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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보10:1603-1627(祝무학정/금당실권역/예천방문1,496)
작성자장병창 @ 2017.12.02 06:09:50

  예천의 연보 10 : 1603(선조 36)-1627(인조 5)(附 무학정(이상배`허회림`도동섭`채번식`박래익), 26일 전국궁도대회 단체전 우승함...축하합니다/용문면 금당실권역, 교육부와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어촌 인성학교에 지정됨...축하합니다/예천방문 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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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03(宣祖 36) : 용궁향교(龍宮鄕校), 대성전(大成殿)과 명륜당(明倫堂)을 중건함. 7 17일 예천 북면 제곡리에서는 논가운데 땅이 꺼졌는데, 사면 둘레가 94촌이고, 깊이가 2 5촌이었음. 흐린 물이 꺼진 바닥에 있었는데, 사람이 꺼진 곳을 밟으면 평지처럼 단단함.

1604(宣祖 37) : 226일 경상감사 이시발(李時發)이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군수 이충가(李忠可)의 첩정(牒呈), '정월 19일 축시(丑時)에 남에서 북으로, 20일 축시에는 서에서 동으로 지진이 있었으니, 이변이 비상하다.'하였으므로, 첩정의 내용이 사실인지 사방 이웃 고을에 이문(移文)하여 알아보게 하였습니다."라고 함. 3 29일 경상도 순검어사 유간(巡檢御史柳澗)이 장계(狀啓)하기를, "예천군수 이충가(李忠可)는 행정이 조리와 두서가 있어 온 지경이 편안하게 되었는데, 부임한 지 반 년 만에 온갖 폐해가 없어지고 모두 잘 되어 가고 있습니다."라고 함. 6 6일 경상도 관찰사가 용궁 고응두(高應斗)의 포장(褒獎)을 건의하기를, "용궁에 사는 고응두는 본래 양반의 후손인데, 학식은 이름자도 모르고 가난하여 생활하기에 어려우나 천성이 본디 순효(純孝)하여 양친을 봉양하는데 있어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 번 난리에 노복(奴僕)들이 흩어져 도망해 버리자, 자신이 몸소 나무하고 물을 기르며 끝내 조금도 게으름 없이 했습니다. 계사년(1593) 봄에 먼저 어미의 상사(喪事)를 당하여서는 자신이 직접 흙을 져나르고 관곽(棺槨)을 마련하여 매장하는 등 효성을 다하였습니다. 홀로 있는 병든 아버지가 걸음을 걷지 못하자, 부축하여 이리저리 다니며 품을 팔아 봉양하기도 하고, 더러는 군번(軍番)을 대신 서주고 값을 받아 봉양하기도 하였습니다.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몸소 농사를 지으며 효성이 더욱 돈독했는데, 그의 삼촌을 섬기는 것도 아비와 똑같이 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흠찬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각별히 포장하여 사람들이 용동(聳動)되게 하소서."하니, 예조(禮曹)에 계하(啓下)하였음. 9월 충훈부 화사(忠勳府畵師), 약포영정(藥圃影幀, 寶物 487 )을 그림. 9 16일 동 유격(董遊擊)의 접반관 여우길이 치계하기를, "예천군에 이르러서는 마침 날도 저물었고, 사세가 급박하였기 때문에 하인들이 제 때에 공궤(供饋)하지 못했던 탓으로 소요스러움이 일자, 동 유격이 잠시 동안 진노하였었습니다. 그래서 신이 역관(譯官)들을 시켜 황망하고 촉박하여 미흡했다는 내용으로 말을 꾸며서 노여움을 풀게 했습니다."하였는데, 예조(禮曹)에 계하(啓下)하였음. 9 17일 동 유격의 접반관 여우길이 치계하기를, "동 유격이 이 번 행군이 예천군에서 하인들이 지응(支應)을 제때에 잘하지 못해 노여움을 야기시킨 뒤로 가정(家丁)들이 점차 잡아다가 욕보이는 것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수령(守令)을 구타하면서 뇌물을 내어놓도록 강요하기 때문에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으니 앞으로의 일이 매우 우려스럽습니다. 대저 이 번 행군의 경우는 패문(牌文)을 발송한 지 오래지 않은 데다가 이틀 길을 하루에 달려갔기 때문에 각 참(), 각 역()에서 지응에 필요한 인마(人馬)를 제때에 판출하지 못하였으므로 가는 곳마다 일이 발생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하였는데, 예조(禮曹)에 계하하였음.

