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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연보 9 : 1593년(선조 26) 1월-1601(선조 34)(附 예천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대표 김광수), 30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을 수상함...축하합니다/감천면 출신 조성순 시인, <가자미식해을 기다리는 동안> 출판...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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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宣祖 26) 1월 : 1일 향병대장 김핵(鄕兵大將金핵), 설복처에 있으면서 밤중에 복병장 이선충(伏兵將李選忠)에게 정병(正兵)을 이끌고 야습(夜襲)을 명령했더니, 적진에 돌입해서 수 없이 죽이고 왜적의 창(槍)과 칼을 빼앗고, 진천뢰(震天雷)를 연거퍼 쏴서 적진을 크게 놀라게 했음. 적은 죽은 자가 대단히 많음. 김핵, 순찰사(巡察使)에게 공문으로 보고함. ᄋ 3일 아침에 좌부장 이정백(左副將李庭栢)이 안동부(安東府)에 돌어와 도사(都事)를 만나 조회(朝會)를 마치고 예천으로 향해 떠남. ᄋ 4일 안동부(安東府)의 배리(倍吏), 당교(唐橋)의 왜적이 예천군 서당리(書堂里)를 분탕(焚蕩)질하였다고 보고함. 판관(判官)이 예천으로 향해 떠남. 좌부장 이정백이 풍산(豊山)으로 출진(出陣)함. ᄋ 5일 도사(都事)와 부사(府使), 풍산에서 안동으로 돌아감. ᄋ 6일 안동, 예안(禮安)의 향병(鄕兵)은 이미 당교(唐橋)를 향해 출발함. 좌부장 이정백과 우부장 배용길(右副將裵龍吉)이 예천에서 이른 아침에 정병(精兵)을 추려 복병장 김사권(伏兵將金嗣權), 조성중(趙誠中)에게 거느리게 하여 먼저 출발토록 명령하고, 곧 양 부장(兩副將)도 역시 나아가 용궁(龍宮)에 도착하면 서현의 관군대장 진소(官軍大將陣所)에서 안동 판관(安東判官), 예천 용궁의 가수, 서평의 권관과 만나 서로 의론하기로 약속함. 예천의 아병 이신(牙兵李信)이 왜적의 머리를 베어와 바침. 관군대장(官軍大將)이 장차 용궁 가수를 정하고는 서평 권관이 군사 90여 명을 거느리고 계속해서 원군(援軍)토록 함. 밤에 복병장(伏兵將)의 군사가 관군(官軍)과 함께 적의 진지(陣地)에 돌입하여 왜적의 무리를 사살하고 돌아옴. 야습(夜擊)한 절차를 낱낱이 들어 대장이 있는 곳에 치보(馳報)함. ᄋ 20일 당교(唐橋)의 왜적들이 무수히 갈평(葛坪)을 붕탕(焚蕩)질함
1593(宣祖 26) 2월 : 2일 군관 최두출(軍官崔두出)이 용궁(龍宮)으로 옴. ᄋ 19일 부장(副將)이 복병장 이선충(伏兵將李選忠) 등을 이끌고 용궁 석현(龍宮石峴)에 묵음. ᄋ 20일 김핵, 이선충 등을 덕통역 북산(德通驛北山)에 설복(說伏)케 함. ᄋ 24일 식후에 부장(副將), 복병장(伏兵將) 등이 석현(石峴)에 올라가 활쏘기 연습을 함. 왜적이 강을 건너와 진시(辰時)에서 사시(巳時)까지 분탕(焚蕩)질함. 포 (砲)를 쏘는데 그 소리가 혹은 컸다 혹은 작았다 하는데 아마 어제 접전(接戰)에서 진 것을 분(憤)하게 여기고 그것을 씻으려는 모양임. 이선충(李選忠)을 보내 반암 (盤岩)에 설복(設伏)케 함. ᄋ 25일 부장(副將)이 식후 있는 곳을 선몽대(仙夢臺)로 옮김. ᄋ 26일 부장은 금몽일(琴夢馹)과 함께 활쏘기를 연습함. 복병 권을생(伏兵權乙生), 김한경(金漢景) 등이 별패군(別牌軍) 10여 명과 함께 힘을 모아 반암(盤岩)에서 왜적과 싸워 적 한 명을 목베어와 바침. ᄋ 27일 대장 김핵(大將金핵), 편지를 조방장 권응수(權應銖)에게 보내고, 결진(結陣)하여 토적(討敵)을 계획하자고 함. 권응수가 답장을 보냈는데, "왜적이 경주로부터 서울로 가는 데는 안동, 예안, 영천(榮川), 예천 등의 고을을 지나고야만 갈 수가 있습니다. 합세하여 싸워봅시다."라고 함.
