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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연보 17 : 1786(정조 10)-1843(헌종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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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6(正祖 10) : <예천군읍지(醴泉郡邑誌)>에 의하면, 예천군(醴泉郡)에는 오천서당(오川書堂, 虎鳴), 유계서당(柳溪書堂, 柳川), 능곡서당(能谷書堂, 龍門), 도서당(都書堂, 醴泉邑)이 있음. 또한 예천군의 편호(編戶)와 인구는 다음과 같음. 1(4部는 東邑內面, 西邑內面, 南邑內面, 北邑內面임)
面名 編戶 男丁 女丁 計 現在
4部 904 1,570 1,930 3,500 醴泉邑
雷澤面 418 712 862 1,574 普門面
普門面 435 535 831 1,366 "
艮山面 121 159 264 423 虎鳴面
神堂洞面 304 550 661 1,211 "
虎鳴里面 227 351 479 830 "
位羅谷面 252 349 489 838 "
蘆浦里面 349 627 831 1,458 開浦面 一部
柳等川面 290 411 705 1,116 柳川面
堂洞面 309 489 871 1,360 "
只西牙面 281 250 565 815 "
花粧面 326 520 620 1,140 聞慶山北山陽面
渚谷面 500 854 964 1,818 龍門面
睢鳩谷面 241 367 414 781 "
希里洞面 180 220 321 541 "
冬老所面 489 512 714 1,226 聞慶東魯面
縣內面 300 428 691 1,119 義城多仁面
縣西面 489 924 979 1,903 豊壤面 一部
縣南面 384 467 903 1,370 義城多仁面
縣東面 424 510 731 1,241 "
計 7,355 10,805 14,825 25,630
1787(正祖 11) : 5월 23일 영남 등 6도의 진휼을 지난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마쳤는데, 영남은 예천 등의 고을에 굶는 백성이 총 1,088,287명, 진휼한 각 곡식이 83,531섬(石)임.
1788(正祖 12) : 송금절목(松禁節目) 반포(頒布)에 의하여, 예천에서는 황장목(黃腸木) 보호지(保護地) 1처(處)가 선정됨
1790(正祖 14) : 김여욱(金麗昱) 장대흥(張大興), <양양기구록(襄陽耆舊錄)>을 편하여 초판(初版)함
1791(正祖 15) 왕이 수원(水原)을 거쳐 영월 단종릉(寧越端宗陵)으로 행차(行次) 때 경상, 충청, 경기 유생(儒生) 2천 명이 그 길목에서 왕에게 청하여 단종 충신 권산해(端宗忠臣權山海)가 정려(旌閭, 知保大竹)됨. ᄋ 대홍수로 고평제(高坪堤, 醴泉高坪), 서정평제(西亭坪堤, 醴泉西本) 등이 무너짐. ᄋ 7월 벽파당 우상(碧波堂友祥), 보문사 사적(普門寺事蹟)을 지음. ᄋ 9월 19일 사직 신기경(愼基慶)이 여러 가지 시무책(時務策)에 대해 상소하기를, "옛날의 밀성현(密城縣)은 상주와 예천 사이에 있었는데, 어느 때 혁파해서 상주에 속하게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중간에 또 단밀(丹密) 등 네 면을 나누어 상주에 붙이고, 다인의 네 면(縣內面, 縣東面, 縣西面, 縣南面)은 예천에 소속시킴으로써 두 고을의 소재지까지의 거리는 다 100여 리나 되는데, 그 여덟 면에 사는 사람들은 7천 호로 토양이 비옥하고 마을이 흥성하며, 고을 소재지였던 옛터와 관리의 자손들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지형으로 말하면, 예천의 다인과는 용궁현을 넘어서 삼강(三江)이 그 사이를 갈라놓고 있습니다. 요충지로 말한다면, 동래부(東萊府)로 통하는 직로가 전부 이 두 경계 사이에서 모이니, 진정 한 지역의 요충지입니다. 비안(比安), 함창(咸昌), 상주, 예천과의 거리는 거의 200리에 가까운데, 공연히 텅비어 있습니다. 과거 임진왜란(1592) 당시 왜적들이 승승장구한 것도 이 길에 가로막고 지키는 시설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험난한 위수(渭水)와 낙동강의 세 나들을 끼고서 높이 성을 쌓아 죽음으로써 굳게 지켰더라면 그들이 어찌 감히 이처럼, 처참하게 돌파하여 유린할 수 있었겠습니까? 밀성현의 읍의 복구하고픈 소망은 모든 백성들이 한 입처럼 말합니다. 백성들의 심정이 이와 같은, 비록 약간의 어려운 점이 있더라도 어찌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할 것이 있겠습니까."하니, 왕이 밀성현을 다시 설치하는 일은 묘당(廟堂)에 넘겨 신칙할 것은 신칙하고 아뢰어 처리할 것은 아뢰어 처리하도록 하겠다."라고 함.