 

1605(宣祖 38) : 45일 예천군에 서북쪽으로부터 동남쪽을 향하여 뇌풍(雷風)이 크게 일고 비와 우박이 뒤섞여 내려 양맥(兩麥)이 말라 손상되었고, 목화도 막 싹이 났는데, 모조리 말라 손상되어 수확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음. 422일 예천에 비, 우박이 내려 농사에 큰 피해를 줌.71일 용궁 등의 재해가 더욱 혹심하였는데, 산사태가 나고, 죽은 사람과 가축의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으며, 관청과 민가가 거의 떠내려가고 깊은 산의 큰 나무들은 뿌리채 뽑혀 낙동강으로 떠내려갔음. 모두 예전에 없었던 재해라고들 하였음. 723일 예천, 용궁 등에서 첩보(牒報)한 내용에, "큰 바다로 변하여 민가가 침수되고, 들이 온통 물바다로 변하였다."고 함. 10 1일 서원부원군 정탁(西原府院君鄭琢)이 졸함.

 

1606(宣祖 39) : 송계암(松溪庵), 용궁현 묘장동(龍宮縣墓藏洞, 知保)으로 이건됨. 1 29일 예천군수 이충가(李忠可), 사헌부의 탄핵으로 이임함.24일 홍치상(洪致祥), 예천 군수로 임명됨.816일 김용(金涌), 예천 군수로 임명됨.

 

1607(宣祖 40) : 10 5일 예천군수 김용(金涌), 사헌부의 탄핵으로 이임함. 1119일 홍경소(洪敬紹), 예천 군수로 임명됨.

 

1608(宣祖 41) : 호남승 혜명(湖南僧慧明), 용문사 제하당(龍門寺霽霞堂, 舊 寮舍, 1984燒失)을 증축 중수함.

 

1609(광해군 1) : 17일 왕이 정묵(鄭黙)을 예천 군수로 삼음. 8 12일 경상감사 강첨이 치계하기를, "용궁 등 고을이 치보(馳報)하기를, '이 달 719일 인시(寅時)에서 신시(申時)까지 큰 비가 마치 퍼붓듯이 내리고 폭풍이 휘몰아쳐,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산과 들의 나무들이 모두 뽑히고 전답의 벼는 물에 잠기거나 바람에 쓰러져 마치 서리맞은 풀과 같다."하였습니다. 이 번 이 폭풍우의 재변은 예전에 없었던 일로 보기에 매우 참혹하며, 장차 백성들의 일이 매우 걱정됩니다. 냇물이 넘쳐 모래가 쌓인 곳과 수재가 특별히 심했던 곳에는 급재(給災)를 하여, 죄 없는 재해민들이 조금이나마 은혜를 입도록 하소서."라고 함. 9 17일 사시(巳時)에 예천군에 지진이 났는데, 남쪽에서 북쪽으로 향하여 우뢰같은 소리가 났음.

 

1610(光海君 2) : 728일 성주 생원 정준민(鄭俊敏)이 정구(鄭逑)의 신원(伸寃)과 박이립(朴而立)의 처벌을 청하였으나, 왕이 불허하였는데, 경상도 감사가 용궁에서 청송(聽訟)한 적이 있었음. 12 1일 사간원이 왕에게 아뢰기를, "급제 전이성(及弟全以性)은 본래 용궁 사람으로 용궁 땅에 정배(定配)되었는데, 다른 곳으로 정배하소서."하니, 왕이 윤허하지 않음. 129일 이조(吏曹)가 왕에게 아뢰기를, "전 응교 김광엽(金光燁)1116일에 죽었습니다."라고 아뢰니, 별치부(別致賻)하라고 전교함.

 

1612(光海君 4) : 정산서원(鼎山書院, 生川)이 설립되어 이황(李滉), 조목(趙穆)이 제향(祭享). ᄋ 초간정(草澗亭, 龍門竹林), 재건됨. 4 9일 예천에 지진이 발생함. 528일에 예천군수 곽열(郭說), 사간원의 탄핵을 받음.