1593(宣祖 26) : 3월 7일 당교(唐橋)의 적이 용궁읍(龍宮邑)을 겁략(劫掠)하여 분탕(焚蕩)하고 사람을 죽임. ᄋ 3월 8일 병사 권응수(兵使權應銖), 예천을 향해 떠남. ᄋ 3월 16일 당교(唐橋)의 적이 예천군 유천(醴泉郡柳川)을 분탕(焚蕩)질함. ᄋ 4월 4일 대장 김핵(大將金핵)이 정병(正兵)을 뽑아 사룡(士龍) 등에게 영솔(領率)하게 하여 산양(山陽)의 병사(兵士)와 합진(合陣)하게 함. ᄋ 4월 11일 안동부사(安東府使), 군사를 거느리고 용궁(龍宮)으로 향해 떠남. ᄋ 4월 12일 병사 권응수(兵使權應銖), 예천으로부터 안동부(安東府)에 들어옴. ᄋ 4월 29일 용궁의 전통에 의하면, 당교(唐橋)의 왜적이 28일에 모두 상주(尙州)로 떠났다고 함. 명군(明軍)의 선봉이 당교(唐橋)에 도착했다고 함. ᄋ 안동부사(安東府使), 용궁으로 감. ᄋ 5월 3일 순찰사(巡察使), 명병(明兵)을 영접하기 위하여 용궁을 떠남. ᄋ 5월 4일 순찰사(巡察使), 예천(醴泉)에 있으면서 회송(回送)하는 장계(狀啓)에서 공훈과 수고를 상준다고 함. ᄋ 5월 5일 향병대장 김핵(鄕兵大將金핵, 1555-1593), 안동부(安東府)에 들어가 순찰사(巡察使)와 만남. ᄋ 5월 22일 경상좌도 관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치계(馳啓)하기를, "상주의 왜적은 매일 용궁, 예천 등의 고을을 분탕질하고 있는데, 중국군의 선봉은 벌써 문경 유곡(幽谷) 등지에 도착했습니다."라고 함. ᄋ 6월 5일 경상도 예천, 용궁 등은 모두 분탕과 절거를 겪었음. ᄋ 7월 16일 사간원에서 아뢰기를, "예천군수 정사신(鄭士信)은 지난 해 적변(賊變)이 처음 일어났을 때에 간관(諫官)의 반열에 있는 몸으로서 사친(私親)을 핑계로 상소하여 돌아가기를 청하였습니다. 임금께서 사(私)를 돌아볼 겨를이 없다는 전교까지 내리셨는데도 겨우 서울을 벗어나자 곧바로 장인(丈人)의 임소(任所)로 도망쳤으며, 왜적의 수급(首級)을 구해가지고 와 죄를 면하려고 도모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서둘러 거두어 서용(敍用)하였기 때문에 물정(物情)이 이미 마땅치 않게 여기고 있는데, 지금 본직(本職)에 제수되자 공론(公論)이 더욱 분하게 여기고 있으니 바라건대 그를 파직하시어 신하로서 임금을 버린 불충의 죄를 징계하소서."하니 임금이 따름. ᄋ 11월 5일 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라 하니, 유성룡(柳成龍)은 아뢰기를, "영천(永川)에서 세운 공은 덮어둘 수가 없습니다. 정대임(鄭大任)도 성심으로 적을 쳐서 그 공이 권응수(權應銖)와 다름이 없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정대임은 어떤 사람인가?"함.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그 위인을 보건대, 장수가 될만 했습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 '나는 글을 모르므로 목민관(牧民官)은 될 수 없다. 장수로 정하여 내려보내어 일대(一隊)를 담당해 준다면 적들을 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의 뜻이 가상했습니다. 그리고 영천에서의 공을 모두 권응수에게 돌리고 자신의 공은 말하지 않았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무슨 관직에 있는가?"함. 아뢰기를, "예천 군수로 있습니다."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소원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라고 함.
