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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연보15:1728-1763(祝예천여성합창단)
작성자장병창 @ 2017.12.07 06:33:44

  예천의 연보 15 : 1728(영조 4)-1763(영조 39)(附 예천여성합창단(단장 유영미), 안동대 솔뫼문화관에서 열린, 3회 독립군가부르기 경북도합창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함...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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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28(英祖 4) : 228일 예천, 둔전(屯田)의 수세를 할속(收稅割屬)받음(備邊司謄錄 8265面下). 3월 이인좌(李麟佐)가 예천의 이윤사(李允師)의 동조로 난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윤사는 점차 비협조적 태도를 취함. ᄋ 이인좌는 안음(安陰)으로 내려가 경상우도(慶尙右道)를 중심으로 난을 일으킴. 그러나 예천군은 예천현(醴泉縣)으로 강등(降等). 3 27일 예천의 술사 이윤행(術士李允幸)이 일찌기 적(李麟佐)과 서로 왕래해 통하면서 길흉을 점쳐 주었는데, 영남 안무사(嶺南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정탐해서 붙잡아 서울로 보냄. 3 30일 예천향교 교임(醴泉鄕校校任) 권정로(權鼎老), 권덕(權悳), 김태석(金泰錫), 박성태(朴成泰) 등과 정산서원 원임(鼎山書院院任) 권임(權恁), 이평(李枰), 김대석(金大錫) 등이 향교(鄕校)에서 창의 통문(倡義通文)을 발(). 4 1200여 명이 모여 의진(義陣)의 진용(陣容)을 갖추고, 군문절목(軍門節目)과 격문(檄文)을 경내 각처로 전함. 한편 예천향교의 명륜당(明倫堂)에서 의진이 진용(陣容)을 정비하는 과정에 안동, 순흥(順興), 용궁 등지에서 창의 격문(倡義檄文)이 날아들어 인근의 여러 읍()이 서로 연결됨. 이인좌의 난에 예천군 의병소(義兵所)가 설치됨. 창의자(倡義者)는 장위규(張緯奎, 醴泉路上), 장위방(張緯房, 醴泉路上), 임원발(林元發, 醴泉西本), 이선방(李善芳), 윤빈(知保), 이억(李億, 醴泉龍山), 송익룡(宋翼龍, 醴泉高坪, 檄文만듬), 신익도(辛翼道, 開浦伊泗), 안성리(安省履) 안이성(安履性, 龍宮月梧), 유세윤(柳世潤, 知保), 박동석(朴東碩, 龍門), 박동수(朴東秀, 龍門), 박서린(朴瑞麟, 開浦), 박규익(朴逵翼, 龍宮), 박희렴(朴希濂, 龍門上金), 권만추(權萬樞, 龍門下鶴), 장후명(張厚明, 醴泉路上), 장대경(張大經, 虎鳴原谷), 장대규(張大奎, 虎鳴原谷), 정지박(鄭之박, 豊壤浦內), 박성옥(朴成玉, 龍門) 등임. ᄋ 예천군의병소(醴泉郡義兵所)의 별군관 장위규(別軍官張緯奎)는 용문면의 산골에서 적장 세추(敵將世樞), 세모(世謨), 세홍(世弘) 등을 잡음. 동소(同所)의 유진장 임원발 (留陣將林元發)도 공을 세움. 4월 장위규(張緯奎)는 양무원종공신 가선대부(楊武原從功臣嘉善大夫)에 오르고, 임원발(林元發)은 같은 공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오름. 4 10일 임금이 인정문(仁政門)에 나가서 정의련(鄭宜璉, 逆賊 鄭希亮의 조카)을 친히 국문하였는데, 정의련이 공초(拱招)하기를, "이인좌의 무리인 이웅좌(李熊佐)가 예천에 왔다가 310일 뒤에 크게 성내어 돌아가면서, '안동놈들 때문에 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하고 함. 410일 충청 병사(忠淸兵使) 조담(趙담)이 장계하여 왕에게 아뢰기를, "역적 이만구(李萬衢)를 잡았는데, 공초하기를, '3월에 이웅좌(李熊佐), 이숭곤(李崇坤) 등을 용궁에서 만났는데, 이웅좌 등이, 「우리들이 바야흐로 큰 일을 경영하여 형 이인좌는 양성(陽城)으로 가서 군사를 모으고...」하므로 효시(梟示)하였습니다.". 4 11일 안동 사람 권구가 공초하기를, "1725(영조 1) 무렵에 신이 예천 서원(書院)에 갔더니, 원장(院長) 및 지방의 장로(長老) 5,6인이 함께 모였는데, 한 소년이 들어와서 스스로, '골패 등으로 치는 점(六壬占)을 배우려고 합니다.'하기에 신이, '그대를 보건대. 또한 소년이고 재주가 있으므로 배울만한 것이 많은데, 어찌 잡술(雜術)을 배우려 하는가?'하였습니다. 뒤에 물어보니, 이인좌였습니다."라고 함.