1792(正祖 16) : 이병성(李秉誠), 희령군 이타(熙寧君李타)를 위해 왕명으로 이정사(夷靖祠, 龍門九溪)를 건립함. ᄋ 10월 3일 동부승지 김한동(金翰東)이 상소하기를, "근래 벼슬아치들이 사림의 기를 꺾는데, 사사로운 감정이 있는 듯 합니다. 예천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떠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함.
1793(正祖 17) : 5월 3일 왕이 특명으로 교리 김관주(金觀柱)를 용궁 현감에 보임하였는데, 이는 그가 고향에 머물면서 벼슬에 나오지 않아서 였음. ᄋ 6월 1일 영남의 진휼이 정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이르러 끝났는데, 영남의 예천, 용궁 등의 고을에 굶주리는 백성이 총 2,829,596명, 진휼한 곡식이 205,756석 남짓이었음.
1794(正祖 18) : 예천군수 이학영(李學永), 고평제(高坪堤)와 서정평제(西亭坪堤)를 다시 쌓음. ᄋ 노봉서원(魯峰書院, 虎鳴內新)이 창건되여 권산해(權山海)가 제향됨
1795(正祖 19) : 5월 8일 영남에서의 진휼을 끝마쳤는데, 용궁현, 예천군 등의 고을에 굶은 백성이 총 1,424,008명, 진휼한 각종 곡식이 105,407석이었음.
1798(正祖 22) : 권진락(權進洛), 권문해(權文海)가 지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판각 출판(板刻出版)함. ᄋ 1월 12일 예천군, 기민(飢民)을 구휼(救恤)한 곡수(穀數)를 기록함(備邊司謄錄 18卷 769面下). ᄋ 3월 9일 예천 민가(民家), 소진(燒盡)함(備邊司謄錄 18卷 795面下). ᄋ 4월 4일 예천 민가, 소진함(備邊司謄錄 18卷 817面上). ᄋ 5월 7일 영남에서 정월부터 시작하여 굶은 백성을 진휼하는 일을 이 때에 마쳤는데, 공적으로 진휼한 곳은 용궁 등의 읍에 굶은 백성이 총 360,478명, 진휼한 곡식이 26,190석 남짓 들었음. 사진(私賑)으로는 예천 등의 읍에 굶은 백성이 총 122,202명, 진휼한 곡식이 8,760석 남짓 들었음. ᄋ 10월 5일 이익운(李益運)이 왕에게 아뢰기를, "판봉상시사 안준(判奉常寺事安俊)은 고려 말에 정몽주와 마음을 합해 쓰러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 하다가 정몽주가 죽은 뒤에 우현보(禹玄寶) 등과 함께 예천으로 장류(杖流)되었는데, 그대로 그 곳 노동(蘆洞, 開浦面京津里劒岩)에 터를 잡고 살면서 호(號)도 스스로 노포(蘆浦)라고 한 뒤 늘 도롱이와 삿갓 차림으로 행적을 감추고 살면서 생을 마쳤습니다. 길재(吉再)가 언젠가 그에게 글을 보내었는데, 그 대략에, '강산도 옛날과 다르고 경치도 모습이 바뀌었네. 사방을 둘러봄에 온통 부끄러움 뿐, 이쪽 오산(烏山) 역시 일월은 그대로나 구름은 자꾸 변하는데, 여기에 초막 짓고 낮을 밤 삼는다오. 행여나 지인(至人)을 다시 한 번 만났으면.'하였으니, 이것을 보아도 그가 길재와 뜻이 같고 도가 합치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여태 시호(諡號)의 의전(儀典)을 받지 못했으므로 영외(營外)의 많은 선비들이 연명(聯名)으로 정단(呈單)하기에 감히 진달 드립니다.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니, 왕이 따랐음.