 

1613(光海君 5) : 정탁(鄭琢), 위성공신(衛聖功臣)으로 호종공신록권(扈從功臣錄券, 寶物 494)에 추증됨

 

1615(光海君 7) : 82일 역변(逆變)을 고한 죄인 문경천의 공초 내용에서 이르기를, "고변(告變)을 하려던 참에 예천에 사는 충찬위 이사음(忠贊衛李嗣音)이 빚을 받기 위해 대장(大將)에게 부탁하여 저를 가두었으므로 마침내 전옥 참봉(典獄參奉)에게 고변을 하였습니다."라고 함.

 

1616(光海君 8) : 정윤목(鄭允穆), 강당(講堂, 豊壤三江)을 창건하여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현판(懸板)을 게시함. 12 12일 의금부 죄인을 각각 정배(定配)시켰는데, 이유경(李有慶)은 용궁에, 법진(法軫)은 예천에 정배하였음.

 

1617(光海君 9) : 1112일 나라 잔치 때 춤과 노래를 하는 정재인(呈才人)인 조업성(趙業成, 호는 無石)이 흉서(兇書)를 돌렸는데, 그 내용은, "비변사에서 대행례(大行禮)를 행하니, 예천에 사는 양부(養父), 김춘봉(金春奉), 황룡(黃龍), 용궁현에 사는 김언분(金彦分), 신몽룡(申夢龍), 신남복(申南福), 신영복(申永福), 김온전(金穩全) 등은 참석하라."고 함(備邊司謄錄). 11 14일 적괴(賊魁) 자양(自陽)의 초사(招辭)에 따르면, "영천(榮川) 옥문을 깨부술 때에 대장(大將) 7, 별장 2명이 있었는데... 2(第二將) 모진금이(毛進金伊)는 용궁에서 체포되었고, 3장 자양은 영천의 장관(將官)이 체포하고... 용궁, 예천 등의 고을에서 체포한 적인은 다 기록할 수 없으나..."라고 함.(備邊司謄錄)

 

1618(光海君 10) : 427일 박정길(朴鼎吉)이 입번(入番)한 군사들에 대한 침징(侵徵) 폐단에 대해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분부에 따라 이현궁(梨峴宮)을 수직하는 군사 3명을 불러다 물어보았는데, 주애남(朱愛男), 남궁손(南宮孫), 황언희(黃彦希)가 진술하기를, '우리는 모두 용궁현 기병(騎兵)의 봉족(奉足)인데, 그 집 주인이 병이 들자, 용궁현에서 관례대로 영장을 발급해서 대신 보내었다. 그런데 병조(兵曹)에서 점고(點考)를 받은 뒤에 도총부(都摠府)의 색리(色吏)가 영장 발급에 따른 값이라고 하면서 강제로 목면(木綿) 1필을 받아갔다.'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도총부의 낭청 및 하리(下吏)를 불러 물어보았더니, 대답하기를, '봉족이 상번(上番)하는 경우 중간에 대신 입번하는 페단이 있을까 염려되기 때문에 용궁현의 첩보(牒報) 내용 중에서 사조를 대지 못하는 자는 적발하여 목면을 징수해 왔으니, 이것은 몇 년 전부터 관례화되어 온 일이다.'하기에 신이 세 명의 군사에게 사조를 직접 물어보니, 모두 그의 사조를 제대로 외우고 있었으며, 한 사람도 다른 사람 대신 입번한 자는 없었습니다. 지금 농사철을 당하여 그 집 주인이 병든 까닭에 용궁 고을로부터 충정되어 보내졌으므로 식량을 싸들고 상경한 것이지, 이것이 어찌 그들이 원해서 하는 일이겠습니까? 그런데도 도총부에서 더 보살펴 주지 못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침해하며 징수까지 하고 있습니다. 만약 도총부의 낭청이 말한 대로 다른 사람 대신 입번했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경우라면 목면을 징수하여 간사한 행위를 징계하더라도 혹 괜찮겠지만 용궁 고을에서 충정해 보내었고, 병조의 점고까지 받은 군사에 대해 교묘한 명목을 붙여 이렇게까지 마구 침해하다니 놀랍기 그지없습니다. 차지(次知) 낭청 및 색리를 모두 추고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으소서."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함.