 

  ᄋ 4 14일 함양 진격(1728.3.29)때 참여했던 조세추(曺世樞), 정희량(鄭希亮)이 체포(1728.4.3)되자 도망갔으나 예천에서 사로잡힘. 그 후 충주목사 김재로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능치 처사(1728.4.17). 4 16일 이인좌의 표종제 조세추(表從弟趙世樞)가 공초하기를, "예천의 이윤사(李允師) 등이 (이인좌 편에) 들어갔다는 말은 이능좌(李能佐)에게서 들었습니다."하였는데, 조세추는 참형(斬刑)에 처하고, 법대로 자식들은 노비로 만듬. 424일 입시하였을 때, 예천(醴泉) 속오군(束伍軍) 김국(金國)에게 휼전(恤典)을 거행하라고 도신에게 분부하도록 탑전에서 하교하였다(國譯備邊司謄錄 未刊行輯).424일 영남 안무사(安撫使) 박사수(朴師洙)가 왕게게 아뢰기를, "예천의 군사 박국지(朴國只)가 조령을 지키다가 종기가 터져 거의 죽게 되었으므로 예천군수 서종일(徐宗一)이 집에 돌아가 병을 조리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박국지는 마땅히 지키던 곳에서 죽어야 한다고 하면서 끝내 가지않고 있다가 그대로 살아나지 못하고 말았으니, 마땅히 그의 집을 돌보아 구휼해야 할 것입니다."하니, 임금이 관찰사로 하여금 돌보아 구휼하게 함.713일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하여 입시하였을 때 병조판서 조문명이 아뢰기를, 󰡒병조에서 절약해 쓴다면 혹 1년을 지탱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당번으로써 응당 바쳐야 할 것을 호남과 영남은 모두 올려 보내지 않는 것을 위주로 하여 34()을 넘기도록 전혀 올려 보내지 않아 지금은 전포가 여유가 없습니다. 마련할 수 있는 곡식은 1년에 한 차례의 역()이 있으면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예천군수(醴泉郡守) 서종일(徐宗一)의 말을 듣건대 본 읍의 당번포(當番布)를 거의 다 받아두었는데 올려 보내지 않고 퇴봉(退捧)하면 반드시 소모되고 말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미루어보면 여러 고을에서 이미 받아들여 둔 것을 알 수가 있으며, 백성 가운데 이미 바친 자도 있고 혹은 받아서 유치한 것도 있어 중간의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도신에게 각기 신칙하여 속히 올려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자, 임금이 이르기를, 󰡒그렇게 하라. 이광덕은 고집이 있고 박문수(朴文秀)는 지려(智慮)가 있는데, 한갓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라는 뜻만 알아서 나라의 경비를 생각하지 않으니 이는 지나치다. 영남과 호남의 감사가 마음을 다해 백성을 사랑하는 것은 가상하지만 이런 지나친 부분은 억누르지 않을 수 없으니 각별히 신칙하는 것이 좋겠다.󰡓.(國譯備邊司謄錄 未刊行輯)

 