1799(正祖 23) : 유엽배(柳葉盃, 龍門省峴福泉), 유태좌(柳台佐)가 아뢰어 왕의 칭찬을 받음. ᄋ 5월 23일 영남에서 1월부터 시작하여 이 때에 진휼을 마쳤는데, 공적으로 진휼한 곳은 용궁 등이고, 긴급히 구휼한 곳은 예천 등의 읍인데, 굶주린 백성이 모두 463,948명, 구휼에 사용한 곡식은 34,340석임.
1800(正祖 24) : 승 효일(僧孝日), 장안사 본사(長安寺本寺)를 중수함. ᄋ 삼수정(三樹亭, 豊壤靑谷), 정구령(鄭龜齡)의 유지(遺址)에 후손들에 의해 중건됨
1801(純祖 1) : 2월 말 황사영(黃嗣永) 등 천주교(天主敎) 신자들이 신유박해(辛酉迫害)로 경기, 충청도에서 예천으로 피난옴
1803(純祖 3) : 승 근천(僧謹天), 한천사(寒天寺, 一名 寒大寺, 甘泉增巨) 법당(法堂)을 중수함. ᄋ 3월 14일 예천 민가, 실화(失火)함(備邊司謄錄 19卷 568面下)
1804(純祖 4) : 맹추(孟秋) 예천 단양 장씨(醴泉丹陽張氏), <단양장씨족보(丹陽張氏族譜, 全五卷)>를 계개당(繼開堂)에서 발간함
1807(純祖 7) : 승 총섭(僧摠攝), 행선(幸善), 일신(一新) 등, 명봉사(鳴鳳寺)를 중수함
1808(純祖 8) : 승 근천(僧謹天), 한천사 선당(寒天寺禪堂)을 중건(重建)함. ᄋ 권태통(權泰通), 선행을 하여 송덕비(頌德碑, 龍宮山澤)가 세워짐
1811(純祖 11) : 이복(李宓)의 처 신씨(申氏), 절부(節婦)로 호명면 종산리 사월(沙月)에 정려(旌閭)됨. ᄋ 5월 22일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신대곤(申大坤)이 장계(狀啓)하기를, "각 고을의 상번(上番)인 금위영(禁衛營)과 어영청(御營廳)의 군병들이 예천군 삼탄진(三灘津)에 이르러 5.60명이 함께 배를 탔는데, 많은 비가 내린 나머지 강물이 불어 폭류에 휘말려 중도에서 배가 뒤집혀 살아서 나온 자가 겨우 12명입니다."하였는데, 왕이 하교하기를, "시골에서 생계를 꾸려가던 가난한 백성이 재산을 털어 강을 건너다가 뜻밖의 물난리를 만났으니, 정상을 생각하면 실로 너무나 가련하고 측은하다. 숙위(宿衛)가 비록 중하기는 하지만 폐단을 끼치고 있음을 어찌 잊겠는가? 각 해당 관청(금위영과 어영청)으로 하여금 본영의 미곡 가운데 20석 정도를 경상도에 내려보내 재액을 당한 군인들의 처소에 일일이 나누어주도록 하고, 죽은 사람의 신포(身布)와 환포(還布)를 모두 탕감하게 하여 관찰사로 하여금 글을 지어 제사를 지내게 하라."함.
1812(純祖 12) : 장안사(長安寺), 산신탱(山神幀)을 완성하여 봉안(奉安)함 ᄋ 만귀정(晩歸亭, 知保上月), 최윤교(崔潤敎)를 위해 후손에 의해 세워짐. ᄋ 3월 13일 예조(禮曹)에서 각 식년(式年)의 충효열(忠孝烈)의 문서를 보고하였는데, '효부 정려질(孝婦旌閭秩)' 중에 예천에 사는 고 사인 이진헌(故士人李鎭憲)의 처 권씨가 들어있음.