1595(宣祖 28) : 경상도(慶尙道)를 2분(二分)하여 좌우도(左右道)로 함. ᄋ 이복(李福), 예천 등지를 횡행하면서 도적질하다가 정기룡(鄭起龍)이 이끄는 500여 명의 의병에게 피살됨
1596(宣祖 29) : 경상좌우도(慶尙左右道)를 합하여 감영(監營)을 달성(達城)에 둠. ᄋ 2월 9일 비변사에서 토잔(兎棧)의 험조(險阻) 설치를 건의하기를, "용궁과 토잔은 서로 거리가 멀지 않으니, 만약에 근실한 사람을 얻어 그 고을의 수령으로 삼고 상주, 문경과 합세하여 다스리게 하면 토잔의 일은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용궁의 새 현감 이지(李祉)는 자상하여 백성을 다스리는 것은 감당할 수 있겠으나 수비의 조치는 아마 그의 장기가 아닌 듯 합니다. 이 곳 사람들을 단속하여 둔전(屯田)을 만들고 험조를 설치할 계책이 있을 것으로 봅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이지를 체차(遞差)하고 김각(金覺)으로 대신하여 이 일을 전담시키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하니, 임금이 따름. ᄋ 12월 13일 예천 등에 지진이 발생함.
1597(宣祖 30) : 1월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남. ᄋ 권욱(權旭), 상소(上疏)를 올려 스스로 청하여 정벌에 나서 선무훈(宣武勳)에 등록됨. ᄋ 이개립(李介立), 관찰사 종사관 황여일(體察使從事官黃如一)의 천거로 향병대장(鄕兵大將)이 되었으나 병마절도사 김경서(兵馬節度使金景瑞)가 병사를 자기 휘하에 속하게 하지 않는 사실에 사감(私感)을 품고 무고하자 감천면 현내리에 돌아와 봉산서당(鳳山書堂)을 세우고 후진을 양성함. ᄋ 권주(虎鳴內新池後人), 곽재우 휘하(郭再祐麾下)의 의병 참모장(義兵參謀長)이 됨. ᄋ 이경남(李慶南), 진남(鎭南), 흥남(興南) 3형제(虎鳴白松人)가 화왕산성(火旺山城)의 곽재우(郭再祐)를 도와 의병을 일으킴. ᄋ 박수약(朴守約), 수검(守儉) 형제(龍門人), 창의(倡義)하여 화왕산성(火旺山城)을 지킴. ᄋ 장세희(張世禧, 虎鳴原谷人), 아들 여한(汝翰), 여혁(汝혁)을 데리고 박성(朴惺)과 곽재우(郭再祐)의 참모로 시종 활약함. ᄋ 이홍경(李弘經), 이경국(李擎國),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창의함. ᄋ 가을 이준(李埈), 소모관(召募官)이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방어사(防禦使)를 도와 성을 수축(修築)하고 군량(軍糧)을 모았으나 왕명으로 중지됨에 상소(上疏)하여 항의함. ᄋ 김광엽(金光燁),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됨. ᄋ 10월 2일 호조(戶曹)가 왕에게 아뢰기를, "듣기에, 예천 등 여러 고을이 왜적의 변란을 당하지 않았다 하니, 만약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중국군의 양식을 이러한 곳에서 마련해야 되겠으나, 왜적이 근처 고을까지 접근해 있으므로 연분(年分)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니, 부득이 등급을 참작해서 마련한 다음에 기한을 정해서 부세를 거두어 들여야 될 것입니다. 