1729(英祖 5) : 46일 병조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왕에게 말씀드리기를, "예천의 전 군수 서종일(徐宗一)은 변(이인좌 난)이 발생한 초기를 당하여 공로가 없지 않았는데도 원종공신(原從功臣)에서 누락되었으니, 의당 원종공신 1등에 추가로 등록해야 됩니다."하니, 윤허함. 4월 초6일 대신과 비변사 당상을 인견, 입시하였을 때에 병조판서 조문명(趙文命)이 아뢰기를, 󰡒예천 전 군수(禮泉前郡守) 서종일(徐宗一)은 변란 초기에 군병을 거느리고 전투에 임할 즈음 강개히 눈물을 흘리며 군졸을 무마하여 크게 군심(軍心)을 얻었고 또 역적 세추(世樞)와 세모(世模)가 본군에 숨어들어 장교를 파견하여 불시에 덮쳐 체포하였으니 공로가 없지 않으나 다만 호서안무사(湖西按撫使)로 있을 때에 세추를 잡았다가 놓치고 장교의 이름으로만 보고하였기 때문에 비변사에서는 전연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 뒤에 그 실상을 전해 듣고 그때의 영의정인 이광좌(李光佐)가 비록 품주(稟奏)한 뒤에 혹 가자(加資)라도 해야 하겠다고까지 말하였으나 녹훈도감(錄勳都監)에서는 비변사의 성책(成冊)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하여 원종(原從)에서 누락됨을 면치 못하였는데 이는 비록 사세가 원래 그렇게 된 것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흠전(欠典)이었습니다. 이제는 마땅히 원종 1등에 추록(追錄)해야 하겠는데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그렇게 하라고 말하였다(172948日 國譯備邊司謄錄 未刊行輯). ᄋ 윤 7 29일 사옹원 예천분원(醴泉分院), 시장 면세(柴場免稅)를 받음(備邊司謄錄 8697面上).729일 사옹원(司饔院) 관원이 제조의 뜻으로 아뢰기를, 󰡒본원의 시장(柴場)은 그릇을 구워 진상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으로 관계되는 바가 지극히 중대합니다. 그러나 본원에 소속된 땅이 두어 곳에 불과한 데다, 광주(廣州) 무갑산(武甲山)을 수어청(守禦廳)으로 이속한 뒤에 그 대토(代土)로 예천(醴泉)의 임자 없는 공한처에 있는 측량도 거치지 않은 화전(火田)을 이전의 판부(判付)대로 입계(入啓)하여 절수(折受)하였는데, 그 세전(稅錢)으로 장작을 사다가 그릇을 굽는데 보조하여 보아도 절반의 수량을 채우기에 부족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번 호조의 결정으로 인하여 예천의 면세전(免稅田) 250결과 분원(分院)의 면세전 950여 부()를 일체로 전세를 내도록 하였으니, 본원의 절수전(折受田)은 여느 아문의 면세전과 아주 달라서 어기(御器)의 번조(燔造)를 오로지 이것에 기대고 있는데, 지금 만약 이것을 혁파한다면 반드시 다른 땅을 대신 절수받고 나서야 바야흐로 어기 번조를 정지할 근심을 없앨 수 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예천의 땅은 곧 수어청으로 이속한 무갑산 땅의 대토입니다. 분원의 시장 역시 분원을 설립할 초기에 절수한 땅으로서 이는 모두 산 위의 화전이어서 원전(元田)에 대한 면세와는 긴헐(緊歇)이 아주 다릅니다. 지금 비록 이것을 혁파하고 다른 땅을 대신 절수하더라도 면세는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지금 변통하고 나서야 내년에 그릇 굽는 일이 정폐(停廢)를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천 분원의 시장을 이전대로 면세를 하여 주어서 어기를 굽는 일이 정지되어 때에 따라 낭패하는 사태가 없도록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상주하여 처치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윤허한다고 함.(國譯備邊司謄錄 未刊行輯)

 

1730(英祖 6) : 박문도(朴文道), 양한당(養閒堂, 虎鳴衡湖)을 창건함. 11 4일 용궁 등 고을에 큰 눈이 오고 천둥도 있었음. 1211일 예천군에서 지진이 발생함. 1228일 용궁 등지에 큰 눈이 오고 천둥이 침.

 

1732(英祖 8) : 924일 예천, 용궁 등지에 지진이 일어남.

