(龍宮)의 급함을 돕고저 출진함. ᄋ 15일 모리휘원(毛利輝元)의 족장(族將)인 길천광가(吉川廣家)는 병력 미상의 군사를 이끌고 개령(開寧)에서 용궁(龍宮)으로 침입한 후 예천까지 진격함. 당시 용궁현(龍宮縣)과 예천군(醴泉郡)의 향병(鄕兵)을 지휘하고 있던 용궁현감 우복룡(龍宮 縣監禹伏龍)은 판관 조붕(判官趙鵬)으로 하여금 군사를 전후 좌우위(左右衛)로 나누어 나가게 함. 향병은 각색 갑옷과 백의를 입고 도창(刀槍)과 궁시(弓矢)를 가진 사람보다도 곤봉, 철권(鐵拳), 도끼, 낫, 심지어는 톱을 가진 자도 있었고, 전가의 보도를 등에 진 자도 있었고, 대각과 소각, 금탁, 정을 요란스럽게 부는 자도 있었음. 한편 배인길(裵寅吉)을 예안현감 신지제(禮安縣監申之悌)에게 보내 도움을 청하여 궁수(弓手), 창수(槍手), 살수(殺手) 등 무기를 가진 병졸, 군마(軍馬) 300필을 지원받아 용궁현(龍宮縣)에 출정(出征)토록 하여 선봉이 격돌하게 되자 함성이 드높음. 적이 중앙 돌파를 꾀하였는데, 우복룡군(禹伏龍軍)은 양익(兩翼) 포위로써 대하여 전세가 일진일퇴(一進一退)하던 차에 수림 속에서 복병(伏兵)이 일어나 적의 뒤쪽을 향하여 강궁으로 쏘아대니, 적은 크게 놀라 한 쪽이 흩어지면서 불리한 지형으로 밀려나기 시작함. 이리하여 적장(敵將)의 대장기(大將旗)가 급히 후퇴하기 시작하니 모든 적들은 개령(開寧) 쪽으로 철퇴함. 이 싸움은 비록 일순간의 격돌이었지만 피아(彼我)에 사상자(死傷者)가 많음. 이 때 약관(弱冠) 22세의 배인길(裵寅吉)을 비롯하여 한철경(韓澈慶), 권응정(權應定, 知保 大竹人) 등이 순국하고 한철경의 처 노씨(盧氏), 이진영(李進英, 醴泉 旺新人) 등은 자결함. ᄋ 적은 함창(咸昌)과 문경(聞慶)을 장증아부 군(長曾我部軍)으로 지키게 하고, 상주에는 호전승강 군(戶田勝降軍)으로 진입시켰으나, 용궁(龍宮) 예천(醴泉) 방면에는 진공(進攻) 못함. ᄋ 28일 김수가 경상좌우도의 전쟁 상황을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 이 외의 의성 등도 이미 분탕되어 왜적들이 횡행합니다."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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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 24일 서울국립민속박물관 평가에서 교육개발사업우수기관으로 선정됨...축하합니다.
예천군 선정(醴泉郡, 民俗生活史博物館 敎育開發事業 優秀機關 選定) [記事] : 국립민속박물관이 주관한 ‘2017년 민속생활사박물관협력망 교육개발 지원사업’ 평가 보고회에서 예천군이 우수기관으로 선정돼 2018년 교육프로그램 운영을 위한 사업비를 우선지원 받게 됐다. 이번 평가에는 전국 37개 박물관이 참여해 선정된 10개 기관에서 8개월간 개발한 교육프로그램을 2017년 11월 24일 서울국립민속박물관에서 평가한 결과 예천박물관이 우수기관으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예천군이 개발한 교육프로그램은 청단놀음의 대표 마당인 주지놀음과 지연광대놀음을 키네틱 아트로 재현한 체험교구재와 청단놀음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활동지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문가 평가회에서는 ‘박물관의 정체성을 잘 살리고 지역의 무형문화재를 쉽고 재미있게 배울 수 있도록 구상한 아이디어가 돋보인 것’으로 평가했다. 군은 이번 개발된 교육프로그램을 2018년 하반기 지역 초등학생 3~4학년을 대상으로 찾아가는 박물관 프로그램으로 운영할 계획이며, 관내 11개 초등학교에도 교육 자료로 보급할 계획이다. 예천군 관계자는 “우수한 문화재를 다수 보유한 지역의 자긍심을 토대로 관내 학생들이 지역문화를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적극 노력할 계획”이라고 말했다.(醴泉新聞 2017년 11월 28일 (화) 14: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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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