1815(純祖 15) : 을해박해(乙亥迫害)로 경상, 충청, 강원도의 천주교 신자들, 예천 등지로 피란을 옴
1817(純祖 17) : 서정평제(西亭坪堤), 대홍수로 다시 무너짐
1818(純祖 18) : 5월 16일 용궁(龍宮), 포곡(逋穀) 결대곡(결代穀) 대전(代錢)을 바침(備邊司謄錄 21券 104面下)
1819(純祖 19) : 예천군수 이형수(李馨秀), 서정평제(西亭坪堤)를 다시 수축(修築)함
1821(純祖 21) : 3월 예천군수 이형수 선정 마애비(醴泉郡守李馨秀善政磨崖碑, 醴泉西本)가 각자(刻字)됨
1822(純祖 22) : 10월 3일 예천군수 윤경의(尹景儀)와 용궁현감 윤복의(尹復誼), 경상좌도 암행어사 김정균(金鼎均)의 탄핵을 받음.
1826(純祖 26) : 8월 16일 경상감사 조인영(趙寅永)이 예천 등 6읍에 민가가 떠내려가거나 무너진 것이 193호이고 사람이 16명이나 죽었다고 왕에게 아뢰니, 하교하기를, "예천 등의 수재가 보은과 다름이 없으니, 그 위로하고 구휼하며 돌보고 도와주어 정착시키는 일을 한결같이 지난 날 충청 감사의 계(啓)에 판하(判下)한 것에 따라 묘당(廟堂)에서 곧 해당 도의 관찰사에게 관문(關文)으로 신칙하라."함(備邊司謄錄 21卷 778面下).
1830(純祖 30) : 소원사(昭遠祠, 龍門直里)가 창건되어 임춘(林椿), 임질, 임계중(林繼中)이 제향(祭享)됨. ᄋ 4월 6일 경상좌도 암행어사 조연춘(趙然春)이 서달(書達)하였는데, 왕이 전 용궁 현감 이헌영(李憲英) 등의 잘 다스리지 못한 상황을 논하여 경중을 나누어 죄상을 감안해서 조처하도록 함.
1831(純祖 31) : 사림(士林), 회산사(晦山祠, 龍門)을 세우고, 박손경(朴孫慶)을 제향함
1832(純祖 32) : <용궁현읍지(龍宮縣邑誌)>에 의하면, 용궁현(龍宮縣)의 원호(元戶)는 2,866호이고, 인구는 12,197명인데, 남자가 6,872명, 여자가 5,325명임. 승호(僧戶)는 43호이고, 승정(僧丁)은 64명임. ᄋ 여름, 대홍수로 고평제(高坪堤, 醴泉高坪), 서정평제(西亭坪堤, 醴泉西本)가 무너짐
1834(純祖 34) : 1월 17일 계명재(鷄鳴재, 醴泉生川)에 사람의 두개골이 발견되었는데, 호랑이가 먹다 남은 것이라 함. ᄋ 8월 14일 초적(草賊)들이 봉기하여 산간에 익은 벼들을 다 거둬감. ᄋ 12월 1일 길가에서 죽은 사람이 허다하고 유행병이 극성스러움. ᄋ 16일 장티푸스가 날로 더 심해짐(渚上日月)
1835(憲宗 1) : 1월 16일 장질부사(染病)가 날로 더 심해짐. ᄋ 2월 4일 순상(巡相)이 새로 부임하여 예천 관아(官衙)에 부정이 있다 하여 군 호방(郡戶房)과 팔창색(八倉色)을 사형에 처하라고 중앙에 요구하였다 함. ᄋ 2월 16일 용문면 하금곡리 유전(柳田)마을에 장질부사가 전염됨(渚上日月). ᄋ 7월 13일 용궁 등 읍, 홍수로 인하여 사람이 죽고, 민가가 떠내려 감(備邊司謄錄 22卷 652面下). ᄋ 8월 승 역파(僧역坡), 상민(尙敏), 부열(富悅) 등, 화재로 불탄 용문사 보광명전(龍門寺寶光明殿), 종무소(宗務所), 해운루(海雲樓), 영남제일강원(嶺南第一講院), 요사(寮舍) 등을 중건(重建)하기 시작함