 

1734(英祖 10) : 924일 함경도 삼수부(三水府)에 행색이 수상하게 떠돌아 다니는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부사 한사정(韓師正)이 잡아들여 추문(推問)하니, 그사람이 박세만(朴世萬)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박세원(朴世元)이라 일컫기도 하며, 혹은 예천 사람이라 일컫기도 하고, 혹은 충주 사람이라고 일컫기도 함. 또 자복하기를, "이인좌의 난(1728) 전에 역적 조세추(趙世樞), 정희량(鄭希亮)의 심부름으로 서찰을 가지고 서울에 왕래하면서 혼수감으로 채단(綵緞)을 무역하였고, 1728(영조 4)에 적진이 패산(敗散)함에 미쳐 탈신 도주(脫身逃走)하여 이 곳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감영을 거쳐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박세만이 공초하기를, "예천 사람 박동수(朴東秀) 등을 적진에서 만났고, 그 전에 또 역적 조세추가 예천 사람 김규령(金奎齡)과 모의하는 것을 보았으나, 모의한 내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박세만은 끝내 곤장 아래에서 죽었음.

 

1735(英祖 11) : 예천군수 민통수(閔通洙), 영천암(靈泉菴)을 호명면 종산리 고산(古山)으로 이건함

 

1736(英祖 12) : 312일 경상도 생원 이인지(李麟至) 등이 송시열, 송준길의 문묘 종향(文廟從享)하는 일의 의논을 비방하자, 그를 귀양보내었는데, 그 상소에서 예천 현감 민통수(閔通洙)가 상소한 유생을 채찍으로 때렸다고 말하자, 임금이 엄히 신칙하여 금지하도록 명함. 326일 정언 김성탁(金聖鐸)이 상소하여 학문에 힘쓰고 백성을 보전하는 정치에 대해 왕에게 아뢰기를, "예천과 함창(咸昌)의 유생이 혹은 형장(刑杖)을 맞고, 혹은 갇히기도 한 것과 같은 일은 바로 오늘 날 세상 도의의 일대 변고입니다."라고 하니, 임금이 우악(優渥)한 비답을 내림.

 

1737(英祖 13) : 21일 예천, 용궁 등의 고을에 지진이 일어남.

 

1738(英祖 14) : 황사성(黃士誠), 의충사(毅忠祠)에 추향(追享). 1 11일 예천(醴泉縣) 등의 고을을 다시 본래의 명칭(醴泉郡)으로 승격해 회복하도록 왕이 명하였음. 대개 이인좌의 난(1728) 때 역적이 태어난 고을이라 하여 명칭을 낮추었던 것인데, 이제 이미 10년의 시한을 채웠기 때문이었음.

 

1742(英祖 18) : 이서익(李瑞翼), 상우당(尙友堂, 虎鳴宗山)을 창건함

 

1743(英祖 19) : 방산정사(芳山精舍), 조관(趙貫) 조명한(趙鳴漢) 조봉징(趙鳳徵)을 위해 창건됨

 

1746(英祖 22) : 210일 지평 남혜로(南惠老)가 상소하기를, " 예천군수 홍저(洪樗)는 본 읍에 부임하고서부터 오로지 이익을 차지하는 것만 일삼아 재물을 실어나르는 짐바리가 줄을 잇고있기 때문에 백성들의 원성이 떼지어 일어나고 있습니다. 파직하여야 합니다."하니, 비답하기를, "홍저의 일은 먼 외방의 풍문이어서 다 믿을 수 없으니, 나처(拿處)하도록 하라.".

 

1748(英祖 24) : 99일 예천 등 고을에 지진이 발생함.

 

1752(英祖 28) : 취월 대사(醉月大師), 명봉사 내원암(鳴鳳寺內院庵)을 중건함

 

1754(英祖 30) : 용궁현감 이사질(龍宮縣監李思質), 용궁면 향석리 비룡산(龍宮面鄕石里龍飛山) 아래에 임청각(臨淸閣)을 세움

 

1755(英祖 31) : 승 법림 지묵(僧法琳智黙) , 장안사 본사(長安寺本寺, 龍宮鄕石)를 중수함

 

1756(英祖 32) , 약포영정(藥圃影幀, 醴泉高坪)을 보고, 정옥(鄭玉)에게 화상찬(畵像讚)을 내림

 

1759(英祖 35) : 61일 예천군, 사창(社倉)에서 실화(失火)(備邊司謄錄 13264面上). ᄋ 윤 6 29일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있을 때 영의정 김상로(金尙魯)가 아뢰기를, "경상 감사의 장계(狀啓)에 의햐면 예천의 사창(社倉)이 불에 탔으므로 벼와 콩 모두 480석을 예()에 의하여 탕감하소서."하니, 왕세자가 따랐음.