금년 농사는 비록 크게 흉년은 아니지만, 또는 풍년도 아니므로 하(下)의 하(下)로 규정한다 해도 백성의 원망이 없지 않을 것이니, 하의 하에서도 1두(斗)를 삭감해서 마련하여 1결(結)에서 3두를 거두어 들이면 공사(公私)가 모두 편리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이와같이 부세를 거두고 전부터 쌓아둔 곡식과 새로 거두어 들일 환상곡(還上穀)을 모두 합해서 마련하면 대군이 30-40일 간 먹을 양식은 마련해 낼 수 있을 것입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함. ᄋ 11월 21일 명(明) 나라 경리 양호(經理楊鎬), 도독 마귀(都督麻貴) 등이 왜적 토벌을 위해 남쪽으로 내려가려 하자, 왕이 유성룡(柳成龍)에게 먼저 가서 군량을 조치하라고 명함. ᄋ 12일 명(明) 나라 양호(楊鎬), 총병 마귀(總兵麻貴), 4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부총병 이여매(副總兵李如梅)를 좌협(左協), 부총병 고책(副總兵高策)을 중협(中協), 부총병 이방생(副總兵李芳生), 해춘(解春)을 우협(右協)으로 하고 조선의 접반사 이덕형(接伴使李德馨), 도원수 권율(都元帥權慄) 등이 조령(鳥嶺)을 넘어 예천에 이름. 일찌기 와서 기다린 유성룡(柳成龍)이 예천에서 마귀를 맞이하고, 양호를 용궁에서 맞이함. 마귀 때문에 예천향교(醴泉鄕校)의 성전(聖殿)에 번량사건(飜樑事件)이 일어나고, 양호(楊鎬)는 예천 관혁동(醴泉貫革洞, 路下里)의 우물(酒泉) 맛을 보고 그 맛에 탄복함
1598(宣祖 31) : 2월 3일 군문(軍門)이 병마(兵馬)를 나누어 신속히 맡을 지역으로 가게 하였는데, 유격 섭방영(遊擊葉邦榮)은 원부(原部)의 관병(官兵)을 거느리고 용궁에 나누어 주둔했음. ᄋ 2월 18일 마귀 제독(麻貴提督)이 서울에 군량이 없다는 이유로 파귀(頗貴)를 예천에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먹으면서 방수(防守)하게 함. ᄋ 3월 29일 양호 경리(楊鎬經理)가 이남(二南)으로 군사를 나누어 보내고 왕에게 올린 자문(咨文)에서 이르기를, "준화 우영유격 진우문(遵化右營遊擊陳愚聞)은 군사 1,500명을 거느리고 예천에 주둔하고 있습니다."함. ᄋ 5월 9일 경리도감 낭청 정기룡(經理都監郎廳鄭起龍)이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 사람들은 서장(書狀)을 올려 중국 병사가 머물러 있기를 요청하였습니다."라고 함. ᄋ 5월 10일 유격 섭사충(遊擊葉士忠)이 게첩(揭帖)을 올리기를, "변변치 못한 제가 예천을 방어하고 있는데, 의리를 숭상하는 귀국의 사민(士民)들이 바람에 쓸리 듯 모여들어 호장(壺漿)으로 우리 군사를 맞아 위로하여 주었습니다. 다른 곳으로 간다는 것을 듣고는 그 곳에 머물러 있게 하려는 마음이 몹시 간절하여 애연(애然)히 부자 간의 골육같은 정감이 있었으니, 참으로 천하는 한 가정입니다."라고 함. ᄋ 5월 27일 마귀 제독 전송시 왕이 접반사 장운익(張雲翼)을 불러 이르기를, " 이 번 행차는 안동으로 갈 것인가?"하니, 장운익이 예천으로 갈 것이라고 대답함. 