 

1619(光海君 11) : 한씨(韓氏)와 정씨(鄭氏), 임진왜란 순국으로 풍양면 우망리에 정려(旌閭). 12 10일 지평 황중윤(黃中允)이 고강(考講) 탈락 교생(敎生)들을 군정(軍丁)에 충원시키는 방법을 왕에게 제안하기를, "신이 영남을 지나게 되었는데, 예천 등의 나이가 많은 유생들이 무리를 지어 와서 호소하기를, '나라에 변방의 걱정이 있는데, 군부(軍簿)가 형편없으니, 장정들을 동원하여 정원을 채우는 것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러는 가운데 지극히 원통하고 매우 민망한 것이 있다. 근래 조정에서 사목(事目)을 내려 각 고을로 하여금 정원 밖의 교생들을 깎아서 군대 정원에 채우라고 하였다. 그런데 영남은 국가의 근본으로 선비의 고향으로 불리워지는 곳이지만, 교적(校籍)에는 스스로 정수가 있기 때문에 정원을 늘리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고강도 하지 않은 채 몰아서 하루 아침에 행오(行伍)의 병졸로 삼으려 하니, 국가가 민심을 잃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들로 하여금 먼저 고강을 하게 하여 경서에 능통한 자를 정원 안에 처하게 하고, 능통하지 못한 자를 정원 밖에 두게 한 다음에 정원 밖의 사람들을 군오(軍伍)에 충정한다면, 국가는 민심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함.

 

   1623(인조 1) : 620일 용궁현감 원득회(元得會), 이임함. 73일 예천군수 남렴(南濂), 승정원의 계()로 이임함

 

1624(仁祖 2) : 1월 이괄(李适)의 난 일어남. 박수의(朴守誼, 龍門人), 이광윤(李光胤), 이개립(李介立), 이준(李埈), 전로(全로, 龍宮人), 정언굉(鄭彦宏, 開浦琴里池골人), 안대윤(安大胤) 등이 창의(倡義). ᄋ 황사성(黃士誠), 적세(敵勢)를 염탐(廉探)하다 잡힌 후 탈출하여 안현(鞍峴)에서 싸워 진무원종공신(振武原從功臣)이 됨. ᄋ 예천군수 홍위(洪瑋), 선정하였으나 예천인 중에 미움받던 자가 부정을 무고(誣告)하여 구속됨. 왕의 호의로 석방되었으나 곧 병사(病死). 1 25일 용궁별감(龍宮別監) 장여신(張汝信) 2차에 걸쳐 형을 받았고, 권극해(權克諧)가 예천에 우거(寓居). 9 23일 홍이일(洪履一, 字享五), 전세 차원(田稅差員)에서 예천 군수로 부임함.

 

  1625(인조 3) : 75일 호조 언관 이민구(李敏求)가 아뢰기를, “전세(田稅)는 용궁, 예천 등이 관납(官納)하였습니다.”라고 함. 8 23일 호조 언관 이민구가 아뢰기를, “경상도 전세차원(田稅差員)으로 당초 예천 군수가 차정(差定)되었습니다라고 함.

 

  1626(인조 4) : 124일 홍립(洪雴), 용궁 현감 부임차 왕에게 하직 인사를 함.

 

1627(仁祖 5) : 1월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정윤해(鄭允諧)가 태조(太祖)의 화상(畵像)을 모시고 강화도(江華島)로 피란함. 1 28일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예천의병장 장여한(張汝翰), 용궁의병장 정윤목(鄭允穆)으로 나누어 정함. 이형곤(李亨坤), 이광윤(李光胤), 한겸윤(韓謙胤) 등이 창의함. ᄋ 황사성(黃士誠, 醴泉邑淸福里月厓), 정묘호란으로 왕을 강도(江都)로 호종(扈從). ᄋ 덕잠대사(德潛大師), 장안사(長安寺, 龍宮鄕石)를 중건함. 7 16일 용궁 등지에 퍼붓듯이 비가 많이 내려 평지가 내를 이루었음. 1025일 병조에서 아뢰기를, “11월 당번 군사(當番軍士)를 오늘 점고(點考)해 보니, 군사 1인이 없는데, 예천 수령을 파출(罷黜)하소서.” 하니, 왕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함. 10 27일 이정공(李廷恭)을 예천군수로 삼음. 12 2일 홍이일(洪履一), 경상도관찰사의 계청(啓請)으로 계속 예천군수로 있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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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학정(이상배`허회림`도동섭`채번식`박래익), 26일 전국궁도대회 단체전 우승함...축하합니다.