 

1760(英祖 36) : 정옥, <약포문집(藥圃文集)>을 발간함

 

1762(英祖 38) : 12 19일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의 청으로, 전 나주목사 홍역이 환곡을 저축하지 않다가 예천에 정배(定配)되고, 금고(禁錮) 5년에 처해짐.

 

  1763(英祖 39) : 3월 삼강서원(三江書院), 원장 생원 이중목(院長生員李重穆), 재임 홍윤덕(齋任洪潤德). 8 1일 일찌기 예천군 의옥(疑獄)이 있었으므로 경상도 안핵어사 이수봉(按핵御史李壽鳳)을 보내어 조사하게 하였는데, 이 때에 돌아와서 복명하기를, "이충국(李忠國)의 딸이 권조언(權朝彦)의 아내가 되었는데, 그 시어머니의 병이 위급하였는데도 미처 와서 찾아 뵙지 않았으므로 시어머니가 한을 품고 죽었습니다. 그리하여 권조언의 누이동생이 준절히 나무라자, 이녀(李女)가 부끄러워 원한을 품고서 드디어 스스로 자결하였습니다."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부인(婦人)의 성품이 좁는데 연유되어 그런 것이다. 심각하게 죄줄 수 없는 것이다."하고, 권조언과 그에 관련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명하였음. 이어서 전교하기를, "이것은 비록 한 가지 일이지만, 세 가지 경계를 남겼다. 남의 아내가 되어서는 마땅히 시부모에게 성효(誠孝)를 극진히 해야 하고, 시누이(小姑)가 되어서는 마땅히 오빠의 아내와 화목해야 하고, 남편이 되어서는 마땅히 아내에게 모범을 보이는 도리를 극진히 해야 한다는 것이 그 것이다. 이것을 모두 추로(鄒魯)의 고장인 경상도에 효유하여 각기 스스로 면려하게 하라.". 8 11일 일본 통신사 정사 조엄(通信使正使趙엄), 서장관 김인겸(書狀官金仁謙) 등이 예천에서 1박함. 김인겸(金仁謙)은 그의 저서 <일동장유가(日東壯遊歌)>에서 이르기를, "예천에 미녀가 많다"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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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천여성합창단(단장 유영미), 안동대 솔뫼문화관에서 열린, 3회 독립군가부르기 경북도합창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함...축하합니다.

 

  예천여성합창단(獨立軍歌부르기 合唱大會 '銀賞' : 醴泉女性合唱團) [記事] : 경북도독립운동기념관이 주최한 제3회 독립군가 부르기 경북도 합창대회에서 예천여성합창단(단장 유영미)이 영예의 은상을 수상했다. 20171118일 오후 안동대 솔뫼문화관에서 열린 대회에는 사전 참가 신청을 한 도내 10개 아마추어 합창단이 참가했다. 예천여성합창단(지휘 김도형)은 지정곡으로 연극 퍼포먼스가 가미된 압록강행진곡, 자유곡 한강수타령(단원 사물놀이)을 불러 은상을 차지했다. 예천여성합창단은 지난해 금상을 수상한데 이어 이번에 은상을 수상, 탄탄한 실력을 대내외에 과시하고 있다. 이번 대회 시상금은 '희망 2018 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할 예정이다. 한편, 독립군가는 대한제국 의병부터 만주 독립군, 임시정부 소속 한국광복군, 하와이 국민군 등 독립운동가들이 부른 노래이다. 용진가, 독립군가, 조국행진곡, 압록강행진곡, 국민군가, 기전사가 등 여러 곡이 있다.(醴泉新聞 20171206() 11:1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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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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