임금이 이르기를, "무엇 때문에 예천으로 가는가?"하니, 장운익이 아뢰기를, "지난 번, 예천 사람들은 술과 고기를 가지고 위로하여 맞이하였고, 또 덕을 칭송한 일이 있었으므로, 예천에 머물고자 하여 가는 것입니다."라고 함. ᄋ 9월 1일 비변사가 군량의 운반 문제를 건의하기를, "경기도와 충청도의 각 참(站)에 인부를 분정(分定)하여 군량을 용산창(龍山倉)으로부터 용궁과 상주로 운반하는 일에 대해 여러 가지로 헤아려 보았습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음. ᄋ 9월 마귀(麻貴), 24,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예천에서 1박하고 안동으로 떠남. ᄋ 9월 22일 약방이 왕의 온천 목욕을 하지 말 것을 아뢰니, 왕이 이르기를, "옛날 조종조(祖宗朝, 太祖 李成桂)에는 온양과 예천에 간 일이 있었는데, 어째서 경들은 억지로 막는가?"라고 함.
1599(宣祖 32) : 용문사(龍門寺), 대장전(大藏殿) 등을 중수함. ᄋ 달성 감영(達城監營)을 안동으로 옮김. ᄋ 정탁(鄭琢), 고평제(高坪堤)를 쌓음. ᄋ 1월 7일 호조(戶曹)가 왜적 퇴각 후 남쪽 지방 수습에 관한 일을 왕에게 건의하기를, "경상도 감사 정경세(鄭經世, 龍宮人)는 병으로 용궁에 누워있어 체임(遞任)되어 오랫동안 도주(道主)가 없으므로 모든 일이 해이해졌으니, 매우 우려스럽습니다."라고 하였음. ᄋ 2월 29일 지중추부사 장운익이 대죄할 것을 왕에게 아뢰기를, "신이 지난 해 5월에 마귀 제독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예천에 당도하여 갑자기 중풍이 들었는데, 성은을 입어 체직(遞職)이 되고, 다행이 살아서 돌아왔습니다."라고 함. ᄋ 6월 24일 <기로연시화첩(耆老宴詩畵帖)>(寶物 494號, 醴泉 高坪)이 만들어짐. ᄋ 12월 20일 용궁현감 허정은(許廷誾), 대간(臺諫)의 탄핵으로 이임함.
16세기 말 : 면제(面制) 실시에 따라 예천군(醴泉郡) 23개 면(面)으로 됨. 이 때 예천군 소속의 다인현(多仁縣)은 현내면(縣內面), 현동면(縣東面), 현서면(縣西面), 현남면(縣南面)으로 되고, 안동(安東) 소속의 감천현(甘泉縣)은 감천면(甘泉面)으로 되고, 풍기군(豊基郡) 소속의 은풍현(殷豊縣)은 상리면(上里面)과 하리면(下里面)으로 개편됨
1600(宣祖 33) : 정탁(鄭琢, 高坪), 좌의정(左議政)에 오름
1601(宣祖 34) : 경상도 감영(監營)을 안동(安東)에서 대구(大丘, 大邱)로 옮김. ᄋ 정탁(鄭琢), 읍호정(읍湖亭, 虎鳴黃池)을 창건하고, 고평동약(高坪洞約)을 경정(更定)하여 시행함. ᄋ 1월 6일 왕이 김지회(金之晦)를 용궁 현감으로 삼음. ᄋ 10월 17일 예천군수 이춘영(李春永), 도체찰사 이덕형의 탄핵으로 이임함. ᄋ 10월 22일 황여일(黃汝一), 예천 군수로 임명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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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대표 김광수), 30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상을 수상함...축하합니다.