 

  무학정(全國弓道大會 團體戰 優勝 : 武學亭) [記事] : 무학정(사두 허후길)20171125~26일 양일간 경주 호림정에서 경주시 궁도협회가 주최한 제9회 경주시장기 전국궁도대회 단체전에서 우승을 차지해 활의 고장 예천을 전국에 알렸다. 전국 80개 정 4백여명이 참가한 단체전에서 이상배·허회림·도동섭·채번식·박래익 등 5명의 선수가 출전하여 예선 공동 1위로 16강에 진출했다. 16강전에서 충주 탄금정, 8강전에서 창녕 용상정, 4강전에서 신안 용항정을 차례로 꺾고 결승전에서 울산 고헌정을 따돌리고 우승을 차지했다. 한편 9백여명이 출전한 개인전에서는 허회림 선수가 5위에 입상했다. 무학정은 지난 5월 통합경북협회장기 단체전 우승과 10월에 안동시장기 단체전 우승, 개인전 한응복 선수가 우승하는 등 도내 대회에서는 좋은 성적을 거뒀다. 특히 전국대회 단체전 우승은 지난 2000년 제1회 울릉군수배 전국대회 우승 이후 17년만이다. 허후길 사두는 "이현준 군수님과 예천군체육회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원 속에 회원들이 단합하여 열심히 연습한 결과 우승을 차지했다""앞으로도 궁도의 고장 예천을 알리고 선배 궁사들이 이뤄놓은 예천 국궁의 옛 명성을 되찾는데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 무학정은 현재 77명의 회원들이 명궁을 향하여 열심히 습사를 하고 있다.(醴泉新聞 20171201() 14:5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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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용문면 금당실권역, 교육부와 농림축산식품부의 농어촌 인성학교에 지정됨...축하합니다.

 

  용문면 금당실권역(龍門面 金堂室圈域 農漁村 人性學校選定 : 靑少年 人性敎育과 마을圈域 活性化 길 열려) [記事] : 예천군(군수 이현준)은 교육부와 농림축산식품부가 공동으로 지정ㆍ운영하는 『농어촌 인성학교』에 올해(2017) 지정된 전국 9개 마을ㆍ권역 중 용문면 금당실권역이 지정되었다. 농어촌 인성학교는 청소년이 농어촌 현장 체험활동을 통해 인성함양을 할 수 있도록 지정된 농어촌 마을권역으로 청소년의 사회적 문제가 증가함에 따라 올바른 인성함양과 건전사회 구현, 창의적 체험활동을 통한 감성, 사회성, 도덕성을 농촌마을 권역시설을 활용해 개발하고 상호 보완적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 「금당실권역」은 용문면 상금곡 외 2개리를 대상으로 지난 2011년부터 2015년까지 5년간 70억원의 사업비로 권역 내 기초생활, 문화복지, 농촌관광, 경관개선 시설 등을 농촌마을 종합개발사업으로 추진한 지구로 다양한 시설과 체험프로그램 보유 등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농어촌 인성학교 선정으로 금당실권역은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청소년들의 인성교육 기회를 제공하며 도시와의 교류 촉진으로 활력이 넘치는 농촌지역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예천군 관계자는 금당실권역이 이번 농어촌 인성학교 지정으로 지역경제 활성화에 기여할 것으로 보이며, 앞으로도 농촌마을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醴泉뉴스 2017.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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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방문 1,496

 

  천향리(慶北道開發公社`大邱韓醫大, 찾아가는 韓方醫療 奉仕) [記事] : 경북도개발공사(사장 배판덕)20171130일 대구한의대학교 대구한방병원 의료진과 함께 개발공사 11촌 지역인 예천군 감천면 천향리를 방문해 찾아가는 한방의료봉사를 했다.(大邱日報 2017.11.30.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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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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