1836(憲宗 2) : 8월 은풍(殷豊)에서 향시(鄕試)를 실시함. ᄋ 9월 28일 은풍(殷豊, 상하리면)에서 온 사람 말에 의하면, 한 평에 몇 석하던 곳이 싸라기 한 톨도 안 나왔다고 함. 가뭄 때문임(渚上日月)
1837(憲宗 3) : 1월 23일 비와 눈이 내려 도로가 불통됨. 유행병(虎列刺, 印度産 콜레라)을 피해 사람들이 대관령(大關嶺)을 넘어감. ᄋ 3월 9일 용문면 대제리 아랫마을은 유행병으로 인하여 한 집도 편안한 집이 없음. ᄋ 4월 18일 용문면 제곡리 소제(小渚)마을에 유행병으로 사망자가 나옴. ᄋ 4월 25일 유행병을 피해 대관령을 넘어가는 사람이 늘어남. ᄋ 6월 22일 감사(監司)가 예천군 수령의 전최(殿最)를 함. ᄋ 11월 30일 순찰사(巡察使, 巡相) 일행이 예천군에 도착함(渚上日月)
1838(憲宗 4) : 도암정(陶岩亭, 甘泉眞坪), 이황(李滉)이 쉬어간 자리에 감천(甘泉) 6문중(門中)에 의해 세워짐. ᄋ 1월 14일 용문면 대제리(大渚里), 마을 성황당(城隍堂)에서 제사(祭官 朴得寧)를 지냄. ᄋ 4월 정기선거사비(鄭基善去事碑, 知保 舊麻田), 세워짐. ᄋ 5월 22일 가뭄으로 이종(移種)을 하지 못하여 하늘만 쳐다보고 탄식을 함(渚上日月)
1839(憲宗 5) : 고산서원(古山書院, 虎鳴宗山), 창건되어 이동표(李東標)가 제향됨(今無). ᄋ 5월 18일 경상감사 김도희(金道喜)가 왕에게 아뢰기를, "용궁현(龍宮縣)의 동면(東面), 남면(南面) 등 5면과 예천군의 현내(縣內), 현동(縣東) 2면 등에 우박이 내려서 각종 곡물이 손상을 입어 거의 남은 것이 없습니다."함. ᄋ 5월 21일 용문면 대제리 등에 홍수로 논이 파인 곳이 여러 곳임. ᄋ 6월 9일 전후 한 달이나 비가 옴(渚上日月). ᄋ 7월 용문사(龍門寺), 중건을 완료함
1841(憲宗 7) : 1월 15일 용문면 대제리, 마을의 성황당(城隍堂)에서 제사를 지냄. ᄋ 4월 15일 간행된 <예천군읍지(醴泉郡邑誌)>에 의하면, 예천군의 편호(編戶)는 6,296호, 인구는 22,874명인데, 남자는 9,881명, 여자는 12,993명임. 서당조(書堂條) 중 개포서당(開浦書堂)이 추가되어 있음. ᄋ 11월 10일 유행병을 피해 대관령(大關嶺)을 넘어가는 사람은 여전함(渚上日月)
1842(憲宗 8) : 7월 1일 암행어사가 예천군에 오지 않아서 인근 읍(邑)에서 이감(移監)된 죄인들이 예천군 감옥에 가득함. 예천읍의 죄인들은 모두 관원들의 첩들이라 혹은 방치해 두고 심문하지 않았음(渚上日月)
1843(憲宗 9) : 명봉사(鳴鳳寺), 대폭우(大暴雨)로 경내 10여 암자(庵子)가 거의 도괴 유실(流失)되고 내원암(內院庵)만 남음. ᄋ 예천군수 김기현(金箕絢), 고평제(高坪堤)와 서정평제(西亭坪堤)를 축조하기 시작함. ᄋ 1월 15일 용문면 대제리, 마을 성황당(城隍堂)에서 제사를 지내고, 위 아래 마을에서 윷놀이를 함(渚上日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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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2019.02.12