예천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醴泉郡農協쌀組合共同事業法人, 農林畜産食品部 長官賞 수상농업과 企業의 相生協力) [記事] : 예천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이 2017년 11월 30일 서울 양재동 AT센터에서 개최된 농림축산식품부 주관 ‘2017년 농업과 기업이 함께하는 상생협력 대회’에서 전국 우수업체로 선정되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표창을 수상했다. 이번 대회는 FTA 등 글로벌 경쟁시대에 우리 농식품 산업이 경쟁력을 갖기 위해 농업과 기업의 협력을 통한 동반성장을 도모하고, 상생협력 우수사례를 발굴 확산하기 위해 전국 모든 농ㆍ식품 기업을 대상으로 추진된 대회이다. 이번 상생협력 대회에는 대기업과 식품기업, 농업관련 업체들이 치열한 경쟁을 펼친 가운데 예천군농협쌀조합공동사업법인이 대규모 식품기업인 오뚜기와의 백미쌀 계약재를 통한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국순당, 네이버, 아모레퍼시픽 등 쟁쟁한 대기업과 함께 수상하는 쾌거를 달성했다. 「예천쌀」은 토질이 비옥하고 맑은 물과 일조량이 풍부한 지역에서 생산되어 예로부터 임금님에게 진상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하며 공공비축미 특등 비율이 25.2%로 인근 시ㆍ군보다 5%이상 높은 수치를 보인다. 예천군은 최근 쌀 과잉 생산과 쌀값 하락, 수입 확대 등의 어려운 여건에서도 쌀 명품화를 통한 농민 소득 증대를 위해 개포면 경진리 에 전국 최대 규모의 미곡종합처리시설을 설치하였으며, 농협쌀조공법인과 판로 확보를 위해 노력한 결과 2015년 대기업인 오뚜기와 납품계약 체결 2017년 7,000톤에 이르는 납품실적을 달성하였다. 예천군농협쌀조공법인 김광수 대표는 “이번 수상은 예천군과 농협이 지역 주민들이 애써 재배한 쌀이 제값을 받을 수 있도록 농업 유통 및 판로 확보에 노력한 결과이며, 앞으로도 안정적이 농가소득 증대를 위해 예천군과 함께 열심히 발로 뛰겠다.”라고 밝혔다.(醴泉뉴스 2017.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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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면 출신 조성순 시인, <가자미식해을 기다리는 동안> 출판...축하합니다.
조성순(시골 飮食처럼 따뜻한 情 담은 詩 66篇) [記事] : 거친 비약과 현란한 수사가 난무하는 이때, 시에 대한 순결성을 그대로 그린 시집이 나왔다. 조성순 시인의 ‘목침’에 이어 나온 두 번째 시집(가자미식해를 기다리는 동안)이다. 이 시집은 총 4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눈사람’, ‘우물’, ‘선풍기’, ‘가자미 식해’ 등 제목만 들어도 어린 시절 고향에서의 따뜻한 정을 느끼게 하는 66편의 시가 실렸다. 마지막에는 ‘농경사회의 눈으로 세상보기’를 주제로 해설을 다루고 있다. 친한 문인들 사이에서 조성순 시인은 누구보다 문학을 아끼고 사랑하는 시인이다. 문청시절을 함께한 박덕규(단국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 시인은 “문학의 숭고를 한껏 믿고 그것에 쉽게 범접하려는 태도를 경계하는 일종의 ‘문학 순결주의자’였다. 그는 인간과 자연을 사랑할 줄 아는 시인이다. 지난 시간을 그리워하고 다가올 시간에 희망을 품는 시인이다”고 평했다. 저자는 예천군 감천면 장산리 찬샘골에서 나고 자랐다. 대구 대건고등학교 문예반과 동국대학교 국문학과에서 문학을 공부했다. 석사과정에서 현대문학을, 박사과정에서 고전산문을 공부하고 수료했다.(大邱日報 2017.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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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